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제6부-

까미유2005.04.29
조회582

유리 구두를 잃고 간 신데렐라처럼 그녀는 가방을 놓고 갔다. 굽이 빠진 구두와

멀쩡한 구두까지 모조리 놓고 말 그대로 몸만 빠져 나갔다. 태민은 그녀의 신발을

깨끗이 수리해서 다시 차에 실었다. 그리고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처럼

그녀의 가방을 열어 보았다. 거기엔 빨간 색 다이어리와 지갑만 있을 뿐 다른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흔한 화장품 하나조차도. 다이어리와 지갑을 훑어 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나오지 않았다.


-식사하세요.


어설프게 앞치마를 두른 숙희가 방문을 열며 말을 건네자 태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번도 앞치마를 둘러 본 적이 없었다는, 그래서 그것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자 태민은 마음이 스산했다.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여자로써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 보지 못한 그녀. 자신을 함부로 내팽겨 둔 죄로 어쩌면 평생을 이렇게

살다 갈지도 모른다고 말하던 그녀의 얼굴은 예전과 달리 평온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식탁 앞에 앉았을 때, 그녀는 뜨거운 밥을 내놓고 이어 토란국을 내놓았다.

정갈한 음식을 조목조목 담아 내놓은 그릇들을 보면서 그제서야 태민은 그녀와 함께

한 지도 벌써 한 해가 지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맛을 보기 위해 수저를

들자 마치 갓 시집 온 새색시처럼 얼굴을 붉히며 바라보고 있는 숙희의 표정에서

태민은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오래 전 어머니의 손에서 만들어내지곤 했었던 토란국,

그 맛과 흡사했다.


-좋은데? 앉아요. 같이 듭시다.


그제서야 숙희의 표정이 환해지고 태민과 마주 앉아 수저를 들었다. 늘 혼자서

식탁 앞을 지키고 앉아 있었던 태민에게는 함께 마주 볼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들떴고, 감사했다. 이 나이에 찾아 오지 못했을 행복이라 생각했다.

마땅히 갈 곳도 없었던 그녀였지만, 사실 태민 역시 그녀를 다시 돌려 보내고 싶진

않았다. 첫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었지만, 그럴 나이는 더더욱 아니었음에

이렇게 정을 붙이고 살면 살아지겠거니 했다. 사실 딱히 그녀가 싫은 것도 아니었다.

혼자에 익숙해져 누군가 곁에 있는 것조차 부담이 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평생을 혼자 살아왔어도, 그 평생동안 늘 누군가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었다. 그녀에게 태민은 구세주 같은 존재였겠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생 나와 함께 이렇게 마주 앉아 밥을 먹어 주겠소?


그의 말에 숙희는 손에 들고 있던 수저를 떨어 뜨렸다. 뜻밖의 말이긴 했지만

사실 그녀가 전부터 원했던 일이었다. 지금껏 만나왔던 사내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주머니를 털어낼 생각만 했고, 그들의 안락을 위해서

그녀를 붙잡아 두려고만 했었다. 한 지붕 아래 살기 위해서는 필사적이었다가도

정작 그렇게 되고 보면 애정은 없고, 지긋지긋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며

짐승만도 못한 짓거리를 해대는 것은 다반사였다. 처음엔 태민 역시 믿을만한

사내가 아니겠거니 했으나, 역시 갈 곳이 없어 머물게 되는 동안 차츰

그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에 그녀는 욕심이 났었다.

그러던 찰나에 그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녀로써는 매우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아무 대답을 못한 채 고개를 숙이자 태민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자신 없소?


숙희는 그저 고개만 저을 뿐 목이 매여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뜻 응하기에는

너무 염치 없는 듯 했다.


-그 맘, 무언지 다 알아요. 괜히 나한테 미안한 맘 가질 필요는 없소. 내가

좋아서 그러는 것이니.


연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온통 멍 자국만 남긴 인생을 다시 환하게 닦아서

거울처럼 만들어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저 여자를, 저 늙은

여자를 젊게 해주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수를 만나고 돌아 온 그날부터 며칠을 앓아 누웠었다. 심한 감기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온 몸에 한기가 들고, 식은 땀을 흘린 까닭에 현서는 내내 불안해했다.

늘상 현서는 그렇게 희생적이었다. 그런 그의 희생을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그의 친절에, 비로소 그녀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분을 떨치고 싶지

않았던 이기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가 현서를 떠나지 않는 한 그 역시

그녀를 떠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런 현서의

사랑을 처음부터 기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앓는 동안 내내 그녀는 자신이

현서에게 한 짓 때문에 벌을 받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었다.

한기가 사라지고 몸이 가뿐해져 음식을 삼킬 수 있게 되자 은우는 현서와 함께

저녁 산책을 나갔다.


-이럴 때 보면 너랑 나랑 꼭 부부 같지 않냐?


저녁 산책을 나갈 때면 늘 현서는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자연스럽게 팔짱까지

끼고 저녁 산책을 즐길 때면 그녀는 늘 희수를 떠올렸다. 현서에게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들이 왜 그에게는 늘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이렇게 자연스러운

행동들이 현서에게 만큼은 통하는데도 왜 정작 그를 자신의 남자로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사랑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어서

자연스러운 것일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매우 독선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 곧 쌀쌀해지겠지? 바람이 예전 같지가 않네.


현서의 말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웠던 순간이 있으면 그것이

식을 날도 오는 거겠지. 뜨겁기 전에는 그것이 먼저 식어 있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산책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입구에서 낯선 사내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선뜻 그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누구시죠?


그녀가 묻기도 전에 현서가 먼저 경계의 시선으로 묻자 그는 편하게 미소를 지으며

차 문을 열고 가방을 꺼내 보였다. 그제야 그녀는 태민을 떠올렸다.


-연락처도 없고 그래서, 그때 기억을 더듬어 찾아 왔는데 맞군요.

-네에.


은우는 그의 친절에 감사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그 날의 기억이 새삼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은우가 가방을 받아 들기도 전에 이번에도 역시 현서가 가방을 먼저 받아 들었다.


-현서야, 먼저 들어 가.


은우의 말에 현서는 기분이 상했지만 버티고 있을 아무런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며 현서는 자꾸만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미 백발이 무성해질 나이

정도나 됨직한 사내에게서까지 질투가 생기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현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은우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처음 은우를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태민은 어쩐지 은우의 모습이 낯익었다.

마치 오래 전의 딸아이를 만난 것처럼. 아니라면 옛사랑의 여자를 만난 것처럼. 그도

아니라면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결국은 그렇게 스쳐 지나갔을 많은 여자들의 모습을

본 것처럼 낯이 익었다. 왜 그때까지도 태민은 숙희를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 날 은우에게 가방만을 돌려주고 돌아섰어야 했을까. 그러지 못하고 은우의 말에 선뜻

근처에 있는 카페를 가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며 그 카페에서 하필이면 그가, 그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이 흐르지 않았어야 했을까. 그러다 결국 딸아이를

얘기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모든 것들이 어쩌면 운명처럼, 그리고 마치 필연처럼 서슴없이

흘렀다. 미리 짜 놓은 한 편의 각본처럼 태민과 은우의 대화는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과정 또한 계단을 밟는 것처럼 어색하지 않았다.


-아말리아 로드리겟.

- 검은 돛배.


두 번째 음악이 흐르자 둘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리곤 의외라는 듯 태민은 고개를 들었다.

은우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태민을 건너보았다.


-알아요 이 음악을?

-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음악을 잘 모르는데.

-바르꼬 네그로.


은우는 슬밋 웃음을 띠며 말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를 알고 있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가를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 아주 사소하기 짝이 없지만

살면서 그 사소한 것 하나라도 뭔가 통한다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었고 가슴

설레는 일이었으며 마치 오래 전 잃어버린 옛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화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보통 샹송이나 깐소네 정도는

알고 살아도 화도 음악을 아는 사람이 흔치 않던데.

-화도라는 어원이 라틴어로 숙명이란 말이잖아요. 그래서 관심 갖기 시작했어요.

운명이라든지, 숙명이라든지, 우연, 필연, 인연.....사람들은 그런 말들을 좋아하죠.


은우의 말에 태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커피 잔을 움켜잡았다. 숙명, 운명이란 말이

늘 사람들에게는 자극적인 말일 수밖에 없다. 마치 중독처럼 운명론을 믿는 것은

인간의 나약한 심성의 한 단면일 수밖에 없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오랫동안 그들에게

하나의 위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인연을 운명이라 믿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태민이 은우를 만나게 된 것처럼. 그리고 그 전에 숙희를 먼저

만난 것처럼.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음악이 끝나자 그들은 아쉬운 이별을 했다. 마치 그 음악이

그들이 이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니, 이별을 앞두고 음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연인처럼.


난 해변에 쓰러져 있었고 눈을 떴지.

거기서 난 바위와 십자가를 보았어.

당신이 탄 돛배는 밝은 불빛 속에서 너울거리고

당신의 두 팔은 지쳐서 흩어지는 것 같았어.

뱃전에서 당신이 내게 손짓하고 있는 것을 보았지

그러나 파도는 말하고 있었어.

당신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어촌에 너무나 사랑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이 배를 타고 나간 후로

돌아오지 않아 아내는 늘 바다에 나가 앉아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남편이 탄 배가 돌아왔는데 그 배에는 검은 돛이 달려 있었다.

은우가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된 것은 희수 때문이었다. 희수와 헤어지던 날 빗속을

뛰어 거리로 나왔을 때 어느 레코드 가게 앞에서 흐르던 노래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날 바로 은우는 레코드 가게로 들어가 그 음반을 구입했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어떤 자신이 생겼을까. 그 날 태민을 배웅하던 은우는 먼저 다음 약속을 물었다.

어쩌면 그가 꺼낸 딸아이를 생각하며 그녀는 오래 전의 아버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그와 비슷한 연배가 아니었을까 생각했었다.

그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은우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꾸만 뒤돌아보던

그녀의 얼굴을 태민은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화르르 타오르던 단풍이 서서히 저물어 갈쯤이었다. 늦가을 바람이 예사롭지 않았던

그 해에 숙희는 무언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느닷없는 불길한 꿈은 저녁 내내

그녀를 불안 속에 집어넣고 갖가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단풍 때문이었으리라.

자신의 몸이 불길 속에서 화르르 타오르는 꿈을 꾸었다. 그 불길 밖에서 태민은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불길 속에 던져졌다는 공포 보다는

오히려 표정 없는 태민의 얼굴에서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나이가 들어도, 몸은 늙었는데 자꾸만 신경은 예민해졌다. 덤덤해져야 했고, 오히려

무감각해져야 했을 것들이 늙어도 오히려 생생하기만 했다. 그것이 여자의 직감일까.

그제야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여자였구나.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실 너무나 한결 같아서 더 불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은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신경이, 그녀의 느낌이,

그녀의 가슴이 말하고 있었다. 그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딱히 꼬집을 수

없는 느낌. 그러나 감히 먼저 입을 뗄 수가 없는 느낌. 정체도 없고, 분명한 것도 없으며

정확한 것도 없어서 더 불안한 그 느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묻지 못했다.

그녀는 태민을 사랑했으므로. 더 이상 방황하기는 싫었으므로.


은우가 초등학교 일학년 때 남편은 죽었다. 자살이었다. 일찍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편은 여섯이나 있는 동생들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시작했었다. 평생을

과묵했고, 침묵했다. 살을 맞대고 십 년을 살았어도 그녀는 남편을 알지 못했다.

단 한 순간도 남편은 진실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침묵으로만 지켜냈다. 그 속이야

온전했겠냐마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 역시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치 표정 없는,

이야기가 없는 마임을 보는 듯 했다. 그런 남편과 자신에게서 은우가 태어났다는 것

역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유언장도

없었거니와 죽음을 결심하기 전,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이나 언행을 슬쩍 보인 적도

없었다. 십년을 살면서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남편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싫어했는지. 그 흔한 것 하나까지도,

습관까지도, 버릇까지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남편이었고, 그의 아내였건만.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남편의 죽음이

왔을 때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죽일 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으므로. 아내도 몰랐던,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죽음이 왔으므로. 그러니

그녀는 서방 잡아먹은 몹쓸 년이 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남편의 어머니,

남편의 형제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그녀는 남편의 느닷없는 죽음에, 한 순간

살인자가 된 것이었다.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것을 치자면 그녀만큼이나 하겠는가.

나이 열아홉에 팔려 오듯 남편에게 시집을 와서 십년을 사는 동안 농사 일 한 번

꾀부린 적 없이 청춘을 받쳐 일했건만 남은 것이라곤 고작 살인자란 누명뿐이었다.

둔하디 둔했던 죄였다면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벙어리 같은 삶을

살았던 남편 덕이었지 아내인 자신의 잘못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볕에 그을려 청춘이 다 가버린 그녀가 살인죄를 덮어 쓰고 쫓겨나 연고자 하나 없었던

서울로 올라온 뒤로 생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가진 것 하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달랑 딸아이와 저 하나만의 몸뚱이뿐이었지 제 몸 하나 뉠 곳이 어디 있었던가.

남편이 죽고 한참 후에서야 그녀는 알았다.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시집오기 전부터 남편에게는 여자가 있었다. 남편이 그토록 입을 닫고 산

세월이 오로지 그 여자 하나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미

죽고 없는 남편에게 두 번씩이나 배반당한 기분이었다. 한없이 딸아이에게만은 자상했던,

그러나 그것도 뜨거운 볕 아래 땀으로 젖은 머릿결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딸아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던 날의 풍경이 이따금씩

떠올랐다. 그녀에게는 그런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허락되지 않았건만.

애초에 그녀는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선택된 사람 역시도 아니었다.

빈 몸으로, 그녀가 가장 쉽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내였다. 아이에게 아버지가

필요했고, 그녀에게는 남편이 필요했다. 여느 가정처럼 일상의 따뜻한 삶이 필요했다면

그것은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내일은 나와 함께 어딜 좀 가겠소?


태민은 여느 때와 다른 것 없이 따뜻하게 물었다. 항상 그의 말에는 따뜻한 봄볕이

묻어났다.


-어딜요?

-가 보면 알아요.


그를 따라 간 그 곳은 그의 고향이었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그 곳.

오래 전 남편과 함께 살았던 그 곳과 닮아 있는 그의 고향이었다. 이 십년을

밟지 않고 살았다는 그의 고향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그 곳과는 너무나

다르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고향이 되어 버린

곳이었다. 고향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지게 되는 그런 고향.

그의 기억 속에 있던 마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진 그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짐작할만한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는 시멘트가 발라져

자동차도 들어올 수 있는 길 한 편에 걸터앉아 그녀는 오래 전의 남편을 떠올렸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진 남편. 제대로 얼굴이나 기억하려나. 가만히 태민을

돌아보았다. 남편이 저렇게 생겼던가? 태민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간밤의 꿈을 다시 떠올렸다. 혹시 이 남자도 또 내게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와 함께 앉았던 그 자리에 숙희는 홀로 앉아 있다. 이제 그는 곁에 없다.

그에게 고향이었던 이 곳, 그러나 그의 기억 속에서 이미 사라진 고향이었던

여기. 홀로 앉아 숙희는 생각한다. 남편이 죽고 나서 단 한 번이라도 그 곳에

다시 가보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가. 남편의 배신이, 참을 수 없는 그 배신

때문에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곳을 찾지 않았다. 그것이 이미 죽은 남편에게

할 수 있는 자신의 복수라 생각했다. 그러나 느닷없이 그녀는 떠나고 없는 태민

보다도 남편과 함께 했던 그 고향이 떠올랐다.





처음에 현서는 은우를 위해서 허브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로즈마리, 라벤더, 스피아민트,

제라늄, 타임, 페파민트등. 하나씩 사서들이기 시작한 뒤로 허브 종류만 스무 가지가

되었다. 차로도 마실 수 있었지만 우선은 진정제가 될 수 있었던 까닭에 허브를 선택

했었다. 처음엔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은우는 차츰 허브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후로는 집착처럼 그것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 은우의 모습을 보면서 현서는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자신이 아직 은우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히

은우가 행복해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겼다. 곧잘 요리도 해서 은우를 먹이면

마치 여느 주부처럼 현서는 마냥 행복해했다. 그러나 정작 현서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현서가 은우에게 베푸는 그 모든 것들이 사랑이 되어 다른 이에게 전달

되고 있었다는 것을. 은우가 그토록 허브에 집착하게 된 것은 태민 때문이었다.

현서에게 받은 허브를 은우는 태민에게 가르쳐 주었고, 현서가 그랬던 것처럼

은우는 태민에게 허브를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현서가 읊어 주던 시

한 구절까지도 기억해두어서 태민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은우에

대한 현서의 사랑이 고스란히 태민에게 갔던 것이다. 사랑이란 그랬다. 사랑은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것이어서 자신의 사랑만 눈에 보일 뿐이었고, 그 사랑만이

자신의 가슴 안에 들어 있을 뿐 그 외의 것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으며, 들이지

못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은우는 태민을 사랑했지만 태민이 그녀를

사랑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태민이 보여준 애정은 사랑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애정이었고, 연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니까. 현서가 그것을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은우가 떠나고 난 후로 현서는 말라버린 허브를 보고 있었다. 미처 챙기지 못한

서재실 세 번째 서랍 안의 일기장을 보지 말았어야 했을까. 현서는 마치 아내에게

긴 시간동안 농락당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