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다 말하고 싶습니다

..2005.06.11
조회1,037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는 심정으로 이곳에 글을 올려봅니다.

 

요즘 제가 누구를 많이 좋아하는데, 그 사람이랑 잘 안되는것이 힘들고 속상해서 어제 친구 녀석 하나와 술을 마셨습니다.  솔로탈출 참 힘들구나 한탄하는 제게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상처 받을 각오 하고라도 빈틈 좀 보이라구요.  마음에 빗장을 꼭꼭 걸어잠근 사람 같데요 제가.  다들 절 할말 못할말도 못가리고 떠드는 수다쟁이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더니, 이 친구 말이 전 자신을 너무 숨긴다내요.  사실 이 친구는 정황도 모르는데 (웬지 창피해서 말못했어요), 좋아하는 남자 있으면 고민이나 아픔 가진거 그에게 한번 털어놓아보래요.  남자가 마음이 없으면 냉담하게 반응할 수도 있겠지만, 또 그렇게 서로 가까워질수도 있다고 하내요.  친구도 남자니 같은 남자 심리 좀 아는거겠죠?

 

집에와서 혼자 생각 좀 했습니다.  아무래도 친구가 정곡을 찌른 것 같군요.  저 상처투성이에 이런저런 콤플렉스 많고, 거기다 죄책감에까지 시달리는 사람인데, 그럴수록 좋게 포장된 모습만 보이려고 더 노력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되기까지 오랜 세월과 여러가지 사건이 있었으니 바뀌는 것 또한 하루 아침에 되지는 않겠지요.  여기서 연습해보고 싶습니다.  어떤 부분들은 평생 숨기고 사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나마 답답한 마음 풀어보고 싶습니다.            

 

지금처럼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해서 고민고민 하다가 용기내어 고백한 적이 한번 있습니다. 

새내기 대학생으로 만난 과선배, 동아리 오리엔테이션에서 잠깐 스쳤는데 워낙 첫인상이 나빠서 기억에 남았습니다.  한동안 얼굴을 안보여 궁금해지려던 찰나 많이 아프단 말을 들으니 좀 안됐더군요.  그래서인지 선배가 다시 나타났을때 약간은 반가웠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같은 버스에서 마주쳤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갔고, 첫인상과 달리 재밌고 좋은 사람 같았어요.  내리는 정류장까지 같았을때 기분 묘했습니다 (거기서 부턴 정반대 방향이었지만).  그리고 곧 동아리 사람들과 늦게까지 놀다 귀가하던 여자동기가 집근처에서 치한에게 당할뻔한 일이 있었는데, 사건이 제법 심각했었나봅니다.  동아리 일로 늦게 들어갈시 무조건 여자들을 집앞까지 바래다주라는 엄명이 떨어졌죠.  방향 비슷한 사람들끼리 짝지워졌는데, 저는 당연히 선배가 맡았습니다.  다들 몇주만에 흐지부지해졌지만 선배는 학기내내 저를 집까지 동행해주었죠.  키가 족히 185는 되는 남자가 옆을 지키고 있으니 참 든든했습니다.  그 덩치에 우리집 개 무서워하는거 보고 귀여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한번은 꽃샘추위에 하도 덜덜 떨길래 "이러면 덜 추울라나?" 하고 슬쩍 팔짱을 껴줬더니 얼굴 벌개지면서 팔을 빼더군요.  그런 사람이 몇발자국 더가다가 헛기침하고 한다는 말이, "팔짱보다는 허리에 팔 둘러주는게 더 나을텐데" 였습니다.  

버스에 나란히 앉아 농담따먹고, 어쩌다 낮에 집에가게되면 은혜갚으라며 저보고 선배집까지 바래다달래기도 하고,  동아리에서 고적답사여행 가서는 하루 단둘은 아니더라도 함께 잠적하기도 하고...  선배 덕분에 한학기 참 유쾌하게 보냈습니다.  좋은 선배, 편한 선배에서 어느덧 좋아하는 남자로 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더군요.                                   

그러나 아쉽게도 선배는 다음학기 교환학생으로 떠나는게 확정된 상태였습니다.  선배가 떠날때 까지 잠시 지낼 고향집으로 내려가기 전날, 같이 비원에 갔습니다.  얼마전 지방에서 놀러온 친척 때문에 구경갔었는데, 아름답고 운치있는게 선배랑 데이트 한번 와봤으면 하는 생각이 났었거든요.  선배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무턱대고 가자는 말이 나오더라구요.  혹시라도 이상하게 생각할까 긴장 잔뜩했다가 선배가 군말없이 그러자 했을때 그 안도감이란.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선배가 약속이 있어서 저녁 전에 헤어져야했는데, 그대로 버스 정류장에서 작별 인사 하는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뒤돌아봤더니, 먼저 성큼성큼 가버렸던 선배도 그냥 멈춰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선배가 다시 다가와서 낮이지만 수상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며 집까지 같이 걸었습니다.  방학인데 어디 안가냐며 선배 사는 곳에 놀러오지 않을래하고 그가 물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 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하지만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선배가 아니라고 선배 있는덴 별로 볼것도 없으니 더 좋은데 구경가야지 그러는거에요.  오라는 말인지 오지 말라는 말인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죠.          

 

선배는 떠나고 전 선배를 기다렸습니다.  손도 한번 안잡아본 사이였지만 좋아하는 사람 기다리는거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짜피 누굴 사귀어본 경험이 없으니까 특별히 허전한 줄 몰랐고, 제 외모가 별로여서  별다른 유혹도 없었습니다.  외로울때 의지되는 친구도 있었구요.  입학식날 어떻게 저랑 눈맞아(?) 친구먹은 다른과 학생이 있었는데, CC였던 여친이 방학동안 바람나서 깨지는 바람에 서로 위로 하고 상담도 하고, 영화 보는거나 식당밥 먹는거처럼 혼자서 하기 어색한 일 종종 같이하고 그랬거든요.     

한학기 동안 선배로부터는 편지 한통, 그림 엽서 한장, 이메일  서너번 뿐이었는데도 좋아하는 마음이 커져만 갔습니다.  내가 사랑이란 걸 하나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부터 하나의 악몽이 시작되었습니다.  잊고 있었던 어린시절의 나쁜 기억이 되살아 난 것입니다.  정확히 몇살인지도 모르겠는 어린 나이때부터 적어도 초등학교 1-2학년까지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이웃집 언니 오빠도 있었고, 친척 아저씨도 있었고, 심지어는 동네서 범죄가 발생해 수사나온 경찰 아저씨까지 제게 손을 댔습니다.  경찰에게는 일시적으로 당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오랜 기간 습관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된다고 해서 입을 다물줄만 알았지 당시에는 그게 크게 나쁜건줄도 몰랐는데, 그때 몸서리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절망스러웠습니다.  이제와서 괴로워하는게 가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고, 그래서 제 자신이 더욱 더럽게 느껴졌습니다.  이런 내가 사랑받고 사랑할 자격이 있나 싶었습니다.  자꾸 눈물이 나고, 만사가 귀찮아졌습니다.  사람들 만나는게 두려워졌습니다.  나중에 우울증이라는 것을 알고 치료도 받았지만 당시에는 그저 난감했습니다.  가슴이 답답한들 제가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든지 알면 손가락질 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그때 어느 독실한 크리스쳔 여자분과 친해졌습니다.  조금씩 마음을 열고 상담을 하기 시작했죠.  그 분 절대 절 비난하지 않고 제말을 다 들어주며 끝에 꼭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덕분에 많이 나아지고 생각도 긍정적으로 변하는 듯 했습니다.  나한테 왜 이런일이 일어났나 원망스럽기만 하던 것이, 차차 선배에 대한 내 마음의 확신 같이 느껴졌습니다.  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은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자격이 있나 없나로 고민해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요.                        

 

 

마침내 선배가 돌아왔을때 조금은 실망이었습니다.  따로 연락이라도 해줄줄 알았는데 다른 동기들 선후배와 다름없이 동아리방에서 재회했습니다.  절 보고 특별히 더 반가워하는 내색도 없었구요.  그때 알아챘어야하는데, 바보같이 전 오히려 선배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선배는 거절했습니다. 절 좋아하긴 하지만 단지 후배로서일뿐이고 앞으로도 서로 아끼는 선후배로 지내자고 하더군요. 

참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분명 우리사이엔 뭔가 특별했다고 믿어 의심치않았는데 나혼자 착각이였나?  안그래도 볼품없는 내 몸매가 그사이 더 망가졌나?  먼저 고백했다고 내가 발랑까진 애같아 싫어졌나?  혹시 내가 더럽다는게 느껴지는건가?  그래 나같은 애가 사랑은 무슨...  별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선배와 친하게 지내는 것 또한 힘들었습니다.  얼마전 희망고문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프다고 하면 걱정하며 달려와주었습니다.  식당에서 남자동기와 밥먹는거 보면 질투라도 하는듯 너 그녀석 좋아하는거냐며 전화왔습니다.  한번은 학교 끝나고 같은과 남학생이랑 걸어나오는데 선배와 마주쳤습니다.  잠깐 좀 보자며 그 남학생 먼저 보내고 하는 말이 선배도 가는 길이니 집까지 바래다주겠답니다.  선배와 편하게 지내기 위해서라도 남자친구를 사겨야겠다고 했더니, 곧 선배 졸업할텐데 뭐하러 그러냐며 들어온 소개팅도 말렸습니다.  포기했다가도 선배 말 한마디에 또 희망이 생겨버리고, 그 희망이 충족되지 않아 슬퍼하기를 선배가 졸업할때까지 되풀이했습니다. 

 

그사이 우울증이 도졌습니다.   그전에 도움이 되던 크리스쳔 여자분도 더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선배를 좋아해서 힘들어한다는 걸 아시고 말리셨죠.  믿는 사람이 안믿는 사람과 사귀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좋아한다는게 바로 사귀고 싶어하는거니까 그것도 나쁘다고 하셨습니다.  선배가 포기되지 않으니 죄책감이 늘었습니다.  자연적 믿음에서 멀어졌습니다.  절친하게 지내던 다른과 남학생 친구까지 군대에 가버리고 나니 정말 의지할 곳 없는 것 같았습니다.  좀 이뻐지면 누가 날 좋아해주려나 하다보니 거식증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씩 자살충동도 느꼈죠.  오랜 정신과 상담과 약물치료로 낫기는 했지만 제게 그런일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집 식구들도 모르죠. 

 

첫사랑이 많이 아파서인지 점점 사랑, 남자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하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선배가 먼저 졸업하여 언제돌아올지 모르는 유학길에 오르고 전 대학 마지막 일년을 다시 선배없이 다녔습니다.  여전히 마음은 얼굴도 못보는 선배를 향했지만 그런 마음따위는 쉽게 꺾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을만큼 끔찍한 우울증도 한가지 좋은 결과가 있었는데, 살이 제법 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좀 통통한 편이었지만 얼굴은 예쁜축에 든다는 어느 친구의 말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다시 깊이 빠져드는 것은 두려웠습니다.  누굴 사귀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헤어질때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이유로 바로 마음을 접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없는 유혹은 해봤습니다.  전에는 남자가 먼저 다가올땐 손끝만 닿으려해도 그게 성적인 접근으로 느껴져 불편하고 소름이 끼쳐 피하게 되거나, 내가 괜찮다 싶은 남자들이 있으면 날 여자로 보는 것도 아닌데 싶어서 바로바로 동성같은 친구로 만들어버리곤 했었죠.  그런데  내 진심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가있으니까, 어짜피 장난이니까 싶어서인지 거절당해도 아무렇지 않을것 같았습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면 적어도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신체접촉이 있어도 참을만했습니다.

 

생각보다 첫사랑에 얽힌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나름대로 변명이 많이 하고 싶었나봅니다.  뒤따르는 이야기를 하자면 정말 부끄럽고 죄책감도 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