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있으면 방학입니다. 지난 겨울에 짰던 시간표를 붙여놓고 대책없이 놀아봅시다. ......다만 여기서 기억할 점은 재수 학원 방학은 일주일이고 대학교 방학은 일년 중 4개월이 넘는다는 겁니다. ======================== 어쩌라는 거냐 ======================== ‘Nuclear lunch detected.' 허씨 - 너....넌 지난번에 그 영장류!! 머리 잘랐다고 내가 못 알아볼 것 같으냐!! 기억 - 뭐? 영장류? 이게 언제 봤다고 막말이야! 생긴 것도 바바리안 같은 게 주둥이로 힐윈드 돌고 자빠졌네! 나야 말로 흥이다! 이후 난 세 번이나 가발을 바꿔 써가며 미팅에 나온 폭탄녀 역할을 했다. 가장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건 스티커 사진 찍을 때 쓰는 반짝반짝 빛나는 빨간 단발머리 가발.... 민아 - 수고했어요. 이제 잠깐 쉬어요. 폭탄녀 역할을 모두 마치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제 한동안 허씨와 김씨의 대화가 이어지고 그 다음부터는 나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김씨 - 내라꼬 영장류 데리고 일루 오고 싶겠나~!! 내도... 촌에서 왔다꼬 무시 받고.... 가스나들한테 외면 받고.. 그래 산단 말이다~! 팔꿈치로 허씨의 등을 미친 듯이 찍어대며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김씨. 한참을 그 서러운 기분에 몰입하던 중 김씨의 감정 리미트가 끊어지고 말았다. 김씨 - 으아아아~!!! 파트랏~~쓔!!!! ............ 기어코 일을 내는 구나. 짧은 시간. 절대적인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세계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김씨의 표정에 한 줄기 눈물이 반짝인 듯 했다. 김씨 - 파트랏....슈... ‘뭔 소리래?’ 라고 할만도 했지만 무대 위를 가득 채운 범접할 수 없는 포스에 사람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허씨 - 고마... 내가 미안타. 글타꼬 지금 시골 생각하면 우야노. 걱정 말그라. 파트라슈도 잘 있을끼다. 설마 니 없다고 잡아 묵기야 했겠나.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허씨의 재치 있는 대응 덕분에 김씨의 절규는 고향 생각 정도로 마무리 되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골에 있는 개 이름인가봐.’ 라고 숙덕거렸다. ..... 다행이다. 곧 허씨의 독백장면이 이어지면서 김씨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곧 있으면 내 차례가 온다.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겠지?? 점점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엔 정말 실수하면 안 되는데.... 난 손이 저릿하고 뻑뻑해지는 느낌에 손목을 주물렀다. 내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걸까. 이런 적 거의 없었는데... 민아 - 자, 이제 나가요. 기억 - 예? 벌써요?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이미 허씨의 무대는 끝난 후였다. 황급히 무대 위로 올라섰을 때 폭탄녀 역할의 여파로 엄청난 환성이 터졌다. 갑작스러운 환성에 움찔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대사가 뭐더라? 뭐부터 시작을 해야 하지? 분위기가 가라앉은 다음에도 난 멍하니 무대 위에 서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난잡한 생각들만 빙빙 맴돌고 있을 뿐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 말이건 해야 해.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해!! 지금..... 떠오르는 한 마디는..... 기억 - ...... 세상에서 돈이 제일이야~!!! 그 순간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한동안 메아리가 귓가에 징징 울렸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분위기. 분위기만큼이나 고요해진 머릿속에 잊었던 대사들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기억 - 친구, 여자, 술, 담배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돈! 돈이 힘이고, 돈이 진리야! 돈 없으면 연애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한다고! 그래, 지금은 나를 비웃지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독립을 성취하겠어! 왠지 조금 흥겨운 기분이 들었다. Groove.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파도처럼 내 마음을 휩쓸고 다녔다. 기억 - 우선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본을 모으는 거야. 그 다음 주식에 투자해서 몸집을 불리고 성공하면 재건축 될 아파트에 투자해야지. 그 다음은 당연히 재테크! 아파트를 담보로 땅을 사는 거야. 저기 어디 충청도 한 적한 곳에 왕~창. 혹시 누가 알아? 대한민국 수도가 그리 옮겨갈지? 이렇게 신이 나서 말해본 적이 있을까?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오는 대사들. 후끈 달아오른 관객들. ‘기가 차다 +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군.’ 이라는 표정의 교수님. 귓가에 들리는 빠른 템포의 음악만큼이나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소리는 음악보다 더 경쾌했다. 이윽고 각종 아르바이트로 청춘을 불태우는 장면이 지나 여름방학 돌입 장면. 난 무대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딩~ 디링~ 디딩~ 딩....빠바밤!’ 애절하게 흘러나오는 베토벤 8번 교향곡 비창의 일부. 난 음악에 맞춰 경련하듯 몸을 뒤척이며 숨 넘어 갈 듯한 목소리로 대사를 해댔다. 기억 - 8시에 출근인데~. 그 전까지 할 짓이 없어~. 드어어~ 컴퓨터 게임도 이젠 지쳤어... 누가.... 누가 좀 놀아줘~!!! 외로워, 외로워, 외롭다고~!!! 하이힐에 꼬리 밟힌 지렁이처럼 몸을 비비틀어가며 절규를 해대는 동안 난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움츠릴수록 부끄럽다. 숨으려 할수록 환한 곳에 있는 것 같고 피하려 할수록 시선은 가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기억 - 나도 이제~ 청!춘 사업에 투자할 거야~!! 연극은 순식간에 결말을 향해 질주하여 공대찌꺼기의 결성에 다다랐다. 김씨 - 이리하여, 세 남자는 같은 목표 아래 뭉쳤다. 김씨의 해설과 동시에 무대 위로 올라온 공대생 패밀리. 후레쉬맨 같은 데서나 볼 법한 화려한 포즈로 무게를 잡고 있던 세 사람은 이윽고 격렬하고 화려하게 절망하기 시작했다. 허씨 - 그런데 조에 여자가 없어~!! 김씨 - 이런 파트라슈~!! 기억 - 나 이거 드롭하면 두 과목 밖에 안 남아~!! 품속에서 폭탄녀 가발을 꺼내 쓰고 헤드배잉을 해대는 나의 뒤로 김씨와 허씨가 드롭킥을 해대며 날뛰었다. 김씨 - 우리 조의 이름은! 허씨 - 공대... 기억 - 찌꺼기. ‘파밤~!!’ 엄청난 호응 속에서 우리는 동시에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민아의 독무대. 종이 한 장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무대 위를 누비는 그녀. 이윽고 원하던 것을 찾은 듯,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민아 - 음..... 그러니까 강의실이 여기구나. 어라? 문에 뭐가 붙어있네? 아래 수업 강의실은 체육관으로 이동 되었습니다? 체육관이면..... 에엑? 여기서 15분은 걸리잖아?! 이런 게 어디 있어~!! 서둘러 뛰어나가듯 무대에서 사라졌던 그녀가 잠시 후 지친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 올라섰다. 민아 - 헤엑...헤엑.... 아이고 힘들어. 이 거리를 매일 왕복해야 한단 말이야? 그나저나 다음 강의실은 어디야? 어디보자.... 이 건물 5층이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없잖아~!! 이렇다 할 동작도, 특이한 억양도 없었지만 그녀의 연기는 생동감이 넘쳤다. 무대 위의 그녀가 아니라 실제 그 순간의 그녀를 보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연습 때도 종종 느꼈던 것이지만 그녀는 아름답다. 빨주노초파남보 같은 색으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천연색의 파도 같은 아름다움. 한 순간,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빛깔을 바꿔가는 그녀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민아 - 아유 힘들어... 엄마야... 다리에 알 생긴 거 봐. 누가 보면 육상 선순 줄 알겠다. 다음 학기엔 꼭!! 전~부 가까운 데로 할 거야! 무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씨가 해설을 맡아 상황을 넘겼다. 김씨 - 하지만 학기가 시작되는 첫 날. 백설 공주는 독이든 사과를 먹고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드르렁~!! 푸우~!! 드르렁~~!! 푸우~!! 무대 위에 누워서 김씨의 해설에 맞춰 과장되게 코를 고는 시늉을 하는 그녀. 얌전하고 귀엽게만 보이는 그녀가 이런 장면을 서슴없이 해낸 다는 게 나로선 놀랍기만 했다. 김씨 - 쿠아아아~!! 글쩍글쩍..... 뒹굴.... 피유우우.... 하지만 해설에 재미를 느껴버린 김씨는 온갖 형용사를 넣어가며 그녀를 괴롭혔다. 눈을 감고 있지만 난색이 역력한 민아의 표정. 꿋꿋하게 엉덩이를 긁적여가며 김씨의 지시를 따르는 그녀의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애처로웠다. 김씨 - 그렇게 곤히 잠든 백설공주는 첫 수업부터 지각을 하고 맙니다. 민아 - 엄마야~!! 늦었다~!! 김씨 - 그리고 다시. 강의실. 민아가 무대에서 뛰어 내려오고 공돌이 부대가 나란히 등장했다. 기억 - 좋아, 아직 기회가 있어. 허씨 - 다섯 명인 조에서 여자를 한 명 빼내오는 거야! 김씨 - 아까 보니까 5조에 예쁜 애가 있던 데? 허씨 - 어디 어디? 여자가 한 명 뿐이었던 5조에서 ‘야~ 너 예쁘데~!’ ‘너 빨리 저리로 가라.’ 같은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이정도 반응은 이미 예견되었던 일. 김씨 - 아, 지금 보니까 아니다. 미안하다. 허씨 - 이게 확! 큰일 날 뻔 했잖아!! 그 사이, 무대에서 내려선 그녀는 강의실 앞문으로 나간 뒤 잠시 후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교수 - 저기 늦게 들어오신 분! 민아 - 네?! 교수님은 연극 시작 전에 부탁드린 데로 무대로 올라와 대사를 해주셨다. 교수 - 이 강좌에 친구 있나요? 민아 - 아...없는데요. 교수 - 여기 이 분들이랑 한 조 하세요. 민아 - 아 예. 그녀가 예전 모습 그대로 우리의 옆에 와서 선 순간 헨델의 할렐루야 합창이 감동적으로 울려 퍼졌다. 얼싸 안고 감격에 젖는 공대생 부대. 잠시간의 축제 분위기가 진정되자 교수님의 마지막 대사가 이어졌다. 교수 - 이로써, 공대 찌꺼기 조가 완성되었습니다. 민아 - 네~에?! 모든 것은 예전과 똑같았다. 단지 다른 점은 그날 보다 더 크고 즐거운 환호성이 강의실이 떠나가도록 들려왔다는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는 길. 민아 - 아~ 정말 아슬아슬 했어요~! 허씨 - 다~ 이 놈 때문이야. 파트라슈는 무슨... 김씨 - 에휴..... 내가 눈에 뭐가 씌었었나봐. 민아 - 쿡쿡...... ‘그래도 역시 돈이 제일이야~!!’ 허씨 - 아!! 맞다!! 그게 제일 쇼킹했다. 순간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김씨나 허씨는 몰라도... 그녀 입에서 그 대사가 나오다니. 이런 망신이 어디 있을까. 민아 - 여러분, 연극부 들어와요. 정~말 신날 것 같아요. 김씨 - 아핫핫. 전 됐어요. 나름대로 재밌긴 했지만. 허씨 - 저도 여기까지요. 그녀의 시선이 김씨와 허씨를 지나 나에게 머물렀다. 난 머쓱하게 한 쪽 손으로 뺨을 가리며 고개를 피했다. 말해볼까? 연극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그럼... 그녀와 더 친해질 수 있을까? 민아 - 아쉽네요. 진짜 신났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버렸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기억 - 저 들어가겠습니다! 민아 - 네~ 먼저 들어가세요.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닌데.... 하지만 난 어느새 눈물을 휘날리며 붉은 석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런 파트라슈~!!!!!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6화> 연극 종료
곧 있으면 방학입니다.
지난 겨울에 짰던 시간표를 붙여놓고 대책없이 놀아봅시다.
......다만 여기서 기억할 점은
재수 학원 방학은 일주일이고
대학교 방학은 일년 중 4개월이 넘는다는 겁니다.
======================== 어쩌라는 거냐 ========================
‘Nuclear lunch detected.'
허씨
- 너....넌 지난번에 그 영장류!!
머리 잘랐다고 내가 못 알아볼 것 같으냐!!
기억
- 뭐? 영장류? 이게 언제 봤다고 막말이야!
생긴 것도 바바리안 같은 게
주둥이로 힐윈드 돌고 자빠졌네!
나야 말로 흥이다!
이후 난 세 번이나 가발을 바꿔 써가며
미팅에 나온 폭탄녀 역할을 했다.
가장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건
스티커 사진 찍을 때 쓰는
반짝반짝 빛나는 빨간 단발머리 가발....
민아 - 수고했어요. 이제 잠깐 쉬어요.
폭탄녀 역할을 모두 마치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을 때
그녀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제 한동안 허씨와 김씨의 대화가 이어지고
그 다음부터는 나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김씨
- 내라꼬 영장류 데리고 일루 오고 싶겠나~!!
내도... 촌에서 왔다꼬 무시 받고....
가스나들한테 외면 받고.. 그래 산단 말이다~!
팔꿈치로 허씨의 등을 미친 듯이 찍어대며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김씨.
한참을 그 서러운 기분에 몰입하던 중
김씨의 감정 리미트가 끊어지고 말았다.
김씨 - 으아아아~!!! 파트랏~~쓔!!!!
............
기어코 일을 내는 구나.
짧은 시간. 절대적인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세계에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김씨의 표정에
한 줄기 눈물이 반짝인 듯 했다.
김씨 - 파트랏....슈...
‘뭔 소리래?’ 라고 할만도 했지만
무대 위를 가득 채운 범접할 수 없는 포스에
사람들은 침묵할 뿐이었다.
허씨
- 고마... 내가 미안타.
글타꼬 지금 시골 생각하면 우야노.
걱정 말그라. 파트라슈도 잘 있을끼다.
설마 니 없다고 잡아 묵기야 했겠나.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허씨의 재치 있는 대응 덕분에
김씨의 절규는 고향 생각 정도로 마무리 되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골에 있는 개 이름인가봐.’ 라고 숙덕거렸다.
..... 다행이다.
곧 허씨의 독백장면이 이어지면서
김씨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곧 있으면 내 차례가 온다.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겠지??
점점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엔 정말 실수하면 안 되는데....
난 손이 저릿하고 뻑뻑해지는 느낌에 손목을 주물렀다.
내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걸까.
이런 적 거의 없었는데...
민아 - 자, 이제 나가요.
기억 - 예? 벌써요?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이미 허씨의 무대는 끝난 후였다.
황급히 무대 위로 올라섰을 때
폭탄녀 역할의 여파로 엄청난 환성이 터졌다.
갑작스러운 환성에 움찔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대사가 뭐더라?
뭐부터 시작을 해야 하지?
분위기가 가라앉은 다음에도
난 멍하니 무대 위에 서있을 뿐이었다.
머릿속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난잡한 생각들만
빙빙 맴돌고 있을 뿐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아무 말이건 해야 해.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해!!
지금..... 떠오르는 한 마디는.....
기억 - ...... 세상에서 돈이 제일이야~!!!
그 순간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한동안 메아리가 귓가에 징징 울렸다.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분위기.
분위기만큼이나 고요해진 머릿속에
잊었던 대사들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기억
- 친구, 여자, 술, 담배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돈! 돈이 힘이고, 돈이 진리야!
돈 없으면 연애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한다고!
그래, 지금은 나를 비웃지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독립을 성취하겠어!
왠지 조금 흥겨운 기분이 들었다.
Groove.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파도처럼
내 마음을 휩쓸고 다녔다.
기억
- 우선 아르바이트를 해서 자본을 모으는 거야.
그 다음 주식에 투자해서 몸집을 불리고
성공하면 재건축 될 아파트에 투자해야지.
그 다음은 당연히 재테크!
아파트를 담보로 땅을 사는 거야.
저기 어디 충청도 한 적한 곳에 왕~창.
혹시 누가 알아? 대한민국 수도가 그리 옮겨갈지?
이렇게 신이 나서 말해본 적이 있을까?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오는 대사들.
후끈 달아오른 관객들.
‘기가 차다 +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군.’ 이라는 표정의 교수님.
귓가에 들리는 빠른 템포의 음악만큼이나
세차게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소리는
음악보다 더 경쾌했다.
이윽고 각종 아르바이트로 청춘을 불태우는 장면이 지나
여름방학 돌입 장면.
난 무대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딩~ 디링~ 디딩~ 딩....빠바밤!’
애절하게 흘러나오는 베토벤 8번 교향곡 비창의 일부.
난 음악에 맞춰 경련하듯 몸을 뒤척이며
숨 넘어 갈 듯한 목소리로 대사를 해댔다.
기억
- 8시에 출근인데~. 그 전까지 할 짓이 없어~.
드어어~ 컴퓨터 게임도 이젠 지쳤어...
누가.... 누가 좀 놀아줘~!!!
외로워, 외로워, 외롭다고~!!!
하이힐에 꼬리 밟힌 지렁이처럼
몸을 비비틀어가며 절규를 해대는 동안
난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움츠릴수록 부끄럽다.
숨으려 할수록 환한 곳에 있는 것 같고
피하려 할수록 시선은 가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기억 - 나도 이제~ 청!춘 사업에 투자할 거야~!!
연극은 순식간에 결말을 향해 질주하여
공대찌꺼기의 결성에 다다랐다.
김씨 - 이리하여, 세 남자는 같은 목표 아래 뭉쳤다.
김씨의 해설과 동시에 무대 위로 올라온 공대생 패밀리.
후레쉬맨 같은 데서나 볼 법한
화려한 포즈로 무게를 잡고 있던 세 사람은
이윽고 격렬하고 화려하게 절망하기 시작했다.
허씨 - 그런데 조에 여자가 없어~!!
김씨 - 이런 파트라슈~!!
기억 - 나 이거 드롭하면 두 과목 밖에 안 남아~!!
품속에서 폭탄녀 가발을 꺼내 쓰고
헤드배잉을 해대는 나의 뒤로
김씨와 허씨가 드롭킥을 해대며 날뛰었다.
김씨 - 우리 조의 이름은!
허씨 - 공대...
기억 - 찌꺼기.
‘파밤~!!’
엄청난 호응 속에서
우리는 동시에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민아의 독무대.
종이 한 장을 들고
두리번거리며 무대 위를 누비는 그녀.
이윽고 원하던 것을 찾은 듯,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민아
- 음..... 그러니까 강의실이 여기구나.
어라? 문에 뭐가 붙어있네?
아래 수업 강의실은 체육관으로 이동 되었습니다?
체육관이면..... 에엑? 여기서 15분은 걸리잖아?!
이런 게 어디 있어~!!
서둘러 뛰어나가듯 무대에서 사라졌던 그녀가
잠시 후 지친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 올라섰다.
민아
- 헤엑...헤엑.... 아이고 힘들어.
이 거리를 매일 왕복해야 한단 말이야?
그나저나 다음 강의실은 어디야?
어디보자.... 이 건물 5층이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없잖아~!!
이렇다 할 동작도, 특이한 억양도 없었지만
그녀의 연기는 생동감이 넘쳤다.
무대 위의 그녀가 아니라
실제 그 순간의 그녀를 보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연습 때도 종종 느꼈던 것이지만
그녀는 아름답다.
빨주노초파남보 같은 색으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천연색의 파도 같은 아름다움.
한 순간,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빛깔을 바꿔가는 그녀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민아
- 아유 힘들어... 엄마야... 다리에 알 생긴 거 봐.
누가 보면 육상 선순 줄 알겠다.
다음 학기엔 꼭!! 전~부 가까운 데로 할 거야!
무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씨가
해설을 맡아 상황을 넘겼다.
김씨
- 하지만 학기가 시작되는 첫 날.
백설 공주는 독이든 사과를 먹고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드르렁~!! 푸우~!! 드르렁~~!! 푸우~!!
무대 위에 누워서 김씨의 해설에 맞춰
과장되게 코를 고는 시늉을 하는 그녀.
얌전하고 귀엽게만 보이는 그녀가
이런 장면을 서슴없이 해낸 다는 게 나로선 놀랍기만 했다.
김씨 - 쿠아아아~!! 글쩍글쩍..... 뒹굴.... 피유우우....
하지만 해설에 재미를 느껴버린 김씨는
온갖 형용사를 넣어가며 그녀를 괴롭혔다.
눈을 감고 있지만 난색이 역력한 민아의 표정.
꿋꿋하게 엉덩이를 긁적여가며
김씨의 지시를 따르는 그녀의 모습은
코믹하면서도 애처로웠다.
김씨
- 그렇게 곤히 잠든 백설공주는
첫 수업부터 지각을 하고 맙니다.
민아 - 엄마야~!! 늦었다~!!
김씨 - 그리고 다시. 강의실.
민아가 무대에서 뛰어 내려오고
공돌이 부대가 나란히 등장했다.
기억 - 좋아, 아직 기회가 있어.
허씨 - 다섯 명인 조에서 여자를 한 명 빼내오는 거야!
김씨 - 아까 보니까 5조에 예쁜 애가 있던 데?
허씨 - 어디 어디?
여자가 한 명 뿐이었던 5조에서
‘야~ 너 예쁘데~!’ ‘너 빨리 저리로 가라.’
같은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이정도 반응은 이미 예견되었던 일.
김씨 - 아, 지금 보니까 아니다. 미안하다.
허씨 - 이게 확! 큰일 날 뻔 했잖아!!
그 사이, 무대에서 내려선 그녀는
강의실 앞문으로 나간 뒤
잠시 후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교수 - 저기 늦게 들어오신 분!
민아 - 네?!
교수님은 연극 시작 전에 부탁드린 데로
무대로 올라와 대사를 해주셨다.
교수 - 이 강좌에 친구 있나요?
민아 - 아...없는데요.
교수 - 여기 이 분들이랑 한 조 하세요.
민아 - 아 예.
그녀가 예전 모습 그대로
우리의 옆에 와서 선 순간
헨델의 할렐루야 합창이 감동적으로 울려 퍼졌다.
얼싸 안고 감격에 젖는 공대생 부대.
잠시간의 축제 분위기가 진정되자 교수님의 마지막 대사가 이어졌다.
교수 - 이로써, 공대 찌꺼기 조가 완성되었습니다.
민아 - 네~에?!
모든 것은 예전과 똑같았다.
단지 다른 점은
그날 보다 더 크고 즐거운 환호성이
강의실이 떠나가도록 들려왔다는 것이다.
연극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서는 길.
민아 - 아~ 정말 아슬아슬 했어요~!
허씨 - 다~ 이 놈 때문이야. 파트라슈는 무슨...
김씨 - 에휴..... 내가 눈에 뭐가 씌었었나봐.
민아 - 쿡쿡...... ‘그래도 역시 돈이 제일이야~!!’
허씨 - 아!! 맞다!! 그게 제일 쇼킹했다.
순간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김씨나 허씨는 몰라도...
그녀 입에서 그 대사가 나오다니.
이런 망신이 어디 있을까.
민아 - 여러분, 연극부 들어와요. 정~말 신날 것 같아요.
김씨 - 아핫핫. 전 됐어요. 나름대로 재밌긴 했지만.
허씨 - 저도 여기까지요.
그녀의 시선이 김씨와 허씨를 지나
나에게 머물렀다.
난 머쓱하게 한 쪽 손으로 뺨을 가리며 고개를 피했다.
말해볼까? 연극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그럼... 그녀와 더 친해질 수 있을까?
민아 - 아쉽네요. 진짜 신났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버렸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기억 - 저 들어가겠습니다!
민아 - 네~ 먼저 들어가세요.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닌데....
하지만 난 어느새 눈물을 휘날리며
붉은 석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런 파트라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