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55화

피바다2005.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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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리의 기억 4

 

  능리는 식사를 담당하는 시녀 두 명을 대동하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채의 거처에 도착했다. 그녀는 오는 내내  종종걸음이었다. 문이 열리고, 일찍 일어난 채가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등진 채 밝게 인사를 하자 능리는 그제서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하룻밤 사이 얌전히 있어주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안도한 것이다. 능리는 친구로써 자신을 완전히 열어보이는 채와는 달리 여전히 일말의 걱정과 의심으로 들어찬 자신의 가식에 미안했지만 마음이 놓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잘 잤어요? 햇살이 유난히 맑은 날이죠?"

 채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하지만 능리는 그녀의 명랑한 인사에도 불구하고 하급 시녀들을 의식해 대꾸하지 않았다. 채는 상관없다는 듯 몸을 돌려 계속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고, 시녀들은 능리의 절도있는 태도에 기가 죽어 서둘러 아침 상을 차려내고는 떠났다.

  채가 즐거운 표정으로 내다보고 있는 저 큰 유리창이 능리에게는 밤새 근심거리였다. 천제의 허락을 받아 여태 단단하게  창을 봉쇄하고 있던 폐쇄장치를 떼어낸 것이 바로 어제였다. 채가 서서히 그곳의 생활에 마음을 붙이는 것 같아보였고, 능리 자신이 꽉막힌 방의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천제에게 건의한 것이 먹혀들었던 것이지만, 혹여나 밤새 채의 마음이 변하여 무슨 일이 벌어지지나 않았을까 능리는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능리를 참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채가 준비된 아침 식사 테이블로 걸어오며 말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햇살을 받아 싱싱한 물고기의 은빛 비늘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린 계집아이들의 실수가 많아지죠. 황궁에서 실수는 용납될 수 없어요. 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길입니다."

 능리는 두 개의 빈 잔에 물을 따르며 비로소 웃으며 대답했다.

  제황성 천제궁의 대정원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서 봄은 연한 새순의 싱그러운 빛깔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멀리서 새들은 쌍을 지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 간드러지는 사랑의 음색에 두 여인은 왠지모르게 설레었다. 봄은 기어이 두 여자에게도 손짓을 하는 모양이었다.

  채는 수라왕의 조각상이 완성된 이후, 더 이상 조각을 하지 않았다. 천제와의 불미스러운 사건에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조각을 하려는 의욕이 사라졌는지, 아니면 수라왕의 조각품이 그녀의 최종 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수라왕의 조각상은 언제나 채의 곁에서 당당히 버티어 서 있었다.

  처음 조각상에 위화감을 느끼던 능리도 채에게서 하나둘 과거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동안 더이상의 두려움없이 오히려 수라왕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거나 창밖을 함께 내다보며 나른한 봄의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능리는 채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녀는 약간은 초조해보이고 약간은 불안해보였다. 능리는 혹시나 채가 이제와서 달아날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다시금 조바심이 나기 시작해서 채를 살피는데 민감해졌다.

  달이 떠 오르자, 불안해보이던 채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에게 예민해져있던 능리는 저도 모르게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까지 넘어뜨렸지만 채는 그녀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창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채는 창을 뚫고 나갈 듯 밀착하여 창밖의 정경에 몰두했고 능리는 어찌해야할지 몰라 주춤 서 있는데 그런 능리를 채는 손짓하여 불렀다.

  능리는 우선 그녀가 부르는대로 창가로 다가가 곁에 나란히 섰다. 하지만 채가 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채의 가늘고 하얀 손가락이 창의 어느 점을 톡톡 쳤지만, 여전히 능리는 그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채가 급히 몸을 돌렸다. 다시 한 번 능리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지만 채는 그저 방안의 불을 끌 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능리는 그녀를 의심했다는 미안함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 저걸 봐요."

 채는 다시 손가락으로 어느 한 점을 지적했고 그 순간 능리의 눈에 작은 흰 점이 들어왔다. 동편 별궁 뒷쪽에서 시작된 작은 흰 점은 달이 조금더 높이 떠오르자 순식간에 두 배, 세 배로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별궁의 뒷편은 곧 그 하얀 얼룩이 발하는 흰 빛으로 환상적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 히비어에요!"

  그와 동시에 채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능리는 잠시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어 채의 표정을 살폈다. 달빛은 그녀의 얼굴에도 내려앉아 그 투명한 얼굴에서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히비어처럼 그녀의 얼굴도 아름답게 빛났다. 채의 두 눈은 이미 히비어 꽃밭 속에 달려들어가 있었다. 달빛을 받아 한껏 토해내기 시작한 히비어 속에서 채의 마음은 뛰어놀고 있는 듯했다. 수라왕의 조각상을 만들었을때부터 채는 가식을 하나둘 벗어던지고 능리에게 솔직하게 감정을 전달했다. 그런 채는 티 하나없는 소녀같았다.

  다음 날, 능리는 채를 만나러 오는 길에 품 안 가득 히비어의 꽃다발을 꺾어왔다. 채는 능리가 건넨 꽃다발 속에 얼굴을 묻은 채 환하게 웃었다. 히비어와 그녀는 하나인 듯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숨막히게 아름다워보였다.

  채는 히비어를 병에 꽂기 위해 다듬으면서 간만에 다시 옛 이야기로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녀의 미소는 안정되어 보였고 행복해보였다. 

  " 이곳에서 다시 히비어를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히비어는 귀한 꽃이거든요. 아무곳에서나 자랄 수 없는 까다로운 꽃이기도 하죠."

 " 까다로와요?"

 채는 능리의 되물음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히비어는 달빛을 마시며 자라는 꽃, 달빛이 강할 수록 더욱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밤의 꽃이에요. 그래서 세 개의 만월이 다 뜰 때 장관을 이룬답니다. 즉, 달빛이 온전히 드는 땅이 아니면 피어날 수 없는 꽃이에요."

 그녀는 어깨 너머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연신 귀 뒤로 넘겨가며 꽃을 손질하고 있었다.

 " 막혀있던 창을 열게 된 그 날 밤, 창을 통해 히비어를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이런 곳에서 히비어를 다시 보다니!"

  그녀는 들뜬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채는 문득 손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뒤편에 놓인 수라왕의 조각상을 뒤돌아보더니 미소를 거두었다.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 눈부신 히비어를 다시 보게 될 줄...몰랐죠....정말이지..."

  마침내 히비어의 꽃다발이 가지런히 화병에 꽂혔다. 채는 다시 코를 꽃송이에 묻고 눈을 감은 채 그 은근하고 달콤한 히비어의 향을 한참 음미했다.

  " 내가 태어나서 처음 받았던 선물이 무엇인 줄 아세요?"

 채는 꽃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 눈만 치켜들어 능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능리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말이 없자, 채는 고개를 들며 장난스런 소녀처럼 빙긋 웃었다. 그녀는 괜한 질문으로 능리를 괴롭히지 싶지 않았다.

  " 끝없이 펼쳐져 있던 히비어의 꽃밭이었어요. 아직도...그 곳은 그대로 일까요? 보름달 아래에서 순백으로 빛나며 바람결에 춤을 추고 있을까요? 오늘 밤도?"

  채는 문득 수라계의 향수에 젖는 모양인지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 주군께서......제게 선물하신 꽃밭이었답니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유일한 시간이었어요. 세 개의 만월 아래, 새하얗게 빛으로 태어나 어둠 속에서 춤을 추던 그 히비어의 정원에서.......그 분은 제게 다시 한 번 무릎을 꿇었죠."

  능리는 관심을 가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채의 입가에는 슬픈 느낌의 옅은 미소가 서렸다.

 " 그 꿈만같은 아름다운 정원에서, 그 분이 제게 청혼을 하셨을 때.....내게 귀왕이 되어달라고 하셨을때........나는 그 때만큼은 정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채의 눈가에서 또르르 눈물 방울이 흘러나렸다. 웃는 얼굴에서 소리없이 눈물만 흘러내리고 있었다. 능리는 그런 채를 보며 자기 가슴마저 저려옴을 느꼈다. 하지만 낮은 한숨을 토할 뿐, 능리는 그녀의 눈물조차 닦아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채는 너무나 순결해보였다.

  " 그런데.....왜 떠나왔어요? 그렇게 행복했으면서, 그 손을 잡고 영원히 행복할 노릇이지 왜 당신은 여기에 있는건가요? 아름다운 히비어의 꽃밭과 당신의 주군을 둔 채 왜 여기에 있는거에요?"

  아침 햇살은 점점더 봄기운을 깨워내며 따사롭게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둘을 비추고 있었다. 능리는 햇살을 등진 채 서서 그늘진 채의 실루엣을 마주한 채 물었다. 그리고 한참이나 이어지는 그녀의 침묵을 용납해주고 있었다.

 " 내가.....어떻게요?"

 채의 힘없는 목소리가 겨우 침묵을 뚫고 나왔다.

 " 내 주제에......어떻게 귀왕이 되나요?"

 그녀는 나즈막하게 속삭였다.

  " 주군이 내민 손을 내가.......나 따위가 어떻게 잡을 수 있단 말이에요? 나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던 거에요. 내가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거였는데...그제서야 그걸 알아버렸어요."

 능리는 한 걸음 걸어가 눈물이 마르지 않은 채를 조용히 안아주었다.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에 채의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 그 때, 나는 벌써 죄를 짓고 있었던거에요. 고귀하고 절대이신 주군이...나따위에게..나처럼 하찮은 것에게 마음을 주시면....안되는 건데....그게 내 죄였던 겁니다.."

  하지만 능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절대존재라는 수라왕이 왜 이 약한 공주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녀는 알 것 같았다. 채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 영혼은 맑았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빛나는 영혼을 가진 공주였던 것이다. 그녀의 영혼에 사로잡히지 않을 남자가 있다는 그것이 더 이상할 터였다.

  채는 주군을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수라왕의 명으로 그녀를 지키고 있던 최고의 장수인 무혜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끝까지 그녀를 지켜내기 위해서. 그것이 수라왕의 명령이었기에 무혜는 그녀의 결심에 동조했다. 그리고 둘은 뿔을 잘랐다. 채는 수라왕을 기만한 죄, 무혜는 끝끝내 왕의 곁에서 충성을 할 수 없는 죄의 대가로 뿔을 잘랐던 것이다. 둘은 그렇게 천계로 왔다.

 능리는 채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생각했다.

 ' 그래서...수라왕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당신이 떠나주었기때문에?'   

   
  " 히비어...히비어 꽃이라.."

  천제는 집무실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능리는 그의 뒤에서 고개를 숙인 채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각상과 채의 자살미수 사건 후, 천제는 서편 별실로의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냉정을 요구하는 이성의 소리와는 반대로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그 독한 여자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그래서 천제는 능리에게 매일 채의 동태를 보고하도록했고,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하게  일러주는 것을 좋아했다. 능리의 보고가 길어질 수록 천제는 더욱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 날도 어김없이 능리는 보고를 마쳤는데, 천제는 히비어와 관련한 채의 태도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채의 등장 이후, 천제는 황비나 첩들의 거처에 발길을 옮긴 적이 없었다. 채에 대한 소문은 이미 황궁 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질투가 심한 제 2황비는 기회만 닿는다면 채를 잡아먹을 듯 벼르고 있었다.

  " 능리........."

 천제는 창에서 돌아서지 않은 채 그녀를 불렀다.

  " 그녀가 원한다면, 히비어꽃밭으로 데려가시게."

  " 전하!"

  능리는 천제의 명에 소스라쳐 자기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 전..전하, 그 곳은...."

  그녀는 할 말이 있었지만,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한 말을 간신히 눌러 멈추었다. 말한 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생각없이 명을 내릴 천제가 아님을 그녀는 잘 알았다.

  "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하도록 하옵지요."

 비류천이 돌아섰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능리가 아니라면 그런 표정은 평소에 그에게서 보기 힘든 것이었다.

  "  능리는 언제나 그랬지. 말하지 않아도 늘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었어."

  " 송구하옵니다. 전하."

  " 한 번씩 그런 생각을 한다네. 내가 아니었더라면 좋은 어머니가 되었을것을..."

  능리는 천제의 말에 너그러운 미소로 답했다.

  " 전하께서 성군이 되셨음이 제겐 하늘에서 내린 가장 큰 복이옵고 기쁨이옵니다. 제가 제 배로 낳아 수십명의 아이들을 키워낸다한들, 그만한 복이 될런지요"

  능리는 천제의 집무실에서 나와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기다 도중에 발길을 멈추었다. 그녀의 걸음은 이제 천제궁 동편 별궁인 '인덕궁(仁德宮)'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히비어 꽃밭이 펼쳐진 그곳이었다.

  주인도 없이 오랜 시간을 보내온 인덕궁의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하지만 궁 밖까지 히비어의 달콤한 향이 담을 타고 넘어와 능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200년의 시간을 침묵하고 있던 인덕궁의 문이 열린다고 생각하니 능리는 알 수없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이 문이 열림으로 제황성은 또 얼마나 시끄러워 질것인가 걱정도 되었다.

 천제가 많이도 아끼던 제 1황비의 죽음 이후, 새 주인이 들지 못한채 침묵하고 있던 인덕궁.

 첫번째 정비인 제 1황비는 어질고 온화했으나 본성은 강인한 여성이었다. 선대 천제의 평범한 아들이었던 비류와 정략적으로 결혼했으나, 그의 가슴 속에서 뛰고 있던 야심을 이해하고 결국 그가 천제의 보위에 오르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제 1황비였다. 비류천이 야심을 위해 형제들까지 죽이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나도 말없이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준 것이 그녀였다. 천제는 그런 황비를 존중했고, 보위에 오른 후 그녀가 제 1황자인 후강을 낳자 비류천은 그녀를 위해 인덕궁을 지었다. 하지만, 제 1황비가 그렇게나 좋아하던 히비어가 채 자리잡기도 전에 그녀는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천제는 깊은 상심에 빠진 채, 자신의 마음과 함께 인덕궁의 문을 굳게 잠그었다. 하지만, 히비어가 주인없는 궁안에서 해마다 더더욱 아름답게 피고 있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이제 문을 닫았던 천제가 스스로 문을 열라고 명했다. 이계의 여자, 채를 위해서.

  능리는 인덕궁의 정문 위에 솟아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그 날의 달은 왠지 피빛을 띄는 것 같았다. 채의 붉은 눈동자와 닮은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