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리스는 변한 것이 없었다. 우현은 신애의 전화를 받고 뛰다시피 타임리스로 향했다. 그녀와 완벽하게 끝을 냈던 그날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흘러 늦봄이었던 날씨는 가을의 문턱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현은 항상 앉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출입문에 달려있는 작은 종이 딸랑거릴 때 마다 출입문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애에게 이렇게 빨리 전화가 올 줄은 몰랐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일이었다. 신애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길 빌고 또 빌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현실로 나타나자 우현은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 였다. 우현이 떨리는 마음으로 신애를 기다리고 있을 때, 출입문 종이 딸랑거리며 신애가 나타났다. 연두색 원피스에 하얀 카디건을 걸친 신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우현의 심장이 선로를 탈출한 기차처럼 뛰기 시작했다. 우현이 손을 들어 자신을 알리려 할 때, 신애의 뒤편으로 한 강의 얼굴이 삐죽이 들어났다. 그의 모습에 우현은 들었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그때 신애가 먼저 우현을 알아보고 걸음을 옮겼다. 신애가 우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그녀의 옆에 한 강이 앉았다. 우현의 표정은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달리 잔뜩 굳어져 있었다. 한 강은 당연하다는 듯 신애의 옆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우현은 당장이라도 웃는 한 강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은 욕구를 애써 참으며 그 둘을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일에 우현의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주문하시겠어요?”
라는 아르바이트생의 말에 우현이 ‘여기 콜라 두 잔이요.’ 라고 말했다. 그때 한 강이 ‘잠깐만요.’라고 말 한 뒤 메뉴판을 펼쳐 신애가 보기 좋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던 우현이 비웃으며 말했다.
“신애는 콜라밖에 안 먹어!”
“나 탄산음료 좋아하지 않아.”
우현의 말에 신애가 빠르게 대답했다. 신애의 감정 없는 대답에 우현은 자신이 착각한 것임을 알았다. 신애는 자신과 다시 시작할 마음 없구나, 우현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자리 잡자 입안 가득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우현은 그 씁쓸함을 없애려 담배를 한대 입에 물었다. 니코틴이 확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전, 키위주스요.”
“저도요.”
신애의 말에 한 강이 동의하며 말했다. 우현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굳어있는 우현을 향해 한 강이 인사를 건네었다.
“오랜만이네요.”
“..........”
한 강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은 채 우현은 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런 우현의 태도에 신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한 강씨랑 사귀고 있어.”
“뭐?”
그럴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신애의 입으로 직접 들을 줄은 몰랐다. 기대하고 있던 마음이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차라리 기대라도 하지 말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우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신애는 그런 우현의 반응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현이 너도 소연 씨랑 잘 됐으면 좋겠어. 그 이야기 하러 나왔어.”
“너 저 사람 사랑 하냐?”
우현이 담배를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되물었다. 마음속에서는 제발 망설 여라도 줘라. 라는 말을 주문 외우듯 되뇌고 있었지만, 그런 우현의 마음과는 달리 신애는 일초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응. 사랑해.”
신애의 표정을 바라보던 우현이은 담배를 미친 듯 빨아대었다. 아이가 엄마의 젓을 필사적으로 빠는 것처럼, 우현은 자신의 생사가 담배에 있는 것처럼 맹신적으로 담배를 피워댔다. 한대, 두 대, 세대를 연속적으로 피어대는 동안 우현과 신애, 한 강 세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마지막 담배의 끝이 다 타 필터가 보일 때 즈음 우현이 투명한 유리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한 강에게 물었다.
“사랑 합니까?”
“네.”
“쿡. 둘 다 망설임이라고는 없군.”
우현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번 담배를 꺼내려던 우현이 비어버린 담배 케이스를 힘껏 쥐어 구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씁쓸하다. 잘 해보고 싶었는데……. 너한테 못해준 것 이제 다 갚아주고 싶었는데......”
“.............”
“신애 착한 여자입니다. 보수적이긴 해도 사랑스러운 여자죠.”
“알고 있습니다.”
우현의 말에 한 강이 말했다. 한 강의 말투에는 그에 관한 적대감이라고는 없었다. 다만 같은 남자로써 우현을 이해한다는 듯 그의 대답에 답하고 있었다. 우현과 한 강사 이에 남자들만의 무언의 공기가 오고갔다.
“내가 그동안 못했던 것 잊어. 네가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야. 너랑 나랑 시간이 안맞았던것이지. 난 너에게 더 다가가고 싶었고, 날 막아서는 네가 못 견뎌 그런 것이었으니깐......”
“...........”
“이만 간다. 행복해라.”
행복해라라는 말을 남긴 채 돌아서는 우현의 뒷모습을 보며 한 강이 살며시 신애의 손을 맞잡았다. 꽉 잡은 그의 손에서 일어서지 말라는 무언의 간절함이 묻어나왔다. 한 강은 잠시나마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 한 강을 느낀 신애가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남자네. 그래도……. 서운 하지?”
한 강의 말에 신애가 고개를 저었다. 타임리스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서운함이랄까? 그런 잔재들로 힘들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우현을 보는 순간 신애는 그것이 자신만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우현을 향한 자신의 눈빛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었다. 친한 친구처럼 편한 감정이었다. 10년간 연애가 아닌 친구사이로 지냈던 관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약간의 씁쓸한 감정은 남아있었다.
[좀더 잘해줄 껄 그랬네…….]
뒤 늦은 후회가 신애의 마음속을 돌다 사라졌다.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우현에게 만큼은 정말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 아쉬운 감정이 남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감정은 오늘 까지라고 신애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옆에 앉아 그녀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우현이 아니니깐. 자신의 옆에 앉아 자신을 지키는 사람은 이제 한 강이니깐. 신애는 한 강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신애의 말에 한 강은 삐죽 미소 하나를 보여주었다. 둘은 한참을 그대로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신애는 우현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한 강은 타임리스에서 위험했던 몇 달 전 신애를 기억하고 있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의 추억을 되짚어 보고, 정리하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상근은 며칠째 자신의 가게에서 술만 마시고 있는 우현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초췌해진 얼굴로 무슨 말을 걸어도 고개만 절래 흔드는 통에 도통 일까지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상근은 몇날을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한참 뒤 가게 문을 열고 신애가 들어왔다. 시원해 보이는 파란 민소매 원피스 차림 짧은 볼레 흰색 카디건을 걸친 그녀의 모습에 상근은 그녀를 못 알아 볼뻔 했다. 예전 우현과 사귈 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여자는 가꾸기 나름이다.’라던 말이 떠올랐다. 상근이 출입 문 쪽에 서있는 신애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머리 자르셨네요?”
“네. 오랜만이네요.”
“네.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무미건조한 물음과 대답들이었다. 신애가 가게 안을 훑어보자, 한쪽 구석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우현의 처진 등이 보였다. 신애의 시선이 우현으로 향하자, 상근이 한발 비켜서며 말했다.
“며칠째 저러고 있어요. 더 이상 놔 뒀다가는 애 버리겠다 싶어서.........”
상근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신애의 걸음이 우현에게로 향했다. 우현의 맞은편에 앉은 신애 앞에 상근이 재빠르게 소주잔을 가져다주었다. 신애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눈으로 우현이 신애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는 눈이었다. 그런 우현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신애는 조용히 우현 앞에 있는 소주병을 들어 술잔을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알싸한 알코올이 뱃속에 맴돌 듯 퍼져 나갔다. 늦은 시각이라서 그런지 가게 안은 우현과 신애 그리고 상근뿐이었다. 상근이 우현과 신애를 의식하듯 조심히 간판 불을 내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왜 이러고 있어?”
신애의 물음에 우현은 대답할 의사가 없어보였다. 머리는 잔뜩 엉클어져 있었고, 옷은 며칠 전 신애와 타임리스에서 만났을 때와 같은 옷차림이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난 옷을 입고 있는 우현의 모습에서 예전 깔끔하다 못해 병적으로 굴었던 우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또다시 술잔을 채우려는 우현의 손에서 신애가 거칠게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고 있냐고......”
“내가 한심해서.”
신애의 말에 우현이 겨우 한 마디를 내 뱉었다. 잔뜩 가래가 끓는 목소리의 그는 정상이 아닌 듯 보였다.
“뭐가 한심한데?”
“너 놓치고 이 제와서 이렇게 땅을 치고 후회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못해 모자란 애처럼 보여서 그런다.”
우현의 말에 신애가 조용히 그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가슴이 떨지 않고 있었다. 우현에게 마음이 떠난 것을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가슴이 먼저 알고 있었다.
“언제 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소연 씨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신애의 물음에 무표정이던 우현이 그제야 피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신애가 쥐고 있던 소주병을 신경질 적으로 빼앗아 넘칠 듯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키며 말했다.
“걔랑 헤어지는지 오래야.”
“걔랑 헤어지고 나니깐 내가 필요한거였니?”
조용히 되묻는 신애의 말에 우현이 뚫어지게 신애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걔랑 헤어지고 너에 대한 소중함을 느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잖아…….”
신애의 말에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이 잔뜩 취한 눈으로 신애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웠다. 신애를 사귀면서 그녀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인줄 미처 몰랐다는 것에 자신의 두 눈을 파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우현아. 나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한 강 그 사람을 사랑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신애의 입술을 타고 나오는 말을 들으려니 우현은 순간 신애의 입술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다는 충동감이 일었다. 순간의 욕망을 참지 못하고 우현이 신애의 입술을 막무가내로 틀어막았다.
“읍…….”
침략자처럼 우현의 입술은 저돌적이었다. 그녀를 위한 배려 따위는 없는 키스였다. 하지만 신애는 거부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있었다. 목석처럼 그렇게 인형처럼 그렇게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그녀의 입술을 맴돌던 우현이 입술을 떼며 물었다.
“왜 밀치지 않지?”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깐……. 이제 악수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거니깐.”
“제길......”
신애의 대답에 우현의 낮은 욕지거리를 내 뱉었다. 신애가 더 이상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현이 촉촉이 젖은 자신의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사랑은 미로 같다고 생각했어. 출구를 찾을 수 없는…….”
“.............”
“그래서, 그래서 너 때문에 죽고 싶어도,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도 출구를 찾을 수 없어 그대로 있었어. 하지만 이제 그 출구를 찾았고, 그 출구 너머는 다른 사랑이 있었어.”
“........”
“너도 빨리 혼자만 있는 미로를 나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길 바래. 난 네가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을 마친 신애가 일어서자, 우현이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행복해라.”
우현의 말에 신애가 돌아서지도 않은 채 가만히 한동안 서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신애는 움직일 수 없었다. 우현의 말속에는 진정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스쳐 우현이 먼저 가게를 나섰다. 우현의 뒷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아름다워 보여 신애는 한참 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문득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시구가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진정 떠나가는 우현의 뒷모습은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몇일 뒤 신애는 편지 함 속에 있는 하얀 편지 봉투를 받았다. 발신인도 착신인도 없는 그 하얀 봉투안에는 익숙한 우현의 글씨로 몇 글자 적혀 있었다.
[언젠가 내 마음의 상처를 감싸 안으려 나는 너를 택하였다.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세상의 사랑
그러나 거짓말처럼 그대는 나를 또 그 지독한 웅덩이 속에 빠져 들게 하였다.
느끼고 싶지 않은 쓴 술 한잔 같은 사랑을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너를 사랑 하였고
긴 시간 동안 너의 반쪽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나를 또 무너지게 하는 위험한 사랑이었던 것
나를 완전히 부서지게 하는 처참한 버림이었던 것
내 마음의 사랑이 깊어갈 때 너는 내 사랑만 훔쳐 가고
새벽이 오기 전 나를 두고 가 버렸네
다시 얻은 아픔, 내 마음의 깊은 상처
이제 다시 또 속았다는 그 사랑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네
아주 오래 전부터 길들여진 아픔처럼
보고 있어도 보는 것이 아닌 사람
듣고 있어도 듣는 것이 아닌 사람처럼
쓸쓸히 길들여진 아픔에 나는 조용히 떨고만 있네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미움으로......
눈을 들어 눈물을 멈추려 하였다.
내 삶이 너무도 아파
내 인생이 너무도 싫어
나는 잠시 울었을 뿐......
너를 잊고 이제 나는 묵묵히 다시 삶을 살아가야 겠다.]
마음 절이는 그 시 이외에 편지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너를 잊고 이제 나는 묵묵히 다시 삶을 살아가야 겠다’라는 말에 신애는 조용히 편지지를 가슴으로 안았다. 부디 자신의 마음이 우현에게 전해져 우현이 행복해 지길 빌고 또 비는 일 밖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애는 그날 우현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30개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렛(17)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17) 떠날 때를 아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타임리스는 변한 것이 없었다. 우현은 신애의 전화를 받고 뛰다시피 타임리스로 향했다. 그녀와 완벽하게 끝을 냈던 그날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흘러 늦봄이었던 날씨는 가을의 문턱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현은 항상 앉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출입문에 달려있는 작은 종이 딸랑거릴 때 마다 출입문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애에게 이렇게 빨리 전화가 올 줄은 몰랐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일이었다. 신애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길 빌고 또 빌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현실로 나타나자 우현은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 였다. 우현이 떨리는 마음으로 신애를 기다리고 있을 때, 출입문 종이 딸랑거리며 신애가 나타났다. 연두색 원피스에 하얀 카디건을 걸친 신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우현의 심장이 선로를 탈출한 기차처럼 뛰기 시작했다. 우현이 손을 들어 자신을 알리려 할 때, 신애의 뒤편으로 한 강의 얼굴이 삐죽이 들어났다. 그의 모습에 우현은 들었던 손을 슬며시 내렸다. 그때 신애가 먼저 우현을 알아보고 걸음을 옮겼다. 신애가 우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그녀의 옆에 한 강이 앉았다. 우현의 표정은 처음 들어올 때와는 달리 잔뜩 굳어져 있었다. 한 강은 당연하다는 듯 신애의 옆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우현은 당장이라도 웃는 한 강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은 욕구를 애써 참으며 그 둘을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일에 우현의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주문하시겠어요?”
라는 아르바이트생의 말에 우현이 ‘여기 콜라 두 잔이요.’ 라고 말했다. 그때 한 강이 ‘잠깐만요.’라고 말 한 뒤 메뉴판을 펼쳐 신애가 보기 좋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던 우현이 비웃으며 말했다.
“신애는 콜라밖에 안 먹어!”
“나 탄산음료 좋아하지 않아.”
우현의 말에 신애가 빠르게 대답했다. 신애의 감정 없는 대답에 우현은 자신이 착각한 것임을 알았다. 신애는 자신과 다시 시작할 마음 없구나, 우현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자리 잡자 입안 가득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우현은 그 씁쓸함을 없애려 담배를 한대 입에 물었다. 니코틴이 확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다.
“전, 키위주스요.”
“저도요.”
신애의 말에 한 강이 동의하며 말했다. 우현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굳어있는 우현을 향해 한 강이 인사를 건네었다.
“오랜만이네요.”
“..........”
한 강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은 채 우현은 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런 우현의 태도에 신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한 강씨랑 사귀고 있어.”
“뭐?”
그럴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신애의 입으로 직접 들을 줄은 몰랐다. 기대하고 있던 마음이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차라리 기대라도 하지 말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우현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신애는 그런 우현의 반응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현이 너도 소연 씨랑 잘 됐으면 좋겠어. 그 이야기 하러 나왔어.”
“너 저 사람 사랑 하냐?”
우현이 담배를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며 되물었다. 마음속에서는 제발 망설 여라도 줘라. 라는 말을 주문 외우듯 되뇌고 있었지만, 그런 우현의 마음과는 달리 신애는 일초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응. 사랑해.”
신애의 표정을 바라보던 우현이은 담배를 미친 듯 빨아대었다. 아이가 엄마의 젓을 필사적으로 빠는 것처럼, 우현은 자신의 생사가 담배에 있는 것처럼 맹신적으로 담배를 피워댔다. 한대, 두 대, 세대를 연속적으로 피어대는 동안 우현과 신애, 한 강 세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마지막 담배의 끝이 다 타 필터가 보일 때 즈음 우현이 투명한 유리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한 강에게 물었다.
“사랑 합니까?”
“네.”
“쿡. 둘 다 망설임이라고는 없군.”
우현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번 담배를 꺼내려던 우현이 비어버린 담배 케이스를 힘껏 쥐어 구기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씁쓸하다. 잘 해보고 싶었는데……. 너한테 못해준 것 이제 다 갚아주고 싶었는데......”
“.............”
“신애 착한 여자입니다. 보수적이긴 해도 사랑스러운 여자죠.”
“알고 있습니다.”
우현의 말에 한 강이 말했다. 한 강의 말투에는 그에 관한 적대감이라고는 없었다. 다만 같은 남자로써 우현을 이해한다는 듯 그의 대답에 답하고 있었다. 우현과 한 강사 이에 남자들만의 무언의 공기가 오고갔다.
“내가 그동안 못했던 것 잊어. 네가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야. 너랑 나랑 시간이 안맞았던것이지. 난 너에게 더 다가가고 싶었고, 날 막아서는 네가 못 견뎌 그런 것이었으니깐......”
“...........”
“이만 간다. 행복해라.”
행복해라라는 말을 남긴 채 돌아서는 우현의 뒷모습을 보며 한 강이 살며시 신애의 손을 맞잡았다. 꽉 잡은 그의 손에서 일어서지 말라는 무언의 간절함이 묻어나왔다. 한 강은 잠시나마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런 한 강을 느낀 신애가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남자네. 그래도……. 서운 하지?”
한 강의 말에 신애가 고개를 저었다. 타임리스에 올 때 까지만 해도 서운함이랄까? 그런 잔재들로 힘들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우현을 보는 순간 신애는 그것이 자신만의 착각임을 깨달았다. 우현을 향한 자신의 눈빛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었다. 친한 친구처럼 편한 감정이었다. 10년간 연애가 아닌 친구사이로 지냈던 관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도 약간의 씁쓸한 감정은 남아있었다.
[좀더 잘해줄 껄 그랬네…….]
뒤 늦은 후회가 신애의 마음속을 돌다 사라졌다.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우현에게 만큼은 정말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 아쉬운 감정이 남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감정은 오늘 까지라고 신애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옆에 앉아 그녀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우현이 아니니깐. 자신의 옆에 앉아 자신을 지키는 사람은 이제 한 강이니깐. 신애는 한 강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신애의 말에 한 강은 삐죽 미소 하나를 보여주었다. 둘은 한참을 그대로 앉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신애는 우현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한 강은 타임리스에서 위험했던 몇 달 전 신애를 기억하고 있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의 추억을 되짚어 보고, 정리하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상근은 며칠째 자신의 가게에서 술만 마시고 있는 우현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초췌해진 얼굴로 무슨 말을 걸어도 고개만 절래 흔드는 통에 도통 일까지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상근은 몇날을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한참 뒤 가게 문을 열고 신애가 들어왔다. 시원해 보이는 파란 민소매 원피스 차림 짧은 볼레 흰색 카디건을 걸친 그녀의 모습에 상근은 그녀를 못 알아 볼뻔 했다. 예전 우현과 사귈 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여자는 가꾸기 나름이다.’라던 말이 떠올랐다. 상근이 출입 문 쪽에 서있는 신애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머리 자르셨네요?”
“네. 오랜만이네요.”
“네.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무미건조한 물음과 대답들이었다. 신애가 가게 안을 훑어보자, 한쪽 구석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우현의 처진 등이 보였다. 신애의 시선이 우현으로 향하자, 상근이 한발 비켜서며 말했다.
“며칠째 저러고 있어요. 더 이상 놔 뒀다가는 애 버리겠다 싶어서.........”
상근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신애의 걸음이 우현에게로 향했다. 우현의 맞은편에 앉은 신애 앞에 상근이 재빠르게 소주잔을 가져다주었다. 신애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눈으로 우현이 신애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는 눈이었다. 그런 우현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신애는 조용히 우현 앞에 있는 소주병을 들어 술잔을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알싸한 알코올이 뱃속에 맴돌 듯 퍼져 나갔다. 늦은 시각이라서 그런지 가게 안은 우현과 신애 그리고 상근뿐이었다. 상근이 우현과 신애를 의식하듯 조심히 간판 불을 내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왜 이러고 있어?”
신애의 물음에 우현은 대답할 의사가 없어보였다. 머리는 잔뜩 엉클어져 있었고, 옷은 며칠 전 신애와 타임리스에서 만났을 때와 같은 옷차림이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난 옷을 입고 있는 우현의 모습에서 예전 깔끔하다 못해 병적으로 굴었던 우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또다시 술잔을 채우려는 우현의 손에서 신애가 거칠게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고 있냐고......”
“내가 한심해서.”
신애의 말에 우현이 겨우 한 마디를 내 뱉었다. 잔뜩 가래가 끓는 목소리의 그는 정상이 아닌 듯 보였다.
“뭐가 한심한데?”
“너 놓치고 이 제와서 이렇게 땅을 치고 후회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못해 모자란 애처럼 보여서 그런다.”
우현의 말에 신애가 조용히 그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가슴이 떨지 않고 있었다. 우현에게 마음이 떠난 것을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가슴이 먼저 알고 있었다.
“언제 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소연 씨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신애의 물음에 무표정이던 우현이 그제야 피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신애가 쥐고 있던 소주병을 신경질 적으로 빼앗아 넘칠 듯 술을 따라 단숨에 들이키며 말했다.
“걔랑 헤어지는지 오래야.”
“걔랑 헤어지고 나니깐 내가 필요한거였니?”
조용히 되묻는 신애의 말에 우현이 뚫어지게 신애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걔랑 헤어지고 너에 대한 소중함을 느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잖아…….”
신애의 말에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이 잔뜩 취한 눈으로 신애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웠다. 신애를 사귀면서 그녀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인줄 미처 몰랐다는 것에 자신의 두 눈을 파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우현아. 나 이제 널 사랑하지 않아. 한 강 그 사람을 사랑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신애의 입술을 타고 나오는 말을 들으려니 우현은 순간 신애의 입술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다는 충동감이 일었다. 순간의 욕망을 참지 못하고 우현이 신애의 입술을 막무가내로 틀어막았다.
“읍…….”
침략자처럼 우현의 입술은 저돌적이었다. 그녀를 위한 배려 따위는 없는 키스였다. 하지만 신애는 거부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있었다. 목석처럼 그렇게 인형처럼 그렇게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그녀의 입술을 맴돌던 우현이 입술을 떼며 물었다.
“왜 밀치지 않지?”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깐……. 이제 악수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거니깐.”
“제길......”
신애의 대답에 우현의 낮은 욕지거리를 내 뱉었다. 신애가 더 이상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현이 촉촉이 젖은 자신의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사랑은 미로 같다고 생각했어. 출구를 찾을 수 없는…….”
“.............”
“그래서, 그래서 너 때문에 죽고 싶어도,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도 출구를 찾을 수 없어 그대로 있었어. 하지만 이제 그 출구를 찾았고, 그 출구 너머는 다른 사랑이 있었어.”
“........”
“너도 빨리 혼자만 있는 미로를 나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길 바래. 난 네가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말을 마친 신애가 일어서자, 우현이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행복해라.”
우현의 말에 신애가 돌아서지도 않은 채 가만히 한동안 서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신애는 움직일 수 없었다. 우현의 말속에는 진정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섞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스쳐 우현이 먼저 가게를 나섰다. 우현의 뒷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아름다워 보여 신애는 한참 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문득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시구가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진정 떠나가는 우현의 뒷모습은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다.
몇일 뒤 신애는 편지 함 속에 있는 하얀 편지 봉투를 받았다. 발신인도 착신인도 없는 그 하얀 봉투안에는 익숙한 우현의 글씨로 몇 글자 적혀 있었다.
[언젠가 내 마음의 상처를 감싸 안으려 나는 너를 택하였다.
다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세상의 사랑
그러나 거짓말처럼 그대는 나를 또 그 지독한 웅덩이 속에 빠져 들게 하였다.
느끼고 싶지 않은 쓴 술 한잔 같은 사랑을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너를 사랑 하였고
긴 시간 동안 너의 반쪽이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나를 또 무너지게 하는 위험한 사랑이었던 것
나를 완전히 부서지게 하는 처참한 버림이었던 것
내 마음의 사랑이 깊어갈 때 너는 내 사랑만 훔쳐 가고
새벽이 오기 전 나를 두고 가 버렸네
다시 얻은 아픔, 내 마음의 깊은 상처
이제 다시 또 속았다는 그 사랑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네
아주 오래 전부터 길들여진 아픔처럼
보고 있어도 보는 것이 아닌 사람
듣고 있어도 듣는 것이 아닌 사람처럼
쓸쓸히 길들여진 아픔에 나는 조용히 떨고만 있네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미움으로......
눈을 들어 눈물을 멈추려 하였다.
내 삶이 너무도 아파
내 인생이 너무도 싫어
나는 잠시 울었을 뿐......
너를 잊고 이제 나는 묵묵히 다시 삶을 살아가야 겠다.]
마음 절이는 그 시 이외에 편지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너를 잊고 이제 나는 묵묵히 다시 삶을 살아가야 겠다’라는 말에 신애는 조용히 편지지를 가슴으로 안았다. 부디 자신의 마음이 우현에게 전해져 우현이 행복해 지길 빌고 또 비는 일 밖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애는 그날 우현을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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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플 올라온거 보고 있다가 한 편 더 올려드릴께요! 날 씨 구물한 탓에 올려드리니깐 다들 아자아자 힘내서 열심히 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