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를 위해 스테이크와 값비싼 와인을 주문하고는 그것이 나올 때 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천천히 마시지 않으면 이 우아한 착란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향기에 취해 있으면
혀의 감촉에 배신당하고, 혀의 감촉에 취해 있으면 맛에 배신당하고, 맛에 취해 있으면 다시 향기가 다른 즐거움을 전해 준다.”
라 타슈 와인을 따르며 부연설명을 하는 승하는 나에게 건배를 청 한 뒤 그것을 한껏 음미 한 다음 천천히 돌려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일본작가 무라카미 류(村上龍)는 라 타슈 89년을 그렇게 묘사했어.
그런데 난 라 타슈에 취하기도 전에 이미 준희에게 취해버렸는데.”
“?”
생각지 못한 승하의 말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이 조금씩 뛰어 올뿐. 입 밖으로 아무 말도 표출되지 않았다.
“준희야”
처음으로 그가 나와 눈을 맞췄다.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참 감미롭게 내 귀 속을 파고들었다.
그가 와인잔을 빙빙 돌리더니 테이블위에 탁 내려놓고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준희야, 이 준희. 나한테 그런 변명 하지 않아도 돼.
나 이미 알고 있어 네가 아니라고 해도.
처음 너에게 끌렸던 감정이 단순히 하룻밤
상대가 아니었어. 난 지금 너의 마음을 갖고 싶어.”
힘겹게 말을 꺼낸 승하는 다시 와인을 따르고 그것을 단번에 삼켰다.
그와 나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소원(疏遠)한 관계를 승하는 종결을 맺고 싶어 했다.
“내 마음을 갖고 싶다?
그 다음엔,마음을 갖은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너 없이도 행복했었어.
그런데 이젠 너 없으면 안 될거 같아.
솔직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어. 쉽게 흘려듣지 마.”
승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은 진심으로 와 닿았고, 그 모습에 난 만족스런
미소를 살짝 지었다.
“이봐, 승하샘!
순서가 틀렸어. 하지만 당신 진심은 고려 해 볼게.”
내 말에 승하의 얼굴엔 차츰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좀 전과 비교될 만큼 눈에 띄게 밝아지는 낯빛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처음. 너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것 사과 할게.”
무릎이라도 꿇을 모양새를 갖춘 승하는 나에게 용서와 화해를 갈구했다.
“하지만 널 놓치고 싶지 않았어
물론 방법이 틀렸지만 그렇게라도 널 묶어 두고 싶었어.”
경의에 찬 눈으로 승하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조금씩 흔들려왔고,
난 곧 승하의 진의를 깨달았다.
“나 좀 봐줄래?
지금까지 널 아프게 했던 일 만회 할 수 있게 기회를 줄래?”
“.......”
“고마워.”
내 마음을 헤집고 들어오는 승하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 들이는 듯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승하가 환하게 웃는다.
그동안 승하에게 품었던 증오가 그의 미소 하나로 거짓말처럼 봄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릴 것 만 같은 적신호가 울려왔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뛰어대는 심장을, 벌겋게 달아오르는 내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레스토랑 창밖을 응시했다.
창밖을 통해 승하의 미소가 또 한번 내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그를 만지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심장이 더욱 거세게 요동을 쳐댔다.
‘내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대고, 반응 하는 건 당신이 좋아서가 아니야.
이제야 내가 당신을 마음껏 요리할 수 있음에 흥분을 느끼는 것뿐이지.
단지 그것뿐이지. 그래 이 준희. 단지 그것뿐이야. 그 외에 더 이상의
것은 나에게 없어. 오늘을 위해 참고, 또 참아왔으니까.’
* * * *
“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태후와 이기자를
순식간에 둘러섰다.
또 한번 이기자의 얼굴에 내리 꽂히는 태후의 주먹은 강한 힘에 의해 멈춰줬지만,
태후는 치밀어 오르는 격분을 누르지 못해 부들부들 온 몸을 떨었다.
태후를 제치고 그의 형 강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기자를 일으켜 세우며
머리를 깊숙히 조아려 사과를 하고 관용을 베풀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용서도 구했다. 하지만 그는 강후의 손을 툭 쳐내며 일어나 손등으로 입 언저리를 닦았다.
“오늘일 기억해두죠.”
이기자는 싸늘한 눈빛을 보이며 그의 동료들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보인 후 그곳에서
재빠르게 사라져갔다.
기자단이 빠져 나간 후에도 아직 가시지 않은 웅성거림과 주위 시선은 태후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혼 좀 나야 돼, 따라와.”
그의 형 강후는 몹시 화난 표정으로 태후를 데리고 그의 직무실로 들어갔다.
형을 뒤따르는 태후는 자신의 행동에 후회는 없다고 연거푸 다짐을 되새겼다.
“너 하나의 잘못으로 인해 이번일이 어떻게 확산되나
태후 네 두 눈으로 명확하게 지켜봐. 도움은 거절이야!
네가 저지른 일이니까 네 스스로 해결해.”
태후의 각성을 촉구하듯 그의 형 강후는 따끔한 일침을 놓고 먼저 직무실을 나갔다.
강후의 말이 묘한 낙담을 안겨 주었지만, 태후는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후를 괴롭히는 이기자의 말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분명히 똑똑히 들었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귀를 더럽힌 그 기자의 말을 씻어내고 싶었다.
그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방법은 하나였다. 태후는 무작정집으로 갔다.
그의 책상 앞에 놓인 준희의 보랏빛 다이어리를 보는 순간 망설여졌다. 당장 열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이 사실 일까봐 두려워 선뜻 손을 뻗치지 못하고 노려만 보고 있었다. 다이어리를 든 태후의 손이 떨려왔다.
짧은 시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태후는 다이어리를 들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리고 부리나케 준희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생일날 이후 두 번째 오는 집 앞 이었다. 오늘 찾은 준희의 집안은 켜져 있는 불빛에 사람의 그림자가 살아 있어서인지
훈훈하고도 평범한 가정집으로 태후의 가슴에 와 닿았다.
바이크를 골목어귀에 세워놓고 태후는 대문 앞에 앉아 준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루함을 느낄 여유도 없이 흐르는 시간에 맞춰 태후의 맥박도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밝은 빛을 내 뿜으며 승용차 한대가 준희의 집 앞 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승하와 함께 준희가 내렸다.
그 둘의 모습에 모든 게 확연히 드러난 것처럼 태후는 요지부동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원나잇 스탠드.[제26화]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승하의 입에선 콧노래가 끊이질 않았다.
나를 만난이후 이렇게 밝게 웃는 것은 아마도 오늘이 처음 이었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승하가 운전대를 놓으며 나의 손으로 그의 체온을 옮겼다.
잠시 내 눈을 응시하는 승하의 모습에서 묻어 나오는 아쉬움은 나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을 엿 볼 수 있었다.
온화한 미소와 함께 승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의 손을 잡은 승하의 손가락에서
마저도 행복이 묻어 있는 듯 했다.
“놓지 않을 거야.”
꼭 부여잡은 내 손을 보며 말하는 승하는 다짐이라도 하듯 굳은 의지의 강한 눈빛을 보였다. 어느 새 집에 도착했는지 승하는 내리던 발걸음을 뒤로 하고 다시 차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온 승하는 볼을 쓰다듬더니 이내 서서히 그 손이 내 입술로 내려왔다. 잠시 입술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탐색을 하던 승하는 내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나를 바라봤다.
가벼운 키스로는 해갈이 안 되는지 그는 다시 한번 내 입술을 지그시 눌러왔다.
은은 하면서도 향긋한 와인향이 잔잔하게 내 후각을 타고 올라왔고, 난 상큼 하면서도
쌉싸름한 그의 키스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 입술을 살포시 물고 빨던 그가 내 입을 조심스레 열고 혀를 들이 밀었다. 갑작스런 그의 침입에 적잖이 놀라면서도 싫지
않은 그 기분은 나도 모르게 승하의 목을 휘감게 했다.
난 승하가 이끄는 데로 그의 체취와 입술을 느끼고, 혀밑샘을 자극하는 승하가 주는
짜릿함도 맛보았다. 그가 전하는 느낌은 어지러운 기운을 감돌게 했다.
서로의 침샘에서 분비된 액 마저 승하와 나를 황홀하게 물들였다.
차안의 좁은 공간은 뜨거운 열기로 화끈하게 달아올랐고, 깊은 키스를 하던 승하는
애써 자제력을 되찾고 힘겹게 입술을 떼었지만, 그의 시선은 아직 내 입술에 머물고 있었다.
“편하게 자.”
“응. 당신도.”
승하가 내목을 끌어당겨 그의 품에 감싸 고는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편하게 자라는 그 평범한 말이 이상하리만치 감미롭고 기분 좋게 들려왔다.
그가 씨익 웃으면서 먼저 차에서 내리고, 그 뒤를 따라 내가 내렸다.
그리고 난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 마냥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언제부터 그 앞에 있었는지, 태후가 매우 화가 난 눈으로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난 멍해지고 말았다.
“참, 재미있군요. 유치하게 제자와의 삼각사랑이라.”
태후는 손에 들고 있던 내 다이어리를 승하에게 힘껏 집어 던지며 자못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승하는 자신의 가슴팍에 던져진 다이어리를 손에 들고 내 눈을 한번
쳐다봤고, 난 그것을 승하에게서 가져와 품에 안았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는 거죠?
자질이 의심스럽군요.”
“들어가 준희야.”
단호한 말투를 내뱉는 승하의 행동에 난 태후를 한번 노려보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태후를 지나치는데, 내 오른손이 태후에게 잡혀있음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태후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날 자신의 품에 강하게 끌어당기고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아주 거칠게 입술을 포개왔다.
막무가내로 내 입을 열고 들어오는 태후를 제제할 틈도 없이 난 그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또 한번 태후에게 고스란히 내 입술을 내 주어야 했고, 난 정신을 가다듬고 태후의 입술을 힘껏 깨물고 그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쳤다.
하지만 태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 숨 막혔던 짧은 시간은 승하로 인해 멈춰졌다. 승전자의 미소를 한껏 뽐내는 태후와는 다르게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승하는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승하가 나를 자신의 뒤쪽으로 몰아놓고, 자신의 손등을 들어 내 입술을 비볐다.
“이럴 땐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거니?”
엄지로 내 입술을 쓸어내리던 승하는 태후가 안중에도 없는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어왔고, 대답은 태후가 대신했다.
“어떡하긴요 이제 그만 제자의 여자 친구에게서
손떼시고 선생님 갈 길이나 가시면 됩니다.”
독이 오른 독사마냥 태후의 목소리는 매우 절제 되어 있었고, 승하를 향해 으르렁 거렸다.
“서태후, 누울 자리를 보고 덤벼.
승산없는 게임은 애초에 시작도 안하는 게 좋을 거다.”
“쿡. 전 지는 게임은 시작도 안합니다.”
“그래? 너의 그 오만을 요번 기회에 꺾어주지.”
승하의 음색에서 묻어 나오는 말투는 지나치게 신경질 적이었고, 화를 이기지 못하는지 어금니를 꽉 물고 말하는 그가 한순간 내 마음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았다.
승하의 등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서로 헐뜯고 비아냥거리며 견제하는 그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 한쪽이 쓸쓸해져 왔고, 아무렇지 안은 척 그들을 향해 앞으로 나와 섰다.
“그만해.”
그리고 그들을 사이에 두고 서서 짧게 내 뱉은 내 한마디에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가 알아서 할께 그만 들어가.”
“아니, 내가 알아서 할께 준희가 들어가.”
“싫어, 당신이 가.”
단호하게 거절하는 내 말에 승하는 짧은미소를 지어보이며,내 머리를 한번 보듬었다.
“그럼 정확히 10분 뒤에 통화하자.”
손목시계를 한번 들여다 본 승하는 약속을 받아내야 갈 태세를 갖추었고,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 서야 승하는 ‘널 믿을게’라는 눈빛을 보이고 차에 올라타 내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태후와 둘이 남은 그 공간에 잠시 긴 침묵이 흘렀고, 난 태후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뺨을 세차게 한대 후려치고, 또 한번 후려쳤다.
“하나는 남아일언 중천금을 무시 한 것.
또 하나는,네 멋대로 내 몸에 손 댄 것.”
“훗. 몸에 손댄 대가치고는 가볍네.”
능청을 떠는 태후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나도 사람이라, 궁금한 건 못 참겠더라.
내 비위 건드려서 너나 권승하 선생한테
득 될 건 하나도 없어. 나 한번 뒤틀리면
누가 죽든 끝을 봐야 하거든. 지금부터 얌전하게
내 말 잘듣고, 따라와 주면 내가 본 것 묵인 해둘게.”
“하........”
“그렇지 않으면 아주 좋은 구경거리가 생길 거다.”
이렇게 강압적으로라도 날 옆에 묶어 두려는 태후의 의중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끌려 다닐 입장도 아니었다.
“좋은 구경거리 바라던 바야.
네 멋대로 해봐, 기대할게!”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태후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태후가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태후를 피했지만, 그 행동에 자극을 받았는지 내 손목을 힘껏
잡아채어 태후의 가슴으로 다시 한번 끌어 당겼다.
난, 있는 힘껏 태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애썼다.
“태후, 너한테 실망이야!”
손목을 잡힌 상태에서 실망 이라는 단어에 태후의 손아귀 힘이 쫙 빠져 나갔고,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넋 나간 사람마냥 당혹한 표정을 짓는 태후는 낙담에 빠져 보였고, 그사이 나는 태후에게 등을 돌려 집으로 발걸음을 한 발짝 옮기는데, 작지만 또렷한 태후의 실의에 젖은 목소리가 내 등 뒤로 서글프게 들려왔다.
“다행이야,
절망이 아니라서.”
* * * *
시간은 어느 덧 흘러 7월 중순에 접어들었다. 여름방학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태후와의 마찰 이후 보름동안 승하는 준희와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다.
주말이면 함께 인라인 스케이트도 탔고, 연인들이 다 거쳐 가는 영화관도 갔었다.
그리고 몰랐던 준희의 생활 식습관이나 버릇도 알게 되었다.
준희는 콜라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이상하게도 탄산음료를 마시면 딸꾹질을 하는
특이한 체질 이었다. 그런데도 준희는 늘 콜라를 달고 살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넋 놓고 준희를 쳐다본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일 분 일초가 지날수록 승하는 점점 더 준희에게 빠져 들었고,
그 마음은 자신도 모를 정도로 위험하고 수위가 깊어만 갔다.
“권선생 날 잡더니 얼굴 갈수록 좋아지네.”
교무실 책상에 앉아 준희 생각에 마냥 흐믓 해 하던 승하는 엉뚱한 말로 분위기를
흐리는 김선생의 말에 순간 발끈 했지만, 무덤덤하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 이사장님 오셨어 들어 가봐.”
아버지가 오셨다는 김선생의 말에 승하는 옷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이사장실로 허겁지겁 들어갔다.
“오셨어요?”
“그래, 와서 앉아라.”
시원한 매실차를 마시는 그의 부친 손엔 골프잡지가 들려 있었고, 이내 그것을 내려 승하 앞에 펼쳐 놓았다.
무심코 잡지에 눈이 간 승하는 보름 전에 태후가 준희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며 당당한 포즈로 찍은 사진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태후 옆에 그 아이 우리 애더구나.
참하니 예쁘게 생겼어.”
순간, 승하는 부친의 발언에 놀랐다.
혜원이 에게도 예쁘다는 표현을 쓰질 않던 분이 느닷없이 잡지에 실린 준희를 보고 한마디 던진 것에 승하는 한낱 작은 희망을 걸었다.
“네, 저희반 애 에요. 정말 예쁘죠?”
부친의 칭찬에 승하는 자신도 모르게 밝게 웃으며 아버지를 향해 물었고, 그의 아버지가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서야 곧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너희반 애들은 어찌 그래?”
“아버지, 준희 성적 좋아요.
지켜보셔도 좋을 겁니다.”
준희를 두둔하자 승하의 부친 미간이 좁혀지며 인상을 썻고,내심 뿌듯한 마음을 앞세워 환하게 웃던 승하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혜원이 한 테 그 반만큼만 신경 써봐.
방학하면 며칠 여행도 좀 다녀오고,
갔다 오고 나면 결혼준비로 한창 바뻐 질 거 아니냐.
미리 서둘러 해야지 탈이 없는 법이다.”
부친의 말에 승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탁자 위 골프잡지에 실린 준희를 바라보며 흐믓 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승하는 생각했다.
지금이 파혼을 얘기할 적절한 시기가 왔다고, 뒷감당이야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우선은 부딪치고 보자는 심산 이었다. 승하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마침내 열었다.
“저, 아.......버지!”
그의 부친은 매실차를 입으로 가져가 앞에 놓인 잡지를 한 장 뒤로 넘기며 승하의 부름에 살짝 눈을 치켜뜨고 그의 눈과 마주했다.
승하는 초심을 잃지 않고 밀고 나가기 위해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부친의 눈을 피해
시선을 밑에 놓인 잡지책으로 돌렸다.
그러다 그의 아버지가 넘겨버린 잡지책으로 눈을 돌린 그 순간 승하의 동공이 커져왔고, 자신도 모르게‘헉’소리가 튀어 나왔다.
원나잇 스탠드[25], [26]
원나잇 스탠드.[제25화]
“블레이드 스테이크(blade steak)웰던(welldone)으로 해 주세요.
라 타슈도 함께 주세요.”
승하를 따라 도착한곳은 서울의 중심지 고급 레스토랑 이었다.
그는 나를 위해 스테이크와 값비싼 와인을 주문하고는 그것이 나올 때 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천천히 마시지 않으면 이 우아한 착란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향기에 취해 있으면
혀의 감촉에 배신당하고, 혀의 감촉에 취해 있으면 맛에 배신당하고, 맛에 취해 있으면 다시 향기가 다른 즐거움을 전해 준다.”
라 타슈 와인을 따르며 부연설명을 하는 승하는 나에게 건배를 청 한 뒤 그것을 한껏 음미 한 다음 천천히 돌려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일본작가 무라카미 류(村上龍)는 라 타슈 89년을 그렇게 묘사했어.
그런데 난 라 타슈에 취하기도 전에 이미 준희에게 취해버렸는데.”
“?”
생각지 못한 승하의 말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이 조금씩 뛰어 올뿐. 입 밖으로 아무 말도 표출되지 않았다.
“준희야”
처음으로 그가 나와 눈을 맞췄다.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참 감미롭게 내 귀 속을 파고들었다.
그가 와인잔을 빙빙 돌리더니 테이블위에 탁 내려놓고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준희야, 이 준희. 나한테 그런 변명 하지 않아도 돼.
나 이미 알고 있어 네가 아니라고 해도.
처음 너에게 끌렸던 감정이 단순히 하룻밤
상대가 아니었어. 난 지금 너의 마음을 갖고 싶어.”
힘겹게 말을 꺼낸 승하는 다시 와인을 따르고 그것을 단번에 삼켰다.
그와 나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소원(疏遠)한 관계를 승하는 종결을 맺고 싶어 했다.
“내 마음을 갖고 싶다?
그 다음엔,마음을 갖은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너 없이도 행복했었어.
그런데 이젠 너 없으면 안 될거 같아.
솔직해지기 위해 애쓰고 있어. 쉽게 흘려듣지 마.”
승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말은 진심으로 와 닿았고, 그 모습에 난 만족스런
미소를 살짝 지었다.
“이봐, 승하샘!
순서가 틀렸어. 하지만 당신 진심은 고려 해 볼게.”
내 말에 승하의 얼굴엔 차츰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좀 전과 비교될 만큼 눈에 띄게 밝아지는 낯빛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처음. 너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것 사과 할게.”
무릎이라도 꿇을 모양새를 갖춘 승하는 나에게 용서와 화해를 갈구했다.
“하지만 널 놓치고 싶지 않았어
물론 방법이 틀렸지만 그렇게라도 널 묶어 두고 싶었어.”
경의에 찬 눈으로 승하를 바라보는 내 눈빛이 조금씩 흔들려왔고,
난 곧 승하의 진의를 깨달았다.
“나 좀 봐줄래?
지금까지 널 아프게 했던 일 만회 할 수 있게 기회를 줄래?”
“.......”
“고마워.”
내 마음을 헤집고 들어오는 승하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는 내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 들이는 듯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승하가 환하게 웃는다.
그동안 승하에게 품었던 증오가 그의 미소 하나로 거짓말처럼 봄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릴 것 만 같은 적신호가 울려왔다.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이 뛰어대는 심장을, 벌겋게 달아오르는 내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레스토랑 창밖을 응시했다.
창밖을 통해 승하의 미소가 또 한번 내 눈과 마주치자 갑자기 그를 만지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심장이 더욱 거세게 요동을 쳐댔다.
‘내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대고, 반응 하는 건 당신이 좋아서가 아니야.
이제야 내가 당신을 마음껏 요리할 수 있음에 흥분을 느끼는 것뿐이지.
단지 그것뿐이지. 그래 이 준희. 단지 그것뿐이야. 그 외에 더 이상의
것은 나에게 없어. 오늘을 위해 참고, 또 참아왔으니까.’
* * * *
“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태후와 이기자를
순식간에 둘러섰다.
또 한번 이기자의 얼굴에 내리 꽂히는 태후의 주먹은 강한 힘에 의해 멈춰줬지만,
태후는 치밀어 오르는 격분을 누르지 못해 부들부들 온 몸을 떨었다.
태후를 제치고 그의 형 강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기자를 일으켜 세우며
머리를 깊숙히 조아려 사과를 하고 관용을 베풀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용서도 구했다. 하지만 그는 강후의 손을 툭 쳐내며 일어나 손등으로 입 언저리를 닦았다.
“오늘일 기억해두죠.”
이기자는 싸늘한 눈빛을 보이며 그의 동료들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보인 후 그곳에서
재빠르게 사라져갔다.
기자단이 빠져 나간 후에도 아직 가시지 않은 웅성거림과 주위 시선은 태후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혼 좀 나야 돼, 따라와.”
그의 형 강후는 몹시 화난 표정으로 태후를 데리고 그의 직무실로 들어갔다.
형을 뒤따르는 태후는 자신의 행동에 후회는 없다고 연거푸 다짐을 되새겼다.
“너 하나의 잘못으로 인해 이번일이 어떻게 확산되나
태후 네 두 눈으로 명확하게 지켜봐. 도움은 거절이야!
네가 저지른 일이니까 네 스스로 해결해.”
태후의 각성을 촉구하듯 그의 형 강후는 따끔한 일침을 놓고 먼저 직무실을 나갔다.
강후의 말이 묘한 낙담을 안겨 주었지만, 태후는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후를 괴롭히는 이기자의 말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분명히 똑똑히 들었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귀를 더럽힌 그 기자의 말을 씻어내고 싶었다.
그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방법은 하나였다. 태후는 무작정집으로 갔다.
그의 책상 앞에 놓인 준희의 보랏빛 다이어리를 보는 순간 망설여졌다. 당장 열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이 사실 일까봐 두려워 선뜻 손을 뻗치지 못하고 노려만 보고 있었다. 다이어리를 든 태후의 손이 떨려왔다.
짧은 시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태후는 다이어리를 들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리고 부리나케 준희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생일날 이후 두 번째 오는 집 앞 이었다. 오늘 찾은 준희의 집안은 켜져 있는 불빛에 사람의 그림자가 살아 있어서인지
훈훈하고도 평범한 가정집으로 태후의 가슴에 와 닿았다.
바이크를 골목어귀에 세워놓고 태후는 대문 앞에 앉아 준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루함을 느낄 여유도 없이 흐르는 시간에 맞춰 태후의 맥박도 점점 빨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밝은 빛을 내 뿜으며 승용차 한대가 준희의 집 앞 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승하와 함께 준희가 내렸다.
그 둘의 모습에 모든 게 확연히 드러난 것처럼 태후는 요지부동 자세로 버티고 서 있었다.
원나잇 스탠드.[제26화]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승하의 입에선 콧노래가 끊이질 않았다.
나를 만난이후 이렇게 밝게 웃는 것은 아마도 오늘이 처음 이었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승하가 운전대를 놓으며 나의 손으로 그의 체온을 옮겼다.
잠시 내 눈을 응시하는 승하의 모습에서 묻어 나오는 아쉬움은 나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을 엿 볼 수 있었다.
온화한 미소와 함께 승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의 손을 잡은 승하의 손가락에서
마저도 행복이 묻어 있는 듯 했다.
“놓지 않을 거야.”
꼭 부여잡은 내 손을 보며 말하는 승하는 다짐이라도 하듯 굳은 의지의 강한 눈빛을 보였다. 어느 새 집에 도착했는지 승하는 내리던 발걸음을 뒤로 하고 다시 차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온 승하는 볼을 쓰다듬더니 이내 서서히 그 손이 내 입술로 내려왔다. 잠시 입술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탐색을 하던 승하는 내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나를 바라봤다.
가벼운 키스로는 해갈이 안 되는지 그는 다시 한번 내 입술을 지그시 눌러왔다.
은은 하면서도 향긋한 와인향이 잔잔하게 내 후각을 타고 올라왔고, 난 상큼 하면서도
쌉싸름한 그의 키스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 입술을 살포시 물고 빨던 그가 내 입을 조심스레 열고 혀를 들이 밀었다. 갑작스런 그의 침입에 적잖이 놀라면서도 싫지
않은 그 기분은 나도 모르게 승하의 목을 휘감게 했다.
난 승하가 이끄는 데로 그의 체취와 입술을 느끼고, 혀밑샘을 자극하는 승하가 주는
짜릿함도 맛보았다. 그가 전하는 느낌은 어지러운 기운을 감돌게 했다.
서로의 침샘에서 분비된 액 마저 승하와 나를 황홀하게 물들였다.
차안의 좁은 공간은 뜨거운 열기로 화끈하게 달아올랐고, 깊은 키스를 하던 승하는
애써 자제력을 되찾고 힘겹게 입술을 떼었지만, 그의 시선은 아직 내 입술에 머물고 있었다.
“편하게 자.”
“응. 당신도.”
승하가 내목을 끌어당겨 그의 품에 감싸 고는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편하게 자라는 그 평범한 말이 이상하리만치 감미롭고 기분 좋게 들려왔다.
그가 씨익 웃으면서 먼저 차에서 내리고, 그 뒤를 따라 내가 내렸다.
그리고 난 도둑질을 하다 들킨 것 마냥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언제부터 그 앞에 있었는지, 태후가 매우 화가 난 눈으로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난 멍해지고 말았다.
“참, 재미있군요. 유치하게 제자와의 삼각사랑이라.”
태후는 손에 들고 있던 내 다이어리를 승하에게 힘껏 집어 던지며 자못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승하는 자신의 가슴팍에 던져진 다이어리를 손에 들고 내 눈을 한번
쳐다봤고, 난 그것을 승하에게서 가져와 품에 안았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선생이 될 수 있는 거죠?
자질이 의심스럽군요.”
“들어가 준희야.”
단호한 말투를 내뱉는 승하의 행동에 난 태후를 한번 노려보고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태후를 지나치는데, 내 오른손이 태후에게 잡혀있음을 그때 알았다.
그리고 태후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날 자신의 품에 강하게 끌어당기고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아주 거칠게 입술을 포개왔다.
막무가내로 내 입을 열고 들어오는 태후를 제제할 틈도 없이 난 그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또 한번 태후에게 고스란히 내 입술을 내 주어야 했고, 난 정신을 가다듬고 태후의 입술을 힘껏 깨물고 그의 가슴팍을 두 손으로 쳤다.
하지만 태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 숨 막혔던 짧은 시간은 승하로 인해 멈춰졌다. 승전자의 미소를 한껏 뽐내는 태후와는 다르게 온몸에 잔뜩 힘을 주고 승하는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승하가 나를 자신의 뒤쪽으로 몰아놓고, 자신의 손등을 들어 내 입술을 비볐다.
“이럴 땐 내가 어떡해야 하는 거니?”
엄지로 내 입술을 쓸어내리던 승하는 태후가 안중에도 없는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어왔고, 대답은 태후가 대신했다.
“어떡하긴요 이제 그만 제자의 여자 친구에게서
손떼시고 선생님 갈 길이나 가시면 됩니다.”
독이 오른 독사마냥 태후의 목소리는 매우 절제 되어 있었고, 승하를 향해 으르렁 거렸다.
“서태후, 누울 자리를 보고 덤벼.
승산없는 게임은 애초에 시작도 안하는 게 좋을 거다.”
“쿡. 전 지는 게임은 시작도 안합니다.”
“그래? 너의 그 오만을 요번 기회에 꺾어주지.”
승하의 음색에서 묻어 나오는 말투는 지나치게 신경질 적이었고, 화를 이기지 못하는지 어금니를 꽉 물고 말하는 그가 한순간 내 마음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았다.
승하의 등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서로 헐뜯고 비아냥거리며 견제하는 그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면서도 가슴 한쪽이 쓸쓸해져 왔고, 아무렇지 안은 척 그들을 향해 앞으로 나와 섰다.
“그만해.”
그리고 그들을 사이에 두고 서서 짧게 내 뱉은 내 한마디에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가 알아서 할께 그만 들어가.”
“아니, 내가 알아서 할께 준희가 들어가.”
“싫어, 당신이 가.”
단호하게 거절하는 내 말에 승하는 짧은미소를 지어보이며,내 머리를 한번 보듬었다.
“그럼 정확히 10분 뒤에 통화하자.”
손목시계를 한번 들여다 본 승하는 약속을 받아내야 갈 태세를 갖추었고,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 서야 승하는 ‘널 믿을게’라는 눈빛을 보이고 차에 올라타 내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태후와 둘이 남은 그 공간에 잠시 긴 침묵이 흘렀고, 난 태후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뺨을 세차게 한대 후려치고, 또 한번 후려쳤다.
“하나는 남아일언 중천금을 무시 한 것.
또 하나는,네 멋대로 내 몸에 손 댄 것.”
“훗. 몸에 손댄 대가치고는 가볍네.”
능청을 떠는 태후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나도 사람이라, 궁금한 건 못 참겠더라.
내 비위 건드려서 너나 권승하 선생한테
득 될 건 하나도 없어. 나 한번 뒤틀리면
누가 죽든 끝을 봐야 하거든. 지금부터 얌전하게
내 말 잘듣고, 따라와 주면 내가 본 것 묵인 해둘게.”
“하........”
“그렇지 않으면 아주 좋은 구경거리가 생길 거다.”
이렇게 강압적으로라도 날 옆에 묶어 두려는 태후의 의중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끌려 다닐 입장도 아니었다.
“좋은 구경거리 바라던 바야.
네 멋대로 해봐, 기대할게!”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태후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태후가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태후를 피했지만, 그 행동에 자극을 받았는지 내 손목을 힘껏
잡아채어 태후의 가슴으로 다시 한번 끌어 당겼다.
난, 있는 힘껏 태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애썼다.
“태후, 너한테 실망이야!”
손목을 잡힌 상태에서 실망 이라는 단어에 태후의 손아귀 힘이 쫙 빠져 나갔고,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넋 나간 사람마냥 당혹한 표정을 짓는 태후는 낙담에 빠져 보였고, 그사이 나는 태후에게 등을 돌려 집으로 발걸음을 한 발짝 옮기는데, 작지만 또렷한 태후의 실의에 젖은 목소리가 내 등 뒤로 서글프게 들려왔다.
“다행이야,
절망이 아니라서.”
* * * *
시간은 어느 덧 흘러 7월 중순에 접어들었다. 여름방학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태후와의 마찰 이후 보름동안 승하는 준희와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다.
주말이면 함께 인라인 스케이트도 탔고, 연인들이 다 거쳐 가는 영화관도 갔었다.
그리고 몰랐던 준희의 생활 식습관이나 버릇도 알게 되었다.
준희는 콜라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이상하게도 탄산음료를 마시면 딸꾹질을 하는
특이한 체질 이었다. 그런데도 준희는 늘 콜라를 달고 살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넋 놓고 준희를 쳐다본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일 분 일초가 지날수록 승하는 점점 더 준희에게 빠져 들었고,
그 마음은 자신도 모를 정도로 위험하고 수위가 깊어만 갔다.
“권선생 날 잡더니 얼굴 갈수록 좋아지네.”
교무실 책상에 앉아 준희 생각에 마냥 흐믓 해 하던 승하는 엉뚱한 말로 분위기를
흐리는 김선생의 말에 순간 발끈 했지만, 무덤덤하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 이사장님 오셨어 들어 가봐.”
아버지가 오셨다는 김선생의 말에 승하는 옷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이사장실로 허겁지겁 들어갔다.
“오셨어요?”
“그래, 와서 앉아라.”
시원한 매실차를 마시는 그의 부친 손엔 골프잡지가 들려 있었고, 이내 그것을 내려 승하 앞에 펼쳐 놓았다.
무심코 잡지에 눈이 간 승하는 보름 전에 태후가 준희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며 당당한 포즈로 찍은 사진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태후 옆에 그 아이 우리 애더구나.
참하니 예쁘게 생겼어.”
순간, 승하는 부친의 발언에 놀랐다.
혜원이 에게도 예쁘다는 표현을 쓰질 않던 분이 느닷없이 잡지에 실린 준희를 보고 한마디 던진 것에 승하는 한낱 작은 희망을 걸었다.
“네, 저희반 애 에요. 정말 예쁘죠?”
부친의 칭찬에 승하는 자신도 모르게 밝게 웃으며 아버지를 향해 물었고, 그의 아버지가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서야 곧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너희반 애들은 어찌 그래?”
“아버지, 준희 성적 좋아요.
지켜보셔도 좋을 겁니다.”
준희를 두둔하자 승하의 부친 미간이 좁혀지며 인상을 썻고,내심 뿌듯한 마음을 앞세워 환하게 웃던 승하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혜원이 한 테 그 반만큼만 신경 써봐.
방학하면 며칠 여행도 좀 다녀오고,
갔다 오고 나면 결혼준비로 한창 바뻐 질 거 아니냐.
미리 서둘러 해야지 탈이 없는 법이다.”
부친의 말에 승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탁자 위 골프잡지에 실린 준희를 바라보며 흐믓 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승하는 생각했다.
지금이 파혼을 얘기할 적절한 시기가 왔다고, 뒷감당이야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우선은 부딪치고 보자는 심산 이었다. 승하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마침내 열었다.
“저, 아.......버지!”
그의 부친은 매실차를 입으로 가져가 앞에 놓인 잡지를 한 장 뒤로 넘기며 승하의 부름에 살짝 눈을 치켜뜨고 그의 눈과 마주했다.
승하는 초심을 잃지 않고 밀고 나가기 위해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부친의 눈을 피해
시선을 밑에 놓인 잡지책으로 돌렸다.
그러다 그의 아버지가 넘겨버린 잡지책으로 눈을 돌린 그 순간 승하의 동공이 커져왔고, 자신도 모르게‘헉’소리가 튀어 나왔다.
승하의 태도에 그의 부친도 덩달아 잡지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 그의 부친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몸속을 파고드는 심한 배신감에 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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