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사업적인 얘기를 하다보니 승하는 시간이 이렇게 흐른 지도, 또 준희를 혼자 내버려 뒀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이 준희 생각에 주위를 둘러 봤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애인 찾는 거야? 그런 거라면 포기해 진작 가버렸으니까.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좀 키워야겠드라 네 애인. 혼자 파티 즐기러 온 것도 아닌데, 너 가 거들떠도 안본다고 인상 쓰고 욕지거리 내뱉고 가더라. 보기 흉하게.”
두리번거리는 승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수진이 빈정거렸지만, 그 말이 승하의 비위에 거슬렸다는 건 감지하지 못했다.
“남의 일에 관심 갖지 말고 네 일이나 신경 써. 그 시간에 어떡하면 마음을 곱게 쓸지 생각하란 말이다.”
승하는 들고 있던 유리잔을 신경질 적으로 내려놓으며 자유로운 한손으로 수진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수진에게 퍼 부으면서도 준희를 찾는 일은 그만두지 않았다. 안의 곳곳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준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네 애인은 마음을 곱게 써서 딴 남자 품에 안겨 히히덕 거리는 거니?”
그녀는 승하의 비아냥에 홧김에 실언을 하고 말았다. 무심결에 내 뱉은 말이 수진조차도 감당이 되질 않았다. 별안간 승하가 수진의 멱살을 잡아챘다.
“똑바로 말해. 어디서 뭘 봤는지!”
“잘난 네 애인 남자 호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더라. 전직이 의심스러울 만큼!”
수진의 말에 승하는 그녀의 멱살을 잡은 채로 힘껏 밀어내어 수진은 바닥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보니 준석이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불길한 기운이 승하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고,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가는 그의 뒤를 민준이 따랐다.
“침착해. 별일이야 있겠어?”
“준희가 네 여자라도 그런 말이 나와?”
남의 집 불구경 하듯 느긋한 민준의 태도에 승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만, 민준은 계속 침착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는 도우미를 잡고 물어봤으나, 아무도 준석이나 준희를 보지 못했다고 하자 승하는 별장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다 우연히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재빠르게 계단으로 향해 집어든 그것이 준희의 머리핀임을 확인한 승하는 이층에 있을 거 란 확신에 더 생각 할 것 도 없이 이층으로 뛰어올랐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그 순간이 천년만년 길게만 느껴졌고,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을 땐 벽 전체에 걸린 몇 점의 그림들과 한가운데 있는 이젤만이 승하를 맞았다. 그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벽 끝에 그중 제일 큰 화보를 들어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엔 방으로 보이는 문고리가 있었고, 그것을 잡고 돌렸을 땐 방문은 단단히 잠가져 있었다. 귀를 문 쪽에 바짝 갖다댄 승하는 방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발로 방문을 힘껏 걷어찼다.
“김 준석! 문 열어!”
말과 동시에 이번엔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지만 안에서는 어떤 움직임이나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만 내려가자.”
문 앞에 매달려 손으로 발로 계속 문을 두들기는 승하를 민준이 저지 시켰다. 승하는 쉽게 포기하는 스스로에게 절망에 빠져 무거운 발걸음으로 등을 돌렸다. 그런데 힘겨운 발걸음을 한 발짝 떼었을 때 승하의 청각을 곤두세우는 가녀리게 울부짖는 준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승하 새에.......”
민준도 들었는지 놀란 눈으로 승하를 바라봤고, 승하는 굳게 잠겨줘 있는 방문을 다시 쾅쾅 두들기기 시작했다.
“연장을 찾아볼게.”
민준은 말과 동시에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있는 힘껏, 온힘을 무게에 실어 발로 쳐내기를 수차례 단단하여 열릴 것 같지 않았던 문이 낡은 탓인지 쉽게 부서지며 거추장스러운 그것을 걷어냈다. 그리고 그의 앞에 펼쳐진 상황은 승하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짓밟아 버렸다. 준희는 반항을 하다 지친기색이 역력했고, 승하의 등장에 긴장이 풀렸는지 그제 서야 겨우겨우 참고 참았던 잠에게 손을 들고 항복을 청했다. 한달음에 준희 앞으로 달려간 승하는 준희 위에 있는 준석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쿡쿡 절묘한 타임이군.”
“이 개자식아!”
준석의 말에 승하는 거친 말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고 준석이 몸을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고 또 한번 주먹을 날렸다.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준석을 향해 이번엔 발로다 준석을 내리 밟았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승하의 발길과 주먹질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준석의 얼굴은 조금씩 피범벅으로 물들어 갔다.
“네 여자 끝내주던데 쿡쿡.”
얻어터지는 와중에도 준석은 입방정을 놀았다. 승하는 준석을 바닥에 눕히고 그의 아귀에 주먹을 연이어 가격했다.
“매우 훌륭했어.”
“죽기 싫으면 입 닥쳐!”
맞으면서도 빈정거림을 끝내지 않던 준석은 승하의 드센 주먹에 치아 두개를 피와 함께 뱉어냈다. 하지만 승하는 멈추지 않았고 좀 전보다 더욱 거센 몸짓으로 준석을 때려눕혔다.
“승하야, 그쯤 해둬.”
언제 왔는지 민준이 뒤에서 승하를 말렸지만 이미 승하는 귀머거리에 장님 이었다. 오직 준석을 때리는 일에만 몰두했으며, 걸리적 거리는 민준을 밀쳐냈다.
“정신 차려, 이러다 사람 잡겠어!”
“놔, 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민준의 제재에 승하는 사납고 독살스런 표정으로 억세게 말을 내 뱉고 구둣발로 준석을 힘껏 내리 찼다. 어느새 파랗게 질려버린 준석은 승하의 마지막 발길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승하의 복부 가격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준석을 따라 승하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 있었고, 편하게 잠들어 있는 준희를 보고서야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거친 숨소리를 연거푸 내뱉는 승하를 대신해 민준이 잠든 준희를 안기위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섰을 때,
“건드리지 마!”
분기가 서린 우악스러운 승하의 고함은 쩌렁쩌렁 방안을 울려 퍼져 나갔다.
“준희를 만질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민준은 실소를 터트리며 준희 옆에서 물러나 바닥에 앉아있는 승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승하는 누워있는 준희를 자신의 가슴팍에 꼭 감싸 안아 조심스럽게 보듬었다. 자신 때문에 큰 상처가 있는 준희를 또 한번 그의 실수로 버려둘 뻔 했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싫었고 그래서 더욱 준석을 가만둘 수 없었다. 이렇게나 여리고 연약한 여자인데 어떻게 그런 흉악한 짓을 했었는지 승하는 자괴심이 끓어올랐다. 더 이상 준희에게 상처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전의 아픔까지 이제 승하가 다 감싸 안고 감당할 그의 몫인 것이다.
* * * * *
경호가 일러 준대로 찾아온 이곳은 술렁거리며 뒤숭숭했다. 준희나 승하는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안의 사람들은 하나 둘 밖으로 소란스럽게 나오며 망가진 파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바빴다. 개중엔 길길이 날뛰며 악을 쓰는 사람도 있었고, 초주검 상태로 들것에 실려 나가는 한 남자를 보고서야 태후는 상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왜, 어째서?’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으로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한쪽 어귀에 바이크를 세워둔 태후는 웬일인지 자꾸 걱정이 되고 무거운 먹구름이 잔뜩 끼어 흐려진 것처럼 숨 막히는 근심이 감돌았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번호를 누르는 태후의 손이 바삐 움직였고 미세하게 떨려왔지만 경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침착함으로 무장했다.
“어떻게 된 거야?”
[자세한건 나도 모르겠어. 권승하 선생 쌈박질 한 모양이야. 준희 안고 나오더니 차에 올라타서 지금 서울로 가고 있어.]
전화기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려와 태후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또 다시 한발 늦은 자신을 꾸짖으며 허무에서 오는 위기감에 직면했다.
“엿 같네.”
무심코 올려다본 한여름 밤의 하늘은 공명(空冥)했다. 별 한점 없는 밤 하늘위로 한줄기 빛처럼 준희가 환한 웃음으로 내려다본다. 태후는 뛰어오는 심장박동 소리에 놀라 한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하. 미쳤구나. 서 태후.”
준희의 생각만으로도 그의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아득한 준희의 회상에서 정신이 깨어난 태후는 쓴 웃음을 짓고는 바이크에 올라타 왔던 길을 다시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권 승하 선생, 당신이 이겼다는 착각은 오늘 하루뿐이야.’
밤늦게 집에 돌아온 태후는 녹초가 되었지만 쉽게 잠을 청하지는 못했다. 이리저리 한참을 뒤척이던 태후는 새벽녘에 걸려온 전화로 인해 완전한 잠에서 깨고 말았다.
[서 태후, 재미있는 사실 하나 말해줄까?]
술에 잔뜩 취한 혜미 목소리를 듣고 난 태후는 전화를 집어 던지려다 혜미의 뒷말에 다시 전화기를 귀에 가까이 갔다댔다.
[21세기 서비스 축제를 만끽하다.]
잊고 있던 악몽을 혜미가 잔인하게 끄집어냈다.
“그게 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침착성을 가장해 응대했다.
[후훗. 날 믿어봐.]
태후가 말대꾸를 하기도전에 혜미는 이미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
“제기랄, 되는 일 하나도 없네.”
멍하니 넋 나간 꼴로 멈춰선 태후는 흉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으스스 해졌다.
* * * * *
‘탁, 탁’
‘쨍그랑’
무언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시끄러운 마찰음에 난 눈을 떴다. 머리가 흔들렸지만 ‘아, 아’소리를 내어 혀를 입안에서 자유롭게 굴렸을 땐 기능상실해 무뎌졌던 혀의 감각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몸은 새털처럼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누운 자리에서 그대로 천정을 올려다봤다. 그 위는 은하계의 위에서 봤을 때 그 주변의 중심을 감싸 돌고 있는 나선형의 구조로 거대한 별들의 집합을 이뤘다. 강처럼 보이는 안드로메다은하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했다. 한참을 천정을 바라보다 문득, 몸서리가 처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서야 여기가 어딘지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방안을 휘 둘러 봤을 땐 준석의 별장은 아닌 듯 했다. 방의 주인은 별관측이 취미 인 듯(천정도 그렇듯이) 발코니의 망원경 세대가 그걸 증명 이라도 하듯 나란히 앞 다투어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 어수선한 밖의 소음에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 거실을 둘러보았다. 맙소사! 거실을 보고 나서야 이곳이 승하의 집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승하는 앞치마를 두르고 연실 무언가 깨고 부스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맞아, 어제 승하가 날 위기에서 구해줬지.’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만 같아 도리질을 치는데, 승하가 무심코 뒤를 돌아다봤다. 그러다 내 두 눈과 마주친 승하는 활짝 웃는다.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저음의 그의 목소리는 참 촉촉하게 느껴졌다. 난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마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리와 봐. 너 먹이려고 직접 만들었어. 콜라는 오늘 없어. 케익만 먹어.”
반쯤 내 밀어진 몸을 완전히 밖으로 내밀어 승하가 손짓을 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는 자랑스럽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생크림 케익을 내 밀었다. 모양은 우스웠지만 그래도 제법 흉내는 낸 그의 케익은 내 심장을 떨리게 했다. 승하는 내가 생크림 케익과 콜라를 유달리 좋아 하는걸 기억하고 있었다.
“좀 달게 했어. 놀랬을 때 당분을 섭취하면 기분이 좀 낳아 질 거야.”
승하는 어제의 일을 묻지 않았다. 날 위한 그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심장 안을 파고들었고, 세심한 그의 배려에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을 해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승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감추느라 전전긍긍 이었다.
“자, 먹어봐 모양은 이래도 맛은 천하일품 일거야. 하하하.”
승하는 손으로 생크림 케익을 잘라 내 입에 갖다 대고는 멋쩍게 웃는다.
“아 해. 어서!”
눈치 없이 뛰어대는 심장박동에 호흡을 멈추고 있던 내게, 내밀어진 그의 케익을 받아먹기란 참으로 어정쩡한 자세였다. 계속 케익을 입 앞에서 들고 있는 승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나는 숨을 고르고 그의 케익을 받아먹었다. 하얀 생크림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고 달콤한 맛이 내장을 들쑤셔 전파를 타고 온몸으로 따뜻한 기운과 함께 전해졌다.
“달콤해.”
달콤하다는 한마디에 승하는 매우 흡족한 웃음을 흘리고 또 한번 그의 손으로 케익을 조각내어 내밀었다.
“내가 먹을게. 당신도 먹어.”
“너 가 먹여줘.”
일곱 살 난 아이 같은 장난기 서린 그의 눈은 진심으로 내가 먹여주길 바랬다.
“미쳤어?”
“응, 준희 한테 미쳤어.”
손 사레를 치는 내 행동에 승하는 그저 젓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마냥 막무가내였다. 강요는 아니지만 왠지 승하의 행동에 따라주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나는 승하가 그랬던 것처럼 손으로 케익을 조각내어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유난히 생크림이 많이 묻어났다. 승하는 개구쟁이 마냥 받아먹더니 이내 내 손목을 꽉 붙들고 내 손가락도 함께 그의 입안에 넣어 그 사이사이 묻어난 생크림을 입으로 정교하게 핥았다.
“하, 하지 마.......”
“이상하게 달아 너무 달아.”
손을 빼내려는 내 손목을 그가 더 꽉 힘주어 잡아끌었다.
“승하샘.”
갑자기 행동을 멈춘 그가 날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야수 같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나를 그의 품에 잡아당겨 세게 안았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승하가 먹여준 케익보다 더욱 달콤한 맛과 향이 나를 홀리었다. 미치도록 감미로운 그의 입술은 저절로 탄성을 유발시켰다.
“하아.”
“키스를 원하면 언제든 나를 승하샘 이라고 불러. 다음엔 더 미치게 만들어 버릴 거야.”
승하도 알고 있는 것일까? 난 이미 그의 입술에, 그의 키스에, 열광하고 매료 돼 버린 것을....... 그는 어린 아이에게 사탕을 주었다 빼앗는 것처럼 내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만 그의 입술을 거두어 갔다. 못된 아이에게 벌이라도 주듯 더 이상 내 입술을 탐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린 서로의 모습에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풉.”
“하하.”
나와 승하의 얼굴은 생크림으로 범벅되어 엉망진창 이었다.
“같이 씻을까?”
짓꿎은 승하의 말장난에 가슴이 뛰고 얼굴이 새빨개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별안간 초인종이 울렸다.
“민준이가 왔을 거야.”
둘만의 시간에 훼방을 놓은 민준의 이름을 힘주어 말하는 승하의 표정은 언짢은 기색이 두드러졌다. 그는 앞치마도 벗지 않고 생크림 범벅이 된 그 상태로 현관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승하도 나도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으로 인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원나잇 스탠드[34]
원나잇 스탠드.[제34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사업적인 얘기를 하다보니 승하는 시간이 이렇게 흐른 지도,
또 준희를 혼자 내버려 뒀는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불현듯이 준희 생각에 주위를 둘러 봤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애인 찾는 거야?
그런 거라면 포기해 진작 가버렸으니까.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좀 키워야겠드라 네 애인.
혼자 파티 즐기러 온 것도 아닌데, 너 가 거들떠도
안본다고 인상 쓰고 욕지거리 내뱉고 가더라. 보기 흉하게.”
두리번거리는 승하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수진이 빈정거렸지만, 그 말이
승하의 비위에 거슬렸다는 건 감지하지 못했다.
“남의 일에 관심 갖지 말고 네 일이나 신경 써.
그 시간에 어떡하면 마음을 곱게 쓸지 생각하란 말이다.”
승하는 들고 있던 유리잔을 신경질 적으로 내려놓으며 자유로운 한손으로 수진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수진에게 퍼 부으면서도 준희를 찾는 일은 그만두지 않았다.
안의 곳곳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준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네 애인은 마음을 곱게 써서 딴 남자
품에 안겨 히히덕 거리는 거니?”
그녀는 승하의 비아냥에 홧김에 실언을 하고 말았다.
무심결에 내 뱉은 말이 수진조차도 감당이 되질 않았다.
별안간 승하가 수진의 멱살을 잡아챘다.
“똑바로 말해. 어디서 뭘 봤는지!”
“잘난 네 애인 남자 호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더라. 전직이 의심스러울 만큼!”
수진의 말에 승하는 그녀의 멱살을 잡은 채로 힘껏 밀어내어 수진은 바닥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보니 준석이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불길한 기운이 승하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고,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가는 그의
뒤를 민준이 따랐다.
“침착해. 별일이야 있겠어?”
“준희가 네 여자라도 그런 말이 나와?”
남의 집 불구경 하듯 느긋한 민준의 태도에 승하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지만, 민준은
계속 침착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바쁜 걸음으로 지나가는 도우미를 잡고 물어봤으나, 아무도 준석이나 준희를 보지
못했다고 하자 승하는 별장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다 우연히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재빠르게 계단으로 향해 집어든 그것이 준희의 머리핀임을 확인한 승하는 이층에 있을 거 란 확신에 더 생각 할 것 도 없이 이층으로 뛰어올랐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그 순간이 천년만년 길게만 느껴졌고,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을 땐
벽 전체에 걸린 몇 점의 그림들과 한가운데 있는 이젤만이 승하를 맞았다.
그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벽 끝에 그중 제일 큰 화보를 들어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엔 방으로 보이는 문고리가 있었고, 그것을 잡고 돌렸을 땐 방문은
단단히 잠가져 있었다.
귀를 문 쪽에 바짝 갖다댄 승하는 방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발로 방문을 힘껏 걷어찼다.
“김 준석! 문 열어!”
말과 동시에 이번엔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지만 안에서는 어떤 움직임이나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만 내려가자.”
문 앞에 매달려 손으로 발로 계속 문을 두들기는 승하를 민준이 저지 시켰다.
승하는 쉽게 포기하는 스스로에게 절망에 빠져 무거운 발걸음으로 등을 돌렸다.
그런데 힘겨운 발걸음을 한 발짝 떼었을 때 승하의 청각을 곤두세우는 가녀리게 울부짖는
준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승하 새에.......”
민준도 들었는지 놀란 눈으로 승하를 바라봤고, 승하는 굳게 잠겨줘 있는 방문을 다시
쾅쾅 두들기기 시작했다.
“연장을 찾아볼게.”
민준은 말과 동시에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있는 힘껏, 온힘을 무게에 실어 발로 쳐내기를 수차례 단단하여 열릴 것 같지 않았던
문이 낡은 탓인지 쉽게 부서지며 거추장스러운 그것을 걷어냈다.
그리고 그의 앞에 펼쳐진 상황은 승하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짓밟아 버렸다.
준희는 반항을 하다 지친기색이 역력했고, 승하의 등장에 긴장이 풀렸는지 그제 서야
겨우겨우 참고 참았던 잠에게 손을 들고 항복을 청했다.
한달음에 준희 앞으로 달려간 승하는 준희 위에 있는 준석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쿡쿡 절묘한 타임이군.”
“이 개자식아!”
준석의 말에 승하는 거친 말과 함께 주먹을 내질렀고 준석이 몸을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고
또 한번 주먹을 날렸다.
휘청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준석을 향해 이번엔 발로다 준석을 내리 밟았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승하의 발길과 주먹질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준석의 얼굴은
조금씩 피범벅으로 물들어 갔다.
“네 여자 끝내주던데 쿡쿡.”
얻어터지는 와중에도 준석은 입방정을 놀았다.
승하는 준석을 바닥에 눕히고 그의 아귀에 주먹을 연이어 가격했다.
“매우 훌륭했어.”
“죽기 싫으면 입 닥쳐!”
맞으면서도 빈정거림을 끝내지 않던 준석은 승하의 드센 주먹에 치아 두개를 피와 함께
뱉어냈다. 하지만 승하는 멈추지 않았고 좀 전보다 더욱 거센 몸짓으로 준석을 때려눕혔다.
“승하야, 그쯤 해둬.”
언제 왔는지 민준이 뒤에서 승하를 말렸지만 이미 승하는 귀머거리에 장님 이었다.
오직 준석을 때리는 일에만 몰두했으며, 걸리적 거리는 민준을 밀쳐냈다.
“정신 차려, 이러다 사람 잡겠어!”
“놔, 저 새끼 죽여 버릴 거야.”
민준의 제재에 승하는 사납고 독살스런 표정으로 억세게 말을 내 뱉고 구둣발로 준석을 힘껏 내리 찼다. 어느새 파랗게 질려버린 준석은 승하의 마지막 발길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승하의 복부 가격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준석을 따라 승하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피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 있었고, 편하게 잠들어 있는 준희를 보고서야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거친 숨소리를 연거푸 내뱉는 승하를 대신해 민준이 잠든 준희를 안기위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섰을 때,
“건드리지 마!”
분기가 서린 우악스러운 승하의 고함은 쩌렁쩌렁 방안을 울려 퍼져 나갔다.
“준희를 만질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민준은 실소를 터트리며 준희 옆에서 물러나 바닥에 앉아있는 승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승하는 누워있는 준희를 자신의 가슴팍에 꼭 감싸 안아
조심스럽게 보듬었다.
자신 때문에 큰 상처가 있는 준희를 또 한번 그의 실수로 버려둘 뻔 했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싫었고 그래서 더욱 준석을 가만둘 수 없었다.
이렇게나 여리고 연약한 여자인데 어떻게 그런 흉악한 짓을 했었는지 승하는 자괴심이
끓어올랐다.
더 이상 준희에게 상처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전의 아픔까지 이제 승하가 다 감싸 안고 감당할 그의 몫인 것이다.
* * * * *
경호가 일러 준대로 찾아온 이곳은 술렁거리며 뒤숭숭했다.
준희나 승하는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안의 사람들은 하나 둘 밖으로
소란스럽게 나오며 망가진 파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바빴다.
개중엔 길길이 날뛰며 악을 쓰는 사람도 있었고, 초주검 상태로 들것에 실려 나가는 한 남자를 보고서야 태후는 상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왜, 어째서?’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으로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한쪽 어귀에 바이크를 세워둔 태후는 웬일인지 자꾸 걱정이 되고 무거운 먹구름이
잔뜩 끼어 흐려진 것처럼 숨 막히는 근심이 감돌았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번호를 누르는 태후의 손이 바삐 움직였고 미세하게 떨려왔지만
경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땐 침착함으로 무장했다.
“어떻게 된 거야?”
[자세한건 나도 모르겠어. 권승하 선생
쌈박질 한 모양이야. 준희 안고 나오더니
차에 올라타서 지금 서울로 가고 있어.]
전화기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려와 태후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또 다시 한발 늦은 자신을 꾸짖으며 허무에서 오는 위기감에 직면했다.
“엿 같네.”
무심코 올려다본 한여름 밤의 하늘은 공명(空冥)했다.
별 한점 없는 밤 하늘위로 한줄기 빛처럼 준희가 환한 웃음으로 내려다본다.
태후는 뛰어오는 심장박동 소리에 놀라 한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하. 미쳤구나. 서 태후.”
준희의 생각만으로도 그의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아득한 준희의 회상에서 정신이 깨어난 태후는 쓴 웃음을 짓고는 바이크에 올라타
왔던 길을 다시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권 승하 선생, 당신이 이겼다는 착각은 오늘 하루뿐이야.’
밤늦게 집에 돌아온 태후는 녹초가 되었지만 쉽게 잠을 청하지는 못했다.
이리저리 한참을 뒤척이던 태후는 새벽녘에 걸려온 전화로 인해 완전한 잠에서
깨고 말았다.
[서 태후, 재미있는 사실 하나 말해줄까?]
술에 잔뜩 취한 혜미 목소리를 듣고 난 태후는 전화를 집어 던지려다 혜미의 뒷말에
다시 전화기를 귀에 가까이 갔다댔다.
[21세기 서비스 축제를 만끽하다.]
잊고 있던 악몽을 혜미가 잔인하게 끄집어냈다.
“그게 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침착성을 가장해 응대했다.
[후훗. 날 믿어봐.]
태후가 말대꾸를 하기도전에 혜미는 이미 전화를 끊은 상태였다.
“제기랄, 되는 일 하나도 없네.”
멍하니 넋 나간 꼴로 멈춰선 태후는 흉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으스스 해졌다.
* * * * *
‘탁, 탁’
‘쨍그랑’
무언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시끄러운 마찰음에 난 눈을 떴다.
머리가 흔들렸지만 ‘아, 아’소리를 내어 혀를 입안에서 자유롭게 굴렸을 땐 기능상실해 무뎌졌던 혀의 감각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몸은 새털처럼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누운 자리에서 그대로 천정을 올려다봤다.
그 위는 은하계의 위에서 봤을 때 그 주변의 중심을 감싸 돌고 있는 나선형의 구조로
거대한 별들의 집합을 이뤘다. 강처럼 보이는 안드로메다은하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 했다. 한참을 천정을 바라보다 문득, 몸서리가 처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서야 여기가 어딘지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방안을 휘 둘러 봤을 땐 준석의 별장은 아닌 듯 했다.
방의 주인은 별관측이 취미 인 듯(천정도 그렇듯이) 발코니의 망원경 세대가 그걸 증명
이라도 하듯 나란히 앞 다투어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 어수선한 밖의 소음에 방문을 조심스레 열어 거실을 둘러보았다.
맙소사!
거실을 보고 나서야 이곳이 승하의 집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승하는 앞치마를 두르고 연실 무언가 깨고 부스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맞아, 어제 승하가 날 위기에서 구해줬지.’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만 같아 도리질을 치는데, 승하가 무심코 뒤를 돌아다봤다.
그러다 내 두 눈과 마주친 승하는 활짝 웃는다.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저음의 그의 목소리는 참 촉촉하게 느껴졌다.
난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마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리와 봐. 너 먹이려고 직접 만들었어.
콜라는 오늘 없어. 케익만 먹어.”
반쯤 내 밀어진 몸을 완전히 밖으로 내밀어 승하가 손짓을 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는 자랑스럽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생크림 케익을 내 밀었다.
모양은 우스웠지만 그래도 제법 흉내는 낸 그의 케익은 내 심장을 떨리게 했다.
승하는 내가 생크림 케익과 콜라를 유달리 좋아 하는걸 기억하고 있었다.
“좀 달게 했어. 놀랬을 때 당분을
섭취하면 기분이 좀 낳아 질 거야.”
승하는 어제의 일을 묻지 않았다.
날 위한 그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심장 안을 파고들었고, 세심한 그의 배려에
심장이 미친 듯이 펌프질을 해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승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감추느라 전전긍긍 이었다.
“자, 먹어봐 모양은 이래도 맛은
천하일품 일거야. 하하하.”
승하는 손으로 생크림 케익을 잘라 내 입에 갖다 대고는 멋쩍게 웃는다.
“아 해. 어서!”
눈치 없이 뛰어대는 심장박동에 호흡을 멈추고 있던 내게, 내밀어진 그의 케익을
받아먹기란 참으로 어정쩡한 자세였다.
계속 케익을 입 앞에서 들고 있는 승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나는 숨을 고르고
그의 케익을 받아먹었다.
하얀 생크림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고 달콤한 맛이 내장을 들쑤셔 전파를 타고
온몸으로 따뜻한 기운과 함께 전해졌다.
“달콤해.”
달콤하다는 한마디에 승하는 매우 흡족한 웃음을 흘리고 또 한번 그의 손으로 케익을
조각내어 내밀었다.
“내가 먹을게. 당신도 먹어.”
“너 가 먹여줘.”
일곱 살 난 아이 같은 장난기 서린 그의 눈은 진심으로 내가 먹여주길 바랬다.
“미쳤어?”
“응, 준희 한테 미쳤어.”
손 사레를 치는 내 행동에 승하는 그저 젓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마냥 막무가내였다.
강요는 아니지만 왠지 승하의 행동에 따라주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나는 승하가 그랬던 것처럼 손으로 케익을 조각내어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유난히 생크림이 많이 묻어났다.
승하는 개구쟁이 마냥 받아먹더니 이내 내 손목을 꽉 붙들고 내 손가락도 함께
그의 입안에 넣어 그 사이사이 묻어난 생크림을 입으로 정교하게 핥았다.
“하, 하지 마.......”
“이상하게 달아 너무 달아.”
손을 빼내려는 내 손목을 그가 더 꽉 힘주어 잡아끌었다.
“승하샘.”
갑자기 행동을 멈춘 그가 날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야수 같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나를 그의 품에 잡아당겨 세게 안았다. 마침내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승하가 먹여준 케익보다 더욱 달콤한 맛과 향이 나를 홀리었다.
미치도록 감미로운 그의 입술은 저절로 탄성을 유발시켰다.
“하아.”
“키스를 원하면 언제든 나를 승하샘 이라고 불러.
다음엔 더 미치게 만들어 버릴 거야.”
승하도 알고 있는 것일까?
난 이미 그의 입술에, 그의 키스에, 열광하고 매료 돼 버린 것을.......
그는 어린 아이에게 사탕을 주었다 빼앗는 것처럼 내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그만 그의
입술을 거두어 갔다.
못된 아이에게 벌이라도 주듯 더 이상 내 입술을 탐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린 서로의 모습에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풉.”
“하하.”
나와 승하의 얼굴은 생크림으로 범벅되어 엉망진창 이었다.
“같이 씻을까?”
짓꿎은 승하의 말장난에 가슴이 뛰고 얼굴이 새빨개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별안간 초인종이 울렸다.
“민준이가 왔을 거야.”
둘만의 시간에 훼방을 놓은 민준의 이름을 힘주어 말하는 승하의 표정은 언짢은
기색이 두드러졌다.
그는 앞치마도 벗지 않고 생크림 범벅이 된 그 상태로 현관문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승하도 나도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으로 인해 그대로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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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