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개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 (1)

瓚禧200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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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개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

 

 

(1)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전초전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밝은 햇살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햇빛의 느낌으로 보아 오전이 훨씬 지난 듯 하였다. 신애는 진작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집에 온 기억은 찾을 수 없었다. 고장 난 비디오테이프처럼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기억 속에서 신애는 아무 일 없었을 것이라며 최면을 걸 듯 생각하고 있었다. 신애는 한쪽 눈을 살그머니 들어올렸다. 그녀의 기우와는 달리 그녀는 무사히 집에 온 듯 했다. 익숙한 자신의 집 천장 벽지 무늬가 이렇게 반가워 보일 수는 없었다.



“별일 없었구나.”

“별일 많았는걸!”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고 있는 신애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 남자와 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신의 집이었다. 자신의 집에 다른 남자의 침입이라니. 신애는 순간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이불속에 숨겨진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옷은 어제 입고 나간 옷 그대로였다. 그런 신애의 모습을 보던 그 남자는 부엌에서 나와 신애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약이 잔뜩 오른 고양이 같은 신애에게 남자는 양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중 하나를 신애에게 내 밀었다.



“마셔. 방금 내린 거라서 향이 괜찮아.”



신애는 남자가 내민 머그잔을 바라만 볼뿐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남자는 빙긋이 웃으며 힘을 잔뜩 주고 있는 신애의 손에 머그잔을 쥐어주며 말했다.



“한대 칠 듯이 주먹을 꽉 쥐고 있네! 이거 무서워지는데.”



남자는 신애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남자는 자신의 집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어디서 꺼냈는지 겨울에 입는 신애의 검은색 추리닝을 자신의 것처럼 입고 있었다. 신애의 시선이 추리닝 바지에 있는 것을 안 남자가 말했다.



“길이가 너무 짧아. 완전히 7부야. 7부. 조금만 더 짧았으면 반바지였겠어. 쿡”


남자는 그 사실이 웃기다는 듯 혼자 키득대고 있었다. 심각한 신애와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신애는 남자를 한참동안 쳐다본 뒤 말했다.



“누구세요?”

“나 기억 안나?”

“네!”

“허허. 웃기는 여자일세.”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제 집에서 나가주셨으면 해요.”

“이거 물에 빠진 놈 구해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식이군.”



남자는 커피를 다 마셨는지 부엌으로 가 개수대에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신애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남자는 ‘정말 몰라?’ 라며 신애를 쳐다보았다.



“네! 모르겠어요.”

“정리하자면, 이래. 넌 어제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나와 사귀기로 했어. 그리고는 곧 바로 쿵 하고 술에 취해서 테이블에 머리를 박더군. 한참 말 잘하다가 갑자기 쓰러질지 누가 알았겠어? 특이한 여자야. 당신.”

“술버릇이 원래 그래요. 말 잘하다가도 어느 순간 쓰러져 버리죠.”



신애는 자신의 술버릇에 대해 설명했다. 신애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남자는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남자는 신애를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대했다. 낯선 사람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 자신이 이렇게 순식간에 저 낯선 남자에게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신애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 남자에게는 무언가가 있는 듯 했다. 사람을 편하게 하는 그 무언가가 분명 남자에게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지는 말라고. 나도 알고 보면 수줍은 남자니깐.”



남자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신애에게 말했다. 남자는 한참을 신애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할 수 없지 라는 표정으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지만 이렇게 살림살이가 없어서야 되겠어?”

“그래도 꼭 필요한건 다 있어요.”

“말투가 꼭 화개장터 같다?”



신애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있자 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웃었다.



“이런 둔한 여자를 봤나! [있어야 할 건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이 노래 몰라?”



남자는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불러댔다. 대충 부른듯했지만 상당히 노래솜씨가 있어보였다. 노래를 마친 남자는 바닥에 누워 머리를 괴고는 리모콘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고 있는 남자에게 신애가 말했다.



“안가요?”

“어허! 매정한 여자야. 내가 당신 목숨을 구해줬으면 적어도 내가 있을 때 까지는 눈치를 주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벌써부터 눈치를 주는 거야?”

“목숨까지는 아니잖아요.”

“이봐. 내가 만약에 당신을 그 자리에 놓아두고 그냥 갔어봐. 남자들이 가만히 있었겠어? 그럼 당신은 하루 밤 순결을 빼앗기고, 또 그런 일이 없다고 쳐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가는 길에 차라도 와봐. 당신은 벌써 죽은 사람이야.”



남자는 자신에게 감사하라는 듯 신애를 보며 우쭐거렸다.




“지금까지 숱하게 술에 취해봤지만 한번도 그런 적은 없어요.”

“지금까지 없었으니깐 어제는 있었을 거야.”



남자는 필시 그렇다는 듯 추측을 확신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우기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신애는 포기했다는 표정으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남자의 말처럼 자신은 어제 남자친구에게 보기 좋게 차여버렸다. 실연이었다. 술이 좀 깨고 나니 상황이 실감이 되는 신애였다. 신애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시간쯤엔 항상 우현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식사를 챙겨먹으라고 잔소리를 했던 시간이었다. 한동안 밤늦게까지 오락에 빠져 사는 우현의 건강이 걱정스러워 꼭 점심은 일어나 챙겨먹게 만들었던 신애였다. 하지만 이젠 신애가 챙겨 줘야할 우현은 더 이상 없었다. 그녀가 챙겨야 할 사람 하나가 사라져 버렸다. 신애는 핸드폰을 들고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플립을 열었다 닫았다하는 탁- 탁- 소리가 나자 그 남자가 신애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얼굴 중앙에 들고 있던 핸드폰 너머로 플립을 열고 닫을 때 마다 남자의 시선이 남았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연락하고 싶어?”

“어쩜 그런 것 같아요.”

“그럼 해. 뭐가 문제야?”

“항상 간단하게 생각을 하나 봐요? 난 체질적으로 그러질 못해요.”

“미련이 남는 거야?”

“정리할 때 시간이 안 걸린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요.”

“그 남자는 안 걸린 것 같던데?”



남자는 우현의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었다. 돌려서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은근슬쩍 웃으며 말하는 그의 말속에는 뼈가 있었고, 그 날카로운 뼈 조각이 신애의 가슴을 베고 있었다. 근데 이상한 것은 그런 말을 하는 그가 밉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 이름 알아?”

“아니요.”

“내 이름은 한 강이야.”
“네?”
“성이 한, 이름이 강! 한 강”

“특이한 이름이네요. 제 이름은…….”

“알아. 박신애.”

“어떻게 알았어요?”

“술 뻗은 여자 집에 데려다 주는데 주소 아는 방법이 주민등록증 말고 또 뭐가 있나? 봤어.”



한 강은 배를 바닥에 대고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낄낄거리며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그 자세가 불편했는지 한 강은 일어나 옷장 겸 이불장으로 걸음을 옮겨 베게 하나를 집어 들고는 다시 엎드려 베게에 대고 얼굴을 괴었다.



“안가요?”

“허허!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그리 박정하게 굴면 쓰나.”

“그래도 여긴 저 혼자 사는 집이고,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들락거린다는 건 보기가 그래요.”

“남의 이목에 상당히 신경 쓰는 걸 보니 A형인가 보군.”



신애는 한 강의 말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자신이 남의 이목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도 사실이었고, 자신이 A형인 것도 사실이었다. 한 강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곱게 걸어둔 옷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 스트라이프 남방에 이십대를 겨냥해 나온 허리라인이 피트된 회색 양복을 갈아입고 나온 그는 자연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신애에게 말했다.



“나 이만 갈래."



신애는 한 강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칼을 한번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염색을 한 듯 했지만, 상당히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이었다. 하지만 신애의 시선은 이내 그의 양복으로 향했다. 우현에게 면접시험 볼 때 입으라며 사줬던 양복과 똑같은 것이었다. 우연치고는 묘했다. 신애가 한 강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그가 픽 웃으며 말했다.



“나 멋있는 거 아니깐 그만 쳐다보라고!”

“...........”

“인연이 되면 또 보겠지?”

“...........”

“그럼 이만.”



한 강은 그 걸음으로 현관문 쪽을 향해 걸어갔다. 한 강이 신애의 집에서 나가야 정상이지만 신애는 그가 가는 뒷모습이 조금은 서운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머릿속에서 연신 경고 등이 켜졌지만, 머리와는 달리 마음은 그를 잡고 싶어 애타고 있었다. 그가 나가버리면 금방이라도 웅크리고 있던 외로움이라는 괴물이 뛰쳐나올 것 같았다. 남자가 닫은 현관문의 쾅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신애는 그가 나간 것이 실감이 되었다. 고작 몇 시간 같이 있었을 뿐인데, 그의 빈자리가 크게만 느껴지면서 금새 외로움이라는 괴물이 가슴속에서 솟아나왔다.



“존재감이 큰 남자네.”



신애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선 침대의 누웠다.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 질 때도 되었지만, 항상 외로움은 그녀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신애는 옆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신애에게 다감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백수인 그는 그녀가 원할 때면 언제나 곁에 있어주었다. 그가 있을 때 마다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외로움을 잊고 살았었다. 신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잡고 싶었다. 자신의 자존심이고 뭐고 바닥에 쳐 박아두고 그를 잡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연신 ‘뭐하는 거야? 박신애. 어서 먼저 전화해’라는 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사랑에 자존심이란 쓸데없는 거야.”




신애는 중얼거렸다. 그랬다. 신애에게 자존심이란 우현을 만나고 나선 없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자존심 보다 더 겁이 나는 것은 우현의 쌀쌀한 냉대였다. 어느 순간부터 신애는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더 이상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신애 자신이 없이는 우현이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그녀의 가슴속에 항상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그녀 없이도 가능한 남자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우현의 냉대를 받아들였던 것은 신애 자신이었다.




“그래……. 내 탓이야




신애도 알고 있었다. 우현을 그렇게 만든 것에 자신도 일조하였다는 사실을. 자신을 멸시하고 냉대해도 이 악물고 견디는 것만이 최선책이 아니었음을. 하지만 이젠 지나간 일이었다. 다만 예전처럼 그의 바람이 멈추어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정착하길 바랄뿐이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기다림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그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신애였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신애는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단아한 작은 물망초 꽃무늬 벽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단아한 여자. 단정한 여자. 조신한 여자. 그 모든 여자가 우현의 이상형이었다. 우현의 이상형에 맞춰 변해온 자신이었다. 마치 인형처럼, 우현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하나하나 갖춰간 그녀였다. 하지만, 이젠 그럴 이유조차 사라졌다. 언제나 휘청거리며 자신을 인간 이하 취급하던 우현은 이제 ……. 없다. 신애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이런 기분에 낮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지만, 마땅히 부를 친구가 없었다.




“나이 30살에 불러낼 친구하나 없다니. 박신애. 너도 인생 다 살았구나.”



신애는 허탈한 듯 피식대며 말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지난 10여 년 동안 우현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던 그녀였으니깐. 친구보다는 우현이었고, 가족보다도 우현이었고, 자기 자신 보다도 우현이었으니깐. 신애는 그래도 그나마 친했던 친구인 윤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이어지고 윤정이의 똑 부러지는 음성이 들렸다.


“네. 최윤정입니다.”



텔레마케터를 해서 그런지 윤정이의 목소리는 여느 마케터들의 목소리 그것이었다. 신애가 대답이 없자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네. 최윤정입니다.”

“나야.”

“어? 신애구나!”



뜻밖이었다. 자신을 모를 줄 알았던 윤정이가 뜻밖에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기억된다는 사실이 가끔은 가슴을 벅차고 설레게 만들 때도 있구나, 싶었다. 신애는 조심스레 윤정에게 말했다.



“술……. 한잔 할래?”



막상 말을 꺼내 놓고서도 신애는 괜히 말했다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윤정이라도 오랜만에 대뜸 전화해 술 한 잔 하자고 하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뱉은 말 다시 주어 담을 수도 없지 않은가? 신애는 조심히 윤정의 대답을 기다렸다.



“술? 무슨 일 있니? 그래! 알았어.”



쉬운 긍정이었다. 이리 쉽게 대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막상 그녀의 입에서 허락의 단어를 들으니 얼떨떨했다. 5년간 연락 한번 못했던 윤정이 얼마나 변했을지, 궁금해지는 신애였다.




“내가 변한 만큼 윤정이도 많이 변했겠지?”



자의든 타이든 누구든 변하게 되어있었다. 신애는 오랜만에 잡힌 친구와의 약속에 한껏 들떠있었다. 그동안 우현으로 인해 친구에게 마저 소홀했던 그녀였다. 10년 동안 그로 인해 잃었던 것을 하나씩 찾으려고 하는 그녀였다. 윤정이 잡은 장소는 생각 외로 대로변에 있어 찾기가 수월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노란빛의 램프들이 한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신애는 안으로 들어가 윤정을 찾았다. 신애의 눈동자가 미처 윤정을 찾기도 전에 윤정이 한쪽 구석에서 손을 흔들었다. 여전한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때 모습 그대로였다. 10년간의 세월이 무색하게 그녀에게만큼은 비켜간 것처럼, 마치 교복을 입혀놓으면 고등학생이라고 믿길 만큼 그녀는 생동감 있고, 어려 보였다.



“오…….랜만이지?”

“그러게! 계집애. 연락 좀 하지 그랬어.”



윤정은 신애가 마음상하지 않을 정도로 투덜대었다. 그런 윤정의 말에 신애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그때 누군가 지나가면서 신애를 아는 척 했다.



“어? 박신애다.”



남자의 목소리에 신애는 그 쪽을 쳐다보았다. 거기엔 한 강이 다른 사람과 함께 나란히 서있었다. 옷을 갈아입었는지 신애의 집에서 나갈 때와는 달리 편해 보이는 베이지색 면바지에 흰색에 남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가 있는 남방을 걸친 모습이었다. 뛰어난 미남은 아니었지만, 옷이 상당히 잘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가게안의 몇몇 여자들이 한 강을 힐끔거리는 것이 신애의 눈에 띄일 정도였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나가는 모양이었다. 한 강의 얼굴이 붉으스름 해 져있었다. 보통 성을 붙여서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해 유난히 민감한 신애였지만, 그의 부름은 어쩐지 달콤하게 들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네…….”

“어? 뭐야. 그 반응은?”

“그게…….”




신애가 우물쭈물 하자 윤정이 ‘아는 사람이야?’ 라며 되물었다. 신애는 당황스러웠다. 우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아는 척 한다는 자체가 낯설었다. 우현 하나만 알았던 10년의 세월이 쉬이 지워질리 없었다. 어색해 하는 신애를 알았는지 한 강은 피식 웃으며 신애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나 먼저 간다.”



상당히 친근감 있는 행동이었다. 그의 손짓 하나가 그녀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한 강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 즈음 윤정이 픽 웃으며 말했다.



“저 남자 괜찮다. 새로 사귀는 남자야?”

“아니.”

“그럼?”

“그냥 아는 사람이야. 나 며칠 전에 우현이랑 헤어졌어. 정확히 말하면 어제.”



신애의 말에 메뉴판을 보며 안주를 고르던 윤정의 손길이 멈추어 졌다. 그리곤 의아한 표정으로 신애를 바라보았다.



“그녀석이랑 여태껏 사귀느라고 연락 못했다는 말은 하지 말아줘.”


낮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신애는 익숙해 있었다. 그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다들 우현을 싫어했다. 그의 모습, 행실, 그 주변의 소문들 모두가 그녀의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했다는 것을 신애 자신도 알고 있었다. 소문이 좋지 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역시 애써 외면하고 살았던 그녀였다. 사실 그로 인해 그녀와 멀어져간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야.”

“여전히 솔직한 건 알아줘야 해. 그렇지만 그때부터 지금이 몇 년이야?”
“정확히 10년째야.”

“그럼 그 10년 동안 우현이 한사람만 사귄 거야?”



놀란 듯한 윤정의 말투에 신애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와 우현의 만남을 모두 부정했다. 아니 어떤 친구는 전화로 그녀를 말리기까지 했었다. 지금 와서 그때 왜 그 말을 듣지 않았는지, 왜 그를 부정하지 못했는지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임을 알기에 신애는 수긍하기로 했다. 윤정이 간단한 안주와 소주를 시켰다. 차가운 소주가 나오자마자 윤정은 신애 앞에 놓인 잔에 흐를 정도로 가득 따라주었다.



“마셔. 약이다 생각하고. 마셔.”




윤정의 말에 신애는 한숨에 소주를 들이켰다. 오늘 하루 종일 한 강이 건넨 커피 외에는 먹질 않아서 인지 속이 알싸해져왔다.




“묻지 않으마. 어차피 사람 사귀는 일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헤어지고 만나는 건 아니니깐. 어차피 헤어지고 다시 이어질 수 없다면 마셔라.”



역시 윤정이는 변하지 않았다. 윤정이는 학교 때부터 그랬다. 생각이 많아 항상 고민에 차있는 신애와는 달리 윤정이는 모든 단순화 시켰다. 그런 윤정을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면 그녀는 으레 ‘인생 뭐 있냐?’ 라며 웃어넘겼다. 지금 윤정의 모습은 고등학교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과음을 하는 것 같았다. 술을 잘 마시는 여자는 싫다는 우현의 말 한마디에 10여 년 동안 웬만해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쉽사리 취해버렸다. 윤정도 술이 약했는지 얼굴이 불그스름해져서는 신애를 보며 웃었다.




“너 얼굴이 홍당무 같아.”

“너도 그런걸.”

“나는 원래 체질적으로 술만 마시면 그렇더라. 얼굴만 빨개지면 되는데 꼭 얼굴에 여드름 났던 부분만 빨개져. 미쳐 내가.”

“그래도 예쁜걸? 세월이 너만 비켜간 것 같아. 교복 입혀놓으면 아직도 고등학생 같아 보일 것 같다.”

“야. 박신애. 너 아부도 떨 줄 알았어? 몰랐네!”



소주 한 병에 둘 다 얼굴이 불그스름해 져서는 남들의 5~6병 먹은 듯 해 보였다. 소주 한 병을 더 시키고선 윤정은 화장실로 달려갔다. 오바이트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신애가 그런 윤정을 보며 빙그레 웃자 윤정이 신애를 탓하는 말투로 애교 있게 말했다.



“다아 너 때무운 이라고.”



혀가 잔뜩 꼬인 말투로 천천히 말하는 윤정을 보며 신애가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뭐야! 이차 가자 이차!”



윤정이는 한쪽에 놓아둔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먼저 나선 신애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윤정이의 따스한 팔의 체온이 술기운으로 차가워진 신애를 덥히고 있었다. 꼭 잡은 팔을 신애는 살며시 부여잡으며 말했다.



“미안. 이렇게 나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나 정말 나쁜 년이지?”




술김이라도 이렇게라도 자신의 미안한 속내를 드러내고 싶었다. 신애의 말에 윤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생 뭐 있냐?”

“쿡.”



둘은 오랜만에 고등학교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서로 팔짱을 끼고 나란히 화장실이며 매점이며 어디든 같이 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신애는 우현에 대한 슬픈 감정이 윤정으로 인해 사그라지는 기분이었다. 계산대 앞에서 자신이 계산하겠다던 윤정의 지갑을 가방에 도로 넣어주며 신애가 계산서를 점원에게 내밀었다.




“잠시 만요.”



점원은 한참 계산서를 보며 계산기를 두들기더니 빙그레 웃으며 신애에게 말했다.



“혹시 성함이 박신애씨세요?”

“그런데요?”

“이거요.”



점원은 신애에게 만 원짜리 몇 장과 천 원짜리를 건네주며 말했다.



“어떤 남자분이 대신 계산하셨어요. 그리고 이거요.”




점원은 천 원짜리 한 장을 신애에게 다시 넘겨주었다. 거기엔 흘려쓴듯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나야. 한 강. 술값 내가 대신 계산한다.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했지? 잔돈은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줘라. 먹으면 죽는다.]



잘 안 보이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보던 윤정은 신애의 등을 퍽 소리가 나게 쳤다. 흥분하면 나타나는 윤정의 버릇이었다. 신애는 윤정이 친 부분을 살살 문지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완전 좋겠다. 아까 그 남자지? 너무 좋겠다. 우현 같은 그런 개자식 말고 이런 남자를 만나라고! 여자 귀한 줄 아는 그런 남자 말이야!”



윤정의 말소리가 좀 컸는지 근처 테이블에 있던 남자들이 윤정과 신애를 쳐다보았다. 대충 점원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신애에게 점원이 웃으며 말했다.



“행복한 사랑 하세요!”



남에게 축복받는 사랑이라면 이런 기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신애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신애는 윤정이를 위해 택시를 잡아주고는 아직은 쌀쌀한 밤공기를 맞으며 거리를 거닐었다.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어가는 커플이 신애를 지나쳐 갔다. 신애는 그 커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러운 모습이었다. 10년을 사귀어 오면서 우현에게는 한번도 저런 모습이 없었다. 왜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어쩜 다른 이의 말처럼 잘못된 만남이었을 수도 있었다. 우현과 신애의 만남이란 그래. 처음부터 잘못 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애는 아팠다. 아프고 멍든 가슴을 그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곪아가는 가슴은 항상 자신의 몫이었다. 혼자 아파하고 혼자 우는 게 신애의 인생인 마냥, 신애의 운명인 마냥 그렇게 혼자 아파하고 혼자 힘들어하고 있었다. 신애는 쌀쌀한 밤거리를 거닐었다. 주책 맞은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따스한 눈물이 얼굴을 적시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슬픔도 분노도 질투도 그 어느 감정도 없었다. 다만 원래 그랬던 것처럼 눈물이 한없이 흐르기만 했다. 그렇게 신애는 우현과 헤어진 첫날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