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련 {열여섯번째}

이야기 상자2005.04.05
조회1,859

 우려하던 일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당분간 집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
 "왜요?"
 태림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세준의 얼굴에 자신이 쥐어준 그늘은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었다.
 "누가 회사 기밀을 밖으로 유출시킨 것 같아..... 다 해결되면 그때 말해줄게. 약속해."
 그녀는 세준이 그녀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다는걸 알았다.
 "만약에요."
 "뭐."
 세준은 태림이 내어주는 옷을 입다가 그녀의 주춤거림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제가 큰 잘못을 했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
 "뭐 잘못한 거 있어?"
 세준은 옷을 마저 입고 태림을 소중히 안았다.
 "아...니요."
 지금 말해 버리라는 마음속의 속삭임을 태림은 죽여버렸다.
 "무슨 잘못을 해도 용서할게. 하지만 날 배신하지마 그럼 난 미쳐버릴 지도 몰라."
 세준은 태림이 그 자리에 굳어버린 것도 모른 채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기고 바삐 회사로 나갔다.
 거의 모든 일을 세준에게 전담시키고 쉬던 시아버지까지 회사로 간걸 보지 않아도 태림은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차라리 세준에게 사실을 말하고 엄마를 데리고 나오는 방법을 찾아야 했을 지도 몰랐지만, 이미 늦었다.
 너무 늦어 돌일 킬 수 없는 곳으로 물은 흐르고야 말았다.
 쾅!
 태림은 평상시와 다르게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에 세준이 드디어 모든 걸 알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그와 침대에 같이 들기 전에 외롭게 혼자 잠들었던 소파에 몸을 굳히고 앉아 주위의 모든 것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책상, 장롱, 테이블, 방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분명 시어머니가 가져다 놓은 것 같은 그림, 그리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침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이방에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끼고 있었다.
 "너....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질 수 할 수가 있어?"
 "...."
 태림은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생전 처음 보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서서 너무 화가 나서 소리조차 치지 못하고 낮게 말하는 그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곧 쫓겨날 자신 보다 더...
 "무슨 말이든지 해봐. 네 능구렁이 같은 아버지가, 널 그렇게 잔인하게 때리는 아버지가 뭐가 좋아서 그런 일을 한 건지 말해보라고?"
 세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리를 곧추세운 채로 소파에 앉아 있는 태림의 어깨가 멍이 들 정도로 거세게 잡아 일으켜 세워 흔들어 댔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단 한마디 말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너 이러기 위해서 나하고 잠자리에 같이 든 거야?"
 태림은 그것만은 아니었기에 그것만은 그가 오해하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처음으로 그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건...."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아. 네 아버지가 그렇게 좋다면 떠나."
 "제발..."
 태림은 애원했다.
 "너하고 네 아버지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아니 그럴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넌 네 아버지와 한 치도 다른 것이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세준은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그렇게 휑하니 방을 나가버렸다.
 세준이 그렇게 집을 나선 뒤 시아버지는 태림의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은지 찾아오지도 않았고, 시어머니는 머리에 하얀 끈을 두른 채로 방으로 들어섰다.
 "너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니? 너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는데, 이게 그에 대한 대가니?"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하다구! 죄송한 줄 아는 애가 이렇게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그동안 그렇게 태연하게 지냈단 말이니. 어쩜 넌 네 엄마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니 못된 아버지를 쏙 빼다 박았니."
 태림은 아버지의 피를 무시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다.
 "세준이 아빠가 어릴 적 네 어머니 집안에 큰 은혜를 입었다 길래. 그것이 고마워서 잘해줬다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너 같은 애는 필요 없으니 쫓아내기 전에 네 발로 알아서 나가."
 시어머니 역시 태림이 얼마나 힘들어하는 지는 안중에 없었다.


 비가 왔다 장마가 시작되는지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가 내리기 시작했고, 바람은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힘차게 불었지만 태림은 더 이상 자신의 집이 아닌 이곳에 머물 수가 없
었다.
 "저..."
 -돌아올 생각 말아라. 어떻게 처신했기에 그 일이 세준이 그놈이 그 일을 알게 만들었냐.-
 마치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처럼 느껴지는 대답.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아버지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지낼 수 없어요."
 -넌 이미 그 집사람이니 죽어도 그 집에서 죽어라. 돌아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쫓겨나는 게 누구 때문인데 엄마의 곁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다니.
 그녀는 사실 시아버지가 준 용돈과 세준이 준 돈은 지갑만 빼 놓고 고스란히 남겨두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집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세준은 비가 많이 오는 데도 어디서 자는 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집에는 비바람 소리만 가득할 뿐 적막과 어둠으로 가득했다.
 세준이 태림이 있는 동안 들어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작은 미등 조차 켜 놓지 않아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새벽이었지만 태림은 꼭 필요한 옷가지와 필수품이 든 가방과 우산 하나만을 들고 집을 나왔다. 우산이 있었지만 워낙에 거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태림은 금새 다 젖고 말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에 무작정 걸었고, 비바람에 날라든 전단지 하나를 붙잡고 그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태림이 할 줄 아는 건 조금의 공부와 엄마에게 틈틈이 배운 재봉질 뿐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나오 돈과 그녀의 능력으로는 의류공장에 취직하는 게 전부였다.
 방은 공장과 그리 멀지 않는 달동네의 작은 부엌이 딸린 쪽 방이었지만 태림에게는 그것도 과분한 것이었다.
 처음에 집 주인은 비를 잔뜩 맞고 온 태림에게 방을 주는 걸 꺼렸지만 옆방에 사는 미순이 언니 덕에 방과 일자리를 금방 얻을 수 있었다.
 "아가씨 이런데서 살아봤소."
 "아니요..."
 태림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주인 아주머니의 눈길이 불편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조용히 견디어 냈다.
 "아줌마 누군 처음부터 이런데서 살라고 태어난 사람이에요. 착해 보이는 구만, 방 줘요. 내 옆방 비었잖아요."
 태림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을 보기 위해 뒤 돌아섰고, 즉시 강인해 보이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는 한데, 이런 데서 살만한 아가씨는 아닌 것 같아서, 그리고 어려 보이잖아."
 "아줌마 내가 이 집에 온지 6년이 지났어요. 그때는 나도 어렸잖아요. 들어가서 짐 풀지 않고 뭐하고 서 있어. 얼른 들어가."
 "아....네."
 그렇게 해서 태림의 독립 생활은 시작되었다.
 
 언니는 시골에서 올라왔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동생 둘을 돌봐주고 있다고 했다. 언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포기하고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서 인지 미순 언니는 강해 보였고, 믿음직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태림아! 어서 일어나 잘못하면 늦겠다."
 태림은 뜨기 힘든 눈을 한쪽씩 겨우 뜨면서 따뜻한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심적으로 힘들었던 그녀는 힘든 노동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져갔다. 처음에 미순 언니는 일이 익숙해지면 괜찮아 질 거라고 했는데, 태림이 시간이 지나도 적응하지 못하자 아침마다 항상 태림을 깨워주는 일을 자발 적으로 해주고 있었다.
 "응. 언니! 나 일어났어."
 오늘은 언니가 아침을 준비하는 차례였다. 그들은 시간도 아끼고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자는 것만 빼놓고 살림을 합쳤다.
 나중에 좀더 돈이 모이면 둘이 같이 쓸 수 있는 넓은 방으로 옮기기 위해서 생활비를 아끼고 또 아끼었다.
 "오늘은 북어국이다."
 미순 언니는 오랜 객지 생활 덕분인지 음식 솜씨가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욱."
 "왜 그래?"
 태림은 세면장에 뛰어나가 위가 뒤집혀 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구역질을 했다. 미순 언니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는지 따라 나와 등을 두들겨 주었다.
 "언니 이제 괜찮아졌어."
 연두 빛 위액까지 넘기고 나자 속이 진정이 되어 눈앞에 있는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태림이 혹시 너 아이 가진 거 아니야?"
 풍덩
 태림의 손에서 바가지가 미끄러져 다시 통으로 빠져버렸다. 언니의 말을 듣고 보니 찾아올 것이 오지 않는 게 기억이 났다. 생리가 시작한 것도 고 2때부터이었고, 양도 많지 않고 가끔 뛰어 넘기도 해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제 일이 너무 고되어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나 어떻게 언니."
 그녀들은 상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한동안 말이 없이 앉아있었다.
 "누구 아이야? 설마 너 공장장한테 당한 건 아니지?"
 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 능구렁이 같은 공장장이 태림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우두머리 중에 하나인 미순 언니가 암탉이 병아리를 지키듯이 옆에서 살펴주어서 공장장의 마수에 벗어날 수가 있었다.
 "오늘 조퇴하고 나하고 병원에 가자. 공장에 다닌 애들 중에 중절수술 한 애들 많아."
 중절 수술이라는 말에 온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섬짖 한 기분이 들어 태림은 한기가 든 사람처럼 몸을 손바닥으로 연신 문질러 댔다. 그런 건 생각해 보고 싶지 않았다.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절망적이거나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싫어. 언니."
 "이 바보야! 그럼 그 애 나을 꺼야. 너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아이까지 낳아서 어떻게 길러."
 태림은 언니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나.. 사실은 결혼했어."
 미순의 얼굴은 정말 충격을 많이 받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나 그 집에 못 들어가."
 "너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면서."
 태림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그래서 널 쫓아낸 남자아이를 낳아서 기르겠다고, 너 바보니. 임신한 거 알면 당장에 공장에서 쫓겨날 텐데 그럼 어떻게 먹고살려고."
 태림은 언니가 공장장이라도 되는 듯 무릎을 꿇고 사정을 했다. 여기서 포기 할 수는 없었다. 엄마가 있는 집에도 돌아갈 수도 없었고, 세준이 있는 집에도 갈 수 없는 그녀로써는 미순 언니가 마지막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니 제발.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마. 나 이 아이 꼭 낳고 싶어. 응 제발."
 미순은 눈물을 흘리는 태림을 우선 진정을 시키고 공장에 출근을 하자고 하고 겨우 태림을 준비시켰다.
 "야! 뛰어. 이러다가 너 임신한 것 들키기 전에 지각했다고 쫓겨나겠다."
 "응."
 미순 언니가 그녀의 비밀을 지켜줄 것이 확실해 지자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조금 늦어 공장장에게 규율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미순과 태림은 그 시간동안 비밀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 전혀 지루해 하지 않았다.
 
 오늘도 10시간이 넘도록 일을 하고 왔다. 아직은 잔업이 없는 기간이라 그나마 일찍 끝나는 거였다.
 "자 이걸로 감아라."
 미순 언니는 태림의 방으로 들어오더니 기다란 천을 태림의 무릎 앞에 던져 놓았다.
 "이게 뭔데?"
 "지금부터 감아야 나중에 배가 덜 나와. 그래도 하는데 까지 일해서 돈을 모아야 애를 키울 꺼 아니야."
 태림은 천을 들어 올려보았다.
 "답답하겠지만 가능하면 풀지 말고 하루종일 차고 살아. 나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 남들이 애 날 때까지 몰랐었어."
 가슴을 감고 다닌 적이 있어 어느 정도는 참을 자신은 있었지만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을 가 싶은 걱정에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천을 보자 태림이 가슴을 작게 보이려고 천을 두르던걸 싫어하던 세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러면 배속에 있는 애가 너무 답답해하지 않을까?"
 미순은 태림이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자신의 뜻을 무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혹시라도 네 배가 나온걸 다른 사람들이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공장장이 아는 건 시간 문제야."
 그 날부터 태림은 씻는 시간을 빼 놓고는 배에 항상 천을 감고 다녔고, 잠자는 시간만큼은 아이가 마음껏 움직 일수 있도록 천을 감지 않았다. 아침에 하는 입덧말고는 임신한 증거가 전혀 없어 미순 언니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점심시간이었다.
 점심도 교대로 먹어야 할 정도로 공장은 바쁘게 돌아갔지만 이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직원들은 각자가 정한 쉼터로 가서 무작정 앉아 있거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태림의 눈에 들어왔다.
 "미스 김! 커피 좀 마셔봐."
 오늘도 능글맞은 공장장의 안테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를 피해서 한적한 곳으로까지 왔는데, 그도 따라온 모양이었다.
 "아니요. 배불러서 더 이상 안 들어 갈 것 같아요."
 사실이었다. 배가 나오지 않기 위해 감은 천 때문인지 평상시에 비해 덜 먹어도 배가 금방 불렀고, 소화되는 시간도 오래 걸려 태림은 밥을 먹고 나면 소화가 될 때까지 돌아다녀야 할 정도가 되었다.
 "아무리 배불러도 이건 달라. 이게 얼마나 맛있는 줄 알아. 자 어서 마셔보라니까."
 공장장은 싫다는 태림의 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마시던 컵을 그녀의 입술에 들이밀다 시피하고 있었다. 커피 냄새가 태림의 위를 자극하는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맛있다는 말이죠. 공장장님 내가 태림이 대신에 마셔도 되죠."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미순 언니는 공장장의 손에서 컵을 빼앗아 들더니 안에 있는 내용물을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에게~~ 이게 뭐야 쓰기만 하구만 이런 게 뭐가 맛있다는 거예요. 뭘 이런걸 마실 거라고 내놓는데요."
 미순 언니의 인상을 보니 마시지 않은 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도 가끔 커피를 드시기도 했고, 그 향을 좋아했었지만 오늘은 그 냄새도 참기 힘들어 지려고 했다.
 "아니 미스 한이 이걸 왜 마셔. 이게 얼마나 비싼 건 줄 알아. 미군에서 나온 거란 말이야."
 미순 언니의 표정은 완전히 음식가지고 장난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공장장을 바라보았지만 공장장은 태림이 주려는 것을 미순이 마셔서 인지 씩씩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요? 별로 맛도 없구만.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세요. 가자 태림이 일할 시간 다 되간다."
 태림과 미순은 뒤에 남은 공장장의 화난 모습에 낄낄거리면서 그곳을 벗어났다.
 "완전히 뭐 씹은 얼굴이지. 고거 참 고소하다. 다음부터는 혼자 있지마 알았지? 쉬더라도 사람들 있는데서 쉬거나 나랑 같이 있어."
 "그럴 게. 그런데 공장장이 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너무 눈 밖에 나는 거 아니야."
 "야야 걱정하지마. 그러면 지가 어쩔 건데. 내 재봉솜씨는 이 부근에서 다 알아줘. 여차하면 너 데리고 다른 공장으로 가면 되니까. 넌 공장장이나 조심해, 내 걱정이랑은 하지말고."
 태림은 정말 미순의 말처럼 해야할 것 같았다. 요즘 공장장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고, 틈만 나면 일하는 태림의 옆으로 나가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는 행동을 하거나 그녀의 귓불을 만지려고 들어서 태림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태림은 그녀들을 향해 인상을 쓰고 있는 공장장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보고 미순 언니를 따라 작업장안으로 들어가는 다른 여공들과 섞여들었다.

 배를 천으로 감고 다녀서 인지 사람들은 태림이 임신했다는 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아이도 잘 커가고 돈도 버는 태림에게는 세준과 엄마가 그리운 것말고는 전혀 고민거리가 없었지만, 태림이 일하는 공장의 노동자 계층과 학생들에게서는 점점 정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제가 부터 태림이 다니던 공장도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하나 둘씩 변해가고 있었고, 미순 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니 그거 위험한 것 아니야."
 언니는 공장에 다니는 몇몇의 직원들과 대학생들과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귀가도 늦어지고 있었고, 가끔 이상한 전단지 같은 것을 집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의 노동력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걸. 이제는 저 윗사람들도 알아야 할 때가 됐어."
 태림은 자신들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공순이들이 인간 대접도 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장은 직공들의 인격과 노동시간 같은 것은 무시한 채로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만큼 일을 시켰고, 그것도 부족해 임금도 자기들 마음대로 책정해서 주고 있었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고 했어.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 보다 더 무섭다고."
 하지만 이 나라에선 노동자의 인권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였고, 더구나 학생들과 유착해서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유린은 무서우리 만큼 철저했다.
 "넌 임신했으니까. 그냥 빠져 있어. 이 언니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마. 누가 뭐라고는 못할 꺼야."
 언니의 말대로 태림은 그 일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미순 언니가 걱정이 되어서 마음이 편하지 만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순 언니와 다른 사람들이 계획하는 일이 잘 되어서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언니 검정고시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 만나느라고 공부도 하지 않고."
 미순 언니는 시골에 있는 동생들과 그들을 뒷바라지 해주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돈을 보내주기 위해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이곳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그래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넉넉하지 않는 살림이었지만 학교도 다닐 수 있었고, 행복했었다고 했다. 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지금은 형편이 되지 않지만 나중에라도 대학에 가는 게 언니의 꿈이었고, 그걸 알게된 태림은 미순 언니에게 시간만 나면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대학에 가는 거 포기 할 꺼야. 언니 못된 사람들 혼내주는 검사가 되고 싶다면서."
 미순은 그런 태림의 말에 잠시 주춤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금 굳은 결심이 선 표정으로 가득했다.
 "어차피 지금은 이룰 수 없는 꿈이잖아. 우선 눈앞에 있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어.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회피한다면 검사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하류층이라고 무시하고 짓밟는 소위 윗사람들이 각성하는 꼴을 꼭 보고 말 거야."
 미순은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지만 언니는 그들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그 무슨 소리를 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등이 따뜻하면 그만이었고, 가족들이 행복하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가 소요된다고 해도 그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길 사람들이었다. 가장 가까운 아버지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미순 언니에게는 그런 말도 이미 통하지 않았다.
 태림은 언니에게 무슨 말을 해도 언니가 돌아서지 않는 다는 걸 깨닫고 제발 언니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태림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위가 일어 난지 3일도 되지 않아서 공장 측에서는 시위진압대를 내세웠고, 주동자로 보여지는 사람들은 모두다 잡아가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들은 겉으로는 합의를 하겠다면서 대표들의 합동회의를 제의하고서는 그들이 시위대들의 밖으로 나오자 바로 어디론가 데리고 가버렸다.
 그 중에 미순 언니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일을 말릴 수는 없었다. 시위주동자들이 잡혀가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은 채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다시금 일을 시작했지만 태림은 미순 언니가 걱정이 되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얼굴이 달라지는 직공들과 공장장의 협박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미스 김. 다른 공순이들이 어디로 간지 알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어. 미스 김도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내 말 잘 들어야해."
 공장장은 그 느끼한 눈빛을 하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고, 급기야 그녀가 천을 감아 놓은 곳까지 내려오려고 하자 태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공장장의 눈빛이 좀 이상하게 변했지만 태림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 자리를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그에게 아이가 생긴걸 들킨다면 미순 언니가 도와준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도망가 버렸다.
 태림은 당장 배를 조이고 있는 천을 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막기 위해 뼛속까지 시린 물로 세수를 연신 해대었다. 신경이 다른 곳으로 몰리면 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차가운 물에 얼굴이 얼얼했지만 숨쉬기는 많이 편해졌다.
 미순 언니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공들은 공장장의 눈 밖에라도 나서 쫓겨나기라도 할까봐 몸을 사리는 통해 공장장의 횡포는 날로 더 심해지고 있었다.
 오늘도 시위를 한다면서 일을 하지 않아 밀린 일이 많다면서 10시까지 일을 시켰다. 하루 종일 옷감과 재봉틀로 시름을 했더니 이제는 눈이 빠져버릴 것 같아 땅만 쳐다보고 걸었다. 땅에는 누군가 걸어다녔다는 흔적이 눈 위에 이리저리 남겨져 있었다.
 집 근처에 다와 전봇대를 지나려는데 검은 그림자 몇 개가 태림의 시선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녀의 발 아래로 삼켜져버렸다. 태림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가 이상하게 느껴져 고개를 들었는데, 그곳에는 처음 본 남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서있었다. 태림은 그들에게 풍기는 분위기가 어딘지 소름이 끼쳤다.
 "아가씨가 김태림이지."
 태림은 그들이 누군지 몰랐지만 그 자리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지고 거의 하루종일 일하는 태림이 장성한 남자들을 따돌리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이러세요. 살려주...."
 "조용히 해."
 남자들은 태림을 양쪽에서 붙잡더니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천으로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았고, 그 냄새는 태림을 깊은 잠으로 빠져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