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게 씌어진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골프잡지에 그런 가십거리를 실은 기자를 찾아가 당장이라도 목을 조르고 싶었다. 승하의 부친은 떨리는 손으로 잡지를 들고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는 도중 급기야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까지 이르렀다. 화를 참지 못하는 그의 부친이 쥐고 있던 잡지책을 승하의 면전에 확 집어 던져 잡지의 날카로운 끝 면이 그의 얼굴에 ‘슥’스쳐 지나가며 작은 상처를 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승하 앞으로 다가와 있는 힘껏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려 부쳤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부친의 새된 고함이 귀 속 안의 고막까지 터트리듯 크게 들려 왔고, 다시 한번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장관님 댁에서 이걸 보기라도 하면 너 어쩌려고 그래? 이 애비를 죽일 샘 인거냐? 독립 하겠다고 해서 허락했더니 어디서 이런 천치 같은 사고나 치고 다녀? 당장 보따리 싸서 집으로 들어와. 칠칠치 못한 놈 같으니. 혼자 처리도 못할 짓거리를 왜 벌이는 게야 대체.”
철저히 믿었던 자식에게 이런 불상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지 그의 부친은 숨이 넘어가라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는 급하게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래 나다 지금당장 전국에 깔린 시사골프 모두 수거해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몽땅 내 앞으로 다 가져와. 그리고 시사골프 이정우 기자 파면 조치해. 다시는 기자생활 못하게 앞길 막아 버려! 지금 당장. 당장 가서 조치해 어서!”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명령을 하는 그의 부친은 행여 라도 혜원의 집에서 알게 될까 노심초사 했고, 앉은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버지. 오늘 혜원이 하고 파혼 하겠다는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잡지에 실린 건 준희에 대한 모함 입니다. 행실 바르고 착실한 아이거든요.”
쉽게 누그러지지 않는 화를 진정시키던 그의 부친은 승하의 말에 탁자에 놓인 크리스탈 유리잔을 집어 들어 그를 향해 집어 던졌다.
“누구 마음대로 파혼이야? 네 놈이 내 아들인 이상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뒤처리 해줄 때 알아서 고분고분 말 들어. 쓸데없는 반항심 키우지 말고, 알아들어?”
“아버지, 제 인생 제가 살게 해 주세요. 지금까지 아버지 뜻에 맞춰 살아왔으니 결혼 만큼은 제 뜻에 맡겨 주세요. 전 혜원일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자로서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어요. 혜원이랑 있으면 숨이 막혀요. 그리고 이미 전 마음에 둔 여자가 있습니다.”
승하는 사정하듯 그의 부친에게 매달려 보았지만, 부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짧고도 간결한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는 “정리해” 세 음절 이었다. 그는 벼랑 끝에 내몰린 넋 나간 꼴로 멈춰 서 버렸다.
“같은 말 번복하게 만들지 마라. 또 한번 이일이 대두되면 그 아이가 무사하지 않을 거야 명심해둬.”
경고를 지나친 부친의 협박은 승하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고 절벽 끝에 가둬버렸다.
“못난 놈!”
그의 부친이 혀를 차며 더 이상 승하와 마주하기 싫은 듯 밖으로 ‘휑’하니 먼저 나가버렸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친도 준희를 걸고 넘어졌고, 잡지의 기사 또한 준희를 파렴치한 인간으로 내몰고 있었다. 승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잡지에 실린 커다란 『서비스』축제를 만끽하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차분히 읽어 내려가며 심한 분노에 치를 떨었다.
[21세기 삼류연애『서비스축제』를 만끽하다.
엄격한 인격관리를 숙제로 떠안은 골드밸리. 제아무리 훌륭한 레이아웃을 가지고 있더라도 인격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골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장의 레드 카펫을 연상시켰던 골드밸리 창립15주년 기념 파티는 우스운 삼각연예로 사람들의 인상을 구기게 했다. 전 직원이 참여한 서프라이즈 파티, 포토서비스, 무료라운드, 연습볼 제공 등 고객의 눈높이에 맞춘 감동의 서비스를 제공 했지만 그날 사람들의 인식은 우스운 볼거리에 혀를 내둘렀다. 이날, 골드밸리 창립15주년과 더불어 골드밸리 서진석 회장의 자제 서태후 가 프로테스트를 통과하는 경사까지 겹쳐 그 축제의 분위기는 배로 무르익었었다. 하지만 그 축제의 분위기를 흐린 문제의 발단은 S호텔의 경영자이자,J고등학교의 교사까지 겸하고 있는 권승하 씨와 그의 제자 서태후 그리고, 그 둘의 문제의 원인 이준희 였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이준희 의 외모는 출중했지만 이미 권승하 씨와 내연의 관계에 있는 그녀를 서태후 는 오랜 시간 짝사랑 해온 것으로 들어났다. 그날 서태후 는 이준희 를 향한 마음을 고백했으나, 뚜렷한 성과 없이 오히려 그곳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권승하 씨의 분노를 샀다. 권승하 씨는 자신의 제자 서태후 의 사랑고백에 질투를 하고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집어 던지고, 장식된 도자기 분수대까지 깨부수는 어이없는 짓도 일삼았다.
이 준희』,과연 그녀는 누구인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 잡은 건 단연 이준희 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권승하 씨가 선생이란 직업으로 있는 J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당당히 그곳에 나타났다. 선생과의 원나잇 스탠드도 서슴지 않는 그녀는 보기 드문 요즘 학생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고, 행실 또한 좋지 않아 일년간 학교를 쉬었던 경험도 갖고 있었다. 강남 일대에선 남자를 호리는 꽃뱀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고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박ㅇㅇ씨가 조심스럽게 그녀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온몸으로 남자를 휘두르는 그녀는 21세기의 진정한 요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날 그 자리에 안주했던 사람이라면 다들 한번쯤은 불쾌함에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흔히들 말하는 아름다운 로맨스가 아닌 너저분한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그들의 엽기적인 삼각사랑의 끝은 어떠할지 향후 귀추가 주목 된다.]
의도적인 준희에 대한 비방 이었다. 승하는 잡지를 박박 찢었다. 그렇게 산산조각 내어진 종이를 보니 기자들의 모든 부조리를 추방하여 그것을 밝히고 정화 시키는 싶은 마음이 격분과 함께 거세게 차올랐다.
* * * *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퍼 부었다. 장마철이라 습한 기온은 불쾌감마저 가져다주었다. 창밖에 어두워진 하늘은 매우 무섭게 빗줄기를 내리쳤고, 수업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다 난 초조로 울렁거려 평정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국 승하는 수업종이 울린 지 십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뺨에 붉은 상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만들었고, 그가 말하지 않아도 난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 이사장이 학교를 방문 한다는 소문에 며칠 전부터 대청소를 일삼아 왔었다. 그런데 왜? 라는 질문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밝게 웃으며 수업을 해 나갔고, 간혹 나에게 눈을 맞춰 따뜻한 미소를 보이곤 했다.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모르게 승하의 수업은 끝이 났고, 교실 밖으로 나가는 승하의 뒤를 스리슬쩍 따라갔다.
“승하샘. 양호실로 와.”
그의 등 뒤에 대고 말을 내 뱉고는 나는 빠른 걸음으로 먼저 양호실로 향했다. 이곳에 들어오니 예전에 승하와 애정행각을 벌였던 양호선생이 생각나 갑자기 신경질이 났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양호선생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새 날 찾는 건가?”
언제 왔는지 승하가 팔짱을 낀채로 나를 향해 웃음을 흘렸고, 난 나도 모르게 그에게 화답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굴이 왜 그래?”
상처부위에 연고를 바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준희야!”
내 턱을 치켜 올려 승하의 눈높이에 맞춘 그가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포근한 미소가 있지만, 그 속엔 불측지연 한 마음이 숨겨 있었다.
‘설마, 벌써 무너지는 건가?’
알 수 없는 불안에 난 지리멸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불순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승하가 날 꼭 끌어안고 확신을 주듯 속삭였다.
“아무것도 보지 마. 아무 말도 듣지 말고, 내 생각만 하고, 나만 믿고 따라와.”
무슨 일 인지 승하의 그 말이 적적하게 들렸다면 내 착각 이었을까? 난 승하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혼란스러웠다.
“방학하면 여행 갈래? 가서 오래오래 있다오자.”
날 안은 그대로 승하가 물어왔고, 좀더 힘을 주어 안으며 대답도 강요했다. 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고 살짝 긍정의 끄덕임을 해 보였다.
“고마워. 집에 일이 있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 이따가 전화할게.”
“응.”
승하의 뒤를 따라 양호실을 나가려는데 누군가 먼저 양호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비에 흠뻑 젖은 태후였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승하에겐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온갖 번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와.”
착 가라앉은 태후의 목소리 끝엔 고뇌가 묻어났다. 태후는 내 손목을 덥석 잡고 무작정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 힘이 어찌나 세고 빠른지 정말 순식간의 일 이었다.
“봤어? 못 봤지? 본거야? 그 인간이 그걸 보게 둬? 그런데도 넌 가만있어?”
나를 양호실 복도로 끌어낸 태후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 그리고 태후를 바라보던 내 눈빛이 의아심을 나타내자 태후의 눈빛은 잠깐 이었지만 당혹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태후.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매우 퉁명스런 승하의 목소리는 감정을 통제하기 힘든 듯 낮게 가라앉았다.
원나잇 스탠드.[제28화]
“그. 손. 놔.”
저음의 목소리였지만 분명 승하의 목소리엔 거역 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단 한마디에 태후는 얼떨결에 준희의 손목을 놓아 버렸고, 태후와 준희의 시선은 승하를 향했다.
“이 준희, 넌 들어가.”
“왜? 나도 있을 거야.”
“어. 서. 들. 어. 가. 빨. 리.”
딱딱하게 명령을 하는 승하의 위엄 있는 어조에 준희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뒤로하고 교실로 발길을 돌렸다. 준희가 그들의 시야에서 멀어 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승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태후, 준희는 아무것도 몰라. 너도 그렇겠지만 나 또한 준희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끝까지 입 다물고 있어. 쓸데없는 불란 만들지 말고.”
“제 잘못 이었어요. 그건 인정 합니다. 하지만 이미 터져버린 일을 어떻게 준희가 모르게 할 수 있어요? 그 잡지는 전국에 깔려 있는데 어떻게 준희가 안본다고 장담을 하죠?”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넌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확답을 하는 승하의 대답에 태후는 그저 두 주먹만 불끈 쥐고 승하를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참으로 비참 하고, 준희 앞에 나설 명분이 없었다. 또한 자신 때문에 준희가 그런 입방에 오르내린 게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고의적인 준희에 대한 비난이 태후를 향한 경고였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앞으로 준희와 연관 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될 수 있으면 마주 치지 마라. 불. 쾌. 하. 니. 까.”
자신을 책망하며 그날의 일을 반성하던 태후에게 승하의 상대적으로 높은 음성은 크나큰 화와 질투를 불 사 질렀다.
“미쳤군요. 지금 제 정신이십니까? 그게 제자한테 할 소리 인가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제가 지금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것만 같았다면 큰 오산 입니다.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당신같이 비인간적인 선생한테 절대 내 여자 뺏기지 않을 겁니다.”
잔뜩 비아냥거리며 힘을 주고 악을 쓰는 태후의 눈엔 핏기가 서렸다. 한 치도 물러서질 않을 기세로 승하에게 대항하는 태후는 점점 커져가는 질투의 불이 맹렬히 타 올랐다.
“후훗. 어쩌지? 나도 태후 너한테 절대 뺏길 마음이 없는데.”
조롱하듯 내 뱉은 승하의 말에 태후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고,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늘 자신만만했는데, 어딜 가든 뭐하나 부족함 없이 위세를 누리며 살았는데 지금 승하의 앞에서 자신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직 모르는 겁니다. 페어플레이 할 마음 따위는 애초에도 없었습니다. 비겁한 수를 써서라도 준희 저에게 오게 할 겁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 입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자겠죠.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그래, 얼마든지.”
태후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며 여유를 부리는 그로인해 다시 한번 깊은 인상을 찡그린 태후와 달리 승하는 느긋하게 미소를 띤 얼굴 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었고,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승하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조금 더 지체하며 그와 말을 섞다가는 또 한번 어리석은 우(愚)를 범 할 것 같아 태후는 승하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먼저 그 자릴 떠야했다. 승하는 멀어져가는 태후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태후의 말대로 난 정말 자질 없는 비인간적인 사람인가?’
그 말이 승하의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안았다. 준희는 그가 가르치는 제자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시작은 은밀할 수밖에 없다. 배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무시 할 수 없는 높은 장벽이 앞에 커다란 장애물로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배움을 가르치는 이성적인 교사를 떠나, 이 준희 라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감성적인 지극히 정상적인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자였다. 금기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영혼의 떨림은 위험한 계시 엇지만 승하는 그걸 알면서도 포기 할 수 없었다. 마라톤을 완주하듯 천천히 준희 에게로 내지르며 뛰어가는 그 길이 상당히 험난하고 고되고, 위험천만한 길이란 걸 예고했지만, 이미 그녀에게로 곤두박질 쳐버린 그의 마음은 더 이상 막을 길이 없었다.
* * * *
잡지책을 든 혜원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감출 수 없는 당혹감과 배신감이 온몸을 엄습 해왔고, 큰 두 눈에 고인 그렁그렁한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주체 할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모든 것을 잃고 참패 한 듯한 전의의 상실감 이었다. 오직 승하 하나만을 보고 살아왔는데, 그에 대한 꿈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이었다. 혜원은 전화기를 급하게 집어 들었다. 긴 신호음이 한참을 지나도 대답 없는 승하의 전화기는 혜원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고 동시에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눈을 감고 제발 받으라는 주문만 외우길 수차례. 지쳐버린 혜원이 끊으려는 찰나 상대편에서 낮은 승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야.]
심장이 다시 한번 심한 요동을 쳤다. 이 상황을 예견이라도 했었던 듯 그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오. 오빠.”
떨려오는 그녀의 몸과 같이 음색 또한 작은 떨림이 일었고, 울먹임 석인 그녀의 목소리에 승하의 한숨이 수화기 너머 그녀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만나요. 지금 어디 있어요?”
[그래, 만나자.]
승하와의 약속을 받아낸 혜원은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평소와 다른 화려한 옷들을 꺼내 입고, 눈 화장도 입술 화장도 덧칠했다. 그녀의 고불거리는 머리는 하나로 틀어 올려 단아 하면서도 당당한 기품을 엿보이게 만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한층 더 성숙해진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는 했지만, 승하가 좋아 할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두서없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저 멀리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승하가 보이자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또 뛰어왔다. 언제 봐도 한결같이 멋있는 남자였다. 뭇 여성들의 시선을 끌만큼 뚜렷한 이목구비와 건장한 체격 이였다. 늘 그런 승하를 보면서 자신의 남자라는 생각에 항상 뿌듯하고 당당했던 혜원 이었다. 그에 대한 감상에 또다시 혜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빠르게 손수건을 꺼내들어 눈가를 닦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승하 앞에 다가가 섰다.
“오빠.”
애써 밝게 웃으며 말하는 혜원의 부름에 승하는 그저 눈으로 앉으라고 말한다. 혜원은 가슴을 움켜쥐고 침착 하자고 되새기며 자리에 앉았다.
“아빠가 결혼식을 좀 앞당겼으면 하세요. 이왕 할 거 오빠 방학 때 맞춰서 하자고 하시는데, 신혼여행도 좀 느긋하게 다녀오라고 하시고. 제 생각도 그게 낫겠더라고요.”
말을 하는 동안 혜원은 진정되지 않는 심장 때문에 자신의 두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손톱으로 할퀴고 긁어대며 깊은 상처를 만들어 냈다. 초조의 빛을 띤 혜원의 안색은 한시도 쉴 새 없는 불안전한 마음을 대신해 주었다.
“혜원아, 나 너랑 결혼 할 수 없어.”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드디어 승하의 입에서 우려했던 그 말이 현실이 되어 내 뱉어졌다.
“우리 집엔 이미 말씀 드렸어. 너희 집에도 내가 말씀.”
“왜, 왜 나하고 결혼 할 수 없는데?”
승하의 말을 자르고 혜원이 물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져 버릴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그 여자가 아니면 내가 안돼.”
“난, 나는 오빠가 아니면 안돼요. 알잖아요? 23년간 오빠 하나만 바라본 것. 그런데 날 이렇게 내치면 난 어떡하라고요? 말도 안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서.......설마. 그때 그 여.......학생이.......?”
사실이 될까 두려운 마음에 말끝을 흐린 혜원 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리 없는 승하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고, 확고부동한 뜻을 강하게 내 비췄다.
“혜원아 넌 나를 사랑 하는게 아니야. 어려서부터 나만 봐왔기에 너 스스로 그렇게 믿는 것뿐이야. 시야를 좀더 넓게 보면 내 말 이해할거야.”
“아니요. 오빠야 말로 그 앨 사랑 하는 게 아니에요. 오빠 아버지에 대한 반항 아닌가요? 저 다 알고 있어요. 늘 오빠가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 난 것도, 심지어 몇 명의 여자와 같이 침대를 굴렀는지도 다 알고 있다고요!”
“윤 혜원!”
눈물을 흘리면서도 또박또박 말하는 혜원은 자신의 입을 통해 무슨 말이 나갔는지 순간 의심스러웠지만, 놀란 기색은 내 비추지 않았다.
“오늘얘기 안 들은 걸로 할게요. 그러니까 더 이상 저 설득하지 말아요. 집에 돌아가는 즉시 아빠한테 결혼식 앞당기자고 할 거에요. 먼저 일어나요.”
혜원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그녀의 고집스런 행동에 승하는 앞길이 더욱 막막했고, 안개가 심한 울타리 안에 갇혀 헤매는 자신의 모습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 . . . .
원나잇 스탠드[27], [28]
원나잇 스탠드.[제27화]
굵게 씌어진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골프잡지에 그런 가십거리를 실은 기자를 찾아가 당장이라도 목을 조르고 싶었다.
승하의 부친은 떨리는 손으로 잡지를 들고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는 도중
급기야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까지 이르렀다. 화를 참지 못하는 그의 부친이 쥐고 있던 잡지책을 승하의 면전에 확 집어 던져 잡지의 날카로운 끝 면이 그의 얼굴에 ‘슥’스쳐 지나가며 작은 상처를 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승하 앞으로 다가와 있는 힘껏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려
부쳤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부친의 새된 고함이 귀 속 안의 고막까지 터트리듯 크게 들려 왔고, 다시 한번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장관님 댁에서 이걸 보기라도 하면 너 어쩌려고 그래?
이 애비를 죽일 샘 인거냐? 독립 하겠다고 해서 허락했더니
어디서 이런 천치 같은 사고나 치고 다녀? 당장 보따리 싸서
집으로 들어와. 칠칠치 못한 놈 같으니. 혼자 처리도 못할 짓거리를
왜 벌이는 게야 대체.”
철저히 믿었던 자식에게 이런 불상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는지 그의 부친은 숨이 넘어가라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는 급하게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래 나다 지금당장 전국에 깔린 시사골프 모두 수거해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몽땅 내 앞으로 다 가져와.
그리고 시사골프 이정우 기자 파면 조치해.
다시는 기자생활 못하게 앞길 막아 버려!
지금 당장. 당장 가서 조치해 어서!”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명령을 하는 그의 부친은 행여 라도 혜원의 집에서 알게 될까
노심초사 했고, 앉은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버지. 오늘 혜원이 하고 파혼 하겠다는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잡지에 실린 건
준희에 대한 모함 입니다. 행실 바르고 착실한
아이거든요.”
쉽게 누그러지지 않는 화를 진정시키던 그의 부친은 승하의 말에 탁자에 놓인
크리스탈 유리잔을 집어 들어 그를 향해 집어 던졌다.
“누구 마음대로 파혼이야?
네 놈이 내 아들인 이상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뒤처리 해줄 때 알아서 고분고분 말 들어.
쓸데없는 반항심 키우지 말고, 알아들어?”
“아버지, 제 인생 제가 살게 해 주세요.
지금까지 아버지 뜻에 맞춰 살아왔으니 결혼
만큼은 제 뜻에 맡겨 주세요. 전 혜원일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자로서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어요.
혜원이랑 있으면 숨이 막혀요. 그리고 이미 전 마음에 둔
여자가 있습니다.”
승하는 사정하듯 그의 부친에게 매달려 보았지만, 부친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짧고도 간결한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는 “정리해” 세 음절 이었다.
그는 벼랑 끝에 내몰린 넋 나간 꼴로 멈춰 서 버렸다.
“같은 말 번복하게 만들지 마라.
또 한번 이일이 대두되면 그 아이가
무사하지 않을 거야 명심해둬.”
경고를 지나친 부친의 협박은 승하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고 절벽 끝에 가둬버렸다.
“못난 놈!”
그의 부친이 혀를 차며 더 이상 승하와 마주하기 싫은 듯 밖으로 ‘휑’하니 먼저 나가버렸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친도 준희를 걸고 넘어졌고, 잡지의 기사 또한 준희를 파렴치한 인간으로 내몰고 있었다.
승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잡지에 실린 커다란 『서비스』축제를 만끽하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차분히 읽어 내려가며 심한 분노에 치를 떨었다.
[21세기 삼류연애『서비스축제』를 만끽하다.
엄격한 인격관리를 숙제로 떠안은 골드밸리.
제아무리 훌륭한 레이아웃을 가지고 있더라도 인격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골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장의 레드 카펫을 연상시켰던 골드밸리 창립15주년 기념 파티는
우스운 삼각연예로 사람들의 인상을 구기게 했다.
전 직원이 참여한 서프라이즈 파티, 포토서비스, 무료라운드, 연습볼 제공 등 고객의
눈높이에 맞춘 감동의 서비스를 제공 했지만 그날 사람들의 인식은 우스운 볼거리에
혀를 내둘렀다.
이날, 골드밸리 창립15주년과 더불어 골드밸리 서진석 회장의 자제 서태후 가
프로테스트를 통과하는 경사까지 겹쳐 그 축제의 분위기는 배로 무르익었었다.
하지만 그 축제의 분위기를 흐린 문제의 발단은 S호텔의 경영자이자,J고등학교의
교사까지 겸하고 있는 권승하 씨와 그의 제자 서태후 그리고, 그 둘의 문제의 원인
이준희 였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이준희 의 외모는 출중했지만 이미 권승하 씨와 내연의
관계에 있는 그녀를 서태후 는 오랜 시간 짝사랑 해온 것으로 들어났다.
그날 서태후 는 이준희 를 향한 마음을 고백했으나, 뚜렷한 성과 없이 오히려 그곳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권승하 씨의 분노를 샀다.
권승하 씨는 자신의 제자 서태후 의 사랑고백에 질투를 하고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집어 던지고, 장식된 도자기 분수대까지 깨부수는 어이없는 짓도 일삼았다.
이 준희』,과연 그녀는 누구인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 잡은 건 단연 이준희 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권승하 씨가 선생이란 직업으로 있는 J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
당당히 그곳에 나타났다.
선생과의 원나잇 스탠드도 서슴지 않는 그녀는 보기 드문 요즘 학생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고, 행실 또한 좋지 않아 일년간 학교를 쉬었던 경험도 갖고 있었다.
강남 일대에선 남자를 호리는 꽃뱀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고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박ㅇㅇ씨가 조심스럽게 그녀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온몸으로 남자를 휘두르는 그녀는 21세기의 진정한 요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날 그 자리에 안주했던 사람이라면 다들 한번쯤은 불쾌함에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흔히들 말하는 아름다운 로맨스가 아닌 너저분한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그들의 엽기적인 삼각사랑의 끝은 어떠할지 향후 귀추가 주목 된다.]
의도적인 준희에 대한 비방 이었다. 승하는 잡지를 박박 찢었다.
그렇게 산산조각 내어진 종이를 보니 기자들의 모든 부조리를 추방하여 그것을 밝히고 정화 시키는 싶은 마음이 격분과 함께 거세게 차올랐다.
* * * *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퍼 부었다.
장마철이라 습한 기온은 불쾌감마저 가져다주었다. 창밖에 어두워진 하늘은 매우 무섭게 빗줄기를 내리쳤고, 수업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다 난 초조로
울렁거려 평정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국 승하는 수업종이 울린 지 십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뺨에 붉은 상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만들었고, 그가 말하지 않아도 난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 이사장이 학교를 방문 한다는 소문에 며칠 전부터 대청소를 일삼아 왔었다.
그런데 왜? 라는 질문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밝게 웃으며 수업을 해 나갔고, 간혹 나에게 눈을 맞춰 따뜻한 미소를 보이곤 했다.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모르게 승하의 수업은 끝이 났고, 교실 밖으로 나가는 승하의
뒤를 스리슬쩍 따라갔다.
“승하샘. 양호실로 와.”
그의 등 뒤에 대고 말을 내 뱉고는 나는 빠른 걸음으로 먼저 양호실로 향했다.
이곳에 들어오니 예전에 승하와 애정행각을 벌였던 양호선생이 생각나 갑자기
신경질이 났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 양호선생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새 날 찾는 건가?”
언제 왔는지 승하가 팔짱을 낀채로 나를 향해 웃음을 흘렸고, 난 나도 모르게 그에게 화답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굴이 왜 그래?”
상처부위에 연고를 바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준희야!”
내 턱을 치켜 올려 승하의 눈높이에 맞춘 그가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포근한 미소가 있지만, 그 속엔 불측지연 한 마음이 숨겨 있었다.
‘설마, 벌써 무너지는 건가?’
알 수 없는 불안에 난 지리멸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불순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승하가 날 꼭 끌어안고 확신을 주듯 속삭였다.
“아무것도 보지 마. 아무 말도 듣지 말고,
내 생각만 하고, 나만 믿고 따라와.”
무슨 일 인지 승하의 그 말이 적적하게 들렸다면 내 착각 이었을까?
난 승하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혼란스러웠다.
“방학하면 여행 갈래?
가서 오래오래 있다오자.”
날 안은 그대로 승하가 물어왔고, 좀더 힘을 주어 안으며 대답도 강요했다.
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고 살짝 긍정의 끄덕임을 해 보였다.
“고마워. 집에 일이 있어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 이따가 전화할게.”
“응.”
승하의 뒤를 따라 양호실을 나가려는데 누군가 먼저 양호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비에 흠뻑 젖은 태후였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승하에겐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온갖 번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와.”
착 가라앉은 태후의 목소리 끝엔 고뇌가 묻어났다. 태후는 내 손목을 덥석 잡고 무작정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 힘이 어찌나 세고 빠른지 정말 순식간의 일 이었다.
“봤어? 못 봤지? 본거야? 그 인간이 그걸 보게 둬?
그런데도 넌 가만있어?”
나를 양호실 복도로 끌어낸 태후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엉뚱한 질문을 해왔다.
그리고 태후를 바라보던 내 눈빛이 의아심을 나타내자 태후의 눈빛은 잠깐 이었지만
당혹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태후.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매우 퉁명스런 승하의 목소리는 감정을 통제하기 힘든 듯 낮게 가라앉았다.
원나잇 스탠드.[제28화]
“그. 손. 놔.”
저음의 목소리였지만 분명 승하의 목소리엔 거역 할 수 없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단 한마디에 태후는 얼떨결에 준희의 손목을 놓아 버렸고, 태후와 준희의 시선은
승하를 향했다.
“이 준희, 넌 들어가.”
“왜? 나도 있을 거야.”
“어. 서. 들. 어. 가. 빨. 리.”
딱딱하게 명령을 하는 승하의 위엄 있는 어조에 준희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뒤로하고 교실로 발길을 돌렸다.
준희가 그들의 시야에서 멀어 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승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태후, 준희는 아무것도 몰라. 너도 그렇겠지만
나 또한 준희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끝까지 입 다물고 있어. 쓸데없는 불란 만들지 말고.”
“제 잘못 이었어요. 그건 인정 합니다. 하지만 이미
터져버린 일을 어떻게 준희가 모르게 할 수 있어요?
그 잡지는 전국에 깔려 있는데 어떻게 준희가 안본다고
장담을 하죠?”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넌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확답을 하는 승하의 대답에 태후는 그저 두 주먹만 불끈 쥐고 승하를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참으로 비참 하고, 준희 앞에 나설 명분이 없었다. 또한 자신 때문에 준희가 그런 입방에 오르내린 게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고의적인 준희에 대한 비난이 태후를 향한 경고였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앞으로 준희와 연관 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될 수 있으면 마주 치지 마라. 불. 쾌. 하. 니. 까.”
자신을 책망하며 그날의 일을 반성하던 태후에게 승하의 상대적으로 높은 음성은
크나큰 화와 질투를 불 사 질렀다.
“미쳤군요. 지금 제 정신이십니까?
그게 제자한테 할 소리 인가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제가 지금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것만 같았다면 큰 오산 입니다.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당신같이 비인간적인
선생한테 절대 내 여자 뺏기지 않을 겁니다.”
잔뜩 비아냥거리며 힘을 주고 악을 쓰는 태후의 눈엔 핏기가 서렸다.
한 치도 물러서질 않을 기세로 승하에게 대항하는 태후는 점점 커져가는 질투의
불이 맹렬히 타 올랐다.
“후훗. 어쩌지? 나도 태후 너한테 절대 뺏길 마음이 없는데.”
조롱하듯 내 뱉은 승하의 말에 태후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고,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늘 자신만만했는데, 어딜 가든 뭐하나 부족함 없이 위세를 누리며 살았는데 지금 승하의 앞에서 자신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는 아직 모르는 겁니다.
페어플레이 할 마음 따위는 애초에도 없었습니다.
비겁한 수를 써서라도 준희 저에게 오게 할 겁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도전장 입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자겠죠.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그래, 얼마든지.”
태후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며 여유를 부리는 그로인해
다시 한번 깊은 인상을 찡그린 태후와 달리 승하는 느긋하게 미소를 띤 얼굴 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었고,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승하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조금 더 지체하며 그와 말을 섞다가는 또 한번 어리석은 우(愚)를 범 할 것 같아 태후는 승하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먼저 그 자릴 떠야했다.
승하는 멀어져가는 태후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태후의 말대로 난 정말 자질 없는 비인간적인 사람인가?’
그 말이 승하의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안았다. 준희는 그가 가르치는 제자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시작은 은밀할 수밖에 없다. 배움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무시 할 수 없는 높은 장벽이 앞에 커다란 장애물로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배움을 가르치는 이성적인 교사를 떠나, 이 준희 라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감성적인 지극히 정상적인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자였다.
금기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영혼의 떨림은 위험한 계시 엇지만 승하는 그걸 알면서도 포기 할 수 없었다.
마라톤을 완주하듯 천천히 준희 에게로 내지르며 뛰어가는 그 길이 상당히 험난하고
고되고, 위험천만한 길이란 걸 예고했지만, 이미 그녀에게로 곤두박질 쳐버린 그의
마음은 더 이상 막을 길이 없었다.
* * * *
잡지책을 든 혜원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감출 수 없는 당혹감과 배신감이 온몸을 엄습 해왔고, 큰 두 눈에 고인 그렁그렁한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주체 할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모든 것을 잃고 참패 한 듯한 전의의 상실감 이었다.
오직 승하 하나만을 보고 살아왔는데, 그에 대한 꿈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
이었다. 혜원은 전화기를 급하게 집어 들었다.
긴 신호음이 한참을 지나도 대답 없는 승하의 전화기는 혜원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고 동시에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눈을 감고 제발 받으라는 주문만 외우길 수차례. 지쳐버린 혜원이 끊으려는 찰나
상대편에서 낮은 승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야.]
심장이 다시 한번 심한 요동을 쳤다.
이 상황을 예견이라도 했었던 듯 그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오. 오빠.”
떨려오는 그녀의 몸과 같이 음색 또한 작은 떨림이 일었고, 울먹임 석인 그녀의 목소리에 승하의 한숨이 수화기 너머 그녀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만나요. 지금 어디 있어요?”
[그래, 만나자.]
승하와의 약속을 받아낸 혜원은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평소와 다른 화려한 옷들을 꺼내 입고, 눈 화장도 입술 화장도 덧칠했다.
그녀의 고불거리는 머리는 하나로 틀어 올려 단아 하면서도 당당한 기품을 엿보이게
만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한층 더 성숙해진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는 했지만, 승하가 좋아 할 거라는 생각에 미치자 두서없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저 멀리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승하가 보이자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또 뛰어왔다.
언제 봐도 한결같이 멋있는 남자였다.
뭇 여성들의 시선을 끌만큼 뚜렷한 이목구비와 건장한 체격 이였다.
늘 그런 승하를 보면서 자신의 남자라는 생각에 항상 뿌듯하고 당당했던 혜원 이었다.
그에 대한 감상에 또다시 혜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빠르게 손수건을 꺼내들어 눈가를 닦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승하 앞에 다가가 섰다.
“오빠.”
애써 밝게 웃으며 말하는 혜원의 부름에 승하는 그저 눈으로 앉으라고 말한다.
혜원은 가슴을 움켜쥐고 침착 하자고 되새기며 자리에 앉았다.
“아빠가 결혼식을 좀 앞당겼으면 하세요.
이왕 할 거 오빠 방학 때 맞춰서 하자고 하시는데,
신혼여행도 좀 느긋하게 다녀오라고 하시고.
제 생각도 그게 낫겠더라고요.”
말을 하는 동안 혜원은 진정되지 않는 심장 때문에 자신의 두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손톱으로 할퀴고 긁어대며 깊은 상처를 만들어 냈다.
초조의 빛을 띤 혜원의 안색은 한시도 쉴 새 없는 불안전한 마음을 대신해 주었다.
“혜원아, 나 너랑 결혼 할 수 없어.”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드디어 승하의 입에서 우려했던 그 말이 현실이 되어 내 뱉어졌다.
“우리 집엔 이미 말씀 드렸어.
너희 집에도 내가 말씀.”
“왜, 왜 나하고 결혼 할 수 없는데?”
승하의 말을 자르고 혜원이 물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져 버릴 수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그 여자가 아니면 내가 안돼.”
“난, 나는 오빠가 아니면 안돼요.
알잖아요? 23년간 오빠 하나만 바라본 것.
그런데 날 이렇게 내치면 난 어떡하라고요?
말도 안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서.......설마. 그때 그 여.......학생이.......?”
사실이 될까 두려운 마음에 말끝을 흐린 혜원 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리 없는 승하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고, 확고부동한 뜻을 강하게 내 비췄다.
“혜원아 넌 나를 사랑 하는게 아니야. 어려서부터
나만 봐왔기에 너 스스로 그렇게 믿는 것뿐이야.
시야를 좀더 넓게 보면 내 말 이해할거야.”
“아니요. 오빠야 말로 그 앨 사랑 하는 게 아니에요.
오빠 아버지에 대한 반항 아닌가요? 저 다 알고 있어요.
늘 오빠가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 난 것도, 심지어 몇 명의
여자와 같이 침대를 굴렀는지도 다 알고 있다고요!”
“윤 혜원!”
눈물을 흘리면서도 또박또박 말하는 혜원은 자신의 입을 통해 무슨 말이 나갔는지
순간 의심스러웠지만, 놀란 기색은 내 비추지 않았다.
“오늘얘기 안 들은 걸로 할게요.
그러니까 더 이상 저 설득하지 말아요.
집에 돌아가는 즉시 아빠한테 결혼식
앞당기자고 할 거에요. 먼저 일어나요.”
혜원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그녀의 고집스런 행동에 승하는 앞길이 더욱 막막했고, 안개가 심한 울타리 안에 갇혀
헤매는 자신의 모습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
.
.
.
.
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