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는 거의 뛰다시피 타임리스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녀의 걸음은 조급하다 못해 흥분되기까지 했다. 신애는 출입문 앞에서 가팔라진 숨을 가다듬었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안쪽 모퉁이를 돌면 그를 볼 수 있으리라. 신애는 조금은 떨리기 까지 하는 손을 들어 출입문을 힘껏 밀었다. 여전히 친절해 보이는 직원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예의바른 신애였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낼 여유가 없었다. 신애는 모퉁이를 돌아 급하게 두 눈으로 그를 찾았다. 그는 그녀와 즐겨 앉던 창가 쪽에 앉아있었다. 그를 향해 손을 흔들려던 신애는 들어올리던 손을 내렸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며칠 전 클럽에서 봤던 화장이 진한 20살이 갓 넘어 보이는 여자와 함께였다. 여자는 여전히 진한 화장과 깊게 파인 브이넥 붉은 티를 입고 있었다. 짧디 짧아 허벅지 다리가 훤히 들어나는 치마를 입은 그녀는 다리를 꼬아 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허리에는 우현의 손이 있었고 우현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전번과 같이 하나였다. 신애는 그 자리에서 뒤도 안돌아 보고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그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궁금증이 더 앞섰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다가가지 말았어야 하는 그를 향해 그녀는 한걸음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의 등장을 알았는지 화장이 진한 여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정쩡하게 신애가 서있자 우현이 답답하다는 듯 ‘앉아’ 라고 말했다. 신애는 겨우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괜한 탁자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앞에 앉은 우현과 그녀인데 왜 자신이 이렇게 비참해 지는지 신애는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밀어 넣고 있었다. 우현이 자신에게 무슨 말 한마디라도 건네면 바로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자, 우현은 신애의 의향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콜라’ 라고 짧게 말했다. 신애는 콜라가 싫었다. 아니 탄산음료는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우현은 항상 그녀에게 콜라를 시켜주었다. 자신은 가장 비싼 생과일주스를 마시면서 신애에게는 콜라를 시켜주는 우현이었지만, 신애는 한번도 그가 원망스럽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유리 탁자위에 그와 그녀의 생과일주스 사이에 초라한 그녀와 같은 콜라가 나왔다. 신애는 그 꼴이 마치 자신 같아 씁쓸해 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마셔.”
“안녕하세요.”
마시라는 우현의 말에 신애가 고개를 들자, 화장이 진한 그녀가 비웃듯 웃으며 인사를 했다. 말투가 상당히 도전적 이였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그녀였지만 신애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애는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우현에게 말했다.
“왜 부른……. 거야.”
“오빠가 부른 게 아니라, 제가 부르라고 했어요.”
우현 대신에 그녀가 말했다. 신애는 앞에 놓은 콜라로 타들어 가는 목을 잠깐 축였다.
“왜 불렀나요?”
“그냥요! 뭐 하나 물어볼 라고요. 저 오늘부로 오빠랑 사귀려고 하거든요? 근데 언니가 전화 하고 그럼 제가 곤란하잖아요. 이제 제꺼 될 건데 언니가 자꾸 눈. 치. 없. 이 전화하고 그러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보자고 했어요.”
기막히다 못해 기절할 정도로 여자는 신애의 속을 뒤집고 있었다. 앞에 놓인 생과일주스를 쪽쪽 빨면서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신애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눈. 치 .없. 이 라는 말을 하면서 여자는 신애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잘못한 것은 그녀인데, 그녀의 남자였던 우현을 꼬신 것은 그녀인데 죄인 취급은 신애가 받고 있었다. 신애는 떨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그런 말이라면 할 필요 없어요. 우현에게 전화하는 일 없을 테니까요.”
“글쎄요. 그렇게 장담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엔 그쪽이 아직도 오빠에 대한 마음정리가 안된 것 같아서요. 제가 나서서라도 교통정리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나섰어요.”
여자는 신애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했다. 마치 신애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한줄기 희망의 싹마저 잘라버리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신애였다. 애인 있는 사람 먼저 꼬인 것은 네가 아니냐며 그녀에게 따지고 싶은 그녀였지만, 마음속에서만 맴도는 말들이었다. 신애는 꺼낼 용기조차 없는 약하디 약한 여자였다.
“그쪽이 이렇게 나서는 거 주제넘은 것 같네요.”
“주제요? 주제라고 했어요? 이제 그쪽이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라고 보는데요?”
여자는 대 놓고 신애에게 적대적인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맹수같이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그녀를 물어 뜯어놓을 기세였다. 그녀는 작은 핸드백 속에 있던 담배케이스에서 얇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가 핸드백 속에서 무언가를 찾자 우현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그녀의 담배 앞에 가져다 대었다. 종이 타는 냄새를 뒤로 작은 담배 연기구름이 피어났다. 신애는 믿을 수 없었다. 보수적인 남자인 그가 여자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일 따위는 상상도 못했었다. 마치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우현의 탈을 쓴 다른 이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소연아, 화장실 가서 담배마저 피고 와, 나머지는 오빠가 이야기 할 테니깐.”
우현은 타이르듯 소연이라는 여자에게 말했다. 우현의 말에 소연이라는 그 여자는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담뱃갑을 들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신애는 갑자기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우현인지 궁금해 졌다. 자신이 아는 우현은 여자가 담배 피는 것을 죄악처럼 여기던 남자였다. 조신하지 못한 여자는 여자가 아니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는 담배한대 피고 오라고 하고 있었다. 신애는 앞에 앉은 사람이 자신이 10년 동안 알고 지내던 그가 맞는지 그에게 되묻고 싶어졌다.
“왜, 부른 거야.”
“소연이가 불안해하기에. 주변정리 하라고 해서 내가 불러 줄 테니깐 알아듣게 이야기 하라고 했어.”
“고작 그런 이유로 날 부른 거니? 네 눈엔 내가 자존심도 없는 여자인 것 같니?”
“이렇게 하는 게 널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어. 쓸데없는 미련, 애초에 없애 버리는 게 좋잖아?”
“황우현. 너란 사람 정말인지 사람 비참하게 만든다. 정말……. 정말....... 사람을 밑바닥 까지 끌어 내리는 구나. 내가 그렇게 만만했니? 너란 사람이 막 대해도 상관없는 여자 이었니? 그랬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항상 당당하구나. 너 지금 나한테 실수한거야.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실수? 가만히 안두면 어쩔껀데? 넌 나한테 어쩌지 못해. 난 널 너무 잘 알거든.”
바르르 떠는 신애와는 달리 우현은 여유로워 보였다.
“날 안다고? 네 눈엔 내가 어땠는데?”
“말했든 넌 나에게 어쩌지 못해. 넌 아직 날 사랑하거든. 그거 알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인거. 그런 면으로 따지면 넌 나에게 한없는 약자야. 절대 나에게 강하게 굴 수 없어.”
“그래서 지금 지렁이 밟듯 날 이렇게 짓밟는 거니?” “쿡.”
신애의 말에 우현은 비웃듯 피식 거렸다. 신애는 숨이 턱 막혀왔다. 저런 남자를 자신이 10년 동안 사랑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싸가지가 없긴 했어도, 자신에게 막 대하기는 했어도 이정도 인줄은 몰랐다. 신애는 주먹을 꼭 쥐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기가 막혔다.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우현이 죽이고 싶어졌다. 신애는 자신의 앞에 칼이 있었다면 그를 찔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미웠다. 10년 동안의 애정이 한순간에 미움과 증오로 변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했던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이처럼 실감나고, 인정될 수 없었다. 신애는 참고 있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신애는 닦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비굴해 지고 비참해 진 것 더 비참해 지고 비굴해 진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했던 마스카라가 번졌을 텐데 그녀는 닦을 생각조차 없었다. 이 순간 미친년이 되어 길거리를 뛰어다니고 싶은 욕망마저 들었다. 그녀는 멍하니 정말 미친 여자처럼 그렇게 눈물만 흘려댔다. 그녀가 그렇게 우는데도 우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빼어 물었다. 찌이익- 종이 타는 냄새와 함께 담배 냄새가 났다. 우현은 담배를 피며 애써 시선을 창밖으로 두고 있었다.
“꼭 이렇게 잔인하게 끝까지 잔인하게 이렇게 해야 했어?”
“어쩜 내가 널 위한 일일수도 있잖아. 넌 꼭 생각을 그따위로 밖에 못하더라. 난 널 위한 거였어. 내가 이렇게 확실하게 단념 시켜주면 다시는 나한테 미련 같은 거 안 생길 거 아냐.”
“몇 살이니?”
“뭐?”
“소연인가 하는 그 애. 몇 살이니?”
“이제 20살이야.”
“나쁜 놈.”
“뭐?” “내가 욕하니깐 듣기 싫니? 네 욕하니깐 듣기 싫니? 근데 넌 나쁜 놈이고 개자식이야!”
짝-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신애는 맞은 뺨을 한손으로 잡았다. 얼굴 한 면에서 화끈거리는 열기가 그녀의 손바닥에 스며들고 있었다.
“미친년. 어디다 대고 욕지거리야! 남자 빼앗긴 게 자랑이냐? 자랑이야? 지가 간수 못해서 헤어진 거면 미안한거나 알아야지 어따 대고 욕지거리야!”
언제 왔는지 소연은 길길이 흥분하며 그녀를 향해 손찌검을 했다. 그런 그녀를 우현이 잡으며 말했다.
“소연아. 네가 참아. 오빠가 말했잖아. 말이 안 통한다고. 가자.”
소연은 그제야 우현의 손에 이끌려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온 가게 사람의 시선이 신애에게 몰렸다. 신애는 순간 남자 빼앗기고 매까지 맞은 측은한 여자가 되어 그들에게 동정 받고 있었다. 더 이상 앉아 그들의 동정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신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카페 출입구로 향했다.
“저기 계산......”
점원이 멋쩍어 하며 그녀에게 계산서를 내밀었다. 그녀는 대충 지갑에서 2만 원가량을 꺼내어 점원에게 내밀고 가게를 나섰다. 비참한 날이었다. 신애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신애는 사람 많은 그 거리에서 미친 듯 울어제꼈다. 마치 태어나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처럼 그렇게 거리 한 복판에서 미친 여자처럼 울어 젖혔다. 신애는 그대로 달리는 차에라도 뛰어들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신애는 차도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었다.
[그래. 죽음은 한순간이야. 이렇게 더 살면 뭐하니……. 이렇게 살아서 뭐하니……. 깨끗하게 죽자.]
신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슬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해 졌다. 오열하던 눈물은 어느새 들어가 있었고, 신애의 눈은 광기로 빛난다. 그녀는 미쳐있었다. 신애는 차도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단념한 듯 그녀는 발을 대 디뎠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팔을 세차게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미쳤어!”
“그래. 나 미쳤어! 미친년이야! 그럼 그 꼴을 당하고 제정신인 년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아아악”
신애는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향해 악다구니를 써 댔다. 그 사람이 우현인양, 우현에게 풀지 못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시켰다. 미친 듯 악을 써대는 그녀 주변에 사람이 몰린지 오래였다. 남자는 신애의 따귀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쫙- 하는 소리가 주변을 울리고, 신애는 힘에 의해 바닥에 쓰려졌다. 신애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누워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그녀는 울었다. 그녀를 쳐다보던 남자는 한 강이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던 한 강은 신애가 타임리스에서 나왔을 때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오열하는 모습, 울부짖는 모습 모두를 보고 있었다. 한 강은 그녀를 달랠 생각이 없었다. 아픔도, 상처도 곪아서 터져야 낳는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는 가슴속에 뭉친 고름들을 그녀가 빨리 털어내길 빌었다. 하지만 신애가 도로로 발길을 돌리자 한 강은 그제야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한 강은 끝까지 타 버린 담배를 버리며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그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흐느끼는 신애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무척이나 좁아보였다. 그녀의 여린 어깨를 자신의 팔로 감싸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한 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그녀에게 자신이 한 걸음 다가간다면 그녀는 분명 두 걸음 물러설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을 흩어놓았다.
“구경났습니까? 볼일 보세요! 세상 살다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한 강의 말에 사람들은 시선은 한 강과 신애에게 두면서도 그 자리를 비켜 나갔다. 사람이 어느 정도 흩어지자 한 강은 신애를 들어올렸다. 저항할줄 알았던 그녀는 의외로 쉽게 그에게 몸을 맡기었다. 그녀도 지쳤던 모양이었다. 한 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등에 업었다.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한 강은 그녀의 따스한 눈물과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없이 안타까웠다. 이 한없이 가여운 여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알려주고 싶었다. 얼마나 예쁘고,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 여자에게 낱낱이 고해바치고 싶었다. 한 강은 그녀를 받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침대위에 그녀를 눕힐 때 까지 그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지친 표정으로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한 강은 내려다보았다. 마스카라가 얼룩져 얼굴은 엉망이었다. 한 강은 말없이 화장실로 가 수건에 물을 적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를 다루듯 그는 그녀를 소중히 다루고 있었다. 그녀를 편하게 자게 몸을 틀어주고 한 강은 신애의 집을 나서며 조그마하게 중얼댔다.
“당신은 자꾸 시선이 가게 만들어.”
신애는 습관적으로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는 팔을 뻗어 자명종 시계를 들었다. 6시 30분이되기 몇 초전이었다. 잠시 후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기도 전에 신애는 자명종을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분명 누군가의 등에 업힌 것 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다음부터는 암흑 속이었다. 지친 탓인지 간만이 취한 숙면이었다. 신애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마스카라가 번져 엉망일줄 알았던 얼굴은 말끔하게 화장이 지워진 채였다. 누가 자신을 이리로 데리고 왔는지, 화장은 어떻게 지워졌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신애는 그저 멍하니 다시 침대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토가 나올 듯 몸은 으슬으슬 했다.
“그래. 아플 때가 됐어. 그렇게 참았으면 아플 때가 됐어.”
우현을 사귀면서 신애는 1년에 한번씩은 크게 앓았다. 그녀는 그것을 그와 사귀는 동안 연례행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녀는 자신이 왜 아픈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가슴속에 1년 동안 쌓아둔 상처들이 모여 고름이 터지는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신애는 핸드폰을 찾아 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언니네. 왜요?”
한참 꿈나라를 헤매는 듯 진아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 출근 못할 것 같아.”
“언니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응. 그러니깐 월차 좀 써줘.”
“언니 몇 일전에도 쉬어서 점장님이 한소리 하실 텐데…….”
“도저히 못갈 것 같아서 그래.”
“알았어요. 언니 몸조리 잘해요.”
진아는 걱정하는 투로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신애는 핸드폰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어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잔 것 같았다. 신애는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지만, 이미 몸은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석고처럼 그녀의 몸은 단단히 굳어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 옷이 몸에 들러붙었다. 신애는 가파르게 숨을 쉬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자신이 죽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애는 그대로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 강은 자신의 방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조급했다. 무언가 굉장히 두려웠으며, 불안한 복합적인 감정이 한 강을 괴롭히고 있었다. 한 강은 시계를 보았다. 그 책임감 강한 여자라면 분명 은행에 갔으리라는 생각에 한 강은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커다란 통 유리 너머로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있던 데스크는 비어있었고, 그녀 옆에 앉아있던 귀여운 여자는 밀려드는 사람에 정신이 없어보였다. 한 강은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한 곳으로 몰리는 듯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 강은 그녀의 집 쪽으로 차를 급하게 돌렸다. 계산을 두세 개씩 밟아 그녀의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연거푸 눌렀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한 강은 그대로 뛰어나가 열쇠 수리공을 불러 문을 땄다. 한 강은 자신의 생각이 명중했음을 알았다. 그의 불안과 초조함은 그녀였다. 그녀는 그의 불안한 예감대로 였다. 얼마나 고열에 시달렸는지 몸은 자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그녀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신애는 아침에 눈을 뜨듯 스르륵 눈꺼풀이 들어올려졌다. 익숙한 천장이 아니었다. 코를 타고 병원의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신애는 고개를 약간 돌렸다. 거기엔 누군가가 그녀의 침대 모서리에 고개를 박고 자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설잠이 깰까봐 조심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팔에는 링거가 꼽혀있었고, 자신을 간호하다 잠들었는지 그의 한손에는 조금 마른 물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가 잠깐 뒤척이자 그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렇게 순식간에 깨어날 줄 몰랐던 신애는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는 한 강이었다. 신애는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많이 수척해 보였다. 그는 거기서 잠들었었는지 옷은 이틀은 족히 입고 있어 보였다.
“여기가 어디예요?”
“어딘지 알면서 물어보지 마.”
그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냉정하고 차가운 말투였다. 신애는 무어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뚫어지듯 쳐다보던 한 강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조그마한 병실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더니 이내 신애를 향해 얼굴을 바짝 내밀며 도저히 모르겠다는 말투로 그녀를 추궁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여자야, 없는 여자야! 그렇게 아프면 전화라도 하던가!”
“전화 할 곳이……. 없었어요.”
“119도 몰라? 119도 모르냐고! 정말 너란 여자란.......”
“풋.”
“뭐야! 웃음이 나와?”
“고마워요.”
“뭐, 뭐가 고맙다는 거야!”
“걱정해줘서요. 그동안은 항상 혼자였거든요.”
“걱, 걱정해주는 것 아냐!”
한 강은 택도 없는 소리라는 듯 펄쩍 뛰었지만 신애는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적지 않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고함소리마저 고마웠다. 그녀가 빙그레 다 안다는 듯 한 강을 보며 웃자 한 강은 잔뜩 머쓱한 표정으로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 밀었다.
“마셔! 수분 부족으로 또 쓰러지기 전에……. 그동안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려 댔는지 알기나 해? 아주 동해바다 만큼 흘려 댔을 꺼다!”
한 강은 말도 안 되는 비유법으로 틱틱대며 그녀에게 생수를 던지듯 넘기며 말했다. 신애는 생수를 따서 목을 간단히 축였다. 냉장고에서 꺼내서 차가울 줄 알았던 물은 예상외로 미지근해 있었다. 신애가 의아한 눈빛으로 한 강을 쳐다보자 한 강이 시선을 돌리며 우물거렸다.
“갑자기 냉수 먹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내가 냉장고 코드 빼놨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배려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신애의 가슴속에 고마움으로 자리 잡았다. 저렇게 다감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도 있구나, 이래서 세상은 살만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강은 한동안 말없이 신애의 침대 밑에 걸터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노을이 질 때까지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신애는 그런 한 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창 밖을, 신애는 그를 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그의 하얀 얼굴에 그림자 드리워 질 때 즈음 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사귀기로 했던 것 기억나?”
“그건, 장난..........”
“그래. 처음엔 장난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난 지금........”
“알아. 누굴 사귈 마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너의 실연의 아픔을 잊게 해주겠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병을 고치는 건 의사야. 마음의 병을 고치는 건 사랑이지. 내가 너에게 사랑을 주겠어. 일명 실연극복 전문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리고 우린 사귀기엔 서로에 대해 너무 몰라요.”
“다 알면서 사귄다는 것 자체가 웃긴 거야.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사귀는 거 아닌가?”
“말도, 말도 안 돼요. 어떻게 내가......”
“알았어. 불편하다는 거 알아. 그럼 이렇게 하자. 당분간은 친구로 지내자. 친구. 어때?”
“.............”
“하지만 명심해 둬. 내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가능성을 놔둘거라는 것을.”
진지한 표정이었던 한 강이 어느 사이인가 개 구진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신애는 그의 제안이 싫지만은 않았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한없이 사랑받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우현의 잔재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싶었다.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귀지 않을 것이라면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신애는 누군가에게 절실히 기대고 싶었다. 신애는 한 강이라는 사람의 넓은 등에 기대고 싶어졌다. 신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긍정의 뜻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한 강은 말이 없었다. 다만 신애 모르게 그도 빙그레 짧은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30개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3)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이다.
30개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
(3)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이다.
신애는 거의 뛰다시피 타임리스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녀의 걸음은 조급하다 못해 흥분되기까지 했다. 신애는 출입문 앞에서 가팔라진 숨을 가다듬었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안쪽 모퉁이를 돌면 그를 볼 수 있으리라. 신애는 조금은 떨리기 까지 하는 손을 들어 출입문을 힘껏 밀었다. 여전히 친절해 보이는 직원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예의바른 신애였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낼 여유가 없었다. 신애는 모퉁이를 돌아 급하게 두 눈으로 그를 찾았다. 그는 그녀와 즐겨 앉던 창가 쪽에 앉아있었다. 그를 향해 손을 흔들려던 신애는 들어올리던 손을 내렸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며칠 전 클럽에서 봤던 화장이 진한 20살이 갓 넘어 보이는 여자와 함께였다. 여자는 여전히 진한 화장과 깊게 파인 브이넥 붉은 티를 입고 있었다. 짧디 짧아 허벅지 다리가 훤히 들어나는 치마를 입은 그녀는 다리를 꼬아 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허리에는 우현의 손이 있었고 우현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전번과 같이 하나였다. 신애는 그 자리에서 뒤도 안돌아 보고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그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궁금증이 더 앞섰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다가가지 말았어야 하는 그를 향해 그녀는 한걸음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의 등장을 알았는지 화장이 진한 여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정쩡하게 신애가 서있자 우현이 답답하다는 듯 ‘앉아’ 라고 말했다. 신애는 겨우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괜한 탁자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앞에 앉은 우현과 그녀인데 왜 자신이 이렇게 비참해 지는지 신애는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밀어 넣고 있었다. 우현이 자신에게 무슨 말 한마디라도 건네면 바로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자, 우현은 신애의 의향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콜라’ 라고 짧게 말했다. 신애는 콜라가 싫었다. 아니 탄산음료는 싫어하는 그녀였지만, 우현은 항상 그녀에게 콜라를 시켜주었다. 자신은 가장 비싼 생과일주스를 마시면서 신애에게는 콜라를 시켜주는 우현이었지만, 신애는 한번도 그가 원망스럽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유리 탁자위에 그와 그녀의 생과일주스 사이에 초라한 그녀와 같은 콜라가 나왔다. 신애는 그 꼴이 마치 자신 같아 씁쓸해 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마셔.”
“안녕하세요.”
마시라는 우현의 말에 신애가 고개를 들자, 화장이 진한 그녀가 비웃듯 웃으며 인사를 했다. 말투가 상당히 도전적 이였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그녀였지만 신애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애는 애써 침착하려 애쓰며 우현에게 말했다.
“왜 부른……. 거야.”
“오빠가 부른 게 아니라, 제가 부르라고 했어요.”
우현 대신에 그녀가 말했다. 신애는 앞에 놓은 콜라로 타들어 가는 목을 잠깐 축였다.
“왜 불렀나요?”
“그냥요! 뭐 하나 물어볼 라고요. 저 오늘부로 오빠랑 사귀려고 하거든요? 근데 언니가 전화 하고 그럼 제가 곤란하잖아요. 이제 제꺼 될 건데 언니가 자꾸 눈. 치. 없. 이 전화하고 그러면 곤란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보자고 했어요.”
기막히다 못해 기절할 정도로 여자는 신애의 속을 뒤집고 있었다. 앞에 놓인 생과일주스를 쪽쪽 빨면서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신애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눈. 치 .없. 이 라는 말을 하면서 여자는 신애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잘못한 것은 그녀인데, 그녀의 남자였던 우현을 꼬신 것은 그녀인데 죄인 취급은 신애가 받고 있었다. 신애는 떨리는 왼손을 오른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그런 말이라면 할 필요 없어요. 우현에게 전화하는 일 없을 테니까요.”
“글쎄요. 그렇게 장담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보기엔 그쪽이 아직도 오빠에 대한 마음정리가 안된 것 같아서요. 제가 나서서라도 교통정리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나섰어요.”
여자는 신애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했다. 마치 신애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한줄기 희망의 싹마저 잘라버리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신애였다. 애인 있는 사람 먼저 꼬인 것은 네가 아니냐며 그녀에게 따지고 싶은 그녀였지만, 마음속에서만 맴도는 말들이었다. 신애는 꺼낼 용기조차 없는 약하디 약한 여자였다.
“그쪽이 이렇게 나서는 거 주제넘은 것 같네요.”
“주제요? 주제라고 했어요? 이제 그쪽이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라고 보는데요?”
여자는 대 놓고 신애에게 적대적인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맹수같이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그녀를 물어 뜯어놓을 기세였다. 그녀는 작은 핸드백 속에 있던 담배케이스에서 얇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가 핸드백 속에서 무언가를 찾자 우현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그녀의 담배 앞에 가져다 대었다. 종이 타는 냄새를 뒤로 작은 담배 연기구름이 피어났다. 신애는 믿을 수 없었다. 보수적인 남자인 그가 여자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일 따위는 상상도 못했었다. 마치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우현의 탈을 쓴 다른 이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소연아, 화장실 가서 담배마저 피고 와, 나머지는 오빠가 이야기 할 테니깐.”
우현은 타이르듯 소연이라는 여자에게 말했다. 우현의 말에 소연이라는 그 여자는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담뱃갑을 들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신애는 갑자기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우현인지 궁금해 졌다. 자신이 아는 우현은 여자가 담배 피는 것을 죄악처럼 여기던 남자였다. 조신하지 못한 여자는 여자가 아니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는 담배한대 피고 오라고 하고 있었다. 신애는 앞에 앉은 사람이 자신이 10년 동안 알고 지내던 그가 맞는지 그에게 되묻고 싶어졌다.
“왜, 부른 거야.”
“소연이가 불안해하기에. 주변정리 하라고 해서 내가 불러 줄 테니깐 알아듣게 이야기 하라고 했어.”
“고작 그런 이유로 날 부른 거니? 네 눈엔 내가 자존심도 없는 여자인 것 같니?”
“이렇게 하는 게 널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어. 쓸데없는 미련, 애초에 없애 버리는 게 좋잖아?”
“황우현. 너란 사람 정말인지 사람 비참하게 만든다. 정말……. 정말....... 사람을 밑바닥 까지 끌어 내리는 구나. 내가 그렇게 만만했니? 너란 사람이 막 대해도 상관없는 여자 이었니? 그랬니?”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항상 당당하구나. 너 지금 나한테 실수한거야.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실수? 가만히 안두면 어쩔껀데? 넌 나한테 어쩌지 못해. 난 널 너무 잘 알거든.”
바르르 떠는 신애와는 달리 우현은 여유로워 보였다.
“날 안다고? 네 눈엔 내가 어땠는데?”
“말했든 넌 나에게 어쩌지 못해. 넌 아직 날 사랑하거든. 그거 알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인거. 그런 면으로 따지면 넌 나에게 한없는 약자야. 절대 나에게 강하게 굴 수 없어.”
“그래서 지금 지렁이 밟듯 날 이렇게 짓밟는 거니?”
“쿡.”
신애의 말에 우현은 비웃듯 피식 거렸다. 신애는 숨이 턱 막혀왔다. 저런 남자를 자신이 10년 동안 사랑했단 말인가? 믿을 수 없었다. 싸가지가 없긴 했어도, 자신에게 막 대하기는 했어도 이정도 인줄은 몰랐다. 신애는 주먹을 꼭 쥐었다. 용서할 수 없었다. 기가 막혔다.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우현이 죽이고 싶어졌다. 신애는 자신의 앞에 칼이 있었다면 그를 찔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미웠다. 10년 동안의 애정이 한순간에 미움과 증오로 변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했던 사랑과 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이처럼 실감나고, 인정될 수 없었다. 신애는 참고 있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신애는 닦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비굴해 지고 비참해 진 것 더 비참해 지고 비굴해 진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했던 마스카라가 번졌을 텐데 그녀는 닦을 생각조차 없었다. 이 순간 미친년이 되어 길거리를 뛰어다니고 싶은 욕망마저 들었다. 그녀는 멍하니 정말 미친 여자처럼 그렇게 눈물만 흘려댔다. 그녀가 그렇게 우는데도 우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빼어 물었다. 찌이익- 종이 타는 냄새와 함께 담배 냄새가 났다. 우현은 담배를 피며 애써 시선을 창밖으로 두고 있었다.
“꼭 이렇게 잔인하게 끝까지 잔인하게 이렇게 해야 했어?”
“어쩜 내가 널 위한 일일수도 있잖아. 넌 꼭 생각을 그따위로 밖에 못하더라. 난 널 위한 거였어. 내가 이렇게 확실하게 단념 시켜주면 다시는 나한테 미련 같은 거 안 생길 거 아냐.”
“몇 살이니?”
“뭐?”
“소연인가 하는 그 애. 몇 살이니?”
“이제 20살이야.”
“나쁜 놈.”
“뭐?”
“내가 욕하니깐 듣기 싫니? 네 욕하니깐 듣기 싫니? 근데 넌 나쁜 놈이고 개자식이야!”
짝-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신애는 맞은 뺨을 한손으로 잡았다. 얼굴 한 면에서 화끈거리는 열기가 그녀의 손바닥에 스며들고 있었다.
“미친년. 어디다 대고 욕지거리야! 남자 빼앗긴 게 자랑이냐? 자랑이야? 지가 간수 못해서 헤어진 거면 미안한거나 알아야지 어따 대고 욕지거리야!”
언제 왔는지 소연은 길길이 흥분하며 그녀를 향해 손찌검을 했다. 그런 그녀를 우현이 잡으며 말했다.
“소연아. 네가 참아. 오빠가 말했잖아. 말이 안 통한다고. 가자.”
소연은 그제야 우현의 손에 이끌려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온 가게 사람의 시선이 신애에게 몰렸다. 신애는 순간 남자 빼앗기고 매까지 맞은 측은한 여자가 되어 그들에게 동정 받고 있었다. 더 이상 앉아 그들의 동정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신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카페 출입구로 향했다.
“저기 계산......”
점원이 멋쩍어 하며 그녀에게 계산서를 내밀었다. 그녀는 대충 지갑에서 2만 원가량을 꺼내어 점원에게 내밀고 가게를 나섰다. 비참한 날이었다. 신애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신애는 사람 많은 그 거리에서 미친 듯 울어제꼈다. 마치 태어나 세상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처럼 그렇게 거리 한 복판에서 미친 여자처럼 울어 젖혔다. 신애는 그대로 달리는 차에라도 뛰어들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신애는 차도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었다.
[그래. 죽음은 한순간이야. 이렇게 더 살면 뭐하니……. 이렇게 살아서 뭐하니……. 깨끗하게 죽자.]
신애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슬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해 졌다. 오열하던 눈물은 어느새 들어가 있었고, 신애의 눈은 광기로 빛난다. 그녀는 미쳐있었다. 신애는 차도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단념한 듯 그녀는 발을 대 디뎠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팔을 세차게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미쳤어!”
“그래. 나 미쳤어! 미친년이야! 그럼 그 꼴을 당하고 제정신인 년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아아악”
신애는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향해 악다구니를 써 댔다. 그 사람이 우현인양, 우현에게 풀지 못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시켰다. 미친 듯 악을 써대는 그녀 주변에 사람이 몰린지 오래였다. 남자는 신애의 따귀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쫙- 하는 소리가 주변을 울리고, 신애는 힘에 의해 바닥에 쓰려졌다. 신애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누워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그녀는 울었다. 그녀를 쳐다보던 남자는 한 강이었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던 한 강은 신애가 타임리스에서 나왔을 때부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오열하는 모습, 울부짖는 모습 모두를 보고 있었다. 한 강은 그녀를 달랠 생각이 없었다. 아픔도, 상처도 곪아서 터져야 낳는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는 가슴속에 뭉친 고름들을 그녀가 빨리 털어내길 빌었다. 하지만 신애가 도로로 발길을 돌리자 한 강은 그제야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한 강은 끝까지 타 버린 담배를 버리며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그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흐느끼는 신애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무척이나 좁아보였다. 그녀의 여린 어깨를 자신의 팔로 감싸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한 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 그녀에게 자신이 한 걸음 다가간다면 그녀는 분명 두 걸음 물러설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을 흩어놓았다.
“구경났습니까? 볼일 보세요! 세상 살다보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한 강의 말에 사람들은 시선은 한 강과 신애에게 두면서도 그 자리를 비켜 나갔다. 사람이 어느 정도 흩어지자 한 강은 신애를 들어올렸다. 저항할줄 알았던 그녀는 의외로 쉽게 그에게 몸을 맡기었다. 그녀도 지쳤던 모양이었다. 한 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등에 업었다.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한 강은 그녀의 따스한 눈물과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없이 안타까웠다. 이 한없이 가여운 여자에게 자신의 가치를 알려주고 싶었다. 얼마나 예쁘고, 얼마나 매력적인지, 이 여자에게 낱낱이 고해바치고 싶었다. 한 강은 그녀를 받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침대위에 그녀를 눕힐 때 까지 그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지친 표정으로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한 강은 내려다보았다. 마스카라가 얼룩져 얼굴은 엉망이었다. 한 강은 말없이 화장실로 가 수건에 물을 적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를 다루듯 그는 그녀를 소중히 다루고 있었다. 그녀를 편하게 자게 몸을 틀어주고 한 강은 신애의 집을 나서며 조그마하게 중얼댔다.
“당신은 자꾸 시선이 가게 만들어.”
신애는 습관적으로 눈이 번쩍 떠졌다. 그녀는 팔을 뻗어 자명종 시계를 들었다. 6시 30분이되기 몇 초전이었다. 잠시 후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기도 전에 신애는 자명종을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분명 누군가의 등에 업힌 것 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다음부터는 암흑 속이었다. 지친 탓인지 간만이 취한 숙면이었다. 신애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마스카라가 번져 엉망일줄 알았던 얼굴은 말끔하게 화장이 지워진 채였다. 누가 자신을 이리로 데리고 왔는지, 화장은 어떻게 지워졌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신애는 그저 멍하니 다시 침대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토가 나올 듯 몸은 으슬으슬 했다.
“그래. 아플 때가 됐어. 그렇게 참았으면 아플 때가 됐어.”
우현을 사귀면서 신애는 1년에 한번씩은 크게 앓았다. 그녀는 그것을 그와 사귀는 동안 연례행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녀는 자신이 왜 아픈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가슴속에 1년 동안 쌓아둔 상처들이 모여 고름이 터지는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신애는 핸드폰을 찾아 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언니네. 왜요?”
한참 꿈나라를 헤매는 듯 진아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 출근 못할 것 같아.”
“언니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응. 그러니깐 월차 좀 써줘.”
“언니 몇 일전에도 쉬어서 점장님이 한소리 하실 텐데…….”
“도저히 못갈 것 같아서 그래.”
“알았어요. 언니 몸조리 잘해요.”
진아는 걱정하는 투로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신애는 핸드폰을 그대로 바닥에 떨어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렸다. 어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잔 것 같았다. 신애는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지만, 이미 몸은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석고처럼 그녀의 몸은 단단히 굳어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젖어 옷이 몸에 들러붙었다. 신애는 가파르게 숨을 쉬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자신이 죽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애는 그대로 다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 강은 자신의 방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조급했다. 무언가 굉장히 두려웠으며, 불안한 복합적인 감정이 한 강을 괴롭히고 있었다. 한 강은 시계를 보았다. 그 책임감 강한 여자라면 분명 은행에 갔으리라는 생각에 한 강은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커다란 통 유리 너머로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있던 데스크는 비어있었고, 그녀 옆에 앉아있던 귀여운 여자는 밀려드는 사람에 정신이 없어보였다. 한 강은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한 곳으로 몰리는 듯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 강은 그녀의 집 쪽으로 차를 급하게 돌렸다. 계산을 두세 개씩 밟아 그녀의 현관 앞에서 초인종을 연거푸 눌렀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한 강은 그대로 뛰어나가 열쇠 수리공을 불러 문을 땄다. 한 강은 자신의 생각이 명중했음을 알았다. 그의 불안과 초조함은 그녀였다. 그녀는 그의 불안한 예감대로 였다. 얼마나 고열에 시달렸는지 몸은 자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그녀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신애는 아침에 눈을 뜨듯 스르륵 눈꺼풀이 들어올려졌다. 익숙한 천장이 아니었다. 코를 타고 병원의 냄새가 밀려들어왔다. 신애는 고개를 약간 돌렸다. 거기엔 누군가가 그녀의 침대 모서리에 고개를 박고 자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설잠이 깰까봐 조심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팔에는 링거가 꼽혀있었고, 자신을 간호하다 잠들었는지 그의 한손에는 조금 마른 물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가 잠깐 뒤척이자 그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렇게 순식간에 깨어날 줄 몰랐던 신애는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는 한 강이었다. 신애는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많이 수척해 보였다. 그는 거기서 잠들었었는지 옷은 이틀은 족히 입고 있어 보였다.
“여기가 어디예요?”
“어딘지 알면서 물어보지 마.”
그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냉정하고 차가운 말투였다. 신애는 무어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뚫어지듯 쳐다보던 한 강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조그마한 병실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더니 이내 신애를 향해 얼굴을 바짝 내밀며 도저히 모르겠다는 말투로 그녀를 추궁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여자야, 없는 여자야! 그렇게 아프면 전화라도 하던가!”
“전화 할 곳이……. 없었어요.”
“119도 몰라? 119도 모르냐고! 정말 너란 여자란.......”
“풋.”
“뭐야! 웃음이 나와?”
“고마워요.”
“뭐, 뭐가 고맙다는 거야!”
“걱정해줘서요. 그동안은 항상 혼자였거든요.”
“걱, 걱정해주는 것 아냐!”
한 강은 택도 없는 소리라는 듯 펄쩍 뛰었지만 신애는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적지 않게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고함소리마저 고마웠다. 그녀가 빙그레 다 안다는 듯 한 강을 보며 웃자 한 강은 잔뜩 머쓱한 표정으로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 밀었다.
“마셔! 수분 부족으로 또 쓰러지기 전에……. 그동안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려 댔는지 알기나 해? 아주 동해바다 만큼 흘려 댔을 꺼다!”
한 강은 말도 안 되는 비유법으로 틱틱대며 그녀에게 생수를 던지듯 넘기며 말했다. 신애는 생수를 따서 목을 간단히 축였다. 냉장고에서 꺼내서 차가울 줄 알았던 물은 예상외로 미지근해 있었다. 신애가 의아한 눈빛으로 한 강을 쳐다보자 한 강이 시선을 돌리며 우물거렸다.
“갑자기 냉수 먹으면 안 된다고. 그래서 내가 냉장고 코드 빼놨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배려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신애의 가슴속에 고마움으로 자리 잡았다. 저렇게 다감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사람도 있구나, 이래서 세상은 살만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강은 한동안 말없이 신애의 침대 밑에 걸터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노을이 질 때까지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신애는 그런 한 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창 밖을, 신애는 그를 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그의 하얀 얼굴에 그림자 드리워 질 때 즈음 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사귀기로 했던 것 기억나?”
“그건, 장난..........”
“그래. 처음엔 장난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난 지금........”
“알아. 누굴 사귈 마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너의 실연의 아픔을 잊게 해주겠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병을 고치는 건 의사야. 마음의 병을 고치는 건 사랑이지. 내가 너에게 사랑을 주겠어. 일명 실연극복 전문의!”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리고 우린 사귀기엔 서로에 대해 너무 몰라요.”
“다 알면서 사귄다는 것 자체가 웃긴 거야.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사귀는 거 아닌가?”
“말도, 말도 안 돼요. 어떻게 내가......”
“알았어. 불편하다는 거 알아. 그럼 이렇게 하자. 당분간은 친구로 지내자. 친구. 어때?”
“.............”
“하지만 명심해 둬. 내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가능성을 놔둘거라는 것을.”
진지한 표정이었던 한 강이 어느 사이인가 개 구진 얼굴을 지으며 말했다. 신애는 그의 제안이 싫지만은 않았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한없이 사랑받고 싶어졌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우현의 잔재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싶었다.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귀지 않을 것이라면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신애는 누군가에게 절실히 기대고 싶었다. 신애는 한 강이라는 사람의 넓은 등에 기대고 싶어졌다. 신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긍정의 뜻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한 강은 말이 없었다. 다만 신애 모르게 그도 빙그레 짧은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