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련{수정본}

이야기 상자2005.06.02
조회2,590

 수정을 했지만 다시 해야해요. 애 련{수정본}

 어찌나 괴로운지... 하지만 제 미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겠죠.

 많은 걸 바꾸어야 하는데 시대까지 바꾸라는 주문이 있어서 좀 오래 걸릴 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처음 부터 다시 쓰고 있어요.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져서 처음엔 제가 구상한 애련이 다른 것으로 바뀌어 지는것에 대해 좀 고민을 했지만 처음부터 쓰다 보니 괜찮은 제안 같아서 잘 쓰려고 노력중이랍니다.

 여러분 항상 건강하세요.

 동영상은 보지 않았는데... 노인학대가 요즘 문제거리 중에 하나더군요.

 울 병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인 것을 ....

 우리 수선생님이 굉장히 인간적이시거든요.

 매일 치매 걸린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욕먹고 쥐어 뜯기고 살고 있는 직업인지라....

 화가 날때도 많지만 그래도 그런건 좀....

 나중에 우리 부모가... 더 지나서는 내가 요양원에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치매는 병인 아니라 어린 아이가 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일을 잘해도 인간성이 좋아도 노인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인것 같아요.

 우리 부모님께 효도해용..

 쓰다보니 딴 곳으로....

 

 

1


 하필이면 오늘 반공훈련을 하는 날이라 태림과 엄마는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모든 걸 아버지가 들어오시기 전에 끝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지 다른 날은 잘 들어오시지 않는 분이 반공훈련을 하는 날이면 소등을 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 오셨기 때문에 그녀들의 손은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면 단 둘이 맛난 식사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오늘 준비하는 상은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이 태림의 방 한 편에 차려 놓은 두 사람을 위한 상은 6년 전에 세상을 떠난 태림의 언니부부를 위한 제사상이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언니의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도 거부했다.
 언니의 죽음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태림은 그런 아버지가 증오스러웠지만 그 만큼 무서웠기 때문에 반항한번 한적히 없었다.
 아버지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언니를 원하는 대학에도 보내주지 않고 나이가 아버지뻘만 한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내려고 했고, 언니는 그걸 피하기 위해 다 큰 나이에 가출을 했고, 예전부터 남 몰래 사랑을 키워온 동갑내기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아버지가 쏟아낸 저주처럼 금세 끝나고 말았다. 언니는 임신한 몸으로 형부와 시댁에 가던 도중, 중앙선을 침범한 트럭 때문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었다.
 "태림아. 어서 하자꾸나."
 "네."
 태림은 잠시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았다. 다른 친구들의 엄마들처럼 화려함도 당당함도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지워진 분이었지만, 적어도 자식들을 향한 사랑만은 잊어버리지 않았고, 버리지 않으신 분이었다.
 엄마는 외갓집의 빚을 갚기 위해서 처녀의 몸으로 아이가 딸린 아버지에게 시집왔다.
 그 아이를 친딸처럼 키우다가 태림을 낳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던 아들이 아니라면 세 모녀를 무시했다.
 진만의 구타와 폭언이 그녀들의 삶을 어렵게 했지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힘든 삶에서 큰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시련을 다시 한번 겪고 말았다.
 태림은 죽어버린 언니 부부와 보지도 못한 조카가 죽어버린 것도 안타까웠지만 지금 살아서 그들의 제사상을 차리는 엄마가 가장 불쌍했다.
 오늘은 언니와 형부를 위해 잠시 앉아 있을 시간도 없었다.
 다행이 상을 다 치우자 아버지가 집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아버지가 아실 일은 없지만 두 모녀는 가슴이 두근거려 거대한 체격을 가진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의논할 일이 있으니 둘 다 거실로 와."
 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의 말이 그녀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는 사소한 것도 가족과 의논하는 법이 없이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시는 분이었지 한번도 이러신 적이 없던 분이었다.
 두 모녀는 왠지 모른 떨리는 마음으로 독재자인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태림은 처음으로 아버지가 이제 나이가 드셨다는 생각이 들었고, 처음으로 아버지가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슨 일인데요. 아버지."
 태림과 그녀의 엄마는 계엄령을 선포하듯이 독재적으로 태림의 결혼을 선언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들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조차 몰랐다. 그러면 그렇지 아버지가 그들 모녀에게 뭔가 상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항상 그렇듯이 결정하고 선포하면 그의 일은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 모녀를 남겨두고 일어서려고 하자 여자의 엄마는 자신의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
 "결, 결혼이라니요. 태림인 아직 고등학생이에요."
 그랬다 태림은 아직 고등학생 이였고, 결혼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어떻게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돈을 벌어 엄마를 이 집에서 데리고 나가는 것이 태림이의 꿈이자 인생의 목표였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그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태림 모녀의 정신을 강타했다.
 "뭐가 문제야. 제 나이는 스무 살이잖아. 지금 결혼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없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잔말하지 말고."
 태림은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해서 학교를 이년 동안이나 다니지 못해 동급생 학생들 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하지만 나이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 사람이었고, 감정이 있었다. 아버지의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기 위해 그녀가 태어난 건 아니었다. 적어도 이번만은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었다.
 언니도 강제로 결혼시키려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보내고 나서도 뉘우침은커녕 하나 남은 자신마저 그렇게 강제로 시집을 보내려고 하자 태림은 화가 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아버지의 앞에 다가섰다. 다른 건 다 아버지의 말에 따랐지만 이번만은 이번 한 번만은 순순히 따를 수가 없었다.
 "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태림의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어머니가 팔을 붙잡았을 때보다 더 울그락 불그락 거리면서 붉어지다가 점점 더 검붉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가슴을 누르는 분노 때문에 처음으로 무섭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언제나 그랬다. 아버지는 자신의 말만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말을 따르기 바랐고, 그렇지 않을 시에는 가차 없이 냉정하고 폭군처럼 변하는 사람이었다.
 "아니요. 이번만은 싫어요. 항상 아버지 말을 들어왔잖아요. 그러니 이번만은 제 뜻도 받아 들여 주세요."
 진만의 눈이 가늘어 졌지만 태림은 가슴을 펴고 조금 더 당당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약해 보이는 건 곳 패배를 의미했다.
 "여러 번 말시키지 마. 이미 혼인 신고 해놓았으니까."
 태림과 엄마인 순미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언니가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하고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자 이번엔 아예 그런 싹을 처음부터 자른 거였다.
 "어떻게 저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어요."
 진만은 딸과 아내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태림이 팔을 붙잡고 매달리자 어쩔 수 없이 멈추어 섰다.
 "결혼해. 지금까지 키워 주었으면 그 정도 보답은 해야지. 너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거다."
 "싫어요. 전…악."
 "안돼요."
 엄마의 외침이 있었지만, 이미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태림이의 얼굴에 선명하고 붉은 손자국을 내 후였다. 처음 맞는 것도 아니었지만, 오늘도 그 통증에는 익숙해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태림이의 여린 몸은 소파에 다시 안게 될 정도였다.
 벌써 맞은 곳이 후끈거리며 맥이 뛰는 것처럼 벌떡였다.
 "이러지 마세요. 얘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뭐야. 당신이 얘를 이렇게 가르치니 버릇이 없지."
 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겨웠다, 그저 힘이 있다고 해서 그는 가족 위에 군림하려고 했고 조금이라도 그의 눈에 거슬리면 가족에게도 무자비했고, 상처 내는 말들을 서슴지 않았다.
 "잔말하지 말고 결혼식은 올리지 않을 거지만, 곧 신랑이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갈 준비를 해라. 거기서 학교 다니면 돼."
 "여보.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예요. 어떻게 이런 어린애가 결혼을……."
 하지만 무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남편의 서늘한 눈길하나만으로도 평생 그의 언어 폭행과 육체적 폭행을 당해왔던 약한 그녀로써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은 입 닥치고 태림이가 그 집에 들어갈 준비나 해. 워낙 재력가라 별다른 준비는 필요 없을 거야."
 정말 싫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만약 지금 결혼을 한다면 엄마를 이 집에서 꺼낼 수 있는 기회는 멀어지고 말 것 같았다. 이제 일년도 남지 않았다. 담임선생님도 좋은 직장을 소개시켜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을 해주셨다.
 "그렇게 그 집의 재력이 좋으면 아버지나 하세요. 전 하지 않을 거예요. 언니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요. 왜 죽었는지 잊어버리신 건 아니겠죠. 오늘이 무슨 날 인줄이나 아세요. 아버지 마음대로 정한 결혼이 싫어서 나간 언니가 죽은 날이에요. 어떻게 저에게까지 이러실 수 있어요."
 "그년은 죽어도 싸.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하늘이 보여준 거지."
 하늘이라고. 부끄럽지도 않나요?
 딸에게 그렇게 말하는 남자를 불쌍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지 증오해야 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머리는 증오를 말하지만 마음은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떤 모습이던 그녀의 가족이니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형부랑 지금쯤 살아서 아이도 낳고 잘 살았을 거라고요."
 진만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져 갔다.
 "누가 네 형부야. 그놈 말고 내가 정해준 혼처로 갔다면 지금쯤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었을 거야. 그러니 너도 잔말 말고 신랑 집에 들어갈 준비해."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혼인 무효화 해주세요. 이번만은......"
 인상이 험악한 중년의 남자는 자신의 의견에 토를 달고 있는 자신의 딸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그의 옆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서있는 자신의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딸이 말을 듣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줄 알고 있던 그는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뗬다.
 태림은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아차 했지만 이미 그의 투박하고 커다란 손은 자신의 엄마를 향해 내려쳐 지기 시작했다.
 "안돼요. 제발 멈춰요, 흑흑."
 최선을 다해서 아버지의 손이 엄마에게 가는 걸 막으려 했지만 이미 저항하려는 의지를 잊어버린 먹이 감을 놓지 않았고, 그 손길이 멈추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아는 태림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 이제 그만 하세요."
 폭군은 그제야 처량하게 맞고 있던 여자를 소파에 던지다 시피 내려놓았다. 엄마는 마치 생명력이 없는 인형처럼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잘 생각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들을 나두고 뒤돌아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찢어버릴 듯이 바라보았지만, 눈길로는 아무런 해를 미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태림은 넝마조각처럼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엄마에게로 몸을 돌렸다.
 "엄.마. 미안해요."
 어차피 아버지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에게 반항을 했으니, 이런 결과가 있으리라는 걸 미리 예측해야 했었다. 그런데 태림이 하나 예측하지 못한 것은 폭력의 손길이 자신 아닌 엄마에게 향하는 거였다.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견디어 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맞는 것에 이골이 나 있는 연약한 엄마에게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자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만신창이가 된 여인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미안해하면서 불쌍한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만은, 너 하나만은 지켜주고 싶었는데, 흑흑흑."
 두 모녀는 서로를 끌어 앉고 얼굴을 적시면서 그렇게 자신들의 인생을 한탄했다.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딸이 하나 달린 아버지에게 시집을 와서 태림을 낳고 살았다. 언니인 여진도 아버지의 욕심에 의해 아버지뻘 나이의 남자에게 강제로 결혼시키려고 하자 집을 나갔었고, 곧 좋아했던 남자와 결혼을 했었다. 아버지는 그 결혼을 싫어했지만 이미 법적으로나 무엇으로나 결혼이 합법화된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우습게도 반공훈련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대한민국의 전역에 퍼짐과 동시에 숨어 있던 아주머니는 빨리도 소등을 했다. 달빛이 비추는 작은 불빛 말고는 모녀를 비추어 주는 따뜻한 빛줄기는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태림은 이 어두움이 자신의 미래를 나타내는 것 같아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지만 엄마에게 그런 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 걱정하지 마. 난 잘 해 낼 거야. 그래도 언니보다는 더 나을 수도 있잖아. "
 말은 그렇게 했지만 태림은 앞으로 자신과 엄마의 앞에 일어날 일들이 두려웠다. 언니는 죽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의 품안에서 이 세상과의 인연을 끝낼 수가 있었다. 언니의 소원처럼 같은 시간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간에 죽음을 맞이했던 언니가 처음으로 부러웠다. 이제 곧 학교를 졸업해 직장을 가지면 엄마와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태림의 생각이 너무 짧았다.
 
 세준은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와 있는 아버지가 마치 뿔을 두 개 달리고 코가 세 개쯤 달린 괴물로 보이려고 했다.
 결혼이라니! 그런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세준에게 말하고 있었다.
 세준은 자신과 똑 같이 생긴 날카로우면서도 커다래 먹이를 놓치지 않을 두 눈을 아무런 거침없이 바라보았다.
  "아버지 정신 나가셨어요?"
 그 말 자체가 정신 나간 소리였다. 그건 아버지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죄송해요. 하지만 결혼이라뇨. 그것도 김진만 사장의 딸 하고요?"
 세준은 보고 있던 서류를 다시 보는 것을 아예 포기했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 사악하고 재수 없는 김진만 사장에게는 딸이 두 명 있었고, 그중 큰딸은 결혼한 지 일년도 안 되어서 죽었고, 작은 딸은 아직 학생이었다.
 "아직 학생 아닙니까?"
 주영은 아들이 태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어찌 되었던 아주 처음은 아니니까. 미안한 마음을 합리화했다.
 "맞다."
 주영은 아들이 날뛰던 말든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비서가 가져다 놓은 녹차를 마셨다. 세준은 그런 여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더 화가 났다.
 "그런데 어떻게 결혼을 합니까?"
 "태림이가 어릴 적에 좀 아파서 학교를 쉬었었다. 그러니 지금 나이가 스무 살이다. 미성년자도 아니잖냐."
 이런. 젠장 할!
 마음 같아서는 입 밖으로 속마음을 내 비추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참아야 했다.
 "전 싫습니다."
 세준은 자신의 강인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각이 진 얼굴을 손으로 거칠게 문지르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 헤치고 나가야 할지 그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결혼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만약에 한다고 해도 김진만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장인이 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더욱 싫었다. 욕심과 탐욕으로만 가득한 얼굴과 자기가 원하는 거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가 가든지 상관하지 않는 남자, 세준은 그가 경멸 서러웠다. 자신에게 한 짓을 빼더라도 그를 경멸한 만할 많은 증거를 아버지에게 제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아무리 세준이 무슨 말을 하다고 해도 그의 결심을 바꿀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필 이 시점에서 결혼이라니! 이제 겨우 혜란이의 배신을 딛고 일에 전념하는 세준에게 하늘이 왜 이런 시련을 주려고 하는지 그는 한숨만이 나왔다.
 "아버지.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아들의 말에 자신의 목숨 보다 더 사랑하는 세준을 바라보면서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그건 그 여자가 돈 만 밝히는 여자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다행히 김 사장의 딸은 그런 혜란과는 격이 다른 아이이고."
 아버지는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갑자기 결정을 하고 명령을 내리는 일말이다. 적어도 그의 인생과 관련된 일이면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고, 가능한 그의 결정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인 인륜지 대사를 아버지가 혼자 독재자처럼 처리하고 있었다.
 "전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없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를 사랑하셔서 결혼하셨다고 하였잖아요. 그런데 왜 저한테는 그런 기회를 뺏어가려고 하시는 거죠?"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재벌가나 권력가와의 인연을 중요시했고, 그 필요성을 잘 알았지만 결혼만은 세준이 사랑하는 사람과 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한번도 이런 식으로 강요한 적이 없었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 다면 난 이 회사를 사회에 기부할 생각이다. 그러니 잘 생각해라."
 그 말을 하고 아버지는 갑자기 들어왔던 것처럼 그렇게 뒤돌아서 나가 버렸다.
 세준은 하도 어의가 없어 아버지가 나간 문을 한동안 계속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서있었다.
 젠장 할! 결혼이라니 그것도 모르는 여자와 아니 여자아이겠지, 지금은 70년대라고 조선시대도 아닌데,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정략결혼이라니 사람들이 알면 아주 웃다가 배꼽까지 잃어버릴 일이었다.
 다 좋았다. 28살인 그에게 어쩌면 필요한 것이지도 몰랐다. 하지만 왜 하필 아버지가 정한 결혼 상대가 김진만 사장의 딸이란 말인가? 하고많은 집안 중에서 왜 하이에나 같은 남의 것이나 노리는 그런 비열한 인간의 딸이냔 말이다.
 세준은 5년 전의 일을 아직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건 혈기 왕성한 그에게는 사형을 선도 한 것이나 다름없는 효과를 나타냈고, 그 어둠과 끈끈한 영향력에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었다.
 
 그는 그 나이 때 어느 여자와 다르게 섹시함과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혜란에게 빠져있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와는 다르게 그녀의 모습이 남자들에게 어떻게 미칠 줄 알고 있었고 그걸 이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 처음부터 그걸 몰랐던 것이 세준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었다.
 혜란은 볼륨이 정확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그걸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러다 세준의 회사 창립 20주년이 되던 날 그는 가족들에게 혜란을 소개할 겸해서 파티에 유난히 아름답게 차려 입은 그녀를 데리고 갔었다.
 "음, 자기야 너무 멋있다."
 그 날의 화려함은 혜란에게 신선함 이였고, 상류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의 기회였다.
 혜란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다녔었고, 자신의 소원대로 많은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번 찍은 여자는 꼭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건 건축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김진만 사장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누구도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부인이 있는 집에까지 끌어들인다는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사생활이 문란한 남자였다.
 그 때만해도 순진했던 세준은 자신의 어여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여자 친구가 그런 김진만 사장에게 쉽게 빠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혜란은 점점 세준에게 소원해져 갔었고, 그 이유를 알려고 하는 그에게 점차 짜증을 내기 시작했었고, 급기야는 심한 말다툼이 이어졌다.
 "난 너 같은 어린 남자는 싫어. 그러니 우리 그만 끝내."
 세준은 갑작스런 운 혜란의 변심이 그저 자신의 행동에 화가 나서 그냥 내 뱉은 말이거니 생각을 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우리 우선 머리나 식히고 다시 말하자. 내가 연락할게."
 "난 할 말없어 그러니 연락하지 마."
 세준은 그렇게 돌아선 후 며칠이 지나 어느 날 밤에 혜란의 집 앞에서 차안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그런데 점점 자정이 되어 가는데도 혜란은 집으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몇 시간을 기다리다가 혜란이 친구에 집에서 자고 오려니 생각을 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길 저편에서 차의 밝은 라이트가 그의 얼굴에 비추었다.
 세준은 그 차가 지나가면 갈 요량으로 기다리고 서 있었는데, 그 차는 혜란의 집 앞에서 멈추었고, 혹시나 하는 그의 생각대로 혜란이 그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세준은 그녀의 모습에 반가워 차에서 내리려고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반대편에 내리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남자를 보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하지만 더 그를 못 움직이게 하는 것은 혜란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내리는 배가 나온 중년의 남자에게다가 가더니 그의 목에 자신의 두 팔을 다정스럽게 감고 그에 품안에 안기는 것이 아닌가?
 실로 그건 그에게 충격이었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남자는 그가 그토록 싫어한 김진만 사장이라는 거였다. 세준은 그가 어린 혜란과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한 뒤 돌아가자 겨우 분노와 배신감을 추스른 그는 혜란이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차에서 내렸다.
 "이혜란!"
 집으로 들어가려는 여자는 익숙한 목소리에 놀랐는지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는 쪽으로 돌아보았는데, 처음에는 놀란 눈빛 이였지만, 나중에는 귀찮다는 눈빛으로 변하는 걸 세준은 똑똑히 보았다.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세준은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의 눈은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좋아. 어린애 같은 너하고는 전혀 틀리거든."
 "그 남자는 니 아버지뻘이야. 그리고 유부남이고, 더 큰 문제는 그 족제비 같은 남자는 여자를 밥 먹듯이 갈아치운단 말이야."
 그의 말에 혜란이 정신을 차리기 바랐다면 그는 정말 그녀를 모르는 거였다. 그녀는 그의 그런 말을 무시하듯이 자신의 두 팔을 가슴 앞으로 올려 팔짱을 끼었다.
 "칫,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이 어디 있어, 서로 좋아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 사람은 이혼 할 거야. 그거 알아 넌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뭐 하나 사줄 때도 몸을 사리지만, 그이는 그렇지 않아. 내가 원하면 별이라도 가져다 줄 사람이야."
 혜란은 멍하게 서 있는 세준을 남겨두고 집안으로 잽싸게 들어와 버렸다.
 세준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이라니?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뻘 한 남자한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녀가 그렇게 집으로 들어가 버리자 다시는 그녀와 상종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하루 밤도 지나지 않아 변심했고 세준은 그녀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바라며 그녀를 찾아가도 또 찾아갔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과 멸시였고,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세준은 혜란이 말한 사랑이 자신이 맹세한 사랑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세준은 그날의 악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그 날 이후로 술독에 빠져서 지냈고,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과 시비를 붙고 싸우기를 일삼았다.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가 그런 세준을 군대로 보내어 버렸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는 군대에서의 고댄 훈련과 남자들만의 세상에 있으면서 혜란이 세상에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하필 아버지가 정한 신붓감이 혜란이와 놀아났던 김진만의 딸이라니 그건 그 아이가 어리다는 것 보다 더 충격을 주었다.
 그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모습은 자신의 엄마의 한복 뒤에 숨던 눈망울이 유난히 키가 큰 열 살 정도 되는 모습이었고, 키가 크고 어린 모습 말고는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2


 태림은 친구들과 난로 옆에 모여서 불을 쬐면서 방학이 끝나고 진급을 해서도 같은 반이 된 가장 친한 친구인 유정이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단짝인 유정이지만 아버지가 한 폭탄선언을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야! 너 무슨 일 있니?"
 계속 태림이 자신을 들여다 본 걸 눈치 챈 유정이 먼저 물어왔다. 유정 역시 다른 동급생들과 마찬가지로 태림이 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태림은 나이에 그다지 미련을 갖지 않았다. 나이를 따지다 보면 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지내고 있었다.
 "아니, 그냥 저, 유정아…."
 태림은 혼인신고가 끝났고, 오늘부터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 살아야 하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유정이가 집에 전화를 하게 되면 태림이가 없는 것을 알게 될 테고 잘못해서 아버지가 받게 되면 분명 그녀의 결혼을 유정이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왜?"
 유정이의 맑은 눈동자가 작은 손거울에서 태림에게로 향했다.
 "나 오늘부터 사촌 오빠 집에 가서 지내게 돼서 당분간 전화 못 받아 그러니까, 내가 다른 번호 가르쳐 줄 때까지 우리 집에 전화하지 말라고."
 태림의 말에 유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데 갑자기 웬 사촌오빠?"
 -거짓말은 할수록 늦다고 하더니!
 "어? 응 그거, 아! 외국에서 살다가 와서 한국 생활에 적응 할 동안만 아버지가 같지 지내라고 하셔서."
 "사촌오빠 있다는 말 한적 없잖아."
 "좀 먼 친척이라 나도 어릴 때말고는 본적이 없거든."
 아버진 태림과 엄마가 불쌍했는지 아니면 태림도 여진언니처럼 집을 나갈 걸 걱정을 했는지 신랑이 될 사람에 대해 조금 말해주었다.

 '네 언니 약혼식에 왔던 무성전자 아들이다. 아마 그때 교복을 입고 왔지.'
 그 남자라면 태림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많은 어른들의 모습에 기가 눌려 엄마의 치마 자락 뒤에 숨어 있던 태림에게 참 따뜻한 눈빛으로 응대해 준 남자였다.
 가끔 그 남자의 꿈을 꿀 때면 태림은 그 설렘에 잠에서 깨어난 적도 적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가 자신의 나이 뻘의 남자와 딸을 결혼 시키는 걸 막지 못하는 엄마를 한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내고 있을 때 그는 조용히 엄마와 태림에게 다가와서 말동무가 되어주었었다.
 사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에 안부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아버지가 시간이 많이 지났다며 태림을 방에 들어가게 했기 때문이었다.
 태림은 그때의 언니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태림은 언니가 걱정스러워 어른들 몰래 창밖으로 그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언니는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웃고 있었지만 눈은 멀리서 보아도 슬퍼보였다.
 "태림아? 태림아? 일어나."
 그날 저녁 여진은 자고 있는 태림을 깨웠고, 태림은 잠결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왜 언니?"
 언니는 옷을 다 입고 있었지만, 약혼식에서 입었던 옷은 아니었다.
 "태림아. 언니 말 잘 들어, 언니 지금 집 나 갈 거야……."
 "왜?"
 태림의 항의 어린 말에 여진은 태림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해. 언니 아까 그 아저씨하고 결혼하기 싫어. 태림이는 언니가 그 아저씨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언니가 집을 나가는 건 싫었지만 아버지 보다 더 늙어 보이는 늑대같이 생긴 남자에게 언니가 시집가는 건 더 싫었다.
 "아니. 그런데 집 나가면 어디서 살 건데?"
 여진은 자신을 걱정하는 태림이 안쓰러웠다.
 "언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태림아 언니가 다른 오빠랑 결혼할 거거든 그래서 당장은 태림이하고 엄마를 못 데리고 가지만 빨리 자리 잡아서 데리러 올게. 그때 까지 엄마 잘 지키고 엄마 말 잘 들어야해. 약속할 수 있지?"
 태림은 언니의 말을 믿었다. 언니 단 한번도 태림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었다.
 "믿어. 언니 잠깐만."
 태림은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뭘 하려고?"
 태림은 그럴 리도 없지만 아버지에게 서랍을 여는 소리가 들릴 까봐 조심스럽게 맨 아래 서랍을 열어 뭔가를 꺼내어 언니에게 쥐어 쥐었고, 여진은 그 묵직함에 놀라 손에 들여진 것을 내려다보았다.
 "태림아."
 태림이가 준건 빨간 돼지 저금통장이었다.
 "언니가 가져가. 결혼하면 이것저것 쓸데가 많다고 친구들이 그랬어."
 "고마워 태림아."
 태림은 처음으로 언니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언니 꼭 우리 데리러 와야 해.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꼭 올 거야."
 하지만 언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형부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러나 태림은 믿었다. 그 날 언니는 형부와 함께 엄마와 자신을 데리러 오는 중이었을 거라고.

 외국이라는 말에 유정이의 얼굴이 선망으로 빛났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대에 외국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부자가 아니고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다행히 유정이 더 이상의 궁금증을 가지지 않자 태림은 안심을 했다.
 -미안해, 유정아 나중에 말해 줄게.
 어떻게 수업을 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으면 국사 선생님이 걱정을 했다. 평소에 국사를 좋아해서 수업을 넋 놓고 듣던 그녀가 수업에는 관심이 없어서 수업을 멈출 정도였다.
 종례를 하러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는데도, 태림은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네 선생님한테는 이미 말씀 들였다.'
 선생님이 자신이 혼인신고를 하고 남자의 집에 들어가 산다는 걸 안다는 게, 아무리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고 해도 죄를 진 것처럼 죄책감 같은 게들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태림의 행동을 눈치 챘는지 아니면 다른 할 말이 있어서 인지 선생님은 조용히 태림을 불러냈다.
 선생님은 상담실로 태림을 데리고 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여지를 없앴다.
 "아버님에게서 전화 받았다."
 태림의 고개는 점점 밑으로 향했다.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네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이해해 주는 선생님이 고마워서 인지 아니면 참아 왔던 분함이 터져서 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조촐하지만 시댁에 들어가는 태림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는 엄마 앞에서도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아직 결혼이란 걸 생각해 본적이 없겠지. 나도 오랫동안 살아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뭐라고 할까 결혼이라는 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아껴주고 이해해 주는 거라고 생각해."
 선생님은 결혼이란 걸 정의하기가 어려운지 수업시간과는 다르게 쩔쩔 메었지만 태림에게 많은 걸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결혼이란 걸 생각한 적이 없어서 이제부터 자신의 집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가르쳐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엄마는 아버지의 폭력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딸의 결혼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아버지의 폭탄선언 뒤로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엄마에게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뼛속 깊이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무거운 한숨 소리였다.
 하교를 하고 수많은 여학생들 틈에 끼어서 유정과 같이 나오는데, 유정이 태림의 팔을 쿡쿡 찌르는 게 느껴져서 깊은 생각의 늪에서 빠져 나왔다. 유정을 보니 고개로 저 만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정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아버지의 말대로 아버지의 운전기사가 나와 있었다. 태림이는 유정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여학생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면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정작 차에 올라타는 태림은 자신이 꼭 귀향가야 하는 죄인처럼 느껴졌고 사방이 보이지 않는 감옥 같아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아가씨. 바로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네."
 태림 자신이 들어도 자신의 목에서 나온 목소리는 겨우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엄마의 뒤에 숨어서 보호받고 싶었다. 그렇지만 사실 태림이 커가면서 엄마를 더 보호하면서 자라온 것이 더 맞는 소리였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폭행을 가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부터 태림은 작은 몸으로 엄마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대부분은 성공하는 가 싶었지만 태림이 없으면 엄마를 향한 아버지의 처벌은 더 살벌했다.
 자신이 살게 될 집으로 가는 10여분이 꼭 10초 같았다. 태림은 별별 생각을 다했다. 바퀴가 펑크가 나서 멈추어 버렸으면, 누군가 자신이 탄 차를 박아버려서 병원에 누워 있는 생각 등 별 희한한 생각을 했지만 결국은 도착하고 말았다.

 "다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는 돌아와서는 태림이가 앉아있는 곳의 차 문을 열어주고 태림이가 차에서 내리도록 도왔다. 그녀는 내리지 않을 생각도 해봤지만, 자신을 데려다준 아저씨가 무슨 죄가 있냐고 생각하면서 무거운 다리를 길 위로 내려놓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굵고 저음의 남자의 목소리가 들였다.
 "누구십니까?"
 태림이 대신 운전기사가 말을 하자 문은 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아가씨,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혼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태림은 자신의 검은 가방의 손잡이를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쥔 채로 정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막 현관 앞에 도착해서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향하는데 안에서 문이 열렸다.
 "어서 와라."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은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한두 번 뵌 적이 있어서 금방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의 아버지와 다르게 다정다감하고 웃음이 많은 분이 시아버지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갈비뼈를 뚫고 나오려는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봬요?"
 "그래. 많이 컸구나?"
 중년의 남자는 자신의 어린 며느리에게 환영의 미소를 보여주었고, 주춤거리는 태림이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세준이는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단다. 오늘 같은 날 일찍 들어오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사실이었다. 없는 게 더 태림의 정신 상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태림이의 시아버지는 집안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면서 한쪽에 있는 방으로 태림이의 팔꿈치를 잡고 이끌고 갔다.
 "집안일을 봐주는 파출부 아주머니가 따로 있으니 집안일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
 그는 태림이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팔꿈치를 놓고 방문을 열었다. 방은 창가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고, 화장대와 옷장으로 비교적 단조롭지만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 방이 너희들이 지낼 방이다. 전화선은 따로 해놓았으니까 친구들에게 번호를 알려주어도 된다."
 시아버지의 세심함이 고마웠다.
 "그리고 이 옆방은 세준이가 가끔, 아니 거의 회사 일을 하면서 지내는 서재란다. 당분간은 분가하지 않고 우리 부부와 같이 살 거란다. 좀 불편할 지도 모르지만 길어야 일년이겠지만 그놈도 밖에 나가서 사는 걸 좋아하니 그렇게 까지 걸리지는 않을 게다. 태림아."
 시아버지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정말 부드러웠다. 꼭 딸을 부르는 아버지 같았다. 아버지에게서 그런 정다운 소리를 들은 적이 없지만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네?"
 "네가 대학에 가고 싶다면 보내 주마. 그러니 계속 공부하도록 해라. 알겠니?"
 그 말에 너무 고마워서 태림은 큰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와 집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포기 한지 오래였다.
 태림은 엄마의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결혼하는 데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거실에 앉아 있던 아버지는 눈썹을 올리더니 태림을 우습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흥. 그래, 들어 나 보자."
 태림은 아버지가 자신을 기필코 시집을 보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포기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조건을 하나 걸기로 했다.
 "이제 다, 다시는 엄마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주세요."
 딸의 말에 눈에 독기를 품고 있던 남자는 태림이를 내리 칠 것 마냥 다가오다가 표독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녀가 알아온 아버지는 믿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런 약속이라도 받아 놓지 않으면 집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좋아. 맹세하마. 그 대신 나 역시 조건이 있다."
 
 태림은 어릴 적 그녀를 보면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신 아저씨가 시아버지가 되어서 그나마 불행 중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 때 아버지의 말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태림은 우선 엄마의 안전을 위해 그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제발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면 하는 게 태림의 바램이었다.
 갑자기 태림의 입에서 쓴웃음이 흘러 나와 손으로 입을 막아야만 했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닌데 신랑의 얼굴도 보지 않고 시집을 왔다는 게 어의가 없었다.
 태림은 자신이 쓸 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두 개를 연결해 놓았는지 침실과 다른 공간이 벽에 붙은 장식장과 분리되어 있어 수면을 방해받지 않도록 되어 있었고 다른 방에는 넓은 소파와 탁자가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놓여있었다. 실용적 이였지만 왠지 자신의 방이 아니어서 있지 불편하고 차갑게 보이기만 했다.
 태림은 소파에 가방을 올려놓고 침실로 들어가 보았는데 침대는 하얀색으로 배색되어 있었고, 거실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침실 한쪽에 문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하나는 욕실과 세면대가 불리 되어 있는 실용적인 화장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림의 빈약한 옷과 남자의 옷들이 들어 있는 방이 나왔다. 옷 방문은 밖으로 열렸는데 안쪽에는 문 크기와 같은 거울이 달려 있어 옷을 입고 전신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진은 단 한 장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어떻게 변해 있는지 사진으로나마 알고 싶었던 태림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방을 다 둘러보고 나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소파에 앉아 창 밖을 막연히 바라보았다. 곧 저녁식사시간이 되는데 내려가서 일을 도와야 하는지 그냥 아줌마가 올라 올 때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만 되었다.
 똑똑똑
"네."
 태림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30분 뒤에 식사시간이니까, 준비하고 내려오렴."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태림은 머리를 단정히 올리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꽃무늬 치마를 입은 사람이 자신의 시어머니라는 걸 알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뵀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어머니는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태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 삼척동자도 알만큼 확실한 감정을 담은 행동이었다.
 태림은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옷장에서 집에서 보낸 권 색 치마를 먼지 입고 하얀 남방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림은 시어머니가 다시 들어 온 줄 알고 남방 소매에 팔을 재빨리 꾀어 넣고 곧 내려간다고 말을 했다.
 "넌 누구지."
 그는 날 기억하지 못해.
  태림은 키가 크고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방 입구에 서 있자 단추를 잠그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신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변해 있었다. 키도 그때 보다 더 커있었고, 몸집 역시 더 건장해 졌고, 얼굴은 세월의 흔적이 조금 더해져 더 남성스러워져서 태림을 설레게 했지만 아쉽게도 그의 눈 역시 변해 있었다.
 그의 눈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경계의 빛을 띄우고 태림에게 다가오지 말 것을 무언중에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한 눈썹과 커다란 눈, 코, 그리고 말을 할 때마다 보석을 뱉어 낼 것 같은 입술은 태림이 잘 알지 못하는 원초적인 뭔가를 끌어내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은 게 아니라면 옷을 마저 입지 그래."
 태림은 자신의 앞섬을 내려다보고 아직 두 개밖에 잠그지 않은 상태라는 걸 알고 뒤돌아 떨리는 손으로 단추를 채우면서도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에 온 몸이 붉어졌다.
 "네가 내 아내인가 보지."
 태림은 그의 말에 천천히 그와 눈을 맞추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준은 침대에 서류 가방을 던지더니 양복 상의를 벗어 태림에게 던지듯이 건네주었다. 그러자 태림은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옷을 옷걸이에 걸어 옷 방에 걸어놓았다. 그런데 세준은 옷을 다 벗을 작정인지 넥타이를 풀어 목에서 빼더니 와이셔츠 단추를 재빨리 풀어 젖히고 있었다.
 "엄마야."
 세준은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내면서 뒤돌아서는 태림에 행동이 비웃는 웃음소리를 냈다.
 "우습군. 천하의 김진만 사장의 따님께서 이런 장면을 보고 놀라다니. 그분이 따님만은 순진하게 키웠나 보지."
 태림은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바람기는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고, 어디 가면 항상 엄마와 그녀는 동정과 비난의 시선을 동시에 받아야만 했다.
 "그렇게 뒤돌아 있을 거면 차라리 나가있어."
 어린 신부였지만 순수함을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랄랄이 같은 소녀였다면 행동하기가 더 쉬웠을 텐데.
 세준의 날이 설대로 선 말투에 태림은 어깨를 축 늘어 틀인 채 방에서 나갔다. 그런 모습을 보자 괜히 죄책감이 들어 기분이 나빠진 세준은 바닥에 옷을 내팽개쳐서 자신의 좌절감을 표현했다.
 
 식사시간은 차라리 안 먹는 게 나을 만큼 불편했다. 시어머니가 되는 분은 얼굴선은 단아했고, 친절한 인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태림이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가 밥을 어떻게 먹는지, 실수는 하지 않는지 감시를 하는 것처럼 태림이 밥 먹는 모습을 자꾸 쳐다보아서 반찬하나 집어먹는 것도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전교에서 몇 등이나 하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막 집어 올린 김치가 튀어 나갈 뻔했지만 다행이 그녀의 밥그릇 위로 떨어져 칠칠맞다는 소리는 면할 수 있었다.
 "30등 안에 들어요."
 모두들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고, 마치 그녀가 그 자리에 없는 듯이 행동하던 세준도 태림을 빤히 쳐다봐 민망할 지경이었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가장 신경 쓰이는 사람은 세준이었지만 그는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어 그녀의 성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것 밖에 못한단 말이니. 우리 무성전자의 안주인이 되려면 적어도 상위권에 들어있어야 기본이라도 하지."
 "그만해요. 여보. 그 정도면 잘 하고 있는 데 그러오."
 시어머니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남편의 말에 그만두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그녀의 편은 시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시아버지인 주영은 엄마와 같은 고향사람이라고 들어서 인지 더 마음이 갔다.
 그녀의 불편한 심정을 아닌지 모르는지,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지만, 남편이라는 사람은 그녀가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해도 관심 없다는 듯이 밥 한 공기를 해치우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계속 흘겨보면서 태림을 더 힘들게 했다.
 겨우 식사시간이 끝났나 싶었는데 후식을 먹는 다면서 거실로 모여 앉았다.
 "전 일을 좀…."
 "나중에 하려무나."
 "네."
 태림은 세준 처럼 강인하고 무서운 것이 없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꼼짝 못하는 게 신기해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태림과는 다르게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심이었다.
 태림은 아줌마가 차와 과일을 내와 탁자에 올려놓자 고맙다고 말을 했다.
 "아가씨는 아직 어리니까. 우유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태림은 어리다는 말에 시어머니와 남편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걸 보고 조심스레 우유를 마셨다.
 "그렇지 않아도 키가 큰데 무슨 우유, 여자가 그렇게 키만 커 가지고 어디 애는 낳겠니. 스무 살이니 어린 나이도 아니지 뭐."
 "어험."
 "웬 헛기침이세요. 그냥 평상시처럼 핀잔이나 주시지 않고?"
 "흠."
 태림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숨을 거칠게 들어 마시는 걸 본 세준은 잠시 눈썹을 추켜올렸지만 태림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태림은 시어머니의 그런 비아냥거림에 눈썹만 약간 움직일 뿐 얼굴 색 하나 붉히지 않는 시아버지가 놀라웠다. 태림은 시어머니의 말에 손이 날아올지 몰라 긴장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녀가 시집온 이 새로운 가족은 태림이 알고 지내온 가족관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광경이었다.
 엄마는 그런 말대꾸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기도 했지만, 엄마가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라도 보이면 아버지는 반항의 싹을 처음부터 없앤다는 빌미로 항상 폭력을 휘둘렀다.
 엄마는 좌절감을 버리고 그녀가 시가집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많은 걸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지만 남녀 관계에 대해서 미쳐 다 알기도 전에 아버지에게 시집오고 사랑 받지도 사랑하지도 못한 채 불행한 삶은 살아온 엄마는 자신의 욕심처럼 많을 걸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첫...첫날밤은 좀 아플 거야. 하지만 그냥 가만히 있으면 금방 지나가니까 아파도 그냥 참아야 한다. 나..중에는 괜찮아 질 거야.'
 그녀는 거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생각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아프면 엄마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인지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맞았어도 아프다는 소리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림은 걱정이 되어 우유가 목에 걸릴 정도로 긴장을 했다.
 거실에 둘러앉아 있었지만 그 누구도 말을 꺼내려는 사람이 없이 각자 앞에 놓여진 음료만 홀짝이고 있었고, 그런 그들이 모습에 자신이 끼면서 어색해 진 것 같아 태림은 더욱 미안해지고 죄스러웠다.
 "피곤하구나. 너희들도 올라가서 자도록 해라."
 "안녕히 주무세요."
 태림의 남편이 된 남자는 그녀가 따라오던 말든 상관이 없다는 듯이 이층으로 가버렸고, 태림은 조금이나마 늦게 올라가려고 아주머니를 도와주려고 했지만 아주머니가 그런 그녀의 등을 떠밀다시피 계단으로 올려 보내 하는 수 없이 태림은 떨리는 발길로 방으로 향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학생... 아니 작은 사모님. 겉으로는 냉랭해 보여도 이 집사람들 속마음을 참 따뜻하거든요. 너무 긴장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태림은 아주머니가 뭘 이야기 한 건 줄 어렴풋이 알고 얼굴을 붉혔지만 세준의 차갑고 이지적인 눈을 생각하자 다시금 얼굴의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하지만 첫날밤에 대한 걱정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었다. 세준은 이미 소파에 여분의 이불과 베개를 올려놓고 있었다. 세준은 언뜻 보아도 반에서 가장 큰 태림이 보다 얼굴하나는 충분히 더 커 보였다.
 "난 너랑 한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네가 소파에서 자. 난 키 때문에 저 소파에서는 잘 수 없으니까. 알아들어?"
 태림은 세준의 차가운 눈빛이 무서웠다. 아버지의 잔혹한 눈빛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을 비추지 않는 그의 눈빛이 아버지의 먹이 감을 노리는 듯한 눈빛 보다 더 태림을 두렵게 만들었다.
 "네."
 태림은 방과 같이 딸린 거실에 있는 소파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처럼 태림이 누워 자기에는 별로 문제가 없었지만 태림 보다 확실히 키가 큰 세준이 자기에는 불편에 보였다.
 하지만 세준은 잠자리를 정해 주고서도 자신은 잘 생각이 없는지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디 가세요?"
 그는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 태림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문을 열었다.
 "상관하지 말고 넌 학교 가려면 일찍 자던가. 알아서 해."
 그렇게 첫날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남녀의 관계나 결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태림은 뭔가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다정한 말이나 행동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가 다정하게 대했다면 태림은 분명 소리를 쳤거나 방을 뛰쳐나가거나 그랬을 거다.
 하지만 첫날밤을 같은 방에서도 보내지 않고 소파에서 자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뭘 원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 결혼을 취소 할 수 있으면 하고 싶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준에게 느껴지는 뭔가 이상하고 태림의 나이 또래의 남자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으로 밤을 지셀 수는 없었다. 곧 시험이 시작될 것이고, 시어머니 말씀대로 상위권은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내일을 준비해야 했기에 태림은 잠을 청했다.

 어릴 적에 본 것과는 달랐다. 이제 완전히 숙녀가 되어 있었다.
 서류를 보기 위해 서재로 왔지만 태림의 작고-분명 어머니의 기준으로 보면 태림은 키는 결코 작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길이다- 여린 모습이 눈에서 떠나지 않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걸 포기하고 그의 몸에 익숙해진 가죽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김진만 사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직 졸업도 하지 않고 아직 여자라기보다 소녀인-키는 컸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뭔가에 억눌려 있는 듯 처량해 보였다.- 딸을 시집보낼 생각을 했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거의 도둑 결혼을 하면서 까지 보내야 했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지만, 그의 지금까지의 행실을 보면 놀랍지도 않았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누구든지 손에 넣으려고 했고, 대부분의 여자들도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의 생김새는 비슷했다. 혜란 처럼 서구적으로 생긴 여자들을 좋아했는데, 혹시라도 그런 연예인이 있으면 꼭 한번쯤은 술자리 같은 곳으로 불러내어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 여자에게 많은 돈을 주거나 마음에 들면 얼마동안 더 지내고 난 뒤에 가게 같은 걸 하나 차릴 만한 돈을 쥐어 주고 그의 인생에서 내보내고는 했다.
 완전히 난잡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세준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런데 태림이 그의 인생으로 들어옴으로써 이제 그 일들이 세준과 상관있는 일이 될까봐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피곤했다. 아무래도 그의 말도 되지 않는 결혼이 그의 신경을 좀먹고 있었는지 평상시 보다 더 피곤했다.
 "가서 잠이나 자야겠군."
 그 고등학생이 누워 있는 방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달리 가서 잘 곳도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신부였지만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세준은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까치발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뭐 하는 짓인 줄 모르겠군."
 창문에서 달빛이 들어와 태림이 자고 있는 소파 위를 비추고 있었다. 달빛에 비춘 태림을 보자 그래도 소녀 같던 그녀가 조금은 여자다워 보였다.
 그런데 자면서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두 손으로 이불을 꼭 쥔 채로 턱 아래에 손을 고이고 잠들어 있었다. 그가 자고 있는 자신을 덮치기라도 할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가지라고 부탁해도 싫어."
 세준은 평상시처럼 옷을 다 벗고 침대에 들었다. 저 쪼그만 여자아이 때문에 그의 습관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3


 태림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아직도 꿈속에서처럼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 아버지가 엄마에게 무자비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을 처음 보았던 다섯 살 때의 어느 비 오던 날이었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10년이 넘게 보아왔지만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태림은 항상 잠을 깊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일층에서 무슨 소리라도 날 새라 귀를 쫑긋 새우고 자느라 항상 잠을 깊이 잘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오늘도 엄마의 눈가에 멍이 들어있지 않기를 바라면 주방으로 내려가기 위해 일어났다가 자신이 지금 침대가 아니라 소파에서 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가..."
 태림은 잠결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이 잠든 곳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걸 확실히 해준 건 바로 어제 그녀와 결혼한 신랑이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태림이 생전 본적이 없는 모습으로 서서 활짝 기지개를 펴주어서였다.
 태림은 괴성을 지르면서도 그의 그곳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엄마야아아아아아아아."
 세준 역시 잠에서 확실히 깨고 말았다. 세준은 태림이 자신의 남성을 보고 소리를 치자 정신을 차리고 이불로 허리를 감싸 중요한 부위를 가렸다.
 태림이 이렇게 일찍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알았으니까 조용히 해! 나도 엄마 있다구. 그러니 제발 진정하리니까아아."
 세준은 태림의 소리를 멈추기 위해서 소리를 치더니 그래도 태림이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거의 뛰다 시피 다가와서 그녀의 입을 커다란 손으로 막아버렸다.
 "좀 조용히 해."
 태림은 그의 성난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의 커다란 손이 입 뿐 아니라 코까지 막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자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아! 이런 괜찮아?"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려 대답할 기회가 없었다.
 "무슨 일이냐?"
 태림이의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잠옷을 입은 부모님과 아침 준비를 위해 일어나신 아주머니도 그의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도대체 아침부터 웬 소란이니?"
 태림의 얼굴은 거의 홍당무가 되어 있었고,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술만 금붕어 마냥 뻐끔거리고 있었다.
 쫓아 올라온 사람들은 분명 소파 위에 있는 이부자리를 보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별일 아니에요. 어머니! 죄송합니다."
 태림은 자신을 곱게 쳐다보지 않는 시어머니의 눈길에 마음이 상했지만 좀 전에 본 충격적인 영상에서 아직 헤어나지를 못한 채 방을 빠져나가는 그들을 붙잡고만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는 세준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난 올래. 다 벗고 자. 너 때문에 습관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어. 이런 장면을 보게 해서 좀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난 항상 이렇게 자고 이렇게 일어나니까. 다음부터는 네가 늦게 일어나든지 아니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말도록 해."
 태림은 이직도 말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쩜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세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 때문에 그도 아버지처럼 할 줄 모른다는 긴장감에 그녀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충격적인 신혼의 아침이었지만 태림은 학교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하고 또 다시 불편한 식사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갔다.
 "그래도 시댁에서 처음 맞는 아침을 너처럼 소란스럽게 보낸 아이는 그 세상을 통틀어도 찾기 힘들 꺼다. 무슨 여자 목소리가 그렇게 크니? 난 우리 집에 기차 화통이 있는 줄 알았다."
 태림은 시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아주머니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밥상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만해요. 새 애가 놀란 일이 있어서 그랬을 테지. 태림이 어서 아침 먹어라. 세준이는 출근하는 길에 항상 새아기 데려다 줘라."
 그 소리에 태림이 처럼 밥만 내려다보고 있던 세준도 고개를 들었고, 그와 동시에 든 그녀와 눈길이 마주쳤지만 금방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아버지..."
 "전 괜찮아요. 그리고……."
 하지만 시아버지는 두 사람 말을 동시에 묵살해 버리고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관철시키고는 혼자서 맛있는 식사를 시작했지만 태림과 세준은 각기 다른 이유로 식사를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다 먹었으면 빨리 가자."
 아버지의 명령으로 억지로 한다는 걸 여지없이 보여주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나는 낮은 소리였다.
 "네."
 태림이 나가려고 하자 아주머니가 도시락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는 그녀의 집에 있는 가정부 아주머니처럼 인상이 매우 좋았다. 얼굴도 포근했고, 눈빛도 집에 있는 아주머니처럼 따뜻했다.
 "감사는 무슨.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쌓으니 맛있게 먹어요."
 "그럴게요."
 어제오늘은 처음인 게 정말로 많은 것 같았다. 남자와 한 방에서 잠을 잔 것도 처음이고 일어나자마자 남자의 알몸을 본 것도 처음이고,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도 세준 못지않은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아들이 아닌 태림이에게는 뭐든지 인색한 편이었다. 세준의 어머니처럼 그녀의 성적도 싫어했고, 자신의 체격을 닮아 키는 컸지만 반면에 엄마를 닭은 그녀의 여린 외모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녀가 여자라는 걸 매우 싫어했다.
 "다 왔다니까."
 태림은 상념을 뚫고 들어온 자신의 남편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창 밖을 둘러보았다. 버스를 타고 오지 않아서 인지 생각보다 빨리 와있었다.
 "혹시 해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세우라고 했어. 올 때는 네가 알아서 오도록 해."
 "네! 다녀오겠습니다."
  세준은 자신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태림을 보고 역시나 학생이라는 신분을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인사 한번 멋지군. 출발합시다."

 다행이 길가에는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물어보더라도 둘러 델 수 있었지만 아침부터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도 그녀가 결혼했다는 것 만 빼고는 별 다른 변화가 없는 학교생활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어지는 보충수업에 깐깐한 교련선생님의 수업은 태림이 아직 학생이라는 걸 잊어버리게 하지 않았다.
 빨리 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조건이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가 있을 것이다. 태림은 그 희망 하나로 지금까지 꾹 참아왔다. 결혼은 했지만 그 결혼이 그녀의 인생을 변화시켜줄 것 같지는 않았다.
 태림이 아는 남자들은 다 똑같았다. 아버지처럼 가족을 때리고 바람을 피우면서도 전혀 잘못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으스대는 남자들과 자신의 힘을 약한 사람들에게 과시하면서 사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된 세준도 어른이 돼서 그런지 별로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그에게서는 오래 전에 보았던 따뜻함이 보이질 않아 태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의 목적은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 엄마와 아버지의 옆에서 떠나는 것이었다. 깐깐한 시어머니가 그녀가 취직하는 걸 반대할 것 같았지만 시아버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서라도 꼭 취직을 해야 했다. 결혼이라는 어려운 장벽이 그녀의 앞에 놓여있지만 아버지의 무자비한 손에 엄마를 언제까지나 놓아 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태림은 육체적인 폭력보다 엄마를 더 힘들어하는 폭언과 정신적 압력을 아버지가 아주 효율적으로 이용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태림 보다 몇 살 정도 나이가 많은 젊은 여자들과 정사를 즐기면서도 엄마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를 자유롭게 놓아주면 서로가 좋을 텐데, 무슨 미련인지 몰라도 아버지는 엄마를 꼭 쥐고 괴롭힘을 즐기고 있었다.
 지루한 교련 시간이 드디어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반 담임 선생님은 아이가 둘 딸린 유부녀 선생님이었다.
 "자자. 다들 옷 입었으면 잠깐 선생님한테 주목 좀 해라."
 아이들은 재빨리 옷을 입고 각자의 자리에 앉아 선생님을 바라보았고, 교실이 조용해지자 누군가 스르륵 문을 열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고, 그녀의 등장으로 교실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자! 자! 조용히."
 하지만 아이들의 수군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교실 안에 들어온 인물은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하이틴 스타 이현이었다. 이현이 교실 안에 들어서자 어떻게 알았는지 다른 반 아이들도 복도를 가득 메우고서는 교실 안을 들여다보느라고 소란이 가시지가 않을 정도였다.
 이현은 영화에서처럼 깜찍하고 귀엽게 생겼다. 저렇게 생겼는데,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너희들도 이현이가 누군지는 잘 알 거다. 오늘부터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으니까. 서로 사이좋게 지내길 바란다."
 "네에."
 "자. 인사해라."
 이현은 선생님이 교탁에서 비켜주자 앞에 와서 섰다.
 "만나서 반가워, 잘 부탁해."
 그녀의 인사는 짧았다. 뭔가 특별한 인사를 바라던 아이들은 실망스러웠는지 금방 김이 샌 사이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저 애 우리들이랑 친구 할 생각이 없는 애 같지 않니? 지가 영화배우라고 폼 잡는 것 같은데."
 오공주파 중에 하나인 아이가 수군거렸지만 이현은 아무렇지 않는 듯이 웃어 넘겨 아이들의 눈총과 부러움을 동시에 일으켰다.
 "빈자리로 가서 앉도록 해. 어! 태림이 옆자리가 비었구나."
 태림이의 짝꿍은 학기가 시작되기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전출을 가는 바람에 전학을 가고 말았고, 지금껏 태림의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이현은 화면에서 보다 키가 커 태림과 별 차이가 나지 않아 짝꿍이 바뀔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안녕."
 "안녕."
 별로 긴 인사는 아니었지만 태림은 이현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서운하지도 않았다. 짝꿍이 생겼다는 기쁨보다는 집에 돌아가서 남편과 시어른들 얼굴을 보고 살아가는 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4


 시험기간이 이렇게 행복한 적은 그녀의 생에서 처음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시험기간이여서 그런지 시어머니는 태림이에게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사실 태림과 말을 섞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태림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세준은 일이 많은 건지 태림이 보고 싶지 않아서 인지 저녁에 일찍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행이 첫날 아침 이후로 태림은 충격적인 장면을 본적이 없었다. 그녀보고 조심하라고 했던 세준이 항상 먼저 조심을 했고, 보게 되더라도 이불을 허리춤에 두른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야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대화는 얼굴을 보는 횟수보다 더 적었고, 그 대화의 내용도 그녀가 일방적으로 하는 아침인사나 등교 인사가 대부분이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응'이라는 정말 짧고도 정 없는 단어로 일관했기 때문에 부부간의 정이라는 화분을 일구고 싶어도 그런 싹 조차 키울 수가 없었다.
 "저기요?"
 "왜?"
 세준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태림은 말을 꺼냈다. 그는 요즘 늦게 들어왔다. 분명 태림의 얼굴을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는 아침에도 차에서 서류나 밖을 내다볼 뿐 태림에게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고, 굳이 노력해서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용하지 않으시는 시간에 서재 좀 사용했으면 해서요."
 "왜?"
 저렇듯 짧게 대답하는 것도 기술이라고 한다면 태림의 남편은 수준급일 것이다.
 "시험 기간이라 서요. 방에서 공부하려면 불을 켜야 하는데, 주무시기가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젖은 머리를 말리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 세준의 표정은 전혀 달갑지 않았지만 반대하진 않았다. 태림은 세준이 젖은 머리를 말리는 손질과 그의 움직임과 함께 같이 움직이는 처음 보는 근육을 보자 이상하게 떨렸고, 얼굴이 붉어지자 고개를 숙였다.
 "알아서 해. 대신 내 물건은 만지지 말고 사용하더라도 항상 제자리에 놓아둬."
 "네? 감사합니다."
 태림은 머릿속에서 세준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 그의 말을 빨리 알아들을 수조차 없었다.
 그 날부터 태림은 세준이 서재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평상시에는 전혀 쓸 일이 없는 화장대를 책상 삼아 공부를 하고 그가 잠을 자러 방에 올 때면 재 빨리 서재로 나갔다.
 "들어오세요."
 노크 소리에 태림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는데, 시간은 벌써 새벽 한시를 달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시아버지였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잠이 오지 않아서 말이다."
 그는 쟁반을 태림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간식."
 태림은 그의 따뜻한 마음에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예전에 살던 집에서는 언제 아버지의 폭행이 시작될지 몰라 항상 조마조마 했었고, 여기서는 시어머니의 차가움과 세준의 냉대에 힘들었지만 시아버지의 관심이 태림을 버티게 해주었다.
 "태림아. 굳이 성적을 올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잖니. 그러니 그냥 평상시에 하던 데로 하렴."
 어깨에 올려진 시아버지의 따뜻한 손은 더욱더 엄마를 생각나게 했다. 태림은 늦게 나마 시아버지에게라도 사랑을 받아 보지만 엄마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없다는 걸 생각하자 눈가에 눈물이 맴돌았지만 시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미소를 지어 올렸다.
 "네."
 "정 성적을 올리기 원한다면 과외 선생님을 소개시켜 줄 수도 있는데. 필요하니?"
 태림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 부탁할 수는 없었다.
 "그럼 몸 생각해가면서 공부하렴. 사실 세준이도 전교에서 10등 밖에 하지 않았으니, 너도 딸리는 성적은 아니야."
 태림은 그가 나가자 쟁반에 올려져 있는 사과를 한쪽 집어 들었다. 이걸 누가 깎았는지 정말로 궁금했다. 세준처럼 키가 큰 시아버지가 그 투박한 손으로 과일을 이렇게 예쁘게 깎았을 장면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세준이 전교에서 10등을 했다고는 했지만, 그가 다니던 학교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수재들만 모이는 명문고였다. 만약에 그가 태림의 학교를 다녔다면 전교1등은 쉽게 지키고도 남았을 거라는 걸 태림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 공부를 열심히 했다.

 "오늘 성적이 나오는 날이구나."
 "네."
 시어머니는 항상 그런 무거운 주제를 아침에 식사를 할 때만 꺼내어 놓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질문의 수혜자는 항상 태림이었다.
 "세준이 일도 하지 못하게 서재를 차지하고 밤새 공부를 했으니, 성적이 잘 나오겠지."
 시어머니의 말에 시아버지는 눈치를 주었지만, 시어머니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태림은 어제 빼고는 두 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자신이 매본 점수는 평상시 보다 평점이 4점정도 오른 것 같았지만, 같은 순위에 있는 아이들이 태림처럼 성적이 올랐다면 등수에는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어서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잘 모르......."
 "밥 다 먹었으면 가자."
 시어머니가 뭔가 말을 하려는데 세준은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어머. 세준아 밥 다 먹어야지."
 "별로 생각이 없어요. 다녀오겠습니다."
 세준이 입맛이 없다는 덕에 태림은 그 껄끄러운 아침 식사시간을 무사히 넘길 수가 있었다.
 "죄송해요."
 "뭐가?"
 역시나 세준은 태림의 얼굴을 바라볼 시도는 하지 않았다.
 "서재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어서요."
 "별로 상관없어. 내가 필요했다면 비켜주지도 않았을 거야."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뭐 때문에 그녀를 위해서 그런 수고를 했겠는가?
 태림은 교실에 도착해서도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집에서 있을 때는 이렇게 성적에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집가서 받는 처음 시집살이가 성적이라는 걸 알면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실 지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어차피 일등을 하지 못할 거라면 태림이 꼴등만 하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다는 투였고, 엄마는 태림이 정신적인 상처를 받지만 않는다면 그녀가 뭘 해도 받아들을 각오가 되어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성적으로 태림을 닦달하는 일은 없었다.
 엄마와는 하루에 한번 전화통화를 하는데 아직까지는 목소리에 별다른 문제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엄마가 맞더라도 태림에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편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 보니 아버지가 아직은 엄마를 괴롭힐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애들아! 방 붙었다."
 방이란 성적표가 복도 게시판에 붙었다는 소리였다. 교장선생님의 명령으로 전교생의 성적이 학년별로 각 층에 붙이는 걸 아이들은 방이라고 불렀다.
 이번엔 태림이도 아이들의 틈에 끼여 성적표를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보통은 아이들의 열기가 식으면 확인했지만 오늘은 떨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태림아! 너무 좋겠다. 너 21등이야."
 태림은 이름을 확인하자 한시름 놓았다. 시어머니의 기대처럼 많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성적이 조금이나마 올랐으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으히. 난 또 120등이야. 난 어떻게 이 숫자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를 않는 지 몰라. 평균이 올라도 이 등수, 내려도 이 등수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유정은 오늘도 성적을 보고 짜증을 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야 오늘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래?"
 태림은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다가 오늘은 일찍 끝내는 날이니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이현인가 하는 애, 생각보다 똑똑하다."
 태림과 유정은 옆에서 말하는 소리에 다른 반 아이의 눈길을 따라갔다.
 이현은 전학 온 뒤로도 학교에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밖에 나오지를 않았는데, 성적은 50등 안에 들어있었다. 태림의 학교는 한 학년 당 학생이 400명이 넘은 일명 콩나물시루 학교였기 때문에 이현의 성적은 아이들의 이슈거리가 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과외 받나봐.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바쁜 애가 저런 성적이 나올 리 가 있니."
 아이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지만 태림은 별로 관심 있게 듣지 않았다. 그 아이가 어떻게 공부를 했든 말든 자신의 일을 가지고서도 학교 공부에 소홀하지 않는 이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내 짝꿍은 전학안가나?"
 "왜?"
 태림은 갑작스런 유정의 말에 고개를 돌려 유정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네 옆자리 가서 앉으려고, 이현이가 전학을 왔지만 넌 항상 혼자 앉는 시간이 많잖아."
 태림은 유정이의 말이 고마웠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사실 친해진 것은 고등학교 들어와서 줄 곳 같은 반이 되고 나서 부터였다.
 "그래도 성적처럼 변하지 않는 이 키 때문에 안 되겠지."
 태림의 반은 키 순번대로 자리를 정했기 때문에 유정과 태림이 만날 일은 없었다. 유정은 태림의 어깨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키를 가지고 있었고 반면에 아버지의 훤칠한 체격을 닮은 태림은 반에서 가장 키가 컸다.
 "그래도 넌 내 제일 친한 친구잖아."
 "그건 그래. 내가 키가 작은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네가 내 친구라서 나도 좋아."
 그녀들은 점점 몰려드는 친구들의 틈에서 빠져 나왔다.
 "야 3학년 4반은 가정 대신 교련으로 바뀌었단다."
 이 말에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태림이 4반이었고, 같은 반 아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제히 교실로 뛰어 들어갔고, 얼마 남지 않는 시간 안에 운동장으로 나가기 위해용을 써야만했다.
 교련 선생님은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걸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운동장 청소를 시키거나, 잔디밭에 풀 뽑기를 시켜서 아이들은 절대 늦으려 고를 하지 않았다.
 "왜 하필 교련이냐고. 차라리 내가 수학을 듣고 만다."
 하지만 그런 투정은 잠깐의 웃음만 줄뿐 아무도 옷을 갈아입는 걸 멈추지를 않았다.
 
 "정말 두꺼비한테 수업 안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냐?"
 한 친구의 말에 정렬을 서 있다가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들이 웃음이 나온단 말이지. 너희들은 무장공비가 쳐들어와도 그렇게 웃을 거냐? 다들 운동장 다섯 바퀴 돈다. 실시."
 여 학생들의 야유에 찬 불만에도 두꺼비 선생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왜 웃었는지도 모르는 다른 아이들까지 다 뛰게 했다.
 "우리가 무슨 군인도 아닌데 왜 매일 교련시간마다 뛰어야 하는 거냐! 정말 화나. 두꺼비 차라리 체육선생님을 하던가. 두꺼비 지가 무슨 개구리도 아니면서 멀리까지 뛰려고 야단이냐고."
 별로 말도 없고 친구를 사귀는데도 관심이 없는 전학생인 이현이의 말에 옆에 서서 뛰고 있던 태림은 웃음을 지었다.
 "맞아."
 태림이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이현이의 표정이 잠시 이상해지더니 태림이를 마주보고 웃어주었다. 이현은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고 요즘 하이틴 스타였고, 그걸 부러워하면서도 시기하는 여학생들 때문에 친구가 없었다.
 "너 김태림이지."
 "응."
 그 간단한 대답에 그 날부터 그녀들은 친구가 되었다.

 집에 돌아가자 시어머니는 태림이 보다는 그녀의 성적표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 들고는 단 한번에 쑥 훑어보았다.
 "조금 올랐구나. 하지만 어디 이래서 사람들에게 내놓기나 하겠니."
 확실히 못마땅하다는 걸 보여주는 거슬리는 말투였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쯧쯧. 이 정도 올리려고 새벽까지 일하는 우리 세준이를 귀찮게 했니. 다음부터는 무슨. 지금 고3인데 노력한다고 해서 오리가 백조가 될 수나 있겠니. 됐으니까 이 성적이나 떨어지지 않고 잘 유지나 해."
 "네."
 시어머니는 태림을 보고만 있어도 답답한지 한숨을 내쉬더니 성적표를 던지듯이 태림의 손에 주고서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태림은 이 답답한 새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현이는 스케줄 때문에 학교에 자주 나오지는 못했지만 학교에 나올 때마다 태림이와 붙어 다녔고, 그녀들은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을 걸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이현과의 시간은 신경이 날카로워진 태림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는 작용을 많이 했다.
 하지만 당연히 태림은 이현이에게 결혼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태림아!"
 태림은 책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는 시험성적을 봐서는 머리가 좋은 것 같은데 평상시에 보면 책을 보려고 하지를 않았었다.
 "왜."
 "나 너희 집에 놀러가도 돼."
 태림은 이현의 말에 놀라 들고 있던 볼펜을 교실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너 그렇게 손가락에 힘이 없냐. 수업시간에도 보면 잘 떨어트리더라."
 "어! 내가 좀 그래. 그런데 현아 저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촌오빠와 살면서 왜 방문이 안 되는지를 납득시키는 일이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아! 맞다. 나 오늘 사진 찍어야 된다고 그랬지. 우리 매니저 오빠는 나 쉬는 꼴을 못 보잖냐. 다음에 한번 꼭 초대해줘야 한다."
 "알았어."
 태림은 이현이 건네준 볼펜을 들고 책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이현이 눈치 못 채자 가슴을 쓸어 내렸다.
 "휴우. 다행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친구들을 초대해 본적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항상 몸에 멍이 들어있는 엄마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생각해서 보이지 않는 곳만 때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 멍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구의 남자에게 맞는 일은 약한 뼈대를 가지고 있는 엄마의 힘을 소모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태림은 자기 때문에 엄마가 신경 쓸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었다.
 그리고 지금은 더더욱 꿈을 꿀 수도 없는 일이었다.

 "태림아?"
 "네. 아...버님."
 아버님이라는 말이 좀처럼 잘 나오지 않았지만 시아버지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노력했다.
 "자기 전에 내 서재에 잠깐 들렸다 가려무나."
 "네."
  똑똑
 "들어와라."
 태림은 처음으로 시아버지의 서재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서재는 세준의 서재처럼 책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자신의 아버지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지기 위해 가져다 놓은 새 책이 아니라 세준 처럼 거의 대부분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이었다.
 "앉아라."
 "……."
 "자. 이거 받아."
 태림은 시아버지가 내어놓는 하얀 봉투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놀라 숨을 들이쉬었다.
 "웬 돈이에요?"
 "용동이다. 아무리 학생이라고 넌 주부이잖니. 당장은 쓸데가 없더라도 가지고 있다가 필요로 한 일이 있으면 써라. 사람이 돈이 없으면 힘이 없는 거란다."
 시아버지는 태림이 친정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온 것을 간파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요."
 "아니다. 넌 우리집안의 며느리다. 그 정도는 받아도 괜찮아."

 태림은 조금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 들이려 했지만, 시아버지는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저기요?"
 "뭐."
 막 방에서 나가려는 세준을 방문 앞에서 만났다. 분명 오늘도 서재에 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아버님이 용돈을 주셨어요."
 세준의 표정은 변화가 없어 기분이 어떤지 가늠 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써."
 "그런데요……."
 세준은 태림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두 갈래로 나누어져 하얀 살이 보이는 정수리뿐이었다.
 "너무 많아요."
 "저금하던지 그건 너 알아서해."
 세준은 별 관심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복도 끝에 있는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세준은 서재로 들어가 서류 사이에 끼어 있던 하얀 봉투를 꺼내어 들었다. 사실 그가 먼저 주려고 했다. 원치 않는 결혼이었지만 그래도 용돈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태림이를 아끼고 마음에 들어 했던 아버지가 선수를 치고 말았다.
 알아서 태림이를 챙기는 아버지가 있어서 편안해 해야 했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세준의 마음속은 점점 복잡해져 갈 뿐이었다.

 태림은 세준의 말대로 저금을 했다. 이 돈을 모으고 나중에 졸업해서 돈을 모으면 생각했던 금액이 생각보다 빨리 모아 질 것 같아 최소한의 돈만 남겨 놓고 다 저금해버렸다. 
 이현은 새로운 영화촬영에 들어간다면서 학교에 잘 오지 못했기 때문에 얼굴을 좀처럼 볼 수가 없어서 가끔 외로웠다. 유정과 다른 친구들도 있었지만 이현이가 주는 느낌은 그녀만의 것이었기 때문에 이현과 대화를 나누고 점심도 같이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세준에게서 가지는 하나라는 어색한 둘레보다는 이현이 주는 교감이 더 그녀에게 힘을 주었다.

 

5


 한 달 전부터 옷 때문에 소란을 피우던 시어머니가 이제는 가족들 앞에서 패션쇼를 하면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가르쳐 달라며 요란을 떨었지만 시아버지와 세준의 얼굴에는 전혀 귀찮다거나 비웃는 기색은 없었다.
 만약 저런 모습을 그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했었더라면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상상해 보았지만, 시아버지가 보이는 반응은 절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가슴 시린 상상을 그만두었다.
 "여보. 이건 어때요? 내 나이에 핑크 색은 좀 너무했나!"
 시어머니는 치마를 내려다보며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며 옷맵시를 자랑했다.
 "아니. 당신은 뭘 입어도 예쁘니 아무거나 입어요."
 "매일 그 소리."
 시어머니는 삐진 듯이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세준아 넌?"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시어머니는 두 남자에게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넌 어떻게 생각하니?"
 태림에게 물어보고 싶지 않는 표정처럼 떨떠름한 인상을 지고 있었지만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묻는 것 같아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그것도 예쁘기는 한데. 조금 전에 입으신 연두색이 더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너두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눈에는 태림이 그 옷을 고른 것에 의외라는 생각이 가득했지만 태림이 고른 옷이 마음에 드는지 다시 그 옷을 입겠다면서 들어갔다.
 "창립파티 한번도 가본 적이 없지?"
 "네."
 아버지는 단 한번도 엄마와 그녀를 중요한 파티나 작은 파티나 데리고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태림은 시어머니가 수선을 피우는 게 마냥 신기해 보이기만 했다.
 "너도 가고 싶지?"
 책을 읽는 세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관심이 전혀 없는 듯이 보였다.
 "전……."
 "무슨 말씀이세요. 저 아이가 가면 집안 망신이라고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정말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시어머니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씩씩거리고 있었다. 코에서 불만 나오면 완전히 초록색 용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태림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 이 애들 결혼을 아는 건 극소수인데, 태림이를 창립파티에 데리고 가 봐요. 우리 집안이 무슨 꼴이 되겠으며, 세준의 얼굴은 뭐가 되겠어요. 무슨 실수를 했기에 학생이랑 그것도 쉬 쉬 숨기며 결혼을 했냐며 사람들이 속닥거리지 않겠냐구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 식구 아니오."
 시어머니는 자신의 남편이 한심하다는 한 숨을 내쉬며 자신의 주장을 쉬지도 않고 피력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시기에 태림이가 알려지면 투자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 저 애 아버지가 어디 보통 사람 이여야지요."
 시어머니가 한마디 한마디 내 뱉을 때마다 태림의 몸도 같이 움찔거렸다.
 "여보."
 시아버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호통을 쳤고, 그때까지 기세등등하던 시어머니가 처음으로 수그러드는 모습을 보였다.
 태림은 자신 때문에 시부모님들이 작은 말다툼을 할 때마다 심장이 쪼그려 드는 것 같은 긴장감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숨을 고르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우리가 왜 결혼 사실을 숨겼는지 잊지 않으셨죠. 학교를 졸업한 후에 그런 대외적인 행사에 나가도 늦지 않다고요."
 시아버지는 화가 많이 났는지 주먹을 꼭 주며 손잡이를 내리 쳤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시도하지 않았다.
 태림은 자신을 애물단지 이냥, 집안에 구석에 쳐 박혀 있는 집안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가구를 이야기하듯이 말하는 시어머니의 말이 상처가 되었지만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건 태림이도 마찬가 지었다. 지금 알려져 봤자 학교생활에 전혀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태림은 시어머니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도대체 집안이 조용할……."
 "저희는 그만 올라가 보겠습니다."
 태림은 세준이 어머니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 이층으로 도망쳤다. 태림은 어떤 종류를 망라하고 싸움이라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웬만하면 싸움을 하지 않았고, 싸움을 구경하지도 않았다. 두 분만 남겨 놓고 올라가기가 미안스러웠지만 시부모님의 싸움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다는 걸 몇 달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에 뒤돌아보지 않았다. 작은 싸움이어도 지켜보고 있는 것에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왜 그렇게 긴장을 하는 거야. 저러다가 마시는데."
 태림은 그의 말에 세준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알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왜 그러는지 자신의 감정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전 그냥 싸움이 싫어요."
 "그래도 싸워야 할 때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해. 세상은 네가 양보한다고 해서 널 아껴주거나 이해해 주지 않아."
 세준이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것에 태림은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네."
 "잘 자라. 난 할 일이 좀 있어."
 세준은 방으로 들어가는 힘없는 태림이를 보면서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태림은 조금의 큰소리에도 긴장을 했고, 손대면 금방이라도 뛰어오르려는 고무줄 마냥 신경이 팽팽해져 있는 것이 눈으로도 보였다. 확인 할 길은 없지만 능구렁이 같은 김진만 사장의 영향인 것이 분명했다.

 드디어 창립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피부 관리와 머리를 한다면서 일찍 집을 나섰고, 세준은 할 일이 있다며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태림은 창립파티의 전주곡 같은 설렘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을 거야. 다들 늦게 들어 올 테니 먼 저자."
 "네. 잘 다녀오세요."
 태림은 차에서 내려 평상시처럼 그냥 가지 않고 그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태림아."
 "엄마야."
 태림은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치는 손에 놀라 소리를 쳤다.
 "미안해. 많이 놀랐니?"
 "괜찮아.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
 이현은 일찍 온다고 오는 날도 거의 1교시가 끝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찍 이현을 본다는 건 가뭄에 콩 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이 근처에 촬영이 있었거든. 하  암, 잠 온다. 나 한숨도 못 잤어."
 "정말?"
 "응. 정말 짜증나는 거 있지 상대 연기자가 자꾸 NG를 내지 뭐니. 덕분에 날 꼬빡 셌다니까. 이그! 생각할수록 화나내. 이왕 못 잔 김에 혹시나 니 얼굴 볼 수 있을 까해서 기다렸는데 보람 있었네."
 누군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이 이렇게 감동을 주는 것인지 처음 안 태림은 아침의 차가운 바람과는 상관없이 눈이 시려왔다.
 "그럼 학교에는 못 들어오겠네?"
 "응. 사실 5분만 더 기다리다 가려고 했거든. 얼굴 봤으니까 됐다. 어서 들어가 내 몫까지 공부 열심히 해. 안녕."
 "안녕! 현아. 와줘서 고마워."
 "뭘 그런거 가지고. 들어가."
 태림은 가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는 이현에게 손을 흔드는 걸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흔들어 주었다.

 "유정이 너 얼굴이 좋아 보인다."
 "정말? 사실은 어제 마사지했거든 오늘 어디 갈 때가 있어서, 정말 중요한데거든. 내가 갔다 와서 너한테 먼저 말해 줄게."
 태림은 유정이 어디에 가는지 알만 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태림이 알기론 유정의 집에서 세준의 회사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유정이 어디에 간다고 말하지 않아도 목적지를 알 수 있었다.
 유정이 저렇게 설레어 하는 걸 보자 태림은 처음으로 창립파티라는 것에 참여해 보고 싶었고, 세준과 손을 잡고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왈츠를 처보고 싶었지만 그건 그녀의 백일몽일 뿐이었다.
 
 어머니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태림이 집안의 경조사에 빠지게 되는 것이 마음에 마냥 들지만 않은 자신의 속내에 짜증을 내면서도 속속들이 도착하는 사람들을 맞이해 얼굴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의 감사의 말과 초대된 정치가의 축하사가 이어지자 드디어 파티는 절정으로 오르고 있었다. 무성그룹은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전자회사 중 하나였고, 다른 나라에 비해 싼 인건비와 저렴한 가격으로 해외에도 수출을 하고 있는 건실한 기업이었다. 그랬기에 오늘 이 파티에는 저명한 사회 인사들과 정치인들 기업인들이 모여들었고, 이 창립파티에 초대받기 위해 많을 돈을 쓰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정말 축하하네. 정 서방."
 "오셨습니까."
 세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김진만 사장이 세준의 회사의 창립 파티에 온 것까지는 눈감아 줄 수 있었다. 그가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의 딸인 태림이와 혼인을 한 상태이니까. 하지만 김진만 사장이 자신의 아내가 아닌 혜란이를 파트너로 데리고 온 것은 세준과 그의 부모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장모님과 태림을 한 인격체로써 완전히 무시한다는 소리였다.
 혜란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서양적인 이목구비와 그 못잖은 굴곡이 아름다운 몸매도 여전했고, 쌍꺼풀이 크게 된 눈은 그녀의 야심 많은 성격과는 전혀 다르게 순수함 빛을 뿜어내 주위의 남자들을 홀리고 있었다.
 좀 전에 먹었던 술들이 한꺼번에 확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직도 혜란이 김진만 사장을 만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우리 사위 잘 지냈다. 어찌 결혼하고 한번도 처가에 올 생각을 하지 않는가? 우리 집사람이 태림이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 한번 꼭 오게."
 "네."
 집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이 대외적인 자리에 아내가 아닌 첩실을 데리고 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네.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혜란은 이미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신경도 쓰지 않고 김진만 사장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요즘 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설마 그 소문의 주인공이 혜란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소문은 김진만 사장이 요즘 한 젊은 여자를 사귀고 있는데, 그 여자가 결혼을 원한다면서 안방자리를 원한다는 거였고, 김진만 사장도 그 말을 별로 싫어하지 않더라는 소문이었다.
 세준은 장모님과 태림이 그 소문을 듣지 않았기를 바랐다.
 "세준씨 정말 멋있어 졌네요."
 세준은 혜란을 눈을 보자 욱하는 것이 치미는 걸 참느라고 고생해야 했다. 그녀의 눈빛은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니라 정욕의 대상을 보는 것처럼 농도가 짙어져 있었다. 다행히 김진만 사장이 그 때 다른 곳을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때는 왜 혜란의 눈빛이 욕망과 허영으로 가득 차 있던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한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꼬마 사모님은 안 오셨나봐요?"
 혜란의 눈가는 웃음으로 가늘어졌다. 하지만 김진만 사장도 이번만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태림이는 집에 있겠지?"
 혜란은 그의 말에 기분 상해하는 것 같았지만 금세 표정을 바꾸더니 다시 그의 팔에 뱀처럼 엉키어 들었다.
 "네.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온 손님들에게 아직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김사장은 그런 세준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혜란을 대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다.
 "그럼. 그래야지! 우리도 조금 있다가 갈 생각이네. 우리 여기서 작별인사를 하지."
 김진만 사장의 얼굴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처음과는 다른 게 상당히 많이 굳어져 있었다. 세준은 가끔 아버지의 그 표정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사랑을 해서 결혼한 줄 몰랐다면 아버지가 무시당하는 김진만 사장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아버지의 표정은 그때 태림의 언니의 약혼식때나 지금이나 미묘했다.
 "저 인간들은 여기에 왜 왔다니?"
 어머니는 혜란이를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표정이 확실했다. 기분 나빠했지만 아버지처럼 굳어있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뭔지 알고 싶었지만 계속 밀려드는 축하 행렬 때문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회장님, 사모님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어머나. 윤 사장님 오셨군요. 우리 유정이 갈수록 예뻐지는 구나. 이제는 완전히 숙녀가 되었는걸. 세준아 유정이 기억하지."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준은 자신의 꼬마적 보았던 소녀에게 눈길을 한번 줄뿐이었지만 그의 눈길 한번에 소녀는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다.
 세준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른들의 옷을 입은 소녀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 여자아이를 보자 집에 있는 태림이 잠시 떠올라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효과만 나고 말았다.
 
 태림은 식구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면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주말 밤이어서 인지 영화를 했는데, 이현이가 주인공으로 나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과 재력을 동시에 차지하는 억척 소녀를 이야기한 영화였다.
 "아직 안자고 있었니?"
 "네. 다녀오셨어요."
 시어머니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태림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웃음을 뗬다.
 "그래. 세준이가 오려면 좀 멀었으니까 너 먼저 자거라."
 "예."
 태림은 시부모님이 그들의 방으로 들어가자 이층으로 올라왔지만 잠이 들지는 않았다. 말뿐인 부부생활이지만 세준을 기다려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거실에 앉아 책을 집어 들었다.
 시어머니의 말대로 세준은 열두시가 넘어도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태림의 입에서는 연신 하품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냥 자버릴까?"
 하지만 지금껏 기다린 시간과 정성이 아까워 태림은 방으로 올라가 책을 한 권 꺼내어 들었다.
 
 세준은 자신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 빛을 보고 오늘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에 처음으로 진정한 미소를 지었다.
 태림이 불을 끄지 않고 잠든 모양인 것 같았지만 누군가 자신을 위해 불을 켜 놓은 것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아직도 않자고 뭐하고 있어? 설마 나 기다린 거야."
 세준은 방문을 열다 말고 소파에 이불을 덮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태림이 자신을 반기자 놀라 그 자리에 잠시 멈춰 꼭 태림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네. 잠도 오지 않고 해서요."
 세준의 눈썹이 아치모양으로 변했지만 그녀가 기다린 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는지 태림에게 상의를 벗어 건네어 주고 욕실로 향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태림은 세준이 샤워를 하러 들어가자 잠을 자기 위해 소파에 누었다. 그가 샤워하는 소리가 어느 정도 귀에 익자 태림은 서서히 잠이 들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요즘은 전화통화로 엄마가 아버지에게 별다르게 시달리고 있지 않다는 걸 엄마와 아주머니에게서 확인해서 인지 예전보다는 잠드는데 고생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항상 두려움에 떨었던 삶을 살았기에 잠을 깊이 못 들기도 했지만 잠을 금방 잠들 수도 없었다.
 
 샤워를 맞추고 나온 세준은 달빛이 곱게 머무는 태림의 얼굴에서 한동안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서도 그저 결혼이라는 이야기만을 들었을 때도 싫었던 어린 그녀가 언젠가부터 그의 마음속에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는지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마음의 따뜻해졌다.
 만약 태림이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혜란과 김진만 사장을 만났더라면 세준은 분명 태림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 한마디쯤은 아무렇지 않게 꺼내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 소문을 그녀가 듣지 않기를 바라고 기도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그의 걱정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어둠과 같은 것이었다.

6


 "태림아! 태림아!"
 태림은 유정의 들뜬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자신의 자리로 뛰어오는 유정을 바라보았다.
 "뭐 때문에 기분이 그렇게 들떠 있어?"
 "나 어제 무성전자 창립파티에 갔다가 정훈희 언니도 보고 남진 오빠도 봤거든. 그 두 사람 정말 멋있더라."
 유정이 처음으로 부러웠다. 연예인을 봐서가 아니라 세준과 한 공간에 있었다는 게 가장 부러웠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더 있는 표정이네."
 유정의 얼굴은 말 그대로 꿈꾸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보이니? 사실 나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 얼굴 봤거든."
 "그래."
 태림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언제부터 좋아하던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행복해하니?"
 "아주 어릴 적부터.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을 마음에 담았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야 말 거야."
 태림은 유정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부러웠다.
 "누군데?"
 유정은 다른 아이들이 들을 세라 조심스럽게 태림의 귓가에 얼굴을 가지고 왔다.
 "무성전자 사장인 김세준."
 쿵
 태림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정에게 들릴 까봐 가슴 위에 손을 잠시 올려 둘 정도로 놀랐다. 태림은 유정이 어릴 적부터라는 말에 세준이 아니길 바랐다. 태림이 양보할 수 있는 거라면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남편을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성전자 사장님. 너무 멋있는 것 있지. 넌 한번도 그런 멋있는 남자 본적 없을 거야."
 걱정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태림의 얼굴을 사색이 되었지만 자기 기분에 푹 빠져 있는 유정은 태림의 기분을 전혀 눈치 못 챘다.
 "예전에도 정말 멋졌는데……."
 태림은 유정이 손을 마주 잡고 그를 그리워하는 표정을 짓자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이야기는 해 본적 있어?"
 태림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아니. 그냥 인사 정도만 그런데 그 짧은 인사도 너무 멋있어. 목소리가 성우 뺨친 다니까. 언제나 그 오빠 목소리만 떠올려도 여기 이 가슴이 떨려."
 유정은 그걸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지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목소리만 좋으면 뭐해. 무뚝뚝하고 냉정한 사람을."
 아차!
 태림의 실수였다. 유정의 마음을 돌려놓는다는 생각에 그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유정의 눈빛은 변해있었다. 마치 자신의 남자를 태림이 빼앗아 가는 것처럼 쳐다보자 태림은 부담스럽고 걱정이 되었다.
 "어! 그게... 있지. 우리 아버지랑 아시는 분이잖아. 그래서 이야기를 좀 들었었거든."
 다행이 유정은 태림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서든지 유정이 세준을 마음에 담는 걸 막고 싶었다. 친구가 상처받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기사도 정신이 아니었다. 단지 세준을 어떤 의미에서든지 잃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머 넌 좋겠다. 그런 말도 듣고, 부럽다. 얘. 냉정하면 어때 남자가 그런 멋도 없으면 무슨 매력이 있겠어."
 그런데 유정의 눈빛이 이번엔 태림을 피하고 있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왜 그래?"
 "모르겠다. 너도 알아야겠지! 그래야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충격을 덜 받을 테니까."
 도통 유정의 말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벌써 세준과 무슨 일을 벌렸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태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제 사실은 너희아버지 봤어."
 태림은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태림이 걱정하는 극단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버지가 세준의 회사 창립파티에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어떻다는 말이고 충격을 왜 받아야 하는지 유정이 이야기를 계속하기를 기다리면서 유정의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파트너가 웬 젊은 여자더라. 혹시 너희 친척언니니?"
 유정은 태림이 받을 충격을 줄여주려고 노력을 했지만 태림은 그 여자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몇 전 년부터 만나고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유정은 그런 태림의 얼굴을 보며 알 수 없는 우월감에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그 여자와 오랫동안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다. 보통은 오래가야 한 달인 아버지가 그 여자와는 몇 년을 만나 오는 게 항상 불안했다. 그런데 드디어 태림이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 여자가 드디어 엄마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 젊은 여자가 아버지와 결혼을 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사실은 차라리 그 여자와 결혼해버리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와 태림이 그 집을 나온 후에나 아버지와 그 여자가 속내를 밝히기를 바랐는데, 그 마저도 태림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니?"
 어느 틈에 이현이 태림의 옆에 와 있었다. 이현은 태림과 친해지면서 늦더라도 학교에 오려고 노력했고, 그런 이현을 유정은 좋아하지를 않았다.
 "어."
 쓰러질 것 만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해오면서도 아버지 말고는 다른 남자에게는 눈길 한번 준 적이 없는 엄마였다. 엄마가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면 얼마나 많은 충격을 받을지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려 괜찮을 수가 없었다.
 이현이 거만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에 앉자 유정은 아니꼽다는 듯이 쳐다보고는 자기의 자리로 가버렸다.
 "왜 그래. 저 애가 무슨 말을 했기에 니 얼굴이 창백한 거야?"
 이현은 안되겠다 싶었는지 태림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어디 가려고 곧 수업 종칠 텐데."
 "한 시간쯤 빠진다고 해서 너 잡아먹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태림은 이현이 이끄는 데로 계단을 힘없는 발걸음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왜?"
 "여기 같이 이야기하기 좋은 데가 어디에 있니. 그 우스꽝스러운 오 공주파도 수업시간에는 잘 오지 않는 데가 여기잖아. 자! 말해봐.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태림은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고, 이현은 그런 그녀가 안정이 될 때까지 안아주었다.
 태림은 조금 진정이 되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우리 엄만 그렇게 맞고 또 맞아도 우리 아빠하고 우리들 밖에 모르고 살았어. 혹시라도 자기가 떠나면 언니하고 내가 맞기라도 할까봐 집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사셨는데, 왜 그런 일까지 당해야 되는 거니?"
 이현은 울먹거리는 태림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일년도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있으면 엄마 데리고 나와서 우리 모녀끼리 살수도 있는데, 왜 하필 지금인지 모르겠어. 왜 내 뜻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는 걸까? 현아 나 너무 속상해. 속상해서 미쳐버릴 것 만 같아."
 이현은 현명하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림은 그녀의 침묵에 고마움을 느끼며 오랜만에 마음껏 울었다. 지금은 어색한 몇 마디 보다 그냥 태림의 쌓인 아픔을 들어주고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이 되었다.
 
 세준은 태림이 창립파티에 가지 못하게 된 뒤로 얼굴 표정이 좋지 않자 영 마음이 불편했다.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책상에 앉아있는 그녀의 쳐진 어깨가 마음에 걸려서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지난번 시험기간 이후에 세준은 태림이 언제든지 공부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방 한쪽에 책상과 성능이 좋은 스탠드를 설치해 주었었다.
 "다음에는 같이 가자."
 하지만 태림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그를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음 창립 파티에는 너도 같이 가자니까."
 "네?"
 태림은 세준이 약간 목소리를 높이자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세준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다음 파티……. 잠깐 네 얼굴 왜 그래? 울었니?"
 태림은 아직도 조금 부어 있는 눈 커플을 손으로 가렸지만 세준의 날카로운 눈매를 피할 수는 없었다. 세준은 가까이 오더니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태림이 뒤로 돌지 못하게 의자를 한 손으로 붙잡고 그녀의 턱을 잡고 위로 추켜올렸다.
 "왜 울었어?"
 "저기……. 그게……."
 마땅히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식은 땀 까지 등에서 날 정도였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는 그런 시시껄렁한 변명은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그녀는 그가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마음이 뜨끔했지만 부끄러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행이 자신의 아버지를 보지 않은 것 같았다. 만약 보았다면 그가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다.
 "친구랑 싸웠거든요."
 "그 나이에 친구하고 싸웠다고 우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친구라고 해봐야 다 너보다 어리지 않아. 어린애들 때문에 왜 상처받아."
 하지만 세준은 여자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특이나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생의 심리를 알 턱이 없는 세준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믿어주는 눈치였다.
 "친한 친구거든요. 너무 속상해서 조금 울었어요."
 "다음부터는 그딴 일로 울지 마. 나 먼저 자니까 공부하려거든 불 켜고 해도 돼."
 "네. 안녕히 주무세요."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책에 떠오르는 거라고는 아버지의 무자비한 얼굴과 그 옆에 서 있던 여자의 비웃음 가득한 얼굴 그리고 상처받은 엄마의 얼굴이 계속 스쳐 지나가서 안정을 취할 수가 없었다.
 태림의 아버지는 도덕관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여진언니가 죽고 1년이 지난 그 날에도 그 여자를 집으로 불려 들여 가족들이 가슴에 비수를 박았던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혜란이라는 여자도 마찬 가지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자신이 온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고, 꼭 그 집이 제 집인 것 마냥 행동하고 다녔었다.
 그 때 태림이 조금만 더 용기 있던 아이였더라면 방에 들어가 숨는 대신 엄마의 옆에서 방패가 되어주었을 테지만 그 때의 태림은 약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용기가 있어도 그럴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걸 생각하자 다시 눈물이 눈앞을 가리더니 책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세준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대해왔던 태림이 마음 상한 얼굴을 하고 있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거렸기 때문이었다.
 태림이 자신의 아버지가 혜란을 데리고 창립파티에 참석한지 당연히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부은 얼굴 보자 한 순간 가슴이 철렁했었다.
 뚝뚝뚝
 세준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처음에 그는 그 소리가 욕실에서 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였지만 그 소리는 태림이 있는 거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비가 오나?'
 그런데 울고 나면 으레 것 나는 코가 훌쩍이는 소리가 나더니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태림이 또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들었던 소리는 눈물이 종이 위로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였다.
 당장에 일어나 우는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있었다. 그만한 나이에는 굴러가는 낙엽을 보고도 웃는다고 했다. 지금 웃고 있지는 않지만 태림의 말대로 친구와 심하게 싸워 속상해서 우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을 당장에 일어나서 태림을 안아주고 싶어 한동안 잠을 들 수가 없었다.

7


 태림은 세준의 차가 보이지 않고서야 자신이 도시락 가방을 놓고 내렸다는 걸 알아챘다. 창립 파티 때 있었던 일을 들은 후로는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다행이 시아버지가 주시는 두둑한 용돈 덕분에 굶은 일은 없겠지만, 차안에 있는 도시락 가방을 보고 세준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걱정되자 한숨이 절로 흘러 나왔다.
 땅에 떨어진 동전이라도 찾는 사람처럼 고개를 처박고 걷던 태림은 맨발에 구두를 신고 있는 남자의 발을 보고 비켜서려고 했지만 여러 차례 그녀를 따라 움직이는 남자의 걸음에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태림의 키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태림은 멍하게 풀린 남자의 눈빛을 마주 볼 수 있었고, 순간 바바리를 입고 맨 다리를 내놓고 다니는 남자가 친구들이 말하는 바바리 맨이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남자는 숙련이 된 빠른 동작으로 태림이 눈을 채 감기도 전에 옷자락을 펼쳤다.
 퍽
 "으윽."
 "넌 이럴 땐 조용하구나. 내가 벗고 있을 때는 지붕이 날라 갈 정도로 소리를 치더니."
 태림은 자신의 귀에 작게 속삭이는 세준의 목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가 여전히 옷자락을 펼치고 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땅에 널브러져 있는 바바리 맨 때문에 다시 눈을 감았다.
 "야! 너 이 학교에 다시 나타나면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릴 줄 알아. 어서 꺼져."
 세준의 음울한 협박조의 목소리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위기감을 느낀 바바리 맨은 옷을 추스를 정신도 없이 줄행랑을 놓았다.
 "저런 변태 같은 자식들이 정말로 있잖아. 눈떠, 갔다."
 태림이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세준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눈만 감으면 어떻게 해. 도망을 치던가. 그런 자식들이 좋아하는 악이라도 지르던가. 아니면 거기를 확 쳐버리던가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저……. 그게……."
 "말을 해. 자꾸 더듬거리지 말고."
 세준은 더듬거리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태림의 대답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손에 도시락 가방을 쥐어 주었다.
 "다음부터는 가져다주지 않을 거니까. 잘 챙겨, 그 나이에 정신이 그렇게 없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거야."
 하지만 태림은 아직도 바바리 맨 때문에 받은 충격과 세준이 그녀를 위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멍해 있었고, 세준이 차를 타고 떠나려는 순간에 겨우 인사를 할 수가 있었다.

 "태림아! 괜찮아?"
 태림 처럼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이 그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응."
 친구들은 놀라서 손이 차가워진 태림의 손을 주물럭거리며 혈액순환을 도왔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친구들의 시선은 태림이 아닌 세준이 떠난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어? 어.. 저기... 사촌오빠야."
 사촌 오빠라는 말에 풋내기 아가씨들은 자신들의 손을 맞잡으며 꼭 자신이 구출된 공주 마냥 들떠서 어쩔 줄을 몰랐다.
 "정말 멋있다. 내 생전에 그렇게 멋진 사람은 처음 봐."
 "나두, 어쩜 그렇게 싸움을 잘 할 수가 있니."
 그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하지만 그가 행사한 폭력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폭력이라는 걸 인정해야만했다.
 "바바리 맨 그 놈 한방에 넘어가더라."
 친구들은 놀라서 정신이 없는 태림을 양쪽에서 잡고 가면서도 세준의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태림은 그런 친구들의 틈 사이에서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안타까워하며 다시금 자신과 엄마의 앞날을 걱정해야만 했다.
 "너 괜찮아? 애들이 그러는데 바바리 맨 봤다면서."
 현아와 유정은 태림을 걱정했고, 다른 친구들도 걱정을 했지만 사실 그들의 관심은 본적이 없는 남자의 나체와 태림을 구해준 세준에게 가 있었다.
 그런 친구들에게 바바리 맨 말고 다른 남자의 나체를 본적이 있다고 말하면 그들이 뭐라고 할까 하는 얄궂은 궁금증이 떠올랐지만 태림은 그 말을 옮길 용기는 없었다.
 "얘. 네 사촌오빠 정말로 멋있다는 소문에 자자하더라. 1학년 2학년 애들까지 난리야."
 -내 남편이야.
 이 말도 그녀의 입안에서만 맴도는 말이었다.
 그 날 하루 내내 세준의 얼굴과 귓가에 스쳤던 그의 입김이 잊혀지지가 않아 여러 번 귓가를 만질 정도로 태림은 붕 떠있었다. 이런 게......?
 사랑?
 태림은 자신의 자각에 놀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뒤에서 따라오던 친구가 자신의 옷자락에 물을 뿌릴 뻔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넋이 났다.
 사랑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그저 처음 해보는 남자와의 생활과 누군가에게 속해있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엄마의 걱정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에 정신이 팔려 그런 감정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사랑이란 건 말이야, 아무도 모르게 특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옆에 와 있는 거야-
 언제가 한 친구가 연애 소설을 한 권 일고 친구들을 앉혀 놓고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때는 그런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지만 자신이 사랑이란 걸 겪고 나니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 아니요."
 태림은 자신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서류만 보고 있다고 생각한 세준이 갑자가 고개를 들고 자신이 했던 것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자 당황을 해서 들고 있던 책을 놓쳐 그것을 줍는다는 핑계로 붉어진 얼굴을 감출 수가 있었다.
 뜸 만 나면 세준의 얼굴을 몰래 몰래 들여다보는 것이 태림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다행이 얼마 가지 않아 학교에 도착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그 정신병자가 보이면 눈감지 말고 도망을 가던가 아니면 내가 가르쳐 준대로 거기를 걷어차 버려."
 세준은 그 날 들어오자마자 태림을 세워 놓고 발차기의 자세와 정확한 목표물을 확인하고 그 목표물을 향해 사정없이 발을 차는 기술을 가르친다며 소동을 부렸었다.
 "네."
 세준이 처음으로 그녀의 인사에 화답을 했다. 그것도 그냥 화답이 아닌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이다. 태림의 얼굴에는 그의 미소보다 더 환한 미소가 걸렸고, 그 미소에 세준의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세준 뿐이었다.

8


-3학년 4반 김태림 전화와 있다. 교무실로 어서 내려오도록.-
 "누굴까?"
 옆에서 오랜만에 공부를 하던 이현도 태림이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고, 사색이 되어 있는 태림의 얼굴을 보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하지 마. 좋지 않은 소식이라면 선생님이 직접 부르지 않겠어."
 "그렇겠지."
 단 한번도 학교로 전화가 온 적이 없었다. 중학교 시절 어느 날을 빼면.
 그녀의 기억에 그 날은 그녀에게 날아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과는 다르게 너무 화창해서 눈을 뜨고 다니기 힘들 지경이었다.
 울음이 가득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엄마의 목소리와 옆에서 그럴 줄 알았다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면 호통을 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해석하기는 힘들었지만 태림은 얼마 듣지 않고서도 전화의 내용은 언니의 부고를 알리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알아듣는 즉시 태림은 기절해버렸다.
 이번엔 제발 누군가의 부고를 알리는 소식이 아니길 엄마에게 일이 생긴 것이 아니길 바라며 떨리는 발걸음을 재촉해 교무실로 향했다.
 "여, 여보세요?"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말씀하세요."
 -나야.
 길게 듣지 않아도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혜란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이토록 졸이게 했다는 것이 화가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지만 굳이 바꾸려는 수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가 조퇴하고 회사로 좀 오라고 하시네,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면 알 거라고 하시던걸.
 태림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내세웠던 조건은 세준의 회사의 기밀서류를 빼오라는 거였고, 그 시기는 따로 알려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걸 왜 그쪽에 전하는 거죠?"
 -호호호, 어머 애도 참. 그쪽이라니 어쩌면 네 새엄마가 될지도 모르는데."
 "꿈도 야무지군요."
 더 한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선생님들이 가득 차 있는 교무실에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들 모녀가 아버지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꿈이기는 했지만 자신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그녀가 엄마를 몰아내고 자신에게 새엄마 행세를 하겠다는 말들과 행동은 그냥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꿈이 될지 현실이 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것 아니야. 그럼 조금 있다봐.
 아버지가 회사로 부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그런 좋지 못한 일을 도모하기에는 그만한 장소도 찾기 힘들 것이었다.

 점심시간이어서 그런지 회사는 한산하다 못해 아버지 같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을 정도로 썰렁했다. 아버지의 비서도 식사를 하러 갔는지 자리는 비어 있었고, 아버지의 사무실 문은 조금 열려 아버지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자 태림은 자신을 발견하고 아버지가 나오는 거라 생각하며 다가갔지만, 아버지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이상하게 만큼 번뜩이고 있었다.
 설마 혜란이라는 여자도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인간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보다 더 한 짓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우리 현이 이번에 영화 찍는 다면서."
 "네."
 태림은 이현의 이름과 그녀의 날카로워진 목소리를 듣자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은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다면서 태림 보다 몇 시간 전에 학교에서 나갔었다. 그런데 하필 그녀가 온 장소가 아버지 회사라니.
 "이번에 우리 회사 광고에 나오면 우리 이현이의 인기는 대한민국 최고가 될 꺼야. 그럼, 감히 그 시건방진 미유와 비교할 수가 없지."
 미유는 이현과 같은 하이틴 스타이었는데 요 근래에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어 수많은 소문이 나돌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니 분명 미유는 아버지의 러브 콜을 거부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스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은 힘든 일이니까.
 구역질이 치밀러 올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딸보다 더 어린 여자에게까지 그 검은 손길을 내미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구더기를 먹는 것 보다 더 싫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아,아니 너 여기는 무슨 일로...."
 이현의 블라우스 단추는 속옷이 비추어 질만큼 열러 있었고, 고운 얼굴에는 눈물이 얼룩져 있었다.
 "당신이 사람이야?"
 "당신이라니 난 네 아비다.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이현의 놀란 얼굴이 태림에게 고정되었지만 부끄러워 차마 그녀의 슬프고 부끄러움이 가득한 눈길을 마주하지 못했다.
 이현은 태림과 자신을 추행하려는 사람과의 관계를 알게 되자 마자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태림은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홀로 아버지와 맞섰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혜란이라는 그 추악한 여자도 부족해서 딸하고 같은 나이의 여자 애를 건들다니 정말 창피해서 살수가 없어요."
 거기서 멈추어야 했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손길에서 벗어 날 작은 희망이 있었을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더 이상 아버지란 사람이 무섭지 않았다.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 위에 군림하면서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던 그가 혐오스러웠다.

 세준은 이현의 매니저가 전화하자마자 회의까지 취소하고 자신의 원수 같은 장인의 회사로 왔다. 이현은 그의 은인의 동생이었고, 친구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가족과 특히 어린 이현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었기 때문에 세준은 이현의 가족의 일이라면 거의 일순위로 생각할 정도로 정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왔다.
 이현이가 무사하지 않는 다면 어수룩한 매니저를... 아니 이미 그 매니저는 해고였다. 우선은 색마인 김진만 사장에게서 이현을 구해와야만 했다. 그렇게 주위를 시켰건만 이현을 그의 손에 맡기고 나왔다는 매니저를 도저히 용서 할 수 없었다.
 세준이 은밀히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그의 장인은 많은 연예인들을 섭렵했고, 그 보다 더 한 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에게 여자를 넘긴다는 거였다. 얼마 전 사라진 미유는 그런 김진만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최고의 전성기를 과감히 버리고 이민을 갔었다.
 "현아?"
 세준은 울면서 뛰쳐나오는 이현을 품아 안고 이러 저리 살펴보았지만 자신의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아 우선 안심이 되었다.
 "어서 나가자, 김 사장은 나중에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저...저기."
 이현이 뭔가 말하려는 데 이현이 나온 코너에서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에 단단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혜란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으면서도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 넘보는 것도 막지 못했나? 이제 당신도 늙었나보지."
 이런 추악한 자리에 혜란이 까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세준의 얼굴은 무서우리 마치 굳게 굳어졌지만 다들 같은 생각으로 바쁜 여자들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헉헉,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안에 태림이가....."
 태림이...
 태림이가 자신의 아버지의 나쁜 버릇을 보고 상처받았을 걸 생각하니 그의 가슴이 아려왔다. 하지만 혜란의 공포스러운 목소리는 그런 감정을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세준은 싸늘해져 가는 가슴을 느끼며 와본 적이 있는 김진만 사장의 사무실로 발길을 재빨리 옮기었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 같으니라고. 뭐가 어쩌고 어째. 너 오늘이 네 제삿날인줄 알아."
 와장창
 세준은 뭔가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와 고함을 지르는 김 사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발길을 더 재촉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세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태림이 자신의 손길만 닿아도 누군가 싸우기만 해도 움츠려 들고 주눅이 들어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가 있었다. 태림은 책상위로 떨어졌는지 사무용품과 함께 바닥에 엎드려 아니 팽개쳐 있었고, 김 사장의 손에는 허리띠가 감겨 있었다.
 몇 대나 맞았는지 모르지만 거의 실신해 있는 태림의 상태를 보면 이현이 뛰어나온 그 짧은 시간에 아주 효율적인 매질을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쓸데라고는 애 낳는 것 밖에는 없는 여자가 날 뛰는 걸 미리 잡지 않으면 나중에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되니 자네는 상관 할 것 없네."
 세준은 다시 한번 허리띠를 쥐어 드는 김 사장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움직인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걸 한꺼번에 후회하도록 해드리지요."
 아직 허리띠를 쥔 손을 허공에 둔 채로 멈춘 김진만 사장의 눈빛에는 세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광기가 어려 있었고, 그 눈빛에는 자제, 자비, 자식에 대한 조그마한 사랑도 없었다.
 "제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사장님도 예전의 그 혈기 왕성한 남자가 아니듯이 저 도 예전의 어수룩한 남자가 아닙니다. 확인하시고 싶으십니까?"
 김사장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진심을 담고 있는 세준의 어조에 손을 내렸다.
 "좋아. 내 자네의 얼굴을 봐서 참지. 이제 자네 사람이니까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교육시키겠지. 어서 데리고 가게."
 세준은 축져져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태림을 안아 들었다.
 "걱정하지 말게. 그 정도로 죽지는 않을 테니까. 한 숨자면 일어 날걸세. 매 집이 아주 좋거든."
 김진만 사장은 자신의 사위가 태림을 안고 있어 자신에게 어쩌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입을 함부로 놀렸다.
 세준은 태림을 안고 있지만 않다면 김진만 사장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릴 수도 있을 만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태림을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참았다.
 "다시 한번만 태림에게 손찌검을 하면 당신을 죽여 버릴 겁니다. 명심하십시오."
 "어디서 그런 협박을 해. 그 아이는 내 딸이야 그러니 나하고 싶은 데로 할 테니 그 꼴을 보기 싫으면 잘 지키게."
 "……."
 "그리고 난 김사장이 아니라 자네의 장인이네. 하하하."

 세준이 기절한 태림을 안고 복도로 나오자 어울리지 않게 발을 동동 구르던 혜란이 쏜살같이 달려와 그들 옆에 서서 태림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듯이 살펴보았다.
 "어머. 어떻게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난 그저 김 사장님이 이현에게 관심을 보이기에... 태림이 나타나면 뭔가 깨달을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로 이런 사람인줄은……."
 그제야 세준은 옆에서 태림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호들갑을 떠는 혜란을 바라보았다.
 "이현이는 먼저 갔어요. 도저히 여기 못 있겠다면서 집으로 간다고 전해 달래요."
 혜란이 세준의 눈빛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예전에는 그녀가 그의 눈빛 만 보아도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했다니, 태림이 이 상태만 아니었다면 웃음이 나왔을 것이다.
 "무슨 소문?"
 "김 사장님 나한테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어서 믿은 적은 없었지만, 소문에 손버릇이 매우 좋지 않아서 부인을 거의 하루건너 때린다고 했거든요. 정말이에요. 믿어줘요. 전 일이 이렇게 까지 될 줄 몰랐어요."
 세준은 안절부절못하면서 겁내하는 혜란을 남겨두고 승강기에 올라탔다.
 그럼 이런 짓이 처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김 사장이 허리띠를 들고 있는 순간에 앞 뒤 가리지 않고 그를 때려 눕혔어야 하는 건데.
 "집으로."
 이런 모습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분명 누군가 냄새를 맡는 다면 태림이 더 힘들어 질 거라는 생각에 세준은 집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세준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기사에게 다시 한번 주위를 주고 집안으로 향했다.
 "애가 왜 이런 다니?"
 김 사장은 정말 요령 있게 태림을 때렸는지 보이는 곳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나있지 않아 세준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피곤했다 봅니다. 학교에서 수업하다가 기절했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어머니의 눈빛은 태림이 못 마땅한 것을 감추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세준을 향한 사랑이 있었고, 그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준은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부모님의 정을 태림이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여러 가지로 널 귀찮게 하는 아이구나."
 그는 도와주겠다는 아주머니의 요청을 물리치고 조심스럽게 태림의 교복 단추를 풀러 내려갔다. 여학생들이 입는 얌전한 속옷만 남겨 놓았지만 팔과 다리에는 이미 검은 멍이 뱀이 휘감아 놓은 것처럼 그려져 있었다.
 연고를 꺼내든 세준은 나머지 옷들도 조심스럽게 벗기다가 가슴을 둘러싸고 있는 천을 보고 손길을 멈추었다. 언제 다쳤는지도 모르는데 태림의 가슴은 하얀 천으로 동동 싸여 있자 세준은 상처를 확인하기 위에 그것마저 풀러 내렸다.
 그는 결혼하고 나서도 장인의 매질이 처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가락이 뻣뻣이 굳어 감을 느꼈다. 
 하지만 다행이 그가 상상했던 상처는 없었다. 천을 풀자 보이는 것은 크림 같이 하얀 색에 부드러움을 가득 지닌 풍만한 가슴이었다. 세준은 그제야 태림의 가슴이 작아 보였던걸. 이해할 수 있었다. 체격에 비해 풍만한 가슴을 감추기 위해 항상 가슴에 천을 둘러왔던 모양이었다.
 혹시 등 뒤에는 상처가 없는 지 확인한 그는 뱀처럼 휘감긴 멍 자국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태림은 몸을 찌르는 화끈거리는 느낌에 잠을 편하게 잘 수가 없어 한참을 뒤척이다가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느껴지는 감각은 쑤지는 느낌과 코를 찌르는 듯한 파스 냄새였다.
 파스?
 그제야 혜란의 전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울고 있던 이현과 그 뒤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폭력이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기억은 전혀 없었고, 몸에 연고를 바른 기억도 없었다. 파스를 바르고 싶어도 냄새가 워낙에 독했기 때문에 학교에 바르고 갈 수가 없어 항상 아픈 채로 버티어야 했지만 지금은 평소처럼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일어나기 힘들면 일어나지 않아도 돼."
 세준의 음울하고 어두운 목소리에 태림은 팔을 괴고 상체를 일으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목소리만큼 어두워 감정을 알 수 없는 눈길로 태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태림은 그의 얼굴이 보기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이제 태림을 뭐로 보겠는가. 소리 한번 제대로 못 내고 젊은 여자들과 놀아나는 남편과 사는 엄마, 그것도 부족해 아내와 자식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가진 어린 아내.
 "처음 있는 일 아니지?"
 질문이었지만 질문이 아닌 확신하는 말투였다.
 "아.. 아니요."
 이 정도 맞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기절한 건 처음 있는 일이어서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세준의 낮아진 목소리는 그 말을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너 일어나는 것 봤으니 다시 회사에 나가봐야겠어. 얘기는 나중에 하자. 학교에서 기절해서 데리고 온 걸로 말해 놓았으니 쉬고 싶을 때까지 쉬어도 돼."
 혼자 있기 죽기 보다 더 싫었지만 분명 그녀 때문에 회사에 나가지 못한 세준을 잡기에는 그녀는 용기가 없었다.
 "학교에는 말해 놓을 테니까 웬만큼 나을 동안은 학교에 나가지마."
 이현...
 태림은 현의 이름이 떠오르자 뼈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다시금 떠올랐고, 이현의 얼굴을 다시 볼 것에 대한 공포에 의해 몸에 난 상처가 뱀이 되어 올라오는 듯한 오싹함이 끔찍하게 밀려 들어와 눈물이 흘러 이불로 입을 틀어막았다.
 
 세준은 태림이 눈을 띄자 밖으로 나왔지만 한동안 문고리를 놓을 수 없어 그 자리에 잠시 머물다가 태림의 쥐어짜는 듯한 울음소리를 듣고 자신의 가슴이 아려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들어가 그녀의 얼굴을 그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싶었지만 마음속에 쌓여 있는 김진만 사장에 대한 증오심이 그의 다리를 붙들고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태림이 일어나면 김진만 사장이 지금까지 해온 야만적인 짓을 추궁할 생각이었지만 공포에 차있는 태림의 눈동자를 보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맞고 살았냐고, 왜 참고 있었냐고 따지고 호통치고 싶었지만 선이 고운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감추고 세준의 눈길을 피하던 그녀의 안쓰러운 행동에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긴 손가락들이 누구를 위해, 누군가의 몸에 있는 상처를 위해 연고를 바른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태림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드러워 손길을 거두고 싶지 않던 그녀의 피부에 나 있는 멍 자국과 등에 나 있는 가느다란 상처들이 눈에서 잊혀 지지가 않았다.
 등에 있는 상처들은 이미 오래 전에 나서 아물어 있는 것들이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몸 구석구석에 연고를 바르는 친밀한 행동은 그 작은 상처들을 아무런 여과 없이 볼 수 있게 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딸꾹질이 이어지자 세준은 그제야 문고리를 놓을 수가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이현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밀려옴과 동시에 어떻게 세준이 그 자리에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나왔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는 분명 아버지에 대한 경멸감을 아무런 여과 없이 태림에게 들어내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아버지를 개인적으로 만나기 위해 왔다거나 사위 된 도리로 회사에 찾아 왔을 거라는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었다.

9


 이틀 만에 태림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학교에 등교를 했지만 세준은 말리지는 않았다. 더 누워 있고 싶어도 시어머니의 눈총에 불편했기에 얼얼한 사지를 겨우 추슬러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조금 더 쉬지 그러니 몸살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시아버지는 태림이 근력이 약해져서 기절한 거라고 생각하고 과일이나 뭐다 간식거리를 가득 사다주며 그녀의 건강을 걱정했다.
 "젊은애가 그 정도 쉬었으면 됐죠. 잘하는 것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 줘. 저 아이가 누워있으면 세준이가 회사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겠어요."
 태림은 몰래 역시 표정이 없는 세준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시어머니의 말뜻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맞은 날은 세준이 그녀의 곁에 잠시 머물러 일에 차질이 생겼다지만 다른 날들은 세준은 평상시와 별 다른 차이 없이 생활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의 일해 방해되었다는 말이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은 여전히 태림의 머릿속에서만 머물 뿐이었다.
 "늦겠다! 어서 출발해야지."
 "이 이는 내가 무슨 말만하면. 누가 부전자전 아니랄까봐 그런 건 꼭 닮아 가지고서는."
 시아버지의 나가라는 손짓에 태림은 세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저기 그 날 아버지 회사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세준은 출발할 때부터 살펴보고 있던 서류철에서 잠시 고개를 들고 태림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어두운 눈길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이현이 매니저가 전화했었어. 그 애 오빠에게 신세진 게 있어서 이현이 뒤를 내가 좀 봐주고 있거든."
 태림은 그의 입에서 더 많은 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그의 부드럽지만 냉철해 보이는 입술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애절한 눈길을 느꼈는지 세준은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을 했다.
 "군대에 갔을 때 내가 단체 생활에 좀 적응을 못한 적이 있었어. 그런데 내 고참이었던 현수가 그런 나를 항상 챙기면서 내무반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도와주고는 했지. 그는 제대하면서 꼭 밖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사고로 이 세상을 등을 졌고, 난 조금이나마 신세를 갚고 싶어서 그의 가족들을 돌보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는 듯이 세준의 눈길은 다시 서류로 향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가 사람보다 더 애지중지 하는 그 서류들을 찢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언제나 생각뿐이었다.
 태림은 그의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지나치는 거리의 풍경을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은 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세준은 그렇듯 열심히 살면서 남도 도울 줄 아는데, 자신의 아버지는 젊은 여자들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면서 그들의 인생을 짓밟는 일을 서슴없이 한 다는 게 자신을 용서 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역시 태림의 예상대로 이현은 태림을 바라보지를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태림은 그런 이현이의 눈치를 보며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이현의 표정은 무서우리 마치 싸늘했다.
 "태림이 왔구나. 몸은 어때, 얼마나 아팠기에 너 같은 모범생이 학교에 다 빠졌어. 괜찮은 거야."
 유정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태림에게 수선스럽게 다가와서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기도 하고 태림의 볼을 쓰다듬기도 했다.
 "괜찮아. 많이 좋아 졌어."
 "그래, 다행이다. 근데 니 짝꿍 표정은 왜 저래."
 유정은 귀엣말을 하며 턱으로 책만 바라보며 있는 현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가리켰다.
 "제 웃긴다. 언제는 저 만한 죽마고우는 없다는 듯이 행동하던 애가 오늘은 완전히 생판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구네. 싸웠어?"
 분명 유정의 목소리는 현에게도 들렸을 테지만 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민망한 태림은 다른 친구에게 노트 정리를 빌리러 가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정에게 계속 말을 하게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수업 내용을 놓쳐서는 안 된 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현의 태도가 신경이 쓰여서 책조차 읽을 수가 없었다. 숨 막히는 시간이 흘러갔다.
 태림은 노트를 맨 뒤로 돌려 현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TO. 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미안하다고 해야겠지?
 난 그곳에서 널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어, 아무리 속없는 우리 아버지 이지만 그런 짓을 하리라고는....
 정말 미안해, 우리 아빠를 용서해 달라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우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내는 거니.
 난 널 너무 좋아하는데, 지금까지 만났던 그 누구보다 더 널 사랑하고 아끼고 믿어. 우리 아버지가 밉고 용서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날 한 번만 용서해 줄래.
 지금까지 난 아버지를 사랑해 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어. 언제나 강압적이고 무섭기만 한 사람일 뿐이지. 지금도 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것 같아. 
 이해 할 수 있니.
 없을 거야, 이런 내 자신도 날 이해 못하니까. 너도 지금쯤은 세준 오빠와 내 관계를 알겠지.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닌데 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시집이란 걸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갔어, 아버지가 오빠에 대해 알려주기 전에 혼인 신고를 먼저 해버렸거든.
 지금 너에게는 오빠라고 쓰지만 아직까지 단 한번도 오빠라고 부른 적도 소리내어 이름을 불러 본적도 없어. 솔직히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잘 몰라.
 난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했어, 하지만 우리 엄마와 넌 정말로 날 걱정해 주고 사랑해 주었지, 난 너의 그 사랑이 너무 좋았어, 그걸 우리 아버지라는 인간이 망쳐 버린 걸 믿을 수가 없어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죽어버리라고, 우리 인생에서 제발 사라져 버리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불쌍한 우리 엄마 때문에라도 그럴 수가 없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엄마를 그 집에서 데리고 나오는 게 내 꿈이었어, 엄마가 더 이상 험한 꼴을 보기 전에 말이야. 그런데 그것도 안 돼.
 나 참 웃기지 안 되는 것도 많고 할 수 없는 것도 많고 내 인생은 끝나는 순간까지 이렇게 있으면서 변하지 않을 까봐 무섭다.
 내 소중한 친구인 현아. 날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날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줘, 그리고 내가 널 사랑하는 것도 잊으면 안 돼.

                                             너의 영원한 팬이자 친구인 태림으로부터


 태림은 편지를 다 쓰고 나서 현이 화장실에 갔는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현의 책상 서랍에 넣어 놓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편지를 발견한 현의 옆에서 그녀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무슨 답변을 할지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태림은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는 창가에 기대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유정은 하루 종일 틈만 있으면 태림과 현의 얼굴을 살폈다. 태림은 정말로 많이 아팠는지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고, 현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지 그 밉살스럽게 하얀 얼굴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유정은 단 한번도 태림에게 진심인적이 없었지만 현이 나타나 항상 자신에게 잘해주던 태림이 현에게 관심을 돌리자 화가 나고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태림은 내성적인 성격인 탓에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유정에게 잘 해주었고, 유정이 부탁하는 일이면 거절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는데, 현이 끼어들고 나서부터는 태림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자 단단히 삐쳐 있었다.
 사실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태림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건설회사의 사주인 태림의 아버지는 영향력이 많았기 때문에 유정의 아버지도 그의 연줄을 타고 언젠가는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꿈이었기에 그 집안의 외동딸인 태림에게 딸을 붙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태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유정은 태림이 노트 뒤에 뭔가를 열심히 적어서 현의 서랍에 집어넣고 나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유정은 남의 것을 몰래 보면 안 된다는 양심의 작은 소리를 무시하고 다른 친구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현의 자리 옆을 지나면서 일부러 연필을 떨어 틀렸다.
 "어머."
 유정은 친구들이 자신에게 별다를 관심을 가지지 않자 태림이 넣어두었던 쪽지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들었다.
 "너 내 자리에서 뭐 하는 거니?"
 "엄마야."
 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려보자 가슴이 찔렸지만 유정은 가슴을 내밀고 섰다.
 "연필 떨어트려서 좀 주었다. 왜 톱스타 자리에는 그런 것도 떨어지면 안 되니."
 "누가 그런다고 그랬어. 다 주었으면 좀 비켜 줘. 가방 싸야 하니까."
 "알았어. 좋겠다! 촬영 핑계 치고 수업 안 들어도 되잖아."
 유정은 현이 가방을 챙기기 위해 다른 곳에 눈길을 둘 때 쪽지를 손바닥 안에 꼭 쥐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했다.
 "잘 다녀와."
 "니가 웬 일이니. 나한테 인사를 다 하고."
 '이그, 정말 밉살스러운 계집애라니까. 쪽지만 아니었으면 너한테 말도 안 붙인다 내가. 도대체 태림이는 이런 새침데기가 뭐가 좋다는 건지.'
 "애도 같은 반 친구끼리 그 정도 인사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유정은 다리가 떨려 더 이상 서 있을 자신이 없어지려고 하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무슨 내용일까.'
 편지를 다 읽은 유정의 얼굴은 파리해 졌고, 두 손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그런 유정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유정의 표정은 독을 쏘기 위해 준비하는 독사처럼 두 눈에 가득 독기를 머금고 편지를 사정없이 구겨버리고 있었다.
 "김태림 널 용서 할 수 없어. 어떻게 감히 네 가지께 세준 오빠의 아내가 될 수가 있어. 어떻게 날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 널 용서 못해. 세준 오빠를 너한테 절대로 줄 수 없어. 세준 오빠는 내 꺼야. 너 같이 세상 물정 모르고 세상의 깨끗함이 다 내 것인 냥 하는 애는 세준 오빠를 가질 자격이 없어."
 전에 태림이 등교 길에 바바리 맨 때문에 놀랐을 때 그녀를 도와 준건 분명이 세준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태림은 가증스럽게도 뻔뻔스럽게도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그 사람 예전에 유정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사진 보여준 남자하고 닮았던 것 같아."
 "정말?"
 유정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져 태림을 바라보았다. 태림은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천역덕 스럽게 거짓말을 둘러댔다.
 "아니야. 우리 오빠 미국에서 들어 온지 얼마 되지도 않는 걸. 아마 좀 닮았나 보다."
 유정은 태림이 자신을 가장 소중히 아끼는 친구가 아니라는 건 상관하지 않았고, 그런 것에 상처받지도 않았다.
 유정은 현의 뒤에 세준이 있다는 걸 아버지를 통해 잘 알고 있었기에, 현이 잘 아는 세준 오빠라면 무성전자의 정세준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나중에 자신이 세준의 아내가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을 그의 곁에서 때어 놓는 것이 유정의 계획이었다.
 태림이 자신을 기만했다는 걸용서 할 수가 없었다. 세준 오빠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말했을 때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고 비웃었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쫓아가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도 세준과 태림의 결혼이 알려지는 것이 이득이 되지 않는 다는 걸 깨닫고 죄 없는 편지를 꼬깃꼬깃 만들었다.

 태림은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으면서도 한기가 들어 팔뚝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태림은 교실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가방을 매고 자신의 옆을 싸늘한 시선으로 지나가는 현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하지만 현은 멈추지 않았다.
 태림은 옆을 지나가는 현과 함께 자신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현이 자신의 곁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나간 그 순간부터 태림의 하루는 편지를 쓰기 전보다 더 엉망이 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10


 그 날 이후 현은 학교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친구들이 알려주는 현의 드라마데뷔와 가수로써의 출발한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현이 자신을 피하기 위해서 학교에 오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태림아. 너 요즘 너무 외로워 보인다."
 태림은 자신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기 시작한 유정이 갑작스레 친근하게 대하자 혼란스러웠지만 유정에게 그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내가? 아니 괜찮아."
 외로웠다. 뼈에 사무칠 만큼.
 보고 싶은 엄마와 전화통화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시아버지의 사랑이 있지만 시어머니와 가장 중요한 남편의 관심을 받지 못해서 힘들었고, 마음을 의지하게 된 이현이 곁에 없어서 외로웠다.
 "뭐가 괜찮니, 얼굴에 외롭습니다! 라고 쓰여 있는데, 오늘 수업 끝나고 내가 빵 사줄게 나랑 같이 놀자."
 "그게..."
 "나가자. 우리 고3되고 나서는 떡볶이 한번 먹으러 간 적 없는 거 너 아니?"
 유정이 태림의 팔에 손을 감고는 애교스러운 눈웃음을 해 보였다. 순간 태림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수업이 빨리 끝나는 날이고, 한번쯤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좀 늦는 게 어떠냐. 라는 생각이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가자. 응!"
 유정은 언제나 그렇듯이 애교를 부릴 때면 태림의 팔에 매달려 남들이 거부 할 수 없는 눈빛을 보내며 자신의 뜻을 관철 시켰다.
 "그래."
 "아이 좋아. 그럼 조금 있다가 같이 나가자."
 "응."
 
 태림은 가방을 정리하면서 유정과의 약속을 후회했다. 시간이야 있지만 별로 좋지 않은 기분으로 유정과 앉아서 별로 영양가도 없는 대화를 나누며 시시덕거리는 것이 지금은 그다지 좋은 결정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림은 유정에게 어떻게 말해야 유정이 속상하지 않고 약속을 깰 수 있는지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태림아. 가자."
 "어?.…….엉."
 태림의 목소리는 분명 얼버무리며 주저하는 목소리였지만 유정은 그걸 듣지 못했다는 듯이 왜 그러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고 태림을 자신의 목적지로 데리고 갔다.
 "우리 정말 오랜만에 나온다! 그치?"
 "그래."
 "나오니까 좋지 않니."
 "좋아."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과 많은 학생들이 활기차게 걸어가는 모습들을 보자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빵집에 가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정이 빵집에 가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선생님과 어른들 몰래 하는 미팅을 하기 위해서였다. 태림은 시집을 가지전에도 집에 있는 엄마가 걱정되어 항상 하교 즉시 집에 가는데다가 미팅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아 한번도 한적히 없었다.
 "우리 그냥 분식집에 가면 안 될까. 너 떡볶이 좋아하잖아. 내가 사줄게."
 "안돼. 우린 무조건 빵집으로 가야 돼. 내가 아침에 아줌마한테 제일 좋은 자리로 예약해 놓았단 말이야. 빨리 가자."
 "그래. 알았어."
 태림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걷는 유정의 빠른 걸음걸이에 발을 맞출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유정은 학교 근처에 있는 빵집을 지나쳐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려고."
 "여기 빵집은 빵이 맛이 없어. 저기 정거장 있는데 빵집은 카스텔라가 거의 예술이야.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신경도 안 써."
 
 "다 왔다. 어서 들어가."
 유정이 데리고 온 빵집은 학교 앞에 있는 빵집보다 더 규모가 컸고, 친구들끼리 놀러 와서 편하게 이야기하고 가도 좋을 만큼 공간이 효율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가게 안에는 벌써 학생들이 앉아 있었고, 여학생끼리 앉은 곳은 반대쪽에서 미팅을 하고 있는 팀을 보며 열을 내며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 앉을 까?"
 "거기 말고……."
 태림이 빈자리를 둘러보고 있는데 유정이 그녀의 손을 이끌고 이미 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저기는 손님이 앉아 있잖아. 자리가 또 있어?"
 태림은 혹시 코너에 숨겨진 자리가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했지만 유정은 여지없이 태림을 손님들 앞에 앉게 했다.
 "유정아!"
 유정을 미처 말리기도 전에 한 남자가 유정을 불렀다.
 "유정이 왔구나."
 "응. 오빠. 정말 오랜만이야. 여기 이분이 오빠가 말한 친구 분이야."
 태림은 그들이 하는 대화를 그저 입만 뻥긋거리며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내 친구 김 태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두 남자 모두 길거리에서 봤다면 다시 한번 고개를 돌릴 만큼 잘 생겼지만 태림은 이 자리가 바늘방석 보다 더 어려웠다.
 "네에... 안녕하세요. 유정아 이게 뭐야."
 하지만 유정은 태림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들을 소개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기는 서울 대 다니는 오빠들이야. 우리 태림인 이런 자리 처음이니까 잘해 줘야해요."
 "그래요. 태림씨 유정이 말대로 정말 미인이네요."
 "태림씨는 무슨, 그냥 태림이라고 불러 오빠."
 "그럴까. 그럼 우리야 편하지 그렇지 않나. 상원아. 아참! 그러고 보니 오늘의 남자 주인공을 소개시키지 않았네. 네가 알아서 해라."
 "안녕. 난 윤상원이라고 해. 만나서 반갑다."
 태림은 우려했던 것에 비해 상원과의 만남이 싫지 않은 자신의 감정에 놀랐다. 다른 걸 다 내버려두고라도 세준의 아내로써 그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남자와 이렇듯 편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태림을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했다.
 "걸으니까 좋다."
 "네."
 그들은 유정의 일행과 헤어졌고, 한동안 사람들의 틈에 섞여 조용히 걸었다.
 "태림이 좋아하는 사람 있니?"
 "네."
 상원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에 진실을 이야기했다. 자신은 편한 마음이지만 상원이 그렇지 않다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태림은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구나. 태림인 너무 솔직한데. 그래도 우리 좋은 친구 사이처럼 오누이처럼 이렇게 지낼 수 있지."
 태림은 맑은 미소를 띠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미소에서 세준에게서는 보기 힘든 따뜻함이 태림의 주저함을 녹여버렸다.
 "그래요."
 부모님이 엄하다는 태림의 말에 상원은 태림의 동네 근처에서 작별인사를 했고, 다음 약속 날짜를 잡았다.
 "꼭 나와야해. 알았지. 꼭이다."
 먼저 가라는 상원을 보낸 뒤 집으로 들어온 태림은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세준을 보고 놀라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왔으면 빨리 들어올 것이지 현관에서 멀뚱하니 서서 뭐 하는 거야."
 "아! 네.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네요."
 결혼 생활 동안 처음으로 세준이 태림보다 일찍 들어왔다. 단 한번도 없었던 일에 태림은 자신이 오늘 한 행동에 대한 벌 같이 가슴이 철렁거렸다.
 "작은 사모님 들어왔네요. 어서 씻고 내려오세요. 식사 하셔야죠."
 "네."
 세준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태림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태림이 이처럼 밝은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별로 본적이 없다는 자각에 놀랐고, 태림이 자신이 배제된 곳에서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뭔가 식도에서 걸린 것 같은 불쾌함이 들어 다시 한번 놀랐다.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세준은 이미 태림에게 특별한 감정이 자라고 있었다.

 처음 만남, 그 뒤로 시간이 될 때 그들은 만나 태림의 동네 어귀까지 같이 걷는 것을 즐겼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도 다 왔구나. 너랑 걷는 이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지나 가는지 모르겠다."
 동의하는 마음에 태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림은 상원이 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고, 그녀와 헤어짐이 아쉬운지 자꾸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가요."
 "그래 3일 날 보자."
 "네."
 드디어 상원이 사라지자 태림도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세준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실이 아니라거나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원과의 만남은 답답한 태림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시간이었기에 좀처럼 포기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끼이익
 경쾌한 타이어 소리와 함께 눈에 익은 차가 태림의 옆에 섰다.
 "이제야 집에 오는 거냐?"
 태림은 날카로운 세준의 눈빛에 주눅이 들고 마음이 떨려 상원이 간 길로 자꾸 눈길이 갔다.
 "네."
 "타. 요즘 잘 늦는 다면서?"
 "독..서실에 좀 다녀오느라고요."
 세준은 자신의 눈길을 평상시 보다 더 피하는 태림이 의심스러웠다.
 "그래."
 태림은 세준이 별 다른 의심을 하지 않자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림이 요즘 얼굴이 좋아 보이는 구나."
 "아이는 언제 가질 거냐?"
 태림과 남자들은 갑작스러운 말에 밥을 먹던 손길을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태림을 못마땅해 하던 시어머니가 태림에게 손주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 놀라울 만도 했다.
 "당신이 무슨 일이요?"
 "내가 못 할말 했어요. 왜 다들 토끼 눈이 되어 가지고서는...."
 "태림이는 아직 학생입니다."
 "그래도 우리 집안 며느리 아니냐. 이왕에 며느리가 되었으면 대를 이어야지. 뭐 금방 애가 들어 설 것도 아니니 노력은 해봐야 할 것 아니냐."
 태림은 식사 식사시간에 시어머니가 떨어 틀어 놓은 폭탄선언에 몸 둘 바를 몰라 세준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고,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심장이 떨려왔다.
 세준과 방에 함께 들어가는 것도 그의 옷깃이라도 스칠세라 태림은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긴장 할 것 없어. 아직은 아이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갑작스런 어머니의 심중 변화에 나도 좀 이상하지만 우리가 아직 계획이 없는데, 강요하시진 않으실 거야. 먼 저자."
 "네."
 태림은 세준의 말이 서운한 건인지 다행스러운 건지 가늠 할 수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세준의 아이를 가지고 싶은 본능이 그녀의 마음속을 흔들어 놓고 있었던 거였다.
 
 시어머니가 아기 이야기를 한 뒤로 세준은 태림이가 잠든 후에 방에 들어왔고, 태림이가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맞춘 후 남은 시간을 서재에서 보냈고, 그의 그런 행동이 태림을 더욱 외롭게 했다.
 현의 얼굴을 거의 볼 수 없었고, 유정도 상원과의 만남을 이어준 뒤 이상스러울 정도로 태림을 멀리 하는 것 같았지만, 태림은 세준에 대한 생각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약속한데로 태림은 상원을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로 나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어디 가니?"
 "네?"
 깜짝 놀라는 태림의 행동에 세준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 가는 길이냐고. 집에가?"
 "아..니요. 친구 만나러가요."
 태림은 남자지만 오누이처럼 지내기로 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며 자신의 양심을 다독거렸다.
 "누구?"
 세준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자 당황한 태림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떤 친구 만나러 가냐니까?"
 "학교 친구요. 같은 반이에요. 유정이라고 있어요."
 "그래. 친한 친구니?"
 "네."
 태림은 얼굴이 붉게 되는 걸 느끼고 얼굴에 손바닥을 올리지 않으려고 주먹을 꼭 쥐었다.
 "너무 늦지 마."
 "네. 일찍 들어올게요."
 어차피 태림이 집에 있다고 해서 자신이 너 잘해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집에 있는 시간에 태림이 없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세준은 태림이 처음 외출한다는 걸 알면서도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하고 말았다.
 
 태림은 상원을 만나러 가면서도 세준의 날카로운 눈길에 아직까지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기야. 태림아."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아주 조금 기다렸어."
 상원은 편안한 웃음으로 태림을 반겨 주었다.
 "우리 어디 갈까?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아니요. 전 잘 몰라요."
 "음... 그래. 그래도 잘 생각해봐. 오늘은 태림이가 하고 싶은 건만 하자."
 태림은 자신을 위해 주는 그의 말이 너무 고마웠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뭘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는지를 떠올렸다.
 "저……."
 "말해봐."
 상원은 머뭇거리는 태림이 용기를 내도록 기다렸다.
 "동물원에 가고 싶어요."
 "동물원?"
 "너무 아이 갔죠. 다른데……."
 "그래 가자."
 태림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걸렸고, 그 미소에 상원의 가슴은 설레었지만 태림은 알지 못했다.
 어릴 적 친구들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동물원에 갔다왔다면서 자랑 할 때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랐다. 아버지는 가족과의 시간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동물원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어느 날 엄마는 여진언니와 태림이 동물원에 가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그들을 동물원에 데리고 나왔는데, 동물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과 반대로 그 날에 집은 악몽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고, 가고 싶어 한 여진과 태림에게 손찌검을 했었다.
 태림은 고개를 흔들어 어린 날의 암울한 기억을 지워 버리려 노력했다. 상원이 그녀에게 이토록 신경을 써 주는데 어두운 생각을 하는 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1


 세준은 처음으로 주말에 태림이가 없자 그녀의 빈자리에 대한 허전함을 느끼고 놀라고 짜증스러웠다.
 언제부터 그녀의 존재가 중요했던가?
 왜 그녀가 없다는 그 자체로 집에 있는데도, 다른 곳에 홀로 와 있는 느낌인가?
 세준은 그 생각에 거울에 비춘 자신의 눈을 한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세준과 태림이 쓰는 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화는 태림이 친구들에게 연락을 받을 지도 모른 다면서 아버지가 새로운 번호로 만들어준 전화였다.
 세준은 잠시 받을 까말까 망설였지만, 누군가 물어봐도 사촌오빠라고 대답하면 될 거라 생각하며-그의 마음속에는 태림에 대한 것을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수화기를 집어 올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누구십니까?"
 -전 태림이 친구 유정인데요.-
 말을 낮추어도 상관없지만 아내의 친구라는 생각에 말이 편하게 나오지 않았다.
 -태림이 집에 있나요?-
 세준은 유정이라는 말에 얼굴과 수화기를 잡은 손에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아니요. 나갔는데."
 세준의 목소리는 위험스러울 치 만큼 낮아졌지만 상대편은 그걸 알리 없었다.
 -어머. 그래요. 그럼 같은 반 친구에게 전화 왔다고 전해 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요."
 세준은 거의 기계적으로 대꾸했지만 전화기를 내려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유정은 자신의 목소리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준도 미웠다. 자신의 존재가 이렇게 하잘 것 없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고, 이제는 태림에게 세준을 뺏어 온다는 것과 같이 세준에 대한 배신감에 그들을 부부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태림 보다 더 먼저 그녀가 먼저 세준을 좋아했고, 마음에 담았다.

 세준은 집으로 돌아온 태림의 얼굴을 그녀가 눈치 못 채게 요모조모로 살펴보았다. 언제나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린 그는 그녀의 변화에 민감했고, 오늘도 역시 그가 일찍 돌아 왔을 때처럼 태림의 얼굴에서 뭔가 다른 것을 보았다고 맹세 할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목소리도 밝았다. 하지만 세준은 언제나 학교와 집만을 다니며 빡빡한 일상을 보내는데다가 아직 어린 나이에 하는 결혼생활에서 어쩌다 한번쯤 친구들과 놀러 다닌 다고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왜 만나는 친구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유정이하고 있다가 오는 길이야?"
 "네? 아 네."
 세준의 눈에 태림은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눈빛이었지만 심증만으로 그녀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고, 그런 의심으로 아직 시작하지 않는 그녀와의 관계를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께 요즘 연락 자주하고 있지."
 태림은 갑자기 엄마에 대해서 물어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처음 말보다 그녀를 더 놀라게 했다.
 "네. 아까도 통화했어요."
 세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직 부모님들의 만남은 피하고 있었다. 김진만 사장을 만나는 건 사업상의 문제라 별것 없을 수도 있지만, 태림의 어머니를 만나는 것 다른 꼬리표가 붙을 가능성이 있었다.
 "안부 전해드려. 피곤하겠다. 올라가서 쉬어."
 "네."
 
 태림은 세준의 눈빛에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고, 눈치 챌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태림은 찜찜한 기분을 풀기 위해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 태림은 놀랐다. 그녀의 볼은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한 번의 외출이 몇 시간의 즐거움이 이토록 많은 변화를 불어 일으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태림은 젖은 머리를 말리며 욕실 밖을 나왔다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세준의 눈길에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세준은, 적어도 그녀가 방안에 있을 때에는 소파에 앉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그녀가 자는 소파에 걸터앉아 욕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저한테 뭐라도 묻었나요?"
 태림은 벽에 걸린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혹시 옷이 이상한가 싶어서 옷까지 확인했지만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내려가서 밥 먹자."
 "네."
 돌아서서 나가는 세준의 뒷모습에 태림은 상원과의 만남을 그만 두어야 겠다는 자각이 강하게 들었다. 세준에게 아무리 어리고 철없는 신부라지만 그 신부가 남자를 친구로 두고 몰래 만나는 걸 좋아할 리는 없다는 걸 방금 그녀를 바라보는 강한 눈빛에서 알았다.
 용서란 없는 눈빛. 꼭 사물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아버지의 잔인한 눈빛보다 더 무서웠다.

 "어제 재미있었어?"
 유정은 학교에 오자마자 태림에게 달려와 어제 상원과의 만남에 대해서 물었다. 태림은 상원이 만나자고 청하자 그를 소개 시켜준 유정에게 말했고, 부탁했었다.
 "어."
 태림의 짧은 대답에 유정은 태림의 정수리를 흘겨보았지만 떨어진 볼펜을 줍던 태림은 그녀의 시기 어린 눈빛을 보지 못했다.
 "어디 갔었어."
 태림은 유정의 목소리에 친구들이 엿들을 까봐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데었다.
 "동물원."
 "동물원?"
 "응."
 "얘 하필이면 왜 동물원이야. 음악 홀도 있고, 더 좋은 데가 얼마나 많은데."
 "그냥 동물원이 가고 싶었어."
 "넌 참 별난 애인 것 같아. 가질 것 다 가지고서도 부족해하니 말이야."
 태림은 처음으로 유정이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유정은 현처럼 태림의 내면을 본 것이 아니라 그녀의 보이는 모습과 아버지의 영향력만을 보고 태림을 판단해 온 것이었다.
 그 깨달음이 더욱더 현의 빈자리를 크게 했다.
 "요즘 텔레비전 보니?"
 "아니. 뭐 재미있는 거 해?"
 "난 별로 재미없는데, 다른 사람은 재미있다고 하더라. 현이 나오는 거야."
 태림은 현이 나온 다는 말에 기쁨이 몰려왔다.
 "현이 주인공이야?"
 "아니 주인공은 아니야. 주인공 여동생으로 나와서 쏠쏠하게 나오더라."
 태림은 텔레비전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저 유정아? 부탁이 있는데."
 "뭔데?"
 태림은 힘들지만 그리고 더 외롭겠지만 상원과의 만남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했다. 가능한 빨리.
 "상원오빠에게 이제 나 못나간다고 말해줄래. 사정이 생겼다고."
 유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왜?"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나... 상원오빠가 참 편하고 좋지만 오빠를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그런 마음으로 만나면 안 될 것 같아서. 부탁해도 될까?"
 "그래. 네가 그런 마음이라면, 하는 수 없지 하지만 네가 직접 말하는 게 좋지 않을 까."
 "그렇겠지?"
 태림은 하늘을 내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 태림의 가식적인 모습에 유정은 손톱자국이 나도록 주먹을 꼭 쥐었다.
 "그래. 하지만 내가 운만 띄워 놓을게."
 "아내야. 네 말대로 내가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이 말이 나온 후로 시어머니는 확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많이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가끔은 태림의 학교생활을 물어오기도 하고 태림에게 필요한 옷이며 생활 용품을 직접 사다주는 애정을 보여줘 태림을 기쁘게 했고, 그런 가족들의 행동들이 상원을 만남 태림의 마음에 더욱 상처를 내고 있었다.
 상원과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먼저 나와 있던 태림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정리했지만, 생각처럼 쉽게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아 걱정스러웠다.
 "먼저 나와 있구나."
 "네."
 상원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갸름한 얼굴의 태림을 내려다보았다. 태림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도, 그녀의 마음에 이미 다른 사람이 차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녀가 자신과 있을 때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좀처럼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정리 할 수가 없었다.
 "무슨 걱정거리 있니?"
 태림은 상원의 날카로운 관찰에 놀랐다. 하지만 결정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너무 갑작스럽다는 건 알지만……."
 "뭔데?"
 그렇게 물었지만 상원은 태림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우리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아요."
 "왜?"
 "……."
 "우린 그냥 좋은 친구 사이처럼 만나기로 했잖아."
 그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그런 사이라도 유지 할 수 있다면 그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전에 말했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요."
 "알아."
 "그 사람이... 저 때문에 마음 상하는 거 싫어요."
 "난 괜찮고?"
 "죄송해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시선을 피하는 태림을 상원은 안타깝고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강요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만 가볼게요."
 "잠깐만."
 상원은 발길을 돌리려는 태림은 불러 세웠다.
 "그럼 우리 마지막으로 함께 걷지 않을래?"
 태림은 상원의 따뜻한 눈길에, 그의 목소리에 차마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내내 걸어오면서 태림은 상원과 마지막으로 함께 걷는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좀 전에 헤어졌다면 이런 서먹한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거라는 깨달음이 태림의 머릿속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세준은 오늘도 태림이 집에 들어와 있지 않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태림을 기다리는 것도 싫지 않았지만, 그가 왔다는 걸아는 즉시 방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는 그녀의 모습이 더 그리웠다.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네. 작은 사모님이 오늘은 좀 늦으시네요."
 "어제는 일찍 들어 왔었나요?"
 "네. 요즘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들어오셨어요."
 세준은 혼자 방으로 들어가면서 태림이 항상 자는 소파를 먼저 바라보았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자 세준은 태림의 전화이기를 바라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전 태림이 친구인데요.-
 세준은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이에 맞지 않게, 꼭 혜란 처럼 가르랑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 인지 알았다. 바로 지난번 전화했던 유정이라는 친구였다.
 세준은 그 유정이라는 친구가 창사 기념일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왔던 그 유정이라는 아이가 생각이나 싫었다. 목소리도.
 "태림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는데."
 -어머! 정말요? 진작 집에 간다고 갔는데……. 무슨 일이지?-
 "집에 일찍 간다고 했다고?"
 -네. 오빠 일찍 들어온다고 빨리 갔는데, 어! 이상하다. 태림이가 집에 늦게 들어갈 애가 아닌데.-
 "알았어요. 고마워요. 곧 들어오겠죠."
 세준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양복 상의만 벗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유정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마치 쥐를 코너에 몰아넣은 고양이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준을 가지지 않아도 좋았다. 하지만 태림이가 그를 가지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세준은 무작정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태림을 동네 어귀에까지 걸어가서 기다렸다.
 지난번에도 거의 이 시간 무렵에 들어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가 예상한 시간 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 태림이의 모습이 누런 가로등불 아래로 보였다. 하지만 태림이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태림과 말쑥하게 생긴 남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태림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남자는 어두웠지만 애절해 보였다.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보던 태림은 눈물을 훔치는지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그 모습이 세준의 야성적인 본능과 거의 사라졌다고 믿었던 쓰라림이 드러나게 했다.
 다시는 그런 꼴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그에게 그런 상처를 쥐어 주었던 딸에게 말이다.
 태림은 상원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쉽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기에 뒤돌아서 집으로 향하는 세준의 모습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12


상원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어깨가 축 처져버린 태림은 세준에게서 풍기는 어두운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입맛이 없었지만 의무적으로 참석한 저녁을 마치고 태림은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잘거니?"
 "네."
 태림은 무슨 일인지 서재로 가지 않은 세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의를 벗은 채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리와."
 "네?"
 "들었잖아. 두 번씩 말하게 하지 마. 짜증나니까."
 하지만 세준의 목소리는 자신의 감정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낮게 흘러 나왔다.
 태림은 그의 말대로 세준 앞에 섰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어두운 눈길에 몸을 떨렸다.
 "왜 부르셨어요?"
 단 한번도 세준은 침대 근처로 그녀를 부른 적이 없었다.
 "벗어."
 "네?"
 또 한번의 반문에 세준이 침대에서 일어나 태림을 어둡고 강렬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넌 내 아내잖아."
 "네."
 "그러니까 벗으라고."
 태림은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었지만 세준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왜 마음에 안 들어. 그럼 헤어지자. 당장 짐 싸서 네 집으로 돌아가."
 태림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그의 말투와 표정은 진실이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빨리 결정해."
 "……."
 태림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세준이 그녀의 곁을 지나 가려했다.
 "잠....깐 만요."
 태림의 부름에 세준이 멈춰 섰다.
 그녀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유도 엄마도, 세준도 모두 다 잃게 되는 걸 태림은 잘 알고 있었고, 세준을 잃고 싶지 않았다.
 "욕실에서 벗고 와도 될까요?"
 태림은 간절한 눈빛으로 세준을 바라보았다.
 "아니 여기서 벗어. 네가 누구의 아내인지 잊지 않도록."
 태림은 그의 말에 그가 상원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보았지만, 그가 상원에 대해서 어떻게 알겠는가?
 세준은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는지 다시 침대에 앉아 단 한번도 다른 곳에 눈길을 주지 않고 태림이 옷을 스스로 벗기를 기다렸다.
 여자들 틈에서 말고 남 앞에서 옷을 벗어 본적이 없는 태림의 손끝은 심하게 떨려서 단추를 푸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세준은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실 태림은 아직 남자의 손길로 옷이 벗겨질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겨우 상의를 벗고 치마를 벗자 태림에게 남은 것은 팬티와 다른 여학생에 비해 풍만한 가슴을 가리기 위해 감아둔 붕대만 남았다.
 "기다려."
 태림은 옷을 벗는 도중 처음으로 세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할게."
 세준은 이렇게 서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태림을 잃을 까봐 그녀가 그에게 영원히 마음을 주지 않을 까봐 겁이 난 나머지 그녀에게 그를 강요하고 있었다.
 "네?"
 태림은 다 커서 왜 옷을 벗는 걸 도와준다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요?"
 떨렸지만 너무 이상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질문이 웃겼는지 세준이 오늘 처음으로 피식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세준은 태림의 손을 들게 한 후 천천히 그녀의 가슴을 속박하고 있는 붕대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이 계속 될수록 태림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지만 세준은 태림를 애절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남자가 생각이나 감정을 잘 조절 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다시 한번 세준의 눈앞에 태림의 풍만한 가슴이 보였지만 태림은 처녀의 본능으로 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세준은 그녀의 손을 치우는 대신 그녀의 무릎 뒤로 손을 올려 그녀를 안아 올렸다.
 "어?"
 "가만히 있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세준은 감정의 소용돌이와는 다르게 태림을 부드럽게 다루려고 노력했다.
 태림을 내려놓은 세준 역시 바지를 벗고 그녀와 같이 팬티만을 남겨 놓고 태림의 옆으로 가서 몸을 뉘었다.
 태림은 팔과 다리에 세준의 팔과 다리가 닿자 소름이 사르르 돋았지만 그의 몸을 피하지는 않았다. 언제가 일어날 일이라는 걸 조금은 알고 있었다. 단지 시기를 몰랐을 뿐이었다.
 세준은 태림의 위로 올라와 상체를 자신의 팔로 지탱한 체로 태림을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비다가 그녀의 팔을 그의 몸으로 두르게 한 뒤 그녀의 하얀 가슴이 그의 가슴과 눈 안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미 흥분한 그와 다르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준은 그것이 순수한 그녀로써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걸 알았지만 혹시나 그녀의 마음속에 그 남자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솟구쳐 오르는걸 막을 수가 없었다.
 "미팅 해봤어?"
 세준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다.
 "……. 네."
 세준은 진실을 말하는 태림의 눈을 드려다 보다 맥이 팔딱팔딱 뛰는 것이 보이는 그녀의 긴 몸에 입술을 묻었다.
 "어땠어."
 "잘 모르겠어요. 하려고 한 게 아니어서…….흠음"
 태림은 귓불과 목을 배회하는 그의 입술의 감촉과 가슴을 누르는 그의 가슴의 감촉에 겪어 본적이 없는 뭔가가 몸속에서 일어나는 걸 느꼈다.
 "느낌이... 정말 이상해요."
 세준은 태림이 발가락을 꼬물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만난 사람 어땠어?"
 "친철한... 사람이었어요."
 태림은 가슴을 입술로 지분거리는 세준 때문에 말을 더듬거렸지만 세준은 입술과 함께 손을 이용해 태림의 가슴을 점령해 나갔다.
 "또 보고 싶어?"
 "아니요."
 오빠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태림은 자신의 가슴을 아이처럼 만지는고 빠는 세준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말을 삼켰다.
 "잠...깐 만요."
 태림은 팬티 선을 따라 움직이는 세준의 손길에 놀라 손으로 그의 손길을 저지했다. 하지만 세준은 그런 태림의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한 손으로 잡은 뒤 입술과 손으로 그녀의 몸을 마음껏 점령해 갔고, 태림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면 팬티까지 그녀의 몸에서 치워버렸다.
 아름다운 나신이 완전히 드러나자 세준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매혹되었고, 태림은 반대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 무릎을 세우려고 했지만 세준의 행동이 더 빨랐다.
 이제 그녀의 다리사이에 자리 잡은 세준은 그녀의 손목을 놓아 쥔 뒤 그녀의 입술 목 가슴 배까지 손과 입술이 가지 않는 곳이 없게 만들었다.
 "팔을 내 목에 둘러."
 세준은 한 여자가 완전히 자신의 여자가 되어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게 이렇듯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드리라는 걸 혜란과 만날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태림은 그의 손길이 어색하고 창피했지만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아무도 심지어는 엄마조차 커서는 만져 본적이 없는 곳에 손을 대려고 하자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세준의 손에 의해 다시 눕고 말았다.
 "거기는... 제발요."
 세준은 태림이 아무것도 모른 다는 걸 다시금 깨닫고 손길을 거두었다.
 "다음에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말릴 생각하지 마."
 "알았어요."
 태림은 다음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할 거라 다짐했지만 우선 그의 손이 그곳에서 벗어나자 뭐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준은 입과 손으로 최대한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 자제력을 총동원해야 했지만 즐거웠다.
 그의 노력이 효력을 보이는지 태림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몸이 본능적으로 들썩거렸지만 그녀 자신만 그 사실을 몰랐다.
 "다시는……."
 "네?"
 태림은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과 가슴을 배회하면서 움직이는 통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는 미팅 따위 하지 마."
 "네. 하고 싶지 않아요."
 세준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태림에게 최대한 고통을 줄여 주고 싶어 천천히 그녀 안으로 들어갔지만 처녀가 가지는 고통을 완전히 막아 줄 수는 없었다.
 "미안해. 다음에는 아프지 않을 거야."
 "알...아요. 전 괜찮아요."
 사랑해요.
 태림은 무엇이든 세준을 자신의 곁에 머물게만 할 수 있다면 다 참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랬지만 그들은 아직 배울 것이 많은지 서로에 대한 정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13


 눈을 뜨기 전 느낌은 뻐근했지만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아픔과 좌절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태림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눈을 뜨고 옆자리를 확인했지만 그곳에는 세준이 누워있지 않았다. 허전했지만 사실 그를 침대에서 봤다 해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샤워를 하던 태림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동작을 멈추었다. 갑자기 왜 그가 부부 관계를 원했는지, 왜 미팅에 대해서 물었는지 그 의문점이 쉽사리 풀리지가 않았다. 그리고 어제가 상원과 마지막 만남이었던 것도 태림의 마음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태림은 이런 저런 과정을 생각하다가 세준이 절대 알 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지 세준이 미팅에 관해 언급했던 건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미팅이 유행하고 있었기에 이미 유부녀인 태림이 그런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태림은 소파에 얌전히 올려진 붕대를 집어 올렸다. 분명 그가 나가기 전 그녀가 벗어 내렸던 옷들을 정리 해 놓았을 것이었다. 세준은 태림의 붕대에 대해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에 태림은 다시 그것을 그녀의 가슴위로 감았다.

 일층에 내려가면 어색하지만 세준을 보리라고 기대했던 그녀는 그가 보이지 않자 왠지 가슴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쓸쓸함이 느껴졌고, 꼭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사모님 잘 주무셨어요."
 "네. 저기...."
 태림이 머뭇거렸지만 아주머니는 태림이 무엇을 묻는지 재빠르게 눈치 채고 대답해 주었다.
 "아! 사장님이요. 일찍 나가셨어요. 지방 공장에 일이 생기셨다면서 나가셨어요."
 "그래요."
 얼마나 급한 일이면 꼭 두 새벽부터 나갔을까.
 태림은 그가 걱정이 되었다. 잠도 많이 자지 못했을 것이 분명한데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지방으로 내려갔으니 말이다.
 "학교 가는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김기사는 남아있거든요."
 "네? 그럼 어떻게 지방에 내려갔어요?"
 "직접 운전하고 가셨어요."
 오고가는 대화도 별로 없었던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의 부재가 있도록 크게 다가올지 생각지 못했던 태림은 그가 항상 커피를 마셨던 머그 컵을 집어 들어 손에 꼭 쥐었다. 마치 어젯밤 그의 등을 감쌌던 것처럼.

 "왜 그렇게 힘이 없니?"
 유정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태림에게 달려왔다.
 "어? 그냥."
 "상원 오빠랑은 어떻게 했어. 웬만하면 그냥 만나지 그 오빠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 매너도 좋고 집안도 좋고 사람도 좋고."
 하지만 태림의 사람은 이번 생애에서는 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원하지도 않았다.
 "알아.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거."
 "그런데 왜 더 만나보지도 않고 그만 두려고 하는데, 아빠 때문에?"
 "아니."
 아버지의 회사에서 심하게 맞은 이 후 아버지에게는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다. 혹시나 태림의 행동에 아버지가 엄마에게 보복을 할 까 두려웠지만, 태림에게 아직 바라는 게 있는 아버지는 그 약속만은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왜?"
 태림은 유정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지만, 유정이 또 다른 미팅이나 상원과의 만남을 주선하기 전에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유정아. 사실은.....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말에 유정의 표정이 굳어 졌지만 창 밖 너머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고 있던 태림은 보지 못했다.
 "그래. 그럼 그 사람도 널 좋아해."
 "아니. 잘 몰라."
 태림은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세준의 머리카락을 떠올리고 있는 자신에게 놀라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말은 해 봤어? 좋아한다고."
 "아니. 말 붙이기 정말 힘든 사람이라서……."
 "그럼 사람을 왜 좋아하는데, 상원 오빠처럼 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태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지만 유정의 눈에는 태림의 그 모든 게 가증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사람을 떠날 수가 없어. 그 사람이 아니면 난 안되거든. 그리고 그 사람이 나 미팅 같은 거 하는 거 싫어해. 그 사람이 싫어하는 거 하고 싶지 않아."
 그 때 수업종이 울렸고, 태림은 분노를 불태우고 있는 유정의 눈길을 자신이 잘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며 교실로 들어섰다.

 유정은 자신의 계획이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태림이 세준을 마치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말하자 참을 수가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어떻게 해야 그들을 갈라놓을 수 있을지 유정은 그 날 하루 내내 그들 생각만 했고, 그 시간들이 유정의 정신을 점점 더 좀먹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에게 관심과 사랑을 혼자 독차지하고 싶었다. 집에서든 밖에서는.

 예정에 없는 출장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정신이 들고 옆에 다소곳이 누워 잠들어 있는 태림을 내려다보자 가슴을 가득 메우는 자부심과 함께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자각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와의 결혼생활은 육체적으로 편했을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무척 힘들었을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쩌면 자신을 더 아껴주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건 당연할 일을 지도 몰랐다.
 무턱대고 그녀를 안는 대신 그녀를 좀더 아껴주고 기다려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발정이 난 강아지 마냥 상대를 다른 이에게 빼앗길 까봐 그녀의 처녀성을 급하게 취하고 말았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태림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세준은 당연히 공장 관계자들이 싫어하는 급습 적인 출장을 오고 말았다.      
 하지만 공장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는 일 보다는 태림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고, 그 사실에 화가는 세준은 사람들을 닦달하고 말았고, 미안한 마음에 하루 더 머물기로 마음먹고 회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세준을 보고 싶은 마음에 집에 빨리 돌아왔지만 세준은 좀처럼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도 보고 현이 나오는 광고도 눈여겨보았지만 머리 속에는 세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태림은 소파에서 튀어 오를 만큼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보..세요."
 세준은 태림이가 당연히 통화를 하기 위해 한 말인 걸 알았지만 순간 짧게 들려오는 "여보.."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야.-
 "네."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세준이 싫어할지 몰라 수화기만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집에 별일 없지?-
 "네. 아무 일 없어요."
 -부모님은?-
 태림은 그가 먼저 자신의 안부를 물어주길 바랐다.
 "모임에 나가셨어요. 좀 늦으신다고 했어요."
 -그래......-
 "……."
 -몸은... 어때?-
 태림의 얼굴에는 그의 질문에 환한 미소가 피었다. 하지만 그는 볼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 나 오늘 못 들어가. 일이 생겨서 내일이나 올라갈 것 같다.-
 "네."
 태림은 즉시 힘이 빠지고 말았다.
 "조심해서 올라오세요."
 -음. 잘자. 바바리 맨 인가하는 변태 조심하고.-
 "그럴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태림은 신호음이 울렸지만 전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와 부부간의 연을 맺었다고 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라는 존재가 지금 그녀의 옆에 있었으면 했을 뿐이었다.

15


 그 후 그는 다음날 돌아왔지만 태림이가 어디에서 잠이 들지 몰라 소파에서 잠이 들면 그제야 방으로 들어와 잠든 태림의 얼굴을 한동안 내려다보았지만 그녀는 그런 사실은 모르는 채 자신을 침대로 청하지 않는 세준을 그리워하는 꿈만 꿀뿐이었다.
 그런데 언제가 부터 태림을 바라보는 동기들과 후배들의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세준과 부부관계를 맺어 다른 사람들 보기 부끄러운 자신의 생각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같은 반 아이들도 태림을 점점 피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유정아?"
 "왜?"
 유정이 싸늘하게 대하는 건 자신이 소개시켜준 상원과 계속 만나지 않아서 기분이 상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말을 걸기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요즘 애들이 나한테 좀 이상하게 대하는 것 같지 않니? 후배들까지 좀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기분이 그런 거겠지. 신경 쓰지 마."
 "그럴까?"

 "왜 그렇게 어깨가 축 쳐져있어? 그런 모습 보면 오해하잖아."
 태림은 어두운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상원 때문에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정말 놀랐어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태림의 질문에 상원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걸었는데, 와 보니까 여기더라."
 상원은 자신의 행동이 어이없다는 듯이 태림이와 항상 헤어졌던 동네 어귀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가 너무 안쓰럽고 자신을 보는 듯해서 태림은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학교생활은 어떠니?"
 "그냥 그럭저럭 잘 지내는 편이에요. 오빠도 잘 지내고 있죠."
 태림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가에 웃음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괜스레 신발 앞 축으 로 땅을 툭툭 찼다.
 "글쎄……. 어떻게 보면 잘 지내는 거 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널 만나기 전 보다 더 외로울 수도 있겠지."
 상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태림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 역시 분명히 태림이가 세준을 보고하는 외기러기 사랑을 태림을 보고 시작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넌 그...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이랑 어떻게 됐어. 물론 잘 되고 있겠지."
 "사람일이 다 원하는 데로 흘러가는 건 아니잖아요."
 태림은 상원에게서 뭔가 말이 흘러나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누르스름한 빛을 띄우며 아주 작은 공간을 비추고 있는 가로등만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한 없이 상원과 있다가 혹시라도 가족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큰일이 날거라는 생각에 태림은 조금씩 초조해져갔다.
 "할말이 없으면 전 이만……."
 "정말 난 안되니? 단 한번의 기회조차 가질 수 없을 만큼 그 사람이 너에게 그렇게 큰 거야?"
 태림의 눈에는 상원을 동정하는 마음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 날 동정하지 말라고."
 "오빠……."
 상원은 화가 났는지 태림의 어깨를 꼭 쥐고 태림이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왜.. 이래요."
 태림은 과격한 상원의 손놀림에 놀라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런 그녀를 상운은 품속에 안아버렸다.
 "태림아! 태림아! 제발 날 좀 바라 봐줘. 나에게 그 사랑에게 보이는 관심을 조금만 보여줘."
 상원이 너무 세게 껴안는 통에 태림은 숨도 쉬기 힘들었다.
 "이러지 말아요. 난 그 사람 포기 할 수도 잊을 수도 없어요."
 만약 세준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그를 떠날 수 없게 그녀는 그에게 발목이 잡혀 있었다. 그가 스스로 놓아 줄 때까지. 하지만 그 조임이 태림은 싫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의 곁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상원의 이런 행동은 세준의 마음을 점점 그녀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제발 놓아줘요."
 "싫어. 난……."
 누군가의 거친 손길에 인해 태림은 벽으로 밀쳐져서 심하게 부딪쳤고, 상원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가 싶더니 곧 바로 다시 일으켜져서 세준의 주먹에 망가지고 있었다.
 "어머!"
 태림은 세준에게 들켰다는 것에 너무 놀라 아픈 것도 잊어 버렸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는 상원이 세준에게 흠씬 두들겨 맞자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저 놈 품안에 안겨 있던 것도 네 잘못이란 말이야."
 세준의 눈은 독기와 살기를 함께 품고 있어 아버지의 눈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게 했지만 자신의 실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맞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그건 아니지만. 하여튼 상원 오빠가 여기 온건 제 잘못이 커요. 그러니 그냥 보내주세요."

 세준은 상원인가 뭔가 하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풋내기 놈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아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상원을 보호하려는 태림을 손목을 멍이 들 정도로 꼭 붙잡고 그녀를 차에 태웠다.
 "태림아!"
 상원은 이미 피가 나고 멍이 든 얼굴로 태림을 쫓아왔지만 태림이 순순히 자신을 때린 남자를 따라가자 그 자리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준은 늦은 첫날밤을 치르고 난 뒤 태림이에게 너무 소홀하게 대한 것 같아 그녀를 보기 위해 일을 일찍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동네 어귀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안으려고 했고, 여자는 그 손길을 거부했지만 번번이 그 남자의 품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 보이지 도와주려는 마음에 차를 세워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남자의 품안에 안긴 것이 태림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남자가 강제로 안으려 한 것도 잊은 채 두 사람 모두에게 분노가 일어나 성질을 참을 수가 없어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고 말았다.
 "전……."
 "입 다물어. 지금 아무런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
 다행이 김기사는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태림의 행동이나 집안 일이 밖으로 세어나가는 일은 없었지만 그 앞에서 태림이가 말을 하는 걸 그냥 놓아 둘 수가 없었다.
 집에까지 차로 2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그 거리가 태림에게는 1년처럼 길게 느껴졌고,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잔뜩 굳어져 있는 세준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내려."
 사실 내리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에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렸지만, 태울 듯이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무서워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를 타고 아주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태림이 내릴 생각을 하지 않자 세준은 그녀를 태웠던 것처럼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차에서 내리게 만들었다.
 "다녀오셨어요."
 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첸 아주머니가 재빨리 자리를 비켜주었다.
 세준은 태림이가 거의 뛰다 시피 하면서 계단을 두 칸씩 오르는 자신의 속도를 따라오는 걸 알았지만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놈하고 미팅 한 것도 부족해서 남자를 동네로 끌어들여. 항상 집에 들어오기 전에 그놈을 만났던 거야?"
 그가 어떻게 해서 그 사실을 알았는지는 몰랐지만 그가 이미 전부터 상원과 만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걸 알고 태림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원을 만나고 있는 사실을 아는 건 태림을 포함한 단 서명뿐이었다.
 설마 유정이가?
 태림의 자신의 가설에 고개를 흔들었다. 유정이가 그런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아마도...    그래 아마도 내가 상원 오빠랑 같이 돌아오는 걸 보았을 거야. 그래서 지난번에 날 안았던 거야.
 "아니에요. 전 그런 적 없어요. 그만 만나자고 예전에 말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찾아 올 줄은 정말이지 몰랐어요."
 그런데 말을 하다 말고 세준이 양복 상의와 셔츠를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너와 네 아버지는 어쩔 수 없는 부녀지간이군, 하는 짓도 비슷한 걸 보니."
 태림은 그의 말이 부당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허리띠까지 푸는 그의 행동에 놀라 항의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모습의 위로 아버지의 모습이 겹치려고 했다. 엄마나 그녀에게 거의 가장 쉽게 잡을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인 허리띠를 풀던 그 포악하던 모습이 겹쳐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는데.
 "뭐...하시는 거예요."
 "네가 누구의 여자인지 확실히 보여주려고. 왜 미팅한 남자 품에는 안겨도 남편의 품에는 안기기 싫은가?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너에게 배려란 없을 거야."
 세준은 아직도 떨고 있는 태림에게 다가왔다.
 "싫어요."
다행이 그는 아버지처럼 폭력을 휘두를 생각이 없는지 허리띠도 다른 옷들처럼 저만치 던져 버렸다. 하지만 태림의 마음이 여자의 본능이 싫다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처음 그녀를 안으려 했던 날 보였던 눈빛도 이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그 교복 찢어 버리기 전에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교복이 왜 찢어진 걸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으면."
 그는 태림의 변명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태림이 그의 말에 그에게 저항하던 손길을 멈추자 세준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태림은 그의 무서운 눈빛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있다가 자신의 등에 닫는 것이 침대가 아니라 책상이 놓여져 있는 벽이라는 걸 알고 놀라 눈을 떴다.
 "왜 놀랐나 보지. 남녀의 관계가 침대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야. 내가 오늘부터 그걸 확실히 가르쳐 주지."
 세준은 교복을 찢어 버릴 수도 있다고 협박 한 것과는 다르게 그녀의 치마를 들어 올려 속옷을 단 한번에 벗겨 버리더니 상의 단추를 재빨리 풀었다.
 태림은 두 다리가 공중에 떠버리자 균형을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맨 살인 그의 어깨를 붙잡아야만했다.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겨냈지만 태림의 가슴에 감겨져 있는 붕대가 남아 있었다.
 세준은 잠시 태림의 가슴을 내려다보더니 연필꽂이에 꽂혀 있던 가위를 서슴없이 꺼내어 들어 천과 가슴 사이로 밀어 넣었다.
 "뭐하는……."
 그가 왜 가위를 집어 들었는지 몰랐던 태림은 그가 붕대 아래로 차가운 가위를 집어넣자 그 차가운 느낌에 그가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시선 안에 들어오자 세준은 이미 잘려버려 쓸 수 없는 천과 가위를 던져 버리고 그녀의 가슴을 손안에 쥐었다.
 그의 손길은 전혀 부드럽지 않았지만, 다른 것에는 이미 관심을 잃어버린 그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세준은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는 것 같더니 그녀를 좀더 들어 올려 그녀의 하얀 가슴에 자신의 입술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위치를 조정했다.
 "아!"
 환희의 감탄사가 아닌 세준의 이빨이 준 순순한 아픔 때문이었다.
 뭔가에 화가 났는지 세준은 태림의 유두를 이빨로 약간 힘을 주어 깨물어 태림이 신음을 뱉자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네가 반응하지 않겠다면 하게 해주겠어."
 태림은 세준이 그의 애무에도 그녀의 유두가 단단해지지 않아 그가 화를 낸 것조차 몰랐다.
 세준은 그녀의 상의를 벗겨낸 다음 한 손은 그녀의 가슴을 여전히 배회했고, 입술은 그녀의 입술이 부풀어 오를 정도의 키스를 하더니 급기야 그녀의 다리 사이로 남은 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돼...읍."
 태림은 그의 손이 자신의 은밀한 곳으로 움직이는 걸 알고 막아보려고 작은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이미 벽과 그의 몸에 단단히 고정되어 버린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어 버려 그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에는 네가 싫다고 해서 참았지만, 이제는 참지 않겠어."
 세준은 이미 여자의 몸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그녀의 도톰하고 부드러운 둔부로 첫 손길을 내밀어 부드러운 속살을 마음껏 음미하기 시작했다.
 태림은 처음에는 그의 손길이 아무도 닿지 않은 곳을 만지작거리자 움츠려 들었지만 그녀의 몸 깊은 곳으로 그의 손가락들이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오자 조금씩 발가락을 간지럽게 만드는 작은 깃털의 느낌이 몸속으로 퍼지면서 힘을 주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작은 한숨소리 같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자 세준은 조금 더 강하게 그녀의 깊은 곳을 자극하기 시작했고, 그의 손길에 태림은 본능적으로 그의 허리를 긴 두 다리로 감싸 안았다.
 "이 느낌을 잃어버리지 마. 넌 이제 몸 속 깊숙이 내 여자니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세준은 자신의 남성을 태림의 몸 속 깊숙이 묻어버리고 그녀의 포근하고 부드러움에 완전히 자제력의 끈을 놓아버렸다.
 그녀는 그 날 밤 그의 말대로 완전히 몸 속 구석구석 그의 여자가 되었다.
16


그 날 이후로 생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준이 태림을 벽으로 몰아붙여 자제력을 잃어버린 날 태림은 그의 거친 몸놀림에 도중에 지쳐 그가 절정에 이를 때까지 그의 등과 허리를 안고 있었고, 세준은 태림이가 아직은 그의 힘에 부흥하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몰아붙인 것이 미안했는지, 지친 태림의 이마를 쓸어 넘겨주었다.
 세준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려는 듯이 태림을 거의 매일 안았다. 그때마다 자제력을 잃어 태림이를 육체적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꼭 그녀를 자신의 인생에서 몰아내려는 듯이, 아니면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들어와 있다는 걸 부정하려는 듯이 태림을 침대 밖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태림은 그와 함께 잠들고 싶었다.
 "난 누구랑 같이 침대에서 잠들어 본적 없어."
 그래서 항상 그와 나누는 불꽃같은 강렬한 사랑 뒤에는 아픔이 따라다녔다.
 그의 침대에서 그의 품안에서 나오기 싶지 않았다. 그건 육체의 쾌락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품안에서 좀더 있으면서 그의 여자라는 걸, 그가 그녀의 여자라는 걸 확신하고 싶었다.
 그녀를 침대에서 몰아내는 그의 손길과 말들은 태림의 가슴을 무너지게 했지만 그녀는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소파로 돌아오면 달랐다. 언제나 소리 없이 우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태림은 잠들기 전까지는 항상 눈물을 흘리며 가슴아파했다.
 
 세준은 그녀를 침대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한 뒤에 침대에서 내려서서 소파로 향하는 그녀를 붙잡지 않기 위해 이불을 관절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꼭 쥐어야만했다.
 그녀를 원했다. 그녀가 영원히 그의 침대에서 머물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를 밤새 원해도 끝나지 않을 까봐. 그녀를 너무 지치게 할까봐 세준은 그녀를 침대 밖으로 내보냈고, 그럴 때마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한동안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면서 점점 숨소리가 고르게 변하는 태림을 느끼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가 침대에서 내보낼 때는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태림의 생활은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여전히 친구들은 쑥덕거리는 것 같았지만 태림의 결혼이 아니라 미팅을 했다는 것에 대한 시기심과 질타가 섞인 것이어서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집에서도 점점 시어머니와 잘 지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좀처럼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일찍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긴장하지 마! 마지막으로 얼굴 보려고 온 거야."
 태림은 상원을 보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상원은 상처 받았다.
 "잘 지냈어요?"
 "글쎄 잘 지냈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럭 저거 지냈다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날 혼나지 않았니?"
 "네. 미안했어요."
 상원은 답답한 마음을 풀려는 듯이 차가운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니야. 처음부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잖아. 그냥 마지막으로 네 얼굴 보려고 왔어.'
 태림은 마지막이라는 말에 놀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나 군대가. 영장 나온 지 좀 됐거든. 그 사람하고 잘 되길 바란다는 말을 하러 왔어."
 "고마워요."
 태림은 너무 미안했다.
 상원은 마지막으로 안수를 청했고, 태림도 뿌리치지 않았다.

 요즘 들어 등교 때뿐만 아니라 간혹 하교 길에도 세준이 태림을 마중 나오는 일이 종종 있어 태림은 도로 가에서 익숙한 차 모습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버지의 차와 같은 차를 보고 놀라 그 자리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번호까지 확인했는데 아버지의 차가 맞았다.
 지난 번 현에게 추행을 하려다가 무산되자 태림이를 때린 뒤로 처음 있는 만남이라 태림은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내 차를 봤으면 재빨리 와야 되는 것 아니냐."
 "처음에는 잘 몰라봤어요. 엄마는 잘 계시죠."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암묵적으로 알렸다. 태림은 아버지가 왜 찾아 왔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쯧쯧 네 어미가 아버지를 보면 인사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더냐?"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만한 훈계는 전혀 아니었다.
 분명 아버지가 세준과 태림과 결혼시킨 이유는 오래 전부터 전무이사와 넘보기 시작한 가전제품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난 약속을 지켰다. 그러니 너도 지켜야 하지 않겠냐?"
 그렇지 않으면 엄마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의도를 확실히 목소리와 눈빛으로 밝히고 있었다.
 "뭘 원하세요?"
 태림이 본론을 꺼내자 김진만 사장은 태림에게 손바닥 보다 더 작은 물건을 태림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죠?"
 "소형 카메라다. 크기는 작아도 성능은 꽤 쓸만하지."
 태림은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뭘 하라는 거죠. 전 그 사람 공장이나 회사에 가본 적도 없어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세준을 배신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걱정할 것 없다. 네 남편이라는 인간은 워낙에 일을 좋아해서 집에까지 일을 가지고 들어가는 걸로 유명하니까. 그리고 보안 때문이라도 자신이 신 모델 디자인을 가지고 다닐게다."
 태림은 아무리 사업 확장을 위해서라지 만 자신의 사위가 된 사람까지 등을 쳐가면서 성공을 하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날 이해할 필요는 없다. 난 너희 모녀에게 그런 걸 바란 적은 한번도 없으니까. 단지 넌 내가 시키는 대로하면 돼. 네 어미를 위해서라도."
 태림은 자신의 속을 환히 꿰뚫고 바라보는 아버지를 언제 벗어 날수 있을지 앞날이 막막했다.
 "데려다 주랴?"
 "아니요. 그 사람이 올지도 몰라요."
 태림의 말에 아버지는 비웃음을 흘렸다.
 "푸하하. 벌써 그런 사이가 됐냐? 잘되었구나! 그럼 그놈 서재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태림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서재를 왕래했었다. 그 때는 시어머니가 주는 세준의 일에 방해가 된다면서 준 핀잔이 무슨 뜻인 줄 몰랐지만, 이제는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 참."
 그녀는 아버지가 연극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어쩌나가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행동했지만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그것도 다 계획에 있었다.
 "뭐요?"
 "혜란이를 알고 있지?"
 어떻게 모르겠는가. 아버지는 여진언니가 죽던 날에 혜란을 집에까지 들인 막되 먹은 인간이었고, 혜란이란 여자도 그와 비슷한 기회주의자였다.
 "네. 아주 잘이요."
 "그런데 이건 모르고 있을 거다. 혜란이가 네 남편의 첫사랑이었다는 걸."
 태림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현기증이 일어 눈을 꼭 감았다. 세준의 그녀 부녀를 향한 미움과 증오심을 이제 확실히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걸 왜 지금 와서 말씀하시는 거죠."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혹시 그놈에게 잘 보이고 싶어 내가 시킨 일을 말하고 싶겠지만 이미 그는 널 좋게 볼 수 없다는 걸 잊지 말라는 이 아비의 충고라고 생각해라."
 "그따위 충고는 필요 없어요."
 "그래. 그럼 내려라."
 태림이 차에서 내리자 운전기사는 차에 올라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처음 보는 젊은 남자였지만 태림의 머릿속에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걸 기억할 여유가 없었다.
 "잊지 말아라. 다음 주까지다. 그때까지 연락이 없다면 그때는 내 마음대로 할 거다."
 태림은 죽어도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아버지에게 저항 한번 못하고 당하는 엄마 때문이라도 해야 만했다. 어릴 적 왜 엄마가 그런 아버지에게 저항하지 못하나, 왜 맞으면서 참고 지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에게서 도망갈 기회를 놓친 그 순간부터 그런 삶에 지쳐버린 것이었다. 그건 절대 엄마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차가 떠나가 얼마 있지 않아 세준의 차가 도착했지만 태림은 세준이 부를 때까지도 그가 옆에 와있는 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태림은 재빨리 카메라를 주머니 속에 넣고 차에 올라탔다.
 그에게 너무 죄스러워서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괜한 가방 끈만을 손가락으로 감았다 풀었다만 을 목숨이 달려 있는 일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태림은 그의 질문에 그가 혹시 아버지의 차를 본 것이 아닌 가 해서 그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순수한 걱정만 담겨 있었고, 그래서 너 미안해 진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엄마를 위해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사랑해요. 언젠가는.... 오래 걸리더라도 절 용서해 주세요.
 "아니요.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세준이 그녀를 거의 매일 원하는 것도 있었지만 처음 보다 잠도 많아 졌고, 몸이 금방금방 피곤해져 쉬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감기 걸렸어?"
 세준은 피곤하다는 그녀의 말에 시원한 손으로 태림의 이마를 만져보고 나서 자신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열은 없는데."
 "감기 안 걸렸어요. 한 여름에 무슨 감기가 걸리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관심에 너무 기뻤고, 너무 슬펐다.
 "혹시 지난번에 그 놈이 다시 나타나 괴롭힌 거 아니야?"
 어이없는 추측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그녀에 대한 믿음이 조금은 묻어났다. 이제 겨우 쌓아 올린 그의 믿음이 얼마 후에 눈앞에서 사라질 걸 생각하자 태림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려고 했지만 태림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요. 그냥 오늘 체육시간에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해서 그래요."
 
 태림이가 피곤하다고 해서 마음에 걸렸는지 그 날 세준은 그녀를 찾지 않았고, 서재에서 오랫동안 머물다가 태림이 잠이 든 후에야 방으로 돌아왔는지 선잠에서 깨어난 태림은 침대에서 잠든 세준을 발견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기에, 지금 이 기회가 그의 서류를 보기 좋은 시간이라는 걸 알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그녀의 마음 속 속삭임이 그녀를 서재가 아닌 그가 누워 있는 침대로 향하게 만들었다.
 태림은 그가 싫어한다는 걸 알았지만 그의 옆에 눕고 싶은 마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와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바심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누웠지만 세준은 그녀의 몸의 움직임을 즉시 알아채고 손을 내밀어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무슨 일이야?"
 "잠이 오지 않아요. 오늘만, 딱 오늘 하루만 여기서 자면 안 될까요?"
 세준은 태림의 눈에 뭔가 더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자신에게 스스로 찾아온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냥 아무 질문 없이 꼭 안아 주기로 했다.
 "그래. 여기서 자."
 태림은 처음으로 세준의 품안에 안겨 잠이 들었고, 그의 품안에서 깨어났다.
 "우리 꼬마 신부가 부끄러움이 많이 없어졌구나."
 태림은 먼저 눈을 떴지만 그의 품에서 바로 나오지 않고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과 얼굴, 눈, 코, 입을 차례차례 쓰다듬고 있는 중이었고,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놀라 손을 치웠지만 세준은 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 그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난 싫다고 한적 없어."
 "저기...."
 "너 지금 얼굴이 계란을 익힐 정도로 붉어진 거 알고 있어?"
 그녀는 남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그거 알아?"
 "뭘요?"
 태림은 자신을 변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세준을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길이 뭘 말하는 지 태림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환한 태양이 비추는 아침에 그가 자신을 원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오늘이 휴일이라는 거."
 세준은 태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미처 방어하지 못한 태림의 위로 올라와 그녀의 입술을 금세 차지했다.
 "지금은... 아침이잖아요."
 "나도 알아."
 그는 손을 아래로 넣어 그녀가 입고 있던 잠옷을 가슴위로 올려 가슴이 드러나게 만들었고, 즉시 손이 원하는 실크의 감촉을 만족시켰다.
 세준은 그녀의 귓불과 목을 지나 이미 그가 주려는 육체의 즐거움을 알고 부끄러운 주인과는 달리 일어선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아침에도… 음……. 그게 저기……."
 세준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태림의 얼굴을 상체를 팔로 지지하고 내려다보았다.
 "아침에는 이러지 말라는 법은 없는데."
 "그게... 법도 있어요?"
 세준은 태림의 말에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고, 그의 웃음에 태림의 몸까지 흔들렸다.
 "그런 건 없어. 그냥 서로 원하면 하는 거야. 우린 부부니까 아무도 뭐라는 사람 없어. 네가 원하지 않으면 그만 둘게."
 세준은 정말 일어서려고 했다.
 "그냥…그냥……."
 세준은 태림에게 하기 어려운 말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게 진한 입맞춤을 하였고, 처음으로 그녀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어 키스와 입맞춤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그녀에게 가르쳤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서 모든 것이 처음 이란 것이 세상을 얻은 것처럼 좋았고, 그녀가 주는 모든 감각을 생명처럼 받아들였다.
 태림은 그 날 세준이 자신의 몸 안으로 깊숙이 몸을 묻은 채로 자제력을 잃어 가는 모습을 하나하나 담았다.
 이번엔 세준이 먼저 잠에서 깨어나 엎드려 자는 태림의 등줄기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탐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뭐로 때린 거지?"
 태림은 그의 질문에 몸을 움츠렸지만 그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현의 일이 있었던 날 이미 그는 그녀의 상처를 보았으니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는 항상 가까이 있는 걸로 때렸어요. 그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던 게 허리띠였어요. 사실 엄마하고 아줌마는 아빠가 무기로 할 수 있을 만한 모든 걸 다 치우려고 노력했지만 아버지의 허리띠만은 어쩔 수가 없었거든요."
 태림은 자신의 등을 아직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에 아픈 상처가 사라질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아무도 말려주는 사람 없었어?"
 "네.... 아무도요. 아버지는 집에 손님이 방문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셨어요. 손님이 온다고 해도 완전한 아버지의 수족을 대신하는 사람들뿐이었거든요."
 태림은 그의 질문에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한번은 여진 언니하고 절 남겨두고 엄마가 집을 나가려는 적이 있었어요. 엄마가 왜 그런지도 모르는 채 엄마를 붙잡고 울고 매달렸죠. 하지만 엄만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처음으로 매정하게 우리를 뿌리치고 나갔어요."
 태림은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어 잠시 말을 멈췄다.
 세준은 코를 통해 이불로 흐르는 태림의 눈물을 등을 만졌던 것처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자 엄마가 다시 들어오셨어요. 우린 그냥 엄마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소파 위에서 뛰고 소리치고 했었어요......... 그런데 말이죠, 지금은요..-울먹거리기 시작하는 목소리와 북받치는 감정이 말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때 엄마를 붙잡은 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나만 없었더라면 엄만 행복했을 지도 몰라요."
 세준은 이제 몸을 떨며 우는 태림을 등 뒤에서 안았다.
 "널 놓아두고 갔다면 엄마는 절대 행복하지 못했을 거야."
 세준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태림이 눈물을 멈출 때까지 그녀의 맨 어깨와 팔을 쓰다듬으며 같이 아파했다.

17


사는 게 완전히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밥도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고, 수업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다면 분명 엄마는 아버지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와 약속이 다가오기 전까지 세준과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었고, 계속 그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땀을 많이 흘렸어.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아. 엄청 찜찜하네."
 "알았어요."
 따르릉.
 때마침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태림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수화기를 집어 올렸다.
 "여보세요."
 -나다.-
 참으로 밉살스러운 목소리였다.
 -약속 날짜가 다 되어 가는 걸 혹시 잊어버리고 있을 까봐 전화했다.-
 마치 일상생활 이야기를 나누는 부녀지간 같은 대화였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 날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믿으마.-
 띠띠띠
 "누구 전화야?"
 세준은 윗옷을 벗은 채로 욕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집에서요."
 아버지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집에서라면 부모님 중에 누군지 밝힐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침대 위에 있는 서류 좀 서재에 가져다 놓아줄래. 가져다 놓지 않으면 서재에 가고 싶지 않을 것 같아."
 세준의 말을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이 무엇 뜻하는지 태림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그럴께요."
 지금이 기회였다. 다리가 떨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지만 태림은 몰래 숨겨둔 카메라와 서류를 들고 조심스럽게 그의 서재로 향했다.
 그가 눈치 못 채도록 서류의 순서를 잘 외어둔 태림은 모델 디자인이 그려진 서류와 그 외 영어로 써져 있는 서류를 다 찍었지만 무슨 정신으로 찍었는지 모를 정도로 긴장해 거의 스러질 지경이었다.
 사진을 다 찍고 왔을 때에도 세준은 욕실 밖으로 나오지 않은 상태여서 카메라를 가방 속에 숨겼다.
 "가져나 놓았어."
 "네."
 "가자 밥 먹으로 아무래도 너 많이 먹어야 겠다. 요즘 들어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
 교복이 조금 헐렁해 지기는 했지만 올래 여름을 타는 태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여름이라서 그럴 거예요."
 "그럼 과일이라도 많이 챙겨서 먹어 아주머니가 챙겨주는 것만 먹지말고 먹고 싶으면 사먹기도 하고 그래."
 "그럴께요."
 "용돈 없어?"
 머리를 털다 말고 세준은 태림에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
 "많이 있어요. 아버님이 넘치게 주시는 걸요."
 태림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생기가 전혀 없어 보이는 걸 모르는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태림은 세준이 머리를 털다 말고 옷장으로 움직이는 것도 못 느끼고 있었다. 태림이 좀더 세준과 살아가면서 그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몇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 그는 머리에 물기가 남아 있는 걸 싫어해 마른 수건으로 여러 번 터는 것을 좋아했고, 머리를 말리다 말고 절대 다른 것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태림은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이마에 정통으로 물을 맞고 말았고, 그 물이 세준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인 걸 알고 놀라 일어서 수건을 찾았다.
 "머리가....."
 "알아. 자 받아."
 그녀는 세준이 내민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웬 지갑이에요?'
 세준의 손에는 가격이 보통이 아닌 것이 한 눈에 보이는 고급 지갑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여자 손 지갑이었다.
 "너 주려고 지난번에 사놓았는데,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어."
 "고마워요."
 태림은 그가 주는 선물을 소중히 손에 쥐었다.
 "빈 지갑 주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해서 용돈 좀 넣어 두었으니까. 필요한 것 있으면 써."
 태림은 용돈이라는 말에 놀라 지갑을 열어보고 지갑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 때문에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지갑만으로도 만족했는데....
 "너무 많아요."
 세준이 준 돈은 지금까지 시아버지가 준 용돈과 맞먹을 정도로 많은 액수였다.
 "이렇게 많은 돈은....."
 "필용 없다는 소리는 마.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은 꼭 필요한 거야.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쓸 일이 생길 줄 어떻게 알아."

 아버지는 약속대로 학교 앞에 나와 있었고, 오늘도 그 기사는 차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요?"
 "나이도 있고 해서 집안 일이나 도우라고 했다. 가지고 왔냐?"
 마음이 조급한 아버지는 더 이상의 대화는 원하지 않는 다는 걸 확실히 했다.
 "네. 약속 잊으시면 안돼요. 절대 엄마에게 다시는 손대지 않는 다는 거요."
 아버지는 카메라가 담긴 봉투가 자신의 손에 잡혀지자 비열한 웃음을 띄웠다.
 "걱정할 것 없다. 요즘 집에 들어가는 일도 없으니까."
 
 "태림아? 아직 안 갔네."
 "응."
 오늘 주번이었던 유정이 마지막 정리를 하고 나오는 길인 것 같았다.
 "누구야? 그 사촌 오빠야?"
 말에 가시가 있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태림의 귀에는 거슬리는 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아니. 우리 아버지."
 "무슨 일로 오셨는데, 얼굴만 보고 가셔?"
 유정은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온 외동딸이었기에 태림의 상황을 말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바쁘셔서, 뭐 좀 부탁하신 게 있으셨거든. 오늘도 아빠오시니?"
 "응. 태워다 줄까?"
 "아니. 괜찮아."
 유정은 태림이 세준 의 집 앞으로 갈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안내할지 정말 궁금했다.
 "태워다 줄게."
 유정은 무슨 일인지 싫다는 태림을 억지로 붙잡으려고 했다. 그들의 가는 방향은 항상 반대였기 때문에 평상시에도 데려다 준다가 한적이 없는 유정은 오늘 따라 고집을 부려 태림을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유정아. 미안해 먼저 갈게. 내일 보자."
 태림은 유정에게 세준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차가 다가오기 전에 먼저 뛰어가 차에 올라탔다.
 그 덕에 차에 탄 세 사람은 유정이 주먹을 쥐고 이를 갈며 그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을 듣지 못했다.

 "아까 이야기하던 학생 이름이 유정이지."
 "네."
 세준의 눈썹이 유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유정이하고 친해?"
 "그런 편이에요. 왜요?"
 세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태림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아버지가 준 사진기가 있었다면 꼭 담고 싶었다.
 "그런 편이에요."
 "그럼 다른 친구랑 친하게 지내고, 그 친구랑은 멀리 지내."
 태림은 그의 말에 놀라 자동으로 반문을 했다.
 "그냥 별로야.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저 아이 성격 마음에 들지 않아. 내 기억이 맞는다면 유정인 언제나 욕심이 많은 아이였어. 욕심만 많으면 상관없지만 그걸 채우지 못하면 참지 못했던 것 같아."
 유정이 일부러 그에게 전화했다는 걸 세준은 알았지만 태림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태림은 세준이 유정에 대해서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아는 것에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별로였거든. 차라리 현이가 기분이 풀리면 현이랑 다시 친하게 지내."
 현이 보고 싶었다.
 "현이는 잘 지내고 있죠?"
 "바쁘게 지내. 나하고도 말하지 않아. 일부러 일에만 전념하는 것 같아. 그때 일은.... 내 잘못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네."
 하지만 이제는 정말 태림이 잘못한 일이 생겨버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속이 별로 좋지 않아 자율 학습 시간에 조용히 빠져 나와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오던 태림은 화장실 입구에서 각기 다른 포즈를 잡은 채로 서있는 오공주파의 모습에 잠시 주춤했다.
 "좀 비켜줄래."
 "흥."
 태림은 그들의 신경을 그다지 거스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저기... 아야!"
 오공주파 애들 중 선생님이 없으면 손목에 빨간 손수건을 두르고 다니는 점순이가 태림의 가슴을 꼬집었다. 코밑에 점이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진짜네! 너 가슴이 많이 커졌다. 이상하네 지난 번 까지만 해도 완전히 아스팔트의 껌 같더니 요즘 들어서는 완전히 사과 수준이네."
 "낄낄낄."
 태림은 아이들의 정확한 지적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세준이 붕대를 감는 것을 싫어해 용기를 내서 속옷을 사 입었기 때문에 가슴이 커지게 보인 것이었다.
 "사실 창피해서 천으로 감고 다녔는데, 올 여름이 너무 더워서 풀고 다녀서 그래. 그만 해."
 태림은 그들을 피해 나가려고 했지만 그 중에 세 번째로 태어나 삼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지나가려는 태림의 머리채를 붙잡아 태림을 뒤로 끌어 당겼다.
 "이년이 어디 건방지게 말도 다 안 끝났는데 가고 지랄이야."
 "아야! 도대체 할 말이 뭐야. 이거 놓고 말을 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이 태림을 둘러 샀다.
 "너~ 결혼했다면서."
 질문이 아닌 확신이었다.
 "뭐?"
 태림은 놀라 부정하지도 못했다.
 "너 결혼했다는 거 다 알아. 그런데 너 결혼했으면서도 미팅했다면서."
 태림은 너무 창피해 아무 말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다.
 "네 남편도 너 미팅한 거 알고 있냐?"
 "..."
 "어머머. 남편 몰~~래 했겠지, 그런 걸 남편한테 말했겠니?"
 "그만해."
 태림의 강한 어조에 아이들은 잠시 주춤거렸으나 하나는 금새 다섯이 되었고, 그 다섯은 또 하나가 되었다.
 "싫어. 너 결혼 한 채로 딴 남자하고 눈맞으면 간통인 거 알고 있니?"
 아이들은 자신들이 한 말에 서로 마주보고 낄낄 웃었다.
 "네 남편이 좀 시원찮은 가봐. 남자들 정력에는 뱀이 좋다던데. 너네 아버지 돈 많다면서, 엄마한테 말해서 사위 몸보신 좀 시켜달라고 해. 딸 바람 피게 만들지 말고."
 태림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 오빠 더 이상 모욕하지마. 나 이제는 못 참아."
 "아이고 무서워라. 그러면 우리가 벌벌 떨 줄 알았냐."
 이제 점순이는 태림의 이마 중앙을 손가락으로 뚝뚝 퉁기기 시작했다. 지가 마치 학생주임 선생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오빠를 말하는 거냐? 아니야 그게 궁금한 게 하니라 우리가 좀 불량해 보여도 완전히 숫처녀들이거든, 먼저 결혼하신 선배님으로써 우리 성교육 좀 시켜주라."
 이들이 원하는 것을 가는 할 수가 없는 것이 태림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다들 수업중이라 화장실을 찾는 사람은 없을 거고, 있다고 해도 오공주파의 심기를 건들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였다.
 "본론만 말해."
 "어머. 그 당당함은 유부녀가 되면 생기는 거니? 걱정하지만 우리가 알고 싶은 것 처녀하고 유부녀하고는 거기가 생긴 게 다르다며? 너니 남편이랑 뜨거운 밤 많이 보냈을 거 아니야. 그러니 불쌍한 중생들한테 보시한다고 치고 좀 보여주라."
 태림은 오공주파에게 포위 당했을 때 보다 더 창백해지고 말았다.
 "뭐.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태림은 최선을 다해 나가려고 했지만 아무리 키가 큰 태림이어도 다섯 명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효율적으로 태림의 팔과 다리를 붙잡기 시작했고, 태림이 거칠게 반항하면서 팔꿈치과 발길질에 의해 다치자 보복으로 태림의 뺨을 때렸다.
 "야! 이런 씹년이. 가만이 있어. 조금 구경만 하고 보내준다는데 왜 이렇게 뻣뻣하게 굴어."
 "하지마. 너희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이들은 태림의 몸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디어 태림의 팬티를 벗기는데 성공하려 하고 있었다.
 "너희들 이게 무슨 짓이야?"
 중요한 일이 있어 잠시 자율 학습을 시켰던 담임 선생님과 실습을 나온 선생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손에는 항상 쥐고 다니던 매를 쥐고 헉헉거리며 화장실에 들어와 들고 있는 매로 태림을 괴롭히고 있는 아이들은 사정없이 한 대씩 내리쳤다.
 태림이를 꼭 쥐었던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등장과 바로 이어지는 매질에 태림을 놓아주었고, 담임의 매질에 꼼짝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았다.
 "이것들이, 내가 뭐라고 했어. 공부하지 않아도 좋다. 학교를 나오지 않은 것도 너희들 자유 다고 했지. 다만 아이들을 건들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했을 텐데. 니들이 건달이야. 이런 양아치만도 못한 것들. 너희들 오늘 한번 나 쓸어 질 때까지 맞아봐."
 태림은 풀어진 교복을 수습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흥분한 담임 선생님을 막을 수도 없었다.
 "태림이 넌 교실로 가있어."
 "하지만....."
 "가 있어."
 태림은 담임 선생님이 이토록 화난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잠시 주춤거리는 태림은 실습선생님이 등을 떠밀자 교실로 향했다.

 하교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선생님이 태림을 불렀다.
 "오늘 너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오늘 일이 생겨서 못할 것 같아. 집에다가 오늘 있었던 일 이야기해서 가능하면 전학 가는 걸로 하자."
 "네."
 태림은 담임선생님께 너무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언제나 매를 들고 다녔지만 숙제를 하지 않거나 수업시간에 조는 경우를 빼고는, 그것도 한두 대가 최대였다. 누구를 그토록 심하게 때린 적은 없는 분이었다.
 "너 아니었어도, 요즘 그 애들이 하는 행동이 좋지 않아서 보고 있던 중이었어. 당분간 조심하도록 하고 화장실 갈 때도 혼자 가지 말도록 해."
 "네."

 "너 다리가 왜 그래?"
 세준은 앞에 김기사가 있어서 태림의 치마를 들추지는 못했지만 태림도 넋이 나가서 못 본 멍을 발견해 손으로 만져보았다.
 "어. 그게..."
 다행이 손자국이나 손톱자국은 남지 않아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더 이상의 걱정거리를 더해주고 싶지 않았다.
 "체육 시간에요.... 피구하다가 공을 좀 많이 맞아서 그래요."
 "너만 공격한 거야?"
 세준의 얼굴에는 분노와 근심이 어려있었다.
 "아니요. 얼굴 맞아서 멍든 애도 있어요."
 그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덜어주고 싶어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너 운동신경 별로지?"
 "그리 나쁘지는 않아요."
 대화가 다른 곳으로 흘러갔지만 태림은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세준의 놀림을 조금의 장난기로 받아 주었다.
 "아닌 것 같은데. 운동신경이 좋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멍이 많이 들어."
 세준은 멍 이야기를 하다가 김 기사가 없고 그가 운전을 했었더라면 태림에게 또 다른 새로운 경험을 시킬 수 있을 상황으로 몰리고 말았다.
 태림은 멍이 잘 드는 피부였기 때문에 세준의 손길에도 멍이 잘 들곤 했지만 또 금방 사라지기도 했고, 혹시 세준이 조금만 힘을 주어서 그녀의 피부를 입에 머금기라도 하면 자줏빛으로 변해 태림이 조금만 목 근처로 와도 놀라기도 했다.
 태림은 갑자기 자신을 놀리다가 말을 멈추고 밖을 내다보는 세준의 변화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눈길을 느꼈는지 태림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사람의 손이 이렇게 따뜻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엄마의 손은 따뜻했지만 커 갈수록 태림의 손이 더 커갔었고, 아버지와는 손을 잡고 외출한 적은 한번도 없어 누군가의 손에 그녀의 손이 폭 감싸진 적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손을 잡은 채 각자의 옆에 있는 창을 바라보며 이렇게 잡은 손이 절대 놓아지는 일이 없도록 빌었다.

 집에 도착해서 씻으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태림은 세준이 보내는 욕망의 기운 때문에 제대로 밥을 먹을 수조차 없었다.
 태림은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혹시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나 않았을 까하는 걱정 때문에 어른들의 얼굴을 둘러보았지만 그때마다 마주친 건 세준의 강렬한 눈빛이었다.
 "저 숙제가 많아서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래라. 과일 좀 가지고 가지 그러니?"
 시어머니는 아주머니에게 태림이 먹을 과일을 따로 담으라고 시켰다.
 "아니에요. 배불러서 못 먹을 것 같아요. 쉬세요."
 방에 와서야 태림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세준의 내 뿜는 욕망을 이처럼 강하게 느낀 적이 없는 태림은 그 것을 소화해 낼 자신이 없었다.
 태림이 떨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고 있을 때 세준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방 앞에서 그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는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서재로 향했다.
 태림은 그를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태림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을 보이고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유혹의 눈빛을 태림에게 보냈었다.
 태림은 그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흘러도 그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태림이 참을 수가 없었다.
 "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세준의 짧게 대답했다.
 "왜?"
  세준은 태림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그의 냉정한 행동에 당황한 태림은 어쩔 줄 몰랐다.
 괜히 왔나봐.
 평상시의 태림이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거였다. 하지만 그와 헤어질 아픔을 준비하는 태림은 달랐다.
 "일이 많이 있나봐요?"
 "응. 좀 있어."
 태림은 서운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방해해서. 뭐 드실 거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아니."
 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다가 태림은 자신이 손가락을 꼬고 있는 걸 발견하고 손을 등뒤로 보냈다.
 "알았어요."
 "……."
 휙 하는 순간에 태림은 세준의 무릎에 걸터앉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태림은 자신이 이렇게 만든 건지 아니면 세준이 이렇게 만든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어? 저기.."
 세준은 태림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틈을 타 그녀의 자세를 바꾸어 그의 다리 위에 걸쳐 앉도록 만들었다.
 "숙제는?"
 세준은 손은 이미 그녀의 가슴께를 헤매고 있었다.
 "다 했어요."
 세준은 한번의 멈춤도 없이 그녀의 윗옷을 벗겨내 브래지어만을 남겨 놓았다.
 "여기서요?"
 태림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말았다. 단 한번도 이런 자세로 그와 사랑을 나누어 본적이 없었다.
 "응."
 "하지만 어떻게요?"
 세준은 태림이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이 싫어 태림의 치마를 머리 위로 벗겨냈다.
 "치마를 이렇게 벗는 건 아마 너 밖에 없을 걸."
 태림은 그의 말도 부끄러웠지만 팬티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남성에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이미 부풀어 올라 그녀를 자극하고 있었다.
 "가만히 좀 있어."
 태림이 그의 남성의 느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들썩이자 세준은 그녀의 들썩이는 허리를 잡아 그에게 고정시켰다.
 "젠장."
 태림은 갑작스러운 욕설에 세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왜요?"
 "멍이 너무 많이 들었잖아."
 세준의 태림의 다리와 팔을 부드럽게 만졌다. 마치 태림의 마음의 상처와 몸의 상처를 동시에 없애 주려는 그의 손길에 태림은 그의 목에 스스럼없이 팔을 둘렀다.
 "괜찮아요. 지금은 아프지도 않는 걸요."
 세준은 그녀의 허리를 들어 올려 책상에 걸터앉게 한 후, 마지막 남았던 옷가지까지 전부 그녀의 몸에서 벗겨냈다.
 태림은 다리가 벌려진 자세가 부끄러워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세준은 그녀의 다리 사이로 의자를 밀고 들어와 앉아 그녀의 전라가 그의 눈과 손안에 들어오게 만들었다.
 태림은 더 이상의 부끄러움을 느낄 순간도 없이 자신의 가슴에 느껴지는 세준의 입술의 감각만을 느끼며 손바닥을 책상에 내리 누르며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지탱했다.
 그녀는 세준의 손길에 취해 있다가 어느새 그녀의 다리 사이에 와 있는 그의 얼굴에 놀라 흠칫했다.
 "저..저기..."
 태림이 놀라 그의 얼굴을 밀어내려 했지만 세준은 그녀의 손을 다시 책상에 눌러 못 움직이게 한 뒤 그녀가 들뜬 교성을 지를 때까지 멈추지 않고 입술과 혀를 놀렸다.
 "이제.. 그만...해요."
 세준은 태림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왔다는 걸 느끼고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려 다시 그의 무릎에 안도록 만들었다.
 태림은 어느 순간에 알몸이 된 그의 몸에 놀라 눈을 떴고, 그의 눈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말이 필요 없음에 감사했다.
 세준은 태림의 엉덩이를 자신의 남성에 맞추고 처음인 태림을 위해 천천히 그녀의 몸이 자신의 몸을 덮도록 이를 악물었다.
 "으흠...."
 태림의 신음 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고, 그게 신호가 되어 그들은 서로의 모든 걸 서로에게 바쳤다. 
 사랑해요. 아주 많이
 태림은 그의 품에 안겨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18


 오공주파 아이들은 그 일이 있는 다음 날 바로 근신에 들어갔고, 아이들은 잘되었다고 좋아하면서도 소리 소문 없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궁금해 했고, 다들 추측을 할 뿐이었다.
 태림이 그들에게 당하는 걸 선생님에게 보고해준 고마운 후배 역시 누군지 모르지만 나중 일을 생각해서 소문을 내지 않는지 저학년에서도 별다른 소문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유정은 뭐가 불만인지 태림에게 말을 잘 걸어오지도 않았지만 태림은 곧 터질 일 걱정에 신경 쓰지 않았다.

 우려하던 일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당분간 집에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
 "왜요?"
 태림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세준의 얼굴에 자신이 쥐어준 그늘은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었다.
 "누가 회사 기밀을 밖으로 유출시킨 것 같아……. 다 해결되면 그때 말해줄게. 약속해."
 그녀는 세준이 그녀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다는걸 알았다.
 "만약에요."
 "뭐."
 세준은 태림이 내어주는 옷을 입다가 그녀의 주춤거림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약에 제가 큰 잘못을 했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
 "뭐 잘못한 거 있어?"
 세준은 옷을 마저 입고 태림을 소중히 안았다.
 "아...니요."
 지금 말해 버리라는 마음속의 속삭임을 태림은 죽여 버렸다.
 "무슨 잘못을 해도 용서할게. 하지만 날 배신하지 마 그럼 난 미쳐버릴 지도 몰라."
 세준은 태림이 그 자리에 굳어버린 것도 모른 채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기고 바삐 회사로 나갔다.
 거의 모든 일을 세준에게 전담시키고 쉬던 시아버지까지 회사로 간걸 보지 않아도 태림은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차라리 세준에게 사실을 말하고 엄마를 데리고 나오는 방법을 찾아야 했을 지도 몰랐지만, 이미 늦었다.
 너무 늦어 돌일 킬 수 없는 곳으로 물은 흐르고야 말았다.

 쾅!
 태림은 평상시와 다르게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에 세준이 드디어 모든 걸 알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그와 침대에 같이 들기 전에 외롭게 혼자 잠들었던 소파에 몸을 굳히고 앉아 주위의 모든 것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책상, 장롱, 테이블, 방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분명 시어머니가 가져다 놓은 것 같은 그림, 그리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낸 침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이방에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끼고 있었다.
 "너....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질 수 할 수가 있어?"
 "……."
 태림은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생전 처음 보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서서 너무 화가 나서 소리조차 치지 못하고 낮게 말하는 그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곧 쫓겨날 자신 보다 더...
 "무슨 말이든지 해봐. 네 능구렁이 같은 아버지가, 널 그렇게 잔인하게 때리는 아버지가 뭐가 좋아서 그런 일을 한 건지 말해보라고?"
 세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리를 곧추세운 채로 소파에 앉아 있는 태림의 어깨가 멍이 들 정도로 거세게 잡아 일으켜 세워 흔들어 댔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단 한마디 말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너 이러기 위해서 나하고 잠자리에 같이 든 거야?"
 태림은 그것만은 아니었기에 그것만은 그가 오해하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처음으로 그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건……."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아. 네 아버지가 그렇게 좋다면 떠나."
 "제발……."
 태림은 애원했다.
 "너하고 네 아버지는 다르다고 생각했어. 아니 그럴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넌 네 아버지와 한 치도 다른 것이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세준은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그렇게 휑하니 방을 나가버렸다.
 세준이 그렇게 집을 나선 뒤 시아버지는 태림의 얼굴을 보고 싶지도 않은지 찾아오지도 않았고, 시어머니는 머리에 하얀 끈을 두른 채로 방으로 들어섰다.
 "너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니? 너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는데, 이게 그에 대한 대가니?"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하다고! 죄송한 줄 아는 애가 이렇게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그동안 그렇게 태연하게 지냈단 말이니. 어쩜 넌 네 엄마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니 못된 아버지를 쏙 빼다 박았니."
 태림은 아버지의 피를 무시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했다.
 "세준이 아빠가 어릴 적 네 어머니 집안에 큰 은혜를 입었다 길래. 그것이 고마워서 잘해줬다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너 같은 애는 필요 없으니 쫓아내기 전에 네 발로 알아서 나가."
 시어머니 역시 태림이 얼마나 힘들어하는 지는 안중에 없었다.


 비가 왔다 장마가 시작되는지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가 내리기 시작했고, 바람은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힘차게 불었지만 태림은 더 이상 자신의 집이 아닌 이곳에 머물 수가 없었다.
 "저..."
 -돌아올 생각 말아라. 어떻게 처신했기에 그 일이 세준이 그놈이 그 일을 알게 만들었냐.-
 마치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처럼 느껴지는 대답.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아버지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지낼 수 없어요."
 -넌 이미 그 집사람이니 죽어도 그 집에서 죽어라. 돌아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쫓겨나는 게 누구 때문인데 엄마의 곁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다니.
 그녀는 사실 시아버지가 준 용돈과 세준이 준 돈은 지갑만 빼 놓고 고스란히 남겨두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집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세준은 비가 많이 오는 데도 어디서 자는 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집에는 비바람 소리만 가득할 뿐 적막과 어둠으로 가득했다.
 세준이 태림이 있는 동안 들어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작은 미등 조차 켜 놓지 않아 그녀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새벽이었지만 태림은 꼭 필요한 옷가지와 필수품이 든 가방과 우산 하나만을 들고 집을 나왔다. 우산이 있었지만 워낙에 거세게 부는 바람 때문에 태림은 금새 다 젖고 말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에 무작정 걸었고, 비바람에 날라든 전단지 하나를 붙잡고 그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태림이 할 줄 아는 건 조금의 공부와 엄마에게 틈틈이 배운 재봉질뿐이었다. 그녀가 가지고 나온 돈과 그녀의 능력으로는 의류공장에 취직하는 게 전부였다.
 방은 공장과 그리 멀지 않는 달동네의 작은 부엌이 딸린 쪽 방이었지만 태림에게는 그것도 과분한 것이었다.
 처음에 집 주인은 비를 잔뜩 맞고 온 태림에게 방을 주는 걸 꺼렸지만 옆방에 사는 미순이 언니 덕에 방과 일자리를 금방 얻을 수 있었다.
 "아가씨 이런데서 살아봤소."
 "아니요. 하지만 여기서 꼭 살아야 해요."
 태림은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주인아주머니의 눈길이 불편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조용히 견디어 냈다.
 "아줌마 누군 처음부터 이런데서 살라고 태어난 사람이에요. 착해 보이는구먼, 방 줘요. 내 옆방 비었잖아요."
 태림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을 보기 위해 뒤 돌아섰고, 즉시 강인해 보이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기는 한데, 이런 데서 살만한 아가씨는 아닌 것 같아서, 그리고 어려 보이잖아."
 "아줌마 내가 이 집에 온지 6년이 지났어요. 그때는 나도 어렸잖아요. 들어가서 짐 풀지 않고 뭐하고 서 있어. 얼른 들어가."
 "아....네."
 그렇게 해서 태림의 독립생활은 시작되었다.

 

 생각 보다 쉽지는 않았지만 태림은 독립생활을 잘 해나가고 있었다. 미순의 도움으로 일자리도 빨리 구할 수 있었고, 미순 뿐만 아닌 다른 사람과도 안면을 트고 지내 그다지 외롭지 않았다.
 같은 달 방에 살게 된 미순 언니는 태림이 부러워 할 정도로 씩씩 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공장에서도 인기가 많은 언니였다.
 시골에 있는 조부모님이 동생들을 돌봐주고 있지만 그들의 생활비를 위해 공부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공장생활을 하는 억척스럽지만 참 착한 사람이어서 정이 많이 갔다.
 태림은 힘든 노동 때문에 항상 잠이 부족했지만 사람들과 일부러 더 어울리며 지냈다. 그련 태림을 미순은 단 한번도 짜증내지 않고 아침 마다 깨워 주어서 지각하는 일은 없었다.   "태림아! 어서 일어나 잘못하면 늦겠다."
 동료들이나 미순 언니는 처음에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태림은 좀처럼 피곤이 풀리지 않아 아침 마다 고생해야 했다.
 "너 약골인가 보다. 키만 커가지고 힘은 하나도 없나봐."
 "왜?"
 미순과 태림은 아침 일찍 출근하는 많은 아가씨들 틈에 끼어 걸어 나갔다.
 "아침마다 힘들어 하니까 그렇지. 혹시 너 어디 아픈데 있는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봐."
 태림은 정말 아픈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없어. 아프기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러면 다행이고."
 
 그 다음 날 역시 미순이 태림을 깨웠다.
 다행이 오늘은 언니가 아침을 준비하는 차례였다. 그들은 시간도 아끼고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자는 것만 빼놓고 살림을 합쳤다.
 나중에 좀더 돈이 모이면 둘이 같이 쓸 수 있는 넓은 방으로 옮기기 위해서 생활비를 아끼고 또 아끼었다.
 "오늘은 북어국이다."
 미순 언니는 오랜 객지 생활 덕분인지 음식 솜씨가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욱."
 "왜 그래?"
 태림은 세면장에 뛰어나가 위가 뒤집혀 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구역질을 했다. 미순 언니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는지 따라 나와 등을 두들겨 주었다.
 "언니 이제 괜찮아졌어."
 연두 빛 위액까지 넘기고 나자 속이 진정이 되어 눈앞에 있는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태림이 혹시 너 아이 가진 거 아니야?"
 풍덩
 태림의 손에서 바가지가 미끄러져 다시 통으로 빠져버렸다. 언니의 말을 듣고 보니 찾아올 것이 오지 않는 게 기억이 났다. 생리가 시작한 것도 고 2때부터이었고, 양도 많지 않고 가끔 뛰어 넘기도 해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제 일이 너무 고되어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나 어떻게 언니."
 그녀들은 상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한동안 말이 없이 앉아있었다.
 "누구 아이야? 설마 너 공장장한테 당한 건 아니지?"
 태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 능구렁이 같은 공장장이 태림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우두머리 중에 하나인 미순 언니가 암탉이 병아리를 지키듯이 옆에서 살펴주어서 공장장의 마수에 벗어날 수가 있었다.
 "오늘 조퇴하고 나하고 병원에 가자. 공장에 다닌 애들 중에 중절수술 한 애들 많아."
 중절 수술이라는 말에 온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섬뜩한 기분이 들어 태림은 한기가 든 사람처럼 몸을 손바닥으로 연신 문질러 댔다. 그런 건 생각해 보고 싶지 않았다.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절망적이거나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싫어. 언니."
 "이 바보야! 그럼 그 애 나을 거야. 너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아이까지 낳아서 어떻게 길러."
 태림은 언니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나.. 사실은 결혼했어."
 미순의 얼굴은 정말 충격을 많이 받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나 그 집에 못 들어가."
 "너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면서."
 태림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그래서 널 쫓아낸 남자아이를 낳아서 기르겠다고, 너 바보니. 임신한 거 알면 당장에 공장에서 쫓겨날 텐데 그럼 어떻게 먹고살려고."
 태림은 언니가 공장장이라도 되는 듯 무릎을 꿇고 사정을 했다. 여기서 포기 할 수는 없었다. 엄마가 있는 집에도 돌아갈 수도 없었고, 세준이 있는 집에도 갈 수 없는 그녀로써는 미순 언니가 마지막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니 제발.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 나 이 아이 꼭 낳고 싶어. 응 제발."
 미순은 눈물을 흘리는 태림을 우선 진정을 시키고 공장에 출근을 하자고 하고 겨우 태림을 준비시켰다.
 "야! 뛰어. 이러다가 너 임신한 것 들키기 전에 지각했다고 쫓겨나겠다."
 "응."
 미순 언니가 그녀의 비밀을 지켜줄 것이 확실해 지자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조금 늦어 공장장에게 규율교육을 받아야 했지만 미순과 태림은 그 시간동안 비밀스러운 웃음을 지은 채 전혀 지루해 하지 않았다.
 
 오늘도 10시간이 넘도록 일을 하고 왔다. 아직은 잔업이 없는 기간이라 그나마 일찍 끝나는 거였다.
 "자 이걸로 감아라."
 미순 언니는 태림의 방으로 들어오더니 기다란 천을 태림의 무릎 앞에 던져 놓았다.
 "이게 뭔데?"
 "지금부터 감아야 나중에 배가 덜 나와. 그래도 하는데 까지 일해서 돈을 모아야 애를 키울 꺼 아니야."
 태림은 천을 들어 올려보았다.
 "답답하겠지만 가능하면 풀지 말고 하루종일 차고 살아. 나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 남들이 애 날 때까지 몰랐었어."
 가슴을 감고 다닌 적이 있어 어느 정도는 참을 자신은 있었지만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을 가 싶은 걱정에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천을 보자 태림이 가슴을 작게 보이려고 천을 두르던걸 싫어하던 세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러면 배속에 있는 애가 너무 답답해하지 않을까?"
 미순은 태림이 안쓰럽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자신의 뜻을 무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혹시라도 네 배가 나온 걸 다른 사람들이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공장장이 아는 건 시간문제야."
 "알았어. 언니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그런데 아이 아빠에게는 말하지 않을 거니?"
 "……."
 "일하면서 아이 키울 수는 없잖아. 누가 봐 줄 사람도 없고."
 "잘 모르겠어. 언니. 그건 좀 더 생각해 볼게."
 그 날부터 태림은 씻는 시간을 빼 놓고는 배에 항상 천을 감고 다녔고, 잠자는 시간만큼은 아이가 마음껏 움직 일수 있도록 천을 감지 않았다. 아침에 하는 입덧 말고는 임신한 증거가 전혀 없어 미순 언니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넘어가고 있었다.

 드디어 점심시간이었다.
 점심도 교대로 먹어야 할 정도로 공장은 바쁘게 돌아갔지만 이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직원들은 각자가 정한 쉼터로 가서 무작정 앉아 있거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태림의 눈에 들어왔다.
 "미스 김! 커피 좀 마셔봐."
 오늘도 능글맞은 공장장의 안테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를 피해서 한적한 곳으로까지 왔는데, 그도 따라온 모양이었다.
 "아니요. 배불러서 더 이상 안 들어 갈 것 같아요."
 사실이었다. 배가 나오지 않기 위해 감은 천 때문인지 평상시에 비해 덜 먹어도 배가 금방 불렀고, 소화되는 시간도 오래 걸려 태림은 밥을 먹고 나면 소화가 될 때까지 돌아다녀야 할 정도가 되었다.
 "아무리 배불러도 이건 달라. 이게 얼마나 맛있는 줄 알아. 자 어서 마셔보라니까."
 공장장은 싫다는 태림의 말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마시던 컵을 그녀의 입술에 들이밀다 시피하고 있었다. 커피 냄새가 태림의 위를 자극하는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맛있다는 말이죠. 공장장님 내가 태림이 대신에 마셔도 되죠."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미순 언니는 공장장의 손에서 컵을 빼앗아 들더니 안에 있는 내용물을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에게~~ 이게 뭐야 쓰기만 하구만 이런 게 뭐가 맛있다는 거예요. 뭘 이런 걸 마실 거라고 내놓는데요."
 미순 언니의 인상을 보니 마시지 않은 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도 가끔 커피를 드시기도 했고, 그 향을 좋아했었지만 오늘은 그 냄새도 참기 힘들어 지려고 했다.
 "아니 미스 한이 이걸 왜 마셔. 이게 얼마나 비싼 건 줄 알아. 미군에서 나온 거란 말이야."
 미순 언니의 표정은 완전히 음식가지고 장난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공장장을 바라보았지만 공장장은 태림이 주려는 것을 미순이 마셔서 인지 씩씩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요? 별로 맛도 없고만.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세요. 가자 태림이 일할 시간 다 되간다."
 태림과 미순은 뒤에 남은 공장장의 화난 모습에 낄낄거리면서 그곳을 벗어났다.
 "완전히 뭐 씹은 얼굴이지. 고거 참 고소하다. 다음부터는 혼자 있지 마 알았지? 쉬더라도 사람들 있는데서 쉬거나 나랑 같이 있어."
 "그럴 게. 그런데 공장장이 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너무 눈 밖에 나는 거 아니야."
 "야야 걱정하지 마. 그러면 지가 어쩔 건데. 내 재봉 솜씨는 이 부근에서 다 알아줘. 여차하면 너 데리고 다른 공장으로 가면 되니까. 넌 공장장이나 조심해, 내 걱정이랑은 하지 말고."
 태림은 정말 미순의 말처럼 해야 할 것 같았다. 요즘 공장장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고, 틈만 나면 일하는 태림의 옆으로 나가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는 행동을 하거나 그녀의 귓불을 만지려고 들어서 태림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태림은 그녀들을 향해 인상을 쓰고 있는 공장장을 다시 한번 힐끗 쳐다보고 미순 언니를 따라 작업장안으로 들어가는 다른 여공들과 섞여들었다.

 아이를 가진 걸 알게 된 후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엄마였다. 목소리에 너무 힘이 없었다.
 태림은 너무 미안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
 -전화를 걸었으면……. 혹시 태림이니? 너 태림이지?
 "엄...마. 잘 지냈지. 너무 오랜만에 전화해서 미안해."
 -괜찮아. 난 너만 잘 있으면 다 괜찮아."
 태림은 아이를 가지고 나니 왜 엄마가 그런 인생을 살았는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부모님이랑 정 서방은 잘 지내지?
 "어? 네."
 태림은 엄마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왜 엄마는 태림이 집을 나온 사실을 모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엄마에게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른들에게 잘하고. 정서방은 너한테 잘하지?
 "그럼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엄마와의 통화를 끝낸 태림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왜 엄마가 태림이 더 이상 세준의 집에서 살지 않는 걸 모르는지 궁금했지만. 차라리 엄마가 모르는 것이 더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봐야 뭘 어쩌겠는가?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태림 역시 엄마에게 해 줄 것이 아직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순 언니가 남자를 사귀기 시작했다.
 태림은 그들을 보고 있자 너무 부러웠다. 미순 언니는 태림과 너무 달랐다.
 언니는 남자 친구에게 뭐든 당당했고, 자신 있는 사랑으로 그에게 다가 갔다.
 "바보 같아."
 미순은 공원에 놀러 나와 음료수를 사가지고 오겠다면 덩벙거리는 남자 친구의 뒷 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사랑이 묻어나는 말이라는 걸 태림은 느낄 수 있었다.
 "부럽다. 오빠가 언니에게 너무 잘하는 것 같아."
 미순의 남자 친구인 효민 역시 미순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걸 부끄러워 하거나 감추지 않았다.
 "그러면 뭐해. 아직 결혼 할 능력도 되지 않는 걸.'
 "조금 만 참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들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신이 너무 처량해 보였고, 뱃속에 있는 아이도 너무 불쌍했다.
 태림은 쉬는 날 일찍 일어났다.
 세준은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태림을 일찍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에게 얼굴을 들어낼 생각은 아니었지만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지난 번에 산 원피스를 입었다.
 "어디가니?"
 "어. 좀 다녀 올때가 있어.'
 "그래. 나도 효민이학 나가려고 했는데 잘됐다. 너 혼자 두고 가는 게 영 불편했는데. 조심해서 다녀와."
 "응. 재미있는 시간 보내.'
 
 버스를 타고 세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 보이는 나무들이 오늘 따라 유난히 푸르게 보여 태림의 눈을 눈부시게 했다.
 그가 언제 나올 지는 알 수 없지만 태림은 모퉁이에 숨어서 그를 기다렸다. 그의 모습이라도 멀리서 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몇 시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세준이 회사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런데.....
 그의 옆에는 태림이 아는 사람이 뒤 따르고 있었다. 이제 대학생이 되었을 유정이었다.
 유정은 세준에게 잘 보이려고 한껏 멋을 냈는지 머리도 길어서 요즘 유행하는 파마머리를 했고, 옷도 태림이 한 달에 받는 월급과 맞먹어 보이는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세준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유정은 연신 혼자 뭐라고 재잘거리며 세준의 옆에 붙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태림의 한쪽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통증이 밀려 들어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유정은 분명 태림을 보았다.
 넌 절대로 세준 오빠를 가질 수 없어. 그대로 영원히 사라져 버려.
 세준이 태림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라 유정은 넘어지는 시늉을 해 세준의 시선을 끌었다.
 "아야.'
 "괜찮아. 잘 걷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높은 굽을 신고 나니는 지."
 "아니에요. 저 잘 걸어요. 저 오늘 점심 사주시면 안돼요?"
 "바빠."
 그에게 돌아오는 건 항상 냉정한 말투 였지만 유정을 그가 포기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튕겨요. 하지만 언젠가는 꼭 내 것이 될꺼에요.
 
 태림은 세준을 보기 위해 간 그 날을 잊고 싶었다.
 "너 너무 무리 하는 거 아니야. 좀 쉬어 가면서 일해."
 식사 시간 말고는 항상 앉아서 일하는 태림이 때문에 미순이 걱정할 정도였다.
 "무슨 일 있었어. 지난 번에 어디 간다고 한 날부터 너 좀 이상해.'
 "아니야. 나 괜찮아."
 미순의 걱정을 물리치고 나서도 태림은 손과 발을 쉬지 않았다.
 "이런! 우리 미스 김이 일을 열심히 하는 구만. 자자! 여러분들도 좀 배워요. 우리 미스 김......"
 태림은 공장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더욱 힘차게 발판을 눌렀다.
 
 "야? 너?"
 태림은 우유를 사러간 미순 언니를 기다리면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
 "저요?"
 "그래 너. 여기 너 말고 또 누구 있어."
 언제나 잘난 척이 심해 태림은 승미와 친한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고, 미순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왜요?"
 "왜요. 이게 정말 몰라서 물어."
 태림은 짜증이 났다. 자신이 뭘 잘 못했기에 시비를 걸어오는 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정말 모른단 말이지. 좋아. 내가 설명해 줄게. 너 왜 공장장님한테 꼬리쳐."
 "뭐요?"
 태림은 정말 어의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봐봐. 네가 질리는 데가 있으니까 말을 못하지."
 사람 잡는 대회에 나가면 일등 감이었다.
 "오해하신 모양인데요. 전……."
 승미는 태림의 말을 끊으며 어깨를 툭툭 쳤다.
 "오해. 웃기고 있네."
 정말 관심 없었다. 뭐가 좋아서 나이도 많고 능구렁이 같은 공장장의 눈에 들려고 노력한단 말인가?
 "그만 하세요. 전 정말 아니니까요."
 "이게 혼 이 좀 나봐야 정신을 차릴려고..."
 승미는 태림의 머리 카락을 잡을 기세였지만 태림이 동작이 너 빨랐다. 태림은 승미의 손길을 재빨리 피했고, 즉시 그녀를 힘껏 밀었다.
 "아야... 이게 너 오늘 나한테 죽었어."
 승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태림에게 달라 들었고, 태림도지지 않으려고 승미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어머머. 이게 무슨 일이야.'
 우유를 사들고 온 미순 언니와 그들이 싸우는 걸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싸움은 끝났지만 태림의 손에는 승미의 긴 머리카락이 한줌 쥐어져 있었다.
 "한번만 쓸데 없는 소리로 날 건들기만 해봐. 그때는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승미는 씩씩 거렸지만 그 자리를 피했다.
 "태림이 너 보기보다 강자 있다. 우리 공장에서 사납다고 소문한 승미를 단 한번에 이기다니. 그런데 승미가 뭐라고 하던.'
 태림은 머리를 매만지며 들었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미순에게 해주었다.
 "뭐? 정말? 승미가 공장장 첩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인가 보다."
 태림은 그런 것에 평가를 내리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공장장이 다른 건 별로 없었으니까.
 그 뒤로 승미는 태림만 보면 슬슬 피해 다녔고, 공장장도 승미에게 뭐라고 소리를 들었는지 태림이에가 한동안은 접근 하지 않았다.
 예전에 세준이 싸울 땐 싸워야 한다는 말을 확실히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태림이 일하는 공장의 노동자 계층과 학생들에게서는 점점 정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제가 부터 태림이 다니던 공장도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하나 둘씩 변해가고 있었고, 미순 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니 그거 위험한 것 아니야."
 언니는 공장에 다니는 몇몇의 직원들과 대학생들과 만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귀가도 늦어지고 있었고, 가끔 이상한 전단지 같은 것을 집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의 노동력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걸. 이제는 저 윗사람들도 알아야 할 때가 됐어."
 태림은 자신들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공순이들이 인간 대접도 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장은 직공들의 인격과 노동시간 같은 것은 무시한 채로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만큼 일을 시켰고, 그것도 부족해 임금도 자기들 마음대로 책정해서 주고 있었다.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고 했어.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 보다 더 무섭다고."
 하지만 이 나라에선 노동자의 인권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였고, 더구나 학생들과 유착해서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인권 유린은 무서우리 만큼 철저했다.
 "넌 임신했으니까. 그냥 빠져 있어. 이 언니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마. 누가 뭐라고는 못할 꺼야."
 언니의 말대로 태림은 그 일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미순 언니가 걱정이 되어서 마음이 편하지 만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순 언니와 다른 사람들이 계획하는 일이 잘 되어서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언니 검정고시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 만나느라고 공부도 하지 않고."
 미순 언니는 시골에 있는 동생들과 그들을 뒷바라지 해주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돈을 보내주기 위해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이곳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그래도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넉넉하지 않는 살림이었지만 학교도 다닐 수 있었고, 행복했었다고 했다. 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지금은 형편이 되지 않지만 나중에라도 대학에 가는 게 언니의 꿈이었고, 그걸 알게 된 태림은 미순 언니에게 시간만 나면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대학에 가는 거포기 할 거야. 언니 못된 사람들 혼내주는 검사가 되고 싶다면서."
 미순은 그런 태림의 말에 잠시 주춤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다시금 굳은 결심이 선 표정으로 가득했다.
 "어차피 지금은 이룰 수 없는 꿈이잖아. 우선 눈앞에 있는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어. 지금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회피한다면 검사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난 하류층이라고 무시하고 짓밟는 소위 윗사람들이 각성하는 꼴을 꼭 보고 말 거야."
 미순은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지만 언니는 그들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그 무슨 소리를 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등이 따뜻하면 그만이었고, 가족들이 행복하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가 소요된다고 해도 그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길 사람들이었다. 가장 가까운 아버지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미순 언니에게는 그런 말도 이미 통하지 않았다.
 태림은 언니에게 무슨 말을 해도 언니가 돌아서지 않는 다는 걸 깨닫고 제발 언니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태림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위가 일어 난지 3일도 되지 않아서 공장 측에서는 시위진압대를 내세웠고, 주동자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다 잡아가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들은 겉으로는 합의를 하겠다면서 대표들의 합동회의를 제의하고서는 그들이 시위대들의 밖으로 나오자 바로 어디론가 데리고 가버렸다.
 그 중에 미순 언니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 일을 말릴 수는 없었다. 시위주동자들이 잡혀가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은 채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다시금 일을 시작했지만 태림은 미순 언니가 걱정이 되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미순이 괜찮겠지."
 효민 역시 언니와 같은 일이 했지만 다행이 재빨리 피해 잡혀가지는 않았지만 도망자 신세는 면하지 못했다.
 "그럴 거라고 믿어요. 그런데 오빠는 어떻게 할 거예요?"
 "당분간 숨어 있어야지. 태림이 너도 조심해. 가끔 들릴 테니까 혹시 미순이 소식 들으면 알려줘."
  하루하루 얼굴이 달라지는 직공들과 공장장의 협박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미스 김. 다른 공순이들이 어디로 간지 알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어. 미스 김도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내 말 잘 들어야해."
 공장장은 그 느끼한 눈빛을 하고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고, 급기야 그녀가 천을 감아 놓은 곳까지 내려오려고 하자 태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공장장의 눈빛이 좀 이상하게 변했지만 태림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 자리를 피하기에만 급급했다. 그에게 아이가 생긴 걸 들킨다면 미순 언니가 도와준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도망가 버렸다.
 태림은 당장 배를 조이고 있는 천을 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막기 위해 뼛속까지 시린 물로 세수를 연신 해대었다. 신경이 다른 곳으로 몰리면 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차가운 물에 얼굴이 얼얼했지만 숨쉬기는 많이 편해졌다.
 미순 언니가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여공들은 공장장의 눈 밖에라도 나서 쫓겨나기라도 할까봐 몸을 사리는 통해 공장장의 횡포는 날로 더 심해지고 있었다.
 오늘도 시위를 한다면서 일을 하지 않아 밀린 일이 많다면서 10시까지 일을 시켰다. 하루 종일 옷감과 재봉틀로 시름을 했더니 이제는 눈이 빠져버릴 것 같아 땅만 쳐다보고 걸었다. 땅에는 누군가 걸어 다녔다는 흔적이 눈 위에 이리저리 남겨져 있었다.
 집 근처에 다와 전봇대를 지나려는데 검은 그림자 몇 개가 태림의 시선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녀의 발 아래로 삼켜져버렸다. 태림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가 이상하게 느껴져 고개를 들었는데, 그곳에는 처음 본 남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서있었다. 태림은 그들에게 풍기는 분위기가 어딘지 소름이 끼쳤다.
 "아가씨가 김태림이지."
 태림은 그들이 누군지 몰랐지만 그 자리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지고 거의 하루 종일 일하는 태림이 장성한 남자들을 따돌리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이러세요. 살려주……."
 "조용히 해."
 남자들은 태림을 양쪽에서 붙잡더니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천으로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았고, 그 냄새는 태림을 깊은 잠으로 빠져들게 했다.

20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손으로 머리를 만지려고 했지만 손은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윽……."
 태림은 손이 움직여지지 않자 처음에는 가위에 눌린 것이라 생각하고 풀려고 노력하다가 벽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에 머리 위에서 누렇게 비추는 전등과 자신이 앉아있는 자세에 의해 남자들에게 납치되어 온 것이 기억이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려움에 방안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녀 말고는 아직은 아무도 없었다. 태림은 겁에 질려 손을 풀려고 했지만 효율적으로 묶인 결박은 풀어질 생각은 하지 않고 태림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더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고! 이런 우리 작은 아가씨 드디어 일어났나 보군."
 태림은 삐거덕거리면서 열리는 철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면서 열리는 문과 동시에 남자 둘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인상은 험악했지만 그녀를 납치한 남자들은 아니었다.
 세준이 보고 싶었다. 저 무서운 아저씨들을 세준이 없애주기를 바랬지만 세준은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태림은 직감적으로 미순 언니와 연관 된 일로 자신이 이곳에 납치되어 왔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언니에 대한 원망보다 미순 언니의 걱정이 앞섰다.
 "언니는요?"
 남자들은 태림이 알아서 말하기를 기다리는 듯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절.. 왜 데리고 오신 거예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하얀 상의 위에 권총집을 찬 두 남자는 서로 쳐다보면서 눈길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아는 것하고는 틀린데. 정보에 의하면 아가씨가 이번 시위 주동자중 한 명인 한미숙이 하고 친한 사이인데 다가, 한 집에서 산다던데."
 이상했다. 분명 그 사실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태림을 잡아올 생각이었다면 좀더 일찍 잡아 올 수도 있었는데 왜 시일이 조금 지나서인지 이해 못하던 태림은 오늘 낮에 공장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잘 보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하며 엉큼한 웃음을 떠올리던 그의 얼굴이 생각이 났다.
 분명 공장장이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자신의 손길을 태림이 거부하고 뛰쳐나가자 앙심을 품었던 거였다.
 "한…….한 집에서 사는 것도 맞고 언니와 친한 것도 사실이지만, 언니가 한 일은 정말 몰라요."
 하지만 남자들의 눈빛은 태림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이 아가씨 안 되겠구먼. 아직 어려서 살살 대하려고 했더니. 아직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가 본데. 아가씨 여기 한번 들어오면 살아서 나가기 힘들어."
 "제발 살려주세요."
 아이를 이런 곳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무서운 곳에 미숙 언니가 있다는 것도 믿고 싶지가 않았다. 태림이 잔업에 힘들어하고 있을 때 미숙 언니는 이런 음침하고 칙칙한 곳에 있었던 말인가. 언니가 보고 싶었다.
 "그럼 아는 거 다 말해봐."
 "전 정말 몰라요."
 짝. 짝. 짝.
 이미 폭행에 익숙해진 남자의 손은 태림의 고개가 어깨 넘어서 까지 휙휙 돌아가도록 손을 놀렸다.
 하지만 태림은 정말 아는 것이 없었다. 단지 미순이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 일에 관여하려고 한적히 없었고, 언니 역시 태림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지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좋아 그럼 윤효민이라는 놈이 어디 있는지만 말해."
 "몰라요."
 남자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져 만 갔다.
 "좋은 말로 할 때 말하는 게 아가씨 신상에도 좋다는 거 몰라서 이렇게 고집을 피우나?"
 "본적은 있지만 어디로 가는 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얼굴에 상처가 있는 남자는 거만한 눈길로 태림을 내려다보았다.
 "거짓말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미순이 걱정이 되어서라도 연락하라고 연락처를 남겼을 거 아니야?"
 태림의 모른 다는 말에 또 다시 폭력이 시작되었다.
 이미 붉게 부풀어 오른 볼 위로 눈물이 흘러 내렸지만 두 남자들은 그녀의 눈물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흑흑흑. 정말이에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들은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멈추지 않고 그녀를 때렸다. 그러나 그들의 무자비한 폭행에 태림은 아무런 해줄 말이 없었고, 그녀는 그렇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포기할 줄 몰랐다. 그들은 태림이 때려도 말을 듣지 않자 방구석으로 그녀를 끌고 가더니 작은 욕조에 태림의 고개를 박아 그녀가 거의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 고개를 들게 하는 것을 계속 반복했다.
 "독한 년이구만."
 콜록콜록 헉헉
 너무 괴로웠다. 고개를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남자의 힘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숨을 참기 힘들어 지자 태림이 자신이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머리채를 거칠게 물 속에서 잡아 빼더니 다시 책상 쪽으로 끌고 갔다.
 "이년이 맛을 좀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본데. 야? 저년 옷 벗겨."
 태림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들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뭘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콜록 콜록 제....발 살려....주세요. 정말 전 아무것도 몰라요. 제발요."
 "누가 그걸 믿어."
 얼굴에 상처가 있는 남자는 태림의 뺨을 다시 여러 차례 때려 그녀가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이 혼미해 지자 태림의 블라우스를 찢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쾅
 "멈춰."
 "뭐야?"
 한 남자가 문이 떨어질 정도로 거칠게 열고 들어오자 태림의 옷을 찢으려는 흉터 있는 남자는 짜증을 냈지만 들어온 남자의 얼굴이 심상치가 앉자 바로 동작을 멈추었다.
 "뭐? 이런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내 인생 종칠 뻔했잖아."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쳐져 있는 태림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것도 알아보지 않고 데리고 들어왔단 말이야. 그 공장장 녀석 혼 좀 나야겠구먼. 그래서 데리고 간다고?"
 "아니. 좀 혼내주래."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흉터 있는 남자는 태림의 옷을 벗기는 것을 그만두고 나가버렸고, 나중에 들어온 남자가 남더니 그녀에게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잠이 쏟아지는 태림을 잠이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몸은 맞아서 축 쳐져 있었고, 정신은 극도의 긴장상태에서 이제는 피로가 겹쳐와 고개를 들기조차 힘들었다.
 "아가씨는 운이 좋은 줄 알아."
 태림을 물 속에 집어넣고 때린 사람이 다시 방으로 들어오자 태림은 남아 있는 신경과 힘을 한곳에 모아 정신을 차리기 위해 집중을 했다.
 태림은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고문을 당한 것이 운이 좋다는 건지 이곳에 잡혀 왔다는 것이 운이 좋다는 소리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착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는 커다란 테이프를 찢어서 태림의 입을 봉했다. 태림은 고개를 흔들어 그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그녀가 잠이 들지 못하도록 교대를 하러 들어온 남자가 고개를 거칠게 잡고 고정시키자 어쩔 수 없었다. 테이프를 성공적으로 붙인 남자는 잠시 태림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녀의 뺨을 톡톡 소리 나도록 몇 번 쳤다.
 "얌전히 앉아서 구경하라고, 아가씨도 똑 같은 대접을 받을 신세였는데, 아버지 하나 잘 두어서 이 정도로 끝나니까 나가면 아버지 말씀 잘 들어. 알았지. 학생이 공부나 열심히 해야지 무슨 가출이야."
 태림은 아버지라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더 이상의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데리고 들어와."
 태림은 그들이 데리고 들어온 만신창이가 된 여자의 모습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떠보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끌고 들어온 여자는 많이 맞아서 얼굴이 심하게 멍이 들고 부어 있었지만 분명 미순이 언니였다.
 "음으으음."
 "조용히 해."
 흉터가 있는 남자는 모든 걸 폭력으로 해결하는 사람인지 또 다시 태림의 뺨을 거세게 쳤다.
 "태.....림아."
 뺨을 때리는 소리에 미순은 태림이 있는 쪽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언니의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태림은 이미 많이 맞아 생기마저 다 빠져나가려는 언니에게 물고문을 하려는 남자들을 증오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들은 태림에게 관심이 없었다.
 태림의 뒤에 서 있는 남자 둘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많이 힘은 빠졌지만 그래도 바동거리는 미순의 양팔과 다리를 잡아서 책상위로 올려놓았다. 그제야 태림은 그들이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태림은 언니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지만 뒤에서 잡고 있는 남자 때문에 의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손목이 조여지는 거 몰라.'
 그런 건 상관없었다. 손목이 끊어져 버려도 좋았다. 언니에게 갈 수만 있다면 세 명의 남자들에게 붙잡혀 강간당하고 있는 미순 언니에게다가 갈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대 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 테이프에 막혀 신음소리만 흘러 나왔을 뿐이었고, 작은 방안은 남자들의 웃음소리와 미순 언니의 살려달라는 애원의 소리뿐이었다.
 "안 돼. 제발 하지 말아요. 살려주세요. 태림아 도와줘."
 하지만 태림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었다. 미순 언니의 공허한 눈빛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남자들은 축 쳐진 미순 언니의 몸 위를 마음껏 올랐고 언니의 아름다운 육신을 더러운 손길로 짓밟고 있었다.
 "야! 저년이 고개 못 돌리게 꽉 잡아."
 "네."
 태림의 뒤에 서 있던 남자는 미순 언니의 위에 있는 남자가 명령하자 태림의 고개를 붙잡았다. 그 남자가 무서웠다. 적어도 세준은 태림의 안에 있을 때는 아무것에도 신경을 쓸지 못할 만큼 자제력을 잃거나 태림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미순 언니 위에 있는 남자는 그런 일이, 여자의 순결과 인생을 짓밟아 버리는 일이 숨쉬는 것만큼 자연스럽다는 듯이 차가웠다.
 "움직이지 마. 너도 저런 꼴 당할 수도 있었어."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게 이 순간처럼 죄스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 남자의 말대로 미순 언니가 당하는 무서운 일은 당하지 않았지만, 이런 남자들과 연관이 되 있는 아버지가 이들보다 더 더럽게 느껴졌다.
  남자들은 교대로 미순 언니를 범했고, 그때마다 미순 언니에게 자백을 강요했지만 두 눈을 감은 태림에게 들리는 소리는 삐걱거리는 책상과 남자들의 숨소리뿐이었다.  
 "어 뭐야. 이년 왜 안 움직여."
 태림은 미순이 움직이지 않는 다닌 소리에 처참한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 꼭 감았던 눈을 뜨고 노랑 전등에 비춘 미순의 얼굴을 찾았다. 그런데 미순의 눈은 이미 마지막 가지고 있던 증오의 빛도 사라져 버리고 있었다.
 "혀를 깨물었습니다."
 "에이 기분 잡치는구먼. 미친년 왜 죽고 지랄이야."
 미순의 위에 있는 남자는 그러면서도 미순의 몸속에서 나오지 않고 계속 움직이더니 한차례 강하게 몸을 떨고 나서 그제야 바지 지퍼를 올리면서 미순 언니의 몸 위에 침을 뱉었다.
 그들은 미순의 죽음을 마치 동네에 떠돌던 개가죽은 것 같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미순의 유린당한 몸을 눅눅한 담요에 싸서 방에서 나가버렸다.
 태림은 자신이 본걸 믿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 사람에게 한 짓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직접 앉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지만 미순이 당한 일과 그녀의 죽음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여기서 나가지 못하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마구잡이로 흐르면서 시야를 가리어 주던 눈물조차 이제는 나오지 않았고, 깨끗해진 시야는 담요 밖으로 나와 남자들의 움직임에 생명력 없이 흔들리는 언니의 팔로 가득 차버렸다.
 "이 학생은 어떻게 합니까?"
 "알아서 내보내, 이 정도 했으면 집이 좋은 줄 알겠지."
 남자는 힘이 다 빠져 버린 태림을 거의 끌다시피 하면서 밖으로 내리고 나왔지만 그녀의 눈을 가리는 걸 잊지 않았다.


 그는 태림을 차에 실고는 어딘 가로 운전을 하고 갔다.
 "학생은 정말 운 좋은 줄 알아. 학생 아버지 아니었으면 아가씨도 그런 험한 꼴을 당했을 테니까. 그리고 여기서 본일 아무대서도 이야기하지 않는 게 아가씨 신상에 좋을 거야. 누가 믿어주지도 않겠지만."
 차가 멈추더니 남자는 태림을 차에서 내리게 한 다음 손의 결박을 풀어주고 다시 가버렸다.
 태림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겨우 들어 올려 입에 붙은 테이프와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천을 풀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해서 있는 눈은 강렬한 태양 빛에 감정과 상관없는 눈물을 만들었다.
 세상은 태림이 기억하는 곳처럼 맑고 드높았고, 하늘은 푸르고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가 눈으로 보는 세상은 그녀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 잡혀가기 전까지만 해도 힘들지만 세상은 노력하는 사람의 것, 성실한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은 아버지의 말처럼 힘 있는 자의 것, 무슨 짓을 했더라도 돈을 많이 가진 자의 것일 뿐이었다.
 미순 언니의 영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없어지지 않는 언니의 모습과 처절한 절규가 태림을 빛을 보았다는 사실에도 안도하지 못하게 했다.
 그때 멀리서 기차가 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뒤를 돌아보니 철로가 보였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이었지만 태림은 이곳이 자신이 세상에서 보는 마지막 장소가 되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세준에게도 돌아가지 못하고, 엄마를 아버지의 손에서 꺼내 올 수 없다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가 있었지만 이런 세상에 태어나 보았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태림에게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태림은 점차 앞으로 걸어갔다. 우스웠다. 짧지만 살아오면서 이처럼 담담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나 갇혔었는지 모르지만 그 어두운 곳에서 무서운 일을 당하고 미순 언니의 죽음을 보았는데도 저승으로 가려는 이 길이 무섭지 않았다.
 "언니. 나 기다려 내가 길 동무 해줄게. 우리 아기 자리도 남겨놓아야 돼."
 태림은 철로 한 가운데 서서 저 만치 보이는 기차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기차는 선로 위에 서 있는 태림을 발견했는지 요란스러운 경적 소리를 냈지만 태림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거대한 기계가 자신을 이 세상에서 그 속도만큼이나 빨리 저승으로 보내주기만을 기다렸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와.
 이미 힘이 빠져 버린 몸과 머리가 기차가 다가올수록 강해지는 진동에 흔들렸고, 기차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태림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게 행운처럼 느껴졌다.

21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몸이 공중에 붕 떠있는 몽롱한 감각이 눈을 뜨자 처음으로 느껴졌다.
 "태림아. 괜찮니? 태림아 엄마 여기 있어."
 태림은 듣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 들킬까봐 전화 한 통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부었는지 잘 떠지지 않는 눈두덩 이를 억지로 들어올렸다.
 "엄마?"
 "그래 우리 딸 정신이 드니?"
 "엄마."
 엄마가 떠날 까봐 무서워 태림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녀의 어깨를 내리 누르는 손길에 놀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싫어. 놔줘 싫어."
 태림의 발작에 병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랐지만 엄마의 포옹과 위로의 말에 태림은 겨우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워낙에 기력이 약해진 상태인데 다가 정식적인 충격이 커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머니의 존재에 안정을 취하는 것을 보니 다행입니다."
 태림은 조금씩 기력을 찾기 시작하면서 잠자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고, 덕분에 엄마와 이야기 할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에 엄마는 태림이가 어깨를 침대의 누르는 손에 거칠게 반응하자 태림이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림이가 별다른 설명을 할 필요 없이 아이를 위해 산부인과 진료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실이 밝혀져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한 가지 없애 주었다.
 "엄마 그런데 나 누가 데리고 왔어?"
 "어 밖에 있는 최군이, 아버지가 시켰다고 하더라. 그래도 이 정도니 얼마나 다행이니. 아이도 무사하고 너도 무사하니까. 지금부터는 최군이 네 옆에 항상 있는 다니까 걱정 할 것 없다."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최군이라는 남자는 아버지가 채워 놓은 개 목걸이 같은 거라는 걸 태림은 알고 있었다. 확실히 태림에게 자신의 위력을 보인 아버진 이제는 태림을 감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시지 않네."
 보고 싶지 않았지만 이왕에 맞을 매라면 빨리 맞는 것이 났다는 걸 태림은 잘 알고 있었다.
 "워낙에 바쁘시니까. 시간 나면 오실 거야."
 미안해하는 엄마의 얼굴을 보자 괜한 것을 물었다는 자책에 죄스러웠다. 아버지란 남자는 단 한번도 가족을 위해서 바삐 움직여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가족에게 내는 작은 시간마저도 아까워 어쩔 주 몰라 하는 위인이었다.
 "안보니까 더 좋아."

  최군이라는 남자는 왠지 태림의 눈에 익었다.
 "절 구해 주셨다면서요."
 "별 것 아닙니다."
 기차가 가까이 와있는 상황에서 남의 목숨을 구한다는 일이 결코 별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두 사람 아니 우리 엄마까지 세 사람 목숨을 구해주신 거예요."
 "별 말씀을 하십니다. 전 아가씨가 빨리 완쾌되시길 바랄 뿐입니다."
 최군이라는 남자는 결코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옆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고, 그의 매력에 간호사 몇몇이 눈길을 보냈지만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죽하면 주사를 놓기 위해 온 간호사도 최군이라는 남자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얼굴이 붉어져서 나가고는 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최윤수입니다."
 "반가워요. 윤수씨. 전 김태림이라고 해요. 그런데 혹시 우리 본 적이 있지 않나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전에 학교 앞에서 두 번 뵌 적이 있습니다."
 태림은 그의 말에 아버지가 찾아봤던 두 번다 윤수가 따라 왔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 날부터 윤수는 태림의 모녀와 친해졌고, 병실 밖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태림의 엄마가 준비해 오는 음식을 먹으며 그들과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좀 나가 보시겠습니까?"
 "아니요. 나중예요."
 태림의 얼굴과 손목에 있던 멍과 부은 기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태림은 아직 바깥세상이 두려웠다. 그녀가 안심하고 있을 때 또 다시 그 남자들이 나타나 그녀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끌고 갈까봐 두려웠다.
 그녀는 많이 안정되어 갔지만 미순이 나오는 꿈을 꿀 때만은 예외였다. 미순이 꿈에 나타나는 날은 태림은 소리를 지르거나 땀을 뻘뻘 흘리며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보다 못한 엄마가 태림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응? 엄마한테 말해 줄 수 없니?"
 그 날은 꿈이 가장 극에 치달았던 날이었다.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와 공장장의 추행, 모르는 남자들에 의한 납치, 절망감과 무기력함이 더해져 태림의 가슴을 짓눌렀고, 미순의 공허한 눈빛이 그녀의 눈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왜 정서방은 병원에 한번도 오지 않니? 둘이 무슨 일 있었어? 네 아버지는 워낙에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 도통 알 수가 없구나."
 태림은 엄마가 안쓰러웠다. 대화조차 없는 부부 사이가 얼마나 처량하고 버거운 것인지 태림은 처음 결혼 생활 몇 달 동안 격어보아서 잘 알고 있었다.
 "엄마? 나 시가에서 나왔어."
 엄마의 눈이 놀라움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뭐? 언제? 왜?"
 엄마는 태림의 손을 붙잡고 대답을 재촉했다.
 "일이 좀 있었어."
 "도대체 무슨 일 이길래! 네가 집을 나왔단 말이니? 말을 해봐?"
 태림은 시가집에서 나온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네 아버지란 사람은……."
 엄마의 눈에서 분노가 보였다.
 "그럼. 어떻게 네가 이 꼴을 당한거니? 최군도 잘 모르더구나. 그냥 네 아버지가 말해준 장소에 가서 널 찾아 헤맸다고만 하던데."
 "엄마. 안기부 란 거 들어봤어."
 윤수는 태림의 잠꼬대에 걱정이 돼서 들어오려다 모녀의 말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어. 사람들이 말하는 걸 조금 들은 적이 있어. 요즘 거기에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들고, 살아 돌아온다고 해서 온전한 몸으로는 못 나온다고 하더라. 혹시... 너 거기 들어갔다가 온 거니? 아니지 태림아 아니지."
 엄마는 부모 된 마음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사실이 사라질 순 없었다.
 그곳을 부정 할 수 없듯이.
 "난 그 사람들 말대로 아버지 잘 만나 정말로 운이 좋은 거네. 살아 돌아왔고, 이 정도면-아직도 밧줄 자국이 다 가시지 않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많이 조였는지 한동안 손목을 쓸 수조차 없었다.-몸도 온전한 거니까."
 태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엄마와 윤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태림이 겪었던 일들을 듣는 동안 그들은 숨조차 멈추고 있다는 걸 모를 정도였다.
 "그런 일이……."
 태림은 격한 감정에 휩쓸려 엄마에게 너무 많은 짐을 떠안긴 것이 미안해 바들바들 떠는 엄마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엄마. 미안해."
 "아니야. 아니야. 태림아, 잘 말했어. 그런 일은 너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끔직한 일이야. 그런 기억을 혼자만 알고 괴로워하면 배속에 있는 아이에게도 좋지 않아."
 어떻게 아이를 가진 채로 죽을 생각을 했는지. 그 생각만 하면 아직 세상 아름다움을 격지 못한 아이에게도 미안했다.
 "태림아. 아버지가 원망스럽겠지만 그 일은 아버지만의 잘못이 아닌 것 같아. 미순 이라는 아가씨가 그렇게 죽은 것이 엄마도 너무 마음 아프고 안타깝지만 그 아가씨가 당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이미 일어난 일이었고, 그곳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거였던 거야. 아버지가 사주해서 그 아가씨가 그렇게 죽은 것이 아니라 너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네가 있던 방으로 데리고 온걸 거야."
 엄마의 말이 맞는다는 것이 싫었다. 그냥 그 모든 일은 아버지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이 더 좋았다. 하지만 태림도 엄마가 말한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우리 잊자. 잊어버리기 힘들어도 그래도 잊어버리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너하고 아이만 생각하자."

 엄마에게 고백한 후 태림은 꿈을 꾸었지만 힘들지는 않았고, 꿈속에서의 미순은 편안해 보였다.
 "미순 언니 가족을 찾아서 도와주고 싶어."
 그녀의 말에 엄마는 윤수를 시켜 아버지 모르게 미순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했다. 엄마에게 말하고 엄마가 미순 언니의 가족을 찾는 것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태림은 처음으로 힘이 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나가 보고 싶어요."
 윤수는 태림의 말에 기뻐했고, 극구 싫다는 그녀를 휠체어에 앉게 한 뒤 병원 밖으로 나왔다.
 태림이 그런 일을 겪었지만 세상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태림이 새장에서 잠시 벗어나 먹이도 찾지 못하고 잠잘 곳을 찾지 못한 새처럼 잠시 헤매다가 다시금 그 새장이 그리워 돌아온 새처럼 느껴졌다.
 "심심하죠?"
 한 자리에 20분 정도 앉아 아무런 의미 없이 사물을 바라보다 태림은 옆에 있는 윤수를 그제야 의식했다.
 "아니요. 저도 좋은데요."
 "그런데 저기에 사람들이 왜 저렇게 많이 모여든 걸 까요?"
 태림이 나왔던 병원 입구에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드라마 촬영을 이 병원에서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연예인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든 걸 겁니다."
 그 말이 현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켰다.
 "윤수씨는 연예인 중에 누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전 연예인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말 사람이 무거워 보이는 윤수 다운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윤수의 분위기는 세준과도 닮았고, 그런 점이 태림을 편하게 해주는 것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현이 가장 좋아요."
 "예쁘기는 하더군요."
 태림은 윤수의 말에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었다.
 "이현이 그런 말을 들으면 아마 충격 받을 거예요."
 윤수의 눈에 따뜻함이 어렸지만 태림은 하늘을 바라보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이현을 아는 것처럼 말하시는 군요."
 태림의 눈은 그리움으로 변했다.
 "네. 친구였거든요."
 윤수는 태림의 눈에서 상처를 보았다. 과거형의 그녀의 말에 뭔가 더 있을 거라는 걸 집작했지만 태림의 눈에 상처가 더 이상 떠오르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질문을 피했다.
 "오늘은 그만 들어가시고 내일 또 나오시죠."
 윤수는 행여나 태림이 감기에 걸릴까봐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알았어요."
 윤수는 여전히 태림을 휠체어에 앉힌 채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 후로 윤수와 태림은 종종 병실 밖으로 나와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거나 바깥바람을 쇠이면서 지루한 병원생활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태림아!?"
 태림과 윤수는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현아."
 "태림이 맞구나."
 그들은 사람들의 눈이 많아 태림의 병실로 향했다. 태림이 집을 뛰쳐나온 뒤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잘 지냈니?"
 현은 완전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응. 세준 오빠 덕분에 좋은 역할 얻어서 확실히 자리 매김 했지. 많이 야위었다."
 태림은 현의 말처럼 야윈 자신의 볼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좀 그렇지."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 네 몰골이 왜 이래. 친정에 잠시 가있었다면서? 세준 오빠도 너 병원에 입원한거 알아?"
 세준이 자세한 이야기는 한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몰라. 현아 오빠에게 말하지 말아 줘. 약속해 줘!"
 현은 태림의 부탁해 당황했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분명 이 상황을 이용하리라는 걸 알았지만 세준에게 알려지는 걸 최대한 연장하고 싶었다.
 "그래 알았어."
 현은 말하지 않았지만 유정이 세준에게 자꾸 접근한 것이 태림이 병원에 있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보고 싶어 자다가도 일어나 그의 얼굴을 생각하지만 그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그에 대한 그리움을 누르고 있었다.
 "다행이다. 네가 성공해서. 네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난 참 너에게 많이 미안했을 거야."
 태림과 현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도 서로의 눈길이 마주칠세라 금방 고개를 돌리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난 네가 내 편지를 보고도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아서……."
 "편지? 무슨 편지?"
 현의 질문에 태림도 할 말을 잃었다.
 "그 날 내가 쉬고 나서 편지 남겨 놓은 날, 못 봤니? 분명히 네 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현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니야 못 봤어……. 그러고 보니 유정인가 하는 그 새침데기가 내 책상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어. 맞아 그 애가 분명 가지고 갔을 거야."
 태림과 현은 한 사람의 농간으로 이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 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난 널 미워한 게 아니었어. 난... 내 자신을 미워했어. 정말 너한테 부끄러울 만큼."
 태림은 의외의 말에 현을 바라보았지만 현은 무릎 위에 올려진 자신의 주먹 진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갔었어."
 "……."
 "나 성공하고 싶었어. 알아 그 당시에도 내가 유명했다는 거.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었어. 내가 원한 건, 대한민국의 최고의 배우가 되는 거였어, 그래서 난 간 거야."
 태림은 말하기 힘들어하는 현의 손을 꼭 잡아 주었고, 현의 뜨거운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난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나타나니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학교에 온 널 보니까 너무 반가웠지만 그런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더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널... 널 바라볼 수가 없었어. 미안해 태림아."
 태림은 눈물로 얼룩진 현의 얼굴의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고 살아. 뭐든 걸 다 잘 할 수는 없는 거야. 어쩌다 한번 판단 착오로 실수를 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학대하면서 살 이유는 없어. 고마워 사실대로 말해 주어서. 넌 아직도 내 소중한 친구야."
 그렇게 그들의 오해를 풀었고, 현은 시간이 날 때마다 태림에게 와 태림이 불행한 기억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이야기며 연예인들 이야기를 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22


세준은 태림이 입원해 있는 병동으로 들어섰을 때 병실을 지키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고, 첫 눈에 김진만 사장의 아래서 일하기는 아깝다는 걸 느꼈다.
 "오셨습니까?"
 "그래. 태림이는?"
 윤수의 눈에 세준을 향했지만 김진만 사장은 윤수가 소개시킬 가치가 없다는 듯이 무시하고 있었다.
 "쉬고 계십니다."
 윤수는 김진만 사장 옆에 서 있는 냉철하고 다부지게 보이는 남자가 태림의 남편이라는 걸 눈치 챘다. 그리고 다행감과 씁쓸함이 가슴에 아리게 새겨지고 있었다.
 "들어가지."
 세준은 문을 열어주는 윤수를 향해 작은 목례를 했다.
 방안에 들어가 보니 태림은 잠들어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연약하고 애처로워 보여 놀랐다. 그녀를 보지 않는 몇 달 동안 이렇게 야위어져 있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 세준은 뭔가 잃어버린 느낌에 한동안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골에 내려가 있다는 태림이 보고 싶어 그녀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리운 것과 그녀를 다시 그의 인생 안으로 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녀를 다시금 그의 인생 안으로 들인 다는 것은 다시 한번 세준 자신을 김진만 사장에게 노출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와 다신 상종도 하고 싶지 않았다.
 "깨우지 마십시오. 그런데 절 왜 여기로 데리고 오신 겁니까. 저에게 이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김진만 사장의 얼굴에서는 야비한 웃음이 사라지질 않았고, 세준은 그가 뭔가 히든카드를 쥐고 있다는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 졌다.
 "우리 회사가 먼저 개발한 상품 때문에 자네 회사가 많은 타격을 입었다는 게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게 어디 내 잘못인가. 부하직원 잘 못 둔 자네의 부덕함 탓이지."
 세준의 주먹은 굳게 쥐어졌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세준은 김진만 사장의 뻔뻔함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김진만 사장은 분명 세준이 누가 범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게."
 태림은 아버지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리라는 걸 알았다. 아이를 이용해서라도 말이다. 그건 죽기 보다 더 싫은 태림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아직 엄마라는 미끼가 남아 있었기에 태림은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싫습니다."
 "싫다."
 "네. 싫습니다. 이미 집을 나간 사람입니다. 그런 아내를 받아 들어야 할 이유가 제게는 없습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흔들리는 건 죽기 보다 더 싫은 세준이었다.
 "이 아이 얼마 전에 납치를 당했다네."
 "납치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가 왜 그렇게 기운이 소진되어 보이는 이유를 알자 그의 눈이 확장되었다. 태림이 무서움에 떨었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왜 김진만 사장은 태림이 하나도 지키지 못했을 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데리고 갈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 뿐인 따님을 알아서 잘 보호 하셨어야죠. 이미 제게서 떠난 사람의 안전을 제게 책임지라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김진만 사장의 살기 어린 눈은 세준의 당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뜻이 역력했지만 세준도 그도 서로에게 쉽게 흔들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아이를 가진 아내를 버리는 것 자네의 그 잘난 윤리에도 어긋난 짓이 아닌가."
 화가 났다. 태림과 아이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는 흘러가지 않는 인생에 화가 났다. 열심히 살아왔다. 남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피해는 주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태림이 돌아온다는 것과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환희 마저 느끼고 있었지만 세준은 김진만 사장과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만을 생각하고 곱씹었다. 

 "자고 있지 않다는 것 알고 있다."
 저 관찰력을 다른 곳에 사용했더라면 아버진 분명 세상을 위해 큰일을 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세준의 한마디 한마디가 상처가 되었지만 태림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를 원수처럼 바라보았다.
 "전 가고 싶지 않아요. 절 왜 보내려고 하시는 거죠.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게요. 아이도 제 힘으로 키울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이제 저희들 좀 놓아주세요."
 "내일 퇴원 수속을 할 거다. 최군이 널 데려다 줄 테니 걱정 할 것 없다."
 태림이 세준과 아버지의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정말 그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 만큼 아버지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정 서방에게 내가 당한 일을 이야기 할 생각은 하지 마라.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의 전자 회사 사장이라고 해도 국가에 찍히면 정 서방 삶은 지옥이 될 테니까 말이다. 명심해라. 난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태림은 아버지의 협박에 웃음이 나왔다.
 "이제 그런 협박도 지겨워요. 이 세상에 아버지란 존재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세준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 절대 두고 보지 않으리라는 걸 아버진 이미 간파한 모양이었다.
 "뭐야? 다 죽어갈 것을 살려 놓았더니."
 김진만 사장은 태림이를 때릴 기세로 손을 추켜올렸지만 윤수와 함께 간호사가 들어오자 머뭇거리더니 나가버렸다.
 
 태림은 엄마를 보지 못했다. 아버진 이번엔 세준과 엄마를 빌미로 태림을 세준의 집으로 보냈다.
 "아가씨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저기 부탁이 있는데, 시간 날 때마다 우리 엄마 좀 돌봐 주실래요."
 "걱정하지 마십쇼."
 "고마워요."
 태림은 엄마의 안전을 부탁 할 정도로 윤수를 믿었다. 아버지의 사람이었지만 그는 모든 면에서 그들 모녀의 사람이었다.

 퇴원 하는 날 세준은 오지 않았다. 당연히 태림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기사는 많이 야윈 태림을 보고 놀라는 것 같았고, 안쓰러워 보였는지 그 답지 않게 묻지 않는 말까지 말했다.
 "오늘 사장님은 외국에서 중요한 바이어가 방문에 오실 수가 없었습니다."
 "네."
 우스웠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집이었던가?
 사실 엄마가 있는 집보다 세준과 함께 했던 집을 더 그리워하며 꿈꾸어 왔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는 집은 처음 집에 들어갈 때와 별만 다르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잘 계셨어요?"
 태림은 거실에 앉아 있는 시부모님께 인사를 올렸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온 건 싸늘함뿐이었다. 이럴 거였다면 이런 처참한 기분이 들 거였다면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다.
 "....흠음."
 "……."
 김기사는 처음처럼 조촐한 태림의 짐을 이층까지 올려주었다.
 "작은 사모님 이게 뭐예요."
 아주머니는 태림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요리 저리 살펴보더니 우유와 과일들을 챙겨와 태림이 먹는 걸 끝까지 지켜보았다.
 "제가 알아서 먹을 게요."
 "안돼요. 알아서 먹었다는 게 이 모양이라면 지금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알만해요. 배속에 사장님 아이도 있다면서요. 그러니 더 신경 써서 먹어야 해요."
 아주머니의 씀씀이가 너무 고마워 눈물을 흘릴 뻔했다. 미순 언니처럼 태림을 하나하나 챙기는 것 이 아련함을 느끼게 했다.
 "회장님 내외분이 저러시는 건 이해하세요. 사장님이 좀 고생을 하셨거든요. 아이도 있으니 곧 풀리실 거예요."
 "……."
 
 "어쩌다 납치를 당했지?"
 태림은 처음에는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그가 돌아오자 그가 벗는 옷을 받았다.
 "...쇼핑 나갔다가요."
 별다른 핑계가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였기에 지키고 싶었다.
 "몸이 좋지 않아 학교를 쉬었다는 사람이 쇼핑을 할 기운이 있었다는 게 놀랍군."
 그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가슴속에 담아 두었고, 그것이 꼭 뭔가에 언친 것처럼 태림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다시 그들은 처음처럼 소파와 침대에 각자의 자리를 마련했고, 쓸쓸한 밤을 지내기 시작했다.


 "작은 사모님 친구 분이 오셨는데요."
 태림은 아주머니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주머니가 태림의 친구를 알리도 없었고, 태림을 찾아 집으로 올 친구는 없었다. 현이 말고는....
 태림은 현이가 왔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 재빨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정답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건 현이아니라 유정이었다.
 "어머! 태림아? 정말 오랜만이다."
 태림은 현에게 보낸 편지를 유정이 가로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면상이 보고 싶지 않았다. 분명 미팅도 계획적이었고, 그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퍼트린 것도 유정이었을 거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어?"
 "그럼. 덕분에."
 그 말은 태림이 없어서 더 좋았다는 뜻이라는 걸 그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시골에 가 있었다면서. 시골공기가 별로 였나 봐."
 "잠깐 이야기 하고 있으렴. 난 아줌마한테 가서 저녁 준비를 하라고 해야겠구나."
 "어머. 어머님 아니에요. 제가 무슨 손님이라고요."
 유정의 목소리는 간드러졌다.
 "우리 유정이가 왜 큰 손님이 아니겠니. 그리고 태림이도 좀 잘 먹어야 해서 말이다."
 시어머니가 자리에서 사라지자 유정의 얼굴은 사납게 변했다. 태림은 사람이 그렇게 빨리 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연기자인 현이 보다 더 감정의 변화가 확실 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돌아왔니? 너 참 뻔뻔하구나."
 태림은 어의가 없어 혀를 찼다.
 "뭐?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유정은 태림이 예전과는 좀 다르다는 걸 느꼈지만 무시했다.
 "내가 뭘 말이니. 난 누구처럼 오빠를 배신하지는 않았어. 그리고 어머니가 네가 돌아와서 나에게 얼마나 미안해 하셨는 줄 아니."
 태림은 배가 뭉쳐 옴을 느꼈다. 요즘 들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인지 종종 배가 뭉쳐서 그 순간에는 숨쉬기도 힘들었고, 통증 때문에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네가 내 편지 빼돌렸지."
 태림의 확신에 유정의 표정이 굳어 졌지만 당당했다.
 "그래."
 그 당당함에 태림은 기가 막혔다. 그런 짓을 하고도 당당하다니. 그런 아이를 친한 친구로 믿고 산 세월이 아까웠다.
 "미팅도 네가 일부러 자리를 만든 거고, 소문도 네가 낸 거지."
 "맞아. 네가 뭔데 세준 오빠를 가져. 앞으로도 넌 영원히 세준 오빠를 가지지 못할 거야. 네 아버지 같은 사람을 가진 네가 뭐가 좋아서 결혼생화를 계속하겠니. 아마 오빠가 곧 헤어지자고 할 걸."
 배가 점점 뭉쳐왔다. 태림은 아랫배로 손을 가져갔다.
 "그거 아니. 결혼했다는 것도 내가 말했어. 어쩌다가 그 애들이 정학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뭐 나한테는 손해될게 없으니까 상관없지만."
 태림은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 신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악."
 "왜 그래?"
 그 소리에 시어머니와 아주머니가 부랴부랴 뛰어 나왔고, 마침 들어오던 남자들까지 태림의 곁으로 다가와서 그녀의 걱정을 하자 유정은 참을 수 질투심에 발을 동동 굴렀다.
 "왜 그러니 아가?"
 "태림아. 어디가 아픈 거야?"
 세준은 소파에 앉아 몸을 움츠리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잠아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유정이 너 태림이에게 무슨 소리를 한거니?"
 유정은 그렇게 말하는 세준의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사실 그녀가 싫었지만 세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양을 떤 것 이었는데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좋아서 그런 줄 알고 착각에 빠져 있었다.
 "제가 뭘요? 전 별말 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저 애 왜 저래요?"
 유정의 말에는 짜증이 묻어났고, 그것이 태림의 식구들의 귀에는 거슬렸지만 유정은 자신만의 감정에 빠져 그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배가 좀 아파요. 이제 괜찮아요."
 "뭐 배가 아팠다고?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시어머니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 차고 있었다.
 "잘 모르겠어요. 내일 병원에 가 볼게요."
 "아이라고요?"
 유정의 목소리 톤은 가족들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
 "그래. 태림이가 아이를 가졌단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태림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자 유정은 급기야 도에 넘은 소리까지 하고 말았다.
 "세준 오빠 아인 줄 어떻게 알아요?"
 "뭐? 아……."
 태림은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배에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다시금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무슨 소리야?"
 세준의 눈빛과 목소리는 위험 하리 만큼 낮아 졌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유정은 계속 날뛰기 시작했다.
 "오빠 아이인줄 어떻게 아냐고요. 배도 안 불렀잖아요. 집 나가서 뭔 짓을 했는지……."
 유정은 처음으로 맞은 뺨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가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다.
 "함부러 지껄이지 마. 다시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마."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유정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 찼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협박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네가 뭔 짓이던 하는 순간 네 집은 거리에 나 앉게 될 거야. 내가 약속하지."
 유정은 세준의 협박과 그의 식구들의 괄시에 집에서 나갔다.
 
 "6개월치고는 배가 부르지 않은 편이구나."
 "네."
 천을 감고 지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하긴 초산이라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세준이 가졌을 때 배가 많이 나온 편은 아니었으니까."
 배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눈초리가 불편에 손으로 가리고 싶었지만 태림은 견디어 냈다.
 "내가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다는 걸 알 거다. 워낙에 실망을 크게 시켰어야지."
 시어머니가 태림에게 잘해주었던 건 태림의 외할아버지에게 태림의 시아버지 집안이 많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만약 시아버지가 지금의 시어머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태림의 엄마하고 결혼했을 지도 몰랐었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세준이 널 다시 받아들인 이상, 그리고 네가 우리 집 자손을 가진 이상 당분간은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
 '감사합니다.'라는 입에 발린 소리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이 낳고 몸조리가 끝나거든 곧 발로 검정고시 준비해라. 무성전자 사모가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세준이가 들을 이유가 없지 않니."
 "네."
 언제나 세준의 걱정뿐인 시어머니였지만 그래도 미운 마음을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오늘은 다들 태림의 학교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로 약속을 했는지 회사에서 돌아와 태림에게 양복을 건네주던 세준 역시 그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이 낳고 나면 복학해라. 학교에다가는 손을 써 놓았으니 문제없을 거야."
 학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동기간에도 그녀가 결혼한 것을 이해하지 못해 괴롭혔다. 그런데 어린 동생들과 공부하면서 그 시선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싫어요. 그냥 검정고시 준비할게요."
 넥타이를 풀던 세준의 손이 멈췄고, 그의 시선이 양복 상의를 손에 든 채로 고개를 숙인 채로 발끝만 내려다보는 태림에게 꽂히었다.
 "무슨 소리야. 그래도 검정고시보다는 복학이 더 낳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도 검정고시 보라고 하셨어요."
 세준은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태림에게 그런 말을 먼저한 어머니에게 짜증이 났지만 목소리에는 그런 기색을 들어내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이유가 뭐야."
 "그냥 가고 싶지 않아요. 지금부터 검정고시 준비할게요."
 세준은 당장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었지만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더 이상 자극하고 싶지 않아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23


 "태림이가 학교에 다시 오고 싶지 않아 합니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냥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단 한번도 고집을 부린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세준은 답답해 찾아간 사람은 태림이의 담임선생님이었고, 태림이 사라졌을 때 가장 걱정하고 찾는 것에 열성을 보였던 은경을 만났다. 그들은 태림이 사라지자 찾아다니다가 김진만 사장이 시골로 보냈다는 말을 믿고 포기했고, 세준은 자신을 떠나버린 태림은 찾지 않았다.
 그녀라면 태림을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준의 말에 태림의 담임선생님이었던 은경은 잠깐 주저하더니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태림이가 집을 나가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2학년 학생이 조용히 와서 화장실에서 좋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 같으니 가보라고 하더군요. 우리 반 학생들 같다면서요."
 세준은 은경의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사실 저희 반에 오공주파라고 불량한 애들이 있었거든요. 전 그 애들이 다 싶어 급히 화장실로 갔는데, 그 아이들에게 당하고 있는 학생인 바로 태림이었어요."
 세준은 그 당시 태림의 다리에 멍이 들어있던 걸 기억해 냈다. 태림은 체육시간에 다쳤다고 했었고, 그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은경은 목이 탔는지 앞에 있는 물을 세준이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벌컥벌컥 마셨다.
 "후우, 다 제가 부덕한 탓이죠. 태림이가 집에는 말하지 말라고 얼마나 간곡하게 부탁을 하던지 차마 연락할 수 없었어요. 태림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태림이에게 전학이야기도 했었거든요. 어떻게 알았는지 그 아이들은 태림이 결혼한 사실과 미팅을 한 것을 알고 태림을 괴롭히고 있었어요."
 "도대체 어떻게?"
 은경은 충격을 받은 세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씀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항상 태림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유정에게서 흘러나온 말이에요. 태림이가 가출한 뒤로 오공주파 아이들과 이야기를 했거든요."
 세준은 항상 고귀한 척 하면서 태림이가 집을 나간 뒤 자신의 주위에서 맴돌던 유정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준은 유정이가 처음부터 싫었다. 아무리 태림이가 없어 외로운 시간이었지만 유정이라는 아이를 대타로 삼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지만 그녀는 말로 해서는 듣지 않았다. 세준은 하는 수 없이 유정을 자신에게 떼어놓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에게 딸 단속을 하지 않으면 납품을 다른 회사로 바꾸어 버리겠다는 어이없는 협박까지 했다.
 "그 아이들은 태림을 못 움직이게 붙잡고 태림이가 부도덕하다고 비난하고 유부녀가 되었으니 처녀와는 다를 거라면서......."
 세준의 눈은 완전한 충격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죠."
 하지만 세준은 자신이 한 짓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비난 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들도 나중에는 후회를 많이 했어요.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부끄러웠던 짓이었는지를 깨달은 거죠."
 
 세준은 거의 회사에서 술을 마신 적이 없었지만 태림의 선생님이었던 은경을 만나고 온 뒤 독한 양주를 잔에 가득 따라 마신 후 또 한잔을 따른 상태였다.
 "사장님 작은 사모님을 모셨다는 분이 뵙기를 청하시는 데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세준은 그 방문객이 윤수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습니까?"
 세준은 윤수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진실 되고 강직한 눈빛은 김진만 사장이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눈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사장님도 알아야 하실 것 같아서 왔습니다."
 세준은 태림을 걱정하는 윤수의 마음이 의심스러웠지만 표현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뭡니까?"
 "아가씨가 집에서 나와 어디서 지냈는지 알고 계십니까?"
 더 이상 충격적인 이야기와 태림에게 미안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듣더라도 은경을 만나 충격이 가신 뒤이기를 바랬지만 그건 이루어 질 것 같지 않았다. 태림이가 없어지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일도 힘들었지만 그런 일에 더욱더 자신을 몰아 붙였고, 휴식은 거의 취하지 않아 아버지 마저 걱정을 할 정도였다.
 그때는 적어도 태림이 김진만 사장의 휘하 안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원하는 것을 쥐어 주었으니 당분간은 태림을 함부러 하지 않을 거라는 최면을 걸면서 지내왔다.
 "시골에 가 있지 않았습니까, 쇼핑하러 나왔다가 돌아가는 도중에 납치를 당한거고요."
 하지만 윤수의 눈빛은 세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것이 있습니까?"
 "아가씨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사장님의 댁에서 나오시자 마자 셋방을 얻으셨고, 바로 의류 공장에 취직하셨습니다. 김진만 사장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가씨를 데리고 오거나 다른 보호조치는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준은 윤수의 말이 믿어지지가 않아 의문조차 달지 못했지만, 윤수가 김진만 사장의 지시 없이도 태림을 지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태림은 그를 위해 우리 회사 신 모델 디자인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까?"
 윤수는 굳은 얼굴로 세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건 사모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장모님을 말입니까?"
 세준은 그 말에 김진만 사장이 태림을 때리던 일이 기억났다. 마치 집에 있는 미친 강아지를 때리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때리던 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혜란의 말을 흘려버린 것과, 태림이 그렇게 맞고 지냈다면 장모님 역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을 저주했다.
 "네. 김진만 사장은 사모님을 미끼로 아가씨에게 그 일을 시켰고, 아가씨는 사모님의 안전을 위해 그 모든 걸 감수했습니다."
 "왜 그때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그건 자신을 탓하는 소리였다.
 '왜 그때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왜 태림을 그렇게 몰아 세웠던 거야?'
 윤수는 현명하게도 세준이 자기 자신을 탓하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저 역시 나중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장님이 두차례 아가씨의 학교에 가는 걸 모셔다 드렸지만 목적이 그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그녀를 이해했더라면,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몰아세우지 않았더라면 태림이 납치라는 무서운 일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세준의 머리를 무겁게 말들었다.
 "그럼. 납치는? 그것 역시...."
 "그곳에서 미순이라는 아가씨를 만났고,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힘든 노동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다 미순씨는 시위에 가담했고, 아가씨는 미순씨와 같이 지냈다는 공장장의 신고로 인해 안기부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공장장은 여러 여공들을 건들고 있었고, 아가씨도 넘봤지만 미순씨가 있어서 뜻을 못 이루고 있다가 미순씨가 사라졌는데도 아가씨가 강력하게 거부하자 신고를 했습니다."
 김진만 사장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 공장장 역시 죽여버리고 싶었다.
 기필코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세준은 태림이 단칸방에 살면서 콩나물 시루 같은 공장에서 하루 종을 일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죄가 없는 사람도 한번 들어가면 만신창이가 되어 나온다는 곳에 태림이 며칠 동안 갇혀 지냈다는 게 상상조차 되지 않아 그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그동안 장인은 뭘 했답니까?"
 하지만 윤수의 눈에는 세준과 김진만 사장 둘 다 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럼 사장님은 뭘 하셨습니까? 아가씨는 몇 일 동안 계속 되는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었고, 미순씨가 눈앞에서 윤간 당한 체 자결하는 모습까지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 것도 김진만 사장님의 딸이라는 것이 아가씨가 그들에게 당하기 전에 밝혀져 가장 약한 고문 중에 하나였을 겁니다."
24


태림은 소파에 그에게 거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찍 들어오셨네요."
 그녀가 집을 나가고 나서 처음으로 집에 일찍 들어온 날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김기사를 닦달해 집으로 돌아왔다.
 "자."
 태림은 세준이 내민 검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태림은 책 위로 내밀어진 검은 봉투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뭐예요?"
 "과일."
 태림은 봉투 안을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안 먹어?"
 "왜 갑자기 나에게 신경을 쓰는 거죠. 아이 때문인가요? 그렇다면 걱정 할 것 없어요. 언제나 좋은 것만 먹으려고 노력했어요."
 세준은 차가워진 태림이 안쓰러워 손을 내밀었지만 태림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날 그냥 내버려둬요."
 태림은 갑작스런 세준의 변화보다는 미순이 당한 일이 생각이나 남자의 손길이 아직은 무서웠다. 병원에서도 만약 엄마나 태림을 살려준 윤수와 엄마가 없었더라면 의사의 손길조차 참아낼 수 없었을 것이었다.
 세준은 자신의 손길이 닫지도 않았는데 몸을 사리고 놀라는 태림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주먹을 꾹 쥔 채로 참았다.
 "방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면서."
 아주머니는 세준이 들어오자 마자 그의 어머니가 방에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나서 태림이 밥 먹는 시간말고는 나오지 않는 다는 것과 잘 먹지 않는 다는 걸 걱정스러운 어조로 알려주었다.
 "여기에 필요한 게 다 있어요."
 "좀 나가봐. 집 밖에 나가고 싶지 않으면 정원이라도 둘러보고, 나하고 같이 바깥 구경나가지 않을래?"
 태림은 그의 제안이 좋은 의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준은 태림의 상처 입은 눈에서 모든 아픔을 지워주고 싶었다.
 "아직은 나가고 싶지 않아요."
 그들의 대화는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세준은 그 날은 아예 점심 시간이 지나자 마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른 귀가에 그의 어머니는 거의 거품을 물 정도였고, 아주머니는 귀가 입에까지 걸릴 정도였지만 태림은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역시 과일을 사오는 걸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가 사온걸 굳이 먹으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가 직접 깎아 오기 시작하자 태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먹기 시작했다.
 "뭐하고 있어?"
 태림은 책을 정리하는 지 상자에 책을 담고 있었다. 어쩐지 책상이 너무 허전해 보여 세준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태림이 하는 걸 잠자코 보고 있었다.
 "필요 없어서 버리려고요."
 "검정고시 본다면서 책을 버리면 어떻게 봐?"
 태림은 그의 얼굴을 바라볼 시도도 하지 않고 계속 책을 정리해나갔다.
 "노트 정리되어 있어서 괜찮아요."
 "좀 도와줄까?"
 "아니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세준은 태림이 정리하는 걸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가 무거운 상자를 들려고 하자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이런 건 내가 들게."
 태림은 그것만을 말리지 않았지만 손끝이 세준의 손이 닿자 얼른 손을 뒤로 뺐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부모님하고 좀더 잘 지내려고 노력해봐."
 세준은 상자를 밖에 내놓고 들어오면서도 태림에게 줄 우유를 잊지 않고 아주머니에게 받아왔다.
 "……."
 태림은 그저 말없이 두 번째 상자를 정리했다.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로 지낼 수는 없잖아."
 "곧 달라지겠죠."
 세준은 그 뜻을 잘 못 받아들였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 또 다른 큰 실수가 되었다는 걸 그는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드디어 태림은 미순 언니네 가족이 어디에 있는 지 엄마의 연락을 받았고, 다시 집을 떠나기 위해 모든 걸 정리했다.
 아웃사이더는 자신만으로도 족했다. 아이까지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원하지 않는 아이의 인생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 자신의 경험으로도 충분했다.
 엄마와 같이 서울을 떠나 미순 언니의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갈 계획을 엄마와 짰다.
 엄마 역시 이번에는 용기를 냈어 태림의 의견에 동참했고, 스스로 움직였다.
 그 날은 무슨 일로 태림의 분위기가 많이 풀려 있었다. 항상 긴장하고 있었는데 오늘만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더 부드러워 보였다.
 "장모님 우리가 모시고 살까?"
 태림은 이외의 말에 세준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냥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서."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세준은 태림의 차가움에 점점 힘들어져가고 있었다.
 그녀도 처음에 이렇게 힘들었을까? 무신경한 그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나 목욕 좀 하고 올게."
 세준은 괜히 불편해 핑계를 댄 것이 목욕이었고, 그래서 인지 갈아입을 옷가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탕 속에 들어가서야 기억해 냈다.
 "태림아!"
 "네."
 "나 옷 좀 가져다 줄 수 있어."
 "……."
 태림이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나 지금 탕 속에 있어."
 "잠깐만 기다리세요."
 태림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세준의 옷가지를 챙겨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문제는 세준의 알몸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세준이 들어가 있는 물이 가득한 욕탕은 태림이 당했던 숨이 끊어 질 듯한 고문을 떠오르게 했고, 그 자리에서 태림을 단 한발작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태림아!"
 세준은 자신의 부름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태림이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태림의 몸이 흔들리자 물을 뚝뚝 떨어트린 채로 욕실 밖으로 나와 태림의 어깨를 잡았다.
 "아악."
 태림을 물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던 남자들의 손길이 떠올랐고, 그 기억은 즉시 물 속에서의 숨막힘을 떠오르게 했다.
 태림의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에 세준은 태림이 무엇을 기억해 냈는지 알 수 있었다. 윤수는 태림이 무슨 고문을 당했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태림이 물을 보고 일으키는 반응은 그녀가 물 고문을 당했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태림에게 고통을 준 그 모든 사람을 다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우선은 두려움에 질린 태림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태림은 세준의 손길에 거칠게 반항했고, 세준은 태림이 미끄러질까 봐 손을 놓지 못했고, 급기야는 태림을 잡은 채로 탕으로 빠지고 말았다.
 "살려줘. 싫어."
 "태림아! 진정해 내가 있잖아 다시는, 다시는 물에 빠지는 일 없을 거야."
 세준은 몸부림치는 태림을 꼭 끓어 않았다. 그래도 태림이 진정이 되지 않자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에 태림의 환각에서 빠져나왔고, 그 기억을 잊어버리기 위해 그의 입술에 매달렸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제 곧 그를 떠나야 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 단 하루만 그의 품안에 안겨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었다.
 잠시 미순의 처참하게 당하던 순간이 떠올라 그녀를 힘들게 했지만 태림은 세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그들이 아니라는 걸 자신에게 주입시켰다.

 세준은 젖어 버려 벗기기 힘들었지만 태림의 옷을 천천히 벗겨나갔다. 아이를 가져서 인지 태림의 가슴은 그가 기억했던 것 보다 더 풍만해져 있었다.
 세준은 떨리는 손으로 태림의 얼굴과 목 어깨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고, 태림은 그런 그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그의 강인한 목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가 싫어하진 않을까?"
 "잘은 몰라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 것 같아요."
 세준은 조금 부풀어 오른 자신의 아이가 들어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그녀의 배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남자아이일까?"
 "오빠는 남자아이를 원하나요?"
 "아니. 건강하기만 하다면 상관하지 않아."
 태림은 그에게 미안했다. 그는 절대 이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없을 거였다. 태림이 다시 그의 곁에서 떠날 거였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미안함과 그에 대한 식지 않는 사랑을 담아 처음으로 먼저 그에게 입을 맞추었고, 세준은 태림의 적극적인 행동에 놀랐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의 입술을 받아 들였다.
 세준은 태림이 미순의 일을 잃어버리기를 바랬다. 그와의 사랑으로 태림이 그동안 겪었던 나쁜 일들을 잃어버리길 바랬다.
 그녀의 가슴은 예전보다 더 예민해져 있어 그의 작은 입 놀림에도 몸이 들썩였고, 그녀의 몸부림에 욕조에 있는 물도 같이 출렁거렸다.
 세준은 당장에라도 그녀를 안고 싶었지만 그녀가 감기라도 걸릴까봐 태림의 몸을 수건으로 감싼 다음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세준이 침대에 내려놓는 순간에도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의 목을 감은 손을 풀지 않았다.
 세준 역시 태림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그녀를 안은 채로 겨우 수건을 그녀의 몸에서 치웠다.
 "어!..."
 "긴장하지마."
 세준은 태림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그가 주는 쾌락에 빠져들기 바랬다.
 태림은 그의 얼굴이 가슴을 떠나 점점 아래로 내려가 급기야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그가 얼굴을 묻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그의 손길에 다시 눕고 말았고, 고스란히 그의 손과 입, 혀의 놀림은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긴장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태림은 점점 그녀의 돌기를 자극하는 그의 입술과 혀에 몸이 뜨거워짐을 느꼈고,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태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이 느끼는 데로 손길이 가는 데로 움직여 그의 머리를 붙잡아 키스를 원했고, 세준은 태림의 소원대로 그녀의 입술을 차지했고,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녀의 모든 것을 차지했고, 그의 모든 걸 그녀에게 주었다.
 
 세준은 항상 태림을 안으면 자제력을 금세 잃어버리고 사랑을 나누었지만 이번엔 아이 때문인지 최대한 자제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식은땀까지 흘리며 태림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이 태림을 황홀하게 해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미순 언니에 대한 기억도 잊어버릴 수 있어 태림은 그의 손과 입이 주는 감각에 모든 걸 맡겼다.
25


 세준은 밝은 햇살에 이끌려 눈을 떴고 그녀가 곁에 없을 때처럼 그녀를 찾아 손을 내밀어 침대를 더듬었고, 오늘도 여지없이 그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있어야 했다. 그녀와 나눈 사랑의 기억은 그녀가 그의 침대에 있어야 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침대에 있지 않았다.
 "어디 갔었어?"
 태림은 이미 옷을 입고서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목이 말라서요."
 태림은 침대로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컵을 상두대에 내려놓았다.
 "뭐야?"
 "주스요."
 세준은 시트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지만 가릴 생각이 전혀 없는 듯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주스를 마셨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태림은 그의 목소리에 심통 같은 투정이 묻어 있어 놀랐다. 그의 목소리는 태림에게 집에 나가기에 그와 아침에 침대에서 나누었던 일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세준은 붉어진 그녀의 얼굴의 의미를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뭐...해요?"
 세준은 주스 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당겨 얼굴을 그녀의 가슴 골짜기에 묻고 그녀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키스해 줘."
 어제처럼
 세준은 태림이 해주는 키스가 그렇듯 묘하면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자신에게서 끌어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태림은 못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었고, 이제 어쩌면 영원히 보지 못할 사람이었다. 그가 원하는 걸 다 해주어도 아무것도 손해볼 것이 없었다.
 그녀의 다칠 마음만 빼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시부모님의 태도도 처음과는 다르게 많이 누그러지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말대로 아이가 있어서 인지 그들은 태림을 위해 비싼 과일들만 골라 사오셨고, 구하기 힘들다는 아기 용품을 하나씩 사들이는 것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해 벌써부터 일층에 육아 실을 꾸미기 시작했다.
 "이것도 늦은 거야. 내 친구 네는 애가 생긴 거 알자마자. 육아실을 만들었어."
 태림은 가끔은 소녀 같은 시어머니가 부러웠다.
 "하지만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 걸요."
 "뭐 어때 두 개 다 사다놓고 아니면 다음번을 기다리던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 주면 되지 않겠니."
 시어머니는 바쁘게 움직였지만 태림이가 일하는 건 참지 못했다. 완전히 세준과 똑같았다.
 "넌 일하지 마라. 그냥 쉬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말만해. 너 일하는 거 네 시아버지에게 들켰다가는 난 그 날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시달릴게 뻔해."
 시어머니의 밝은 성격에 태림은 익숙해져갔다.
 "그런데 아기 방이 일층에 있으면 울음소리를 듣지 못할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마라니까. 내가 있잖아 어떻게 하루 종일 애를 보려고 그래. 나도 있는데, 아이 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시부모님의 관심과 세준의 관심이 떠나려는 태림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지만 아버지가 나중에 무엇을 더 원할지, 엄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태림은 마음을 바꿀 수가 없었다.

26


시부모님의 태림을 향한 관심에 질세라 세준은 점점 더 가정적이 되어갔다.
 태림은 그를 떠날 날이 조금씩 다가온다는 중압감에 가끔은 때도 아닌 입덧을 하기도 해 그를 자주 놀라게 했다.
 "괜찮아?"
 세준은 갑작스러운 구토로 욕실에 달려온 태림을 따라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주고 나서 수건에 물을 묻혀 태림에게 내밀었다.
 "네."
 "좀 쉬어."
 세준은 괜찮다는 태림을 침대로 데리고가 그녀가 잠들 때까지 등을 쓰다듬어 주거나 배를 만져 주었다.
 "어? 움직인다."
 세준은 태림의 배 위에 올려놓았던 손에 희미하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진동이 느껴지자 경이로움에 빠졌다.
 "요즘 들어서 가끔 이래요."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아직 이렇게 작은데 움직이다니."
 태림은 기뻐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배가 움직이는 것에 눈길을 주고 있는 세준은 그녀의 애달픔 눈길을 느끼지 못했다.
 "이놈이 벌써부터 엄마를 힘들게 하는 구나."
 "아들을 원하는 거예요?"
 지난번에 세준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그의 말투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서 태림은 누구나 아들을 원한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아니. 딸이어도 좋아. 난 딸이어도 아이가 원한다면 사업을 가르칠 거고, 원하지 않는 다면 다른 걸 하도록 도와줄 거야."
 세준의 눈에는 진실이 가득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지도 몰라요."
 세준은 그녀가 자신을 보도록 턱을 잡고 단호하지만 부드러움이 가득한 손길로 그녀의 고개를 돌렸다.
 "내가 상관하지 않아. 아들을 낳기 위해서 계속 아이들을 낳을 필요도 없고, 혹시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해서 부담 가질 필요도 없어. 그냥 자연에 맡기는 거야. 우린 그냥 인간을 뿐이니까."
 세준은 태림이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키스를 함으로써 토론을 중단하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주머니 누구예요."
 "네. 작은 사모님 아버님이 신데요."
 태림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방문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있는 집에서 아버지가 흥분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위안을 하면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미순의 가족들의 행방이 확실해 지자 엄마는 윤수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폐물과 돈을 모았고, 태림이 역시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을 엄마에게 보내 그들이 살 곳을 정하도록 했다.
 당연히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엄마는 집을 나섰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네가 지내는 방으로 가자."
 그녀는 아무런 표정을 가지고 있지 않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았다.
 "차는 뭘로 가져다 드릴까요?"
 "됐소."
 "전 우유 한잔만 가져다 주세요."
 전혀 뭔가를 먹고 싶지 않았지만 아주머니가 오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 태림은 아버지의 기분을 거슬리면서 까지 부탁을 했다.
 "절 따라 오세요."
 방으로 들어오자 드디어 아버지가 본심을 들어냈다.
 "네가 누구 덕분에 이렇게 호강하고 사는데 감히 날 배신을 해."
 배신이라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앞 말에는 할 말이 많았다.
 "호강이라고요? 돈 만 있으면 호강하는 건가요. 전 아버지의 그 끝없는 욕심 때문에 이 집에 들어온 것뿐이에요. 누가 이런 호강 시켜 달라고 하던가요. 언제 제가 부탁이라도 했었냐구요. 제가 바란 건 그저 아버지의 웃음과 작은 관심이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번도 그러신 적이 없으셨죠."
 "난 딸을 바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특히 네 언니나 너처럼 되바라진 계집에 들은 더더욱 더 말이다."
 아들. 또 아들 타령이었다. 아버지는 그토록 원하는 아들을 가지기 위해 수많은 외도를 했지만 단 한번도 아들이 생기지 않았고, 그 분풀이를 가족에게 해대었다.
 "저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아버지를 배신 한 적은 없었어요."
 "그럼 왜 무성전자에서는 보류된 구형 모델을 나한테 보낸 거냐.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게 생겼는지 알아."
 아버지가 말한 사실에 태림은 새로운 사실이 떠올라 휘청거렸다.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태림이 잘못을 했지만 그렇게 까지 세준이 몰아 붙인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업자득이지요."
 "뭐?"
 태림의 바른 말에 아버지가 이성을 일어가고 있었지만 태림은 세준이 했던 말이 떠올라 겁조차 나지 않았다.
 "평생을 남을 속이고 협박하고 살아왔으니 이제 그 죗값을 치를 때가 되지 않았겠어요. 차라리 잘되었어요. 재력과 권력이 없으면 조금은 반성하시겠지요."
 "좋아. 다른 건 다 내버려두고, 네 엄마가 어디 있는 지만 말해. 그럼 조용히 물러가마."
 "왜 엄마가 필요하죠. 이제 돈도 없어지면 혜란씨 같은 골빈 여자들이 아버지를 따르지 않을 까봐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엄마를 붙잡아 두려는 심산인가 보죠."
 아버지의 손이 올라 왔지만 아직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것을 깨닫고 다시 제자리로 돌렸다.
 "좋은 말로 할 테 말해. 네 엄마 어디에다가 감추었냐?"
 엄마가 사라진지는 오래였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관심 조차 주지 않고 태림에게 전화조차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위에서 모든 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엄마를 찾는 것이었다.
 "아실 필요 없어요. 아버지 같은 남편하고 같이 사느니 혼자 사시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돌아오신다면 분명 아버지의 화풀이 대상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요."
 "이년이."
 김진만 사장은 화를 참지 못하고 태림의 뺨을 때렸다.
 아버지의 폭력에 아직 완전히 낳지 않았던 태림의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이를 가졌어요. 나중에 아버지의 구세주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를요."
 태림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 쳤다.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아버지에게는 그런 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네 엄마 어디 있어. 그 망할 년 어디에다가 숨겼어."
 "절대 찾지 못할 거예요."
 이미 이성을 놓은 김진만은 태림을 때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 만큼 노세 해 졌다고는 하지만 그의 힘은 나이보다 10년은 더 젊었다.
 "어머나. 이를 어째."
 우유를 들고 왔던 아주머니는 자신이 우유 잔을 떨어트린 것조차 모르고 일층으로 뛰어내려가 밖으로 뒤쳐 나갔다. 처음에는 뭘 할 줄 몰라 허둥지둥 하던 그녀는 밖에 있는 윤수를 보고 안의 상황을 장황하게 말하기 시작했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윤수는 태림이 맞고 있다는 소리에 집으로 뛰쳐 들어갔다.
 윤수가 집에 막 들어서는데 세준의 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고, 아주머니는 자신이 버선 말로 뛰어 나갔다는 것도 있고, 차를 향해 달려갔다.
 끽익
 "아줌마. 위험하잖아."
 "무슨 일 있습니까?"
 그녀는 무조건 차 문을 열어 세준을 끌어내렸고, 그녀의 행동에 식구들은 차에서 재빨리 내렸다.
 "아이고, 사장님 이제야 오시네요. 빨리 집으로 들어가 보세요. 이러다 작은 사모님 돌아가시겠어요."
 아주머니의 호들갑에 세준과 같이 들어오던 시부모의 발길이 바빠졌고, 위에서 나는 소리에 신발을 벗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받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서 사모님을 모시고 나가세요."
 "빨리 놓지 못해. 네 놈은 당장에 해고야."
 세준은 김진만 사장을 위에서 올라 타 결박을 하고 있는 윤수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태림을 안아 들었다. 이번엔 김진만 사장이 남들의 시선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때렸는지 벌써 얼굴에 멍이 생기고 있었다.
 "이거 놔. 이 나쁜 놈을 나한테 다 빼앗아 갈 수 있을 것 같아. 너 정회장 네가 니 아들하고 짜고 한 짓이지. 네가 널 용서 할 것 같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세준의 아버지는 세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김 사장님의 정신이 이상하신 것 같습니다. 요 며칠 이상한 행동을 하셨는데, 여기에 모시고 온 제 불찰입니다."
 세준은 마음 같아서는 태림의 아버지를 죽을 만큼 때리고 싶었지만 윤수의 말대로 그의 눈은 풀려 있었고, 의미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윤수의 손안에서 풀려 나오기 위해 몸부림 쳤지만 젊은 윤수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아주머니의 신고로 경찰들이 들이 닥쳤고, 김진만 사장은 곧바로 연행되어 갔다.
 "사...사모님."
 "'왜 그래요?"
 윤수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며칠 수고 세준의 회사로 나오라는 제의를 하고 돌아서는 데 아주머니가 신발도 신지 않은 채로 뛰쳐나와 숨을 헐떡였다.
 "작은 사모님이, 작은 사모님이."
 세준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태림이 누워 있는 방으로 손살 같이 향했다.
 "아 악."
 세준은 태림의 비명 소리와 함께 하얀 이불이 붉은 피로 물 드는 것을 보았고, 태림의 약한 몸에서 피가 나올수록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그게 자신의 아이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역겨워 할 틈도 없었다.


 도대체 병원에서 벗어날 틈이 없는 것 같았다. 정신을 잃고 깨어나면 항상 병원인걸 보면 말이다.
 "정신이 들어?"
 "아이는요?"
 태림은 홀쭉해진 배에 손을 올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한줄기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고, 그런 태림을 보는 세준의 마음도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겨 펑펑 울기를 바랬다. 하지만 태림은 고개를 돌린 채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혼자 울었다.
 "이번엔 태어나고 싶지 않았나 봐. 우리 아이를 편한 마음으로 보내주자. 그리고 다음 번에 태어난 아이에게 이번 몫까지 다 해주자."
 다음 번이라는 게 그녀에게 주어질 거라는 어리석은 희망을 가질 만큼 순수하지 않았다.
 "아버지는요?"
 "정신 병원에 입원하셨어. 근래에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야."
 어쩌면 가족들에게 그토록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는 예전부터 정신에 병이 들었을 건지도 몰랐다. 워낙에 강인하고 억압적이던 아버지가 무서워 눈치를 못 채고 지낸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병원이에요?"
 "시골로 모셨어. 서울에 가까이 계시는 것 보다 지금껏 살아온 환경과 다른 곳에서 다 잊고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고마워요. 그런 것까지 신경서 주셔서요. 병원비는?"
 "걱정 할 것 없어 회사가 부도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줄 알았는데, 병원비 할 정도의 돈은 충분히 남아있어."
 태림은 그림자를 남기며 창 밖을 지나가는 새 한 마리의 모습에 눈을 고정시켰다.
 "혜란이라는 그 여자는요?"
 궁금했다.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던 여자들은 아버지가 그렇게 되고 나서 어떤 행동을 했을지. 얄궂은 생각이었지만 아버지의 곁에 머문 여자들 중 단 한 명도 아버지를 사랑한 사람은 없을 거라는 깨달음이 생겨 그런 그가 불쌍했다.
 그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한 그의 인생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 위해 군림했어도 결코 행복한 인생이 아니었을 것이다.
 "회사가 부도나기 전에 한몫 챙겨서 미국으로 간 것 같아."
 "우리 아버지에게는 그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군요."
 "....."
 그 날부터 세준은 태림의 곁에 거의 하루 종일 머물면서 간병을 자청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 감동하는 사람들과 팔불출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그의 얼굴은 병원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과일 좀 먹을래?"
 세준은 그 커다란 손으로 사과를 깎아 태림에게 내밀었다.
 "회사 일은 어쩌고 여기에 있어요."
 "걱정할 것 없어. 다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의사가 그러는 데 내일 모레쯤에는 퇴원해도 된데 네가 원하면 더 있어도 되고. 어떻게 할래?"
 아이가 있었기에 그의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나마 세준이 그녀를 참아 넘기던 아이도 없어졌으니 그의 곁에 머물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돌아가면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떠날 계획을 세웠지만 세준은 그런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자 세준은 안심을 했는지 회사로 일하러 나갔고, 다른 식구들도 없는 틈을 타 별로 많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했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집에 있었기에 기회를 잡기 힘들었다.
 똑똑
 "예?"
 "작은 사모님 저 장 좀 보고 올게요. 뭐 필요한 것 있으세요."
 "아니요. 한숨 자려고요. 다녀오세요."
 "네."
 아주머니가 장바구니를 들고 나가자 태림은 또 한번 마지막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면 눈으로 마음으로 담았다. 세준과 결혼생활을 했던 방, 그가 대부분을 시간을 보내던 서재, 시부모님이 쓰는 부부간의 애정이 넘치는 방 그 모든 걸 기억 속에 추억 속에 간직한 채 태림은 떠났다.

 "무슨 말씀이세요. 태림이 사라지다니요."
 세준은 태림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자 마자 집으로 한걸음에 달려왔고, 당황하고 있는 식구들에게 소리를 치며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떠났다.
 이번엔 아무것도 남기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물건은 단 한가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검정고시를 본다던 태림이 책을 다 버리던 것이 생각이 났다. 왜 버리냐는 질문에 "노트 정리 다해놓아서 필요 없어요." 라고 대답했기에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윤수 넌 뭐 아는 것 있어?"
 윤수는 세준의 경호실의 일원이 되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가씨는 큰 사모님을 모실 때도 저에게 장소를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혹시 뭐?"
 세준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태림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28


 광주의 생활이 적응이 되고 안정이 되자 태림과 순미는 진만의 얼굴을 보러 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아버지 얼굴 한번 보고 와야 하지 않겠니. 아무리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지만 한번 보고 와야 마음이 놓을 것 같구나."
 태림은 엄마의 마음을 아직도 이해 할 수 아마 어쩌면 영원히 이해 못할 지도 몰랐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어디가 예쁘다고."
 엄마의 입가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미소가 가로 새겨졌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건 다 잊어버리더라도 네 아버지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 않니?"
 태림은 엄마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택시 대절해서 가요 우리."
 "그러면 돈이 얼만데."
 "그래도 그곳 위치도 모르는 상태에서 버스 타고 갈 수는 없잖아요. 송씨 아저씨에게 부탁해 놓았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가 신세도 많이 졌는데 신세도 갚을 겸해서 아저씨 차타요. 아저씨가 병원이 어딘지 정확히 알아보겠다고 하셨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루 동안은 종업원과 미순 언니의 할머니에게 식당을 맡기기로 결정한 그들 모녀는 새벽에 출발했다.
 경기도에 있는 병원에 가서 당일로 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잘 있겠지?"
 "그러겠죠."
 하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많이 변해 있었다. 살도 많이 빠져 초라해 보였지만 너 큰 건 그의 눈빛에서 삶의 의지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공허했다.
 "아버지..."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였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 태림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아버지는 태림의 부름에 잠시 눈길만 줄 뿐 다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다른 땅 바닥으로 눈을 돌렸다.
 아버지는 자신이 평생을 괴롭혀 온 부인이과 딸이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려도 알아보지 못했고, 그저 그들이 싸온 음식만을 게걸스럽게 먹을 뿐이었다.
 "아버지 우리 가요. 다음에 또 올께요."
 "여보? 다음에 올 때 좋아하는 거 많이 싸가지고 올테니 병원 생활 잘해야 해요."
 태림과 모녀는 발길이 띄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진만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병원에서 나왔다.
 "김태림?"
 모녀는 태림을 부르는 강한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멀리에서 그들을 확인한 세준을 보고 놀랐다.
 "어머나!"
 "엄마 빨리 차에 타."
 "응."
 세준은 전력을 다해 그들에게 달려오기 시작했고, 그의 모습에 태림은 송씨 아저씨를 재촉했다.
 "아저씨 빨리 출발해요."
 "잉. 알았어. 꽉 잡어."
 "김태림 기다려."
 세준은 태림이 차를 출발시키자 다시 자신의 차로 전 속력을 다해 달려갔다.
 태림은 세준이 차로 다가가 출발 시키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놀랐지만 아저씨의 운전 솜씨 덕에 세준의 추격에서 피했다.
 "병원에는 웬일로 왔을 까?"
 "잘 모르겠어요."
 택시는 휴게실에서 멈췄고, 모녀는 세준 때문에 놀라 목이 탔었는지 음료수를 쉬지 않고 들이켰다.
 "난 왜 시아버지가 날 오빠와 결혼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순미는 딸의 의문에 대답을 해주었다.
 "만약에 운명이 꼬이지만 않았다면 네 시아버지의 동생하고 결혼했을 거야."
 태림은 처음 듣는 말에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사람 참 많이 사랑했는데……."
 태림은 엄마를 다그치지 않았다. 그저 흘러나오는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런데 그 때는 참 가난해서 네 외할아버지가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었단다. 그가 성실하다는 건 인정했지만 하나 밖에 없는 딸이 가난한 집에 시집가서 고생하는 게 싫었던 거지."
 엄마의 눈에는 원망은 없었다.
 "그래도 난 그 사람을 만났어. 그러던 도중 내 아버지가 주영씨와 그 사람의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러다 아버지 눈에 띄었지. 처음에는 반항도 참 많이 했었어. 하지만 네 외할아버지는 이미 네 아버지에게 마음을 주신 상태였지. 하지만 난 돈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어. 그게 싫었는지 네 아버지가 좋지 못한 일로 그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단다. 그리고 그러더구나.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감옥에서 죽어서 나오게 만들겠다고. 지금이나 그때나 그 사람은 그럴 능력이 있었고, 할 수도 있었지."
 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보면 그러고 남았을 거라는 걸 태림도 알 수 있었다.
 "그분은 어떻게 됐어요?"
 엄마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 나왔다.
 "죽었어. 아니야 네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어. 네가 결혼에 동의하자 그 사람을 풀어줬지. 그 사람은 한동안 날 찾아 왔지만 난 이미 마음을 정했기 때문에 만나지 않았었어. 그러다 몇 년이 흘러서 소식을 들었어. 차사고가 났었데. 그 사람 언제나 착했거든. 아이 대신 죽었어."

차들과 사람들 장사꾼들이 엉켜 있는 포장이 되지 않은 거리에 적응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지나가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다른 여자들은 세준에게 호감의 눈길을 보냈고 자신들과 다르게 고급 양복을 입고 길을 활보하는 세준을 남자들은 호감과 거리가 먼 눈빛을 보냈지만, 세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태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윤수는 태림이 미순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했던 일을 말해 주었고, 세준 역시 태림의 심성으로 분명 미순의 가족을 도왔을 거라는 생각에 미순의 가족을 추적했지만 그들은 누군가 그대로 가지고 간 것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돈을 들였지만 누군가 그들의 흔적을 지워 놓은 것처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 병원에서 그들을 보았다.
 세준은 자신을 보고 급하게 자리를 뜨던 태림의 모습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차는 놓쳤지만 번호판을 외어둔 세준은 먼저 택시를 추적했고, 그 택시가 속해 있는 광주를 이 잡듯이 뒤져 태림을 찾았다.

 

 오늘도 일이 많았지만, 집을 나오면서 가지고 나온 세준의 사진이 들어 있는 그가 준 지갑을 들여다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세준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항상 아버지의 얼굴도 떠올랐다. 

 병원에서 그를 보고 도망쳤을 때도 그에게 떠났을 때 만큼이나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를 잊어야만 했다. 이미 그들의 인연은 아이가 죽었을 때 같이 끝났다고 태림은 생각했다.
 태림은 힘들었지만 광주로 내려와 미숙 언니네 식구들과 함께 여관과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여관과 식당이 차츰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자 일하는 아주머니들까지 구했지만 가끔은 그 일손도 부족했기 때문에 때때로 태림도 객실 청소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청소 좀 하겠습니다.”
 “하 암. 음 그라쇼.”
 103호 손님은 언제나 같은 차림의 파란색 츄리링을 입고 방안에서 이상스러운 잡지나 만화를 보면서 있었기 때문에 아주머니들도 꺼려하는 방이었다.
 역시나 꼬질 꼬질 한 모습을 한 남자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보기 민망한 그림으로 가득 차 있는 만화책을 능글맞은 미소를 띠며 보고 있었다.
 “잠시 나가 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의 눈이 번뜩 이었지만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방바닥에 눈길을 띄지 않았던 태림은 그걸 미쳐 보지 못했다.
 “그냥 치 것 이제. 나가라 마라 하는구먼, 아이고 어쩔 수 없제이.”
 남자는 굼뜬 동작으로 기지개를 펴면서 방문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남자는 나가는 척 문고리를 잠시 잡았을 뿐 방문을 잠가 버리고 놀라 얼굴을 든 태림을 만화 속의 음탕한 남녀를 보듯이 바라보더니 그녀와의 간격을 점점 좁혀 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거기서 멈추지 않으면 소리 지르겠어요.”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강한 의지를 담은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남자는 잠시 발을 주춤거렸지만 다시 이상스러운 웃음을 지으면 태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으로는 자신의 부풀어 오른 물건을 만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난 분명히 멈추라고 경고했어요.”
 “헤헤. 싫다면 어쩔 건데.”
 그녀는 그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자신에게 항복할 의사로 비추어 졌는지 남자는 더더욱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태림은 그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한 치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녀는 들고 있던 방 빗자루를 아주 효율적으로 움직여 더 이상 부풀어 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그의 물건을 단 한번의 지체 없이 팔을 돌려 아래서 위로 걷어 올렸고, 남자는 다른 매질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며 온 방을 떼굴떼굴 구르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 죽네. 아이고.”
 남자의 목소리는 정말 고통스럽게 들렸지만 태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문을 나왔다. 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가지려는 남자에게 그 정도의 벌은 작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여관 손님들과 식당에서 점심 준비를 하던 식구들까지 몽땅 여관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고, 태림은 일이 조용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끙 하는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애기 사장. 이것이 뭔 소리당가?”
 다른 객실을 청소하던 아주머니가 빗자루를 손에 쥔 채로 태림에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태림아 괜찮니? 무슨 일이야?”
 식당에서 일하던 엄마까지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그게 저.....”
 태림이 주저하고 있을 때 103호 남자는 이때다 싶었는지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방에서 엉거주춤 걸어 나와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아니에요. 저 남자가 먼저....”
 “퍽.”
 103호 남자가 갑자기 땅으로 널브러지자 사람들의 시선은 한방에 사내를 바닥에 뻗게 만든 남자에게로 시선이 향했고, 태림은 남자의 얼굴을 보자 거의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어....떻게... 여길 알고…….”
 “나중에 이야기해. 저놈 먼저 죽여 놓고.”
 세준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103호 남자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세준을 피해 사람들 뒤로 피해 다녔지만 사람들은 살기 어린 세준의 눈빛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피하느라 103호 남자를 피했다.
 “오메. 뭔일이당가. 저리로 가쇼오.”
 103호 남자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태림의 뒤로 와서 숨었고, 태림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기까지 이르렀다.
 “야. 너 어딜 만져. 빨리 손 내려놓지 못해.”
 세준은 태림의 팔을 꼭 잡고 있는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그녀가 다칠세라 뛰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경찰을 불러 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저 남자한테서 멀어지게 해주세요.”
 103호 남자의 애원에 사람들은 심각한 상황임에도 키득 거리 시작했고, 마침 경찰들이 들어와 남자를 연행해 갔다.
 “조서를 써주셔야 되겠는데요. 우선 신분을 좀...”
 경찰들도 세준에게 위압감을 느꼈는지 조심스러웠다. 그들은 세준이 내민 명함을 보더니 언제든지 편할 때 오라는 인사까지 남기고 남자를 데리고 나갔다.
 “장모님 그동안 별거 없으셨습니까?”
 “응... 그럼. 정서방 자네도 잘 지냈지.”
 엄마는 태림의 눈치를 보느라 세준의 인사를 불편하게 받았다.
 사람들은 세준이 태림의 엄마에게 하는 호칭과 엄마가 세준에게 하는 호칭에 술렁거렸고, 새로운 볼거리에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머. 그럼 애기 사장이 결혼한 상태라는 거네.”
 “그러게. 이일을 어쩌나. 쌀집 사장이 애기 사장 자기 며느리 삼고 싶다고 했다면서.”
 “그 뿐이야. 사진기사 장군도 애기 사장한테 반해 가지고 거의 매일 밥 먹으로 식당에 오잖아.”
 세준은 사람들의 말소리를 하나도 빼지 않고 들었고, 누군가 태림을 마음에 담았다는 사실에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잠깐 나가서 태림이 와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엄만 아버지의 모습이 세준의 위로 겹쳤는지 몸을 떨었다.
 “태림이가 좋다고 해야지.”
 “나갔다가 올게요. 걱정하실 것 없어요. 엄마.”
 세준은 자신을 마치 불한당 취급하는 태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현명하게도 속에 있는 말을 내 뱉지는 않았다.

 태림이 세준을 데리고 간 곳은 음악 홀이었고, 머리를 긴 촌스러운 DJ가 머리를 넘기면서 사연과 함께 음악을 틀어주고 있었다.
 “커피 두 잔 주세요.”
 “전 우유주세요.”
 “아직도 우유 좋아하는 구나.”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커피를 보면 가끔 공장장이 생각이 나서 피했다.
 “왜 오셨어요?"
  "그때 왜 날 보고 도망친 거야?"
 태림은 고개를 들어 세준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만나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윤수 내 밑에 있다."
 세준은 태림이가 한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딴 소리를 했다.
 그가 세준의 경호원으로 있다는 건 축하해주고 싶을 만큼 기뻤지만, 지금 그들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 였다. 태림은 그가 그 만큼 긴장해 있다는 걸 몰랐다.
 “무슨 일로 내려오셨어요.”
 “같이 올라가자.”
 꿈에서도 그리고 일상에서도 그가 이 말을 해주기를 바랐다는 걸 태림은 깨달았다.
 “왜요?”
 “넌 내 아내니까.”
 하지만 이건 그녀가 원하던 답이 아니었기에 태림은 좌우로 고개를 흔들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상상하던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그저 서류상으로 꾸며진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말은 없었다.
 “왜?”
 역시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는 건지도 몰랐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많은 용기가 생겨났지만 아직 세준이라는 대상은 제외인지 그녀의 마음속에 말들이 밖으로 흘러나오지는 못했다.
 “어차피 우리 결혼은 우리들의 의사는 배제한 체로 이루어 진 거잖아요. 그런 관계를 계속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태림의 말이 끝나자 세준은 양복 상의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어 들었다. 태림은 그것이 본능 적으로 이혼서류라는 걸 알았다.
 “거기에 써진 데로 바라는 건 없어요. 지금까지 해준 걸로도 부족하지 않아요.”
 쫙쫙
 태림은 자신의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지는 이혼서류 조각을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무슨 짓이에요. 난 다시 쓰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그것을 작성 할 때의 처참하고 쓸쓸한 기분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세준이 이토록 잔인하게 구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그럼 다시 쓰지 않으면 되잖아.”
 “부모님도 우리의 재결합을 원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아니. 널 찾는데 가장 앞서신 분들이야. 네가 돌아오기를 바라셔.”
 태림은 그 말을 믿고 싶었고, 희망이 생기려고 했지만 꾹꾹 눌러버렸다.
 “하지만 네가 원하지 않아요. 우리 더 이상 할 이야기 없는 것 같군요.”

 태림은 흐르는 눈물을 겨우 감추며 여관으로 돌아왔고,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한나절을 방에서 보내고 저녁에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 사람 갔죠.”
 “아니. 방 하나 빌렸다.”
 “엄마! 방을 빌려주면 어떻게 해요.”
 태림의 비난에 엄마는 어깨만 잠깐 들썩일 뿐이었다. 방에 들어가서 바깥일을 살피지 않는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세준은 태림이 엄마의 옆에 없는 사이에 마음 약한 엄마를 꾀인 것이리라.
 “그럼 어떻게 하니 돈주고 있겠다는 데 손님을 내보낼 수도 없잖니.”
 태림은 엄마의 말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손님’이라는 말에 세준을 그냥 손님으로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태림은 만 하루가 지나지 않고서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는 조금 야윈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본 남자들 중에 가장 건장한 세준이 하루 종일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걸 그냥 넘기기에는 태림은 아직도 그를 사랑했다.

 “올라가지 않을 거예요?”
 “난 너랑 올라간다니까.”
 세준은 손님들을 위해 가져다 놓은 아령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가볍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난 가지 않는 다니까요.”
 “난 너랑 갈 꺼야.”
 “마음대로 해요. 고집불통 같으니.”
 그를 외면하기로 한 태림의 결심과는 관계없이 사람들은 세준에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서기 시작했고, 세준은 그걸 십분 발휘하여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있었다. 문제는 그 사람들 속에 순진한 엄마까지 끼여 있다는 것이었다.

 태림은 엄마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결심을 말했지만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세준 때문에 엄마하고 싸우기까지 했다.
 “미워요.”
 세준은 태림이 쀼루퉁한 얼굴을 하고 내뱉은 말에 가슴에서 뭔가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그래?”
 “몰라요.”
 세준은 이러다 태림이 정말 자신을 영영 돌아봐 주지 않을 까봐 무서웠다.
 그의 그런 두려움에 무게를 더하려는 듯이 태림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말했던 쌀집 아들과 사진기사가 얼쩡거려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저런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남자가 뭐가 좋아?”
 태림은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사진기사를 보고 평을 하는 세준을 흘겨보았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난 저 남자 좋다고 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장 기사는 다른 사람 기분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에요.”
 세준은 휭 하니 바람을 일으키고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곰탕하나 주쇼.”
 세준은 식 당일을 거들면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쌀집 아들을 꼽았다.
 세준은 쌀집 남자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려는 태림에게서 쟁반을 빼앗아 들고 직접 음식을 가져다 날랐다.
 “남자가 남우세스럽게 시리 어찌 음식을 나른다요.”
 “남이야. 뭘 하던 상관없지 않습니까.”
 세준은 자신의 감정을 담아 그릇을 놓았는데, 그 소리에 태림이 쫓아왔다.
 “그릇을 그렇게 소리나게 놓으면 어떻게 해요. 죄송해요. 아직 일이 서툴러서요.”
 “내가 태림씨가 사과하니까 그냥 넘어 갈라요. 다음부터는 조심하시요이.”
 세준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일하기 싫으면 그냥 방에 가있던가요. 누가 도와달라고 했어요.”
 “저렇게 구식인 남자가 어디가 좋아.”
 “난 좋다고 한적 없다니 까요. 그리고 구식이어도, 내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는 사람이에요.”
 이제 목록이 만리장성처럼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세준은 서울에 있는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나서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자 하늘을 보며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정서방.”
 할 말이 있는지 장모님은 밤이 늦은 시간에 세준을 찾아 나왔다.
 “네. 장모님.”
 세준은 장모님의 청을 들어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태림이가 싫어할텐데요.”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태림이를 데리고 올라갈 생각이라면 뭐든지 해야지.”
 세준은 장모의 든든한 후원을 업고 태림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태림은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불빛을 받으며 자고 있었고, 태림의 옆자리에는 세준의 잠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세준은 태림과 장모님이 잔다는 방을 둘러보다가 서랍이 있는 작은 책상 앞에 앉아 태림이 만졌을 상을 조심스레 쓸어보았다. 그러다가 책 사이에 그가 선물 한 것이 분명한 지갑이 기어 있었고, 그걸 본 세준의 가슴이 희망으로 두근거렸다.
 놀랍게도 지갑 안에는 그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가 막 군대에서 제대해 길지 않는 머리스타일을 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태림 역시 그를 마음에 담아 두었다는 희망이 그를 기쁘게 했다.
 그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태림이 깰까 걱정스러워 유난히도 쿵쿵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감싸 앉았다.
 천하의 정세준이 아내의 잠든 모습에 이렇게 설레어 할 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세준은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겉옷만을 벗고 태림의 옆자리로 조심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가 태림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무언 가를 가진 그녀만을 얼굴이었다.

 태림은 따뜻한 품안에 안기어 있는 게 너무 좋아 얼굴을 비비다 엄마의 부드러운 가슴이 아닌 단단한 가슴을 느끼고 눈을 떴다. 어두웠지만 당연히 모든 감각이 세준이라는 걸 알아챘고, 그녀의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태림은 자신을 꼭 안은 세준의 팔에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고, 천천히 내려오는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맞아 들였다.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모든 부드럽고 감각적인 것들이 울고 갈 만큼 서로에 대한 배려와 그리움으로 하나가 되었다.

 세준은 태림의 입술에서 귀 목 그리고 그녀의 탐스러운 가슴까지 여행을 멈추지 않았고, 태림이 환희의 소리를 낼 때까지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안...안돼요.”
 하지만 세준의 입술과 손길은 이미 단단해진 태림의 유두를 머금고 쓰다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여긴 방음이 되지 않아요.”
 태림의 숨찬 소리에 세준은 자신의 입으로 태림의 입을 막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줄 알았다. 세준은 여관에서 몇 일 지내면서 적날하게 들리는 옆방의 소리에 잠을 깬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태림이 그의 애무에 내는 신음소리가 그 무슨 소리 보다 더 마음에 들었지만 그녀가 아침에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건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사랑의 여파로 가슴을 들썩일 때도, 진정이 되었을 때도 세준은 태림의 안에 머물러 있었다.
 “같이 가자.”
 태림은 평생 기억할 만한 사랑을 나누어 놓고 흥을 깨어버리는 세준의 행동에도 올라가지 않겠다면서 그의 눈길에 휩쓸려 사랑을 나눈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의 말뜻을 이해한 태림의 얼굴이 붉어졌고, 그 변화가 세준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비켜줘요. 일하러 나가야 되요.”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는걸.”
 “숨쉬기 힘들어요.”
 태림은 포기하지 않았지만 세준은 태림의 양쪽에 팔을 괴고 가슴을 조금 들어올렸을 뿐이었다.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우린 부부 관계를 맺었어.”
 태림은 그의 어휘에 고개를 돌렸다.
 “부부가 아니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세준은 그 말에 잠시 숨쉬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굳어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세상에 대해서 많이 배웠어요. 부부가 아니어도, 이... 이런 관계를 맺잖아요.”
 태림은 뭐라고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어 그와 자신의 밀착된 모습을 한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몸짓에 그녀의 몸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누가 가르쳐 준거야.”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여관을 하면서 찾아오는 남녀가 부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처음에 그 깨달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안다면 세준은 그런 질문을 하지 못했을 거다.
 “뭐라고요? 정말이지 말하고 싶지 않아요.”
 태림은 움직이려다가 그의 표정처럼 성나있는 그의 남성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눈빛을 보니, 아직 배울게 많구나.”
 아무런 전희도 없이 거칠게 움직이는 그의 몸짓과 하나가 된 태림은 잠깐 생각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일어났을 때 세준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들어냈다는 걸 알았고, 그 깨달음에 더 흥분됨을 느꼈다.
 그의 행위가 좀 전과는 다르게 얼마나 거칠고, 맹목적이었는지 태림은 금새 잠이 들었고, 세준은 그런 태림을 한참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29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세준이 옆에 있으리라 생각한 그녀는 그가 없자 실망을 했다. 그건 자신의 결심과 다른 감정이란 걸 알았지만 뻐근한 몸은 그녀의 결심은 언제든지 허물어 질 수 있는 모래성이라는 걸 여실히 가르쳐 주었다.
 “나 서울 간다.”
 태림은 그가 포기했다는 것에 왜 기쁘지 않고 슬픈지 알았지만 억지로 웃었다.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 일 마무리되면 내려올게.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올라가자.”
 태림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영원히 떠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날아 오를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서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녀는 깨닫지 못했지만 세준은 그녀의 배웅에 미소로 화답했다. 그녀의 마음은 세준을 처음 보았을 때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입으로 그녀의 감정을 내 비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준이 떠난 자리가 이토록 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태림은 다른 사람에게 표현은 하지 못했지만 그가 빨리 내려와 주기를 기다리며 그를 떠올렸다. 그가 광주에 내려오기 전에는 그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한 반면 그가 이번에 올라간 뒤로는 그의 얼굴, 몸짓, 말투를 잊어버릴 새라 거의 하루 종일 그의 생각을 했다.

 세준은 약속대로 내려왔지만 태림과 신체적인 접촉은 가능한 피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우선은 태림이가 그녀의 인생에서 그가 필요하다는 걸 확실히 깨닫길 원했다.
 “어이 거기? 히물끼리하게 생긴 총각 삐루 한잔 가지고 와보소.”
 세준은 히물끼리하다는게 결코 칭찬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에 괜히 시비를 붙어 태림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 그러나 삐루는 문제가 달랐다.
 “예?”
 도대체 삐루가 뭐야?
 세준은 도움의 눈길을 사방으로 보냈지만 다들 자신들의 일에 바빠 아무도 그를 도와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메. 울화통 터지 것는 그. 삐루 하나 가지고 오란지가 언젠디 그라고 서있는가, 어여 가지고 오소잉.”
 이상스럽게 식당에서 밥 먹는 사람 중에 느긋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보였다. 세준은 자신에게 삐루라는 것을 시킨 남자를 식당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생기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겁나게 짜증 나불구만. 저그 우게 있는 삐루 좀 가지고 오라는디 장승처럼 서있단가.”
 우게?
 “삐루가 뭐야? 우게는 뭐지?”
 세준은 무거운 쟁반을 들고 다가오는 태림에게 쟁반을 받아 들었다.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다닌단 말이야.”
 세준의 놀람에도 태림은 그저 어깨만 씰룩거렸다.
 “근데 뭐 물어봤어요.”
 “삐루하고 우게.”
 그의 목소리 리는 심통 난 어린 아이 같았다.
 처음으로 태림의 얼굴에서 미소가 보일 듯 말 듯 입가가 씰룩이자 세준은 삐루를 시킨 남자를 안아 주고 싶어졌다.
 “맥주요.”
 “뭐?”
 세준은 절대 그 문제의 삐루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다시 한번 태림에게 물었지만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한결 같았다.
 “맥주라니까요. 저기 냉장고에 있어요. 잔도 잊지 말고 가져다주세요.”
 태림은 당황한 세준의 얼굴이 너무 재미있어 입가에 가득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식당 일을 돕겠다고는 했지만 얼마나 가랴 싶어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식당 안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그를 무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준은 우개라는 뜻을 맥주를 찾고서야 알 수 있었다. 맥주는 냉장고의 맨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는 사투리에 적응하는 게 태림을 설득하는 일보다 더 어렵게 느껴질 정도였고,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세준이 식당 일을 잘 해내리라 믿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의 걱정을 무시하듯이 모든 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고 있었지만, 태림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삐루에는 단 한방에 무너지고 말았고,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까 저 아저씨가 나보고 히물끼리하게 생겼다는데, 그건 무슨 뜻이야.”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태림이 자신의 질문에 배를 움켜잡고 웃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까지 그의 말을 듣고 웃기 시작하자 세준의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태림의 밝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자 그의 피는 다른 곳으로 몰리기 시작했고, 해결을 못하더라도 식당에서 더 이상 동물원 원숭이가 되기 싫어 아직도 웃고 있는 태림의 손목을 잡고 뒷문을 통해 식당에서 나왔다.
 “왜?”
 웃는 모습은 보기 좋았지만 이유를 전혀 모르는 세준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세준의 골난 모습에 태림은 겨우 숨을 고르고 눈가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얼굴이 너무 희어서 그렇기도 하고 여기 사람들에 비해서 키도 좀 크고 약해 보여서 그런 말을 하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녀의 기준에서는 그의 골격이 절대 약골이 아니었지만 농사일과 노동을 주로 하는 식당 손님들에게는 세준이 약해 보였을 것이었다.
 “그건 나보고 약골이라는 소리잖아.”
 남자의 자존심이 상하는 소리였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아니고 태림의 앞에서,  그런데 태림은 그 말을 듣고도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신경 쓰지 말라면서 아직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약과예요. 나보고는 먹다 남은 멸치 쪽아 리라고도 했는걸요.”
 “뭐! 누가?”
 그에게 뭐라고 하던 상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태림을 모욕한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 왔을 때 제가 너무 약해 보여서 걱정해서 한 소리예요. 여기 말이 투박하기는 해도 사람들이 얼마나 정이 많은데요.”
 태림은 세준의 분노하는 얼굴에서 뭔가를 보았다고 확신 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그와 처음 만난 날부터 그의 눈에서 보고 싶던 빛. 그 빛이 이제 그녀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한테 할 말 있어요?”
 혼자 살아보면서 갖은 풍파를 겪어 보면서 태림은 많이 성숙했고, 세상에 조금은 당당해진 자신의 모습이 뿌듯했지만 그의 앞에서는 언제나 떨렸다.
 “같이 올라가자.”
 그건 들었던 말이었다.
 “왜요?”
 그 질문은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었다. 할 수만 있다면 국어사전에서 영구히 지어 버리고 싶은 단어였다.
 그들은 같은 결론이었지만 단 시간에 가는 방법은 아직 많이 배워야만 할 것 같았다.
 “널.... 널 사랑하니까.”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상처가 되어 누런 고름이 흐를망정 그녀를 포기 할 수는 없었다.
 태림은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의 볼을 만지기 전까지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날 사랑하지 않아도 돼.
  뒤돌아보지 않아도 돼.
  내가 다 할게.
  너한테 강요하지 않을게,
  그냥 내 옆에만 있어 줘,
  내가 참기 힘들면 때려도 화를 내어도 괜찮아.
  미워해도 좋아.
  하지만 내 옆에만 있어 줘.
  네가 너무……. 너무 그리워서 보고 싶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그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확인 할 것이 남아 있었고, 그 말을 하는 그녀의 가슴은 찢어지고 있었다.
 “그... 여자! 혜란씨를 사랑하잖아요.”
 태림은 그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입은 태림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눈으로는 다른 말을 할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그녀를 다시금 겁쟁이로 만들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래 그 시절에는 그녀를 사랑했을 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그래서 그때 날 더 밀어 낸 거 아닌가요. 제가 아버지에게 사진을 준건 잘못한 일이었지만.... 그 디자인은 어차피 구형이었다는 거 알아요.”
 세준은 할 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난 그때도 널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그걸 인정할 수 없었나봐. 그래서 그랬던 거야. 날 용서해. 혜란이 때문이 아니었어. 그녀는 사랑이고 정인 이었다는 말보다는 그냥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었다는 말이 더 맞아.”
 “...”
 세준은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고 있는 태림이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진심을 말했다.
 “널 사랑해. 나와 같이 가자.”
 세준의 눈에도 눈물 차오르더니 그의 광대뼈 위로 흘러 내렸다. 태림은 그의 눈물에 안타까움과 고마움의 물결이 밀려들어옴을 깨닫고 그가 자신에게 한 것처럼 그녀도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럴 수 없어요.”
 세준의 눈빛은 죽어 가고 있었다.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태림은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이미 사랑하는 걸요.”
 그녀를 잡고 있던 세준의 손길이 다시 세차지더니 그의 품안으로 그녀를 끌어 당겼다.
 “고마워. 나 같은 놈한테 기회를 줘서. 날 사랑해 줘서. 이제는 절대 널 놓지 않을 게.”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꼭 데리고 가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사랑은 기대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멋없고 냉정하고 재미없는 그를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은 모든 과거를 묻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들의 남은 인생을 위해 서로를 사랑하면서 보내기로 약속했다.

30


 그들은 결혼식을 하고 약속대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결혼식은 아주 조촐하면서도 스피드 하게 치러졌지만 태림은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소박했지만 웨딩드레스도 입었고, 세준과 즐거운 사진 촬영도 했기 때문에 만족했다.
 윤수에게서 들어서 알게 되었는데, 태림을 괴롭히고 다른 여공들의 인생을 망치던 공장장을 세준의 손을 써 퇴사 시켰다고 했다. 가능하면 구속시켜 버리고 싶어 했지만 그에게 당한 여자들이 비밀을 원했기에 그런 방법을 취했다고 했다.
 그런 세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 날 밤 여관에서 보냈을 때 생겼는지, 허니문 베이비인지는 모르지만 첫째 딸은 무사히 세상에 태어나 가족들의 온갖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언제나 태림을 사랑하는 세준의 일 순위 관심사는 항상 태림이었다.
 “피곤하지 않아?”
 “괜찮아요. 아기가 젖을 잘 먹어서 다행이에요.”
 세준은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 엄마의 젖을 맛있게 빨아먹는 딸아이의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그런 아이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태림을 바라보았다.
 그와 돌아온 그 날부터 태림의 입가에는 언제나 그런 부드러운 미소가 거의 떠나지 않았고, 그런 그녀의 얼굴은 세준의 삶의 의미였다.
 세준은 참을 수 없는 욕구로 태림과 아이의 앞에 꿇어앉아 남아 있는 그녀의 한쪽 가슴을 입안에 머금고 마치 아이처럼 생명을 위해서 인 것처럼 유두를 빨았다.
 그런 세준을 태림은 거부하지 않고 남은 팔로 세준을 안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었지만 워낙에 어릴 적부터 독립적으로 자라온 세준이 외로움을 많이 탔었다는 걸 많은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태림은 가끔 자신에게만은 아이처럼 행동하는 세준을 아무런 말없이 받아주었다.
 “아이가 다 먹었나봐.”
 “많이 먹었어요. 어머니께 데려다 주고 올게요.”
 첫 손주가 여자아이였지만 시부모님은 전혀 서운해 하지 않았고, 틈만 있으면 아이를 돌봐주었기 때문에 태림이 지치는 일은 없었다.
 “괜찮다. 다음에 또 나으면 되잖니. 사실 나도 딸 하나 낳고 싶었는데, 생기지가 않아서 얼마나 서운했다고.”
 아기를 어머니에게 부탁하고 오자 세준이 욕실에서 막 나오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답답하니? 집안에만 있어서.”
 세준은 태림이 잘 묻지 않는 말을 하자 걱정이 앞섰다. 그녀가 너무 놀란 일도 많았지만 그녀를 보호하고 싶다는 욕심에 태림이 집에서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녀가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요. 현이가 시간만 나면 놀러 오는 걸요.”
 아직은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은 없었다. 광주에 있을 때에는 엄마와 미순 언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했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도 없었거니와, 적어도 아이가 클 때까지는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지금도 그녀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조금 더 큰 후에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식구들 역시 반대하지 않고 좋아했다.
 태림의 밝은 얼굴에 세준은 마음을 놓았다.
 “나름대로 잘 보낸 하루였어. 너에게 즐거움을 주는 현이가 나한테는 골칫거리가 되어버렸지만.”
 “왜요?”
 태림은 현이 윤수의 흉을 잔뜩 보자 그들 사이에 뭔가 있을 것 같아 세준이 혹시 아는 게 있는가 싶어 넌지시 물어 본 것이었다.
 “요즘 이상한 사람이 붙어서 걱정스러워서 윤수를 붙여 줬더니 경호원이 못생겼다는 둥, 운동도 못하게 생겼다는 둥, 별 이상한 트집을 잡아서는 요즘 날 달달 볶는 중이야. 네가 말해서 좀 정신 좀 차리라고 그래. 현이 얼마나 요리 저리 잘 도망 다니는지 윤수가 대머리가 될 지경이라니까.”
 태림은 그의 말에 웃음이 나와 킥킥 웃고 말았다.
 “왜? 현이가 무슨 말하고 갔어.”
웃음소리는 세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현이가 윤수씨 좋아하나 봐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 와서 윤수씨 욕을 한 바가지나 하고 갔거든요.”
 “현이가?”
 “네.”
 “윤수씨도 그다지 싫은 것 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대머리가 될 것 같이 힘들어도 일을 그만둔다는 소리를 안 하지요.”
 세준은 또 다른 시각에 동의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착실한 윤수라면 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태림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그가 임자가 생기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 애들이 우리처럼 서로 이해하고 행복해 지는데 얼마나 걸릴까?”
 “필요한 만큼이요. 하지만 너무 길지는 않을 거예요. 이렇게 같이 살아가는 시간도 너무 짧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