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연-제7부-

까미유2005.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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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거리는 버스 안에서 태민의 몸은 출렁거렸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불안정하게 버스가 흔들렸다. 흔들릴 때마다 태민의 시선에 잡힌 모든 풍경들 역시

흔들렸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이미 사라진 고향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곳엔 자신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그는 고향에서도 까마득한 과거의

사람이었으므로. 그를 기억하고 있는 이도 없을뿐더러 그 역시 변해버린 고향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는 상태였다. 어차피 고향이라도 낯선 땅에 발을 들여 놓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한 때에 동향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염치 같은 것을

따지기도 전에 서둘러 짐을 꾸렸지만 가는 내내 자신이 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에 쫓기듯 이렇게 서둘러 도망쳐 왔을까. 오고 보니 이 곳이 땅 끝이라는 것을

알았다. 땅 끝엔 시퍼런 바다가 있었다. 육로는 거기서 끊어져 버렸다. 육지 끝 바다.

시퍼런 바다 앞에 서고 보니 마치 절벽 앞에 서 있는 기분처럼 암담했다.


-사업 실패하고, 고향에 있던 땅까지 팔고 나니까 늙고 병든 몸뚱이밖에는

없더라. 차라리 몸뚱아리를 팔았을 것이지, 땅은 왜 팔았는지. 땅 끝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서둘러 도망 왔더니 더 이상 숨을 곳도, 발 디딜 곳도 없는 이 곳이지 뭐냐.

여기가 이제 내 고향이다 싶은 생각이 든다.


친구 놈의 말을 떠올리며 마른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바다 끝을 망연하게 바라

보았다. 기어이 여기까지 오고 말았구나.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면 여기서

묻혀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점처럼 보이는 먼 섬 두 개가 바다 한 가

운데에 둥둥 떠 있다. 땅 끝과는 무관한 두 개의 섬. 그 섬을 또 잇는 육로가 어딘가

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보면 한없이 멀고, 까마득해서 동화 속, 혹은 꿈속의

어느 섬이겠지만 말이다. 피서지를 찾아 이 곳까지 찾아 드는 관광객들의 얼굴엔

봄꽃이 지고, 그 자리에 눈부신 볕이 뜬 것 같다. 어쩐지 자신이 문득 이방인

같단 생각이 들었다.


뉘엿뉘엿 해가 질쯤에 발길을 돌렸다. 일출도 장관이겠지만 일몰도 못지않게

장관을 이룬다. 인생의 황혼이 저렇듯 아름다울 수도 있을까. 자연처럼 욕심 없이

순수한 아름다운 인생의 황혼을 맞게 되길 바랐건만, 그것도 인력으로는 안 되는

일인가 보다. 시퍼런 바다 위로 붉은 태양이 가라앉는 것을 등지고 친구 놈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이제 막 들에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마른 수건으로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다 들어서는 태민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뛰어 나왔다.


-올 때가 됐는데, 안 온다 했다. 연락이라도 좀 하고 오든지.


짐가방부터 챙겨 들며 경식이 핀잔을 주지만 내심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투와는 달리 얼굴엔 그리움이 묻어났다. 사람이 그리웠으리라. 낯선 타향에서

홀로 정을 붙이고 사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던가. 대문조차 활짝 열어 놓고

사는 인심 좋은 마을이라해도 열린 대문으로 불쑥 들어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경식이 그를 기다릴 만도 했다.


-홀아비 냄새 풀풀 풍기며 살 줄 알았더니, 이제 제법 농사꾼 같아 보인다.


태민이 슬밋 웃으며 농을 던지자 경식은 마냥 기분 좋은 듯 가방을 대청마루에

내려놓고 섰다.


-너까지 합세 했으니 아마도 적지 않게 냄새를 피울 것이다. 저녁 전이지?

-저녁은 무슨.

-그럼 오랜만에 해후했으니 한 잔 해야지. 일단 가방 들여 놓고 좀 씻고 있어.

나가서 찬거리라도 좀 구해 올 테니.


경식이 나가려 하자 태민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지 말고, 바다 보면서 한 잔 하자. 땅 끝에서 마시는 술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자 그럼.


그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형제 바위가 있었다. 현무암처럼 생긴 기괴암석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형제바위를 따라 돌면 맴섬이 나온다. 태민은 살아생전 처음 발을

디딘 곳이라 마치 먼 여행길을 떠나온 객처럼 느껴졌다. 바다 근처라 그런지 온갖

해삼물이며 횟거리가 주를 이루었다. 막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명처럼 그것들은

아직 죽음의 빛을 띠지 않고, 선명했으며 맑았다. 젓가락을 들긴 했지만 선뜻

집어 들 엄두가 나지 않아 애꿎은 소주잔만 자꾸 비웠다. 아작아작 씹히는 오이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경식은 빈 잔을 채워주며 담배를 꺼내 건넸다.


-끊은 지 한참 됐어.


경식은 내밀었던 담배를 입에 물다가 태민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너도 내 처지냐?


경식의 말에 태민은 말없이 잔을 비우고 젓가락을 들었다. 뭉글뭉글 거리는

산 낙지를 집어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다 늙어 무슨 고민이냐? 살아봐야 얼마나 산다고. 그냥 대충 살어. 내가 여기 와서

느낀 게 그거다. 아등바등 모질게 버티면서 악다구니 써대고 살았던 세월이 다

물거품이더라. 그렇게 살아봐야 몇 발자국 나가지도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더라. 그 자리마저 빼앗길까 노심초사 긴 세월 허송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그러니 마누라가 못 살겠다 도망간 거 아니냐. 그게 다 처자식 먹여 살리

려고 핏대 올리며, 내 몸 부러져라 살았건만 그게 다 누굴 위한 거냐? 말이 그렇지

알고 보면 내 욕심인 게야. 그 욕심 때문에 그 사람한테나 자식들한테나 상처만

준 게지. 확 돌았다 그땐. 그래도 스무 살 적까진 꿈이 있었는데, 살다보니

꿈은 그냥 꿈인 채로 흘러 까맣게 잊고 살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현실만

쫓다보니 다른 건 일체 보지도 못하고 산 게지. 그러니 그것들이 죄다 떠나지.

한없이 기다려주는 건 없더라. 버스 가고 나서 손 흔드는 격이니.

그래서 인간이 어리석은 게야.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바로 코앞에, 발등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사니. 진작 여길 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경식의 말에 태민은 그저 짧은 한숨만 내쉴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빈 잔에

술을 채우려는 태민의 손에서 병을 빼앗아 들고 잔을 채워주며 경식이 말했다.


-이왕 여기 왔으면 머리를 비워. 그게 상책이야. 너도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오죽 답답한 상황이겠냐 싶다.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둬라. 여기까지 온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되는 건 없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사람 사는 곳이고,

도시나 다를 바 없어. 말 그대로 이 곳이 끝이야. 여기서 더 나갈 길은 딱 하나

있다. 죽는 거. 근데,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욕심이 불끈불끈 생긴다. 이판사판이란 생각이 든다고 이 자식아.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줘.


친구인 경식에게조차도 자신의 속사정을 말하기란 참으로 애매한 일이었다.

이 나이에 여자 문제를, 사랑인지 뭔지도 모를 그런 애매모호한 감정 문제를

껴안고 있다고 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 보일까. 자식, 드럽게 복 많은 소리

하고 앉았네. 회춘이라도 할 셈이냐? 이 나이에 그건 사랑이 아니라 주책이고

망령이다. 아마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생각해도

한없이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태민씨가 왜요? 뭐가 부끄러워요? 뭐가 그렇게 창피해요? 사랑하는 게 창피해요?

나이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그냥 숫자에 불과한 그것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나이를 누가 정했는데요? 그것도 기한이 있는 거라고 누가 그래요?


살아 있다면 딸아이와 나이가 비슷할 그녀가 태민씨라고 꼬박꼬박 부를 때마다

그는 어디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그것은 평생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면 연륜 이라는 말 역시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이는

사는 동안 불편한 것이다. 마치 생의 어느 금지선처럼, 어느 나이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구분하는 금기. 나이는 적어도 그랬다.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도

나이에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나잇값도 못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겠는가. 당돌하기만 한 그녀. 너무나 당돌해서 완강하게 밀어내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관계의 선 앞에 세워 둔 채 넘지 마라, 그러지

마라 하는 말들 따위로 어른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비겁하다는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이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유는 다른데 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잔을 비우자 온 몸에 열기가 퍼졌다. 마치 불꽃이 팡팡 튀는 것처럼

열꽃이 피워 올랐다. 취기가 오를 모양이었다. 짭짜름한 바다냄새가 따갑게 느껴졌다.




감자전을 앞에 내놓고 은우는 할머니와 마주 앉았다. 작년에 캔 감자라면서

초저녁부터 감자껍질을 벗겨 갈아 부치던 할머니는 도우려는 은우를 끝내 내쳤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먹기만 하려니 죄송한 맘이 먼저 들어 선뜻 젓가락을

집지 못하자 할머니가 직접 젓가락까지 손에다 쥐어 주었다. 도시에서도 늘

먹던 감자전이었건만, 맛은 확연히 달랐다.


-맛있어요.

-그랴? 더 있으니께 많이 들어. 아따, 오늘따라 달이 기차게 밝네.


손수 만들어내신 감자전을 당신은 드시지도 않고 검은 하늘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 주자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색시는 뭐한다고 여그까지 와서 이러고 있는 겨? 어디가 아픈 겨?


할머니의 말에 은우는 말없이 쓴웃음을 지어 보이다 감자전을 뒤적거렸다.


-감자에도 꽃이 피는 걸 알고 있는 겨?

-싹이 자라는 건 알고 있는데 꽃을 본 적은 없어요. 꽃도 피나 봐요?

-그라제, 꽃도 피제. 이것이 보기에는 보잘것없이 고냥 고냥 하게 생겼어도,

필 것은 다 핀단 말이제. 뿌리도 있고, 잎도 있고, 꽃도 있제. 사람허고 똑같애야.

뭣인들, 열매부터 피는 것이 어디 있간디? 뿌리를 먼저 내리고, 싹이 피우고

꽃이 피어야 열매가 맺는 것이제. 저절로 혼자 맺는 것은 없다니께.


할머니의 말에 은우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어서 떠오르는 태민의 얼굴.

은우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따라서 떠오르는 태민.

그를 떠올리면 또 따라서 떠오르는 어머니. 샴쌍둥이처럼 둘이 동시에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 속에 이런 날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있었다. 늦은 초여름 밤, 유난히도 밝은 달빛

아래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아버지와 함께 했던 날의 기억. 귀뚜라미가 울고,

개구리가 목청을 높이고, 어느 집 개가 간간이 짖어대던 날의 여름 밤.

아버진 굳은살이 붙어 거친 손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주시며 긴 여름밤의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아무런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표정은 끝 간 데 없이

깊었다. 그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그닥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통 어머니와는 입을 닫고 살던 아버지.

은우에게는 한없이 다정했던 아버지였건만, 어머니 앞에선 뜨거운 여름에도

몸서리칠 만큼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곤 했었다. 늘 아버지 등만 보고 살았던

어머니에게 때로는 연민이 생기기도 했지만 사실 그 나이에 연민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 더 깊었다. 어쩌면 아버지를 사랑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아닌, 남자로써 아버질 어머니보다도 더 끔찍하게 사랑했는지도.

어째서 늘 자신을 제대로 봐주지 않는 사람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사랑 받고 싶었던 것일까.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어머니는 딸자식에게조차 사랑을 보이지 않았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주는 것 역시 모를 수밖에. 그런 어머니에 비하면 아버진 사랑을

제대로 알고 계셨던 것일까. 어쩌면 그랬을 것이다. 평생을 한 사람만

가슴에 품고 살았던 분이었으니까. 어머니나 은우에게는 치명적인 상처였

지만, 아버지의 눈물겨운 일편단심은 인정해줄만한 것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한 사람만 그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죽음을 택할 만큼?

은우는 자신이 어째서 이토록 잔인하게도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를 다시

느꼈다. 어째서 사랑 받지 못하고 내버려진 채 살아왔던 어머니보다도

지독하게 자신만 알았던 아버지를 더 사랑했던 것일까. 아버진 분명 자신에게는

분노의, 원망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사람이었거늘.


-넌 지독하게도 니 아버질 닮았다. 그래서 가끔 니가 무섭다.


오래 전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자 은우는 명치끝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내 속으로 난 자식이지만, 넌 내 자식이 아니라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니

아버지의 자식인 것 같어. 남의 집에 내가 끼어 있는 기분이었어. 나도, 그늘이

필요하고, 사랑 받고 싶다.


세 번째 결혼을 할 때였던 것 같다. 그땐 그런 말들이 다 변명처럼 느껴졌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것은 어머니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어머니의 진심은

외면당했다. 평생을 한 여자만 가슴에 품은 아버지와는 달리 여러 남자들의

품에 안긴 어머니를 이해하기란 어려웠으므로.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 내몰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랬다한들 어머니의 방식은 옳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런가? 지금도 그녀는 어머닐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싫었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적막한 밤. 작은 창틀 너머로 대나무 숲이 있다. 검은 대나무 숲에선 휘파람 소리가

났다. 한 밤중에 소스라치듯 놀라 잠에서 벌떡 깨어보면, 잠을 깨웠던 것이 휘파람

소리였다는 것을 알았다. 휘파람 소리, 그리고 때로는 빗소리 같은 것이 음산하게

들려왔다. 날이 밝은 오후의 대나무 숲은 그리 음산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소리가 어느 깊은 절의 풍경처럼 아득하게 느껴져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곤

했었다. 그런데, 칠흑 같은 어두운 밤이면 그 소리가 어김없이 공포로 밀려 왔다.

그럴 때면 잠에서 깬 겁 많은 어린 계집아이처럼 울상을 짓고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 쓰곤 했다. 그러다 이미 달아난 잠에서 벌떡 일어나 마루청으로 나와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곤 했었다. 여기 온 지 벌써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몰려든 모기떼에 피를 내주며 앉아 먹칠한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을은

깊은 수면 아래에 잠겨 고요했다.


-사랑해요.


은우의 눈에 눈물이 그렁하게 차올랐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말이 왜 이다지도 가슴을 쥐어뜯는 것일까. 그렇게 오랫동안 만났던

희수에게조차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을 만큼 인색했었는데. 그녀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희수는 습관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었다. 아마도 그런

말을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희수는 그녀가 사랑한다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시시때때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했다. 그러니 그녀가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민은 달랐다. 아니, 어쩌면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그녀가

하게끔 만들었는지도.


-사랑해요.


사랑한다고 말하던 순간에 모든 것들이 금이 갔다. 쩌억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부서져버린 것이다. 그 말 한마디에 모든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었다면, 차라리 오래 전의 아버지처럼 가슴 안에 담아 두기만 할 걸

그랬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니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당황하던 태민의 표정이 떠올랐다. 애써 덤덤한 척 했지만 그럴수록 어색한 표정만

만들어냈다.


-아니요, 사랑이에요.

-은우야.

-사랑이에요.

-.........

-사랑해요.

-나를…….사랑하지 마라 그럼.

-왜요?

-난 사랑이 뭔지도 모른다. 아주 오래 전에 난, 사랑을 잃고 모르고 살았어. 그래서

사랑이 뭔지도 몰라. 그렇게 늙어 버렸어. 다시 사랑을 배우기에는 너무 늙었다.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오는 게 사랑이에요.

-은우야.

-사랑해요, 사랑한다구요. 내가 사랑한다구요.


소리를 지르며 발악 같은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에 느낌으로 은우는 알았다. 이 사랑이

외면당할 것이라는 걸. 사랑한다고 내뱉는 순간, 사랑이 끝이 나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희수처럼 두 번은 그렇게 보내기 싫었다.


-난, 내 발에 꼭 맞는 신발이 있다. 낡았다고 그걸 버릴 순 없어. 난, 오히려

그 신발이 편해. 새 신발은 불편하다. 발이 익숙해질 때까지 까이고, 상처 나고,

아플 것이 뻔해. 이 나이에 새 신발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니가 더 잘 알거다.


자신의 발에 꼭 맞는 신발. 그 신발이 왜 하필 어머니였을까. 은우는 마치 어머니를

사랑한, 그래서 아내로 맞이한 오이디푸스가 떠올랐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들이 모두 여기에 와서 박혀 있는가 보다. 별들도 죄다 도시를 떠나 이 곳에

와 있다. 어디선가 그도 이 별들을 보고 있을까. 너무도 아름다워서 눈물겹도록

서러운 밤처럼 그에게도 서러운 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