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동안 사랑하기 (2) - 그의 오른 손이 나의 허리께를 스치다-

레몬파이2005.06.14
조회972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과 기다리던 사람을 발견한 사람들의 표정이 한데 어우러진 복잡한 행렬 속에서 그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심 기대했던,... 그가 나를 먼저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애초의 생각은, 늘어선 사람들의 줄
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혹시 아직 공항에 나오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잣아들 무렵 어디선가 " I'm over here! "
하는 영어에 이어 " 여기야!!" 하는 한국말이 들려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는 그 때, 생각없이 영어가 먼저 튀어나왔다고 했다. 단지 그 곳이 영어권 나라라는 이유 만으로 말이다.  그런 가끔씩 그렇게 순수하고도 특이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상대방을 어디서 만나느냐에 따라 그때 그때, 달라보일 수도 있다는 걸 그
를 통해 여러 번 경험하게 된다.
서울에서의 그 사람과, 아테네에서의 그, 그리고 지금 밴쿠버의 반짝이는 오후의 햇살 속에
서있는 그는 모두 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오래 전의 그가  깊고 그윽했던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 뭐랄까!  다소 이국적이면서도

밋밋하게 눈부시다.

 

" ......................... 흐음... "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내 입에선 벌써 어색하게 인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짧은 숨
소리가 간단하고 흐릿한 미소와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그의 첫 마디는 마치 우리가 바로 어젯밤까지
도 규칙적인 데이트를 해오던 연인들처럼 가까운 간격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했지
만, 나는 생각했다.   - 여전하군요 당신!-

 아침잠을 깨우는 이른 아침의 전화벨 소리와 약속 시간 어기는 걸 무엇보다 싫어했던 그 사
람. 긴 시간의 흐름마저도 그의 그런 완고한 빚깔은 바꾸어 놓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가볍게 웃어보였다.
" 그림이 들어 있는 가방 하나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그랬어."
" 그랬구나!"

그것이 우리가 나눈 인사의 전부였다. 여기저기서 포옹과 키스가 난무(?)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린 아주 조용한 해후를 끝내고 서로의 모습을 천천히 가슴 속에 익혔다.

그 때 였다. 아주 잠깐의 날카롭고도 어지러운 느낌이 나를 멈칫하게 한 것은, 내 수트 케이스를 받아들고 걸어가던 그의 오른 손이 나의 허리께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 후였다.
의도된 다정함인지, 아니면 실수인지는 구별할 수 없었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의 온도는 여전히 차갑다는 것을....

 

 

 

" 눈이 왔었나보네??"
잠시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 사이,  차창 밖을 내다보던 내가 물었다.
" 음, 내가 도착하던 날도 이랬었어."
" 그 날, .. 밤늦게 도착했어?"
" 한 아홉시 넘어서쯤??....  도착했을 땐 무척 어둡더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았
어. 그리스의 밤과 무척이나 닮아있다고 느껴지더라구."

" ................. 그랬어?"

순간 그는 아차 싶다는 표정으로 나의 옆모습을 살피는 것이 내 옆 시선에 들어온다.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는... 그리고 아테네는.... 아테네 속의 플라카는, 그다지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아픈 빚깔의 도시이기 때문에 그는 얼른 화제를 돌리며 속도를 냈다.

" 소형차라서 불편하지 않니? 좀 더 큰 차로 렌트할 걸 그랬지?"

" 겨우 5일인데 뭐....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

 

 

그랬다, 그는 그리스에서 왔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서 왔다.

 서로의 사는 곳이 아닌 전혀 다른 나라로 날아온 두 사람,
그러니까 우린 둘 다 이방인이 되어 앞으로의 5일을 벤쿠버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