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온 세상에 소복이 쌓였다. 금방이라도 뽀얀 입김이 불어져 나올 것 같은 추위였다. 한 강이 서리 낀 창문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었다. 손바닥이 지나간 부분 사이로 하얀 세상이 보였다. 손때 묻은 통나무 탁자위에 놓여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한 강의 두 손은 또다시 노트북으로 향했다.
“오늘도 오셨네요?”
서글한 인상으로 사장이 나와 한 강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벌써 1달째 한 강은 이 카페로 출근 중이었다. 처음 반달동안은 바라보기만 하던 사장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한 강에 대한 궁금증을 들어내 보이고 있었다. 3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가벼운 목례를 하며 한 강이 응수하자, 사장은 한 강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날씨가 상당히 춥죠?”
금방 밖에서 카페 안으로 들어온 사장이 어깨에 묻은 눈들을 털며 말했다. 빨갛게 얼은 손을 문대고 있는 사장에게 여 종업원이 커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뜨거운 커피를 후- 불며 사장이 한 모금 들이켰다.
“매일 이리로 출근 하시는 것 번거롭지 않으세요?”
남 사장의 말에 한 강이 쓰고 있던 검은색 뿔테 안경을 벗어 관자놀이를 눌렀다. 잔뜩 피곤한 기색으로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와이프 소망이라 서요.”
“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남 사장의 반응은 뭐랄까? 희극의 배우 같은 면이 있었다. 한 강의 말 한마디에도 놀람이 그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그의 말을 유도하는 재주가 그에게는 있었다.
“와이프 꿈이 남편 퇴근 기다리며 보글거리는 된장찌개를 끓이는 것이거든요. 근데 제 직업이 프리랜서다 보니, 한 달 전에 말하더라고요. 출근하고 퇴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래서 뭐 이 신세입니다.”
“애처가신가봐요?”
“팔불출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남 사장은 한 강의 말에 부럽다는 시선을 건네며 말했다.
“저도 그런 게 꿈이었습니다. 아내가 퇴근 시간 맞춰서 찌개 끓여 놓고 기다려 주는 게 말입니다.”
“미혼이십니까?”
남 사장은 한 강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한 강의 말에 남 사장이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연애라도 한번 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연애요?”
“네. 이 나이 먹도록 연애 한번 못해봤거든요.”
남 사장이 아픈 구석이라는 듯 말했다. 남 사장의 말에 한 강이 이상하다는 눈빛을 건네자, 그가 말했다.
“이상하게 보실 것 없습니다. 다들 제가 연애 한번 못해봤다고 하면 무슨 병이 있는 것은 아니야? 말 못할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냐? 이상한 눈빛으로든 보시는데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소극적인 제 성격 탓도 있지만, 이 여자다 싶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 여태껏 아껴둔것이니깐요.”
남 사장의 말에 한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가운 날씨 탓인지, 창문 너머로 찬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한 강이 왼쪽 팔을 문지르며 온기가 남아있는 머그잔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작가님은 부인을 어떻게 만났나요?”
남 사장은 한 강을 향해 항상 작가라고 칭했다. 작가라는 말보다는 기자라는 말이 더 익숙한 한 강이었지만 굳이 그의 버릇을 고칠 생각은 없었다. 남 사장의 물음에 한 강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운명이요?”
한 강의 말에 남 사장이 팔짱을 낀 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의 눈에는 궁금함에 떨림마저 스며 있었다. 그런 남 사장의 태도에 한 강이 말을 이었다.
“처음엔 그녀의 귀가 좋았어요. 클럽에서 처음 만났는데 잔뜩 술에 취해 머리를 흐트러트리는데 그 사이로 뽀얀 그녀의 귀가 좋았어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귀와 닮았었거든요.”
“아.”
한 강의 말에 남 사장이 짧은 탄식을 쏟아냈다. 남자에게 어머니와 닮았다는 말은 모성애를 자극시키는 말이라서 그 말 한마디면 어느 남성이든 고개를 끄덕이는 법이었다. 남 사장의 적극적인 대꾸에 힘을 얻은 한 강이 노트북을 닫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그때 남자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었어요. 헤어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그런 관계였거든요.”
“사랑하면 쉽사리 헤어지지 못하는 법이지요. 이성으로는 잘 되지 않는 법이니깐 요.”
남 사장이 얼른 한 강의 말에 응수했다.
“저랑 같이 있는데 남자친구가 오더라고요. 그 남자 입장에서는 헤어질 구실만을 찾았던 모양인데 올커니 했겠지요.”
“저런,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순간 머리가 혼잡하더라고요. 그에게 변명을 하자니, 그녀를 빼앗길 것만 같은 느낌이 불현듯 들어서.........”
“들어서?”
한 강이 말끝을 얼버무리자, 잔뜩 흥미로운 부분에서 끊었다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남 사장이 물었다.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에?”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요.”
“그래서 그 전 남자친구랑 지금의 부인은 헤어지신 건가요?”
“그렇죠. 어쩜 그 날 이후로 제게 기회가 찾아온 지도 모르겠고요.”
“꽤나 낭만적인 만남이네요!”
남 사장의 말에 한 강이 피식 웃으며 손 사레를 쳤다.
“그렇지도 않아요. 여느 만남과 똑 같죠. 다만 틀린 점이 있다면 그날부터 그녀가 제 눈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전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거든요. 이 여자, 저 여자 종류를 가리지 않았죠.”
“젊은 날 호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지요.”
애 늙은이 같은 말투였다. 비슷한 또래의 남성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제 이야기도 했으니, 이제 남 사장님 이야기도 좀 해 보시지요.”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연애 한번 번번이 해 보지 못한 인간입니다.”
“그래도 짝사랑이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한 강의 집요한 말에 남 사장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작가님께는 못 당하겠군요. 좋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지요. 한 때 한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었습니다. 허나 그 여자는 제 친구의 여자친구였죠. 단아한 모습에 저 한눈에 빠져 버렸습니다.”
“잘못된 만남이군요?”
“허허, 그렇습니다. 소위 그렇게들 말하지요. 그날 처음으로 불알친구인 그 녀석을 원망 했습니다.”
“그래서 고백은 하셨습니까?”
한 강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고백 한다면 그나마 편했던 그녀와의 사이가 멀어질까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누구나 고백 전에 두려움은 느끼는걸요.”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 내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과는 확연히 달라지는 법입니다.”
한 강의 말에 남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한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식어버린 커피 위로 여 종업원이 따스한 커피를 리필해 주고 있었다.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어 몇 날 며칠 외운 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한 강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어둠을 타고, 새벽을 넘어 아침이 해를 낳을 때 즈음
한 줄기 빛을 안고
사랑은 그렇게 왔습니다.
한 아름 보듬은 꿈결이 아련한 지라,
몹시도 고운지라, 그것이 사랑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몹시도 그리운 지라,
그것도 흔들리더니 그것이 사랑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바람을 타고 내를 건너 저녁이 달을 낳을 때 즈음
그윽한 달빛 품고, 사랑은 그렇게 왔습니다.
달빛에 넘실거리는 미소 그 눈동자 따스한 지라,
몹시도 포근한지라, 그것이 사랑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몹시도 빛나던 지라 그리도 설레더니
그것이 사랑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대가 나를 안고
내가 그대를 안고
사랑이 사랑을 안고
달빛이 뒹구는 밤에 사랑은 그렇게 왔습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왔습니다.]
한 강이 그 시를 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다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그렇것 같습니다.”
한 강이 카페 한 쪽에 걸려있는 작은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십자수로 만들어진 시계 안에는 붉은 벽돌의 교회가 서 있었다. 시간은 벌써 6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눈이 와서 그런지 아직도 환한 대낮같네요.”
한 강이 한 쪽에 치워둔 노트북을 챙기며 말했다. 한 강은 항상 6시면 카페 문을 나섰다. 그걸 아는 남 사장이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 뵙죠!”
내일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이었다. 그의 말에 한 강이 다 챙겨진 노트북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말했다.
“이래 뵈도 주 5일제입니다. 다음주에 뵙죠.”
말을 마친 한 강이 카페 문을 나섰다. 그의 뒤편으로 출입문에 달려있던 종이 여운을 남기며 울었다. 한 강이 나가고 난 직후, 누군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남 사장은 여전히 한 강과 앉아있던 자리에 있었다.
“뭐하냐?”
짙은 쥐색 코트 차림의 우현이 좀 전 한 강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우현의 말에 남 사장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그래, 장사는 잘 되고?”
“그럭저럭.”
우현의 앞에 여 종업원이 남 사장과 같은 종류의 커피를 내어왔다. 얼굴을 자주 본 탓인지 우현이 그 여종업원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도 뭐 저번 호프집 보다는 나은 것 같다.”
우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우현의 말에 남 사장은 여전히 말을 아끼는 모양새였다. 우현의 질문이 귀찮았는지 남 사장이 성에 낀 유리창을 손으로 닦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까 한 강이 나간 발자국과, 우현이 들어온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회사는 다닐 만 하냐?”
남 사장의 질문에 한 강이 죽을상을 하고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죽겠어. 일은 잘 안되고, 집에서는 결혼 하라고 난리고.”
“그래도 좋아 보인다.”
“좋아 보이기는........”
죽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우현의 표정은 살아있었다. 우현이 두리번거리더니 아까 한 강이 바라보던 벽시계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30개의 달콤쌉싸름한 초콜렛-(episode) 그 남자의 짝사랑
(episode) 그 남자의 짝사랑
하얀 눈이 온 세상에 소복이 쌓였다. 금방이라도 뽀얀 입김이 불어져 나올 것 같은 추위였다. 한 강이 서리 낀 창문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었다. 손바닥이 지나간 부분 사이로 하얀 세상이 보였다. 손때 묻은 통나무 탁자위에 놓여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한 강의 두 손은 또다시 노트북으로 향했다.
“오늘도 오셨네요?”
서글한 인상으로 사장이 나와 한 강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벌써 1달째 한 강은 이 카페로 출근 중이었다. 처음 반달동안은 바라보기만 하던 사장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한 강에 대한 궁금증을 들어내 보이고 있었다. 3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가벼운 목례를 하며 한 강이 응수하자, 사장은 한 강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날씨가 상당히 춥죠?”
금방 밖에서 카페 안으로 들어온 사장이 어깨에 묻은 눈들을 털며 말했다. 빨갛게 얼은 손을 문대고 있는 사장에게 여 종업원이 커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뜨거운 커피를 후- 불며 사장이 한 모금 들이켰다.
“매일 이리로 출근 하시는 것 번거롭지 않으세요?”
남 사장의 말에 한 강이 쓰고 있던 검은색 뿔테 안경을 벗어 관자놀이를 눌렀다. 잔뜩 피곤한 기색으로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와이프 소망이라 서요.”
“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남 사장의 반응은 뭐랄까? 희극의 배우 같은 면이 있었다. 한 강의 말 한마디에도 놀람이 그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그의 말을 유도하는 재주가 그에게는 있었다.
“와이프 꿈이 남편 퇴근 기다리며 보글거리는 된장찌개를 끓이는 것이거든요. 근데 제 직업이 프리랜서다 보니, 한 달 전에 말하더라고요. 출근하고 퇴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래서 뭐 이 신세입니다.”
“애처가신가봐요?”
“팔불출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남 사장은 한 강의 말에 부럽다는 시선을 건네며 말했다.
“저도 그런 게 꿈이었습니다. 아내가 퇴근 시간 맞춰서 찌개 끓여 놓고 기다려 주는 게 말입니다.”
“미혼이십니까?”
남 사장은 한 강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한 강의 말에 남 사장이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연애라도 한번 해 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연애요?”
“네. 이 나이 먹도록 연애 한번 못해봤거든요.”
남 사장이 아픈 구석이라는 듯 말했다. 남 사장의 말에 한 강이 이상하다는 눈빛을 건네자, 그가 말했다.
“이상하게 보실 것 없습니다. 다들 제가 연애 한번 못해봤다고 하면 무슨 병이 있는 것은 아니야? 말 못할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냐? 이상한 눈빛으로든 보시는데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소극적인 제 성격 탓도 있지만, 이 여자다 싶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 여태껏 아껴둔것이니깐요.”
남 사장의 말에 한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가운 날씨 탓인지, 창문 너머로 찬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한 강이 왼쪽 팔을 문지르며 온기가 남아있는 머그잔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작가님은 부인을 어떻게 만났나요?”
남 사장은 한 강을 향해 항상 작가라고 칭했다. 작가라는 말보다는 기자라는 말이 더 익숙한 한 강이었지만 굳이 그의 버릇을 고칠 생각은 없었다. 남 사장의 물음에 한 강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운명이요?”
한 강의 말에 남 사장이 팔짱을 낀 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의 눈에는 궁금함에 떨림마저 스며 있었다. 그런 남 사장의 태도에 한 강이 말을 이었다.
“처음엔 그녀의 귀가 좋았어요. 클럽에서 처음 만났는데 잔뜩 술에 취해 머리를 흐트러트리는데 그 사이로 뽀얀 그녀의 귀가 좋았어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귀와 닮았었거든요.”
“아.”
한 강의 말에 남 사장이 짧은 탄식을 쏟아냈다. 남자에게 어머니와 닮았다는 말은 모성애를 자극시키는 말이라서 그 말 한마디면 어느 남성이든 고개를 끄덕이는 법이었다. 남 사장의 적극적인 대꾸에 힘을 얻은 한 강이 노트북을 닫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그때 남자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었어요. 헤어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그런 관계였거든요.”
“사랑하면 쉽사리 헤어지지 못하는 법이지요. 이성으로는 잘 되지 않는 법이니깐 요.”
남 사장이 얼른 한 강의 말에 응수했다.
“저랑 같이 있는데 남자친구가 오더라고요. 그 남자 입장에서는 헤어질 구실만을 찾았던 모양인데 올커니 했겠지요.”
“저런,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순간 머리가 혼잡하더라고요. 그에게 변명을 하자니, 그녀를 빼앗길 것만 같은 느낌이 불현듯 들어서.........”
“들어서?”
한 강이 말끝을 얼버무리자, 잔뜩 흥미로운 부분에서 끊었다는 원망 섞인 목소리로 남 사장이 물었다.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에?”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요.”
“그래서 그 전 남자친구랑 지금의 부인은 헤어지신 건가요?”
“그렇죠. 어쩜 그 날 이후로 제게 기회가 찾아온 지도 모르겠고요.”
“꽤나 낭만적인 만남이네요!”
남 사장의 말에 한 강이 피식 웃으며 손 사레를 쳤다.
“그렇지도 않아요. 여느 만남과 똑 같죠. 다만 틀린 점이 있다면 그날부터 그녀가 제 눈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전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거든요. 이 여자, 저 여자 종류를 가리지 않았죠.”
“젊은 날 호기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지요.”
애 늙은이 같은 말투였다. 비슷한 또래의 남성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제 이야기도 했으니, 이제 남 사장님 이야기도 좀 해 보시지요.”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연애 한번 번번이 해 보지 못한 인간입니다.”
“그래도 짝사랑이라도 있지 않겠습니까?”
한 강의 집요한 말에 남 사장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작가님께는 못 당하겠군요. 좋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지요. 한 때 한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었습니다. 허나 그 여자는 제 친구의 여자친구였죠. 단아한 모습에 저 한눈에 빠져 버렸습니다.”
“잘못된 만남이군요?”
“허허, 그렇습니다. 소위 그렇게들 말하지요. 그날 처음으로 불알친구인 그 녀석을 원망 했습니다.”
“그래서 고백은 하셨습니까?”
한 강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고백 한다면 그나마 편했던 그녀와의 사이가 멀어질까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누구나 고백 전에 두려움은 느끼는걸요.”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 내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과는 확연히 달라지는 법입니다.”
한 강의 말에 남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한 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식어버린 커피 위로 여 종업원이 따스한 커피를 리필해 주고 있었다.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어 몇 날 며칠 외운 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한 강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어둠을 타고, 새벽을 넘어 아침이 해를 낳을 때 즈음
한 줄기 빛을 안고
사랑은 그렇게 왔습니다.
한 아름 보듬은 꿈결이 아련한 지라,
몹시도 고운지라, 그것이 사랑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몹시도 그리운 지라,
그것도 흔들리더니 그것이 사랑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바람을 타고 내를 건너 저녁이 달을 낳을 때 즈음
그윽한 달빛 품고, 사랑은 그렇게 왔습니다.
달빛에 넘실거리는 미소 그 눈동자 따스한 지라,
몹시도 포근한지라, 그것이 사랑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몹시도 빛나던 지라 그리도 설레더니
그것이 사랑인 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대가 나를 안고
내가 그대를 안고
사랑이 사랑을 안고
달빛이 뒹구는 밤에 사랑은 그렇게 왔습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왔습니다.]
한 강이 그 시를 듣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다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그렇것 같습니다.”
한 강이 카페 한 쪽에 걸려있는 작은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십자수로 만들어진 시계 안에는 붉은 벽돌의 교회가 서 있었다. 시간은 벌써 6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눈이 와서 그런지 아직도 환한 대낮같네요.”
한 강이 한 쪽에 치워둔 노트북을 챙기며 말했다. 한 강은 항상 6시면 카페 문을 나섰다. 그걸 아는 남 사장이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 뵙죠!”
내일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말이었다. 그의 말에 한 강이 다 챙겨진 노트북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말했다.
“이래 뵈도 주 5일제입니다. 다음주에 뵙죠.”
말을 마친 한 강이 카페 문을 나섰다. 그의 뒤편으로 출입문에 달려있던 종이 여운을 남기며 울었다. 한 강이 나가고 난 직후, 누군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남 사장은 여전히 한 강과 앉아있던 자리에 있었다.
“뭐하냐?”
짙은 쥐색 코트 차림의 우현이 좀 전 한 강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우현의 말에 남 사장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그래, 장사는 잘 되고?”
“그럭저럭.”
우현의 앞에 여 종업원이 남 사장과 같은 종류의 커피를 내어왔다. 얼굴을 자주 본 탓인지 우현이 그 여종업원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래도 뭐 저번 호프집 보다는 나은 것 같다.”
우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우현의 말에 남 사장은 여전히 말을 아끼는 모양새였다. 우현의 질문이 귀찮았는지 남 사장이 성에 낀 유리창을 손으로 닦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까 한 강이 나간 발자국과, 우현이 들어온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회사는 다닐 만 하냐?”
남 사장의 질문에 한 강이 죽을상을 하고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죽겠어. 일은 잘 안되고, 집에서는 결혼 하라고 난리고.”
“그래도 좋아 보인다.”
“좋아 보이기는........”
죽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우현의 표정은 살아있었다. 우현이 두리번거리더니 아까 한 강이 바라보던 벽시계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어? 저거 신애가 만 든 거네?”
“호프집 개업할 때 선물했던 거잖아. 호프집 정리하면서 가지고 왔어.”
“녀석. 호프집 정리 하면서 그 곳 물건은 모조리 버린다고 난리치던 놈이.......”
우현이 ‘별난 녀석’ 이라며 중얼거렸다. 남 사장은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개업선물이라며 벽시계를 내밀던 신애가 떠올랐다.
[제가 만든 것이에요. 별것 아니지만 받아주세요.]
그녀의 고운 목소리 선명하게 맴돌았다. 그로부터 1년 뒤, 작은 소설책 한 권이 출판 되었다. 작가의 짝 사랑 이야기를 담은 그 책은, 잔잔한 인기를 끌었다. 그 후, 한 강과 남 사장은 같은 테이블을 쓰는 동기이며,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