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제5부-

까미유200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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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의 Serenade To Spring이란 곡이 끝날 때까지 미동도 없이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검은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그녀는 좀체 잠들려 하지 않았다.

젖은 머리에 감기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작은 담요를 가져다가

어깨에 걸쳐 주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더니 몸을 더 작게 공처럼 모았다.

그녀 역시 불혹이 나이를 넘어 그와 마찬가지로 오십에 섰을 거라는 걸 적은

머리 숱을 보며 짐작했다. 채 벗겨지다 만 손톱위의 빨간 색 매뉴큐어의 흔적이

그녀의 볼에 물든 시퍼런 멍자국과 대조적이었다. 그녀의 인생이 마치

거기에 있는 듯 태민은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뜨거운 보릿차를

끓여 가져다 주어도 그녀는 좀체 마시려 들지 않았다. 그 사이 실어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내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들어가서 눈 좀 붙여요.


대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늙어 거죽만 남은 듯한 앙상한 발가락조차 얼어

붙은 듯 미동이 없었다.


-자고 나면 좀 괜찮아질겁니다.

 

-술, 있어요?


곱슬거리는 머릿결이 출렁거렸다. 그가 짐작했던 것 보다 그녀의 얼굴에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과는 달리 눈빛만은 깊었다.

많은 시간이 그녀를 늙게 했구나 싶은 생각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초면임에도

그녀가 낯설지가 않았다.


검은 가방에 짐을 꾸리다 문득 태민은 그녀를 떠올렸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의

기억. 시퍼런 멍자국이 도장처럼 찍혀 있던 그녀의 얼굴. 주홍글씨처럼 박혀 내내

자신의 삶을 망친 것이라고 그녀가 술에 취해 흘리던 말을 기억한다.

태민은 거실을 둘러 보았다. 오래 전 그녀가 머물렀던 소파를 바라보며 그는

한숨을 내쉰다. 어찌하여 그는 아무 것도 짐작하지 못했을까. 운명과 숙명이 한꺼번에

자신에게도 닥칠 것이라는 걸 왜 짐작하지 못했을까. 왜 하필 두 여자가 동시에

자신의 삶으로 도망쳐 왔을까. 이제와서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는

고개를 흔든다. 짐을 꾸린 가방을 끌고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려 수화기를 바라볼 뿐 받지 않았다. 도피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 그는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모습으로 그것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다. 현관문이 닫히자 베란다 밖에서

바람이 거실안으로 들어왔다. 한동안 그가 없는 빈 집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빈 집에 오랫동안 전화벨 소리만 가득 울려 퍼졌다.



 

 

볕이 눈부셔서 그런지 유난히도 은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보였다. 끝내 입을 열지

않던 은우를 명선의 손에 넘기고 돌아서는 현서의 표정은 깨진 유리 파편 같았다.

당장 떠나겠다고 하는 은우를 잡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녀에게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시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직감이란 것이 사람을 이토록 처참한 기분으로

만들어 놓는 구나 싶은 생각이 다시 일었다. 입을 열지 않았지만 현서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이 남자일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동안

그는 그녀에게서 낯선 남자의 체취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에게 남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무슨 이유였을까. 그녀에게는 희수가 처음이었고

마지막은 자신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당장 그녀가 여길 나간다고

해도 갈만한 곳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명선에게 부탁했다. 전남 어딘가에 비어

있는 집이 있다고 들은 얘기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물며 현서는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은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가방이 어쩐지 자신의 몸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명선이 그녀의 어깨를 부축하고

차에 태우는 것을 보며 현서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차에 오르던 명선의 시선이 잠깐

현서와 마주쳤다. 미련 가질 거 없다고, 잘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 그의

입안이 씁쓸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건만 언제나 신기루처럼 손에 닿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그녀. 십 년이란 시간을 함께 건너왔건만, 정작 그는 그 시간을

건너지 못하고 처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아닐까. 그녀가 홀로 건너는 동안 그저

그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던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럽기까지 한 순간이었다.


-잘 가라. 다시는......돌아 오지 마라.


현서는 홀로 중얼 거리며 돌아섰다. 이제는 자신이 건너야 할 시간의 강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아까부터 말없이 창 밖만 응시하고 있는 은우를 힐끔 돌아보던 명선은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좁은 차 안 가득히 흐르는 비발디의 무상한 것들을 위하여란 곡이

기분을 더욱 가라 앉게 하는 것 같아 전원을 꺼버리자 그제서야 은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냥 둬요, 좋은데.

 

-너무 무겁지 않니, 이런 날씨에 듣기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은우는 고개를 돌려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명선은 괜시리

그녀를 힐끔 거리다 다시 전원을 켜자 낮고 무거운 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


-혼자 괜찮겠어?

 

-언제나 혼자였는걸요.


명선의 말에 은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중얼거리 듯 대답했다. 막혀 있던 도로가 다시

뚫리자 명선은 기아를 넣고 액셀을 밟았다. 차가 움직이고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차 안으로 바람이 몰려 왔다. 사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있었지만 은우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머릿 속에는 온갖 잡념들이 둥둥 떠다녀 봄볕을 느낄만한 여유조차

생기지 않았다. 자신을 옭아매는 이런 잡념들 때문에 그녀는 달아나고 싶었다. 달아나려

했던 것이 고작 자살이란 행위였지만 자신도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쯤은

알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화들짝 놀란 은우의 동공이

커지면서 차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편의점에서 나오는 낯익은 얼굴. 태민이었다.

유난히도 검은 얼굴이 어쩐지 까슬하게 느껴졌다. 순간 은우는 소리 높여 그의 이름을

부를 뻔했지만 애써 삼키며 백미러로 그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 보았다. 멀어져

작은 점처럼 찍히는 순간에 은우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하게 차 올랐다.

이렇게라도 다시 보게 되는 구나 싶은 생각에 설움이 복받쳐 올라 왔다. 명선은

그런 은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차 안으로 거칠게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

은우의 눈물을 자꾸만 걷어 채 갔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명선은 은우를 대신해 가방을 트렁크에서 내려 끌고 들어갔다.

표를 끊고 차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대합실 의자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은우의

눈이 붉게 부어 있음을 그제서야 눈치 챈 명선은 그녀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할머님께 다 말씀 드려놨으니까 아마 지내는데에는 불편한 게 없을 거야.

가서 니 짐만 정리하면 될 거구, 어려운 일 있으면 할머님께 청하구.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은우를 보자 명선의 마음 역시 좋을 리가 없었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등을 떠밀기라도 한 듯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전화도 있으니까 연락할 일 있으면 전화하고.


명선은 당장 앞에 있는 은우를 걱정하면서도 정작 현서를 걱정하고 있었다. 멀찌기서

돌아보던 현서의 얼굴이 내내 머리 속에 엿가락처럼 달라 붙어 있었다.

애초에 사랑이 아닌 걸 어쩌겠냐며 위로 아닌 말로 중얼거려도 보지만 역시 현서를

떠올리면 먹먹해졌다. 그래도 한 지붕 아래서 십 년을 함께 한 사람이니 그 정이야

말로 여느 부부보다 더 했으면 했지 적진 않을 것이다.


-은우야.


명선의 목소리에 은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본다. 세월 앞에서 장사 없다더니

명선 역시도 이제 늙어가는 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은우는 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제나 고마운 그녀였지만 사실 편안한 상대는 아니었다. 하긴 그녀에게

편안한 상대가 있기라도 했던가. 십 년이란 시간을 함께 했던 현서마저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사람에게 마음 한 켠을 내준다는 것이 어찌하여 자신에게는 그다지도

힘든 것인지. 그토록 철저하게 자신을 포장하고 틀에 갇워 두면서 살았던 그녀에게

그렇게 쉽사리 사랑이 두 번씩이나 오게 될 줄은 누가 또 알았던가.

어째서 한결같이 자신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고 있었던 현서의 마음을 받아 들이지는

못했을까. 오히려 그녀의 삶을 덤덤하게 바라본 사람은 그였음에도 선뜻 마음이

서질 못했던 것은 또 무엇일까. 죄스러움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현서에

대한 것일게다. 그런 현서를 아끼는 명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마도 자신이 눈에

가시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고마웠고, 지금도 고마워요. 그 고마움 말로 다 하지도 못하겠지만

선배가 현서, 잘 챙겨 줘요. 나 때문에 지금껏 마음만 내내 구겼을 거에요.

구겨진 그 맘, 내가 다 반듯하게 펴주고 가야 하는 건데.

 

-알아 무슨 말인지. 현서 걱정은 말고, 니 몸이나 잘 추슬러.




빈 서재실문을 열어 본다. 텅 빈 책장과 주인 잃은 책상 앞의 의자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항상 암울했던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은우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그저 정적만 매웠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아무 근심 없이

웃음을 흘리던 시간들도 분명 있었다. 깔깔 거리며 거실 바닥을 뒹굴던 은우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해가 언제였을까.


-나, 여기서 잠깐 지내도 되니?


처음 현서를 찾아왔었던 은우는 그 당시 고작 스물 둘이었다. 지금처럼 그렇게

어둡고 무겁지만은 아니었을 나이였다.


-짐이 될 수도 있겠다 하면서도 당장 찾아 나설 사람이 너 밖에는 없더라.

이 넓은 땅 덩어리에 내 몸 하나 뉠 곳이 없다 생각하니까 헛살았구나 싶었어.


그때는 그렇게 당당하기도 했었던 그녀였다. 피붙이 하나 없는 그에게 달가운

짐이었건만, 이제 그 짐을 내려 놓고 보니 그의 인생에서 그녀가 얼만큼의 무게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서재실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순간 그녀가 다시 돌아왔나 하는 생각에 가슴을 졸이며 현관문을 열었지만 그녀가

아닌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또 하나인 상처. 그녀가 그토록 외면했던 상처 하나가

되어버린 어머니였다.


-은우.


숙희는 은우의 이름을 부르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한 발 늦으셨네요. 조금 전에 떠났습니다.




현기증이 일어날 만큼 화사한 봄볕이다.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일게다.

긴 겨울을 이겨 내고 태어났던 봄꽃들이 이제 막 지기 시작했고, 그러면 앞다투어

다음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움켜 쥐고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숙희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훔쳐냈다. 땀이 날만큼 더운 날씨가 아님에도

그녀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솟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일찍 서둘 걸

그랬나보다.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안도했다. 딸자식 앞에 서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난감하긴 했었다. 수십 년을 산전수전 거쳐 온 그녀지만 모녀 사이가 아닌

여자와 여자로써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켜 쥐고 한 쪽 보도 블록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너무 늙어 버렸구나. 모든 색들이 선명해진 봄날의 자신은 보잘것 없이

늘어진 살덩어리가 세월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거짓말을 잘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뻔뻔한 사람인지.

뻔뻔해질만큼 살아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뻔뻔한 것만큼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매번 버리지 못한 것은 오로지 자신 때문이었다.

딸자식에게는 이기적인 어머니가 될 수 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런 무모한 뻔뻔함이

결국 자신에게나 은우에게 덫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일곱 번째 재혼이 실패로 끝나고 나서부터 그녀는 은우에게 연락을 끊었다.

아무리 뻔뻔해지기로 했으나 차마 그 땐 나타날 자신이 없었다.

제 입으로 딸자식 앞에서 일곱 번째 결혼이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는 말을 던질

때에 그녀의 가슴은 폭삭 내려 앉아 모든 것들이 다 무너졌었다. 무엇이 두려워

딸자식 앞에서 아프다는 엄살 한 번 피우지 못했을까.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했더라면

자신을 포장만 하지 않았더라면 은우는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을까.

단 한 번도 아내의 자격을 가지지 못하고, 남편이란 그늘에 쉼터를 만들지 못했던

그녀의 불행을 은우가 알았더라면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의 모녀 관계는 당신이 세 번째 남자와 재혼을 했을 때, 끝났어요.

막 살든, 어디가서 죽든, 내가 상관할바 아니니까, 앞으로 찾아오지 말아요.


언제나 날을 세우며 외면하던 은우를 단 한 번도 원망해본 적은 없었다. 원망할

것이 다 무엇인가. 자신의 혈관 속을 돌아 살게 하는 핏덩어리와도 같은 자식인

것을. 평생을 딸자식 가슴에 못을 박고 살았다 생각하니 그녀는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 늙어버린 나이에 사랑이라니. 지금껏 사내를 만나 정을 나누고 살아왔건만

그 나이에 사랑은 아니었다. 다 죽어버린 고목 따위에 무슨 꽃을 피우겠다고 사랑이

었겠는가. 뿌리나 썩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거늘. 그랬던 그녀에게도

정말 사랑이 왔었다. 누구에게 차마 입에 오르지 못할 사랑이란 것은 이상하게도

그녀를 뻔뻔하게 만들지 못했다. 또 다시 뻔뻔하게 딸자식 앞에 찾아가 여덟 번째

남자가 생겼노라고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거짓말쟁이 어린 양치기 같다고 느꼈다. 이제와 사랑이었다고 말한다면 딸자식이

그것을 믿어 주었을까. 그녀는 벌써 성치 못한 다리를 펴고 일어나 걸었다.

설상 사랑을 잃더라도 딸자식은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두 가지

다 놓쳐 버린 자신을 보았다. 지금 그녀는 목적지도 없는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