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강은 은행 통 유리 너머의 신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안에 있는 한 강을 신애가 알아볼리 없지만 한 강은 모자 까지 눌러쓴 모양새로 힐끔 힐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박신애 스토커 다 되었군.”
한 강이 슬쩍 미소 지으며 싫지 않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때 창 문 너머 신애가 무엇이 그리 좋은 지 얼굴 한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티나게 웃음 짓는 일은 드문 일었다. 한 강은 바로 옆 좌석에 놓아둔 사진기를 들어 그녀를 담기 시작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담고 있었다. 오늘 한 강은 그녀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몇 시간이고 앉아있었던 것이었다. 한 강은 다 찍은 사진기를 흡족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기다린 보람이 있군.”
원하는 것을 얻은 개선장군처럼 한 강은 얼굴 가득 만족감을 품고 그제야 자리를 떴다. 한 강은 집으로 들어가 현상을 위해 마련해둔 작은 밀실로 걸음을 옮겼다. 일초라도 빨리 그녀의 사진을 현상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급하게 계단을 두 세 개씩 밟고 올라가 현관문 번호를 입력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와, 형?”
“어? 언제 왔냐? 잠깐만 기다려!”
한 강이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밀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한참이 지난 후 한 강이 역시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나오면서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는 남자에게 말했다.
“그래. 시킨 일은 잘 한거냐?”
“뭐, 그럭저럭.”
“이 녀석이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그럭저럭이라는게 말이 되냐?”
한 강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앉은 남자의 목을 졸라댔다. 남자가 항복이라는 뜻으로 팔을 들자 그제야 풀어주며 남자에게 캔 맥주 하나를 건넸다.
“그래. 어떻게 꼬셨냐?”
“뭐, 금방 넘어오던걸? 그런 여자 그렇잖아. 조금만 더 빛깔이 좋으면 찾아오는 날벌레들처럼.”
남자가 한 강의 물음에 생각하기 조차 싫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한 강이 피식 웃으며 맞받아 쳤다.
“아무리 그런 여자라 할지라도 나의 전술을 전수받지 못했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암.”
“형 진짜 이제 코 꿴 거야?”
“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거 같다!”
한 강은 코 퀬다는 단어를 반복하여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소파에 앉은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캔 맥주를 따 마시면서 한 강에게 말했다.
“근데 그 여자애가 민아 친구인건 어떻게 안거야?”
“솔직히 예쁘장하게 생겼잖아. 너도 알지? 나의 명석한 기억력! 예전에 너희 집에서 본 게 기억이 나더라고!”
“근데 우현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나쁜 놈이야?” “이보게 아우. 카사노바에게도 지켜야 할 룰이 있는 법이라고. 사랑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 자! 사랑으로 비참하게 만들어 주리라!”
“뭐 형이 그렇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소파에 앉은 사람은 채민석이었다. 채민석은 한 강의 대한 후배로써, 한 강과는 절친한 사이었다. 한 강은 클럽에서 우현의 옆에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 여자가 채민석의 동생 채민아의 친구라는 것을 눈치 채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한번 꼬셔볼까 싶어 자신의 기억 리스트에 넣어둔 여자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한 강은 머리가 명석한 남자였다. 기억 속에 넣어둔 사람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그녀를 잊을 리 없었다. 한 강은 신애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결심했다. 우현에게 남은 것 마저 빼앗기로, 그래서 한 강이 채민석에게 부탁을 했었다. 소연이라는 그 여자를 유혹하라고. 한 강의 제의를 채민석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 강에게 무슨 일이냐는 이유 또한 묻지 않아준 기특한 후배였다. 한 강은 옷을 집어 들며 채민석에게 말했다.
“가자, 후배. 오랜만에 이 선배가 거하게 쏠 테니깐!”
한 강과 채민석은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일본풍의 선술집은 검은색과 붉은색이 조화롭게 섞여 묘한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한 강과 채민석은 간단히 술과 안주거리를 시키고 마주 앉았다.
“도대체 그 여자의 뭐가 형 마음을 빼앗은 거야?”
“너 그거 아냐? 애들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그것에 대한 염원이 더 커져. 나도 그래. 처음 그 여자를 보았을 때 나한테 쉽사리 넘어올 여자가 아니라 는걸 알았지. 그래서 더 그 여자를 가지고 싶었는지도 몰라.”
“단지 천하의 한 강이 가지고 싶다는 염원만으로 한 여자에게 이렇게 공들인다는 것은 말이 안돼.”
채민석은 한 강이 괜한 호기를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믿기엔 한 강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해 보였다.
“형, 진심이야?”
“그래. 진심이야. 드디어 천하의 한 강이 임자 만났다.”
“아무리 그래도……. 도대체 그 여자의 뭐가 형을 잡은 거야?”
“글쎄. 그 여자의 무관심? 절대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마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그녀를 보면 가슴이 떨리기도 하고 두근대기도 해. 천하의 한 강이 유치한 원시적인 방법까지 쓰고 있다면 말 다한 거지.”
“형도 참. 소연이는 어떻게 할까?” “아직은 아니야. 그 여자도 사랑 우습게 여긴 벌을 받아야 해. 당분간은 잘해 줘. 너한테 빠지게 말이야.”
한 강은 소연과 우현 둘 다에게 사랑을 우습게 여긴 벌을 주고 싶었다. 그 대책중 하나가 소연과 우현의 사이에 채민석을 끼워 넣은 것이었다. 민석은 알아주는 부잣집 아들이며, 명석한 두뇌의 재원이었다. 그의 겉모습만으로도 그에게 빠져들 여자는 많았다. 더군다나 소연같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길 좋아하는 여자로써 채민석은 최상의 남자일 것이다. 한 강은 최대한 소연이 채민석에게 빠지길 바랬다. 그 여자에게 신애 같은 순정은 기대할 수 없을 테지만 말이었다.
아침의 공기는 저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날씨가 따스해져서 그런지 새벽 공기마저 따스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강은 스르르 눈을 들어올렸다. 피곤하지도, 잠이 자신을 더 붙잡지도 않는 기분 좋은 날이었다. 한 강은 잠이 깬지 오래였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천장을 바라보고 생글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한 강의 시선이 닿은 곳에 신애가 있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생글거리는 신애의 사진이 한 강의 천장에서 그를 행해 웃고 있었다.
“정말 다른 사람이 보면 미친놈이라고 하겠군.”
한 강은 여전히 웃음이 머금은 얼굴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랑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아침을 시작한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지 한 강은 새삼 사랑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게 점점 더 빠져 들어갈수록 변해가는 자신이 싫지만은 않았다. 여러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이런 감정은 없었다. 이렇게 떨리고 가슴 두근거리는 감정은 없었다. 한 강은 신애가 마법같이 느껴졌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가지고 싶어 미치게 만드는 마법의 묘약 같은 여자라고 느껴졌다.
우현은 며칠째 방안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해가 지는지도 해가 뜨는지도 모르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우현을 힘들게 했다. 우현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자신이 왜 이렇게 힘든지 알 수 없었다. 소연을 사랑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연의 몸을 사랑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소연이 떠나버린 지금 갑작스레 그녀가 사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고 믿었던 여자가 사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현은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현이 그렇게 상실감이 느낄 만큼 우현은 소연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았는데 헤어지고 난 지금 그녀를 향한 이 미칠 것 같은 그리움은 무엇인가. 우현은 재킷을 집어 들고 상근이네 가게로 향했다.
“뭐가 문제야?” “난 분명 소연의 몸이 좋았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니었다고. 근데 미치겠어. 소연이가 다른 남자랑 그럴 것을 생각하니깐 미칠 것 같아.” “이기적인 놈. 넌 진짜 이기적인 놈이야. 가질 수 없으니깐 간절해 지는 거겠지. 넌 소연이라는 그 여자 사랑하지 않았어. 다만 가질 수 없는 상황이니깐 사랑했다는 빌미로 간절함을 나타내는 거겠지.”
상근의 말에 우현은 아무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신애를 보내놓고 밀려오는 그리움과, 소연을 빼앗기고 느끼는 상실감은 다른 듯 같은 듯 해 보였다. 상근의 말처럼 가질 수 없다고 느꼈던 그 순간부터, 아니 채민석과 자신이 게임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소연을 사랑했다고 여긴 것 같기도 했다.
“마음이 복잡하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 “살맛이 좀 나나보다? 사랑 타령 할 시간도 있고 말이야. 그것도 복에 겨운 거다 너. 세상 풍파 겪다보면 사랑이라는 게 있었는지조차 까먹는 것은 시간차이니깐.”
우현은 상근이네 가게에서 만취하도록 술을 마셔댔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또렷해지는 그녀의 몸이 우현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한순간 천해보이던 소연이 여신이 되고 다가갈 수 없는 신분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우현은 데려다 주겠다는 상근을 뒤로 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동인천으로 가주세요.”
우현은 소연의 동네를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그녀와 결판을 짓지 못할 것 같았다. 잡을 수 없으면 포기라도 되겠지 싶은 심정이었다. 택시가 동인천으로 향하는 동안 우현은 소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외박은 안하는 그녀이기에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소연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우현이.”
[왜 전화했어?]
“나 지금 니네집앞으로 가니깐 10분후에 나와. 안나오면 벨 누를 테니깐 그런 줄 알아”
우현은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소연은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소연의 부모님은 공무원이셨다. 그래서 그런지 모범적인 것에 상당히 예민한 분들이셨다. 그래서 날라리 소연이도 부모님 앞에서 만큼은 요조숙녀인 척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밤중에 우현이 벨을 누른다면 소연은 분명 난처해 할 것이 분명했다. 나오지 못하고는 못 베길 것이었다. 우현은 소연의 집 앞에 택시를 세웠다. 우현의 생각처럼 소연은 그가 벨을 누를까 두려웠는지 아니면 그가 보고 싶었는지 집 앞에 서있었다. 우현은 제발 소연이 서 있는 이유가 후자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우현을 보자마자 날카롭게 말하는 소연의 목소리에 그의 환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뭐하는 짓이야? 지금 몇신줄이나 알아?”
“미안하다.”
소연의 화난 목소리에 우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화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야기 좀 하자.”
“여기서 해.”
소연의 팔을 끌며 공원으로 향하려고 했던 그에게 소연이 매정히 그를 뿌리치며 말했다. 소연에게 뿌리쳐진 손을 우현은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신애라는 순종적인 여자와 사귀었던 그로써는 상상 할 수 없는 대접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소연은 자신이 잡아야 할 여신으로 보였기 때문에 우현은 이런 대접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한테 돌아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잘할게! 내가 좀더 잘 할게!”
“싫어! 구질 거리게 이러지 마! 헤어지자는데 이러는데 너무 구질거리잖아? 우리 쿨하게 헤어지자!”
우현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려 입술을 움직이려다 굳게 닫았다. 우현은 소연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신애에게 냉정했던 자신의 모습과 행동을 소연이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현은 더 이상 그녀에게 자신의 자리는 없음을 알았다. 우현이 생각을 그렇게 정리하자 가슴속에서 슬픔이 밀려왔다. 고작 1달 남짓 사귀었던 그녀가 잡을 수 없을 때 더 간절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우현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신애와 헤어질 때 우현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신애가 벌레처럼 느껴졌다. 어떻게든 떨쳐 버려야 하는 벌레처럼, 그녀를 떨쳐버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소연에게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우현은 말없이 돌아섰다. 잡을 수 없는 그녀임을 알기에 우현은 말없이 그대로 돌아섰다.
“쳇, 신애를 버린 벌을 받는 모양이군.”
우현은 슬며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눈물이 자신이 매몰차게 버린 신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갖을 수 없는 소연에 대한 사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눈물이 났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눈물이 그를 흘러 내렸다.
신애는 집 앞에서 밤공기를 맞고 있었다. 신애는 제법 초초한 얼굴로 아파트 현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신애는 조금 전 받은 한 강의 전화가 떠올랐다.
[지금 약 2분후면 도착할 예정이니깐 나와서 기다려 주십시오]
신애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한 강은 통보하듯 그렇게 말하고는 끊어버렸다. 신애는 한 강의 전화에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색 치마에 진분홍 카디건을 살짝 걸치면서 거울을 수도 없이 보았다. 신애의 가슴이 불안한 듯, 기쁜 듯 떨렸다. 신애는 재빨리 아파트 현관으로 나가면서도 수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신애는 자신의 떨리는 가슴을 한 강에게 들킬까봐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연신 한 강이 올 것 같은 어두운 길을 바라보았다.
“이봐, 박신애!”
한 강이 신애를 먼저 발견했는지 저 쪽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한 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신애의 심장이 순간 덜컥 하고 내려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쩜 신애는 자신의 심장이 먼저 한 강과 사랑에 빠진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강이 신애를 향해 단숨에 뛰어왔다.
“밤중에 무슨 일이예요?” “이것!”
한 강이 아스크림이 담겨 있는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아스크림 중에 뭘 제일 좋아해?”
“체리…….”
“체리쥬빌레! 맞지? 그럴 줄 알았어!”
한 강이 큰 한통 가득 담긴 체리쥬빌레를 꺼내 신애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 통에 원래 4~5개 정도 담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냥 체리쥬빌레로 다 담아달라고 했어. 잘했지?”
한 강은 신이 난 듯 잔뜩 기분 좋은 목소리로 신애에게 재빨리 말하고 있었다. 신애는 그런 한 강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아스크림은 왜?”
신애의 물음에 한 강이 수줍은 사춘기 소년처럼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슬슬 뒷걸음치며 말했다.
“나 이만 갈래! 사실 그쪽 얼굴이 보고 싶은데 볼만한 핑계거리가 없잖아! 그래서 사온거야!”
한 강이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그러면서 뒤돌아 어깨위로 손을 몇 번 흔들어 주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로 같아. 쿡.”
신애가 그런 한 강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보면 볼수록 그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신애였다. 하지만 신애는 그럴수록 겁이 났다. 저런 사람이 자신에게 가당한 사람인가 싶어 두려움이 앞섰다.
[당신은 가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사람 같아요.]
신애는 한 강이 다가오면 올수록 불안했다. 항상 곁에 머물다가 자신을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바람 같은 그 사람을 잡고 싶었다. 신애는 한 강을 잡고 싶었다. 한 강을 놓치면 평생 후회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신애는 어둠 속 한 강이 사라질 때 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신애는 한 강의 뒷모습을, 어둠 속에 있는 우현은 신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30개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9) 사랑은 가질 수 없을 때 더 간절하다.
30개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
(9) 사랑은 가질 수 없을 때 더 간절하다.
한 강은 은행 통 유리 너머의 신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 안에 있는 한 강을 신애가 알아볼리 없지만 한 강은 모자 까지 눌러쓴 모양새로 힐끔 힐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박신애 스토커 다 되었군.”
한 강이 슬쩍 미소 지으며 싫지 않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때 창 문 너머 신애가 무엇이 그리 좋은 지 얼굴 한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티나게 웃음 짓는 일은 드문 일었다. 한 강은 바로 옆 좌석에 놓아둔 사진기를 들어 그녀를 담기 시작했다. 그녀가 웃는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담고 있었다. 오늘 한 강은 그녀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몇 시간이고 앉아있었던 것이었다. 한 강은 다 찍은 사진기를 흡족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기다린 보람이 있군.”
원하는 것을 얻은 개선장군처럼 한 강은 얼굴 가득 만족감을 품고 그제야 자리를 떴다. 한 강은 집으로 들어가 현상을 위해 마련해둔 작은 밀실로 걸음을 옮겼다. 일초라도 빨리 그녀의 사진을 현상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급하게 계단을 두 세 개씩 밟고 올라가 현관문 번호를 입력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와, 형?”
“어? 언제 왔냐? 잠깐만 기다려!”
한 강이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밀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한참이 지난 후 한 강이 역시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나오면서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는 남자에게 말했다.
“그래. 시킨 일은 잘 한거냐?”
“뭐, 그럭저럭.”
“이 녀석이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그럭저럭이라는게 말이 되냐?”
한 강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앉은 남자의 목을 졸라댔다. 남자가 항복이라는 뜻으로 팔을 들자 그제야 풀어주며 남자에게 캔 맥주 하나를 건넸다.
“그래. 어떻게 꼬셨냐?”
“뭐, 금방 넘어오던걸? 그런 여자 그렇잖아. 조금만 더 빛깔이 좋으면 찾아오는 날벌레들처럼.”
남자가 한 강의 물음에 생각하기 조차 싫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한 강이 피식 웃으며 맞받아 쳤다.
“아무리 그런 여자라 할지라도 나의 전술을 전수받지 못했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 암.”
“형 진짜 이제 코 꿴 거야?”
“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거 같다!”
한 강은 코 퀬다는 단어를 반복하여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소파에 앉은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캔 맥주를 따 마시면서 한 강에게 말했다.
“근데 그 여자애가 민아 친구인건 어떻게 안거야?”
“솔직히 예쁘장하게 생겼잖아. 너도 알지? 나의 명석한 기억력! 예전에 너희 집에서 본 게 기억이 나더라고!”
“근데 우현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나쁜 놈이야?”
“이보게 아우. 카사노바에게도 지켜야 할 룰이 있는 법이라고. 사랑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 자! 사랑으로 비참하게 만들어 주리라!”
“뭐 형이 그렇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소파에 앉은 사람은 채민석이었다. 채민석은 한 강의 대한 후배로써, 한 강과는 절친한 사이었다. 한 강은 클럽에서 우현의 옆에 있는 여자를 보는 순간 그 여자가 채민석의 동생 채민아의 친구라는 것을 눈치 채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한번 꼬셔볼까 싶어 자신의 기억 리스트에 넣어둔 여자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한 강은 머리가 명석한 남자였다. 기억 속에 넣어둔 사람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그녀를 잊을 리 없었다. 한 강은 신애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결심했다. 우현에게 남은 것 마저 빼앗기로, 그래서 한 강이 채민석에게 부탁을 했었다. 소연이라는 그 여자를 유혹하라고. 한 강의 제의를 채민석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한 강에게 무슨 일이냐는 이유 또한 묻지 않아준 기특한 후배였다. 한 강은 옷을 집어 들며 채민석에게 말했다.
“가자, 후배. 오랜만에 이 선배가 거하게 쏠 테니깐!”
한 강과 채민석은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일본풍의 선술집은 검은색과 붉은색이 조화롭게 섞여 묘한 이국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한 강과 채민석은 간단히 술과 안주거리를 시키고 마주 앉았다.
“도대체 그 여자의 뭐가 형 마음을 빼앗은 거야?”
“너 그거 아냐? 애들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그것에 대한 염원이 더 커져. 나도 그래. 처음 그 여자를 보았을 때 나한테 쉽사리 넘어올 여자가 아니라 는걸 알았지. 그래서 더 그 여자를 가지고 싶었는지도 몰라.”
“단지 천하의 한 강이 가지고 싶다는 염원만으로 한 여자에게 이렇게 공들인다는 것은 말이 안돼.”
채민석은 한 강이 괜한 호기를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믿기엔 한 강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해 보였다.
“형, 진심이야?”
“그래. 진심이야. 드디어 천하의 한 강이 임자 만났다.”
“아무리 그래도……. 도대체 그 여자의 뭐가 형을 잡은 거야?”
“글쎄. 그 여자의 무관심? 절대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마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그녀를 보면 가슴이 떨리기도 하고 두근대기도 해. 천하의 한 강이 유치한 원시적인 방법까지 쓰고 있다면 말 다한 거지.”
“형도 참. 소연이는 어떻게 할까?”
“아직은 아니야. 그 여자도 사랑 우습게 여긴 벌을 받아야 해. 당분간은 잘해 줘. 너한테 빠지게 말이야.”
한 강은 소연과 우현 둘 다에게 사랑을 우습게 여긴 벌을 주고 싶었다. 그 대책중 하나가 소연과 우현의 사이에 채민석을 끼워 넣은 것이었다. 민석은 알아주는 부잣집 아들이며, 명석한 두뇌의 재원이었다. 그의 겉모습만으로도 그에게 빠져들 여자는 많았다. 더군다나 소연같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길 좋아하는 여자로써 채민석은 최상의 남자일 것이다. 한 강은 최대한 소연이 채민석에게 빠지길 바랬다. 그 여자에게 신애 같은 순정은 기대할 수 없을 테지만 말이었다.
아침의 공기는 저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날씨가 따스해져서 그런지 새벽 공기마저 따스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강은 스르르 눈을 들어올렸다. 피곤하지도, 잠이 자신을 더 붙잡지도 않는 기분 좋은 날이었다. 한 강은 잠이 깬지 오래였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만 천장을 바라보고 생글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한 강의 시선이 닿은 곳에 신애가 있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생글거리는 신애의 사진이 한 강의 천장에서 그를 행해 웃고 있었다.
“정말 다른 사람이 보면 미친놈이라고 하겠군.”
한 강은 여전히 웃음이 머금은 얼굴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랑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아침을 시작한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지 한 강은 새삼 사랑의 위대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에게 점점 더 빠져 들어갈수록 변해가는 자신이 싫지만은 않았다. 여러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이런 감정은 없었다. 이렇게 떨리고 가슴 두근거리는 감정은 없었다. 한 강은 신애가 마법같이 느껴졌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가지고 싶어 미치게 만드는 마법의 묘약 같은 여자라고 느껴졌다.
우현은 며칠째 방안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다. 해가 지는지도 해가 뜨는지도 모르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우현을 힘들게 했다. 우현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자신이 왜 이렇게 힘든지 알 수 없었다. 소연을 사랑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연의 몸을 사랑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소연이 떠나버린 지금 갑작스레 그녀가 사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랑이 아니라고 믿었던 여자가 사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현은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현이 그렇게 상실감이 느낄 만큼 우현은 소연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았는데 헤어지고 난 지금 그녀를 향한 이 미칠 것 같은 그리움은 무엇인가. 우현은 재킷을 집어 들고 상근이네 가게로 향했다.
“뭐가 문제야?”
“난 분명 소연의 몸이 좋았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니었다고. 근데 미치겠어. 소연이가 다른 남자랑 그럴 것을 생각하니깐 미칠 것 같아.”
“이기적인 놈. 넌 진짜 이기적인 놈이야. 가질 수 없으니깐 간절해 지는 거겠지. 넌 소연이라는 그 여자 사랑하지 않았어. 다만 가질 수 없는 상황이니깐 사랑했다는 빌미로 간절함을 나타내는 거겠지.”
상근의 말에 우현은 아무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신애를 보내놓고 밀려오는 그리움과, 소연을 빼앗기고 느끼는 상실감은 다른 듯 같은 듯 해 보였다. 상근의 말처럼 가질 수 없다고 느꼈던 그 순간부터, 아니 채민석과 자신이 게임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소연을 사랑했다고 여긴 것 같기도 했다.
“마음이 복잡하다. 사랑이라는 게 뭔지.”
“살맛이 좀 나나보다? 사랑 타령 할 시간도 있고 말이야. 그것도 복에 겨운 거다 너. 세상 풍파 겪다보면 사랑이라는 게 있었는지조차 까먹는 것은 시간차이니깐.”
우현은 상근이네 가게에서 만취하도록 술을 마셔댔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또렷해지는 그녀의 몸이 우현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한순간 천해보이던 소연이 여신이 되고 다가갈 수 없는 신분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우현은 데려다 주겠다는 상근을 뒤로 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동인천으로 가주세요.”
우현은 소연의 동네를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그녀와 결판을 짓지 못할 것 같았다. 잡을 수 없으면 포기라도 되겠지 싶은 심정이었다. 택시가 동인천으로 향하는 동안 우현은 소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외박은 안하는 그녀이기에 집에 있을 시간이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소연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우현이.”
[왜 전화했어?]
“나 지금 니네집앞으로 가니깐 10분후에 나와. 안나오면 벨 누를 테니깐 그런 줄 알아”
우현은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소연은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소연의 부모님은 공무원이셨다. 그래서 그런지 모범적인 것에 상당히 예민한 분들이셨다. 그래서 날라리 소연이도 부모님 앞에서 만큼은 요조숙녀인 척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밤중에 우현이 벨을 누른다면 소연은 분명 난처해 할 것이 분명했다. 나오지 못하고는 못 베길 것이었다. 우현은 소연의 집 앞에 택시를 세웠다. 우현의 생각처럼 소연은 그가 벨을 누를까 두려웠는지 아니면 그가 보고 싶었는지 집 앞에 서있었다. 우현은 제발 소연이 서 있는 이유가 후자이기를 바랬다. 하지만 우현을 보자마자 날카롭게 말하는 소연의 목소리에 그의 환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뭐하는 짓이야? 지금 몇신줄이나 알아?”
“미안하다.”
소연의 화난 목소리에 우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화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야기 좀 하자.”
“여기서 해.”
소연의 팔을 끌며 공원으로 향하려고 했던 그에게 소연이 매정히 그를 뿌리치며 말했다. 소연에게 뿌리쳐진 손을 우현은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신애라는 순종적인 여자와 사귀었던 그로써는 상상 할 수 없는 대접이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소연은 자신이 잡아야 할 여신으로 보였기 때문에 우현은 이런 대접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한테 돌아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잘할게! 내가 좀더 잘 할게!”
“싫어! 구질 거리게 이러지 마! 헤어지자는데 이러는데 너무 구질거리잖아? 우리 쿨하게 헤어지자!”
우현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려 입술을 움직이려다 굳게 닫았다. 우현은 소연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신애에게 냉정했던 자신의 모습과 행동을 소연이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현은 더 이상 그녀에게 자신의 자리는 없음을 알았다. 우현이 생각을 그렇게 정리하자 가슴속에서 슬픔이 밀려왔다. 고작 1달 남짓 사귀었던 그녀가 잡을 수 없을 때 더 간절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우현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신애와 헤어질 때 우현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신애가 벌레처럼 느껴졌다. 어떻게든 떨쳐 버려야 하는 벌레처럼, 그녀를 떨쳐버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소연에게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우현은 말없이 돌아섰다. 잡을 수 없는 그녀임을 알기에 우현은 말없이 그대로 돌아섰다.
“쳇, 신애를 버린 벌을 받는 모양이군.”
우현은 슬며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눈물이 자신이 매몰차게 버린 신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갖을 수 없는 소연에 대한 사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눈물이 났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눈물이 그를 흘러 내렸다.
신애는 집 앞에서 밤공기를 맞고 있었다. 신애는 제법 초초한 얼굴로 아파트 현관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신애는 조금 전 받은 한 강의 전화가 떠올랐다.
[지금 약 2분후면 도착할 예정이니깐 나와서 기다려 주십시오]
신애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한 강은 통보하듯 그렇게 말하고는 끊어버렸다. 신애는 한 강의 전화에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색 치마에 진분홍 카디건을 살짝 걸치면서 거울을 수도 없이 보았다. 신애의 가슴이 불안한 듯, 기쁜 듯 떨렸다. 신애는 재빨리 아파트 현관으로 나가면서도 수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신애는 자신의 떨리는 가슴을 한 강에게 들킬까봐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연신 한 강이 올 것 같은 어두운 길을 바라보았다.
“이봐, 박신애!”
한 강이 신애를 먼저 발견했는지 저 쪽 어둠 속에서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한 강의 얼굴을 보는 순간 신애의 심장이 순간 덜컥 하고 내려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쩜 신애는 자신의 심장이 먼저 한 강과 사랑에 빠진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강이 신애를 향해 단숨에 뛰어왔다.
“밤중에 무슨 일이예요?”
“이것!”
한 강이 아스크림이 담겨 있는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아스크림 중에 뭘 제일 좋아해?”
“체리…….”
“체리쥬빌레! 맞지? 그럴 줄 알았어!”
한 강이 큰 한통 가득 담긴 체리쥬빌레를 꺼내 신애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 통에 원래 4~5개 정도 담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냥 체리쥬빌레로 다 담아달라고 했어. 잘했지?”
한 강은 신이 난 듯 잔뜩 기분 좋은 목소리로 신애에게 재빨리 말하고 있었다. 신애는 그런 한 강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아스크림은 왜?”
신애의 물음에 한 강이 수줍은 사춘기 소년처럼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슬슬 뒷걸음치며 말했다.
“나 이만 갈래! 사실 그쪽 얼굴이 보고 싶은데 볼만한 핑계거리가 없잖아! 그래서 사온거야!”
한 강이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그러면서 뒤돌아 어깨위로 손을 몇 번 흔들어 주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로 같아. 쿡.”
신애가 그런 한 강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보면 볼수록 그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신애였다. 하지만 신애는 그럴수록 겁이 났다. 저런 사람이 자신에게 가당한 사람인가 싶어 두려움이 앞섰다.
[당신은 가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사람 같아요.]
신애는 한 강이 다가오면 올수록 불안했다. 항상 곁에 머물다가 자신을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바람 같은 그 사람을 잡고 싶었다. 신애는 한 강을 잡고 싶었다. 한 강을 놓치면 평생 후회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신애는 어둠 속 한 강이 사라질 때 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신애는 한 강의 뒷모습을, 어둠 속에 있는 우현은 신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