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왜놈이 차지했는지 알 수 없다'

trudy2005.03.17
조회75

구독하는 페이퍼에서 퍼온 글입니다.

 

'언제부터 왜놈이 차지했는지 알 수 없다'

 

 

 

 

 

 

"대마도는 전에 신라에 속했던 땅인데
언제부터 왜놈이 차지했는지 알 수 없다.
...임금께서는 이틈을 타서 무찌르시려고
.....몸소 한강까지 납시어 전송하셨다."


대마도,
일본어로 쓰시마 섬.



97%가 산으로 이루어진 험한 땅,
복잡한 해안선과 뱃길을 가져
오랫동안 독립적인 성격을 유지했던 섬.



조선은 1419년 6월
227척의 배와 1만 7,000여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대마도 정벌에 나선다.



1.대마도 vs 쓰시마?



부산 태종대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희미하게나마
대마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49.5km,
일본에서는 134km 떨어져 있다.

거리로 따지면 우리 쪽에 훨씬 가깝다.



독도가 울릉도에서 90km 떨어져 있으니
현재 '우리땅'인 독도보다
더 가까운 땅이다.



대마도는 정말 일본땅이었을까?



1419년 대마도 정벌에 나서기전
조선은 말한다.



"대마도는 전에 신라에 속했던 땅인데
언제부터 왜놈이 차지했는지 알 수 없다."라고.



조선 초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지도'등 여러지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위해
사용한 지도에서도 조선땅으로
그려져 있는 대마도를 만날 수 있다.



기록이 말하듯,
오랜기간 대마도가 조선땅이라는
생각은 조선과 일본을 지배했었다.



이후 대마도가 정식으로 일본의 땅이
된 것은 임진년 조일전쟁으로부터
300여년이 흐른 1868년부터였다.



오랫동안 우리의 땅이었던 대마도가
일본의 영토가 된것은



섬을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공도(空島)정책'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러니까,
섬에 우리나라의 주민을 살게 하지 않아서
일본이 낼름-_-먹어버렸다는 얘기다.



대마도는 그 옛날,
일단 들어가면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다던 제주도보다도 못한땅이었다.



대마도가 왜구들의 본거지가 된데에는
조선이나 일본정부의 간섭이
거의 없었다는것이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때문에 조선이나 일본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들이 넘쳐날 수 밖에
없었던 곳이 바로 대마도였다.



그런 땅에 정책적으로
정부에서 주민을 살게 한다는것은
무리가 있었다.



굳이 귀양을 보내지 않는한
그 누가 자발적으로 가서 살겠는가.


하지만,
독도보다도 우리의 영토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더 많다는 대마도.



실제로 정부수립이후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대마도의 주민들이 대마도가 대한민국에
편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걱정할 정도로 대마도와 우리의
인연은 깊고 현실적이다.



그런 대마도,
조선에겐 어떤 땅이었을까?


2.대마도 정벌, 왜인가?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대마도의
왜구는 500여차례나 노략질과
침략을 일삼았다.



왜구란 말 그대로 도둑이다.



대마도는 도둑들의 소굴이었다.



97%가 산으로 이루어진 척박한 땅에서
그들의 살길은 무역 아니면,
도둑질 뿐이었다.



하지만,
정규군도 아닌
왜구 소탕을 위해
건국초기에,



조선 전체,
5만남짓의 수군 병력중
3분의 1이나 되는 1만 7000여명을 동원해
정벌을 감행했던 이유는 대체 뭘까?



아무래도 지나쳐보인다.



대마도 정벌의 그해,
1419년은 세종 1년이다.



세종은 1418년 8월에 왕위에 올랐다.



세종이 아무리 훌륭한 임금이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해도

그때는 그가 왕위에 오른지 1년도
지나지 않았다.



나라를 안정시키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세종은 조선을 안정시키고
나라의 틀을 잡아간 왕이다.



하지만
아직은 혼란스러웠던 그때,



조선의 백성인 군사들과
조선땅에서 힘들게 얻은 식량을 싣고
그들은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당시에는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왜구로부터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명나라는 왜구로부터의 피해가 심해지자
대마도 배의 해안 접근은 물론,
모든 무역도 금지시켰다.



약탈과 함께 사무역에도
의존하던 대마도의 왜구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일년에 한 두차례만 허가되던 무역만으로는
대마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명이 왜구를 통제하려 들면 들수록
왜구들은 더욱 극성을 부렸고
그것은 명나라에게 부담이 됐다.



마침내 명은 배 만척을 동원해
직접 왜구를 치겠다는 의사를
조선에 보낸다.



조선은 긴장했다.



명나라가 왜구 토벌을 위해
직접 군사를 일으킨다면



고려때의 여몽 연합군때처럼
엄청난 부담이 뒤따를 것이 분명했다.



이미 고려때 고려와 몽고군은
일본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몽고의 통제를 받고 있었던
고려였기 때문에 일본을 공격한것은
물론 몽고의 생각이었다.



고려는 원하지도 않았던 전쟁때문에
고려의 백성들과 물자를 들이부어야 했고,



들판에서 말을 달리며 싸우던
몽고군이 해전에 능숙할리 없었기에


고려는 몽고군보다 더 앞장서야 했고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은 큰나라의 횡포가 두려웠다.



그래서 조선은
단독으로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한다.



또한
조선이 대마도 정벌에
나설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에는
태종이 있었다.



태종이 세종에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긴 했지만



그는 아직 세종에게 군권을 내주진 않았다.
군사들과 무기들,



모든 권한을 아직 자신의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이다.



'공부가 가장 쉬웠던'게-_- 세종이었다면,
'싸움이 가장 쉬웠던'것이 태종이었다.



그런 태종이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선제 공격을 결정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이 시기'에
대마도 정벌에 나섰을까?



그것은 당시의 대마도 내부사정과 관련이 있다.



당시 대마도 도주는 종정성,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그는
대마도 왜구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다.



때문에
그 틈새로 왜구들의 노략질은 심해졌고
대마도 안에서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조선은 대마도를 직접 토벌해서
조선의 통제 아래에 둘것을 결정하고



드디어,
상왕인 태종은 수군을 집결시킨다.


3.진군의 북소리



태종은 조선 수군을 거제의
견내량에 모은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고성 통영쪽
육지 사이의 좁은 바다로
물의 흐름이 빠른 곳이다.



태종은 조선수군을 하필이면
좁고 거센 바다로 모이게 했다.


왜일까?



견내량 바깥 쪽의 지세포만은
거제도를 지키는 기지였다.



거제도에는 모두 25개의 산성이 있다.



땅의 크기에 비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성은
왜구때문이었다.



그런 견고한 방어시설로
일단 조선군의 안전은 보장되었고,

거제도가 감싸고 있어 대마도나
먼바다쪽에서는 조선군이 보이지 않아
적이 눈치챌 수 없없다.



또한 견내량은 하루에 두 번 조류에 의해
물살의 방향이 바뀐다.



때문에 썰물을 기다렸다가
물살을 타면 힘들이지 않고 바다로
나갈 수 있다.



그런 다음 해류를 타면 힘들이지 않고
대마도로 갈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은 출정하기 전의 비밀유지와
출정 한 후 조선의 방어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



하나,
조선은 부산포와 내이포의 왜관을 폐쇄했다.
(왜관이란건 일본인의 입국과 교역을 위한곳이었다.
조선이 왜인들에게 던져준 당근-_-같은 곳이었다.)

왜관의 패쇄로 왜인들과 왜구의 연락은 두절되고
591명의 왜인이 갇힌다.


둘,
난폭한 왜인들은 아예 처형을
해 버렸다 한다.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여지조차 남기지
않겠다는 조선의 의지로,
왜인 '평망고' 등 21명이 처형되었다.


셋,
명분을 만든다.



조선은 대마도 도주에게 조선에서 노략질을 한
해적들을 체포해서 보낼것을 요구한다.

물론, 왜구들을 통제할 수 없었던
대마도 도주가 조선의 요구를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조선은 직접 군사를 일으킨 구실을 만든것이다.


넷,
정벌 중 국내방어 대책을 세운다.
조선은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을 모두 동원해서
국내의 군사적 요충지를 지키도록 한 뒤 출정한다.


이로써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마침내


태종의 특명에 의에 구성된
원정함대 총사령관에 이종무,
좌군도절제사에는 유습,
그리고 우군도절제사에는 이지실등의 지휘관 아래



전선 227척,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충청경기의
1만 7천여 수군이



65일 분의 식량과 함께,
해류를 타고 단 하루만에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에 도착한다.


4.원정대 상륙작전



대마도의 매우 복잡한 해안선과
뱃길 때문에



조선 수군은 대마도에서 귀화한
왜인을 길잡이로 세운다.



이종무는 두지포에 배를 댄 후
대마도주 종정성에게
즉시 항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대마도주는 듣지 않았고,
이에 원정대는 상륙작전을 감행해,



상륙과 동시에 왜구를 격파한다.



적선 129척 소각,
왜구 120여명 사살
집 2천여 채 소실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출한다.


왜구들이 섬 깊숙이 숨어들자
이종무는 훈내곶에 목책을 설치하고
대마도 해안을 봉쇄한다.



훈내곶은 상 대마도와 하 대마도를 잇는 곳으로
지금은 바다 매립으로 육지가 넓어졌지만



당시에는 훈내곶을 중심으로
양쪽의 바다가 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단다.



훈내곶은 일본에서 오는 배가
아소만과 조선으로 가는 길목이다.



이종무는 왜구들의 길목을 막고
장기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조선군은 니로군 지역에 상륙하면서



지형에 어두웠던 탓에
적의 매복으로 180여명의 전사자를 내게 된다.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인
이 전투에 대한 일본의
기록이 남아 있다.



대주편년략은 대마도 정벌에
관한 짧은 글을 남겼는데,



니로군 전투에서
조선군 2천여명을 사살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 실록보다 10배 이상 부풀려져 있다.

(역시 뻥이 세다-_-)



또한,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정벌군을
조선과 명나라의 조명 연합군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1만 7천여명중 180여명의 전사는
그리 큰 타격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대마도 상륙
열흘만에 돌연 철군을 결정한다.



65일치의 식량으로 장기전을 예상했었고
실제로 장기전을 준비했던 조선군이었다.



아무리 1만 7천여군의 훈련된 군사라해도
극성맞은 왜구들을 완전히 토벌하는데
열흘은 너무 부족하다.



조선군의 철수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걸까?


5."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군이 대마도 정벌에 나선 그때,

일본은 태풍이 한창 기세를 떨칠때였다 한다.



조선군이 더 오래 있다가는
태풍때문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조선의 조정에서 완전하게 왜구들을
소탕하지 못했다 하여 있었던 회의에서



우의정 의원은
"예기가 쇠하고, 선박의 장비가 파손되었으며,
날씨가 나빠져, 정벌을 무리하게 추진했다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180여명의 전사자를 낸것도
그렇지만 왜구가 항복을 해온다면
더 이상의 피해를 입는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있었을것으로 보여진다.



왜구는 결국 항복했고
조선에 귀속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종무의 조선군은
열흘만에 대마도를 정벌하고 개선한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려
왜구 통제의 의무를 주고,
대신 무역을 허락한다.


1436년 대마도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지자
도주인 소우 사다모리는 대마도를
조선의 한 고을로 편입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속하게 하고
도주를 태수로 삼았다.



조선은 정식으로 대마도를
조선의 통제 아래에 두었던 것이다.


만약 일본이 주장하는 바대로
역사적으로 오래 이용하고 점유했던 나라가
땅의 주인이라면,



독도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대마도 또한 우리의 땅이다.



그 어떤 나라가
이 같이 명백한 증거를 외면하고
무시할 수 있겠는가.


역사를 편리한대로,
멋대로 이용하지 마라.



역사는 진실을 말하는 자들의
편이다.




18세기 초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했던 신유한의
'해유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 섬은 조선의 한 고을에 지나지 않는다.
태수가 조선 왕실로부터 도장을 받았고
조정의 녹을 먹으며 크고 작은 일에
명을 청해 받으니 우리나라에 대해
번신(藩臣)의 의리가 있다."


paper.cyworld.com/funny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