애 련 {열두번째 이야기}

이야기 상자2005.03.16
조회1,959

 눈을 뜨기 전 느낌은 뻐근했지만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아픔과 좌절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태림은 그 사실을 깨닫자 마자 눈을 뜨고 옆자리를 확인했지만 그곳에는 세준이 누워있지 않았다. 허전했지만 사실 그를 침대에서 봤더라 해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샤워를 하던 태림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동작을 멈추었다. 갑자기 왜 그가 부부 관계를 원했는지, 왜 미팅에 대해서 물었는지 그 의문점이 쉽사리 풀리지가 않았다. 그리고 어제가 상원과 마지막 만남이었던 것도 태림의 마음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세준이 상원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일까?
 어떻게?
 과연 누가 말해주었단 말인가?
 상원과 태림의 플라토닉 한 만남은 당사자와 그들을 소개시켜준 두 사람뿐이었다.
 태림은 이런 저런 과정을 생각하다가 세준이 절대 알 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지 세준이 미팅에 관해 언급했던 건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미팅이 유행하고 있었기에 이미 유부녀인 태림이 그런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태림은 소파에 얌전히 올려진 붕대를 집어 올렸다. 분명 그가 나가기 전 그녀가 벗어 내렸던 옷들을 정리 해 놓았을 것이었다. 세준은 태림의 붕대에 대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에 태림은 다시 그것을 그녀의 가슴위로 감았다.

 일층에 내려가면 어색하지만 세준을 보리라고 기대했던 그녀는 그가 보이지 않자 왠지 가슴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쓸쓸함이 느껴졌고, 꼭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사모님 잘 주무셨어요."
 "네. 저기...."
 태림이 머뭇거렸지만 아주머니는 태림이 무엇을 묻는지 재빠르게 눈치채고 대답해 주었다.
 "아! 사장님이요. 일찍 나가셨어요. 지방 공장에 일이 생기셨다면서 나가셨어요."
 "그래요."
 얼마나 급한 일이면 꼭 두 새벽부터 나갔을까.
 태림은 그가 걱정이 되었다. 잠도 많이 자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일어나자 마자 곧바로 지방으로 내려갔으니 말이다.
 "학교가는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김기사는 남아있거든요."
 "네? 그럼 어떻게 지방에 내려갔어요?"
 "직접 운전하고 가셨어요."
 오고가는 대화도 별로 없었던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의 부재가 있도록 크게 다가올지 생각지 못했던 태림은 그가 항상 커피를 마셨던 머그 컵을 집어 들어 손에 꼭 쥐었다. 마치 어젯밤 그의 등을 감쌌던 것처럼.

 "왜 그렇게 힘이 없니?"
 유정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태림에게 달려왔다.
 "어? 그냥."
 "상원 오빠랑은 어떻게 했어. 웬만하면 그냥 만나지 그 오빠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 매너도 좋고 집안도 좋고 사람도 좋고."
 하지만 태림의 사람은 이번 생애에서는 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원하지도 않았다.
 "알아.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거."
 "그런데 왜 더 만나보지도 않고 그만 두려고 하는데, 아빠 때문에?"
 "아니."
 아버지의 회사에서 심하게 맞은 이 후 아버지에게는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다. 혹시나 태림의 행동에 아버지가 엄마에게 보복을 할 까 두려웠지만, 태림에게 아직 바라는게 있는 아버지는 그 약속만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왜?"
 태림은 유정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지만, 유정이 또 다른 미팅이나 상원과의 만남을 주선하기 전에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정아. 사실은.....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말에 유정의 표정이 굳어 졌지만 창 밖 너머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고 있던 태림은 보지 못했다.
 "그래. 그럼 그 사람도 널 좋아해."
 "아니. 잘 몰라."
 태림은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세준의 머리카락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말은 해 봤어? 좋아한다고."
 "아니. 말 붙이기 정말 힘든 사람이라서....."
 "그럼 사람을 왜 좋아하는데, 상원 오빠처럼 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태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지만 유정의 눈에는 태림의 그 모든 게 가증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사람을 떠날 수가 없어. 그 사람이 아니면 난 안되거든. 그리고 그 사람이 나 미팅 같은 거 하는 거 싫어해. 그 사람이 싫어하는 거 하고 싶지 않아."
 그 때 수업종이 울렸고, 태림은 분노를 불태우고 있는 유정의 눈길을 자신이 잘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며 교실로 들어섰다.

 유정은 자신의 계획이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태림이 세준을 마치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말하자 참을 수가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어떻게 해야 그들을 갈라놓을 수 있을지 유정은 그 날 하루 내내 그들 생각만 했고, 그 시간들이 유정의 정신을 점점 더 좀먹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혼자 독차지하고 싶었다. 집에서든 밖에서는.

 예정에 없는 출장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정신이 들고 옆에 다소곳이 누워 잠들어 있는 태림을 내려다보자 가슴을 가득 메우는 자부심과 함께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자각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와의 결혼생활은 육체적으로 편했을 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쩌면 자신을 더 아껴주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건 당연할 일을 지도 몰랐다.
 무턱대고 그녀를 안는 대신 그녀를 좀더 아껴주고 기다려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발정이 난 강아지 마냥 상대를 다른 이에게 빼앗길 까봐 그녀의 처녀성을 급하게 취하고 말았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태림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세준은 당연히 공장 관계자들이 싫어하는 급습 적인 출장을 오고 말았다.      
 하지만 공장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는 일 보다는 태림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고, 그 사실에 화가는 세준은 사람들을 닦달하고 말았고, 미안한 마음에 하루 더 머물기로 마음먹고 회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세준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집에 빨리 돌아왔지만 세준은 좀처럼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도 보고 현이 나오는 광고도 눈여겨보았지만 머리 속에는 세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태림은 소파에서 튀어 오를 만큼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보..세요."
 세준은 태림이가 당연히 통화를 하기 위해 한 말인 걸 알았지만 순간 짧게 들려오는 "여보.."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야.-
 "네."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세준이 싫어할지 몰라 수화기만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집에 별일 없지?-
 "네. 아무 일 없어요."
 -부모님은?-
 태림은 그가 먼저 자신의 안부를 물어주길 바랐다.
 "모임에 나가셨어요. 좀 늦으신다고 했어요."
 -그래......-
 "....."
 -몸은... 어때?-
 태림의 얼굴에는 그의 질문에 환한 미소가 피었다. 하지만 그는 볼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 나 오늘 못 들어가. 일이 생겨서 내일이나 올라갈 것 같다.-
 "네."
 태림은 즉시 힘이 빠지고 말았다.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음. 잘자. 바바리맨 인가하는 변태 조심하고.-
 "그럴께요. 안녕히 주무세요."
 태림은 신호음이 울렸지만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와 부부간의 연을 맺었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라는 존재가 지금 그녀의 옆에 있었으면 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