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밀화에 대하여...

휘뚜루2005.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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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에 대하여...

                                                        * 2mm 붓끝으로 그린 고란초의 세밀화/삼백초님 작

* 붓끝으로 살려낸 식물들의 호적등본


[이틀간의 봄비가 그친 아침, 기분 좋게 기지개 켜는 녀석들을 만났다. 줄기를 덮은 북슬한 흰수염털과 각도에 따라 다른 색을 내는 벨벳 느낌의 꽃,그 옆으로 흐르는 작은 냇물로는 어치 부부가 아침 세수차 날아오고, 침엽수 잎 사이로 쨍한 아침 봄볕에 눈이 부시다.]
한 편의 전원시 같은 이 글은 초야에 묻혀 사는 시인의 솜씨가 아니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에서 일하고 있는 공혜진,권순남,이승현등 세명의 세밀화가들이 공동으로 쓴 식물 관찰기의 한 대목으로 광릉숲 외국수목원을 둘러보다가 만난 [흰털제비꽃]에 대한 아름답고 옴팡진 메모다.


꽃피는 봄과 함께 어김없이 4월5일 식목일이 다가오지만 내년부터 식목일 공휴일을

반납하기에 올 식목일은 마지막 공휴일이 되는 셈이다. 공휴일에서 빠져도 되는 날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 식목일이 1순위에 뽑혀 제일 먼저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나무심기가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일제의 수탈과 6·25 당시 초토화됐던 국토의 식목이 이제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나름의 자긍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숲의 중요성에는 단순한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수자원, 생물 다양성, 휴양 등의 공익적 가치와 지역의 역사 및 정서가 담긴 문화적 가치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 숲의 풀과 나무에 대한 보존 관리의 첫 걸음이 바로 세밀화 작업을 통한 식물의 분류와 표본 확보다. 표본은 한 식물이 어떤 시대, 어떤 장소에서 서식했는가를 따지는 식물의 호적등본에 해당한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컬렉션을 보유한 영국 큐식물원의 경우 지난 200년 동안 수집한 식물 세밀화가 무려 20만점에 이른다. 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미국 뉴욕식물원은 5000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으며 일본 쓰쿠바식물원은 매년 식물세밀화 작품 공모를 통해 지속적으로 작품을 확보하고 있을 정도다.
국립수목원에서 일하고 있는 3명의 세밀화가들이 표본 기록이 없어 우리 식물을 공부하러 영국으로 가야하는 불행한 현실에서 광릉 숲의 풀과 나무 100종을 세밀화로 그려낸 의미는 각별하다고 할 것이다.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는 봄볕에 기지개를 켜는 잎, 잔바람에 살랑이는 줄기의 솜털, 그리고 그 사이를 빠르게 행군하는 개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색을 내는 꽃….

내 안에 있던 모든 감각들이 하나하나 살아나는 것이 느껴진다.] (공혜진)


[식물세밀화 작업은 단순히(눈에) 보이는 하나의 작품이 아니다.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식물 채집과 세밀한 사진 촬영, 비슷한 식물 종류들과 비교, 채색 이전의 세부 형태 스케치까지 무엇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권순남)


[식물은 때를 놓치고 나면 또다시 1년이란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볼 수 있는 아쉬움을 주지만 그 기다림 또한 설렘과 즐거움의 한 가지이다.] (이승현)


세 명의 세밀화가들은 2003년 4월부터 2004년 12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우리 숲의

자존심인 광릉 숲속에서 자생하는 광릉요강꽃, 광릉물푸레를 비롯, 100종의 식물들을 만나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그림을 그렸다. 식물과의 대화가 없이는 세밀화의 탄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식물학적 정보 외에도 그림을 그릴 당시 화가들이 식물과 주고받은 세세한 감정들에 대한 기록은 세밀화의 가치를 더욱 빛내고 있다.

 예컨대

[꽃과 눈을 맞추고 한참을 보고 있으면 어린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 앵초]라거나 [그 모습이 마치 봄볕에 소풍 나온 병아리들 같다. / 애기중의무릇],

[바람결에 은은하게 풍겨오던 향기는 제비꽃을 만나면 엎드려 코를 가져가는 버릇을 만들어 주었다. / 태백제비꽃]는 식이다.
세조 이후 600년간 온전히 보호되어온 광릉 숲에는 앞으로도 800여종의 식물들이

자신들의 호적등본을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공휴일이 될 이번 식목일에는 아침에

눈을 떠 처음으로 만난 식물에게 다가가 두런두런 말을 붙여봄이 어떨까...?

                                                  (2005.4.4. 휘뚜루)

세밀화에 대하여...

* 2mm 붓꿑으로 그린 괭이눈의 세밀화 / 삼백초님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