떴다!!! 그녀 {#3.기억상실}

이야기 상자200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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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아니라는 최면을 아무리 걸어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이라 그녀도 쉽게 할 줄 알았는데 로비에 들어서는 발이 덜덜 떨려 사람들이 눈치 챌까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봐요. 아가씨 거기 서요."
 "이봐요. 거기 머리 파마한 아가씨 서라니까요."
 요나는 '파마한 아가씨'라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어 섰고, 보안요원들의 소리에 바쁘게 출근하느라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쓸 정신이 없는 다른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춰 요나를 한번 씩 보고 지나갔다.
 "저요. 왜요?"
 요나는 손가락을 자신에게 돌렸다.
 "아가씨. 처음 보는 사람인데, 우리 회사 직원 아니죠."
 폭탄 머리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캐주얼 스타일이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배경을 깔아주고 있었다.
 "저 여기 직원 맞아요."
 하지만 그들은 도통 믿을 생각이 없는지 그녀를 들여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확인해 보세요. 오늘부터 디자인 실에 출근하기로 한 신입이라니까요."
 요나가 무슨 말을 해도 그들은 요지부동인 장승처럼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이런 꼴을 당하자 그녀를 대문 앞에 세워 놓고 그냥 가버린 유신이 제일 원망스러웠다.
 "무슨 일입니까?"
 반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이 아가씨가 신입사원이라면서 카드도 없이 들어가려고 해서 말입니다."
 "너 언제 한국에 들어왔니? 그리고 머리가 그게 뭐냐. 넌 줄 몰라봤잖아."
 요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솜사탕 같은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넣고 긁적거렸다.
 "잘 지내셨어요. 그제 들어왔어요. 못 찾아봬서 죄송해요. 일이 좀 생겨서요."
 하지만 요나를 처다 보는 이모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차가웠다. 이모는 어릴 적부터 가족들의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아웃사이더 같은 존재였다. 잘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이모는 그런 요나의 노력을 바라볼 시도도 하지 않았고, 요나도 포기해 버린 지 오래였다.
 "들여보내세요. 네 할머니는 널 회사에 들이면서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하지 않는 구나. 오늘부터 근무하기로 한 사원 맞아요. 카드는 오늘 발급되니까 꼭 소지하고 다녀."
 "네."
 이모가 찬바람은 일으키며 지나가자 요나를 무시했던 직원들은 그녀가 이사장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고 쩔쩔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나는 그들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일을 너무 열심히 한다고 욕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녀가 낙하산이라는 소문이 벌써 퍼졌는지 팀장님은 요나에 너무 잘해주어서 부담이 될 정도였고, 같이 일하게될 직원들은 너무 예의바르게 행동하면서 친해지려 고를 하지 않아 좀처럼 마음 편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이 워낙 살 갚게 대해주지가 않아 친해질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고, 자신을 불편해 하는 걸 알면서도 식사시간에 따라 다니는 것도 불편해 점심시간이 별로 반갑지 만은 않았다.
 어쩌다 우연이라도 유신을 만나게 되면 한번쯤 같이 식사하자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집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오늘은 속이 안 좋다고 말할까.
 "나요나씨. 전화요."
 "네. 전화 바꿨습니다."
 -나다. 오늘은 나하고 점심식사 하자꾸나. 내 사무실로 올라와라.
 "네."
 오늘처럼 이모의 전화가 반가운 적이 없었다.
 "저 먼저 식사하러 가보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요나가 일어나자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그 소리를 무시하기로 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녀가 낙하산을 탄 이유말고 다른 이유로 요나를 좋게 보지 않는 것 같았지만 곁을 주지 않는 그들에게 거짓 웃음을 띄우면서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회사에서 그녀가 이사장의 조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니 당당하게 살자는 게 요나의 인생의 좌우명이었다.
 "저 이사님이... 넌."
 "안녕하십니까. 이사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나에 깍듯이 인사를 하는 사람은 그녀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악연 중에 한사람이었다.
 미진은 예전 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있었고, 한층 더 높은 자신감으로 충만 되어 있었다.
 요나를 완전히 처음 보는 방문객으로 취급하는 미진의 당찬 모습에 요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이모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왜 여기에 있냐고, 사람이 그렇게 뻔뻔할 수 있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들추어내고 싶지도 않았고, 미진과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게 기분이 몹시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솔직한 감정이었다.
 "이모 저 왔어요. 손님이 또 오시나 봐요."
 세명 분의 자리가 셋팅이 되어 있었다.
 "음. 김사장이 올 꺼다. 앉아서 기다리자."
 김사장이라면 유신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신을 기다리라면 얼마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 줄 수 있는 요나였다. 하지만 미진과의 만남은 항상 웃음을 잃지 않던 요나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하지만 유신의 태도는 좀 불만스러웠다. 아무리 요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지만 그는 그녀에게는 예의는커녕 쌀쌀맞게 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상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불만의 핵심이었다.
 "반가워요."
 역시나 요나에게 돌아오는 그의 눈길은 짜증이 조금 섞인 냉대였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다고 저렇게 쌀쌀맞게 대하는 거야. 짐 좀 부딪친 거 하고 알몸 본거-화가 날 만도 하군-때문이라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느님이 그에게 뭔가 빠트린 게 아닌가 싶었다.
 "괜찮아요. 바쁜 사람보고 오라고 한 내가 오히려 미안하지요. 우리 요나는 알고 있겠죠. 이사님이 소개도 김사장에게 소개도 없이 요나를 회사에 들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네."
 두 사람이 사업상 오가는 대화는 마치 이 자리에 요나가 없는 것 같이 둘 만의 대화였다.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이사님."
 "그래 손비서 수고했어. 식사하고 와요."
 "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손비서는 언제 바도 참 참한 아가씨야. 그렇지 않나요. 김사장."
 "네. 사내에서도 평판이 좋더군요."
  요나는 미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로 험담을 하고 싶지 않아 꾹 참고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억지로 넣는 다고 해서 술술 넘어갈 식사가 아니었다.
 
 "무슨 소리야. 나하고 헤어지겠다니? 우리 약혼식이 내일인 거 몰라."
 "알아. 하지만 너하고 약혼하고 싶지 않아."
 차갑게 변해버린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요나는 답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이유가 뭐야. 왜 나하고 약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거야. 약혼식을 서둘렀던 건너잖아."
 그런 그녀의 말에 상연의 얼굴은 후회로 가득 찼고, 그런 그의 표정을 보는 그녀의 가슴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때는 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였어. 하지만 지금은 너의 본 모습을 알게 된 이상 너하고 약혼을 할 수가 없다."
 상연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 본모습이라니?"
 "난 내가 정말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넌 알고 보니 버릇없는 재벌 집 딸에 불가해. 어떻게 도움을 청하는 미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이야기의 내용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들의 파혼 이야기에 미진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그녀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 모양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미진이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거며, 내가 미진이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요나의 표정을 보면 상연은 가면을 쓰고 있는 요나를 보는 것처럼 더러운 것을 보는 경멸의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돈을 빌려주기 싫으면 싫다고 말 할 것이지 왜 사체업자를 소개 시켰어. 그러고도 네가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돈이라니? 사채업자라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미진과 한 공간에 같이 있었던 적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고, 미진과의 만남에 돈과 사채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그걸 잊어버릴 정도로 요나의 머리는 멍청하지 않았다.
 "모른 척 해도 소용없어. 친구한테 그런 짓을 하는 네가 내 아내가 되는 참을 수가 없어.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는 그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하지 않는 일로 그가 오해하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요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러지마.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라. 네가 무슨 소리를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난 그런 적 없어."
 "거짓말하지마."
 상연은 이미 그녀가 아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벌써부터 누군가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았지만 상연처럼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라면 부모님처럼 서로를 의지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약혼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요나였었다.
 할머니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까? 결혼이나 약혼은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아무리 좋아하는 사이더라도 어른들이 반대하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무시 한 것이 이렇게 큰 상처가 되어 날아올지 몰랐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나온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미진이 한테 다 들었어. 그런데도 시치미를 뗄 참이야."
 "정말 난 모르는 일이야. 미진이가 너에게 거짓말을 한 거야."
 상연은 그녀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이제는 나한테까지 거짓말이야. 차라리 진실을 말했다면 이런 배신감을 들지 않았을 거야. 구차하게 이러지 마."
 하지만 요나는 구차해 졌다. 아직은 요나의 편인 상연의 부모님과 할머니에게 매달려 상연을 다시 찾으려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방법은 상연을 더욱더 멀어지게 만드는 꼴이 되었고, 나중에는 미진과 상연이 약혼식을 한다는 소문까지 들어야만 했다.
 차라리 다른 친구가 그를 빼앗아 갔다면 그녀의 기분은 좀더 나았을 까. 미진하고는 별로 친하지도 않았었다. 언제나 혼자 지내는 미진과 친구들이 많은 요나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가 없는 존재였다.
 "너 나 한테 왜 이러는 건데."
 따지는 요나를 쳐다보는 미진의 눈빛에서는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 볼 수가 없었고, 그것이 요나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내가 뭘? 넌 이미 많을 걸 가지고 있잖아, 내가 상연씨를 가진다고 해서 네가 손해볼 일이 뭐가 있어. 자존심? 그거 별거 아니야. 친구들한테 무시당하고 자신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 속에 사는 거에 비하면."
 미진은 자신의 삶의 잘못된 부분을 요나에게 전과시키려 들고 있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네 스스로 그렇게 산 거잖아."
 "누구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산적은 없어. 하긴 너하고 상관없기는 해. 하지만 난 상연씨를 가지고 싶었거든 그래서 너에게 뺏은 것 뿐이야."
 "상연이가 물건이니? 가지고 싶다고 남한테 빼앗게. 네 말처럼 가지고 싶다고 쳐, 그렇다면 정정당당하게 빼앗아 갈 것이지 왜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데."
 미진의 거짓말에 이제는 상연의 가족들도 요나를 만나려 들지 않았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 보았자 그들은 요나를 결백을 믿어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런 그들의 태도는 상연의 태도 보다 더 큰 상처를 그녀의 가슴에 남기고 말았다.
 "작전상의 전략이지."
 미진의 눈물연기에 자신의 인생이 이처럼 추락하게 되었다는 게 아직도 믿을 수가 없는 요나는 미진이 어떤 말로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상연이에게 사실대로 말해. 그러면 용서해 줄게. 내가 상연이 깨끗하게 포기할께."
 그를 마치 물건인 냥 내어 준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진이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혀 주기만 한다면 기쁜 마음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약혼을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진은 실소를 터트릴 뿐이었다.
 "허. 용서! 무슨 용서? 상연씨가 널 믿지 않은 건 네가 그동안 얼마나 버릇없이 굴었으면 그랬겠니. 네 말대로 그 사람이 널 믿던 말던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야. 그리고 네 용서 따위는 필요 없어. 상연씨는 이제 내 사람이니까 신경 꺼주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다 잊어버린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예기치 않는 장소에서 미진을 만나니 요나의 정신과 심장을 갈아먹었던 쓰라린 기억들이 요나의 머리 속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기에, 밥상 앞에서 멍하니 있는 거니?"
 요나는 이모의 질책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고기가 목에 걸려 넘어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씹어서 억지로 삼키었다. 아무래도 나가자마자 소화제를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유신이 잠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요나는 고개를 숙이고 식사를 할 뿐이었다.
 "그런데 김사장 요즘 어디서 지내는 중이에요. 난 괜찮으니 비어있는 아파트를 사용해요."
 오잉. 이건 또 뭔 소리. 그럼 이 독불장군이 지금 할머니 집에서 들어와 사는 걸 이모는 모른 다는 소리야. 왜 그걸 감추었지.
 "아닙니다. 지금 있는 곳이 편합니다. 가끔 시끄럽게 울어대는 고양이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참을 만 합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우리집에 고양이가 있었나? 혹시 이 인간이 날 이야기하는 거야.
 요나는 한 마디 따지려고 하다가 유신의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찌그러져 있어야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모가 유신의 거처를 알면 안 되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식사시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신을 주인공으로 흘러갔지만 어차피 기분이 좋지 않았던 요나는 이모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언젠가 홀연히 나타난 존재도 모르던 이모는 단 한번도 요나에게 따뜻한 웃음을 보여 준 적이 없었고, 긴 대화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어려운 존재였다.
 "잘 먹었습니다."
 "요즘 일은 열심히 하고 있는 거냐? 집안 먹칠하지 않게 잘해."
 "네."
 정말 요즘은 어디가나 그런 소리가 나와 죽을 지경이었다. 집에 전화를 거는 친척 어른들이나 그녀와 동년배인 사촌들도 진심을 담아서 혹은 장난삼아 그런 이야기를 해대는 통해 그녀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렇다고 디자인이라도 잘 되면 다행이지만 연필은 좀처럼 도화지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전화 번호 좀 가르쳐 줘요."
 "내 번호는 뭐하게."
 이건 완전히 요나가 그에게 작업을 들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유신이 퉁기고 있었다.
 "그냥요. 심심하면 문자라도 날려볼려고요."
 "그 시간 있으면 디자인 하나라도 더 그려."
 그는 차가움이 넘쳐서 그 자리를 얼려 버릴 만큼 냉정하게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 버렸다.
 "정말 인간미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네."
 그런 줄 알면서도 왜 유신에게 한 번이라고 말을 시켜보고 싶은지 자신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말을 걸어보았자 돌아오는 건 차가운 말투와 시선뿐인데도 요나는 독립운동가처럼 투지를 불태우며 유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일이 쉽지 않지."
 상종도 하고 싶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진이 식사를 다 하고 왔는지 어느새 데스크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요나는 미진과 말을 섞음으로써 괜히 말을 일고 싶지 않아 그 자리를 그냥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소문에 디자인이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렇게 힘이 드니? 내가 너 같이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다면 지금쯤 몇 장은 그렸을 텐데."
 약올리는 것이 다분한 비아냥거림에 요나도 참았던 화가 솟구치고 있었다.
 "내가 좀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데 넌 결혼하지 않았다면서, 남의 남자를 더러운 방법으로 빼앗아 가더니 왜 싱글로 남아 있어?"
 미진의 고운 얼굴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찌푸려지고 있었다.
 "어머, 화장품이 별로 인가 보다. 주름이 그렇게 보여서야 어디 쓰겠니. 내가 쓰는 화장품 소개 시켜 줄까?"
 "됐어. 나 일해야 되니까 그만 가봐."
 요나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곱게 가려는 사람 속을 긁어 데면서 못 가게 할 때는 언제고 질 것 같으니까 가라고 하다니 말이다.
 "그래 수고해. 아참"
 요나는 일부러 한 걸음 갔다가 뱅그르 돌아서 미진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화장 고치는 것 잊지 말고, 우리 이모 기절하시면 안되니까."
 뒤에서 미진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을 할 수 있었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 뒤돌아 서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미진까지 그녀의 디자인에 대해서 말할 정도면 회사 안에 소문이 가득하다는 소리였다.
 할머니와 이모의 명예도 문제였지만 그녀 자신의 이름이 걸린 문제였기에 요나는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미진에게도 밉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유신에게도 잘 보이고 싶다는 여자만의 심리가 그녀에게 기폭제가 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