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96. 옷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무늬만여우공주2005.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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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은 지방의 소매상들을 돌며 주문을 받아왔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물건을 그렇게 돌며 팔기도 했다. 랑이 주문받은 물품을 난 얼른 수량대로 색깔대로 맞춰서 박스 포장해서 지방에 내려보내는 택배 회사에 보내야했다.

택배 회사들은 아침과 오후에 가게들을 한 차례씩 돌았는데 박스를 잘 싣고 갈 수 있게 알맞은 짐수레를 달달달 소리를 내며 끌고 다녔다.

바쁘거나 할 줄 몰라 박스를 미처 포장을 못하면 그들이 와서 돈을 조금 더 받고 박스 포장까지 다 해줬는데, 내가 박스포장을 하도 하다보니 나중에는 내가 그들보다 한 수 위로 포장을 탄탄하니 잘하게 되었다.

박스 포장은 힘으로 하는 건지 알고 겁을 냈드랬는데 그거도 다 요령이 있었다.

먼저 납작하게 되어있는 박스를 가져다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가며 박스를 만든다. 거기에 옷을 차곡 차곡 넣는다. 사실은 박스 무게와는 상관없이 박스 갯수로 가격을 매기기에 한 박스에 어느만큼의 물건이 들어가냐에 액수가 정해지는 거였다.

보통 물건을 많이 사는 집에는 다섯 박스씩 붙여야 했는데, 싸는 요령에 따라 그게 열박스도 될 수 있고 세네 박스도 될 수도 있는 거였다.

도저히 닫혀지지 않을 꺼 같은 박스를 박수 포장하는 사람들은 무릎으로 꾹꾹 눌러가며 닫고 양쪽 맞물리는 곳도 다리를 이용해 닫고, 스카치 태이프도 난 가위로 얌전하니 잘라서 썼는데 그들은 그냥 쓰던 볼펜을 팽팽하니 당겨진 스카치테이프에 대니 '툭' 쉽게도 잘라지는게 아닌가.

유심히 관찰한 것을 혼자서 박스 포장을 하고, 힘이 필요한 것은 직원들 시켜서 했다. 하나라도 돈을 아껴야 하지 않는가.

옷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2층 재단대에다 뗄라(원단)를 재단사와 재단사 보조가 둘둘말린 원단을 풀며 차곡차곡 쌓는다. 그 위에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옷 본을 놓고 재단사가 커다란 날이 달린 기계로 그 본대로 잘라낸다. 그 잘라진 조각들을 주인은 다 이해하고 있어야한다. 그래서 그 잘려진 원단을 들고 꼬세집(바느질 집)에 갖다준다.

기본 디자인이면 설명이 필요없지만, 변형된 디자인이거나 특이한 옷은 바느질 집에 설명을 제대로 해줘야 옷이 제대로 나온다. 안그러면 엉뚱하게 바느질이 되어 나올 때도 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꼬세집은 그래도 잘못 나올 확률이 적은데 원주민이 운영하는 곳은 가격이 좀 싼 편에 비해 세 번에 한 번은 잘못 하기에 여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게 아니다. 비싼 원단으로 만든 옷이 잘못 바느질이라도 되면 속상해서 밥이 안넘어갈 때도 있었다.

바느질 집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건, 원주민이 운영하는 곳이건, 대체적으로 볼리비아 사람들이 재봉질을 하고 있었다. 페루 사람들도 중간 중간 섞여도 있었지만 볼리비아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주인도 직접 달라붙어서 하는 집도 있었다. 자기 일이니까 전문성을 띄어야 하기에 처음 바느질 집을 시작했더라도 그들은 재봉질에 관한한 볼리비아노들보다는 잘 이해하고 있어야했다.

난 꼬세집에 가는걸 별로 안좋아했는데, 볼리비아 음식에서 냄새가 나는건지, 아니면 그들 몸에서 나는 건지 모르지만 항상 특유의 역겨운 냄새가 그들에게서 풍겨나왔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들을 공장에서 한꺼번에 숙식까지 제공하며 일하게 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건 아르헨티노가 경영하건 그 볼리비아인들 숙소에서 나는 묘한 쿠린내는 인상을 찡그리게 했다.

아르헨티나 인들도 그 냄새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네들 보고 볼리비아노라고 하면 욕처럼 생각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건 그들에게 하나의 욕이었다.

한국인에게 '치노(중국인)'라고 하면 또 한국인이 싫어했다.
아르헨티나에 사는 중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참 지저분했다. 떡진 머리를 그대로 다니고 새카맣게 때 묻은 옷을 입고 다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인들도 한국인들이 치노라고 불려지는 걸 싫어하는 걸 알기에 그들은 놀리거나 욕을 하고 싶을 때는 우리보고 '치노'냐고 일부러 물어봤다. 그럼 우린

"오~ 노. 우린 한국인이야. 근데 넌 볼리비아노니?" 이러면서 맞대응 해본다. 그들은 상당히 기분나빠했다. 우린 내색은 안했지만 고소했다.

어떤 꼬세집은 바느질과 단추, 그리고 다림질까지 다 하는 집이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한가지만 전문으로 했다. 바느질집, 단추만 다는집, 다림질만 전문으로 하는 집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옷이 빨리 나와야 빨리 팔아서 현찰이 되기 때문에 시간은 돈이었다.

저녁에 가게문을 닫으면 레미스(대절택시)를 불러서 새로 잘라진 옷 조각을 꼬세집에, 꼬세집에 가서 바느질이 다 된 옷은 단추가 필요하면 단추집에 아닌 것은 다림질 집에 다녀야했다.

한창 옷에 수를 놓아서 파는 것이 유행했드랬는데, 그럼 그 수를 놓아야 하는 조각은 보르다도집(수놓는 집)에 먼저 보내서 수를 놓은 다음 바느질 집에 갖다 주어야했다.

대부분 다른 집들은 그걸 남자들이 차로 다니며 했는데, 우리 집은 랑이 주로 지방으로 돌기 때문에 내가 아이들을 끌고 그 일까지 해야했다. 물론 랑이 카피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을 때는 다 해줬지만 주로 지방으로 도는 사람이라 없거니 생각하고 하는 게 속편했다.

윤희와 은비는 내가 끌고 다녔는데 밤 12시까지도 일이 안끝날 때가 있었다. 그럼 저녁도 굶기 쉽상이라 윤희 녀석은 그래도 남자 녀석이라 빵을 주면 그거만 먹고 묵묵히 기다려줬는데, 은비는 뒷좌석에서

"아이고 아이고~ 맘마 먹고싶다. 배가 아프다(고프다를 아프다로 표현했다)"

이러면서 사람을 웃겼다. 지 딴엔 엄마에게 하소연 한다는 것이 꼭 80세 할머니가 내는 소리를 했었다.
저녁 일이 다 끝나면 자는 아이들을 업고 걸려서 집에 들어갔다.
보통 일은 10시 반 정도면 끝나서 집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아버님이 한국에 안가시고 아르헨티나에 계시거나 하면 아이들을 봐주시기 때문에 좀 낫었다.

집안 일은 성악을 공부하던 아가씨가 많이 도와주었다. 시어머니를 닮아서 일도 나보다 잘하기도 했다.

지방에서 랑이 올라오면 좀 편해지는 게 아니라 더 바빠졌다. 주문 받은 물건을 빨리 보내줘야 했기에 저녁에 바느질집, 단추집, 수집, 다림질 집까지 한 바퀴 돌아 가져온 물건을 박스 포장해야했다.
어떤 때는 새벽 세네시까지 포장하고 아침에 다시 문 열러 나오곤 했는데, 그런 날은 하루종일 꾸벅거리며 졸았다. 그래도 체력은 좋아서 깡말랐었지만 아프거나 몸살이 나서 눕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