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 하는 순간, 진한 피비린내가 선행하여 후각을 자극하고, 뒤이어 통렬한 통증이 엄습해온다. 시각은 가장 나중이다. 오른쪽 팔뚝에서 검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분한 마음에 나직이 이를 갈아본다. 아직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지금 눈앞에는 현존하는 요괴 중에서도 가장 처리하기 까다롭다고 알려진 ‘여우’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다. 시걸은 목까지 차오른 숨결을 거칠게 토해내고는 눈을 부릅뜨고 여우를 노려보았다. 불행히도 여우는 경미한 상처만을 입었을 뿐, 시걸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상태다. 기묘하게 벌어진 기다란 주둥이가 마치 시걸을 비웃는 듯했다.
“제법인데? 방심했다가는 내 목이 달아나겠어. 역시 여우는 레벨이 다르구나. 하지만 베는 맛이 나쁘지 않았어.”
시걸은 그렇게 내뱉으며 왼손으로 옮겨 쥔 단검에 묻은 여우의 피를 스윽 핥았다. 다분히 도발적이어서 여우는 불쾌하다는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아? 너도 좋았어? 너무 노골적인 반응인데? 이제 보니 너도…….”
기습적인 도약! 시걸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우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퍼뜩 고개를 드니, 섬뜩한 붉은 만월의 월광 속으로 여우가 사라졌다.
“제기랄!”
시걸은 혀를 차고 미끄러지듯이 뒤로 십여 미터나 물러섰다. 불과 1초의 간격을 두고, 여우가 시걸이 머물던 자리를 벼락처럼 급습했다. 조금만 지체했더라면 무지막지한 여우의 괴력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졌을 것이다. 시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고르고는 기합과 함께 득달같이 내달렸다.
그야말로 질풍같은 움직임! 거의 10미터가 넘게 나던 간격이 순식간에 좁혀지고, 어느 틈엔가 시걸이 여우의 턱밑으로 파고든다. 당황한 여우가 시걸의 정수리를 후려갈기려 들었지만, 구부정하게 자세가 불안정한 상태라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시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왼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여우의 겨드랑이에 힘껏 쑤셔 박았다. 단검의 칼날 표면에 새겨져 있는 붉은 문자들이 눈부신 빛을 발하고, 여우가 휘청거리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댄다.
캐캐애애앵―
시걸은 단검을 뽑아 반전하여, 이번에는 반대편 옆구리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여우가 극심한 고통으론 눈을 까뒤집으며 난동을 부렸다. 너무 근접한 탓에 여우가 휘두르는 팔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턱을 맞아버린 시걸은 보기 좋게 뒤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른 시걸은 용수철처럼 탄력적으로 텀블링하여 일어나자마자 여우의 숨통을 끊어버리기 위해 그대로 몸을 날렸다.
“마지막이다!”
기세 좋게 고함을 내지르며 여우에게 날아드는 시걸.
여우의 옆구리에 박혀 있는 단검을 뽑아들어 마무리로 목을 베려는 찰나,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로 전해졌다. 시걸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빼며 불의의 기습으로부터 벗어났다. 간발의 차이로 시커먼 물체가 시걸이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면서 남긴 잔상을 꿰뚫고 지나갔다.
“누구냣!”
순간 고개를 돌린 시걸은 몸을 움찔거렸다. 몸을 돌렸을 때, 누군가 연기처럼 시걸의 뒤를 장악한 것이다. 전혀 기척도 느낄 새도 없이, 그가 내뿜는 입김이 뒷목에 닿아서야 겨우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공포감이 전신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시걸은 손에 쥐고 있는 단검을 휘두를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얼어버린 건가? 오줌까지 지릴 모양인데? 하긴 겁이 좀 날 거야. 그렇지? 넌 하마터면 우리 귀여운 막내를 죽일 뻔 했거든. 그러니, 그만한 대가를 충분히 치르게 해줘야지 않겠어? 어때, 내 생각이?”
등 뒤의 누군가가 시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걸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하든, 부정적인 대답을 하든, 이 자의 선택은 같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배후를 장악당한 지금, 어설프게 반격을 하려고 했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앞에는 상처 입은 여우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가녀린 여인이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들 두 사람도 여우일 것이다. 하나도 힘든데 셋씩이나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무도 대책 없는 생각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시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혜린아, 이 꼬마를 어떻게 처리하지? 간만에 파릇파릇한 젊은 놈의 생간을 먹어볼까?”
등 뒤의 남자가 키득거리고 물었다. 이들은 펜트하우스의 두 남녀, 제와 혜린이었다. 여우의 상처를 살피고 있던 혜린이 고개를 들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의미 없는 살생은 그만둬. 사고를 친 것은 유미로도 족해.”
부상을 당한 여우의 이름이 유미였던 모양이다. 여우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신음을 냈다. 혜린은 그런 여우의 이마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시걸에게 물었다.
“당신, 누구죠? 퇴마사? 아님 도계감찰이라도 되나요? 혹시, ‘인사동’의 사람?”
시걸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시걸, 우리 사부와 마찬가지로 요격사(妖擊師)야.”
“요격사? 그렇다면 황토인(黃土人: 중국인을 가리키는 옛 표현 중 하나)이란 말이야?”
잠자코 듣고 있던 제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난 아니지만, 사부는 화교다.”
“그래? 이 땅덩어리에서 활동 중인 요격사는 그리 많지 않은데…… 네놈의 사부라는 작자는 누구지?”
제가 시걸의 뒷덜미를 움켜쥐더니 서서히 힘을 가하며 물었다. 두꺼운 철근도 가볍게 꺾어버리는 그다. 마음만 먹으면 시걸의 목뼈 정도는 얼마든지 산산조각을 낼 수 있었다. 시걸은 고통스러운지 미간을 좁히며 끙,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것을 본 혜린이 제를 만류했다.
“제, 나한테 맡겨.”
제는 무서운 눈초리로 혜린을 노려보다가 이내 실소하며 시걸을 놔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눈빛이었다. 제의 손아귀로부터 겨우 자유로워진 시걸은 뒷목을 만지며 기침을 했다.
“알고 싶네요. 당신의 사부는 어떤 사람이죠? 남자인가요?”
혜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걸은 잠시 침묵하더니, 약간의 사이를 두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의 사부는 여자다. 남자가 아냐.”
“여자?”
물러서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제가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옆에는 부상을 입었던 여우, 유미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하지만 옆구리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출현은 이미 멎었고, 회복속도도 인간보다 몇 배나 빨라서 조금 후면 완전히 나을 것 같았다.
“요격사인데, 여자라? 내가 알기로 이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요격사 중 여자는 모두 둘이야. 하나는 철관음(鐵觀音)이라 불리는 환속한 비구니고,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진홍의 마녀, 정화. 너의 사부는 둘 중 누구지?”
“그건…….”
제는 시걸이 대답하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철관음은 남자를 지독하게 혐오하는 여자니까, 너 같은 아이를 제자로 둘 리가 없고, 그렇다면 정화가 너의 사부이겠구나. 그렇지?”
질문은 시걸에게 하는 것이었지만 제의 눈길은 헤린을 향하고 있었다.
“정말 당신의 사부가 정화?”
혜린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옅은 살기가 느껴졌다. 시걸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혜린의 목소리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제, 죽여.”
제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고, 시걸은 당황하여 혜린과 제를 번갈아 보았다. 혜린의 옆에서는, 이제는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유미라는 여우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오빠. 언니 말 못 들었어요? 빨리 그 인간을 죽여요.”
유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들었지? 꼬마. 모두가 너의 죽음을 바라는구나. 네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만 인기관리를 위해선 아가씨들의 소망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미안하지만, 나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죽어줘야겠구나.”
제가 싸늘하게 웃으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시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新 구미호 (9) : 요격사(妖擊師)
구九미尾호狐
요격사(妖擊師)
아차! 하는 순간, 진한 피비린내가 선행하여 후각을 자극하고, 뒤이어 통렬한 통증이 엄습해온다. 시각은 가장 나중이다. 오른쪽 팔뚝에서 검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분한 마음에 나직이 이를 갈아본다. 아직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지금 눈앞에는 현존하는 요괴 중에서도 가장 처리하기 까다롭다고 알려진 ‘여우’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다. 시걸은 목까지 차오른 숨결을 거칠게 토해내고는 눈을 부릅뜨고 여우를 노려보았다. 불행히도 여우는 경미한 상처만을 입었을 뿐, 시걸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상태다. 기묘하게 벌어진 기다란 주둥이가 마치 시걸을 비웃는 듯했다.
“제법인데? 방심했다가는 내 목이 달아나겠어. 역시 여우는 레벨이 다르구나. 하지만 베는 맛이 나쁘지 않았어.”
시걸은 그렇게 내뱉으며 왼손으로 옮겨 쥔 단검에 묻은 여우의 피를 스윽 핥았다. 다분히 도발적이어서 여우는 불쾌하다는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아? 너도 좋았어? 너무 노골적인 반응인데? 이제 보니 너도…….”
기습적인 도약! 시걸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우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퍼뜩 고개를 드니, 섬뜩한 붉은 만월의 월광 속으로 여우가 사라졌다.
“제기랄!”
시걸은 혀를 차고 미끄러지듯이 뒤로 십여 미터나 물러섰다. 불과 1초의 간격을 두고, 여우가 시걸이 머물던 자리를 벼락처럼 급습했다. 조금만 지체했더라면 무지막지한 여우의 괴력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졌을 것이다. 시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고르고는 기합과 함께 득달같이 내달렸다.
그야말로 질풍같은 움직임! 거의 10미터가 넘게 나던 간격이 순식간에 좁혀지고, 어느 틈엔가 시걸이 여우의 턱밑으로 파고든다. 당황한 여우가 시걸의 정수리를 후려갈기려 들었지만, 구부정하게 자세가 불안정한 상태라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시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왼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여우의 겨드랑이에 힘껏 쑤셔 박았다. 단검의 칼날 표면에 새겨져 있는 붉은 문자들이 눈부신 빛을 발하고, 여우가 휘청거리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댄다.
캐캐애애앵―
시걸은 단검을 뽑아 반전하여, 이번에는 반대편 옆구리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여우가 극심한 고통으론 눈을 까뒤집으며 난동을 부렸다. 너무 근접한 탓에 여우가 휘두르는 팔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턱을 맞아버린 시걸은 보기 좋게 뒤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른 시걸은 용수철처럼 탄력적으로 텀블링하여 일어나자마자 여우의 숨통을 끊어버리기 위해 그대로 몸을 날렸다.
“마지막이다!”
기세 좋게 고함을 내지르며 여우에게 날아드는 시걸.
여우의 옆구리에 박혀 있는 단검을 뽑아들어 마무리로 목을 베려는 찰나,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로 전해졌다. 시걸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빼며 불의의 기습으로부터 벗어났다. 간발의 차이로 시커먼 물체가 시걸이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면서 남긴 잔상을 꿰뚫고 지나갔다.
“누구냣!”
순간 고개를 돌린 시걸은 몸을 움찔거렸다. 몸을 돌렸을 때, 누군가 연기처럼 시걸의 뒤를 장악한 것이다. 전혀 기척도 느낄 새도 없이, 그가 내뿜는 입김이 뒷목에 닿아서야 겨우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공포감이 전신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시걸은 손에 쥐고 있는 단검을 휘두를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얼어버린 건가? 오줌까지 지릴 모양인데? 하긴 겁이 좀 날 거야. 그렇지? 넌 하마터면 우리 귀여운 막내를 죽일 뻔 했거든. 그러니, 그만한 대가를 충분히 치르게 해줘야지 않겠어? 어때, 내 생각이?”
등 뒤의 누군가가 시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걸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하든, 부정적인 대답을 하든, 이 자의 선택은 같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배후를 장악당한 지금, 어설프게 반격을 하려고 했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앞에는 상처 입은 여우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가녀린 여인이 무심한 얼굴로 서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들 두 사람도 여우일 것이다. 하나도 힘든데 셋씩이나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무도 대책 없는 생각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시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혜린아, 이 꼬마를 어떻게 처리하지? 간만에 파릇파릇한 젊은 놈의 생간을 먹어볼까?”
등 뒤의 남자가 키득거리고 물었다. 이들은 펜트하우스의 두 남녀, 제와 혜린이었다. 여우의 상처를 살피고 있던 혜린이 고개를 들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의미 없는 살생은 그만둬. 사고를 친 것은 유미로도 족해.”
부상을 당한 여우의 이름이 유미였던 모양이다. 여우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신음을 냈다. 혜린은 그런 여우의 이마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시걸에게 물었다.
“당신, 누구죠? 퇴마사? 아님 도계감찰이라도 되나요? 혹시, ‘인사동’의 사람?”
시걸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시걸, 우리 사부와 마찬가지로 요격사(妖擊師)야.”
“요격사? 그렇다면 황토인(黃土人: 중국인을 가리키는 옛 표현 중 하나)이란 말이야?”
잠자코 듣고 있던 제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난 아니지만, 사부는 화교다.”
“그래? 이 땅덩어리에서 활동 중인 요격사는 그리 많지 않은데…… 네놈의 사부라는 작자는 누구지?”
제가 시걸의 뒷덜미를 움켜쥐더니 서서히 힘을 가하며 물었다. 두꺼운 철근도 가볍게 꺾어버리는 그다. 마음만 먹으면 시걸의 목뼈 정도는 얼마든지 산산조각을 낼 수 있었다. 시걸은 고통스러운지 미간을 좁히며 끙,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것을 본 혜린이 제를 만류했다.
“제, 나한테 맡겨.”
제는 무서운 눈초리로 혜린을 노려보다가 이내 실소하며 시걸을 놔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눈빛이었다. 제의 손아귀로부터 겨우 자유로워진 시걸은 뒷목을 만지며 기침을 했다.
“알고 싶네요. 당신의 사부는 어떤 사람이죠? 남자인가요?”
혜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걸은 잠시 침묵하더니, 약간의 사이를 두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의 사부는 여자다. 남자가 아냐.”
“여자?”
물러서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제가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옆에는 부상을 입었던 여우, 유미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하지만 옆구리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출현은 이미 멎었고, 회복속도도 인간보다 몇 배나 빨라서 조금 후면 완전히 나을 것 같았다.
“요격사인데, 여자라? 내가 알기로 이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요격사 중 여자는 모두 둘이야. 하나는 철관음(鐵觀音)이라 불리는 환속한 비구니고,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진홍의 마녀, 정화. 너의 사부는 둘 중 누구지?”
“그건…….”
제는 시걸이 대답하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철관음은 남자를 지독하게 혐오하는 여자니까, 너 같은 아이를 제자로 둘 리가 없고, 그렇다면 정화가 너의 사부이겠구나. 그렇지?”
질문은 시걸에게 하는 것이었지만 제의 눈길은 헤린을 향하고 있었다.
“정말 당신의 사부가 정화?”
혜린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옅은 살기가 느껴졌다. 시걸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혜린의 목소리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제, 죽여.”
제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고, 시걸은 당황하여 혜린과 제를 번갈아 보았다. 혜린의 옆에서는, 이제는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유미라는 여우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요, 오빠. 언니 말 못 들었어요? 빨리 그 인간을 죽여요.”
유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들었지? 꼬마. 모두가 너의 죽음을 바라는구나. 네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만 인기관리를 위해선 아가씨들의 소망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미안하지만, 나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죽어줘야겠구나.”
제가 싸늘하게 웃으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시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는.
“흐흐흐, 고통은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