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성 지국천왕의 아우이자, 동방군 최고 사령관인 범천은 잠결에 몸을 뒤틀었다. 며칠 새 피로에 시달린 탓인지 꿈자리가 무척 사나웠다.
지국천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문왕(文王)이었기 때문에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군대를 이끄는데 약점이 많은 왕이었다. 그래서 지국천은 자신의 아우인 범천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것을 기대하고 그에게 군 통솔권을 전적으로 위임하고 있었다. 내노라하는 힘을 자랑하는 동방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통째로 거머쥐게 된 범천이었지만, 그는 형 지국천을 진심으로 섬기며 한 번도 왕권을 위협하는 일이 없었다. 전쟁 시에는 맹장이었지만 범천 역시 형 지국천만큼이나 그 기질이 온순한 사람이었다. 두 형제는 자라면서 한 번도 싸운 적없을 정도로 우애가 깊었고 형 지국천이 왕위에 오르자 범천은 자진해서 몰래 긴 여행길에 올랐을 정도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훌륭했다. 동방이 어느 곳보다 평화로운 이유는 두 형제의 신뢰와 타고난 온화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꿈이 주는 정신의 괴로움이 육체의 고통으로 넘어오면서 범천의 가슴이 답답해왔다. 몸은 땅으로 꺼지듯 무겁고 꿈의 수령에서 발을 뺄 수 없을 수 없을 정도로 노곤했다. 그는 눈꺼풀도 쳐들지 못한 채 답답한 숨을 몰아쉬었지만 답답증은 심해져만 갔다. 죽음으로의 공포가 느껴지면서 범천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같던 무거운 눈꺼풀을 번쩍 말아올렸다.
범천은 심장이 멎을만치 소스라쳤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 위에 올라있었다. 커튼이 걷혀 있었지만 창 밖에선 달빛 하나 새어들어오지 않아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 누..누구냐?"
범천은 막혀오는 숨을 겨우 내몰아 쉬며 물었다. 그의 오른쪽엔 늘 곁에 두고 자는 검이 한 자루 있었지만 정체 불명의 자객은 범천의 오른 팔마저 짓눌러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자객은 두 발로 그의 가슴과 오른팔을 각각 누르고 있었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바람에 밀려가면서 희미한 달빛이 어둠을 거두며 방 안으로 스며 들었다. 달빛이 자객의 왼편에 부딪히며 그를 단절된 두 부분으로 드러내주었다. 하지만 범천이 그를 알아보는데 두드러진 음영이 방해될 것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지만 강한 인상으로 빛나는 붉고 흰 가면과 그 소름끼치는 비웃음의 가면으로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챘다.
" 다...다....당신은...?"
누워있는 범천에게 초율은 거대한 산과도 같았고 깊은 두려움이었다. 초율의 체중이 실린 왼발에 범천은 더욱 호흡이 곤란해져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편했다. 초율이 돌연 가슴을 짓누르던 발을 들어 그 위치를 범천의 왼팔로 옮겨주자 범천은 겨우 숨통이 트여 방안 가득 숨소리가 퍼질만치 급하게 숨을 몰아위었다.
" 내가 누군지 아는가?"
초율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음침하게 공기 중에 울려퍼졌다.
" 제 5황자..아니, 제 4황자 전하가 아니십니까?"
범천의 두려움은 피가 통하지 않아 마비된 오른팔이 주는 고통 이상이었다.
" 아니지, 나는 저주받은 괴물이다. 천제 전하의 수치이자 최대의 오점이지 않느냐?"
초율의 대구에 범천은 당황하여,
"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 네가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동정할 가치도 없는 괴물이라고."
범천은 초율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한 조각 구름이 달을 스치고 지나며 방안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초율의 가면이 사라졌다 다시 빛나자 범천의 뇌리에 기억 하나가 스쳤다. 범천의 눈동자가 커졌다. 초율은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 기억났는가?"
그의 차가운 저음이 범천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범천은 자신이 무심코 뱉었던 아주 오래 전의 몇 마디 말이 지금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비수가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 옛날의 일이, 또한 초율이 전혀 듣지 못했을 그 말들이 어째서 이제서야 자신을 위협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건 극히 사소한 일이 아니었던가. 적어도 범천 자신에게는.
초율이 흡수해버린 능리의 영혼을 그는 알지 못했다. 오래 전 어린 초율의 해괴한 행동을 보고 그가 능리에게 뱉었던 말들이 초율에게는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는 오늘의 사건이라는 것을 그가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범천은 천제의 유모인 능리와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된 사이었다.범천은 능리가 가진 나이 든 여자의 성숙한 매력이 편했고, 박식한 능리는 대화상대로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능리는 가끔 범천이 생각지도 못한 진리와 지혜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범천에게 능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같은 안식처이자 친구였다.
그리고 평생을 홀로 살면서 젊은 시절을 천제를 보살피는데 다 소비한 능리에게 이 젊은 왕족은 삶의 활력이 되어 주었다. 천제가 다 자라 더 이상 그녀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후, 그녀는 어쩔 수 없는 허무와 고독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삶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 젊은 친구는 그녀의 우울증을 희석시키는 좋은 계기였다. 둘의 관계를 두고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별별 음란한 소문들까지 다 만들어냈지만 둘의 건전하고 발전적인 관계를 갈라놓진 못했다.
그 날, 범천은 불시에 능리를 찾아왔다. 범천은 형 지국천이 동방군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하자 몇 번이고 거절하다가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도리천으로 와서 우선 천제에게 신고를 해야했다. 제황성에 들린 범천은 그 참에 오랜 시간 보지 못한 능리를 만날 생각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놀래켜 줄 생각으로 미리 소식도 전하지 않은채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북궁으로 향했다.
이계에서 온 여자가 제 1황비에 오른 후, 불의의 사고로 그녀가 죽었다. 그녀를 좋아하던 능리는 그 후 깊은 상심에 빠졌고 그 충격으로 두문불출했다. 능리가 새 황비와 그녀의 태어날 아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범천은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의 충격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난 그녀는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능리는 범천을 만나는데 좀처럼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고 약속이 된 후에야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주었다. 북궁에 머무르고 있다고 밝혔지만, 그녀는 범천을 북궁에서 대접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아직도 실의에 빠져있어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던 범천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으니 이제는 불쑥 찾아가도 그녀가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북궁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북궁의 정문에 이른 범천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꼈다. 북궁의 정문인 철문에 이어진 낡은 담벼락과 칠이 벗겨진 철문의 철장을 타고 이름 모를 덩쿨들이 무성히도 휘감아 자라고 있었다. 그 을씨년스러운 모습에 범천은 그제서야 의문이 몰려왔다.
황자궁을 이루는 다섯채의 궁(宮)-동궁,서궁,남궁,중궁 그리고 북궁-이 있었지만, 북궁은 애초에 불필요하게 만들어진 궁이었다. 북쪽에 제대로 위치한 궁은 중궁이었고 북궁은 중궁에서도 한참이나 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에 지어져있었다. 제황성 전체로 보아도 제일 북쪽에 위치한 북궁은 터가 좋지 않아 동식물이 이유없이 죽거나 드세어져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 때까지 사람이 산 적이 없던 사생아같은 북궁에서 능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다. 게다가 능리는 분명히 천제의 작은 황자 한 명을 모시고 산다고 했다. 무엇때문에 천제가 귀한 자기 자식을 이런 거친 곳에 던져버린단 말인가. 범천은 왠지 모를 불쾌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북궁의 정문 앞에서 서서 잠시 망설였다.
그 때 철문의 철창 사이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한참 떨어진 거리였지만 정원을 스쳐지나가는 여인은 분명히 능리였다. 범천은 그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범천은 망설임을 떨치고 철문을 힘주어 밀었고 문은 낡은 쇳소리를 울리며 쉽게 열렸다.
정원은 더더욱 엉망이었다. 온갖 잡초가 방해받지 않고 그 성질대로 자라 야생의 숲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정원을 통과하는 동안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도 없었다. 제황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시녀와 시종들의 모습도 하나 없었다. 범천은 잡초가 우거져 겨우 그 흔적만을 읽어낼 뿐인 중앙로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들어온 이질적인 물체게 놀라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엉뚱한 장소에 잘못 세워진 석고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무 아래 꼼짝않고 서 있는 석고상이 공격적인 시선을 던지는 곳이 바로 범천 자신인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소름이 끼쳤다. 범천은 동상처럼 꼼짝않고 서 있는 괴이한 소년의 손을 보고 경악했다. 소년의 양 손에 털뭉치가 쥐어져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대여섯 마리의 새끼 고양이었다.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 가죽을 손가락으로 쥐고 있는 소년을 보자 범천은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고양이들은 바람에 힘없이 흔들릴 뿐 스스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범천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소년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얼어붙어있었다.
==범천이 뜬금없이 왜 등장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설무랑과 초율이 거리를 한 걸음 더 좁히는 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입니다. 또 불쌍한 초율의 타고난 잔인성을 좀 더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다음 주부터 장마라는군요. 비의 질퍽거리는 느낌은 싫어하지만 비가 올때 대기 중에 퍼지는 마른 풀 냄새와 새벽 빗소리를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우선 이 더위가 한풀 꺾일 것을 생각하니 좋아요! 우산 필수-아시죠?
초율(礎律) 제 64화
동방성 지국천왕의 아우이자, 동방군 최고 사령관인 범천은 잠결에 몸을 뒤틀었다. 며칠 새 피로에 시달린 탓인지 꿈자리가 무척 사나웠다.
지국천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문왕(文王)이었기 때문에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군대를 이끄는데 약점이 많은 왕이었다. 그래서 지국천은 자신의 아우인 범천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것을 기대하고 그에게 군 통솔권을 전적으로 위임하고 있었다. 내노라하는 힘을 자랑하는 동방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통째로 거머쥐게 된 범천이었지만, 그는 형 지국천을 진심으로 섬기며 한 번도 왕권을 위협하는 일이 없었다. 전쟁 시에는 맹장이었지만 범천 역시 형 지국천만큼이나 그 기질이 온순한 사람이었다. 두 형제는 자라면서 한 번도 싸운 적없을 정도로 우애가 깊었고 형 지국천이 왕위에 오르자 범천은 자진해서 몰래 긴 여행길에 올랐을 정도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훌륭했다. 동방이 어느 곳보다 평화로운 이유는 두 형제의 신뢰와 타고난 온화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꿈이 주는 정신의 괴로움이 육체의 고통으로 넘어오면서 범천의 가슴이 답답해왔다. 몸은 땅으로 꺼지듯 무겁고 꿈의 수령에서 발을 뺄 수 없을 수 없을 정도로 노곤했다. 그는 눈꺼풀도 쳐들지 못한 채 답답한 숨을 몰아쉬었지만 답답증은 심해져만 갔다. 죽음으로의 공포가 느껴지면서 범천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같던 무거운 눈꺼풀을 번쩍 말아올렸다.
범천은 심장이 멎을만치 소스라쳤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 위에 올라있었다. 커튼이 걷혀 있었지만 창 밖에선 달빛 하나 새어들어오지 않아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 누..누구냐?"
범천은 막혀오는 숨을 겨우 내몰아 쉬며 물었다. 그의 오른쪽엔 늘 곁에 두고 자는 검이 한 자루 있었지만 정체 불명의 자객은 범천의 오른 팔마저 짓눌러 움직일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자객은 두 발로 그의 가슴과 오른팔을 각각 누르고 있었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바람에 밀려가면서 희미한 달빛이 어둠을 거두며 방 안으로 스며 들었다. 달빛이 자객의 왼편에 부딪히며 그를 단절된 두 부분으로 드러내주었다. 하지만 범천이 그를 알아보는데 두드러진 음영이 방해될 것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지만 강한 인상으로 빛나는 붉고 흰 가면과 그 소름끼치는 비웃음의 가면으로 그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챘다.
" 다...다....당신은...?"
누워있는 범천에게 초율은 거대한 산과도 같았고 깊은 두려움이었다. 초율의 체중이 실린 왼발에 범천은 더욱 호흡이 곤란해져 그의 얼굴이 파리하게 편했다. 초율이 돌연 가슴을 짓누르던 발을 들어 그 위치를 범천의 왼팔로 옮겨주자 범천은 겨우 숨통이 트여 방안 가득 숨소리가 퍼질만치 급하게 숨을 몰아위었다.
" 내가 누군지 아는가?"
초율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음침하게 공기 중에 울려퍼졌다.
" 제 5황자..아니, 제 4황자 전하가 아니십니까?"
범천의 두려움은 피가 통하지 않아 마비된 오른팔이 주는 고통 이상이었다.
" 아니지, 나는 저주받은 괴물이다. 천제 전하의 수치이자 최대의 오점이지 않느냐?"
초율의 대구에 범천은 당황하여,
"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 네가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동정할 가치도 없는 괴물이라고."
범천은 초율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한 조각 구름이 달을 스치고 지나며 방안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초율의 가면이 사라졌다 다시 빛나자 범천의 뇌리에 기억 하나가 스쳤다. 범천의 눈동자가 커졌다. 초율은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 기억났는가?"
그의 차가운 저음이 범천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범천은 자신이 무심코 뱉었던 아주 오래 전의 몇 마디 말이 지금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비수가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 옛날의 일이, 또한 초율이 전혀 듣지 못했을 그 말들이 어째서 이제서야 자신을 위협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건 극히 사소한 일이 아니었던가. 적어도 범천 자신에게는.
초율이 흡수해버린 능리의 영혼을 그는 알지 못했다. 오래 전 어린 초율의 해괴한 행동을 보고 그가 능리에게 뱉었던 말들이 초율에게는 지금 생생하게 살아있는 오늘의 사건이라는 것을 그가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범천은 천제의 유모인 능리와 신분과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된 사이었다.범천은 능리가 가진 나이 든 여자의 성숙한 매력이 편했고, 박식한 능리는 대화상대로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능리는 가끔 범천이 생각지도 못한 진리와 지혜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범천에게 능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같은 안식처이자 친구였다.
그리고 평생을 홀로 살면서 젊은 시절을 천제를 보살피는데 다 소비한 능리에게 이 젊은 왕족은 삶의 활력이 되어 주었다. 천제가 다 자라 더 이상 그녀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후, 그녀는 어쩔 수 없는 허무와 고독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삶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 젊은 친구는 그녀의 우울증을 희석시키는 좋은 계기였다. 둘의 관계를 두고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별별 음란한 소문들까지 다 만들어냈지만 둘의 건전하고 발전적인 관계를 갈라놓진 못했다.
그 날, 범천은 불시에 능리를 찾아왔다. 범천은 형 지국천이 동방군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하자 몇 번이고 거절하다가 결국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도리천으로 와서 우선 천제에게 신고를 해야했다. 제황성에 들린 범천은 그 참에 오랜 시간 보지 못한 능리를 만날 생각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놀래켜 줄 생각으로 미리 소식도 전하지 않은채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북궁으로 향했다.
이계에서 온 여자가 제 1황비에 오른 후, 불의의 사고로 그녀가 죽었다. 그녀를 좋아하던 능리는 그 후 깊은 상심에 빠졌고 그 충격으로 두문불출했다. 능리가 새 황비와 그녀의 태어날 아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범천은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의 충격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난 그녀는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능리는 범천을 만나는데 좀처럼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고 약속이 된 후에야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주었다. 북궁에 머무르고 있다고 밝혔지만, 그녀는 범천을 북궁에서 대접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아직도 실의에 빠져있어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던 범천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으니 이제는 불쑥 찾아가도 그녀가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북궁으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북궁의 정문에 이른 범천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꼈다. 북궁의 정문인 철문에 이어진 낡은 담벼락과 칠이 벗겨진 철문의 철장을 타고 이름 모를 덩쿨들이 무성히도 휘감아 자라고 있었다. 그 을씨년스러운 모습에 범천은 그제서야 의문이 몰려왔다.
황자궁을 이루는 다섯채의 궁(宮)-동궁,서궁,남궁,중궁 그리고 북궁-이 있었지만, 북궁은 애초에 불필요하게 만들어진 궁이었다. 북쪽에 제대로 위치한 궁은 중궁이었고 북궁은 중궁에서도 한참이나 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에 지어져있었다. 제황성 전체로 보아도 제일 북쪽에 위치한 북궁은 터가 좋지 않아 동식물이 이유없이 죽거나 드세어져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 때까지 사람이 산 적이 없던 사생아같은 북궁에서 능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었다. 게다가 능리는 분명히 천제의 작은 황자 한 명을 모시고 산다고 했다. 무엇때문에 천제가 귀한 자기 자식을 이런 거친 곳에 던져버린단 말인가. 범천은 왠지 모를 불쾌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북궁의 정문 앞에서 서서 잠시 망설였다.
그 때 철문의 철창 사이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한참 떨어진 거리였지만 정원을 스쳐지나가는 여인은 분명히 능리였다. 범천은 그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범천은 망설임을 떨치고 철문을 힘주어 밀었고 문은 낡은 쇳소리를 울리며 쉽게 열렸다.
정원은 더더욱 엉망이었다. 온갖 잡초가 방해받지 않고 그 성질대로 자라 야생의 숲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정원을 통과하는 동안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도 없었다. 제황성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시녀와 시종들의 모습도 하나 없었다. 범천은 잡초가 우거져 겨우 그 흔적만을 읽어낼 뿐인 중앙로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에 들어온 이질적인 물체게 놀라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엉뚱한 장소에 잘못 세워진 석고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무 아래 꼼짝않고 서 있는 석고상이 공격적인 시선을 던지는 곳이 바로 범천 자신인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소름이 끼쳤다. 범천은 동상처럼 꼼짝않고 서 있는 괴이한 소년의 손을 보고 경악했다. 소년의 양 손에 털뭉치가 쥐어져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대여섯 마리의 새끼 고양이었다.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 가죽을 손가락으로 쥐고 있는 소년을 보자 범천은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고양이들은 바람에 힘없이 흔들릴 뿐 스스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범천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소년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얼어붙어있었다.
==범천이 뜬금없이 왜 등장하는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설무랑과 초율이 거리를 한 걸음 더 좁히는 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입니다. 또 불쌍한 초율의 타고난 잔인성을 좀 더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다음 주부터 장마라는군요. 비의 질퍽거리는 느낌은 싫어하지만 비가 올때 대기 중에 퍼지는 마른 풀 냄새와 새벽 빗소리를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우선 이 더위가 한풀 꺾일 것을 생각하니 좋아요! 우산 필수-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