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제4부-

까미유200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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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무엇이든 늦다는 희수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매번 마감일을 넘기고서야 원고가

넘겨질 때마다 핀잔을 들어야 했던 은우를 출판사에서도 후에는 아주 포기한 듯 했다.

그날도 역시 마감일에서 일주일을 넘기고서야 부랴부랴 원고를 건넸다. 마감일이 항상

늦는 건 그녀의 완벽한 성격 탓이었으리라. 수정작업이 항상 더디게 흘렀다. 마감일을

몇 일 앞두고서 매번 자신의 글에 대해 미심쩍은 부분을 넘어가지 못하고, 수정하다보면

또 다른 것들이 앞서서 튀어 나와 결국 몽땅 손을 봐야할 지경이었다. 투덜대는 편집장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출판사를 나와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졌던 친구의

전화를 받고 약속 장소로 향하던 길이었다. 을씨년스런 가을 바람에 은행잎들이 발 아래를

뒹굴던 그 날 오후. 낯선 차 한대가 그녀 옆에 와서 섰다. 차창이 내려서야 희수라는 것을

알았다. 정확히 이 년만이었다. 친구의 약속도 잊고 그녀는 완강한 희수에게 끌려

한적한 시외로 나갔다. 마당 넓은 집 뜰에는 작은 풍차가 돌아가고 있었고, 마른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뒤쪽으로 멀리 대나무 숲이 있었고, 그 쪽으로 난 길은 좁고도

구불한 오솔길이었다. 가게는 통나무로 지어졌는데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온통 나무

향기가 무슨 약초처럼 짙게 코 끝을 찔러댔다. 산새가 얕은 입구에 이렇듯 한적한

가게가 있었다니 일부러 찾아 오기조차도 힘든 장소였다. 그 날 채 날이 저물지도 않은

시각에 술상을 받았다. 삼 년전 가을에 담근 솔잎주라며 주인이 내놓은 술 앞에서도

은우는 단 한마디도 열지 않았다.


-니네 엄만 여전하시니?


잔에 술을 따르며 희수는 덤덤하게 물었건만 그 말이 은우의 비위를 뒤틀리게 했다.

아직 잔을 비우지도 않았는데 은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은우의 표정을 놓칠리 없는

희수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말했다.


-비꼬는 거 아냐. 그런 뜻에서 물은 거 아닌데, 기분 상했다면 미안하다.


솔잎 향이 입안 가득 퍼지기도 전에 쓴 뒷 끝 맛이 목구멍을 쏘았다. 그 맛이 쓰긴 했으나

오히려 시원해 막힌 목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은우는 침묵이라도 지킬 작정이었는지 좀체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희수는 그런 은우를 물끄러미 보다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운전해야지.


두 번의 잔을 비우자 그제서야 은우가 입을 열었다. 말을 섞고 싶진 않았으나 돌아 갈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희수도 알다시피 은우는 운전을 하지 못했다. 잔소리처럼

면허증을 따라고 했건만 은우는 내켜하지 않았다.


-이 년만에 만난 사람 앞에서 처음 꺼낸 말이다. 돌아 갈 일이 걱정이야?


희수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아 그저 묵묵히 잔을 비웠다. 향을 느끼기도 전에 은우가

술병을 잡으려 하자 현서가 먼저 잡아 들었다. 옻칠을 여러 번하여 만든 주병의 백색빛이

매끈하였다. 현서의 시선을 피하며 잔을 들고 있던 은우는 채워지기가 무섭게 다시

잔을 비웠다.


-너랑 술 마시자고 여기 온 거 아냐. 천천히 마셔.

 

-그럼 나랑 대화라도 해볼 생각으로 온 거니?

 

-비꼬지마. 뒤틀린 심사, 이 년이란 시간이면 충분히 풀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오래간다.

 

-이십 년이 지나도 니 앞에서 웃을 일은 없어.


은우의 말에 희수는 답답한 듯이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다시 잔을 집어 들었다.

은우 뒷 편으로 난 창 너머로 그새 붉은 노을이 졌다. 붉은 색이 사라지면 곧 어두워

질 것이다.


-현서는 잘 있어?


굳이 대답할 이유 없다고 느낀 은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소한 질문조차도

아직은 심기가 불편한 걸 보면 희수의 말처럼 이 년의 시간이 그다지 해결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건 아니었다. 사랑은

아닌데도 상처는 오래 가는 법이니까. 고통이 없다고 해도 제 상처를 다시 들추어

내는 것은 별로 달가울 리 없을 터였다.


-인정하긴 싫은데, 사실 난 그 자식 처음부터 싫었어. 내가 곁에 있는데도

뻔뻔하게 니가 그 자식 곁에 있는 것이 화가 나긴 했었어. 말하기 참, 치사해서

내가 입 다물고 있었지. 뭐, 지금에 와서야 소용없는 얘기지만.

 

-소용없는 얘길 왜 해? 때를 놓친 얘기를 왜 자꾸 들추는 거니? 헤어지자고

말할 때도 넌 그랬어. 나쁜 버릇인 거 아니?


날카롭게 튀어 나온 말과는 달리 마음 한 구석은 뭔가 금이 가는 것처럼 쩍쩍 소리를

냈다. 결혼이란 게 좋긴 한가 보네. 어딘지 말끔해진 듯한 희수의 모습에 심사가 약간

뒤틀린 것도 사실이었다. 은우는 그런 자신이 한심스러워 화가 났다. 순간순간 그녀와

함께 했을 모든 것들을 그녀가 아닌 다른 낯선 여자와 함께 한다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질투심이 일었다.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사랑은 사라지고

증오만 남았다 생각했는데도 그의 사소한 버릇 하나하나까지도 낯선 그 여자의

것이 되었다는 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너한테 물들었나보다. 나까지도 죄다 늦어졌어.


희수의 말이 이어지기가 무섭게 은우는 잔을 비웠다. 금새 술은 바닥이 났고,

희수가 한 병을 더 주문하자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랑 술 마실 기분 아냐. 일어나.

 

-앉아.


희수가 은우의 팔을 잡고 완강하게 버티자 그녀는 체념한 듯 자리에 다시 앉았다.


-결혼한 지 일 년도 안되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어.


희수의 말에 은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영화 찍니?

 

-할 말 없다. 근데, 사실이야. 나도 너 그렇게 보내고 갔을 땐 두 번 다시 뒤돌아

볼 생각 같은 거 없었어. 후회 안 할 자신 있었고.


다시 술 병이 오고 잔을 비우는 동안 은우는 입을 다문 채 희수의 말을 흘리 듯

듣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선택한 거 앞에선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어 지금껏.

애초에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도 아니었고, 투자한다 생각했어. 나한테 기대가 큰

부모님하고 결혼 문제로 언쟁하는 것조차 두려웠던 건 사실이야.

 

-고해성사하니 지금?


희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은우는 벌써 몇 잔째 술을 비우고 있었고 생각보다

취기가 빨리 올라 오는 듯 했다. 가방을 들고 은우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한 건 나야. 근데 왜 헛소릴 니가 하니?


이 년전 희수 때문에 목을 맨 자신이 역겹기까지 했다. 비굴하다 못해 안쓰럽기

까지한 희수의 태도에 은우는 좀 전의 질투심까지도 부끄럽게 느껴졌다. 몸을

제대로 가눈다 생각했는데 자꾸만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가게를 빠져 나갔다. 밤공기가 훅 하고 얼굴을 덮치자 조금은 살 것 같았다.

금새 어두워진 모양이다. 모든 것들이 암흑이었다. 어둠은 숲에 먼저 오는가 보다.

희수는 제 말을 다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건지, 표정이 내내 굳어 있었다.

차 안에 앉자 마자 은우는 눈을 감았다. 취기가 금새 다시 올랐다. 아찔한 현기증

마저 일었다. 현서는 그런 은우를 곁눈질로 힐끔 돌아보다 국도를 달리는 동안에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느새 은우는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결에 자신의 몸에 무언가 스치는 듯한 기분에 실눈을 뜨자 희수의 얼굴이

바로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희수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치자 은우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만큼 끈적끈적한 것이 기분이 나빴다.


-왜 이래?


희수를 밀쳐내고 은우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술이 다 확 깨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럴까. 치욕스런 기분에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며

차문을 열자 희수가 그녀의 팔을 움켜 잡았다.


-맞고 싶니?


눈이 붉어지며 은우가 노려보자 희수는 그제서야 잡았던 손을 풀었다. 차에서

내린 은우는 자신이 어디쯤에 와서 서 있는지 확인할 정신도 없이 앞만 보고

뛰었다. 사라져가는 은우의 뒷모습을 차 안에서 지켜보던 희수는 상기된 표정으로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서는 시동을 걸었다. 앞만 보고 뛰던 은우의 몸이 순간

균형을 잃고 바닥 위로 철퍽 쓰러지자 희수의 차는 그녀의 옆을 지나쳐 사라졌다.

왼 쪽 구두 굽이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서둘러 사라지는 그의 차를 바라보면서

은우는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두 번 다시 뒤돌아 보지 않겠다 했는데, 다시 돌아 보게 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니

욕망이었구나. 나쁜 자식.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은우는 그 자리에 엎어져 소리를 내며 울었다. 부러진 구두굽은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서러웠다. 한적한 국도변을 쌩쌩 달리는 낯선 자동차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유난히도 달이 밝은 날의 밤이었다.



그 날 밤 그녀를 태운 차가 아파트 앞 주자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 위로 쏟아진 머리칼이 유난히도 검다고 느끼며 태민은 은우를 깨우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치마 아래로 뻗은 왼쪽 다리의 상처를 보며 태민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다시 집어 넣었다.

짙은 어둠 속의 국도 도로변에 서 있던 그녀는 마치 길을 잃고 헤매던 짚시 같았다.

검은 웨이브 머리 탓이었을까. 아니라면 깊은 눈빛 탓이었을까. 신발을 손에 쥐고

맨발로 서서 히치하이크를 하는 것도 아닌 채로 어둠 속을 그저 응시하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태민은 뭔가 이끌리 듯 차를 세우고 그녀를 태웠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와 위치를 말한 것을 빼고는 오는 내내 그녀는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낯설고 젊은 그녀와 그의 사이에선 김광민의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

라는 피아노곡이 흘렀고, 그 노래가 반복적으로 세 번쯤 돌 때서야 그녀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기에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러다 그녀는 까무러치 듯 깊은 수면 속으로 가라 앉았다. 태민은

그녀의 맨발을 보다 다시 작은 어깨를 보았다. 마치 빗 줄기 속에서 길을 잃고

젖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추락할지도 모를 위험한 창공을 감당하다 겨우내 어느

집 처마 아래에 몸을 가누고 앉아 있는 여린 새를 보는 듯 했다. 오래 전에

곁을 떠난 그의 딸을 생각했을까. 아마도 그 애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녀와 또래이지

싶단 생각을 문득 했다. 그때쯤 은우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제서야 당황하며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차에서 내리던 그녀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던 낯선 사내가

뛰어와 그녀의 팔을 고쳐 잡는 동안 태민은 차 안에 앉아 그들이 사라지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힐끔 뒤를 돌아 보던 낯선 사내의 눈빛엔 경계심이 서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혹의 나이를 이겨내고 어느 새 자신이 오십 줄에 섰다는 것이 뜬금없이 서글퍼질

때가 있었다. 간혹 눈에 띄게 새치 같은 백발이 줄기를 뻗고 고개를 내밀 때면 당혹

스럽기도 했었다. 늙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것이리라. 어찌하여 이

나이에도 감히 사랑이란 녀석이 올 수 있을 것인가. 진작에 왔더라면 이 나이에

이토록 사랑 앞에서 초라하지는 않았을 터였건만. 태민은 애초에 사랑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나이 오십이 되고 보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동지였다.

속수무책 세월 앞에서 한량처럼 지난 세월을 웃으며 나누고 손을 잡고 함께

인생의 황혼기를 걸을 수 있길 바랬다. 세상에 놓고 갈, 그래서 마음 쓰일 혈연 하나

없음에 그저 남은 인생의 행로를 함께 말동무나 하며 거닐 수 있는 그런 동무가

필요했을 터였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한 여인을 만났다. 막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어디선가 외마디 비명 소리가 울렸다. 그 비명을 쫓아 필사적으로

뛰었다. 어느 골목 어귀쯤일까. 한 사내의 손에 우악스럽게도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맨발로 발버둥을 치는 여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태민은 당황했다.


-이 년이, 지 서방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알어.


사내는 이미 취해 있는 상태였고, 머리채를 잡힌 여인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이거 놔. 제발 이것 좀 놓으란 말야.


사내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머리채를 잡고 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그 여인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 갈기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태민은 서둘러 그들의 싸움에

휘말려 들고 말았다. 태민이 사내의 손에서 그 여인을 떼어 놓자 그녀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맨발로 정신없이 도망가기 시작했고, 사내가 그런 그녀를 향해 욕설을

퍼붓더니 태민의 멱살을 잡으려 하자 그는 몸을 돌려 사내에게서 벗어나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태민은 순간 사라진 그녀의 맨발이 떠올라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건만 지금 생각하면 태민은 그것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자 마음이 더 착찹해졌다. 그 골목 길을 돌아 한참을 지난 후에서야

맨발의 그녀를 만났다. 한 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흙에 묻은 맨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넋을 잃고 있던 그녀. 태민은 은우를 떠올렸다. 은우를 처음 만났던 그날의 맨발을

보면서 그녀를 떠올렸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맨발을 들여다 볼 때면 늘상 가슴 한

켠이 시리도록 아파 눈물이 쏟아지는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