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구미호 (5) : 영등포 조 사장

니르바나200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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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九미尾호狐 

 

 

 

 

 


영등포 조 사장


원 여사의 전화를 받고 잠이 완전히 달아나버린 조 사장은 불곰을 연상케 하는 거구를 이끌고 서재로 나와 가죽소파에 몸을 묻었다. 무려 150킬로나 되는 체중이 실리자 가죽소파의 형태가 일그러지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른다. 앉은 자세가 불편했던지 조 사장은 몇 번이고 거구를 뒤뚱거리며 최대한 몸을 편안하게 했다. 그리고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말없이 한곳을 응시했다.

“그 아이가 돌아온단 말이지. 생각해보니 세월이 많이 흘렀군. 예전의 당돌했던 꼬마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해지는걸. 이제는 제법 사내다워졌겠지…….”

조 사장은 담배를 피워 물며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을 떠올렸다.

우진그룹의 김우진 회장, 조 사장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그는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하여 작은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자신의 회사를 불과 10년 만에 여느 대기업 못지않은 수준으로 일궈낸 사나이였다. 더불어 돈을 만지는 사업가치고는 화통하고 기개가 당당한 진짜 남자였다. 개인적으로는 호감을 갖고 있던 상대였지만, 자신이 이끌고 있는 조직을 키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여야 했다.

그랬다. 세상 사람들은 김우진 회장의 사인이 말기 간암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아내였던 원희재의 사주를 받은 조 사장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그는 병을 이겨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수행비서도 없이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비밀리에 수술을 받은 결과, 비관적이었던 김 회장의 병세는 기적적으로 호전되었고, 그것은 자신이 낳은 아들 근우에게 막대한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오로지 그가 죽기만을 기다리던 원 여사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사랑도 없이, 김 회장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결혼을 요구했고 결국엔 뜻을 이루었던 그녀다. 원 여사는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데 너무나 서툴렀고, 이미 오래 전에 추악한 계획을 간파 당했다. 그래서 김 회장이 아내인 그녀에게조차 함구하고 미국행을 했던 것이다.

원 여사가 측근인 비서실장을 집요하게 추궁해서 뒤늦게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수술이 끝난 후였고 기대와는 달리 병세마저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그녀가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자신의 계획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극도로 불안해진 원 여사는 결국 극단의 처방을 선택했고, 수소문을 해서 당시 영등포에서 겨우 기반을 잡기 시작한 조 사장을 찾아갔다.

서로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두 사람이다. 조직을 키우기 위해 든든한 자금줄이 아쉬웠던 조 사장은 고민할 것도 없이 원 여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바로 한 달 뒤에 김 회장이 귀국하자마자 재활과 요양을 겸해서 입원한 병원으로 한밤중에 직접 찾아가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켰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항간에 알려지기를 간암으로 투병 중이었던 김 회장의 죽음을 두고 청부살인의 의혹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비서실장과 계열사를 맡고 있는 여동생인 김은실 사장은 김 회장의 미국행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지만, 조 사장의 협박이 무서워 함구하였고, 주치의였던 황 박사도 조 사장의 부하에게 딸이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거짓으로 사망진단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을 꾸민 덕분에 완전범죄가 성립되었고, 원 여사와 조 사장은 둘 다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조 사장이 그들 세 사람을 주시했기 때문에 기밀은 유지되었고, 아무도 김 회장의 죽음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의 아들인 선우만은 달랐다.

선우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뭔가 석연치 않다며 부검까지 요청했지만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어린 아이로 투정이라 여기고 그 의견은 묵살되었다. 그러나 선우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의심을 품었고 집요하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펼쳤다.

처음에는 원 여사나 조 사장은 나이도 어린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자만이었다.

선우는 오랜 노력 끝에 김 회장이 미국으로 건너간 진짜 이유를 밝혀냈고 수술결과가 나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뿐만 아니라 김 회장이 살해되었던 그날, 주치의 황 박사가 딸의 실종신고를 했다가 몇 시간 만에 갑자기 철회했다는 것을 알아내고 황 박사를 찾아가 해명을 요구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황 박사가 조 사장의 강압에 못 이겨 거짓으로 사망진단을 내렸고, 조 사장의 배후가 원 여사라는 것까지 알아버린 것이다. 그때 선우 나이가 겨우 스물 하나, 무려 8년이란 세월에 걸쳐서 포기 하지 않고 끈질기게 조사한 것이다.

선우는 용의주도하게 황 박사의 자백을 테이프에 녹음했고, 그것을 근거로 원 여사를 추궁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다가 선우의 추궁을 받고 다급해진 원 여사는 다시 조 사장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조 사장 역시 마음을 놓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원 여사의 연락을 받고, 선우에게서 죽는 순간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호통을 쳤던 김 회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역시 호랑이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조 사장은 김 회장 때와 마찬가지로 선우에게 묘한 호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선우에게는 황 박사의 자백을 녹취한 테이프까지 있다. 살인의 공소시효는 15년. 이제라도 이의를 제기하고 재조사에 들어갔다가 만에 하나 사실로 밝혀진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된다. 단순한 호감 따위로 일을 그르칠 수는 없다.

조 사장은 부하들을 소집해 선우가 테이프를 검찰에게 넘기기 전에 납치해오라고 명령했다. 부하들은 명령을 내린지 5시간 만에 선우를 끌고 왔다. 그런데 영악하게도 테이프를 이미 다른 곳으로 빼돌린 후였다. 게다가 최악의 경우,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검찰에 바로 테이프를 넘기도록 조취까지 해놓았다. 어리다고 결코 얕볼 수 없는 상대였다. 그뿐인가, 선우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히 조 사장에게 거래를 요구했다. 자신의 목숨과 테이프를 서로 맞바꾸자는 제의였다.

그 순간 조 사장은 웃음이 나왔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살아온 그였지만 이런 물건은 본 적이 없었다. 요즘은 건달들 중에서도 이만한 그릇은 보기 힘들다. 만일 다른 상황이었다면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고 싶을 정도였다. 역시 김 회장의 아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 끝에 조 사장은 결정을 내렸다. 선우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단순히 선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테이프의 소재가 명확하지 않는 상황에서 선우를 건드렸다가 정말로 검찰에 테이프가 전해지기라도 하는 날엔 정말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자신을 호시탐탐한 노리고 있는 검찰에게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조 사장에게서 풀려난 선우는 약속했던 대로 테이프를 우편으로 돌려주고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군대도 김 회장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죄책감을 안고 사는 비서실장에게 부탁해서 그의 친형이 원사로 근무하는 부대의 사단장 당번병으로 근무하면서 혹시 모를 조 사장의 흉수를 미연에 방지했고, 휴가를 나왔을 때도 미리 어느 노숙자의 명의로 사들였던 원룸에서 지내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리고 전역을 하자마자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 것이다. 아무리 조 사장이라도 미국까지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선우에게 충분한 재력이 있었고, 재력을 바탕으로 조 사장에게서 자신을 보호할 줄 아는 두뇌도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선우는 처음으로 조 사장에게 패배를 안겨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피해 달아났던 선우가 다시 귀국을 한다는 것이다. 아직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선우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한, 결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두려운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즐겁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날 당혹스럽게 만들 생각이냐…….”

조 사장은 전혀 겁먹지 않고 당당히 거래를 제안했던 선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앞으로 있을 선우와의 2차전이 몹시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지난 몇 년은 매우 권태롭고 지루했던 나날들이었다. 어쩌면 내심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선우는 조 사장에게 있어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도록 만드는 일종의 자극제였다.

초인종소리가 울리고, 이어서 아래층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집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도착한 것이다.

조 사장은 필터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부터 원 여사의 불안감을 떨쳐주기 위해, 아울러 선우의 새로운 공세에 대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같은 일은 없도록 할 생각이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먼저 찾아내어 두 번 다시 도전하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다. 그렇게 이 바닥에서 통용되는 ‘영등포 조 사장’의 위명을 선우의 머릿속에도 확실히 각인시켜줄 것이다.

“흐흐흐,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야.”

조 사장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야릇한 흥분에 휩싸인 나머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엄청난 체중이 실어가며 계단을 밟을 때마다 들리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흥을 돋우었다. 평소에 안하던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쾌감이었다.

아래층에 집결하고 있던 조 사장의 부하들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도 미약하게나마 예측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바다를 건너 날아오고 있는 작은 불씨로 인해 엄청난 파란이 일어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