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 들어 오기까지 나는 숱한 일들을 겪어야만 했다. 군대에서 막 제대하고 맞은 아버지의 죽음. 평생 농사일만 지으신 내세울것 없는 아버지였지만 난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지금것 살아왔다,
비록 문제아 였지만 아버진 나에게 늘 너그러우셨다. 그러했기에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남겨진 홀 어머니와 셋이나 되는 어린 여동생, 졸지에 나는 아버님이 지어 오신 많고 많은 농사일과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가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내나이 24살,젊은 나이에 하고 싶은거 많고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겐 엄청난 고통과 부담으로 다가 왔다. 1년 내내 힘들게 농사일을 지어 봐도 손에 쥐어지는건,
각종 농사일에 갖다 쓴 융자금 영수증과 세금 고지서.. 나에게 더이상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거 같았다.
답답했다. 매일밤 ,술을 밥대신 대신한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런 나의 현실을 벗어 나고자 도피처를 선택 해야만 했다.
눈을 떠도 일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떠나고 싶었다 어디론가.
그렇게 선택한 곳이 지역소식지에 조그맣게 광고가 실린 직업 전문학교였다.
학교는 무슨, 그냥 잠시 놀다가 오지 머,
난, 그곳을 그저 지금 나에게 닥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도피처로 생각 했을뿐,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현실의 걸림돌을 피해 도피처로 생각한 그곳이 내게 디딤돌이었는지
안것은 입학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였다.
학교에 입학한 나의 생활을 우리에서 벗어난 망아지였다.
첫날부터 결석에 기숙사에서의 음주. 나이 많은 예비역이 정신 못 차린다며 많은 수근거림과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부담에서 벗어나 홀가분 기분에 난 취해 있었다. 나의 무절제한 생활은 한동안 계속되어 갔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잠시뿐, 나의 도피처에서의 방탕한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내 인생의 디딤돌이라 할수 있는 선생님을 만난후부터 끝이 없어 보이던
나의 방탕함은 종착역에 다다를수 있었다.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나 자신에게 한마디 꾸지럼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보아 주신 선생님, 퇴학시키라며 교무회의도중 나이어린 학생과선생님의 꾸지럼에도 나를 지켜 주신 선생님. 그 선생님의 관심으로 인해 나는 학교 생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회갑을 훌쩍 넘기신 선생님과의 1대1첫 만남은 입학 3개월만에 면담형식으로 처음 이루어 졌다. 이것 저것 수많은 선생님의 이야기들.... 선생님도 나같이 비슷한 처지의 문제아 였고 많은 문제를 일으켜 아버지 걱정 많이 시켜 드렸다고, 정신차려 제대로 공부해서 선생님이 되어보니 그렇게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축하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하신 말씀들.
그러면서" 누군가 자기를 지켜 봐주고 특히 기뻐 해주실 부모님이 계실때 잘하라고"
선생님 당신은 아무도 계시지 않지만 나에겐 어머니랑 형제가 있지 않냐며 하신 말씀. 나이도 있으니 이제 모든일에 책임감과 나를 지켜보는 주변분들을 한번더 생각하며
생활하시라는 말씀. 회갑을 훌쩍 넘기신 선생님이 당신 아버님 이야기를 할때 흘리는 눈물을 보고선 나 역시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아마 아버지 돌아 가신후로 제일 많이 울었던 거 같다. 선생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와 닿아 돌아가신 아버지와 집에 계신 어머니께 지금까지
받기만 하고 단 한번도 효도라는걸 해보지 못한거 같은 자책감에 흘렸던 눈물이었을 것이다.
선생님과의 면담후,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난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교일이나 학교밖 모든 생활에 의욕과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기숙사 자치 위원으로 할동하면서 기숙사내 음주근절에 앞장섰고, 일과후에 자율적인 공부시간 만들기에 앞장섰다. 같이 놀던 선배들이나 후배들이 달라진 나의 행동에 위협아닌
위협을 해왔지만 나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그렇게 생활한지 6 개월남짓, 난 자격증을 5개나 취득하게 되어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학교장 추천으로 입사 하게 되었다. 그 예전의 나로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현재 다니고 있는 우리 부서에 직업 전문학교 출신은 나뿐이 없다. 아니 흔히 말하는 고졸 출신의 학력은 나뿐이 없다. 하지만 난 내 밑에 당당히 나보다 좋은 학력의 직원들을 거느리며 일을하고 있다.
지금은 매달 어머님과 동생들에게 얼마간의 용돈도 보내드리고 있다. 달라진 나의 모습에 집에 갈때마다 어머닌 아버지가 보셧으면 좋았을 거라며 매번 눈물을 보이신다.
아침에 출근하는 내 모습을 볼때마다 이게 내 모습인가 하며 어색해 보일때도 있지만 난 늦게나마 얻은 새로운 나의 인생을 즐기면서 모든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생활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 할것이다.
인생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주어진 상황속에서 만들어 가는 거라 생각합니다.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어....
지금 생각하면 그건 분명한 걸림돌 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 누구나가 하기에 따라 때론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나 한테는 그러했다.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에 들어 오기까지 나는 숱한 일들을 겪어야만 했다.
군대에서 막 제대하고 맞은 아버지의 죽음.
평생 농사일만 지으신 내세울것 없는 아버지였지만 난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며 지금것 살아왔다,
비록 문제아 였지만 아버진 나에게 늘 너그러우셨다.
그러했기에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과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남겨진 홀 어머니와 셋이나 되는 어린 여동생,
졸지에 나는 아버님이 지어 오신 많고 많은 농사일과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가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내나이 24살,젊은 나이에 하고 싶은거 많고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있었던 나에겐 엄청난 고통과 부담으로 다가 왔다.
1년 내내 힘들게 농사일을 지어 봐도 손에 쥐어지는건,
각종 농사일에 갖다 쓴 융자금 영수증과 세금 고지서..
나에게 더이상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거 같았다.
답답했다. 매일밤 ,술을 밥대신 대신한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런 나의 현실을 벗어 나고자 도피처를 선택 해야만 했다.
눈을 떠도 일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떠나고 싶었다 어디론가.
그렇게 선택한 곳이 지역소식지에 조그맣게 광고가 실린 직업 전문학교였다.
학교는 무슨, 그냥 잠시 놀다가 오지 머,
난, 그곳을 그저 지금 나에게 닥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도피처로 생각 했을뿐,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현실의 걸림돌을 피해 도피처로 생각한 그곳이 내게 디딤돌이었는지
안것은 입학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였다.
학교에 입학한 나의 생활을 우리에서 벗어난 망아지였다.
첫날부터 결석에 기숙사에서의 음주.
나이 많은 예비역이 정신 못 차린다며 많은 수근거림과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나를 짓눌렀던 부담에서 벗어나 홀가분 기분에 난 취해 있었다.
나의 무절제한 생활은 한동안 계속되어 갔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잠시뿐,
나의 도피처에서의 방탕한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과의 운명적인 만남,
내 인생의 디딤돌이라 할수 있는 선생님을 만난후부터 끝이 없어 보이던
나의 방탕함은 종착역에 다다를수 있었다.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나 자신에게 한마디 꾸지럼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보아 주신 선생님,
퇴학시키라며 교무회의도중 나이어린 학생과선생님의 꾸지럼에도 나를 지켜 주신 선생님.
그 선생님의 관심으로 인해 나는 학교 생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회갑을 훌쩍 넘기신 선생님과의 1대1첫 만남은 입학 3개월만에 면담형식으로 처음 이루어 졌다.
이것 저것 수많은 선생님의 이야기들....
선생님도 나같이 비슷한 처지의 문제아 였고 많은 문제를 일으켜 아버지
걱정 많이 시켜 드렸다고, 정신차려 제대로 공부해서 선생님이 되어보니
그렇게 고생하시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축하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하신 말씀들.
그러면서" 누군가 자기를 지켜 봐주고 특히 기뻐 해주실 부모님이 계실때 잘하라고"
선생님 당신은 아무도 계시지 않지만 나에겐 어머니랑 형제가 있지 않냐며 하신 말씀.
나이도 있으니 이제 모든일에 책임감과 나를 지켜보는 주변분들을 한번더 생각하며
생활하시라는 말씀.
회갑을 훌쩍 넘기신 선생님이 당신 아버님 이야기를 할때 흘리는 눈물을
보고선 나 역시 눈물을 흘릴수 밖에 없었다.
아마 아버지 돌아 가신후로 제일 많이 울었던 거 같다.
선생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에 와 닿아 돌아가신 아버지와 집에 계신 어머니께 지금까지
받기만 하고 단 한번도 효도라는걸 해보지 못한거 같은 자책감에 흘렸던 눈물이었을 것이다.
선생님과의 면담후,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난 달라지기 시작했다.
학교일이나 학교밖 모든 생활에 의욕과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기숙사 자치 위원으로 할동하면서 기숙사내 음주근절에 앞장섰고,
일과후에 자율적인 공부시간 만들기에 앞장섰다.
같이 놀던 선배들이나 후배들이 달라진 나의 행동에 위협아닌
위협을 해왔지만 나의 의지를 꺽지는 못했다.
그렇게 생활한지 6 개월남짓, 난 자격증을 5개나 취득하게 되어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학교장 추천으로 입사 하게 되었다.
그 예전의 나로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현재 다니고 있는 우리 부서에 직업 전문학교 출신은 나뿐이 없다.
아니 흔히 말하는 고졸 출신의 학력은 나뿐이 없다.
하지만 난 내 밑에 당당히 나보다 좋은 학력의 직원들을 거느리며 일을하고 있다.
지금은 매달 어머님과 동생들에게 얼마간의 용돈도 보내드리고 있다.
달라진 나의 모습에 집에 갈때마다 어머닌 아버지가 보셧으면 좋았을 거라며 매번 눈물을 보이신다.
아침에 출근하는 내 모습을 볼때마다 이게 내 모습인가 하며
어색해 보일때도 있지만 난 늦게나마 얻은 새로운 나의 인생을 즐기면서
모든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생활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 할것이다.
인생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주어진 상황속에서 만들어 가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게 걸림돌이던지 디딤돌 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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