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효는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상현을 보고 있었다. 어깨 넓은 상현의 몸에 꼭 맞는 검은색 슈트는 그의 인물을 더 살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멋졌다. 여자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남자는 멋있었다. 실내에서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영효를 몇몇 사람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지만, 지금 여자에게는 선글라스 속 왕자님만 존재할 뿐이었다. 완벽한 모습으로 영효를 향해 빙긋 웃어주는 상현을 향해 영효는 하마터면 그대로 뛰어가 안길 뻔 했다. 신부를 기다리는 그의 앞으로 단숨에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결혼 행진곡이 멋들어지게 울려 퍼지면서 신부가 입장했다. 분명 그 자리는 여자의 자리였다. 영효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지금 다른 여자가 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었다.
“안돼. 안돼. 이럴 순 없어. 이건 꿈일 거야. 그럴 거야.”
영효는 인정할 수 없다는 말투로 연신 중얼거렸다. 당당하게 너 없이도 잘산다는 모습을 보여주려 더 멋지게 꾸미고 왔지만, 옛 남자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여자는 초라한 전 여자친구일 뿐이었다. 불과 몇 달 전 꾸었던 그의 다정한 신부의 꿈은 사라져 버렸다. 영효는 듬직한 남자의 등을 여자는 쏘아보았다. ‘나쁜 놈.’이라는 말이 절로 흘러 나왔다. 아무리 마지못할 상황이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결정은 남자가 한 것이었다. 굳이 변두리 저 계집애와 결혼 까지 가지 않았어도 되는, 뭐 그래야 했더라도 선택의 여지는 분명 있었다. 그런 선택권을 두고 상현이 낯선 여자와 결혼 한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배신감이 들었다. 분에 못 이겨 부들거리는 영효 곁에서 낮다 못해, 상당한 저음인 남자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이 결혼은 무효야, 무효.”
그 작은 남자의 목소리에 영효가 고개를 획 돌렸다. 거기엔 자신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한 남자가 신부를 향해 애틋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남자는 키가 상당히 컸다. 영효는 그 남자가 족히 180은 넘어 보일 거라 생각하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선글라스에 검은색 양복이라니. 그의 주변을 슬금 슬금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무서워 할만한 차림새였다. 결혼식장에 잔뜩 위화감 조성된 옷차림으로 온 남자라니. 영효는 그의 정체가 궁금해 졌다. 그때 영효는 남자의 볼에서 반짝이는 액체를 발견했다. 선글라스로 가려졌지만, 남자의 볼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울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꼭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아 영효는 남자에게 건넨 시선을 쉽사리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멋쩍은 표정으로 씩 웃으며 선글라스 사이로 삐져나온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놀란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조금 내렸다. 자신도 선글라스를 끼고 웨딩 홀에 왔으면서, 정작 선글라스 낀 여자가 신기하다는 눈빛을 여지없이 보이고 있었다. 조금 내려진 선글라스 틈바구니 너머로 선한 그러나 눈물 가득 맺힌 남자의 눈망울이 선명하게 들어났다. 여자는 그 눈망울이 자신의 것인 것만 같아서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여전히 행복한 미소 속에서 결혼을 치루고 있는 자신의 남자친구이며, 자신과 결혼 할 남자였던 상현을 뒤로 하고 여자는 웨딩 홀을 나섰다.
“날씨 한번 지랄 맞게 좋다!”
밖에 나온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꼭 우울한 날에는 날씨가 좋더군. 팔을 펼쳐 내리 쬐는 햇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던 여자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 조금 전 자신을 출렁이는 눈망울로 쳐다보던 남자가 아닌가? 남자는 여자처럼 두 팔을 펼치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는 벗어 버리고, 눈을 감고 그대로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햇빛을 비삼아 서 있었다. 남자의 감은 눈꺼풀 사이로 맑은 눈물이 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이 많은 남자군.’이라고 생각하며,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여자는 손을 들어 남자의 보드라워 보이는 갈색 곱슬머리를 쓸어내려 주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날씨 한번 정말 지랄 맞게 좋죠?”
말똥히 뜬 눈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영효는 갑작스런 남자의 물음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 참 예쁘더라고요. 뭐 물론 예쁜 만큼 재수 없고, 싸가지도 없고, 못된 여자이긴 하지만.”
남자가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지껄이고 있었다. 영효는 순간 이 남자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싸가지 대마왕 같은 주리 계집애에게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효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핸드백 속에 곱게 넣어두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것뿐인가요? 남의 남자 가로채는데 는 선수고, 눈웃음치면서 꼬리 살랑거릴 때는 구미호 같은 계집애지요!”
“뭘 안다고 그래요!”
영효의 말에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영효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상한 남자였다. 분명 자신이 먼저 신부를 욕하지 않았던가? 영효는 사태파악이 안되는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먼저 욕을 한건 그 쪽이라고요!”
“난 욕을 해도 되는 입장이라고요!”
“나도 그런 입장이라고요!”
“그럼 그쪽도 결혼 직전에 차인 불행한 인물이라는 건가요?”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렇게 외쳤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순간, ‘나도 그래요.’라고 맞받아칠 뻔한 입술을 한 손으로 가리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입을 막은 여자의 손을 남자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혹시 그쪽도?’라며 의미심장한 물음을 영효에게 던졌다. 그 말에 ‘혹시 그쪽도 결혼 직전에 차인 불행한 인물이라는 건가요?’라는 함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를 만큼 영효는 바보가 아니었다. 남자의 말에 영효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행동에 남자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왕방울만한 남자의 눈을 보자, 영효는 갑자기 왕눈이 개구리가 생각나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여자의 웃음에 남자가 부드러워 보이는 곱슬머리를 매만지며 ‘왕눈이가 별명이거든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이상한 관계네요. 한 사람은 신랑에게 차인 여자, 한 사람은 신부에게 차인 남자. 이렇게 만나기도 힘든데. 어쨌든 반갑습니다. 전 .......... 상한이라고 합니다.”
조금 큰 그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영효와 상한을 향해 힐끔거렸다. 그들의 시선에 우물거리는 영효를 향해 남자는 그의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얼른 잡으라는 듯 흔들어 대는 그의 손앞에 여자는 마지못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제 이름은 박영효예요.”
남자의 커다란 손을 마주잡으며 영효가 말했다. 영효의 말에 남자가 편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의 환한 미소를 여자는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꽃미남, 꽃미남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여자보다 예쁜 남자는 처음이었다. 박상현도 잘 생긴 남자 축에 들지만, 꽃미남은 아니었다. 피부가 좀 하얗긴 해도 듬직한 근육이며, 그녀가 안기기 적당한 쿠션을 가지고 있는 신체 조건을 보면 연약한 꽃미남과는 차원이 다른 남자였다. 허나 여자 앞에서 조금 모자란 듯 웃고 있는 남자는 전형적인 꽃미남 스타일이었다. 마르다 못해 조금은 비실댈 것 같은 몸매에 웃는 모습이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라니.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어버리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시간 있어요? 우리 기분도 꿀꿀한데 어디 가서 낮술이나 합시다!”
영효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상한은 먼저 저벅거리며 앞서 걷고 있었다. 큰 키 탓인지, 남자는 벌써 여자가 뛰어 가야 할 정도로 빠르게 걷고 있었다. 그의 일방적인 행동이 싫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혼자 있기 싫었다. 혼자 남아 덩그러니 빈 집에 들어간다면 그야 말로 자살 충동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뛰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남자가 갑자기 서버렸다. 뛰어서 쫓아가던 영효는 남자의 갑작스런 멈춤에 브레이크 걸린 차 마냥 서 버렸다.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영효를 향해 남자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는 문 연 술집이 없을 것 같아서요.”
“아…….”
고작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아무리 주말이라 해도 이런 이른 시간에 문을 연 술집은 영효도 본적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요?’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영효를 향해 남자가 또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어요. 따라와요.”
남자는 반대편 웨딩 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일방적인 남자였으며, 웃음이 헤픈 남자였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웃음이 많아. 그러니깐 변두리 같은 계집애한테 차였겠지.’
영효는 들리지 않게 혓바닥을 차면서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남자를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영효는 저만치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남자의 머릿속을 해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아무리 술집이 문을 열지 않은 시각이라고 해도 그렇지, 하필........ 여자의 생각도 모른 채 남자는 그 헤픈 웃음을 보이며 여자의 팔을 끌어 당겼다.
“여기 보다 좋은 곳은 드물잖아요. 술 마시기 딱 좋고, 게다가 맛있는 음식도 많고…….”
종알거리는 상한의 입을 영효는 확 막아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곳도 아니고, 영효의 전 남자친구이자, 상한의 전 여자친구의 피로연에서 술을 마시자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여자는 ‘당신 생각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에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꾸역꾸역 참고 넘겼다. 여전히 서 있는 여자를 향해 남자는 친절하게도 빈 접시와 포크 나이프를 챙겨 여자에게 내 밀었다. 여전히 웃음 어린 표정의 남자는 언제 울었냐 싶고, 언제 분노 했냐 싶었다. 여자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결혼한 상현이나, 그를 빼앗아간 주리 보다 자신의 앞에서 철없이 웃고 있는 남자가 더 미워졌다. 마지못해 들어가 근처 의자에 앉은 여자의 앞에 남자는 종류별로 음식을 담은 접시를 내 밀었다.
“먹어 봐요. 정말 맛있어요.”
남자는 정말 게걸스럽게 먹어대고 있었다. 마른 몸으로 어떻게 저 많은 양이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남자의 먹는 속도는 맹렬했다. 그 와중에 간간히 맥주까지 들이키던 남자가 여자를 향해 물었다.
여자는 아주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잘도 영효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영효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확 달려들어 오선지를 그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꾹꾹 참으며 어색한 미소를 날려주었다. 그래도 지성인이 아닌가? 그녀의 이름만 나오면 병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영효에게 상현이 늘 읊조리던 말이었다. ‘이봐, 박영효! 그래도 우리 지성인이잖아. 지성인답게 행동해야지.’ 항상 어른스럽게 영효를 달래고 어르던 상현의 말만 아니었다면 영효는 진작 그 여자의 고운 얼굴에 오선지를 쫙쫙 그려댔을 것이다.
‘너 상현이한테 고마운 줄 알아라.’
꼿꼿이 앉은 여자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영효가 자리에 앉았다. 카페 안에는 잔잔히 유키구라모토의 음악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간단히 ‘오렌지 주스’라고 읊조리고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5년 만이지만 여자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오히려 더 앳되어 보이는 예전 동창 계집애의 얼굴을 마주 하고 있자니 잊었던 고통들이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김주리라는 이름 세 글자를 듣고 싶지 않았었다. 한때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는 것도 잘라버릴 수만 있다면 잘라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5년 동안 잊고 지냈던 주리가 앉아있었다. 여전히 새초롬하고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주리를 보자니, 속에서부터 분노가 허리케인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웬일이지? 나한테 연락을 다 하고?”
빈정거리는 영효의 말투에도 주리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다만 기다란 다리를 꼬아 올려 하얀색 청미니 스커트가 아찔하게 올라가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냥, 할 말도 있고 해서…….”
“말해. 너랑 이렇게 단둘이 앉아 있는 것만 해도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니깐 말이야.”
영효의 말에 주리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를 비웃었다. 그 비웃음을 잘 아는 영효는 순간적으로 살인의 욕구가 일어나는 것을 애써 눌러 참았다. ‘살인 그것도 별것 아니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점이었다. 그런 영효의 기분을 무시한 채, 여자는 뜸을 들이고 있었다. 5년 만에 다시 나타나서 할 말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영효는 갑자기 발끝에서부터 간질간질 한 것이 온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기도 하고, 어딘가를 사정없이 꼬집으면 나을 것 같기도 한 그 이상 미묘한 감정들은 목구멍을 간질이고 있었다. 불안했다. 한마디로 단정 짓자면 불안, 그래 불안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이런 감정을 느낄 때면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곤 했다. 학교 다닐 때 이런 감정은 선생님의 매타작이 이어지는 날이었고, 체육시간 전에 나타난 이런 감정은 꼭 한달의 마법의 시작으로 나타났었다. 이런 감정은 꼭 그런 악한 무언가로 끝을 맺었기에 영효는 순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 돌려서 말 잘 못하는 것 너도 알거야. 그래도 우리 한때는 절친한 친구 사이었잖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나 박상현이랑 사귀고 있어. 그리고 그 이랑 결혼할 생각이고.”
“뭐?”
제길. 그 불안한 감정들은 항상 이렇게 꼭 악한 무언가로 끝을 맺는다. 알면서도 왜 벌떡 일어나 나가지 못했는지 영효는 지금이라도 나가지 못한 자신의 두 다리를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도 상현을 그이라고 칭하는 여자의 입술을 틀어막고 싶었다.
“너 나랑 농담 따먹기 하니? 5년 만에 나타나서 더운 밥 먹고 고작 한다는 소리가? 뭐? 나 박상현이랑 사귀고 있어? 장난 해? 아직 못 들었나. 본데. 나 상현이랑 날 잡았어.”
“알고 있어. 너희 날 잡은 것쯤은. 그리고 그 날이 이제 반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한 가지 더 추가 하자면 상현이가 오늘 너한테 결혼 못하겠다고 말 한 것 까지도.”
앞에 앉은 마녀 같은 여자는 인정 못하려 드는 영효에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상현이 결혼을 못하겠다고 한 것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아니 말한 상현과 들은 자신 이외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조언을 얻을 만큼의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그 짧은 시간동안 소문이 그녀에게까지 갈리는 없었다. 그럼 결론은 한 가지.
“상현에게 들었어.”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상현에게 들었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주리에게 내뱉어주고 싶었다. 무표정 하게 아니 약간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의 유난히 작은 입술을 바늘이 있다면 꿰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것은 분명 5년 전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날도 이렇게 저 여우같은 계집애와 마주 앉아 있었고, 천청 벽력과 같은 소리로 내 남자친구와 사귄다는 소리를 지껄였었다. 단지 틀려진 것이 있다면, 그때 그 남자친구가 아닌 지금의 남자친구라는 것과, 5년이 지난 지금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눈앞에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 그리고 지금의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너, 5년 만에 상판대기 내 밀어서 한다는 말이 고작, 내 남자친구와 그렇고 그렇다는 말이야? 제 정신이니? 아니, 내가 참아야지 제 정신일 리가 없어.”
여자는 누구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 영효를 보던 주리가 비웃듯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 감각 없는 것은 여전하구나. 쟁쟁댄다고 남자들이 다 좋아하지는 않아. 어쩜 그 쟁쟁대는 말투 때문에 상현이가 나한테 온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주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잘도 여자의 가슴에 비수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아프고 피가 나고 그 상처가 헤어질 때 까지, 예전 5년 전 그 날보다 더 모질게 그녀의 가슴을 헤집고 있었다.
“그, 그럴 리 없어. 상현이가 그럴 리가 없어. 상현이랑 나 어떤 사이인데 그럴 리가 없어.”
인정하려 들지 않는 영효를 보던 주리가 피식 비웃음을 내 비쳤다. 말을 다 마친 주리가 일어나 카페 문을 나설 때 까지 영효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날 이후 상현에게도 주리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마치 상현의 기억 속에 민영효라는 세 이름마저 지워버린 사람처럼 그는 냉정하게 영효에게 등을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서 영효는 혼자였다.
-이상한 관계-(2)내 남자친구 결혼식
(2)내 남자친구 결혼식
영효는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상현을 보고 있었다. 어깨 넓은 상현의 몸에 꼭 맞는 검은색 슈트는 그의 인물을 더 살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멋졌다. 여자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남자는 멋있었다. 실내에서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영효를 몇몇 사람들이 이상한 표정으로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지만, 지금 여자에게는 선글라스 속 왕자님만 존재할 뿐이었다. 완벽한 모습으로 영효를 향해 빙긋 웃어주는 상현을 향해 영효는 하마터면 그대로 뛰어가 안길 뻔 했다. 신부를 기다리는 그의 앞으로 단숨에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결혼 행진곡이 멋들어지게 울려 퍼지면서 신부가 입장했다. 분명 그 자리는 여자의 자리였다. 영효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지금 다른 여자가 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었다.
“안돼. 안돼. 이럴 순 없어. 이건 꿈일 거야. 그럴 거야.”
영효는 인정할 수 없다는 말투로 연신 중얼거렸다. 당당하게 너 없이도 잘산다는 모습을 보여주려 더 멋지게 꾸미고 왔지만, 옛 남자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여자는 초라한 전 여자친구일 뿐이었다. 불과 몇 달 전 꾸었던 그의 다정한 신부의 꿈은 사라져 버렸다. 영효는 듬직한 남자의 등을 여자는 쏘아보았다. ‘나쁜 놈.’이라는 말이 절로 흘러 나왔다. 아무리 마지못할 상황이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결정은 남자가 한 것이었다. 굳이 변두리 저 계집애와 결혼 까지 가지 않았어도 되는, 뭐 그래야 했더라도 선택의 여지는 분명 있었다. 그런 선택권을 두고 상현이 낯선 여자와 결혼 한다는 것에 대해 상당한 배신감이 들었다. 분에 못 이겨 부들거리는 영효 곁에서 낮다 못해, 상당한 저음인 남자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이 결혼은 무효야, 무효.”
그 작은 남자의 목소리에 영효가 고개를 획 돌렸다. 거기엔 자신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한 남자가 신부를 향해 애틋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남자는 키가 상당히 컸다. 영효는 그 남자가 족히 180은 넘어 보일 거라 생각하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선글라스에 검은색 양복이라니. 그의 주변을 슬금 슬금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무서워 할만한 차림새였다. 결혼식장에 잔뜩 위화감 조성된 옷차림으로 온 남자라니. 영효는 그의 정체가 궁금해 졌다. 그때 영효는 남자의 볼에서 반짝이는 액체를 발견했다. 선글라스로 가려졌지만, 남자의 볼에는 작은 물방울들이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울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꼭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아 영효는 남자에게 건넨 시선을 쉽사리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멋쩍은 표정으로 씩 웃으며 선글라스 사이로 삐져나온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놀란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조금 내렸다. 자신도 선글라스를 끼고 웨딩 홀에 왔으면서, 정작 선글라스 낀 여자가 신기하다는 눈빛을 여지없이 보이고 있었다. 조금 내려진 선글라스 틈바구니 너머로 선한 그러나 눈물 가득 맺힌 남자의 눈망울이 선명하게 들어났다. 여자는 그 눈망울이 자신의 것인 것만 같아서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여전히 행복한 미소 속에서 결혼을 치루고 있는 자신의 남자친구이며, 자신과 결혼 할 남자였던 상현을 뒤로 하고 여자는 웨딩 홀을 나섰다.
“날씨 한번 지랄 맞게 좋다!”
밖에 나온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꼭 우울한 날에는 날씨가 좋더군. 팔을 펼쳐 내리 쬐는 햇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던 여자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 조금 전 자신을 출렁이는 눈망울로 쳐다보던 남자가 아닌가? 남자는 여자처럼 두 팔을 펼치고 하늘을 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는 벗어 버리고, 눈을 감고 그대로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햇빛을 비삼아 서 있었다. 남자의 감은 눈꺼풀 사이로 맑은 눈물이 쪼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이 많은 남자군.’이라고 생각하며,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여자는 손을 들어 남자의 보드라워 보이는 갈색 곱슬머리를 쓸어내려 주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날씨 한번 정말 지랄 맞게 좋죠?”
말똥히 뜬 눈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영효는 갑작스런 남자의 물음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부 참 예쁘더라고요. 뭐 물론 예쁜 만큼 재수 없고, 싸가지도 없고, 못된 여자이긴 하지만.”
남자가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지껄이고 있었다. 영효는 순간 이 남자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싸가지 대마왕 같은 주리 계집애에게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효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핸드백 속에 곱게 넣어두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것뿐인가요? 남의 남자 가로채는데 는 선수고, 눈웃음치면서 꼬리 살랑거릴 때는 구미호 같은 계집애지요!”
“뭘 안다고 그래요!”
영효의 말에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영효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상한 남자였다. 분명 자신이 먼저 신부를 욕하지 않았던가? 영효는 사태파악이 안되는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먼저 욕을 한건 그 쪽이라고요!”
“난 욕을 해도 되는 입장이라고요!”
“나도 그런 입장이라고요!”
“그럼 그쪽도 결혼 직전에 차인 불행한 인물이라는 건가요?”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렇게 외쳤다. 남자의 말에 여자는 순간, ‘나도 그래요.’라고 맞받아칠 뻔한 입술을 한 손으로 가리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입을 막은 여자의 손을 남자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혹시 그쪽도?’라며 의미심장한 물음을 영효에게 던졌다. 그 말에 ‘혹시 그쪽도 결혼 직전에 차인 불행한 인물이라는 건가요?’라는 함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를 만큼 영효는 바보가 아니었다. 남자의 말에 영효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행동에 남자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왕방울만한 남자의 눈을 보자, 영효는 갑자기 왕눈이 개구리가 생각나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여자의 웃음에 남자가 부드러워 보이는 곱슬머리를 매만지며 ‘왕눈이가 별명이거든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이상한 관계네요. 한 사람은 신랑에게 차인 여자, 한 사람은 신부에게 차인 남자. 이렇게 만나기도 힘든데. 어쨌든 반갑습니다. 전 .......... 상한이라고 합니다.”
조금 큰 그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영효와 상한을 향해 힐끔거렸다. 그들의 시선에 우물거리는 영효를 향해 남자는 그의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얼른 잡으라는 듯 흔들어 대는 그의 손앞에 여자는 마지못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제 이름은 박영효예요.”
남자의 커다란 손을 마주잡으며 영효가 말했다. 영효의 말에 남자가 편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의 환한 미소를 여자는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꽃미남, 꽃미남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여자보다 예쁜 남자는 처음이었다. 박상현도 잘 생긴 남자 축에 들지만, 꽃미남은 아니었다. 피부가 좀 하얗긴 해도 듬직한 근육이며, 그녀가 안기기 적당한 쿠션을 가지고 있는 신체 조건을 보면 연약한 꽃미남과는 차원이 다른 남자였다. 허나 여자 앞에서 조금 모자란 듯 웃고 있는 남자는 전형적인 꽃미남 스타일이었다. 마르다 못해 조금은 비실댈 것 같은 몸매에 웃는 모습이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라니. 여자는 선글라스를 벗어버리는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시간 있어요? 우리 기분도 꿀꿀한데 어디 가서 낮술이나 합시다!”
영효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상한은 먼저 저벅거리며 앞서 걷고 있었다. 큰 키 탓인지, 남자는 벌써 여자가 뛰어 가야 할 정도로 빠르게 걷고 있었다. 그의 일방적인 행동이 싫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혼자 있기 싫었다. 혼자 남아 덩그러니 빈 집에 들어간다면 그야 말로 자살 충동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뛰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남자가 갑자기 서버렸다. 뛰어서 쫓아가던 영효는 남자의 갑작스런 멈춤에 브레이크 걸린 차 마냥 서 버렸다.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영효를 향해 남자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이 시간에는 문 연 술집이 없을 것 같아서요.”
“아…….”
고작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아무리 주말이라 해도 이런 이른 시간에 문을 연 술집은 영효도 본적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요?’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영효를 향해 남자가 또다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어요. 따라와요.”
남자는 반대편 웨딩 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일방적인 남자였으며, 웃음이 헤픈 남자였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웃음이 많아. 그러니깐 변두리 같은 계집애한테 차였겠지.’
영효는 들리지 않게 혓바닥을 차면서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 남자를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영효는 저만치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남자의 머릿속을 해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아무리 술집이 문을 열지 않은 시각이라고 해도 그렇지, 하필........ 여자의 생각도 모른 채 남자는 그 헤픈 웃음을 보이며 여자의 팔을 끌어 당겼다.
“여기 보다 좋은 곳은 드물잖아요. 술 마시기 딱 좋고, 게다가 맛있는 음식도 많고…….”
종알거리는 상한의 입을 영효는 확 막아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곳도 아니고, 영효의 전 남자친구이자, 상한의 전 여자친구의 피로연에서 술을 마시자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여자는 ‘당신 생각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에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꾸역꾸역 참고 넘겼다. 여전히 서 있는 여자를 향해 남자는 친절하게도 빈 접시와 포크 나이프를 챙겨 여자에게 내 밀었다. 여전히 웃음 어린 표정의 남자는 언제 울었냐 싶고, 언제 분노 했냐 싶었다. 여자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결혼한 상현이나, 그를 빼앗아간 주리 보다 자신의 앞에서 철없이 웃고 있는 남자가 더 미워졌다. 마지못해 들어가 근처 의자에 앉은 여자의 앞에 남자는 종류별로 음식을 담은 접시를 내 밀었다.
“먹어 봐요. 정말 맛있어요.”
남자는 정말 게걸스럽게 먹어대고 있었다. 마른 몸으로 어떻게 저 많은 양이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남자의 먹는 속도는 맹렬했다. 그 와중에 간간히 맥주까지 들이키던 남자가 여자를 향해 물었다.
“근데 영효씨는 저 둘이 사귀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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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이지?”
여자는 아주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잘도 영효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영효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확 달려들어 오선지를 그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꾹꾹 참으며 어색한 미소를 날려주었다. 그래도 지성인이 아닌가? 그녀의 이름만 나오면 병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영효에게 상현이 늘 읊조리던 말이었다. ‘이봐, 박영효! 그래도 우리 지성인이잖아. 지성인답게 행동해야지.’ 항상 어른스럽게 영효를 달래고 어르던 상현의 말만 아니었다면 영효는 진작 그 여자의 고운 얼굴에 오선지를 쫙쫙 그려댔을 것이다.
‘너 상현이한테 고마운 줄 알아라.’
꼿꼿이 앉은 여자의 시선을 맞받아치며 영효가 자리에 앉았다. 카페 안에는 잔잔히 유키구라모토의 음악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종업원에게 간단히 ‘오렌지 주스’라고 읊조리고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5년 만이지만 여자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오히려 더 앳되어 보이는 예전 동창 계집애의 얼굴을 마주 하고 있자니 잊었던 고통들이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다시는 김주리라는 이름 세 글자를 듣고 싶지 않았었다. 한때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는 것도 잘라버릴 수만 있다면 잘라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 5년 동안 잊고 지냈던 주리가 앉아있었다. 여전히 새초롬하고 상대를 깔아뭉개려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주리를 보자니, 속에서부터 분노가 허리케인처럼 불어오고 있었다.
“웬일이지? 나한테 연락을 다 하고?”
빈정거리는 영효의 말투에도 주리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다만 기다란 다리를 꼬아 올려 하얀색 청미니 스커트가 아찔하게 올라가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냥, 할 말도 있고 해서…….”
“말해. 너랑 이렇게 단둘이 앉아 있는 것만 해도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니깐 말이야.”
영효의 말에 주리가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그녀를 비웃었다. 그 비웃음을 잘 아는 영효는 순간적으로 살인의 욕구가 일어나는 것을 애써 눌러 참았다. ‘살인 그것도 별것 아니군.’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점이었다. 그런 영효의 기분을 무시한 채, 여자는 뜸을 들이고 있었다. 5년 만에 다시 나타나서 할 말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영효는 갑자기 발끝에서부터 간질간질 한 것이 온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기도 하고, 어딘가를 사정없이 꼬집으면 나을 것 같기도 한 그 이상 미묘한 감정들은 목구멍을 간질이고 있었다. 불안했다. 한마디로 단정 짓자면 불안, 그래 불안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이런 감정을 느낄 때면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나곤 했다. 학교 다닐 때 이런 감정은 선생님의 매타작이 이어지는 날이었고, 체육시간 전에 나타난 이런 감정은 꼭 한달의 마법의 시작으로 나타났었다. 이런 감정은 꼭 그런 악한 무언가로 끝을 맺었기에 영효는 순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 돌려서 말 잘 못하는 것 너도 알거야. 그래도 우리 한때는 절친한 친구 사이었잖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나 박상현이랑 사귀고 있어. 그리고 그 이랑 결혼할 생각이고.”
“뭐?”
제길. 그 불안한 감정들은 항상 이렇게 꼭 악한 무언가로 끝을 맺는다. 알면서도 왜 벌떡 일어나 나가지 못했는지 영효는 지금이라도 나가지 못한 자신의 두 다리를 잘라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잘도 상현을 그이라고 칭하는 여자의 입술을 틀어막고 싶었다.
“너 나랑 농담 따먹기 하니? 5년 만에 나타나서 더운 밥 먹고 고작 한다는 소리가? 뭐? 나 박상현이랑 사귀고 있어? 장난 해? 아직 못 들었나. 본데. 나 상현이랑 날 잡았어.”
“알고 있어. 너희 날 잡은 것쯤은. 그리고 그 날이 이제 반달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 한 가지 더 추가 하자면 상현이가 오늘 너한테 결혼 못하겠다고 말 한 것 까지도.”
앞에 앉은 마녀 같은 여자는 인정 못하려 드는 영효에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상현이 결혼을 못하겠다고 한 것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아니 말한 상현과 들은 자신 이외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조언을 얻을 만큼의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그 짧은 시간동안 소문이 그녀에게까지 갈리는 없었다. 그럼 결론은 한 가지.
“상현에게 들었어.”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상현에게 들었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주리에게 내뱉어주고 싶었다. 무표정 하게 아니 약간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의 유난히 작은 입술을 바늘이 있다면 꿰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것은 분명 5년 전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날도 이렇게 저 여우같은 계집애와 마주 앉아 있었고, 천청 벽력과 같은 소리로 내 남자친구와 사귄다는 소리를 지껄였었다. 단지 틀려진 것이 있다면, 그때 그 남자친구가 아닌 지금의 남자친구라는 것과, 5년이 지난 지금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눈앞에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 그리고 지금의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너, 5년 만에 상판대기 내 밀어서 한다는 말이 고작, 내 남자친구와 그렇고 그렇다는 말이야? 제 정신이니? 아니, 내가 참아야지 제 정신일 리가 없어.”
여자는 누구에게 말하는지 알 수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 영효를 보던 주리가 비웃듯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 감각 없는 것은 여전하구나. 쟁쟁댄다고 남자들이 다 좋아하지는 않아. 어쩜 그 쟁쟁대는 말투 때문에 상현이가 나한테 온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주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잘도 여자의 가슴에 비수를 사정없이 찔러댔다. 아프고 피가 나고 그 상처가 헤어질 때 까지, 예전 5년 전 그 날보다 더 모질게 그녀의 가슴을 헤집고 있었다.
“그, 그럴 리 없어. 상현이가 그럴 리가 없어. 상현이랑 나 어떤 사이인데 그럴 리가 없어.”
인정하려 들지 않는 영효를 보던 주리가 피식 비웃음을 내 비쳤다. 말을 다 마친 주리가 일어나 카페 문을 나설 때 까지 영효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날 이후 상현에게도 주리에게도 연락은 없었다. 마치 상현의 기억 속에 민영효라는 세 이름마저 지워버린 사람처럼 그는 냉정하게 영효에게 등을 보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서 영효는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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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생각에 잠긴 영효의 얼굴을 보던 남자가 (계속 게걸스럽게 음식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음, 쩝쩝. 난요. 어떻게 알았냐면 말이죠. 주리가 말해줬어요. 나 같이 능력 없는 남자와는 사귀기 싫다고 하더라고요. 뭐 그래서 알았다고 대답해 버렸지요.”
남자는 태연해 보였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태연스레 말을 했다.
“이렇게 우리 둘이 마주 보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참 이상한 관계네요.”
영효가 마지못해 그가 내민 접시에서 깐 새우 하나를 입에 쏙 넣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