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토 히데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폭포소리에 흩어지며 어렴풋 들려왔다.
“여기 빠져 죽은 조센징도 물 위로 떠오르거든 구덩이에 쳐넣고 함께 묻어버려!”
“하잇! 염려 말고 돌아가십시오.”
이 자들이 지껄이는 말로 봐서는 다섯 명 모두가 사살된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언덕 밑으로 떨어져 폭포 속으로 곤두박질친 나를 당연히 죽은 자로 생각하고 시체가 떠오르게 되면 구덩이에 매장하겠다는 저자들의 생각이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행하시는 이 기적같은 일에 나는 다시 한번 감사하며 밤이 될 때까지 지켜주실 것을 기도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서서히 추위가 엄습해 왔다. 총알이 관통한 허벅지가 쑥쑥 아렸다. 속옷 일부를 찢어 허벅지를 힘주어 동여맸다.
10여 일이 지난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가 천지에 쇠말뚝을 박던 날이 1910년(경술년) 8월 22일 오전이었고 한일병합늑약이 체결된 날도 같은 날 오전이었다.
내가 살아서 그 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 곳을 경계하던 일본군인들 모두가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선포하게 된 사실을 알았는지, 아니면 쇠말뚝을 박아 조선을 죽였다고 생각한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어떻든 신나게 먹고 마시고 놀다가 일찍 잠에 골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용정으로 갈 수 없었던 나는 회령에서 살고 있는 고모집에 몸을 숨기고 총 맞은 허벅지를 치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령읍에서 장사를 하던 고모부가 어렵게 구해 온 신문을 보고 순종황제가 조칙으로 내린 경술국치(庚戌國恥)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3대통감 데라우찌는 이 늑약을 비밀리에 체결하고도 민중들의 반항이 두려워 정치단체집회를 전면 중단시키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하는 등 철저한 통제후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의 조칙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고모부는 용정에 사람을 놓아 그 곳 소식을 전해 주셨다. 마스자카 순사와 함께 백두산으로 부역을 떠난 여섯 사람은 가는 도중 마적의 습격을 받아 모두 죽고 마스자카만 겨우 살아났으나 심한 부상을 당해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었다.
놈들의 철저한 시나리오가 사전에 조작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유언비어인 것이다. 쇠말뚝사건을 지휘했던 이토 히데키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장군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훗날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민족의 정기를 잠재우기 위해 그들이 저지른 쇠말뚝사건의 주역이었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무릎 꿇고 참회했다. 그러나 고통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고모부는 그것은 주술적 행위에 불과한 미신이라며 위로했지만 당사자였던 나는 그 사건을 지워낼 수 없었다.
거기다 총에 맞은 허벅지 상처를 곧바로 치료하지 못하고 4일만에야 이곳 회령에 도착하여 민간요법으로 치료한 터여서 쉽게 아물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고모부는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일본인 양의사에게 나를 치료받게 해주셨다.
그러나 양의사는 내 상처가 너무 깊어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상처가 골수까지 파고들어 목숨을 잃게 된다고 진단했다.
나는 하늘이 내려앉는 좌절이 있었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렸다. 이것이 내가 저지른 조선에 대한 죄의 대가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다리를 자르는 대수술의 고통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 것은 내 잘못에 대한 속죄의 의미이다.
또한 풍수지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가 놈들이 백두산 천지 뿐 아니라 한반도 곳곳의 혈맥마다 박아놓았을 쇠말뚝을 세상에 고발하고, 뽑아내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다짐도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꺼져갔다. 수술 후의 후유증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고 죽기보다 참기 힘든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술독에 빠져 살았다.
나는 술독에서 허우적일 때마다 세치입을 통해 일제가 박은 쇠말뚝사건을 떠들어댔고, 사람들은 나를 미친 자로 치부하며 놀렸다.
그랬다. 나는 미치기 시작했고, 드디어 미친 자가 되었다. 하잘 것 없는 신앙심은 나의 번뇌를 이겨내지 못하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기도 역시 나를 이겨내지 못했고, 내면에 존재하는 천사와 악마는 수시로 싸워대며 으르렁거렸다.
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되고 말았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이 글을 읽게 될 후손들이 백두산 천지에 놈들이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아주기 바란다.
아니, 한반도 강산 혈과 맥마다 찾아다니며 박아놓았을 쇠말뚝을 찾아내어 뽑아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했으면, 바라는 것이다.
잠이 온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꺼풀을 들고 있을 힘이 내게서 빠져나가고 있다.
주님이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기서 죽었다.
가슴시리게 써 내린 그 사람의 글이 여기서 죽었다.
------ 1994년 중국---------
강용은 1994년 9월, 중국을 통해 장백산에 올랐다. 그리고 그 분이 오르던 장백폭포 옆 샛길을 따라 천지에 들어갔다. 누가 뽑아냈는지 그 분이 박았던 자리에 쇠말뚝은 없었다. 강용은 장엄한 백두산의 위용을 가슴으로 품으며 그 분을 느꼈다.
[ 죽어라! 조선아! ] 제4장 마지막 일기(하)
4장 마지막일기(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토 히데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폭포소리에 흩어지며 어렴풋 들려왔다.
“여기 빠져 죽은 조센징도 물 위로 떠오르거든 구덩이에 쳐넣고 함께 묻어버려!”
“하잇! 염려 말고 돌아가십시오.”
이 자들이 지껄이는 말로 봐서는 다섯 명 모두가 사살된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언덕 밑으로 떨어져 폭포 속으로 곤두박질친 나를 당연히 죽은 자로 생각하고
시체가 떠오르게 되면 구덩이에 매장하겠다는 저자들의 생각이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행하시는 이 기적같은 일에 나는 다시 한번 감사하며 밤이 될 때까지
지켜주실 것을 기도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서서히 추위가 엄습해 왔다. 총알이 관통한 허벅지가 쑥쑥 아렸다.
속옷 일부를 찢어 허벅지를 힘주어 동여맸다.
10여 일이 지난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가 천지에 쇠말뚝을 박던 날이 1910년(경술년)
8월 22일 오전이었고 한일병합늑약이 체결된 날도 같은 날 오전이었다.
내가 살아서 그 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 곳을 경계하던 일본군인들 모두가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선포하게 된 사실을 알았는지, 아니면 쇠말뚝을 박아 조선을 죽였다고
생각한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어떻든 신나게 먹고 마시고 놀다가 일찍 잠에 골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용정으로 갈 수 없었던 나는 회령에서 살고 있는 고모집에 몸을 숨기고 총 맞은 허벅지를 치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령읍에서 장사를 하던 고모부가 어렵게 구해 온 신문을 보고 순종황제가 조칙으로
내린 경술국치(庚戌國恥)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3대통감 데라우찌는 이 늑약을 비밀리에 체결하고도
민중들의 반항이 두려워 정치단체집회를 전면 중단시키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하는 등
철저한 통제후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의 조칙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고모부는 용정에 사람을 놓아 그 곳 소식을 전해 주셨다.
마스자카 순사와 함께 백두산으로 부역을 떠난 여섯 사람은 가는 도중 마적의 습격을 받아
모두 죽고 마스자카만 겨우 살아났으나 심한 부상을 당해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었다.
놈들의 철저한 시나리오가 사전에 조작되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유언비어인 것이다.
쇠말뚝사건을 지휘했던 이토 히데키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장군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훗날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민족의 정기를 잠재우기 위해 그들이 저지른 쇠말뚝사건의 주역이었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무릎 꿇고 참회했다. 그러나 고통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다.
고모부는 그것은 주술적 행위에 불과한 미신이라며 위로했지만 당사자였던 나는 그 사건을
지워낼 수 없었다.
거기다 총에 맞은 허벅지 상처를 곧바로 치료하지 못하고 4일만에야 이곳
회령에 도착하여 민간요법으로 치료한 터여서 쉽게 아물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고모부는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일본인 양의사에게 나를 치료받게 해주셨다.
그러나 양의사는 내 상처가 너무 깊어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상처가 골수까지 파고들어
목숨을 잃게 된다고 진단했다.
나는 하늘이 내려앉는 좌절이 있었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렸다.
이것이 내가 저지른 조선에 대한 죄의 대가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다리를 자르는 대수술의 고통을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 것은 내 잘못에 대한 속죄의 의미이다.
또한 풍수지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내가 놈들이 백두산 천지 뿐 아니라 한반도 곳곳의
혈맥마다 박아놓았을 쇠말뚝을 세상에 고발하고, 뽑아내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다짐도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꺼져갔다. 수술 후의 후유증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고 죽기보다 참기 힘든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술독에 빠져 살았다.
나는 술독에서 허우적일 때마다 세치입을 통해 일제가 박은 쇠말뚝사건을 떠들어댔고,
사람들은 나를 미친 자로 치부하며 놀렸다.
그랬다. 나는 미치기 시작했고, 드디어 미친 자가 되었다. 하잘 것 없는 신앙심은 나의
번뇌를 이겨내지 못하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기도 역시 나를 이겨내지 못했고, 내면에 존재하는 천사와 악마는 수시로 싸워대며 으르렁거렸다.
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가 되고 말았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이 글을
읽게 될 후손들이 백두산 천지에 놈들이 박아놓은 쇠말뚝을 뽑아주기 바란다.
아니, 한반도 강산 혈과 맥마다 찾아다니며 박아놓았을 쇠말뚝을 찾아내어 뽑아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했으면, 바라는 것이다.
잠이 온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꺼풀을 들고 있을 힘이 내게서 빠져나가고 있다.
주님이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기서 죽었다.
가슴시리게 써 내린 그 사람의 글이 여기서 죽었다.
------ 1994년 중국---------
강용은 1994년 9월, 중국을 통해 장백산에 올랐다. 그리고 그 분이 오르던 장백폭포 옆
샛길을 따라 천지에 들어갔다. 누가 뽑아냈는지 그 분이 박았던 자리에 쇠말뚝은 없었다.
강용은 장엄한 백두산의 위용을 가슴으로 품으며 그 분을 느꼈다.
‘할아버지― 편히 잠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