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iok00401 광나루에 얽힌 슬픈 이야기
지금 보여드리는 사진은 광진교에서 찍은 한강 상류의 모습을 휘 둘러가며 찍은 사진입니다. 너무 이쁘지요? 이곳 광나루는 버드나무가 많은 나루라하여 양진(楊津)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강원도 일대에서 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한강으로 내려보내는데 최종 도착지가 바로 이곳 광나루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 가장 빠른 나루이기도 한데 잠실대교, 올림픽대교와 광진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한 척 나룻배에 의지해 건널 수밖에 없는 넓은 강폭을 가진 곳이었습니다만 또한 아차산 기슭과 강안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다워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와 흥을 돋구던 곳이기도 하였는데 역사적으로 광나루는 세종대왕의 형으로서 세자의 지위를 벗어 던진 양녕대군이 그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내침을 받아 광주로 가던 별리의 아픔이 쌓여진 장소이기도 하지요.
= 양녕대군은 태종4년(1404) 9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인 그는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혹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거나 풍류생활을 더 즐겼다. 이에 대해 태종이 여러차례 꾸지람을 하였지만 양녕대군은 마음을 고쳐 먹었다가도 잠시 후에 다시 향락에 빠져들었고, 당시의 엄격한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왕세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되었다.
그런데 아우 충녕대군의 인품과 독서, 그리고 학식과 군사에 대한 지식은 그를 뛰어넘어 여러 신하들과 태종의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곧잘 하여 그를 가르치던 사람들이 태종에게 문책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태종과 세자 양녕대군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자 태종 18년 (1418) 6월, 황희(黃喜), 이직(李稷) 등이 반대하는 가운데 양녕대군은 폐위당하게 된다.
그리고 유정현(柳廷顯) 등 여러 신하들은 태종의 뜻대로 충녕을 새로이 세자로 정하는데 찬의를 표하였다. 태종은 이와같은 결정이 이루어진 뒤에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곧 원세자 양녕대군을 외방으로 내보내는 일이 추진되었다. 유정현 등과 같은 신하들은 춘천으로 추방하자고 하였다. 태종은 처음에 이를 응낙하였으나 곧 가까운 광주(廣州)로 바꾸어 나가게 하였다. 며칠 사이에 계속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올라 강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강물이 줄어들 동안까지 사제(私第)에서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정현 등이 "서울에 머무는 일은 불가하옵니다."하고 우겼기에 태종은 하는 수 없이 곧 양녕대군을 광주로 길을 떠나게 하였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비자(婢子) 열 세사람과 노자(奴子) 몇 사람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양녕대군이 떠나는 날, 양녕대군은 동대문 밖까지 그를 수행하던 원윤(元胤)에게 "앞으로는 이 땅을 두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고 광나루에서 배를 타며 눈물을 지었고 "…죄가 큰데도 죽지 않은 것은 오직 나라님의 덕택이다.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는지… 이처럼 불효하였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나라님을 뵈옵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하였다.
이렇게 양녕대군의 눈물이 서려 있는 광나루는 지금은 흔적없고 다만 하나의 표석(標石)만이 이곳이 광나루였었다는 사실만을 증명해 주고 있을 뿐이며 쉐라톤 워커힐호텔 정문 쪽 아래 생도량이 만들어져 있는데 바로 이곳이 광나루 혹은 버드나무 나루인것이다..
k2iok00401 광나루에 얽힌 슬픈 이야기
k2iok00401 광나루에 얽힌 슬픈 이야기 지금 보여드리는 사진은 광진교에서 찍은 한강 상류의 모습을 휘 둘러가며 찍은 사진입니다. 너무 이쁘지요? 이곳 광나루는 버드나무가 많은 나루라하여 양진(楊津)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강원도 일대에서 벌목하여 뗏목을 만들어 한강으로 내려보내는데 최종 도착지가 바로 이곳 광나루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로 가는 가장 빠른 나루이기도 한데 잠실대교, 올림픽대교와 광진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한 척 나룻배에 의지해 건널 수밖에 없는 넓은 강폭을 가진 곳이었습니다만 또한 아차산 기슭과 강안에 펼쳐진 풍경이 아름다워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와 흥을 돋구던 곳이기도 하였는데 역사적으로 광나루는 세종대왕의 형으로서 세자의 지위를 벗어 던진 양녕대군이 그의 아버지 태종으로부터 내침을 받아 광주로 가던 별리의 아픔이 쌓여진 장소이기도 하지요.
= 양녕대군은 태종4년(1404) 9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인 그는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 혹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하거나 풍류생활을 더 즐겼다. 이에 대해 태종이 여러차례 꾸지람을 하였지만 양녕대군은 마음을 고쳐 먹었다가도 잠시 후에 다시 향락에 빠져들었고, 당시의 엄격한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왕세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되었다.
그런데 아우 충녕대군의 인품과 독서, 그리고 학식과 군사에 대한 지식은 그를 뛰어넘어 여러 신하들과 태종의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곧잘 하여 그를 가르치던 사람들이 태종에게 문책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처럼 태종과 세자 양녕대군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자 태종 18년 (1418) 6월, 황희(黃喜), 이직(李稷) 등이 반대하는 가운데 양녕대군은 폐위당하게 된다.
그리고 유정현(柳廷顯) 등 여러 신하들은 태종의 뜻대로 충녕을 새로이 세자로 정하는데 찬의를 표하였다. 태종은 이와같은 결정이 이루어진 뒤에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곧 원세자 양녕대군을 외방으로 내보내는 일이 추진되었다. 유정현 등과 같은 신하들은 춘천으로 추방하자고 하였다. 태종은 처음에 이를 응낙하였으나 곧 가까운 광주(廣州)로 바꾸어 나가게 하였다. 며칠 사이에 계속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올라 강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강물이 줄어들 동안까지 사제(私第)에서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나, 유정현 등이 "서울에 머무는 일은 불가하옵니다."하고 우겼기에 태종은 하는 수 없이 곧 양녕대군을 광주로 길을 떠나게 하였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비자(婢子) 열 세사람과 노자(奴子) 몇 사람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양녕대군이 떠나는 날, 양녕대군은 동대문 밖까지 그를 수행하던 원윤(元胤)에게 "앞으로는 이 땅을 두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고 광나루에서 배를 타며 눈물을 지었고 "…죄가 큰데도 죽지 않은 것은 오직 나라님의 덕택이다.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할는지… 이처럼 불효하였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나라님을 뵈옵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 하였다.
이렇게 양녕대군의 눈물이 서려 있는 광나루는 지금은 흔적없고 다만 하나의 표석(標石)만이 이곳이 광나루였었다는 사실만을 증명해 주고 있을 뿐이며 쉐라톤 워커힐호텔 정문 쪽 아래 생도량이 만들어져 있는데 바로 이곳이 광나루 혹은 버드나무 나루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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