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62화

피바다200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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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 흥미로운 주종관계야. 재미가 있어.쿡쿡쿡.."

  마령은 웃음을 흘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그의 목소리는 우거진 숲이 만들고 있는 어둠의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는 말을 이었다.

  " 반드시 자신을 찾아낼 것을 알면서도 늘 따르지 말라 명하는 주인과 무슨 일이 있어도 정확히 주인의 위치를 파악하여 찾아내면서도 늘 어둠 속에 숨어 절대 앞에 나타나지 않는 종이라니...두 사람 마치 이 연극을 즐기고 있는 것 같군. 그러니 어찌 재미가 없겠나?"

 그러자,  마령의 목소리가 한 줄기 바람으로 변해 스치듯 어둠에 파묻힌 한 그루의 나무가 그 잎사귀를 조용히 흔들었다. 그리고 곧 마령의 대화 상대가 어둠 속에서 걸어나왔다.

  " 오랜만에 뵈옵니다, 태자 전하."

  환휴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 더욱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는 긴 소맷자락을 가슴으로 모으며 정중히 예를 갖추고자하였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초율을 쫓아 달려나갈 듯한 그의 기세에 마령의 악랄한 장난기가 동했다.

  " 벌써부터 썪는 내가 진동을 하는군. 홍백면장의 솜씨는 언제봐도 근사하지않는가?"

  하지만, 환휴는 피와 뒤범벅되어 질퍽하게 겹쳐진 채 쌓인 혼계 생물의 시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 무반응조차 마령은 재미있었다.

  " 홍백면장이 오늘은 특히나 피에 주렸던 모양이야. 이런 작품은 오랜만이거든. 환휴...너는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느끼는가? 이들의 개같은 죽음을 말이야."

  "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환휴는 표정없는 얼굴에 어울리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 너와 같은 피가 흐르는 이들의 죽음이 무관하다?"

  ".............."

  " 너를 왕으로 모시고자 했던 자들이 아니었던가? 너에게 목숨을 의지하던 짐승들의 죽음이 네게 벌레의 죽음만도 못하다는 것이냐? 하하하.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게로군. 구세주로 믿었던 이가 이런 매정한 말을 내뱉다니. 시체가 벌떡 일어나도 놀랄 일이 아닐게야."

  하지만, 마령의 장난은 환휴에게 재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 무례를 용서하소서. 소인 먼저 자리를 뜨겠나이다."

  그쯤에서 환휴는 장난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예전부터 그가 궁금해하던 것을 듣고 싶었다.

  " 환휴, 묻겠다. 너는 혼계인이었고 혼계 전역을 통합하리라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은 지도자였다. 그런데도 너는 혼계와 네 여자를 미련없이 버렸다."

  환휴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마령은,

  " 또한 너는 내가 제안하는 더없는 기회마저도 저버렸지. 너에게 부귀와 명에를 보장하고 더러운 출신의 족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음에도 가볍게 거절하였지."

  그러자, 환휴는 송구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조아렸다.

  " 도대체 홍백면장이 네게 무엇을 주었기에 너는 부족과 미래를 버리고 그를 따라간 것이더냐? 너는 여전히 그에게 하찮은 취급을 당하고 무시당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단지 종일뿐이다. 그럼에도 그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환휴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질문에 대답을 했다.

   " 전하, 말씀대로 저는 황자전하의 시시한 하인일 뿐이옵니다. 그 분이 제게 주시기로 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께 오라 명하신 적도 없습니다. 단지 제 발로 그 분을 쫓았을 뿐, 전하께 저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마령은 더욱 궁금해졌다. 혼계 소부족의 족장으로 시작한 환휴는 단기간에 혼계 전 지역에 산재하던 부족들을 정복하였고, 혼계인들은 최초의 왕이 탄생하리라 기대했다. 천계, 마계, 수라계의 쓰레기 처리장과도 같던 혼계에 위대한 왕이 나타나 그들을 이끌어주길 모두 바라였다.

  그런 환휴의 능력이 탐이 났던 마령조차 그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칠 정도였다. 마령은 환휴에게 마계로 편입할 것을 제안했다. 그가 제안한 자리는 다름아닌 제 12 전사의 한 자리였다. 마계 최고 영예의 12전사 자리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하지만, 마령의 예상을 뒤엎고 환휴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어느 날 마계대전 이후 300 여년간 종적을 감추었던 초율의 등장과 동시에 환휴는 혼계를 떠났다.

  " 홍백면장의 강한 힘에 끌리었더냐? 태어나 자란 땅을 버리고 떠날 만큼 그의 힘이 절대적이었던가? 하루 아침에 미련없이 따라 나설 정도로 강한 힘을 그가 보여주었는가?"

  얼핏 환휴의 얼굴에 표정과도 같은게 서린 듯 싶었다. 하지만 눈깜짝할 사이 그의 얼굴은 원래의 밀랍인형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와있었다.

  " 아닙니다, 전하. 제가 주군을 뵈온 건 훨씬 오래전의 일이옵니다. 저는 그 때부터 주군을 기다렸던 것이며, 때가 되어 따른 것 뿐입니다."

  마령은 놀랐다.

  제 2차 마계대전 이후, 사라졌던 초율이 300 여년 후 나타났고 그 때의 만남으로 환휴가 혼계를 등졌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인연은 훨씬 이전이라고 환휴는 말하고 있었다.

  환휴는 더 이상 초율을 따르는 것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 제가 절대 가질 수 없던 것을 주군께서 먼저 주시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분노의 대상조차 없었다. 그는 누가 자기를 낳고 버렸는지, 언제 그 비극적인 땅에 버려졌는지 기억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증오의 감정조차 생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형편없는 운명은 아니었는지 방어력이 전혀 없는 갓난아기 시절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아 준 아련한 기억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분명히 부모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는 그나마 살아가는 방법 정도는 익힌 뒤였다. 그리고 혼자 살아가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인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 날, 아이는 쫓기고 있었다. 각각의 초목이 가진 효험에 대해 아는 바가 많던 아이가 약초를 캐어 짊어진 주머니에 넣고 있을 때, 변방을 넘어온 굶주린 수라족들이 그를 발견했다. 어리고 연한 고기를 발견한 두 명의 수라족들은 누런 이 사이로 군침을 줄줄 흘리며 발톱을 세워 달려들었고 아이는 죽을 힘들 다해 달렸다. 메고 있던 천 주머니 밖으로 애써 캐 낸 약초가 튀어나갔지만, 아이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뛰고 또 뛰었다.

  하지만 아이의 약한 두 다리가 짐승의 두 다리를 한 수라족을 따돌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수라족들은 아이가 지쳐가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며 쫓고 있었다. 결국 근육에서 힘이 다 빠진 아이는 그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수라족들의 얼굴은 든든해진 위장을 상상하며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눈 앞에 점점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아이는 가엾게 떨었고 눈물과 콧물이  얼굴에서 뒤범벅 되었다. 울음 소리도, 비명 소리도 아닌 미약한 소리가 목구멍으로 끊어질 듯 새어나왔다. 죽음 앞에서의 본능적인 공포가 아이를 휘감았다.

  " 크허허허헉!"

  한 명의 수라족이 날카로운 발톱을 아이의 가슴으로 내미는 찰나였다.

  " 퍼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거꾸러졌다. 아이의 눈에 그의 뒤통수가 으깨어진 모습이 들어왔다. 피 묻은 돌멩이가 그 옆에 구르고 있었다. 남은 한 명이 채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 역시 똑같은 운명으로 숨이 끊어졌다. 이번에는 머리에서 뿜어나온 피가 아이의 얼굴로 튀었다. 수라족 특유의 지독한 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수라족의 깨진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골수는 주변의 흙으로 스며들고 있었고 그 위에는 앉은뱅이 들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꽃들에게는 좋은 양분이 될 것이었다. 아이는 죽음을 대면했던 공포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어 몸떨림을 멈출 수는 없었지만, 죽은 자의 끔찍한 모습을 곁에 두고 구역질은 하지 않았다. 그런 장면은 혼계에서 낯선 장면이 아니었고 아이는 혐오를 느낄 단계를 벗어나 있었다.

  아이가 주변을 살필 생각을 하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차츰 정신을 차리고나서야 그는 돌멩이가 날라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맞은 편 나무 그늘 아래였다.

  녹음 속에서 남자의 차림새는 현저하게 눈에 띄었다. 소용돌이 모양의 붉은 무늬가 갑옷 전체로 새겨진 흰 바탕의 갑옷을 그는 입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도 그의 갑옷은 특별해보였다. 그리고 익살스러우면서도 괴상한 눈웃음을 치고 있는 모양의 상아와 홍옥으로 된 가면 역시 비범해보였다. 온통 초록 천지인 배경 속에서 상대방의 붉은 가면은 아이에게 자극적이고 강한 인상을 남겼다.

  " 가..감사합니다."

  아이의 몸은 많이 진정이 되어 다리에 힘을 실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는데 그 목소리는 중성적이면서도 낮게 깔려있었다.

  " 너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고마워할 필요없다. 내 앞에서 수라족 짐승들이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꼴따위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뼈를 갈아대는 소리는 질색이지."

  아이는 상대가 고마움을 받아주지 않고 투박한 반응을 보이자 기가 죽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해칠 것 같지는 않자, 어린이 특유의 호기심까지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의 눈에 그의 전체적인 모습이 들어왔다. 그 때, 아이의 눈에 상대의 옆구리에 흐르는 피가 보였다. 갑옷의 현란한 무늬와 혼동이 되어 처음에는 몰라봤지만 그 이질적인 모양의 얼룩은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반쯤 굳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몸을 움직이면 다시 옆구리에서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올 것처럼 상처도 싶어보였다.

  초율은 천제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내어준 칠기부대를 이끌고 마계대전으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목을 걸고 약속했던 세 번째 하늘 야마천의 회수를 위해 그는 침식을 잊고 군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에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소년 장군이었다. 야마천에서의 첫 전투는 소년 장군에게 낯설고도 감당하기에 벅찬 큰 전투였다. 하지만 기적과도 같이 초율은 전투에서 승리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모두가 일시적으로 승리의 기쁨에 취해있을 때를 틈타서 초율은 전쟁 후의 흥분을 달래고 부상을 숨기기 위해 홀로 혼계를 찾아와 있었다. 축복받은 자연 치유능력이 있지만, 여태 그 능력을 제대로 쓸 일이 없었기에 이번 부상이 정해진 시간 내에 얼마나 치유될 지는 알 수 없었다. 음식 섭취가 제대로 안되고 피로가 누적되어 있어 치유는 더더욱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가 머뭇거리며 두어걸음 다가왔다. 초율은 반사적으로 경계심을 일으켰고 아이는 초율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압도적인 힘에 멈추어 섰다. 아이는 사진없이 손을 들어 초율의 피가 굳은 옆구리를 가리켰다.

  " 상처가...."

  그는 초율의 시선에 말 끝을 얼버무렸고, 초율은

  " 깊지 않은 상처다. 너는 네 갈 길을 가라. 내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좋을것이다. 나는 어린아이을 싫어한다."

  초율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힘껏 뛰어 사라졌다.

       

 

  ===환휴의 이야기입니다. 환휴는 초율의 주치의이며 비서이기도 한 인물이지요. 의술이 뛰어나 초율과의 힘겨루기에서 내상을 심하게 입은 제공을 거뜬히 치료하여 그의 관심을 사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언제나 차가운 무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지요. 혼계인이었던 그가 초율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어 곁에 있게 되었는지하는 것이 다음 편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쓰다보니 제 글 속에는 행복한 주인공은 하나도 없는 것 같군요.^^ 저는 항상 행복한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