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망언에 대해 이순신 장군님이 생각납니다...

명량대첩...200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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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해전
이순신이 1593년 8월 15일,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후 한산도에 전진기지를 설치하여 견내량 이서로 일본수군이 진공하지 못하도록 봉쇄·차단하고서 차기 작전을 위한 부대 재정비·강화에 전념한 기간은 1597년 2월 26일까지의 3년 6개월여 동안이었다. 그가 원균의 모함과 선조의 미움을 받은 결과 일본장수 가토오(加藤淸正)를 제2차 침공시 요격 못했다는 것을 구실로 파직 당할때까지 이룩한 초인간적인 업적은 그 이전의 6차례에 걸친 대해전에서 거둔 무적함대의 위업에 못지 않은 엄청난 군사력 건설 및 대민지원 성과였다.
그가 체포 구금되고 나서 원균이 3도 수군통제사 자리를 가로챘지만, 언급하기조차 싫은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의 피땀으로 건설된 3도 수군함대의 거북선 3척을 포함한 전선 102척과 협선 102척 그리고 수군 9,690명을 하루아침에 일본수군에게 포위 당하여 수장시키고 말았으니, 「패장은 말하지 말라(敗戰之不言兵)」란 가르침대로 백번 죽어도 마땅한 그가 후일 선조에 의해 사후에 1등 선무공신이란 최고무공훈장까지 추서 받았으니 한심하기 이를데 없다.
그의 파직, 투옥, 석방, 백의종군 그리고 재임명 과정의 수난역사는 다음 장으로 미루고, 그가 통제사로 재취임한지 불과 20일 만에 13척의 폐잔선을 지휘하여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10배 이상의 적과 해상결전을 벌여 대승한 명량해전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명량해전에 대한 장계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이를 연구하는 분들은 주로 난중일기와 징비록, 선조실록, 난중잡록 등에 근거하여 작전의 경과를 분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이순신 관련 저서 가운데는 전 서울대학 교수 남천우(南天祐) 박사가 지은 「긴 칼 옆에 차고 수루에 홀로 앉아」란 단행본에 가장 극적으로 그 장면을 잘 정리해놓고 있으며, 그는 군장교 출신일 뿐만 아니라 물리학자답게 매우 치밀하게 자연과학적인 시각으로 상황을 분석 파악해 놓고 있는 바 그의 저술 내용을 중심으로 명량해전의 핵심을 알아본다.
거듭 강조하지만, 적의 함정세력이 아군의 10배가 넘었으며, 승선하고 있는 병력수는 50배가 더 되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 속에서, 적함 31척을 수장시켰으며 92척을 사용불가 상태로 대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약 2만명을 일시에 몰살시킨 대전과를 수립한 것이다. 또한 이 전과 속에는 적의 수군대장 기지미(來島通總)의 죽임까지도 한몫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알아본다.
① 이 해전은 명량(울돌목)의 좁은 애로지점(choke point)에서 격전이 벌어진 것은 아니고, 명량해협의 서북쪽에 있는 임하도 앞의 넓은 바다에서 행하여졌으나, 통상 명량대첩으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이 곳 일대의 수로조건을 철두철미하게 사전 연구하여 시·공간적으로 100% 이용했던 것이다.
그는 그곳을 결전장으로 정하고 그 전날 밤에 그곳으로 함대를 은밀히 이동시켜 은폐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을 결전장으로 선택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조수가 대단히 빠르게 흐르고, 그 최대유속은 시속 40킬로미터 이상으로서 일본함대나 이순신 함대의 함선속도를 능가하였다. 그리고 밀물과 썰물이 약 6시간마다 바뀌어 물이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바뀌어 흐르는데, 물이 바뀔 때에는 물의흐름이 잠시 멈춰지지만, 그후 30분이 지나면 유속은 10킬로미터가 되고, 다시 30분이 더 지나면 20킬로미터가 되며, 다시 2시간 뒤에는 최고 유속인 40킬로미터로 되는 순환과정이 하루 4번씩 반복되는 특수한 수로조건임을 꿰뚫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② 밀물과 썰물사이의 유속이 시속 10킬로미터 이하로 유지되는 시간은 불과 한시간 정도인 바, 이 기간중에는 노 젓는 배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지만 그 나머지 시간에는 배가 유속에 따라 밀려가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이를 잘 이용하면 공격을 효과적으로 따돌릴 수 있고, 역이용하면 공격에 유리한 것이었다. 특히 판옥선은 일본 배에 비하여 선회능력이 뛰어남으로 매우 공격에 유리하였다.
③ 100척이 넘는 일본함대는 조수에 휩쓸리면서 큰 혼란에 빠졌으며, 울돌목의 지형이 좁고 험하여 역조류에 상호 충돌함으로써 부서졌고, 일부는 이순신이 미리 설치해 놓은 해안 장애물에 걸려 침몰했으며, 역류시 아군의 거북선과 판옥선의 당파 및 함포 사격으로 20척을 깨뜨리고, 순류를 타고 적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1척을 추가로 격침시켰음은 물론, 오후 늦게 작전이 끝날 무렵에는 133척의 적함 중에서 온전하게 도망친 것은 10여척이고, 나머지 90여척은 반신불수가 된 채 탑승요원 대부분이 익사한 상태에서 탈출하였으니, 완전한 일방적인 승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해전의 결정적 승리요인은 이순신이 명량해협 역류가 순류로 바뀔때까지의 1시간동안 돌파 당하지 않고 울돌목을 사수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그는 작전전야 지휘관 회의에서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라고 했으며,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로 결사항쟁의 뜻을 모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전중 적의 위력에 압도되어 전투사기가 상실된 부하 장수에게 단호한 결의를 보이고 격려함으로써 용기 백배로 자세를 바꿔 승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싸우다 죽겠는가, 도망쳐 목숨을 탐하겠는가」, 「너는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하지 않는 죄를 지었다. 어째서 도망치려 하느냐, 처형함이 마땅하나 지금 일본군의 기세가 충천하니 여기에서 공을 세우라」
④ 일본군의 해상전법은 재래식 전법, 곧 상대편의 배에 기어올라 육박전을 통하여 병사들을 죽이는 전법이었음에 반하여 조선수군은 함선을 당파 또는 함포로 파괴하고 화전으로 분멸시키는 전법을 사용하였던 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피아의 배끼리 접촉했을 때 판옥선은 구조적으로 적병이 기어오르기에 불편하게 되어 있었고, 기어오르는 적병을 마치 벌레 잡듯이 창으로 찔러 떨어뜨리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은 어선 100여척을 후방 안전해역에 배치해 놓음으로써 고약한 13척의 후원세력인 것처럼 기만전술을 폈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제2차 침공시 일본은 약 14만여의 병력을 중군, 좌군 및 우군으로 편성하였다. 이중에 우군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담당하였던 바, 부산에 상륙한 다음 연안기지 잔존병력과 합세하여 1597년 8월 중순경에는 전주까지 진격한 상황이었다.
지난 7월 17일(3도 수군을 격파한 직후) 일본군은 제해권을 장악한 것으로 판단 작전회의를 실시한 결과 중군과 좌군병력 10만명을 해상 수송하여 9월 16일경 해남과 진도 사이의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전라도를 수륙병진으로 협공하면서 서해안을 통하여 한강에서 합류, 서울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명량해전에 대패한 9월 17일 또 다시 일본군 작전회의가 소집됐는데, 회의 결과는 더 이상의 진격을 중지하고 남해안 연안에 성을 쌓아 지키도록 했던 것이다. 원균 함대의 괴멸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조선으로 출병하겠다고 한 도요도미는 명량해전의 패전소식을 듣고는 마음을 또 바꾸었다.
그러면 명량해전의 경과를 종합해 보기로 한다.
명량해전 종합

명량해전의 진가는 10배 이상의 우세한 적을 격파한 것은 물론이고, 작전참가 직전인 8월 중순경 조정에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수군을 페하고 육상에서 싸우란 천부당만부당한 지시를 내렸던 바에 대한 잘못을 일깨워준 쾌거였다는 것이다. 「아직 배 12척이 있다」(尙有十二)란 해전 지휘관다운 결의와 혜안은 선조 같은 암군(暗軍)에게 좋은 반면 교사가 된 것이다.
이순신은 3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 해놓고도 약주고 병주는 격으로 수군폐지를 지시한 것은 언어도단이며 어불성설이다. 「임진년 이후로 적이 감히 충청·전라 등 남방을 겁탈하지 못하는 것은 실상 우리 수군이 그 세력을 막은 때문인데, 이제 만일 수군을 폐하면 적이 반드시 호남을 거쳐 한강으로 올라갈 것이요, 다만 순풍에 돛을 한번 달면 될 것이니, 그것이 신의 두려워하는 바입니다」란 논리 정연한 주장에 조정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순신의 전선 13척을 무시하고 수군을 폐했다면, 일본수군이 10만명의 병력을 싣고 한강으로 진입했을 것이니, 선조는 임진강을 건너 명나라로 두 번째 도망을 가기 전에 포로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1597년 9월 20일, 명량대첩 직후에 일본군(우군)은 천안 밑의 직산까지 진출하였다. 이곳에서 명군과 충돌하여 전선의 교착상태가 이뤄졌으나, 군량미가 떨어져 진격이 어려운 상황하에서 해상보급로가 명량해전의 대패로 말미암아 단절되고 말았으니 남쪽으로 총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직산에서 천안경유 수원을 통해 서울에 도달하기는 시간문제였던 것을 고약한 이순신 함대 13척이 이를 되돌려놓게 한 것이다.
이순신의 이 위대한 업적을 명량대첩후 약 8개월만에(1598년 4월경) 명나라 군대의 경리양호(楊鎬)는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아무런 포상을 않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이례적인 분부를 했다. 「이순신이 힘을 다하여 그와 같이 적을 죽였다. 나는 그의 대공을 몹시 기리고 기뻐한다. 빨리 이순신에게 포상함으로써 그를 고무·격려하라」
그래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불신과 증오에 가득 차,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 지금의 부총리급)로의 승진내신을 거부하고, 다만 부하 장수들에게만 표상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리고는 일국의 왕의 체모나 권위 따위는 깨끗이 저버리고서 양호에게 자기의 큰절을 받으라고 간청하니, 양호는 「안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나에게 무슨 공이 있다는 거냐! 나에게 큰 절 하는 것은 당치 않다」고 면박을 주었다.
아무튼 명량대첩 이후 적의 수륙병진책이 좌절되었기 때문에 적군은 남해안으로 총퇴각했는데, 동으로는 울산, 서로는 예교(광양)까지 반영구진지를 18개소에 걸쳐 구축하였으니, 전라도의 바다는 이순신에 의해서 제해권이 회복되고 있었으나, 내륙은 이미 전라도까지 일본의 마수가 뻗쳐 특히 코를 베어 가는 간악한 일본군의 야만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명량대첩은 일본군의 서진 북상전략을 결정적으로 좌절시킴으로써 조·일 7년전쟁의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던 한산대첩과 그 전략적 의의를 같이 하고 있으나, 특히 명량해전은 동족의 박해와 역경을 이겨낸 이순신의 초인간적인 능력과 의지를 돋보이게 한다. 13척 대 133척이란 세계해전 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력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설상가상으로 투옥, 고문, 백의종군으로 인한 심신이 극도로 쇄약 상태에서 아무런 조정의 지원도 없이 패잔선 13척을 현지 동원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100여척의 이순신 함대를 괴멸시키고 근 1만명의 수군을 수장시킨 만고역적 원균은 죽어서도 말이 많다. 그를 사후에 1등 선무공신으로 올리라고 선조가 지시한 때문이었다. 그가 결국 선무 1등 공신으로 봉록되어 오늘날의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음은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불의와 야합한 당시의 탐관오리들과 전제군주 이연의 국기문란 행위로서 천추에 한을 남기고 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원주 원씨 중앙종친회를 비롯하여 이들과 이해관계가 있는 일부 아세곡필 하는 무리들이 원균을 한번 더 죽이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음은 실로 개탄할 일이다.
저자는 조·일 7년전쟁을 실질적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지휘했던 3공을 두루 거친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이 그의 식견이나 인품을 봐 진실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3도 수군통제사 원균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의 패전시에 마지막 죽음을 어떻게 맞았는지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원균의 군사는 또 다시 크게 패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이 꼴을 당한 원균은 도망해 해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언덕에 올라 비둔한 몸을 이끌고 걸리지 않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원균이 이 곳에서 혼자 있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전하기도 하고, ....... 이억기는 배 위에서 강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 배설은 원균의 계교가 그르다고 여러 번 간 해오다가 ....... 생각다 못해 자기가 거느린 배 몇척을 적병에 대비시키고 있다가, 적이 오는 것을 보고 항구를 벗어나 먼저 달아났기 때문에 유독 그 군사만은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무주선등으로 독전중 장렬한 전사를 했는데 반하여 원균은 3도 수군통제사로서 적전 도주를 했으니 사형 감이었다. 이러한 반역죄는 그 당시에는 목을 치고, 재산을 몰수하여, 족보에서 그 이름을 제하고,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며, 자식은 노비로 삼는 5가지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좌수사 배설은 배 12척을 갖고 도망쳐 자기 목숨을 겨우 구했으나, 후일 붙들려와 참살 당하였다. 한가지 아이러니 한 것은 배설이 보존한 이 배 12척이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치르게 하고, 함대 재건의 종자 씨앗이 되었던 사실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일시적인 현상인 불의의 득세는 채소와 같아 쉽게 쇄잔하고 말며, 공의의 승리를 보장하는 절대자의 권능이 필연적으로 역사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순신의 해전승리를 통해 알게 된다. 척사위정은 사필귀정으로서 진리와 정의의 편에서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 인내와 소망의 성취를 교훈으로 안겨준다.
원균의 명예회복을 위해 들러리 서고 있는 일부 못난 학자들에게 경고한다.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지 말라고 재삼 강조한다. 천하의 폭군이요 혼군이며 암군인 선조가 왕권의 이익을 위해 원균에게 내린 녹훈이 오늘날 원균을 위대하게 재평가하기 위한 진리의 가치설정이 될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썩은 정치인들이 회칠한 무덤 앞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 같은 작태를 연출하는 꼴은 조금도 다름없이 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