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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제각기 다른 사랑을 한다.
신애는 새벽 요란스럽게 울리는 벨소리에 잠이 깨었다. 연신 벨을 누르는 누군가는 꽤나 급한 모양이었다. 신애는 쌀쌀한 새벽 공기 탓에 근처에 놓여있던 카디건을 대충 걸치고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 작은 창 너머로 신애의 엄마인 진숙이 위태롭게 서있었다. 잠옷차림에 엄마를 보는 순간 신애는 다급한 마음에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엄마가 서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핑크빛 잠옷차림으로 아직은 쌀쌀한 새벽 날씨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엄마가 서 있었다. 신애는 엄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당겼다. 엄마는 힘조차 없는지 신애의 작은 힘에도 쉽사리 당겨져 왔다. 신애와 엄마는 말이 없었다. 신애는 엄마를 침대 모퉁이에 앉히고선 커피를 내렸다. 신애가 커피를 가져가자 엄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신애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다가 텔레비전 받침대 밑에서 작은 구급상자를 꺼내 엄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엄마의 팔을 조금 걷자, 유리조각에 찔렸는지 피가 제법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애는 말없이 상처를 치료하고 지압붕대를 감았다. 익숙한 솜씨였다. 상처를 다 치료하고 나자 신애가 그제야 잔뜩 잠긴 목소리로 엄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미안하다. 이런 꼴 보여서.”
“이혼해.”
“...........”
신애의 말에 엄마는 말이 없었다. 오래전부터 신애는 엄마에게 이혼을 권해 왔었다. 그때 마다 엄마는 묵묵부답이었다. 신애는 그런 엄마가 답답했다. 같은 여자로써,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엄마를 팼었다. 처음에는 따귀 한대로 시작하던 그 매질이 이제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변해버린것이다. 그렇게 까지 사태가 악화된 것은 엄마 책임이라고 신애는 생각했다. 신애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대로 사태를 방관하고 있다가는 엄마의 목숨마저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에 신애는 오랫동안 참고 있던 말을 쏟아내었다.
“제발, 엄마 이혼해.”
“그렇게는 못해.”
단호한 말투였다. 마치 이혼이라는 문제는 아예 할 수 없는 것처럼, 진숙은 대답했다. 그런 진숙으로 보며 신애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나도 이제 성인이야.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너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 이유가 다는 아니야.”
진숙은 걷어져 있는 잠옷을 내리며 말했다. 신애는 알고 있었다. 이미 엄마는 아버지에게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폭력에 관해서 나오더라. 가정폭력. 그게 하도 맞다보면 나중에는 안 때리는 게 더 불안하다고 하더라. 엄마도 그 지경이라고.”
“그래. 나도 안다. 나도 알아.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거겠니.”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아!”
“목소리 좀 줄여라. 남들 듣겠다.”
“들으면 좀 어때! 남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엄마 자신이 제일 중요한 거라고!”
신애는 한껏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엄마는 신애의 목소리를 신경 쓰며, 행여 주변사람이 들을까봐 잔뜩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신애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지극히 미련 곰탱이인 것은 엄마 탓이라고 떠넘기고 있었다.
“엄마. 그거 알아? 나 우현이랑 헤어졌어.”
“왜? 네가 잘못이라도 했니?”
“엄마는 그게 문제야. 무조건 여자가 숙여야 한다고 엄마가 그렇게 나 기른 거잖아. 요즘 애들은 안 그런데, 내 성격 이런 것도 다 엄마 때문이야.”
진숙은 옛날여자였다. 여자가 무조건 복종하고 남자의 말에 따르는 옛날여자였다. 신애는 그런 진숙 때문에 어려서부터 공부보다는 남자의 말에 순종하는 법 먼저 배웠다. 신애의 말에 진숙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의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숙은 신애가 자기 자식이지만 요즘 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자신 때문에 딸이 힘들어 질까봐 염려가 되는 그녀였다.
“미안하다. 내가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학교 다닐 때 애들이 나보고 바보라고 하더라. 왜 바보라고 하는 줄 알아? 내가 잘했든 잘 못했든 미안하다고 하니깐, 내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없으니깐 그러는 거야. 그런데 내 이런 성격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 바로 엄마라고!”
신애는 악다구니 쳤다. 엄마에게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들을 토해냈다. 신애의 절규하는 모습을 진숙은 바라보고 있었다. 진숙은 애써 흐르려는 눈물을 참으며 신애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중얼거리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신애는 우현에게 그런 꼴을 당하고도 아직도 그를 마음에 품고 있는 자신이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엄마인 진숙에게 그 짐을 넘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숙은 울음을 토해내는 자신의 딸 신애의 등을 말없이 매만졌다. 한참을 울던 신애가 울다 지쳐 잠이 들 때쯤 진숙은 신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소중한 딸이었다. 그런 딸이 자신의 전처를 밟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남편인 민철을 버리기에는 자신이 너무 많이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숙은 신애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시 30분이되기 몇 초전에 신애의 눈이 떠졌다. 신애는 습관적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있어야 할 엄마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신애는 가슴 한 구석에 돌덩이를 올려다 놓은 것 같이 묵직해졌다. 엄마에게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죄스러웠다. 엄마이기에 투정을 부렸던 그녀였지만, 신애도 알고 있었다. 엄마인 진숙의 아픔을……. 그런 아픔은 외면한 채 너무 몰아붙인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은 그녀였다. 신애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음을. 엄마의 사랑이 자신과 우현의 사랑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복받지 못한 사랑.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자신의 엄마인 진숙이 한 없이 가여워 졌다. 그러면서 신애는 다짐했다. 더 이상 축복받지 못한 사랑은 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한 강은 훤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천장에 붙여 놓은 신애의 웃는 모습을 보는 한 강이 표정에도 연신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히쭉대기도 하고, 진지해 지기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했다. 그때,
“형, 미친 거야? 왜 웃었다, 진지했다 그러는 거야?”
언제 왔는지 채민석이 현관문 앞에서 한 강을 한심한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한 강이 채민석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나 미쳤다. 사랑에 미친놈이다!”
“뭐야? 그 반응은? 그 여자랑 화해 한 거야?”
채민석이 한 강의 반응에 어이없어 하며 묻자, 한 강이 가지고 있던 베게를 채민석을 향해 던지며 버럭 거렸다.
“이제 형수님이라고 불러! 그 여자가 뭐냐? 그 여자가!”
채민석은 한 강이 던진 베게를 끌어안고 편안해 보이는 감색 소파에 앉았다.
“뭐야? 그럼 정말 잘 됐단 말이야?”
“뭐냐? 탐탁치 않아 하는 그 반응은?”
“그럼 형 나한테 한턱 쏴야 하는 거 아니야? 나 때문에 화해한거잖아.”
채민석의 말에 한 강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쿡, 고맙다.”
“형, 경제 기사 담당 하지 말고, 차라리 연애학 뭐 이런 기사 쓰는 게 어때? 점점 더 로맨티스트가 되어가는거 같다? 잘 쓸 것 같은데 어때?”
핀잔을 주는 채민석을 향해 한 강은 그저 한번 피식거렸을 뿐이었다. 방금 내린 커피를 머그잔 가득 따라 채민석에게 건네면서 한 강이 물었다.
“그래. 소연이랑은 잘 되어가는거야?”
“대충은. 근데 귀찮아 죽겠어. 정말 싫어하는 타입이야.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조르긴 또 얼마나 조르는지. 게다가 나 참 웃겨서…….”
“왜?”
한 강이 채민석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으며 물자, 채민석이 정말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걔 핸드폰에 내 이름이 뭐라고 적혀있는줄 알아 형?”
“뭐라고 적혀 있는데?” “아우디 오빠”
“뭐? 아우디 오빠? 뭐 그런 계집애가 다 있냐?”
민석의 답변에 한 강이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를 툭 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요즘 여자들의 몇몇이 남자의 재력을 보며 만난다는 말은 들었지만, 사귀는 남자에게 아우디 오빠라는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시키는 정도일 줄은 몰랐다. 채민석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난다는 표정으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한 강이 그런 민석의 어깨를 툭 치며 위로하자 민석이 한 강에게 물었다.
“걔 언제까지 만나야 해?”
“오늘 까지! 근데 헤어질 때 말해줘. 일부러 접근 했다는 말.”
“그걸 꼭 말해야 해?”
한 강의 말에 민석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알아야지. 그래야 앞으로 그런 실수 안하지. 사랑에 아파보지 못해서 그래. 그 여자애 말이야.”
“사랑에 아파볼 겨를이 있을까? 대달라고 하면 대주는 계집인데.”
민석이 조롱하듯 말했다. 민석은 조금 답답한지 목을 옭죄는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있었다.
“뭐야? 소연이랑 잔거야?” “그럼. 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소연이가 먼저 올라가자고 부추겼으니깐!”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질책하는 한 강에게 민석이 재빠르게 말했다. 민석의 대답에 한 강이 웃기다 는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하긴, 요즘엔 남자보다 더 밝히는 여자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렇게 행동하면 남자가 우습게 여긴다는 걸 모르나?”
“소연이는 자신이 그러면 남자들이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라고.”
한 강의 말에 민석이 비웃음 가득담긴 말투로 대답했다. 처음 소연을 만났을 때, 자신의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까지 멸시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천박하게 구는 소연 때문에 일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오늘 만나기로 했어?”
“응. 조금 있다 4시쯤에 힐튼 호텔 앞에서 보기로 했어.”
“왜 하필 호텔 앞이야?”
한 강이 편한 자세로 1인용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커피 잔을 홀짝이며 물었다.
“몰라, 나도. 걔가 거기서 만나 재.”
“잘 끝내길 바란다.”
“어? 이제 슬슬 출발해야 겠다. 형 나 갈께!”
“그래. 연락해라.”
민석은 한 강의 집에서 나와 호텔로 차를 몰았다.
“계집애가 먼저 호텔에서 보자고 하다니, 세상 말세야.”
채민석은 남성우월주의자였다. 게다가 상당히 보수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그 주변 그 누구도 그걸 몰랐다. 채민석은 그걸 표현하지 않을 뿐, 태어날 때부터 뿌리 박혀 있던 보수주의는 쉽사리 바뀌지를 않았다. 그런 민석에서 소연은 웃긴 여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민석은 호텔로 차를 몰면서 소연과 끝낼 생각만을 했다. 민석이 호텔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소연이 몸을 들어내놓는 옷차림으로 민석에게 엉겨 붙었다. 민석은 그녀의 역한 화장품 냄새에 당장이라도 그녀를 밀어치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호텔방으로 올라갔다.
채민석이 부스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 격정의 끝이어서 그런지 그의 등에는 땀방울이 송글하게 맺혀있었다. 채민석 뒤로 소연이 나체의 몸으로 누워있었다. 민석이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물자 소연이 그의 등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도 한대만.”
소연의 말에 민석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남방을 걸치며 말했다.
“나 여자가 담배 피는 것 싫어해.”
민석의 말에 소연이 입을 삐죽이며 몸을 일으켰다. 서있는 민석으로 다가가 소연이 나체로 그를 껴안았다.
“오빠는 너무 이기적이야. 하지만 그 이기적인 게 더 매력적이야!”
소연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민석의 볼을 장난스레 집었다. 탁- 소리와 함께 소연의 팔이 떨어지고, 민석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장난 나 싫어해.”
“도대체 좋아하는 게 뭐야!”
민석의 태도에 소연이 단단히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소리에 민석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침부터 쨍알대는 그녀의 목소리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민석은 그녀의 몸을 쳐다보았다. 군살 하나도 없는 그녀의 몸매, 확실히 잠자리 상대로는 완벽한 여자였다. 침대위에서 울리는 교성에서부터, 몸놀림 까지도. 조숙함을 따지며 뜸 들이는 다른 여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허나, 매력은 없었다. 노골적이기 까지 하는 그녀의 말투는 이내 남자의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좋아하는 것 따위는 없어.”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는 채민석의 앞을 소연이 막아섰다.
“뭐하는 짓이야?”
“그럼 나랑 왜 만나는 거야!”
소연이 단단히 벼른 말투로 묻자, 민석이 피식거렸다. 민석의 태도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쯤은 소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왜 만나는 거냐는 소연의 질문에 채민석은 잠시 고민에 빠졌었다.
“그럼 너는 나랑 왜 만나냐?”
도전적인 말투로 채민석이 물었다. 그 물음에 소연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사랑하니깐!”
“돈이 좋아서가 아니고?”
그의 말에 소연이 화를 주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로봇과 같았다. 표정 없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알고는 있었다. 채민석이 자신을 사랑해서 만나지 않는다는 것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채민석의 입을 타고 나오는 말을 들으니 분노가 일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돈이라면 나도 쓸만큼은 있어!”
“그게 아니면 넌 나를 왜 만나냐?”
“말했잖아. 사랑하니깐 만나는 거라고!”
그녀의 당당한 대답에 채민석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소연의 옷가지중 하나를 집어 그녀에게 던졌다.
“입어, 그렇게 서있는거 보기 추하니깐!”
소연은 파르르 떨리는 몸으로 그가 건네준 옷을 쳐다보았다. 나체의 그녀의 모습이 보기 추하다는 그의 말을 인정할 수없었다. 분명 방금 전만해도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갔던 그가 아니던가? 분노와 흥분, 미움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소연을 향해 채민석이 소연의 핸드폰을 꺼내어 내밀었다.
“봐!”
“무슨........”
소연이 자신의 핸드폰 액정을 보았다. 거기에는 소연이 저장시켜놓은 채민석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채민석은 소연이 저장시켜놓은 이름을 말하는 것 같았다. 소연은 채민석을 [아우디 오빠]라고 적어놓았다.
“이…….이건…….”
“변명하지 마. 듣고 싶지 않으니깐.”
변명하려니 소연에게 채민석이 싸늘하게 말했다. 소연은 어떻게든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렇게 적어놓은 것은 단지 재미였다. 소연이 그의 전화번호를 저장시킬 당시 채민석은 소연에게 단지 재미있는 장난감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자신이 빠지고 있었다. 그의 매력에, 그라는 남자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렇게 사랑이라고 느끼고 있는데 지금 그를 놓칠 수는 없었다.
“오빠, 내 이야기 좀 들어봐.”
“듣고 싶지 않아.”
어느새 말쑥하게 나갈 준비를 다 한 채민석은 가방에서 휴대용 향수병을 꺼내어 뿌렸다. 칙칙- 민석은 자신의 몸에 하나라도 붙어있을 소연의 향기를 지우고 싶었다. 그런 민석의 의도를 모르는 소연이 민석의 등을 껴안으며 울먹였다.
“오빠,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오빠가 오해하는 거야! 나 오빠 놓치고 싶지 않아!”
“그래? 나 너보고 헤어지자는 말 한적 없는데?”
“하지만, 오빠가.......”
“우리 소연이 똑똑하네?”
소연의 말을 자르며 민석이 말했다. 민석의 갑작스럽게 바뀐 말투에 소연이 한낱 희망스러운 얼굴로 민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가 미리 말 안 해도 헤어지자고 할 것을 다 알고.”
“오빠!”
“소리 지르지 마!”
쉽게 자신을 보내주지 않을 것을 느낀 민석이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넌 똑똑한 애니깐 알 거야. 내가 너 사랑해서 만난 게 아니라는 거!”
“...........”
“나 사실.........”
채민석은 한 강과 자신의 모종의 관계를 털어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일은 한 강이 먼저 제안한 일이기도 했다. ‘헤어질 때 왜 접근 했는지에 대해서 말해 주어라’ 라는게 한 강의 부탁이기도 했다. 한 강의 말처럼 말하지 않으면 또다시 사랑을 가지고 놀 수도 있다는 것에 채민석도 동의한 일이었다.
“나 사실 너한테 의도적으로 접근 했었다. 너 박신애라는 사람 이야기 했었지? 내가 아는 형이 그 여자랑 사귀는데, 너랑 우현이라는 그 사람이 너무 사랑을 우습게 여긴다고 나한테 부탁했어. 너희 둘 떼어놓아 달라고.”
채민석은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아버렸다. 곧이어 들려올 소연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이었다. 하지만 소연은 말이 없었다. 채민석이 눈을 뜨자, 울먹이는 소연의 얼굴이 보였다. 반라의 몸을 하고 소파에 잔뜩 웅크려 유치원생 어린 아이처럼 잔뜩 방어적인 태도로 울고 있었다. 막상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좋지 않은 그였다.
“미안하다.”
“흑, 아니야. 오빠가 나한테 미안해 할 일이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어. 근데 …….나 이제 진짜 오빠 사랑해…….”
소연의 말에 채민석이 담배케이스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어 소연에게 건넸다. 소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이제 담배도 끊을게. 오빠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할게. 오빠.......”
소연이 애원하고 있었다. 분명 소연이 불쌍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연과 다시 만날 생각은 없는 채민석이었다. 그런 민석의 단호함을 분명 느꼈을 텐데 소연이 무릎까지 꿇고선 애원하고 있었다.
“오빠…….나 이제 정말 잘할게…….”
“미안하다.”
채민석은 미안하다는 말을 던져놓고 피하듯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민석이 간 한참 후에도 소연은 무릎 꿇은 채 소파에 기대듯 쓰러져있었다. 처음엔 장난이었다. 민석의 배경에 마음이 끌려 그를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의 배경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가 떠났다. 소연은 그제야 몸을 타고 느끼는 분노감에 치를 떨었다. 사랑으로가 아닌 것으로 그가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에, 소연은 그제야 치정에 얽힌 살인이 왜 일어나는지 실감할 것 같았다. 소연은 재빠르게 옷을 챙겨 입었다. 죽이고 싶었다. 채민석을 죽여서라도 가지고 싶었다. 소연은 채민석의 회사로 차를 몰았다. 차를 모는 동안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채민석에 관한 사랑과, 분노, 집착이 한데 얽혀 그녀의 얼굴은 광기스럽기 까지 했다. 소연은 뛰다시피 한 걸음으로 민석의 사무실로 향했다.
“누구세요?”
라고 묻는 비서를 뒤로 한 채, 안에 있는 민석의 사무실 문을 쾅 소리가 나게 열었다. 그녀의 등장에 민석은 서류에 향하던 시선을 한번 주었을 뿐 이내 코끝에 걸쳐진 안경을 들어올리며 서류로 시선을 옮겨 버렸다. 어느새 같이 들어온 여비서가 소연의 팔을 잡고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놔요!”
소연이 팔을 뿌리치면서, 채민석의 책상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태도에 민석이 여전히 서류에 향한 눈을 거두지 않은 채 비서에게 말했다.
“그만 나가 봐요. 차는 됐어요.”
민석의 말에 여비서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씩씩거리는 소연의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닿을 듯 민석의 목 언저리를 따스하게 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민석이 안경을 벗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소연을 쳐다보았다. 눈물로 마스카라로 번벅이 된 얼굴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무슨 일이야?”
“죽여버릴꺼야!”
민석의 말에 소연이 기다렸다는 듯 민석의 목을 조르며 외쳤다. 민석은 반항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마네킹처럼 그녀가 하는 대로 그냥 몸을 맞길 뿐이었다. 한참 민석의 목을 조르던 그녀가 흐느끼며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채로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죽이지 않고…….”
“죽이고 싶어. 미치도록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그럴 수가......”
소연의 말에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연을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눈물로 번벅된 마스카라를 옆에 있던 티슈로 조용히 닦아주었다. 아까와는 달리 온화한 표정이었다. 민석은 동생에게 대하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프지? 넌 고작 몇 개월 날 만난 것 가지고 아프지만, 그 사람들은 10년이었어. 앞으로는 사랑가지고 장난치 지마.”
“.............”
채민석의 말에 소연이 살며시 그의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민석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를 그녀에게 빌려주었다. 그녀의 감은 눈 사이로 민석의 측은한 시선이 흘렀다.
30개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렛(15) 제각기 다른 사랑을 한다.
마음을 배반하지 않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한편 더 올립니다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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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제각기 다른 사랑을 한다.
신애는 새벽 요란스럽게 울리는 벨소리에 잠이 깨었다. 연신 벨을 누르는 누군가는 꽤나 급한 모양이었다. 신애는 쌀쌀한 새벽 공기 탓에 근처에 놓여있던 카디건을 대충 걸치고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 작은 창 너머로 신애의 엄마인 진숙이 위태롭게 서있었다. 잠옷차림에 엄마를 보는 순간 신애는 다급한 마음에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엄마가 서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핑크빛 잠옷차림으로 아직은 쌀쌀한 새벽 날씨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엄마가 서 있었다. 신애는 엄마의 손을 잡고 안으로 당겼다. 엄마는 힘조차 없는지 신애의 작은 힘에도 쉽사리 당겨져 왔다. 신애와 엄마는 말이 없었다. 신애는 엄마를 침대 모퉁이에 앉히고선 커피를 내렸다. 신애가 커피를 가져가자 엄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신애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다가 텔레비전 받침대 밑에서 작은 구급상자를 꺼내 엄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엄마의 팔을 조금 걷자, 유리조각에 찔렸는지 피가 제법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애는 말없이 상처를 치료하고 지압붕대를 감았다. 익숙한 솜씨였다. 상처를 다 치료하고 나자 신애가 그제야 잔뜩 잠긴 목소리로 엄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미안하다. 이런 꼴 보여서.”
“이혼해.”
“...........”
신애의 말에 엄마는 말이 없었다. 오래전부터 신애는 엄마에게 이혼을 권해 왔었다. 그때 마다 엄마는 묵묵부답이었다. 신애는 그런 엄마가 답답했다. 같은 여자로써,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엄마를 팼었다. 처음에는 따귀 한대로 시작하던 그 매질이 이제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변해버린것이다. 그렇게 까지 사태가 악화된 것은 엄마 책임이라고 신애는 생각했다. 신애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대로 사태를 방관하고 있다가는 엄마의 목숨마저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에 신애는 오랫동안 참고 있던 말을 쏟아내었다.
“제발, 엄마 이혼해.”
“그렇게는 못해.”
단호한 말투였다. 마치 이혼이라는 문제는 아예 할 수 없는 것처럼, 진숙은 대답했다. 그런 진숙으로 보며 신애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나도 이제 성인이야.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너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 이유가 다는 아니야.”
진숙은 걷어져 있는 잠옷을 내리며 말했다. 신애는 알고 있었다. 이미 엄마는 아버지에게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폭력에 관해서 나오더라. 가정폭력. 그게 하도 맞다보면 나중에는 안 때리는 게 더 불안하다고 하더라. 엄마도 그 지경이라고.”
“그래. 나도 안다. 나도 알아.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거겠니.”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아!”
“목소리 좀 줄여라. 남들 듣겠다.”
“들으면 좀 어때! 남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엄마 자신이 제일 중요한 거라고!”
신애는 한껏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엄마는 신애의 목소리를 신경 쓰며, 행여 주변사람이 들을까봐 잔뜩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신애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지극히 미련 곰탱이인 것은 엄마 탓이라고 떠넘기고 있었다.
“엄마. 그거 알아? 나 우현이랑 헤어졌어.”
“왜? 네가 잘못이라도 했니?”
“엄마는 그게 문제야. 무조건 여자가 숙여야 한다고 엄마가 그렇게 나 기른 거잖아. 요즘 애들은 안 그런데, 내 성격 이런 것도 다 엄마 때문이야.”
진숙은 옛날여자였다. 여자가 무조건 복종하고 남자의 말에 따르는 옛날여자였다. 신애는 그런 진숙 때문에 어려서부터 공부보다는 남자의 말에 순종하는 법 먼저 배웠다. 신애의 말에 진숙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의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숙은 신애가 자기 자식이지만 요즘 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나 자신 때문에 딸이 힘들어 질까봐 염려가 되는 그녀였다.
“미안하다. 내가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학교 다닐 때 애들이 나보고 바보라고 하더라. 왜 바보라고 하는 줄 알아? 내가 잘했든 잘 못했든 미안하다고 하니깐, 내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없으니깐 그러는 거야. 그런데 내 이런 성격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 바로 엄마라고!”
신애는 악다구니 쳤다. 엄마에게 그동안 참아왔던 설움들을 토해냈다. 신애의 절규하는 모습을 진숙은 바라보고 있었다. 진숙은 애써 흐르려는 눈물을 참으며 신애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중얼거리며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신애는 우현에게 그런 꼴을 당하고도 아직도 그를 마음에 품고 있는 자신이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엄마인 진숙에게 그 짐을 넘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숙은 울음을 토해내는 자신의 딸 신애의 등을 말없이 매만졌다. 한참을 울던 신애가 울다 지쳐 잠이 들 때쯤 진숙은 신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소중한 딸이었다. 그런 딸이 자신의 전처를 밟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남편인 민철을 버리기에는 자신이 너무 많이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숙은 신애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시 30분이되기 몇 초전에 신애의 눈이 떠졌다. 신애는 습관적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있어야 할 엄마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신애는 가슴 한 구석에 돌덩이를 올려다 놓은 것 같이 묵직해졌다. 엄마에게 괜한 말을 한 것 같아 죄스러웠다. 엄마이기에 투정을 부렸던 그녀였지만, 신애도 알고 있었다. 엄마인 진숙의 아픔을……. 그런 아픔은 외면한 채 너무 몰아붙인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은 그녀였다. 신애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음을. 엄마의 사랑이 자신과 우현의 사랑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복받지 못한 사랑.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자신의 엄마인 진숙이 한 없이 가여워 졌다. 그러면서 신애는 다짐했다. 더 이상 축복받지 못한 사랑은 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한 강은 훤한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천장에 붙여 놓은 신애의 웃는 모습을 보는 한 강이 표정에도 연신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히쭉대기도 하고, 진지해 지기도 하고,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했다. 그때,
“형, 미친 거야? 왜 웃었다, 진지했다 그러는 거야?”
언제 왔는지 채민석이 현관문 앞에서 한 강을 한심한 듯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한 강이 채민석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래. 나 미쳤다. 사랑에 미친놈이다!”
“뭐야? 그 반응은? 그 여자랑 화해 한 거야?”
채민석이 한 강의 반응에 어이없어 하며 묻자, 한 강이 가지고 있던 베게를 채민석을 향해 던지며 버럭 거렸다.
“이제 형수님이라고 불러! 그 여자가 뭐냐? 그 여자가!”
채민석은 한 강이 던진 베게를 끌어안고 편안해 보이는 감색 소파에 앉았다.
“뭐야? 그럼 정말 잘 됐단 말이야?”
“뭐냐? 탐탁치 않아 하는 그 반응은?”
“그럼 형 나한테 한턱 쏴야 하는 거 아니야? 나 때문에 화해한거잖아.”
채민석의 말에 한 강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며 중얼거렸다.
“쿡, 고맙다.”
“형, 경제 기사 담당 하지 말고, 차라리 연애학 뭐 이런 기사 쓰는 게 어때? 점점 더 로맨티스트가 되어가는거 같다? 잘 쓸 것 같은데 어때?”
핀잔을 주는 채민석을 향해 한 강은 그저 한번 피식거렸을 뿐이었다. 방금 내린 커피를 머그잔 가득 따라 채민석에게 건네면서 한 강이 물었다.
“그래. 소연이랑은 잘 되어가는거야?”
“대충은. 근데 귀찮아 죽겠어. 정말 싫어하는 타입이야.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조르긴 또 얼마나 조르는지. 게다가 나 참 웃겨서…….”
“왜?”
한 강이 채민석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으며 물자, 채민석이 정말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걔 핸드폰에 내 이름이 뭐라고 적혀있는줄 알아 형?”
“뭐라고 적혀 있는데?”
“아우디 오빠”
“뭐? 아우디 오빠? 뭐 그런 계집애가 다 있냐?”
민석의 답변에 한 강이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를 툭 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요즘 여자들의 몇몇이 남자의 재력을 보며 만난다는 말은 들었지만, 사귀는 남자에게 아우디 오빠라는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시키는 정도일 줄은 몰랐다. 채민석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난다는 표정으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한 강이 그런 민석의 어깨를 툭 치며 위로하자 민석이 한 강에게 물었다.
“걔 언제까지 만나야 해?”
“오늘 까지! 근데 헤어질 때 말해줘. 일부러 접근 했다는 말.”
“그걸 꼭 말해야 해?”
한 강의 말에 민석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알아야지. 그래야 앞으로 그런 실수 안하지. 사랑에 아파보지 못해서 그래. 그 여자애 말이야.”
“사랑에 아파볼 겨를이 있을까? 대달라고 하면 대주는 계집인데.”
민석이 조롱하듯 말했다. 민석은 조금 답답한지 목을 옭죄는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있었다.
“뭐야? 소연이랑 잔거야?”
“그럼. 어?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소연이가 먼저 올라가자고 부추겼으니깐!”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질책하는 한 강에게 민석이 재빠르게 말했다. 민석의 대답에 한 강이 웃기다 는 표정을 지으며 응수했다.
“하긴, 요즘엔 남자보다 더 밝히는 여자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렇게 행동하면 남자가 우습게 여긴다는 걸 모르나?”
“소연이는 자신이 그러면 남자들이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라고.”
한 강의 말에 민석이 비웃음 가득담긴 말투로 대답했다. 처음 소연을 만났을 때, 자신의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까지 멸시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천박하게 구는 소연 때문에 일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오늘 만나기로 했어?”
“응. 조금 있다 4시쯤에 힐튼 호텔 앞에서 보기로 했어.”
“왜 하필 호텔 앞이야?”
한 강이 편한 자세로 1인용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커피 잔을 홀짝이며 물었다.
“몰라, 나도. 걔가 거기서 만나 재.”
“잘 끝내길 바란다.”
“어? 이제 슬슬 출발해야 겠다. 형 나 갈께!”
“그래. 연락해라.”
민석은 한 강의 집에서 나와 호텔로 차를 몰았다.
“계집애가 먼저 호텔에서 보자고 하다니, 세상 말세야.”
채민석은 남성우월주의자였다. 게다가 상당히 보수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그 주변 그 누구도 그걸 몰랐다. 채민석은 그걸 표현하지 않을 뿐, 태어날 때부터 뿌리 박혀 있던 보수주의는 쉽사리 바뀌지를 않았다. 그런 민석에서 소연은 웃긴 여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민석은 호텔로 차를 몰면서 소연과 끝낼 생각만을 했다. 민석이 호텔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소연이 몸을 들어내놓는 옷차림으로 민석에게 엉겨 붙었다. 민석은 그녀의 역한 화장품 냄새에 당장이라도 그녀를 밀어치고 싶은 것을 애써 참으며 호텔방으로 올라갔다.
채민석이 부스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 격정의 끝이어서 그런지 그의 등에는 땀방울이 송글하게 맺혀있었다. 채민석 뒤로 소연이 나체의 몸으로 누워있었다. 민석이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물자 소연이 그의 등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도 한대만.”
소연의 말에 민석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남방을 걸치며 말했다.
“나 여자가 담배 피는 것 싫어해.”
민석의 말에 소연이 입을 삐죽이며 몸을 일으켰다. 서있는 민석으로 다가가 소연이 나체로 그를 껴안았다.
“오빠는 너무 이기적이야. 하지만 그 이기적인 게 더 매력적이야!”
소연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민석의 볼을 장난스레 집었다. 탁- 소리와 함께 소연의 팔이 떨어지고, 민석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장난 나 싫어해.”
“도대체 좋아하는 게 뭐야!”
민석의 태도에 소연이 단단히 화가 난 듯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소리에 민석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아침부터 쨍알대는 그녀의 목소리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민석은 그녀의 몸을 쳐다보았다. 군살 하나도 없는 그녀의 몸매, 확실히 잠자리 상대로는 완벽한 여자였다. 침대위에서 울리는 교성에서부터, 몸놀림 까지도. 조숙함을 따지며 뜸 들이는 다른 여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허나, 매력은 없었다. 노골적이기 까지 하는 그녀의 말투는 이내 남자의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좋아하는 것 따위는 없어.”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는 채민석의 앞을 소연이 막아섰다.
“뭐하는 짓이야?”
“그럼 나랑 왜 만나는 거야!”
소연이 단단히 벼른 말투로 묻자, 민석이 피식거렸다. 민석의 태도가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쯤은 소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왜 만나는 거냐는 소연의 질문에 채민석은 잠시 고민에 빠졌었다.
“그럼 너는 나랑 왜 만나냐?”
도전적인 말투로 채민석이 물었다. 그 물음에 소연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사랑하니깐!”
“돈이 좋아서가 아니고?”
그의 말에 소연이 화를 주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로봇과 같았다. 표정 없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알고는 있었다. 채민석이 자신을 사랑해서 만나지 않는다는 것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채민석의 입을 타고 나오는 말을 들으니 분노가 일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돈이라면 나도 쓸만큼은 있어!”
“그게 아니면 넌 나를 왜 만나냐?”
“말했잖아. 사랑하니깐 만나는 거라고!”
그녀의 당당한 대답에 채민석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소연의 옷가지중 하나를 집어 그녀에게 던졌다.
“입어, 그렇게 서있는거 보기 추하니깐!”
소연은 파르르 떨리는 몸으로 그가 건네준 옷을 쳐다보았다. 나체의 그녀의 모습이 보기 추하다는 그의 말을 인정할 수없었다. 분명 방금 전만해도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갔던 그가 아니던가? 분노와 흥분, 미움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소연을 향해 채민석이 소연의 핸드폰을 꺼내어 내밀었다.
“봐!”
“무슨........”
소연이 자신의 핸드폰 액정을 보았다. 거기에는 소연이 저장시켜놓은 채민석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채민석은 소연이 저장시켜놓은 이름을 말하는 것 같았다. 소연은 채민석을 [아우디 오빠]라고 적어놓았다.
“이…….이건…….”
“변명하지 마. 듣고 싶지 않으니깐.”
변명하려니 소연에게 채민석이 싸늘하게 말했다. 소연은 어떻게든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렇게 적어놓은 것은 단지 재미였다. 소연이 그의 전화번호를 저장시킬 당시 채민석은 소연에게 단지 재미있는 장난감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자신이 빠지고 있었다. 그의 매력에, 그라는 남자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렇게 사랑이라고 느끼고 있는데 지금 그를 놓칠 수는 없었다.
“오빠, 내 이야기 좀 들어봐.”
“듣고 싶지 않아.”
어느새 말쑥하게 나갈 준비를 다 한 채민석은 가방에서 휴대용 향수병을 꺼내어 뿌렸다. 칙칙- 민석은 자신의 몸에 하나라도 붙어있을 소연의 향기를 지우고 싶었다. 그런 민석의 의도를 모르는 소연이 민석의 등을 껴안으며 울먹였다.
“오빠,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오빠가 오해하는 거야! 나 오빠 놓치고 싶지 않아!”
“그래? 나 너보고 헤어지자는 말 한적 없는데?”
“하지만, 오빠가.......”
“우리 소연이 똑똑하네?”
소연의 말을 자르며 민석이 말했다. 민석의 갑작스럽게 바뀐 말투에 소연이 한낱 희망스러운 얼굴로 민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가 미리 말 안 해도 헤어지자고 할 것을 다 알고.”
“오빠!”
“소리 지르지 마!”
쉽게 자신을 보내주지 않을 것을 느낀 민석이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넌 똑똑한 애니깐 알 거야. 내가 너 사랑해서 만난 게 아니라는 거!”
“...........”
“나 사실.........”
채민석은 한 강과 자신의 모종의 관계를 털어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일은 한 강이 먼저 제안한 일이기도 했다. ‘헤어질 때 왜 접근 했는지에 대해서 말해 주어라’ 라는게 한 강의 부탁이기도 했다. 한 강의 말처럼 말하지 않으면 또다시 사랑을 가지고 놀 수도 있다는 것에 채민석도 동의한 일이었다.
“나 사실 너한테 의도적으로 접근 했었다. 너 박신애라는 사람 이야기 했었지? 내가 아는 형이 그 여자랑 사귀는데, 너랑 우현이라는 그 사람이 너무 사랑을 우습게 여긴다고 나한테 부탁했어. 너희 둘 떼어놓아 달라고.”
채민석은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아버렸다. 곧이어 들려올 소연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이었다. 하지만 소연은 말이 없었다. 채민석이 눈을 뜨자, 울먹이는 소연의 얼굴이 보였다. 반라의 몸을 하고 소파에 잔뜩 웅크려 유치원생 어린 아이처럼 잔뜩 방어적인 태도로 울고 있었다. 막상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좋지 않은 그였다.
“미안하다.”
“흑, 아니야. 오빠가 나한테 미안해 할 일이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어. 근데 …….나 이제 진짜 오빠 사랑해…….”
소연의 말에 채민석이 담배케이스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어 소연에게 건넸다. 소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이제 담배도 끊을게. 오빠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할게. 오빠.......”
소연이 애원하고 있었다. 분명 소연이 불쌍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연과 다시 만날 생각은 없는 채민석이었다. 그런 민석의 단호함을 분명 느꼈을 텐데 소연이 무릎까지 꿇고선 애원하고 있었다.
“오빠…….나 이제 정말 잘할게…….”
“미안하다.”
채민석은 미안하다는 말을 던져놓고 피하듯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민석이 간 한참 후에도 소연은 무릎 꿇은 채 소파에 기대듯 쓰러져있었다. 처음엔 장난이었다. 민석의 배경에 마음이 끌려 그를 만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의 배경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가 떠났다. 소연은 그제야 몸을 타고 느끼는 분노감에 치를 떨었다. 사랑으로가 아닌 것으로 그가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사실에, 소연은 그제야 치정에 얽힌 살인이 왜 일어나는지 실감할 것 같았다. 소연은 재빠르게 옷을 챙겨 입었다. 죽이고 싶었다. 채민석을 죽여서라도 가지고 싶었다. 소연은 채민석의 회사로 차를 몰았다. 차를 모는 동안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채민석에 관한 사랑과, 분노, 집착이 한데 얽혀 그녀의 얼굴은 광기스럽기 까지 했다. 소연은 뛰다시피 한 걸음으로 민석의 사무실로 향했다.
“누구세요?”
라고 묻는 비서를 뒤로 한 채, 안에 있는 민석의 사무실 문을 쾅 소리가 나게 열었다. 그녀의 등장에 민석은 서류에 향하던 시선을 한번 주었을 뿐 이내 코끝에 걸쳐진 안경을 들어올리며 서류로 시선을 옮겨 버렸다. 어느새 같이 들어온 여비서가 소연의 팔을 잡고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놔요!”
소연이 팔을 뿌리치면서, 채민석의 책상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태도에 민석이 여전히 서류에 향한 눈을 거두지 않은 채 비서에게 말했다.
“그만 나가 봐요. 차는 됐어요.”
민석의 말에 여비서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씩씩거리는 소연의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닿을 듯 민석의 목 언저리를 따스하게 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민석이 안경을 벗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소연을 쳐다보았다. 눈물로 마스카라로 번벅이 된 얼굴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무슨 일이야?”
“죽여버릴꺼야!”
민석의 말에 소연이 기다렸다는 듯 민석의 목을 조르며 외쳤다. 민석은 반항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마네킹처럼 그녀가 하는 대로 그냥 몸을 맞길 뿐이었다. 한참 민석의 목을 조르던 그녀가 흐느끼며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채로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죽이지 않고…….”
“죽이고 싶어. 미치도록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그럴 수가......”
소연의 말에 민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연을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눈물로 번벅된 마스카라를 옆에 있던 티슈로 조용히 닦아주었다. 아까와는 달리 온화한 표정이었다. 민석은 동생에게 대하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프지? 넌 고작 몇 개월 날 만난 것 가지고 아프지만, 그 사람들은 10년이었어. 앞으로는 사랑가지고 장난치 지마.”
“.............”
채민석의 말에 소연이 살며시 그의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민석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를 그녀에게 빌려주었다. 그녀의 감은 눈 사이로 민석의 측은한 시선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