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한 강이 신애를 찾아왔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근처에만 다가가도 술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찾아온 한 강에게 신애는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그를 향해 냉수 한 컵을 건넸을 뿐이었다. 한 강은 그녀가 건네준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신애를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신애를 쳐다보았다. 잔뜩 골이 난 그녀는 고양이처럼 갸르릉 대고 있었다.
“나한테 잔뜩 골이 난 표정이군.”
한 강이 다 마신 컵을 옆에 다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신애가 용수철처럼 일어나 한 강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왜 아는 척 했어요? 모르는 척 그냥 가버렸다면 좋았잖아요. 사람을 꼭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야 겠어요?”
신애가 쌓였던 말을 숨도 쉬지 않고 뱉어냈었다. 그녀의 태도에 한 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왜 아는 척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요. 내 이런 모습 따윈…….”
신애의 말에 한 강이 그녀의 팔을 강하게 부여잡고 자신의 쪽으로 좀더 끌어당겼다. 그의 눈이 그녀의 얼굴에 똑 바로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투명한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건데? 당연히 내가 알아야 할 문제 아닌가? 당신에게 내가 단순히 연애 상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야?”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한 강의 물음에 신애가 소리쳤다.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한 강이 되려 굳은 얼굴로 그녀를 질책하고 있었다.
“그럼 왜 숨기려 했는데? 어차피 결혼 하려면 언젠가는 밝혀야 하는 일 아니었어? 나 같으면 부끄러워하지 않겠어!”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한 강의 말에 신애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잡고 있는 한 강이 팔을 거칠게 밀치고 무릎을 껴 앉아 잔뜩 자신을 보호하는 형태를 만들어 내었다.
“당신이 부끄러워 할 일 아니잖아.”
그녀의 행동에 한 강이 누그러진 말투로 읊조렸다. 신애는 그런 한 강의 태도에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강은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다가오는 어스름 새벽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한 강은 회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걸 다 갖었다고 생각했었지. 나 자신을 완벽하다고 느꼈을 때가 있었어. 무뚝뚝하지만 매사에 긍정적이시고, 어머니에게 만큼은 세상 그 어떤 남자보다 잘 하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며 다감했던 어머니. 오빠라고 부르며 나에게 잘도 안기던 한 솔이 까지. 난 부러울 게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었어.”
한 강의 말에 신애는 관심조차 없어보였다. 고개를 잔뜩 숙인 채 여전히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신애의 호응 따위는 애초 생각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한 강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고였어. 교통사고. 가족끼리 여행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애석하게 나만 살아났지. 사고가 나는 그 순간 뒷좌석에 앉은 어머니가 날 감싸 안으셔서 나만 살아났어.”
“어떻게 그런 일이…….”
사고 이었다는 그 말에 신애의 고개가 들어졌다. 측은한 그녀의 시선 따위는 받기 싫다는 듯 한 강의 시선은 여전히 발갛게 떠오르려고 하는 태양에 향해 있었다.
“한동안은 삶의 의미조차 없었어. 살아있다는 것도 내겐 죽음과 다름없었으니깐. 어느 한 순간 벌거 벗긴 채로 광장 한 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었어. 수치스러웠지. 가족 죽이고 살아난 놈이라는 꼬리표가 날 쫓아다니기 시작했으니깐.”
“말도 안돼요!”
그의 말에 신애가 강하게 반박하고 나섰지만, 한 강은 피식 조소를 지었다.
“딱히 말이 안 될 것도 없어. 맞는 말이니깐. 다들 죽고 나만 살아남은 거니깐. 참기 힘든 것이었어. 그 꼬리표라는 것 말이야. 언젠가 당신이 물어본 적 있었지? 이 사진 말이야.”
한 강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예전 생과일 전문점에서 신애가 보았던 사진을 내 밀었다.
“내 동생이야. 한 솔이라고. 말괄량이에다 개구쟁이이긴 했어도 귀여웠는데.......”
한 강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신애의 손에 들려 있던 지갑을 황급히 덮어 버렸다.
“그래서, 그래서 난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부러워.”
한 강의 말에 신애가 살며시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쉽사리 한 강이 그녀의 안속으로 들어왔다. 포근한 그녀의 품에서 한 강이 중얼거렸다.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향기가 좋았어. 왠지 당신에게서는 엄마의 향기가 났었거든.”
한 강이 기분 좋다는 듯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한 강의 말에 신애는 자신이 왜 한 강에게 화를 내었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치부를 들어내 버려 그녀로써는 더 이상 화 낼 이유가 사라져 버린 탓도 있었다. 한 강은 벌써 떠 올라버린 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 되었군. 일요일인데 느긋하게 지내볼까?”
한 강이 개 구진 표정으로 신애의 무릎에 자신의 머리를 올리며 말했다. 애써 웃음 짓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워 신애가 한 강의 머리칼을 매만져 주고 있었다. 단아하게 감겨진 곧은 속눈썹 사이로 금방이라도 한 강의 짙은 눈동자가 들어날것만 같았다. 신애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사랑하지 않고는 못베기게 만드는군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그 둘은 그렇게 서로 비밀을 공유한 특별한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시각 채민석은 휴일도 반납한 채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힘든 날들이었다. 잔뜩 쌓여있는 서류들은 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채민석은 통유리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넘실대는 바다에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었다. 잡생각은 잊겠다는 듯 채민석이 고개를 흔들고선 다시 서류에 시선을 박았다. 그때 문자가 왔다는 알림소리가 들렸다. 채민석이 한 손으로 핸드폰 플립을 열었다.
[설마 휴일인데도 일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소연이었다. 소연의 문자에 채민석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그날 이후 서로의 관계가 딱히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채민석도 소연도 서로 알고 있었다. 말은 안했지만, 서로의 가슴속에 서서히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채민석이 한 손으로 재빠르게 글자를 입력했다.
[나에게 휴일은 사치인걸.]
전송 되는 것을 보고 책상 옆쪽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문자를 보낸 지 한참인데 답장이 오지 않자 채민석의 시선이 자꾸만 핸드폰으로 향했다. 눈으로 핸드폰 한번, 서류에 한번 시선을 준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한참을 기다린 채민석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었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소한 문자 하나에 이렇게 자신이 깊게 반응한다는 것이 자기 스스로도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다. 채민석은 갈피를 못 잡는 자신을 가다듬기 우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깊은 숨을 들여 마셔보아도, 자꾸만 핸드폰을 향하는 시선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은빛 슈트차림의 그가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재킷을 벗고, 갑갑하게 조여 오던 분홍색 넥타이를 푸르고, 팔 부분을 두 번 접어 올렸다. 자신의 시선을 끄는 핸드폰을 첫째 서랍에 넣어버리고 다시 서류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때 첫 번째 서랍에 갇힌 핸드폰이 억울하다는 듯 표로롱- 울음을 터트렸다. 첫 번째 서랍을 열고 핸드폰을 꺼낸데 소용한 시간은 0.1초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급하게 플립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지금 문 밖에 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무슨 소리인가? 채민석이 재빠르게 문을 여니 소연이 빙긋 웃으며 마법처럼 서 있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방문에 채민석은 진정이 되지 않았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더욱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어쩐 일이야?”
“마침 지나가던 길이 었거든요. 학교 휴학문제로 의논드릴 사람 만나느라고요.”
소연은 변해 있었다. 하늘거리는 흰색 플레어스커트에 몸에 피트된 핑크색 니트를 입고 있는 그녀는 대학 새내기 같은 모습이었다. 항상 자신의 몸매를 노출시키던 그녀의 야하고 색스러운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부터 조숙한 여자 장소연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살포시 고개를 숙여 웃고 있었다.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채민석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당장이라도 소연을 안고 침대로 직행하고 싶은 욕정이 일어났지만, 채민석은 자신의 마음을 컨트롤 하며 슬쩍 비켜 소연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소연이 소파에 앉아 들고 온 횟집 종이가방을 올려놓았다. 무엇이냐는 채민석의 시선에 소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식사 못했을까봐 오던 길에 사왔어요.”
소연이 자신이 사온 초밥을 푸르며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앞으로는 그러지마!”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채민석은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봐 전전긍긍이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누가 말했던가? 채민석은 플레어스커트 사이로 살짝 들어나는 소연의 흰 다리를 유혹하고 싶어 감질맛이 났다. 여자를 안고 싶어 미친놈처럼 발광하는 것은 아마 고등학교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채민석은 속으로 자신을 훈계하고 있었다.
[채민석!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여자 안고 싶어 발정난 놈처럼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그러면서도 채민석의 시선은 연신 소연의 다리에 머물러 있었다. 어서와 앉으라는 소연의 시선에 채민석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먹어봐요. 정말 맛있는 곳이에요!”
소연이 나무젓가락을 갈라 채민석을 향해 권했다. 채민석은 자신의 마음이 들킬 새로 황급히 초밥을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확 쏘는 고추냉이가 코끝을 자극했다.
“된장국도 들어요!”
나긋한 소연의 말투에 채민석은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달콤한 말로 대답할 뻔 했다. 한참 먹기에 열중하던 채민석이 지나가는 말투로 소연에게 말했다.
“우리 사귈까?”
“네?”
“못 들었으면 말고!”
반문하는 소연의 말에 채민석이 재빠르게 말을 내 뱉었다. 채민석의 말에 소연은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채민석이 고개를 들어 소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가득 매달고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울어?”
“고, 고마워서요. 진짜 잘 할게요!”
소연이 환희에 찬 얼굴로 채민석에게 소리쳤다. 표정하나 숨길 줄 모르는 순진한 여자였다. 그동안 남자에게 그런 것도 진정한 사랑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채민석을 스쳐지나갔다. 그녀의 순진한 모습에 채민석이 피식 웃었다.
“너도 먹어.”
채민석이 초밥 하나를 집어 소연에게 건넸다. 소연이 냉큼 초밥을 받아먹으며 오물거렸다. 그런 소연을 보며 채민석이 중얼거렸다.
“비밀이 하나 생겨버렸군.”
“민아에게는 비밀로 해야 겠죠?”
채민석의 중얼거림에 소연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채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일로 집안을 시끄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빠와 같이 공유 할 수 있는 비밀이 생겼다는 게 너무 좋아요.”
소연은 누가 들을 새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천진한 모습에 채민석은 왜 진작 저 여자의 순진한 모습을 보지 못했는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내가 알던 장소연이 맞나 의심스럽군.”
채민석의 말에 소연이 무슨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에 채민석이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얼마 전 알던 장소연의 모습과 지금 너의 모습이 너무 틀려서 말이야. 다른 사람이 장소연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 쌍둥이는 아닌지 의심스러워 지고 있어.”
그의 말에 소연이 조신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자는 누구나 카멜레온 같은 성질이 있어요. 남자도 그렇지 않나요? 때로는 독한 면이, 때로는 약한 면이 있는 것처럼 말이예요. 전에 오빠가 알던 장소연도 나고, 오늘 오빠가 보고 있는 모습도 저예요.”
장소연의 말에 채민석이 빙긋 웃었다. 카멜레온 같다는 그녀의 말에 채민석은 자신이 바로 그 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연을 천한 여자로 박대할 때는 언제이고 이 제와서 이렇게 가슴 떨리는 사춘기 소년 같은 형상은 무어란 말인가? 채민석은 장소 연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묘한 여자였다.
30개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렛(20) 비밀을 공유하는 행위는 친근감을 만든다.
(20) 비밀을 공유하는 행위는 친근감을 만든다.
그날 새벽, 한 강이 신애를 찾아왔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근처에만 다가가도 술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찾아온 한 강에게 신애는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그를 향해 냉수 한 컵을 건넸을 뿐이었다. 한 강은 그녀가 건네준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신애를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신애를 쳐다보았다. 잔뜩 골이 난 그녀는 고양이처럼 갸르릉 대고 있었다.
“나한테 잔뜩 골이 난 표정이군.”
한 강이 다 마신 컵을 옆에 다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신애가 용수철처럼 일어나 한 강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왜 아는 척 했어요? 모르는 척 그냥 가버렸다면 좋았잖아요. 사람을 꼭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야 겠어요?”
신애가 쌓였던 말을 숨도 쉬지 않고 뱉어냈었다. 그녀의 태도에 한 강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왜 아는 척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보이고 싶지 않았다고요. 내 이런 모습 따윈…….”
신애의 말에 한 강이 그녀의 팔을 강하게 부여잡고 자신의 쪽으로 좀더 끌어당겼다. 그의 눈이 그녀의 얼굴에 똑 바로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투명한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왜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건데? 당연히 내가 알아야 할 문제 아닌가? 당신에게 내가 단순히 연애 상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야?”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한 강의 물음에 신애가 소리쳤다.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한 강이 되려 굳은 얼굴로 그녀를 질책하고 있었다.
“그럼 왜 숨기려 했는데? 어차피 결혼 하려면 언젠가는 밝혀야 하는 일 아니었어? 나 같으면 부끄러워하지 않겠어!”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한 강의 말에 신애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을 잡고 있는 한 강이 팔을 거칠게 밀치고 무릎을 껴 앉아 잔뜩 자신을 보호하는 형태를 만들어 내었다.
“당신이 부끄러워 할 일 아니잖아.”
그녀의 행동에 한 강이 누그러진 말투로 읊조렸다. 신애는 그런 한 강의 태도에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강은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다가오는 어스름 새벽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한 강은 회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걸 다 갖었다고 생각했었지. 나 자신을 완벽하다고 느꼈을 때가 있었어. 무뚝뚝하지만 매사에 긍정적이시고, 어머니에게 만큼은 세상 그 어떤 남자보다 잘 하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며 다감했던 어머니. 오빠라고 부르며 나에게 잘도 안기던 한 솔이 까지. 난 부러울 게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자랐었어.”
한 강의 말에 신애는 관심조차 없어보였다. 고개를 잔뜩 숙인 채 여전히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신애의 호응 따위는 애초 생각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한 강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고였어. 교통사고. 가족끼리 여행을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애석하게 나만 살아났지. 사고가 나는 그 순간 뒷좌석에 앉은 어머니가 날 감싸 안으셔서 나만 살아났어.”
“어떻게 그런 일이…….”
사고 이었다는 그 말에 신애의 고개가 들어졌다. 측은한 그녀의 시선 따위는 받기 싫다는 듯 한 강의 시선은 여전히 발갛게 떠오르려고 하는 태양에 향해 있었다.
“한동안은 삶의 의미조차 없었어. 살아있다는 것도 내겐 죽음과 다름없었으니깐. 어느 한 순간 벌거 벗긴 채로 광장 한 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었어. 수치스러웠지. 가족 죽이고 살아난 놈이라는 꼬리표가 날 쫓아다니기 시작했으니깐.”
“말도 안돼요!”
그의 말에 신애가 강하게 반박하고 나섰지만, 한 강은 피식 조소를 지었다.
“딱히 말이 안 될 것도 없어. 맞는 말이니깐. 다들 죽고 나만 살아남은 거니깐. 참기 힘든 것이었어. 그 꼬리표라는 것 말이야. 언젠가 당신이 물어본 적 있었지? 이 사진 말이야.”
한 강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예전 생과일 전문점에서 신애가 보았던 사진을 내 밀었다.
“내 동생이야. 한 솔이라고. 말괄량이에다 개구쟁이이긴 했어도 귀여웠는데.......”
한 강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신애의 손에 들려 있던 지갑을 황급히 덮어 버렸다.
“그래서, 그래서 난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부러워.”
한 강의 말에 신애가 살며시 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쉽사리 한 강이 그녀의 안속으로 들어왔다. 포근한 그녀의 품에서 한 강이 중얼거렸다.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 향기가 좋았어. 왠지 당신에게서는 엄마의 향기가 났었거든.”
한 강이 기분 좋다는 듯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한 강의 말에 신애는 자신이 왜 한 강에게 화를 내었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치부를 들어내 버려 그녀로써는 더 이상 화 낼 이유가 사라져 버린 탓도 있었다. 한 강은 벌써 떠 올라버린 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 되었군. 일요일인데 느긋하게 지내볼까?”
한 강이 개 구진 표정으로 신애의 무릎에 자신의 머리를 올리며 말했다. 애써 웃음 짓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워 신애가 한 강의 머리칼을 매만져 주고 있었다. 단아하게 감겨진 곧은 속눈썹 사이로 금방이라도 한 강의 짙은 눈동자가 들어날것만 같았다. 신애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사랑하지 않고는 못베기게 만드는군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그 둘은 그렇게 서로 비밀을 공유한 특별한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시각 채민석은 휴일도 반납한 채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힘든 날들이었다. 잔뜩 쌓여있는 서류들은 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채민석은 통유리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넘실대는 바다에 뛰어들고픈 충동이 일었다. 잡생각은 잊겠다는 듯 채민석이 고개를 흔들고선 다시 서류에 시선을 박았다. 그때 문자가 왔다는 알림소리가 들렸다. 채민석이 한 손으로 핸드폰 플립을 열었다.
[설마 휴일인데도 일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소연이었다. 소연의 문자에 채민석의 입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그날 이후 서로의 관계가 딱히 변한 것은 아니었지만, 채민석도 소연도 서로 알고 있었다. 말은 안했지만, 서로의 가슴속에 서서히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채민석이 한 손으로 재빠르게 글자를 입력했다.
[나에게 휴일은 사치인걸.]
전송 되는 것을 보고 책상 옆쪽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문자를 보낸 지 한참인데 답장이 오지 않자 채민석의 시선이 자꾸만 핸드폰으로 향했다. 눈으로 핸드폰 한번, 서류에 한번 시선을 준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한참을 기다린 채민석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었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소한 문자 하나에 이렇게 자신이 깊게 반응한다는 것이 자기 스스로도 적응되지 않는 일이었다. 채민석은 갈피를 못 잡는 자신을 가다듬기 우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깊은 숨을 들여 마셔보아도, 자꾸만 핸드폰을 향하는 시선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은빛 슈트차림의 그가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재킷을 벗고, 갑갑하게 조여 오던 분홍색 넥타이를 푸르고, 팔 부분을 두 번 접어 올렸다. 자신의 시선을 끄는 핸드폰을 첫째 서랍에 넣어버리고 다시 서류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때 첫 번째 서랍에 갇힌 핸드폰이 억울하다는 듯 표로롱- 울음을 터트렸다. 첫 번째 서랍을 열고 핸드폰을 꺼낸데 소용한 시간은 0.1초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급하게 플립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지금 문 밖에 있는데 들어가도 될까요?]
무슨 소리인가? 채민석이 재빠르게 문을 여니 소연이 빙긋 웃으며 마법처럼 서 있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방문에 채민석은 진정이 되지 않았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더욱더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어쩐 일이야?”
“마침 지나가던 길이 었거든요. 학교 휴학문제로 의논드릴 사람 만나느라고요.”
소연은 변해 있었다. 하늘거리는 흰색 플레어스커트에 몸에 피트된 핑크색 니트를 입고 있는 그녀는 대학 새내기 같은 모습이었다. 항상 자신의 몸매를 노출시키던 그녀의 야하고 색스러운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부터 조숙한 여자 장소연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살포시 고개를 숙여 웃고 있었다.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채민석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당장이라도 소연을 안고 침대로 직행하고 싶은 욕정이 일어났지만, 채민석은 자신의 마음을 컨트롤 하며 슬쩍 비켜 소연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소연이 소파에 앉아 들고 온 횟집 종이가방을 올려놓았다. 무엇이냐는 채민석의 시선에 소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식사 못했을까봐 오던 길에 사왔어요.”
소연이 자신이 사온 초밥을 푸르며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앞으로는 그러지마!”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채민석은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봐 전전긍긍이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누가 말했던가? 채민석은 플레어스커트 사이로 살짝 들어나는 소연의 흰 다리를 유혹하고 싶어 감질맛이 났다. 여자를 안고 싶어 미친놈처럼 발광하는 것은 아마 고등학교 이후 처음인 것 같았다. 채민석은 속으로 자신을 훈계하고 있었다.
[채민석!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여자 안고 싶어 발정난 놈처럼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그러면서도 채민석의 시선은 연신 소연의 다리에 머물러 있었다. 어서와 앉으라는 소연의 시선에 채민석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먹어봐요. 정말 맛있는 곳이에요!”
소연이 나무젓가락을 갈라 채민석을 향해 권했다. 채민석은 자신의 마음이 들킬 새로 황급히 초밥을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확 쏘는 고추냉이가 코끝을 자극했다.
“된장국도 들어요!”
나긋한 소연의 말투에 채민석은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게 달콤한 말로 대답할 뻔 했다. 한참 먹기에 열중하던 채민석이 지나가는 말투로 소연에게 말했다.
“우리 사귈까?”
“네?”
“못 들었으면 말고!”
반문하는 소연의 말에 채민석이 재빠르게 말을 내 뱉었다. 채민석의 말에 소연은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채민석이 고개를 들어 소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가득 매달고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울어?”
“고, 고마워서요. 진짜 잘 할게요!”
소연이 환희에 찬 얼굴로 채민석에게 소리쳤다. 표정하나 숨길 줄 모르는 순진한 여자였다. 그동안 남자에게 그런 것도 진정한 사랑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채민석을 스쳐지나갔다. 그녀의 순진한 모습에 채민석이 피식 웃었다.
“너도 먹어.”
채민석이 초밥 하나를 집어 소연에게 건넸다. 소연이 냉큼 초밥을 받아먹으며 오물거렸다. 그런 소연을 보며 채민석이 중얼거렸다.
“비밀이 하나 생겨버렸군.”
“민아에게는 비밀로 해야 겠죠?”
채민석의 중얼거림에 소연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채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한 일로 집안을 시끄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빠와 같이 공유 할 수 있는 비밀이 생겼다는 게 너무 좋아요.”
소연은 누가 들을 새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천진한 모습에 채민석은 왜 진작 저 여자의 순진한 모습을 보지 못했는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내가 알던 장소연이 맞나 의심스럽군.”
채민석의 말에 소연이 무슨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에 채민석이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얼마 전 알던 장소연의 모습과 지금 너의 모습이 너무 틀려서 말이야. 다른 사람이 장소연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시 쌍둥이는 아닌지 의심스러워 지고 있어.”
그의 말에 소연이 조신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자는 누구나 카멜레온 같은 성질이 있어요. 남자도 그렇지 않나요? 때로는 독한 면이, 때로는 약한 면이 있는 것처럼 말이예요. 전에 오빠가 알던 장소연도 나고, 오늘 오빠가 보고 있는 모습도 저예요.”
장소연의 말에 채민석이 빙긋 웃었다. 카멜레온 같다는 그녀의 말에 채민석은 자신이 바로 그 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연을 천한 여자로 박대할 때는 언제이고 이 제와서 이렇게 가슴 떨리는 사춘기 소년 같은 형상은 무어란 말인가? 채민석은 장소 연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묘한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