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김영삼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결사반대

KTX200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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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김영삼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결사반대

35년전 1970년 7월7일.
우리나라의 최초 고속도로인 경부고속도로 428km 가 준공된 날이다.

우리나라가 60년대말 산업화의 물고를 트게한 대역사가 바로 고속도로 사업이고 이로 인한 동맥이 사통팔달 흐르게 됨으로써 우리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428Km의 경부고속도로는 외국의 도움없이 순수노력으로 이룩했다는 사실에 민족적인 긍지의 원천이며 자랑거리가 되기도 하는 현존하는 역사인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1964년 12월에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며 첫 구상을 한 뒤 귀국해서도 틈만 나면 인터체인지 선형을 직접 그려가며 꿈을 가다듬었다.

1967년 4월에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아직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재정파탄이 날 것이다”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다”는 게 이유였다. 김대중,김영삼 등 야당정치인들은
"한국의 모든 차들을 줄세워봐야 경부고속도로도 못 채운다." "재벌들 골프치러가기 편하게 하려고 고속도로 만드냐?" 며

경부 고속도로 건설 결사 반대를 외쳤다.


고속도로 건설은 아무리 야당이라 해도 반대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는데 왜 그토록 반대에집착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된다.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던 대표적 오판이었다.

1960년대 중반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최빈국중 하나였고, 북한의 위협도 매우 심각하여 국가 경제,안보 할것없이 참으로 어려웠던 지경에 놓여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예산은 430억원이 책정되었다.
당시 건설비용이 1년 국가예산보다 많았다. 국가재정이 극도로 빈약하여 막대한 건설비 때문에 박대통령으로써도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베트남전에 파월된 국군 장병들이 전쟁터에서 보내오는 전투수당과 월남전선에서 한국군의 용맹성과 전투력이 전세계에 알려지며 이에 힘입은 한국기업들이월남등 해외진출(중동)에서 벌어들어오는 외화수입등이 합쳐져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실질적인 종자돈 역할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 건국이후 최대의 대역사인 경부고속도로는 68년 2월1일 착공하여 70년 7월1일 준공까지 공사기간 2년 5개월만에 마친 전시를 방불한 역사였다.


현대건설이 공사를 수주했으나, 2년 반이라는 단기간에 건설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양심적이고 추진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현역공병장교를 감독요원으로 참여시켜야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육사출신의 우수한 공병장교들을 뽑아서 각 공사구역마다 배치하여건설업자들을 기술지도하고 철저한 감독을 하게했다. 육군의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19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완전 개통됐다.
긴 교량 32개와 짧은 교량 328개를 건설하고 터널 12개를 뚫는 민족의 대역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공사에 투입된 연 인원만 해도 900만명에 달했다.

착공한지 2년 2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에 서울과 부산을 잇는 전장428km, 노폭 22.4m 의 4차선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김대중 김영삼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결사반대

대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기념식에서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체이자 민족적인 대예술작품”이라며 건설 참여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이 가져온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국가 전 부분에 걸쳐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국토의 1일 생활권화가 가능해졌으며, 인적 물적 자원의 지역간 이동이 원활해지고 대도시 집중이 가속화되는 등새로운 사회현상들이 나타났다. 경제적으로는 교통수송 및 유통구조가 급속히 개선되면서
그 자체로 경제개발을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만일 당시 국민적 반대 여론에 굴복해 정부가 고속도로 건설을 미루거나 늦췄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아마도 한강의 기적은 20년 이상 지연됐거나 아예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국민 각자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보고 경제 및 생활상의 여러 변화들을
체험하게 되면서 초기 고속도로 건설에 쏟아졌던 비난은 사라지고
어느새 "지지"와 "격찬"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지금 민주를 부르짓는 자들의 지도자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가 불도적식으로 밀어부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한국 경제개발의 주춧돌이 되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혈맥"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온갖 반대와 장애요인을 무릅쓰고 고속도로 건설을 강행한 박정희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朴대통령이 앞장서 팔을 걷어붙이고 경제 개발에 나설 당시 중용됐던 관료들은 대부분 겁없이 펄펄 뛸 30대 나이였다. 朴대통령은 이들의 패기를 적절히 살려주었고,
그 때문에 시행착오를 겁내지 않는 불도저식 행정이 가능했다.
이 점은 뒤에 숱한 비판도 받았지만, 정작 지금은 오히려 그들의 목소리가 더 높다.
"우리는 허많이판에서 밤잠 안 자가며 몸사리지 않고 일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도대체 사회 전반에 생기있고 힘찬 맛이 없다"라는 것이

이들의 일리있는 항변이다.

그러나 경험이 없었던 공정에서 77명의 사망자를 낸다. 특히 터널공사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그 당시 여러가지 미비한 여건 속에서 짧은 기간내에 이만한 고속도로를
만들고저 이들의 고생은 사실 말안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 김영삼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결사반대

매년 7월6일 위령탑이 있는 옥천군 금강휴계소에서 건설중 희생자의 위령제 행사가 3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고속도로 준공기념비는 추풍령휴게소에 세우고, 공사를 하다가 생을 호화롭게 다하지 못한 희생자를 위한 순직자 위령비는 금강이 내려다보이고 고속도로를 관망하기 좋은곳 금강휴게소에 세웠다.  

우리는 이 고속도로를 잘 이용하면서도 이 도로를 만들면서 흘린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그리고 희생을 잊고 지나는 경우가 많다.
희생자들 77명의 명단이 위령비 뒷면에 새겨져 있다.
금강휴게소에 혹시 들릴 일이 있으면 또 여유 시간이 있다면 한번씩 들러 봄직하다.

김대중 김영삼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결사반대

이은상씨가 쓴 비문.
고속도로 건설에 많은 인원이 참여하여 땀을 흘렸으며 77명이 피를 흘려 생명을 바쳤다.
그들의 혼을 기리는 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