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현을 집으로 보내버리고, 텅 빈 집에서 여자는 망연자실 했다. 막상 상현이 그렇게 나오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 변화로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여자는 짧은 볼레 카디건 하나를 챙겨 들고, B&G마트로 향했다. 마음이 복잡해지고, 머릿속에 생각이 빈번해 질수록 자꾸만 상한이 생각났다. 상한의 가게로 거의 뛰다 시피 들어갔다. 헉헉거리는 영효를 이상한 눈으로 상한이 쳐다보며 물었다.
“달밤에 체조라도 하는 거야?”
“아니. 아니야. 누군가 미치게 말할 상대가 필요해서 왔어. 언제 끝나?”
영효의 말에 상한이 손을 들어 간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선명하게 B&G마트라고 적혀있고, 24시 편의점이라는 글자가 위에 박혀 있었다.
“24시간이면 항상 상한씨가 해?”
“아니, 그렇지는 않아. 가끔 동생이 와서 봐 줄때도 있고, 말이 24시간이지 대부분이 2시나 3시쯤에 문을 닫아.”
“근데 왜 24시라고 적어놨어?”
“그냥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뜨악하게 쳐다보다 파라솔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이스크림을 꺼내려는 상한의 뒤에서 여자가 ‘ 오늘은 맥주가 끝내주고 고파.’라고 말했다. 여자의 말에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 시원하게 냉장되어있는 맥주 캔 두개를 꺼내와, 마시기 좋게 따서 영효의 앞에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상현이가 왔었어. 주리랑 계약서 작성하고 결혼 했다는데 알고 있었어?”
여자의 말에 남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표시를 내 보인 남자를 보던 여자가 인상을 썼다. 남자에게 물어보긴 했지만, 설마 남자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사귀던 여자가 다른 남자랑, 그것도 그냥 결혼이 아닌 계약 결혼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도 이 남자는 이렇게 태평스러웠을까?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근데 왜 나한테는 귀띔조차 해 주지 않은 거야? 친구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할 적당한 선이 있고, 다른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해야 할 선이 있는 거야. 난 그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거고. 내가 말을 안 해도, 봐. 넌 벌써 알고 있잖아.”
남자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어쩐지 남자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더운 듯 옷 부채질을 하며 바람을 만들어 내는 상한을 보면서 영효가 중얼 거렸다.
“삼년 만 기다려 달래. 그럼 나한테 돌아오겠대.”
“그래?”
“놀랍지 않아? 그 책임감 강한 남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말이야.”
“그래서 어쩔 셈이야?”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깜깜하고 까마득해서 잘 모르겠어. 내가 상현을 기다리면서 그를 가끔 만난다면 그건 불륜이겠지?”
영효가 손톱을 이로 물어뜯으며 물었다. 영효의 말에 상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자의 말을 아예 못들은 사람처럼, 가끔 도로를 지나가는 차를 쳐다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할 뿐이었다. 한참 딴 짓을 한 후에 남자가 ‘아니.’라고 짧게 말했다.
“아닌 것 같아. 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나라도 주리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고민스러운 일일 테니깐. 그냥 네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해. 그게 가장 좋은 것 같아. 내가 기다리지 말라고 해도, 네 마음이 기다리고 싶으면 기다릴 테고, 내가 기다리라고 해도 네 마음이 시키지 않는다면 하지 않을 거잖아. 그리고 어차피 넌 마음이 정해져 있는 것 같고.”
남자의 말이 맞았다. 영효는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다. 다만 자신의 결정에 대해 타인의 의견이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적어도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만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대로 한다면 분명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랑이라는 감정이 한 순간에 이제부터 끝! 이제는 그러면 안돼 하면 바로 교통정리가 되는 쉬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자는 복잡한 감정의 구렁텅이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영효는 마음이 복잡해 그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이틀 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조차 가물댈 지경이었다. 아침에는 양치질 한 것을 잊고 있다가 잇몸에 피가 날 지경까지 칫솔로 문질러 댔고, 밥통에 숟가락이 들어가 있었다.
“이봐, 박영효. 정신 차려. 또 그 일들을 반복할 셈이야?”
무섭게 자신을 질책해 보아도 정신은 여전히 몽롱했다. 그런 기억들은 남자의 느닷없는 이별을 들었을 때와 같은 것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하루 종일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서 정신없이 찾아 헤맸고, 그가 사준 커플링을 끼고 있으면서, 커플링 잃어버렸다고, 밖에 까지 나가 찾을 정도였다. 그때와 똑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여자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박영효! 이제 그만 하자고!”
여자가 악다구니 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언제부터 흐르기 시작했던 것일까?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여자는 손을 들어 거추장스러운 눈물을 대충 닦아 내곤 핸드폰을 찾았다. 지금은 그 누구라도 필요했다. 그때 영효의 핸드폰이 울었다. 그였다.
“야! 이제 그만 좀 울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아아아앙. 인생이 뭣 같아. 훌쩍. 훌쩍. 아아아아앙”
“야! 못난이 인형. 너 계속 이렇게 질질 짜면 여기다 확 버리고 간다!”
“버리고 가! 버리고 가버려! 너도 나 버리고 가버려! 이, 이 나쁜 자식아아아아!”
“소리 좀 그만 질러!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내가 미친놈이지. 괜히 나왔어. 나와서 술 꼬장이나 받아 주고 있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술을 마시고 싶다는 여자에게 술을 사준 것부터가 어긋난 일이었다. 남자는 냉큼 냉큼 잘도 받아 마시는 여자를 보면서 은근히 술이 세구나 싶었다. 하지만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들이킨 다음부터는 한 시간이 넘도록 저 상태였다. 여자의 술 꼬장에 남자는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며칠동안 두세 시간 밖에 자질 못했다. 곧이어 패션 페스티벌이 대대적으로 열릴 예정이여서 그만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였다.
‘너 이번에도 펑크 내고 그러면 얄짤 없어! 페스티벌만 아니었어도 네 녀석 안 썼을 거라고!’
그를 큰 무대에 내 보내자고 추천한 선생님의 말에 소속사 사장이 그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내 뱉은 말이었다. 지금 여자에게 내고 있는 이 시간조차 남자에게는 대단한 관용이었다. 여자의 얼굴 잠깐 보고 들어가 밤 새 워킹 연습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는 조그마한 계집애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주혁이었다. 포장마차에 있는 사람들이 영효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그 눈빛은 다시 주혁에게로 이어져 돌아왔다.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남자는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 하는 영효의 겨드랑이에 팔을 껴서 들어 올렸다.
“이제 좀 집에 가자! 보기 추해. 그만큼 했으면 됐으니깐, 이제 가자.”
남자가 간이 탁자 위에 삼만 원 가량을 올려놓고, 여자를 어깨에 들쳐 멨다. 도저히 말로는 들을 것 같지 않은 여자에게 내려진 마지막 보루였다.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이 나쁜 자식아!”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나도 인내심에 한계가 밀려오기 시작하니깐 말이야.”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이 거북스러워 좀 더 빨리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며칠째 강행군으로 밤을 지새우다 시피 연습을 했더니,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지친 몸에 여자의 술 꼬장까지 받고 있으려니 미칠 지경이었다.
“얌전히 있어.”
남자가 안전벨트를 메어주며 영효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때, 주혁의 스포츠카 앞으로 경찰차 한대가 가로 막아 섰다. 20살 초반으로 보이는 경찰관이 뜨악하게 쳐다보는 주혁을 향해 걸어왔다.
“신고가 들어와서 출동 했습니다. 남자 분께서 싫다는 여자 분을 강제로 데리고 가셨다는데 사실입니까?”
어이가 없고, 황당한 마음에 주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싫다는 여자 부운? 남자는 그 싫다는 여자 분인 영효를 바라보았다. 벌써 잠들어 코까지 고는 여자를 깨워 경찰관에게 대질을 시켜주어야 하나? 남자가 경찰관에게 눈짓으로 영효를 가리켰다. 영효를 보던 경찰관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때, 경찰차 안에 타고 있던 그 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경찰관이 ‘이 순경! 그만 가자고. 연인 사이 같으니깐.’이라고 외쳤다. 그 말에 경찰관은 주혁에게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며 사라졌다.
‘제길! 내가 왜 이런 대접 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너 깨어나면 죽을 줄 알아!’
주혁은 찜찜한 기분에 잠든 영효의 이마를 찰싹 소리가 나게 한대 때렸다. 남자가 때린 부분을 영효가 웅얼거리며 몇 번 긁다가 이내 또 잠이 들어 버렸다.
“정말 못 말리는 여자군. 사람 황당하게 만드는 데는 뭐 있는 여자야. 당신은.........”
주혁은 세상모르고 자는 영효를 보다, 차를 몰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 익숙한 벽지가 눈앞에서 아른 거렸다. 머리가 아프고, 숙취 때문에 딱따구리 몇 마리가 머리를 쉴 새 없이 쪼아 대고 있는 것 같았다.
“으으으으.”
여자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고, 화장실로 향했다. 얼굴은 팅팅 붓고, 눈의 쌍거풀을 다 풀려 버렸다. 어제 분명 똥강아지 같은 주혁을 만나서 술잔을 기울였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가 깜깜 무소식이었다. 여자는 끊어진 기억을 다 잡으려 화장실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기서 끊어진 필름은 이어지지 않았다.
“뭐 집에 온 것 보니 알아서 잘 기어왔나 보네. 역시 귀소 본능은 대단한거야.”
여자는 찜찜한 마음을 떨쳐 버리려 괜히 더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수를 대충 하고, 방에 들어가 핸드폰을 찾았다. 여자는 건망증이 대단했다. 가끔 이렇게 무언가 집중할 일이 생길 때면 꼭 한 두개씩은 어딘가 흘려댔다. 여자는 자신의 가지고 있는 물건 중 가장 값나가는 핸드폰을 찾았다. 이불 구석에서 튀어나오는 핸드폰을 들었다.
[부재중 전화 5통]
음성 메시지 버튼이 액정 위에 떠 있었다. 여자는 소리 샘으로 들어가 신규 메시지를 들었다.
[신규메시지 3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삐- 나야. 못난이 인형! 너 아주 깨어나면 죽을 줄 알아. 내가 어제 너 때문에 무슨 봉변을 당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말하면 넌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들 꺼다. 땅꼬마 앞으로 다른 사람이랑 술 마시지 마라. 마시는 상대편 고생시키지 말고, 정 술이 먹고 싶거든, 혼자 집에서 먹어! 그리고 이 메시지 들으면 연락해라. 안하면 죽는다.]
“메롱! 내가 할 거 같냐? 멍청하긴.”
여자는 다음 메시지를 눌렀다.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삐- 뭐야? 아직도 안 일어난 거야? 시체냐? 아니면 고작 소주 세잔 마시고 죽은 거야? 완전 해외 토픽 감이네. 빨리 일어나서 연락해. 나 지금 무지하고 약 올라 있으니깐. 어제 너 업고 너희 집에 가느라고 내 가냘픈 허리가 무리를 했더니, 아주 패인이 다 됐다. 역시 넌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야. 빨리 전화해! 십초 준다.]
‘뭐야? 그럼 주혁이가 나를 데려다 줬다는 이야기야?’
여자는 슬슬 밀려오는 불안감에 다음 메시지로 급하게 넘겼다.
[세 번째 메시지입니다. 삐- 이거 완전히 쌩까네. 나 이제부터 전화 못 받는다. 연습해야 돼. 그렇다고 내가 그냥 이 일을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대단한 착각이야. 일어나서 밥 꼭 먹고, 안 먹으면 속 버린다. 끊는다, 못난아.]
“왠 연습? 워킹인가 뭐신가 그거 하나? 아씨. 궁금한데 전화도 못하겠네.”
여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집까지 데려다 줬는지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또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화했다가 전번 사고 때처럼 인생 망쳤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그나저나, 나 밥 먹는 것 까지 지가 웬 상관이래?’라고 중얼거리며 밥통 문을 열어 늦은 아침을 챙겼다. 절대 그 놈의 협박 때문에 먹는 건 아니야. 라고 중얼거리며.
-이상한 관계-(9) 마음 가는 데로 행동해.
이상한 관계
(9) 마음 가는 데로 행동해.
상현을 집으로 보내버리고, 텅 빈 집에서 여자는 망연자실 했다. 막상 상현이 그렇게 나오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 변화로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여자는 짧은 볼레 카디건 하나를 챙겨 들고, B&G마트로 향했다. 마음이 복잡해지고, 머릿속에 생각이 빈번해 질수록 자꾸만 상한이 생각났다. 상한의 가게로 거의 뛰다 시피 들어갔다. 헉헉거리는 영효를 이상한 눈으로 상한이 쳐다보며 물었다.
“달밤에 체조라도 하는 거야?”
“아니. 아니야. 누군가 미치게 말할 상대가 필요해서 왔어. 언제 끝나?”
영효의 말에 상한이 손을 들어 간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선명하게 B&G마트라고 적혀있고, 24시 편의점이라는 글자가 위에 박혀 있었다.
“24시간이면 항상 상한씨가 해?”
“아니, 그렇지는 않아. 가끔 동생이 와서 봐 줄때도 있고, 말이 24시간이지 대부분이 2시나 3시쯤에 문을 닫아.”
“근데 왜 24시라고 적어놨어?”
“그냥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사람이었다. 여자는 남자를 뜨악하게 쳐다보다 파라솔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이스크림을 꺼내려는 상한의 뒤에서 여자가 ‘ 오늘은 맥주가 끝내주고 고파.’라고 말했다. 여자의 말에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 시원하게 냉장되어있는 맥주 캔 두개를 꺼내와, 마시기 좋게 따서 영효의 앞에 내밀었다.
“무슨 일이야?”
“상현이가 왔었어. 주리랑 계약서 작성하고 결혼 했다는데 알고 있었어?”
여자의 말에 남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표시를 내 보인 남자를 보던 여자가 인상을 썼다. 남자에게 물어보긴 했지만, 설마 남자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사귀던 여자가 다른 남자랑, 그것도 그냥 결혼이 아닌 계약 결혼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도 이 남자는 이렇게 태평스러웠을까?
“알고 있었단 말이야? 근데 왜 나한테는 귀띔조차 해 주지 않은 거야? 친구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할 적당한 선이 있고, 다른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해야 할 선이 있는 거야. 난 그 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거고. 내가 말을 안 해도, 봐. 넌 벌써 알고 있잖아.”
남자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어쩐지 남자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더운 듯 옷 부채질을 하며 바람을 만들어 내는 상한을 보면서 영효가 중얼 거렸다.
“삼년 만 기다려 달래. 그럼 나한테 돌아오겠대.”
“그래?”
“놀랍지 않아? 그 책임감 강한 남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말이야.”
“그래서 어쩔 셈이야?”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깜깜하고 까마득해서 잘 모르겠어. 내가 상현을 기다리면서 그를 가끔 만난다면 그건 불륜이겠지?”
영효가 손톱을 이로 물어뜯으며 물었다. 영효의 말에 상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자의 말을 아예 못들은 사람처럼, 가끔 도로를 지나가는 차를 쳐다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할 뿐이었다. 한참 딴 짓을 한 후에 남자가 ‘아니.’라고 짧게 말했다.
“아닌 것 같아. 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 나라도 주리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면, 고민스러운 일일 테니깐. 그냥 네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해. 그게 가장 좋은 것 같아. 내가 기다리지 말라고 해도, 네 마음이 기다리고 싶으면 기다릴 테고, 내가 기다리라고 해도 네 마음이 시키지 않는다면 하지 않을 거잖아. 그리고 어차피 넌 마음이 정해져 있는 것 같고.”
남자의 말이 맞았다. 영효는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다. 다만 자신의 결정에 대해 타인의 의견이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적어도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만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대로 한다면 분명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랑이라는 감정이 한 순간에 이제부터 끝! 이제는 그러면 안돼 하면 바로 교통정리가 되는 쉬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자는 복잡한 감정의 구렁텅이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영효는 마음이 복잡해 그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이틀 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조차 가물댈 지경이었다. 아침에는 양치질 한 것을 잊고 있다가 잇몸에 피가 날 지경까지 칫솔로 문질러 댔고, 밥통에 숟가락이 들어가 있었다.
“이봐, 박영효. 정신 차려. 또 그 일들을 반복할 셈이야?”
무섭게 자신을 질책해 보아도 정신은 여전히 몽롱했다. 그런 기억들은 남자의 느닷없는 이별을 들었을 때와 같은 것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하루 종일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핸드폰을 손에 들고서 정신없이 찾아 헤맸고, 그가 사준 커플링을 끼고 있으면서, 커플링 잃어버렸다고, 밖에 까지 나가 찾을 정도였다. 그때와 똑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여자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박영효! 이제 그만 하자고!”
여자가 악다구니 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언제부터 흐르기 시작했던 것일까?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여자는 손을 들어 거추장스러운 눈물을 대충 닦아 내곤 핸드폰을 찾았다. 지금은 그 누구라도 필요했다. 그때 영효의 핸드폰이 울었다. 그였다.
“야! 이제 그만 좀 울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아아아앙. 인생이 뭣 같아. 훌쩍. 훌쩍. 아아아아앙”
“야! 못난이 인형. 너 계속 이렇게 질질 짜면 여기다 확 버리고 간다!”
“버리고 가! 버리고 가버려! 너도 나 버리고 가버려! 이, 이 나쁜 자식아아아아!”
“소리 좀 그만 질러!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내가 미친놈이지. 괜히 나왔어. 나와서 술 꼬장이나 받아 주고 있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술을 마시고 싶다는 여자에게 술을 사준 것부터가 어긋난 일이었다. 남자는 냉큼 냉큼 잘도 받아 마시는 여자를 보면서 은근히 술이 세구나 싶었다. 하지만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들이킨 다음부터는 한 시간이 넘도록 저 상태였다. 여자의 술 꼬장에 남자는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며칠동안 두세 시간 밖에 자질 못했다. 곧이어 패션 페스티벌이 대대적으로 열릴 예정이여서 그만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였다.
‘너 이번에도 펑크 내고 그러면 얄짤 없어! 페스티벌만 아니었어도 네 녀석 안 썼을 거라고!’
그를 큰 무대에 내 보내자고 추천한 선생님의 말에 소속사 사장이 그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내 뱉은 말이었다. 지금 여자에게 내고 있는 이 시간조차 남자에게는 대단한 관용이었다. 여자의 얼굴 잠깐 보고 들어가 밤 새 워킹 연습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는 조그마한 계집애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주혁이었다. 포장마차에 있는 사람들이 영효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고, 그 눈빛은 다시 주혁에게로 이어져 돌아왔다.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남자는 바닥에 앉아 대성통곡 하는 영효의 겨드랑이에 팔을 껴서 들어 올렸다.
“이제 좀 집에 가자! 보기 추해. 그만큼 했으면 됐으니깐, 이제 가자.”
남자가 간이 탁자 위에 삼만 원 가량을 올려놓고, 여자를 어깨에 들쳐 멨다. 도저히 말로는 들을 것 같지 않은 여자에게 내려진 마지막 보루였다.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이 나쁜 자식아!”
“제발 좀 가만히 있으라고! 나도 인내심에 한계가 밀려오기 시작하니깐 말이야.”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이 거북스러워 좀 더 빨리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며칠째 강행군으로 밤을 지새우다 시피 연습을 했더니,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지친 몸에 여자의 술 꼬장까지 받고 있으려니 미칠 지경이었다.
“얌전히 있어.”
남자가 안전벨트를 메어주며 영효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때, 주혁의 스포츠카 앞으로 경찰차 한대가 가로 막아 섰다. 20살 초반으로 보이는 경찰관이 뜨악하게 쳐다보는 주혁을 향해 걸어왔다.
“신고가 들어와서 출동 했습니다. 남자 분께서 싫다는 여자 분을 강제로 데리고 가셨다는데 사실입니까?”
어이가 없고, 황당한 마음에 주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싫다는 여자 부운? 남자는 그 싫다는 여자 분인 영효를 바라보았다. 벌써 잠들어 코까지 고는 여자를 깨워 경찰관에게 대질을 시켜주어야 하나? 남자가 경찰관에게 눈짓으로 영효를 가리켰다. 영효를 보던 경찰관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때, 경찰차 안에 타고 있던 그 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경찰관이 ‘이 순경! 그만 가자고. 연인 사이 같으니깐.’이라고 외쳤다. 그 말에 경찰관은 주혁에게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며 사라졌다.
‘제길! 내가 왜 이런 대접 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너 깨어나면 죽을 줄 알아!’
주혁은 찜찜한 기분에 잠든 영효의 이마를 찰싹 소리가 나게 한대 때렸다. 남자가 때린 부분을 영효가 웅얼거리며 몇 번 긁다가 이내 또 잠이 들어 버렸다.
“정말 못 말리는 여자군. 사람 황당하게 만드는 데는 뭐 있는 여자야. 당신은.........”
주혁은 세상모르고 자는 영효를 보다, 차를 몰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 익숙한 벽지가 눈앞에서 아른 거렸다. 머리가 아프고, 숙취 때문에 딱따구리 몇 마리가 머리를 쉴 새 없이 쪼아 대고 있는 것 같았다.
“으으으으.”
여자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고, 화장실로 향했다. 얼굴은 팅팅 붓고, 눈의 쌍거풀을 다 풀려 버렸다. 어제 분명 똥강아지 같은 주혁을 만나서 술잔을 기울였던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부터가 깜깜 무소식이었다. 여자는 끊어진 기억을 다 잡으려 화장실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기서 끊어진 필름은 이어지지 않았다.
“뭐 집에 온 것 보니 알아서 잘 기어왔나 보네. 역시 귀소 본능은 대단한거야.”
여자는 찜찜한 마음을 떨쳐 버리려 괜히 더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수를 대충 하고, 방에 들어가 핸드폰을 찾았다. 여자는 건망증이 대단했다. 가끔 이렇게 무언가 집중할 일이 생길 때면 꼭 한 두개씩은 어딘가 흘려댔다. 여자는 자신의 가지고 있는 물건 중 가장 값나가는 핸드폰을 찾았다. 이불 구석에서 튀어나오는 핸드폰을 들었다.
[부재중 전화 5통]
음성 메시지 버튼이 액정 위에 떠 있었다. 여자는 소리 샘으로 들어가 신규 메시지를 들었다.
[신규메시지 3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삐- 나야. 못난이 인형! 너 아주 깨어나면 죽을 줄 알아. 내가 어제 너 때문에 무슨 봉변을 당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말하면 넌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들 꺼다. 땅꼬마 앞으로 다른 사람이랑 술 마시지 마라. 마시는 상대편 고생시키지 말고, 정 술이 먹고 싶거든, 혼자 집에서 먹어! 그리고 이 메시지 들으면 연락해라. 안하면 죽는다.]
“메롱! 내가 할 거 같냐? 멍청하긴.”
여자는 다음 메시지를 눌렀다.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삐- 뭐야? 아직도 안 일어난 거야? 시체냐? 아니면 고작 소주 세잔 마시고 죽은 거야? 완전 해외 토픽 감이네. 빨리 일어나서 연락해. 나 지금 무지하고 약 올라 있으니깐. 어제 너 업고 너희 집에 가느라고 내 가냘픈 허리가 무리를 했더니, 아주 패인이 다 됐다. 역시 넌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야. 빨리 전화해! 십초 준다.]
‘뭐야? 그럼 주혁이가 나를 데려다 줬다는 이야기야?’
여자는 슬슬 밀려오는 불안감에 다음 메시지로 급하게 넘겼다.
[세 번째 메시지입니다. 삐- 이거 완전히 쌩까네. 나 이제부터 전화 못 받는다. 연습해야 돼. 그렇다고 내가 그냥 이 일을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대단한 착각이야. 일어나서 밥 꼭 먹고, 안 먹으면 속 버린다. 끊는다, 못난아.]
“왠 연습? 워킹인가 뭐신가 그거 하나? 아씨. 궁금한데 전화도 못하겠네.”
여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집까지 데려다 줬는지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또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화했다가 전번 사고 때처럼 인생 망쳤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그나저나, 나 밥 먹는 것 까지 지가 웬 상관이래?’라고 중얼거리며 밥통 문을 열어 늦은 아침을 챙겼다. 절대 그 놈의 협박 때문에 먹는 건 아니야. 라고 중얼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