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의 이번 영화는 대성공이었다. 나이는 24살이었지만 데뷔 8년차인 그녀의 이미지를 식상하다고 여길 거라는 몇몇 사람들의 기우는 그야말로 기우라는 것을 증명해 냈다. 노출 수위가 높아 신경을 많이 썼던 리진도 연기력에 좋은 평가를 하는 평론덕에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영화 상영을 시작한지 2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예매율은 여전히 높았고 당분간은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녀 주변에 늘 왁자지껄한 분위기, 팬레터와 응원 메시지가 넘쳐났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다. 준기와의 이별 6달 후, 이젠 밤마다 울면서 잠에 드는 일도 없었다. 그의 자리는 이제 독한 술이 대신하고 있었다.
스카치위스키를 따른 잔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잔에 담긴 얼음이 자신의 심장과 같다고 생각하며 리진은 술을 들이켰다. 마치 자신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처럼 여겨졌다.
“너 자꾸 술 마시면 늙어!”
리진을 돌봐 주고 있는 친언니 미영이 술잔을 뺏었다.
“내가 늙어? 난 안 늙어. 난 언제나 그대로였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안 늙었다고! 앞으로도 늙지 않아, 리진은! 10년이 지나도 늙지 않을 거야.”
“나무에 매년 꽃이 피지만 그게 같은 꽃이든? 너보다 젊은 애들이 치고 올라와. 네 자리를 꿰어 찰 애들. 너 자신 말고 그 애들이랑 경쟁할 생각을 해. 오늘부터 금주야!”
“언니!”
“······.”
“나 슬퍼! 슬퍼, 너무 슬퍼. 슬픔이 이렇게 무거운 건 줄 몰랐어. 아무 무게도 없는 게 내 마음을 짓눌러.”
“슬플 게 뭐 있어? 세상에 널 원하는 남자는 얼마든지 있어. 남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정신 못 차릴 거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얼마나 무거운지 다리가 휘청거려. 일어날 땐 살이 짓이겨지는 것 같아. 그래도 억지로 웃고 다니다 돌아오면 마음은 너덜너덜 다 상해 있어.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이 아픔 치료할 수가 없다고.”
‘리진아.’
눈물범벅이 되어 술병에 손을 뻗치는 동생이 안쓰러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마음을 약하게 먹을 순 없었다.
“언니가 금주라고 말했잖아! 안돼! 괴로워도 견뎌! 아프면 그냥 아파. 남자대신 술에 의지해 보겠다? 술도 널 배신할 거야. 당장 위로가 되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결국은 너 얼굴 몸매 다 망쳐버려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만들 거란 말이야. 술이든 뭐든 기댈 생각 하지 마. 아무 것도 이의지해선 안돼. 오직 너만 의지해!”
“언니, 오늘만. 오늘만 허락해 줘!”
“시끄러!”
미영은 술병을 싱크대에 던져 버렸다. 견고해 보이던 투명한 유리병은 산산조각 났고 파편은 리진의 발등에 박혔다. 유리조각은 리진의 피와 술에 섞여 마치 보석처럼 보였다.
“가만히 있어. 언니가 치울게.”
그제서야 리진도 조용해 졌다. 미영은 리진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거실로 나와 요가 비디오를 틀었다. 두 팔을 하늘로 향해 뻗었을 때 몸이 절실히 휴식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구슬땀이 매트를 적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동생이 약할수록 내가 강하져야 해. 난 그 애의 보호자니까. 그러나 10분도 못가서 털썩 자리에 누워 버리고 말았다.
리진 집의 부엌은 뷔페요리를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크기만 컸지 휑했던 부엌 곳곳에 미영의 손길이 닿은 후부터였다. 요리학원에 등록한 것은 리진의 균형 있는 식사를 위해서였지만 요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재미있었다. 싱크대 주변엔 전문 요리사들이 쓸 법한 조리기구들 즐비했고 아기자기한 소품도 많았다. 부엌만큼은 늘 평화로운 곳이었다.
야심한 시각. 리진을 위한 야참을 준비되고 있었다. 볶음 야채와 소고기를 밥과 함께 김에 말아 자른 후 코울슬로 드레싱을 얹고 날치 알을 얹었다. 상큼한 오이와 레몬즙은 늦게 귀가한 리진의 피로를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관객 200만 축하!”
“밤에 번거롭게 이런 걸 다 해. 아, 너무 맛있겠어!”
“관객 300만 되면 친구들 불러서 파티하자. 간단하게 저녁 먹는 모임.”
“고마워, 언니.”
“먹어 봐. 어때? 밤이라 너무 달지 않게 했는데.”
음식을 먹는 리진은 행복해 보였다. 늘 네 곁엔 웃음만 있었으면. 미영은 리진의 언니이기 이전에 팬이었고 후원자였다. 그러나 야참을 끝내기도 전에 리진의 전화가 울려댔다.
“어딜 나간다는 거야?”
“급한 미팅이래.”
“12시가 넘어서? 야밤에 사람을 왜 불러낸대? 내일 가면 안 되는 거야?”
“스폰서 미팅이야.”
순간 미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차라리 내가 대신 갈 수 있다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리진이 나간 후에 미영은 숨겨 놓았던 술병을 열었다. 그리고 불쌍한 자신의 동생을 위해 홀로 건배를 했다.
리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문을 열면 지긋지긋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애를쓰며 문을 열었다. 리진은 스폰서 미팅을 극구 거부했었다. 사랑하는 준기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면서라도 스폰서 미팅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문을 통과해야 했다. 스폰서 미팅이란 대기업 총수의 자제나 정치권의 거물들 한마디로 높은 분들을 후원자로 삼아 때때로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리진의 뒤를 봐주고 리진은 웃음을 판다. 그것이 그들의 거래였다.
제일 늦었는지 리진 후원자의 옆 자리만 비워져 있었다. 요즘 그녀와 자주 비교되는 탤런트 민음정과 신인 탤런트들도 눈에 띄었다. 리진은 머리를 비웠다. 이 순간의 일은 기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은 조금만 할게요. 속이 매슥거려요.”
“리진이 임신이라도 한 거야?”
사람들은 깔깔거렸고 리진은 웃음을 보이며 밖으로 나왔다.
‘왜 이러지? 술도 얼마 안 마셨는데.’
입술에 감각도 없어진 것 같았다.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화장실에 들어섰을 때 한 여자가 담배를 피고 있었다. 나이는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아마도 여기서 일하는 여자겠지. 리진은 아픔을 참으며 그녀의 옆에서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그 곳에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들리고 곧 음정이 들어왔다.
“술집에 왔으면 술집년들이나 끼고 놀 것이지. 밤늦게 왜 불러내? 아씨, 나 내일 촬영 있는데.”
리진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음정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는지 괜스레 옆 여자에게 큰소리를 쳤다.
“뭘 꼬나봐? 너 연예인 처음 보냐? 담배나 있음 하나 내놔 봐.”
여자는 담배와 라이터를 음정에게 건네고 사라졌다.
“두 까치 받았는데, 줄까?”
리진은 고개를 저었다.
“좋은 후원자 만났다고 나 같은 건 대꾸도 안 해주는구나. 하긴 대단한 후원자지. 내 후원자는 완전 후져서 섭외 더 들어오는 것도 없이 이리저리 끌고만 댕기니. 아씨.”
“여러 명 상대하는 것보다 그래도 한명만 상대하면 되니 편하지 않아?”
“리진이 별 말을 다하네. 너 새파란 이감독 때문에 미팅 안하다고 끝내 튕겼다면서? 마음정리 완전히 한 거야?”
“그냥 그런 거지.”
“나 완전 감동했었는데. 이 바닥에도 사랑이 진짜 있기는 있구나 했었지.”
음정은 진짜 감동한 눈빛으로 리진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몰래 만나?”
“끝났어.”
“아깝다. 그런 남자가 또 있겠어? 직업이 별루긴 하지만 자기 여자 감싼다고 물러서는 남자. 멋진 순애보다, 야! 난 그런 놈 안 걸리나?”
“감싸다니?”
“얘가 왜 이래? 왜 잡아먹을 듯 쳐다봐.”
“감싸다니 무슨 말이야?”
“너 에이양 꼴 날 뻔했다면서? 기획사에서 이감독한테 손 안떼면 에이양 만들어 버린다고 협박했다고 하던데.”
에이양이라면 얼마 전 인터넷에 나체 사진이 돌아 모든 활동을 접고 외국으로 숨어 버린 여배우였다.
“네 몸뚱이에만 관심 있는 놈이었으면 그런 협박에 물러났겠니? 네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었겠지. 아무튼 완전 감동이라니까.”
“기획사에서 이 감독한테 협박을?”
리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술집을 나왔다. 택시는 쉽게 잡혔다. 그의 집으로 향하면서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끝내 받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보냈다. 심장이 떨리고 눈물이 흘러 액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바보. 난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 우린 사랑하는 사이였잖아. 그럼 비밀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한테 말을 해야 했다고.’
자신이 버려진 여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그에 대한 감정의 폭발. 리진은 흐르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으로 우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 그와 만나면 앞으로는 울 일은 없을 테니까.
청담동에서 그의 집 일산까지는 먼 거리였다. 조바심이 나는 걸 억지로 참으며 그를 보면 먼저 웃어 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파트 근처에서 내린 리진은 웃을 수 없었다. 기획사의 검은 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리진의 목소리는 곧 흩어져 버렸고 그녀는 검은 차에 실려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어졌다.
“우리도 좀 살자. 너한테 딸린 식구가 몇인 줄 알아?”
“······.”
“네가 이럴 때마다 밥줄 끊기는 놈이 몇인 줄 아냐고. 넌 이젠 이름만으로도 웬만한 중소기업 맘먹어. 사장님이라고. 정신 좀 차려.”
“터트려 버리겠어. 기획사가 한 일 모두 언론사에 발표할 거야.”
“끝장 내고 싶다는 거지. 넌 평범하지 않아. 평범함을 포기 해. 몇 년 있으면 너 같은 거 거들떠 안 보게 될 거야. 그 때 멍청하고 평범한 놈 끼고 살면서 평범함 지긋지긋하게 누려봐. 아마도 옛날이 좋았지, 하면서 또 기어 나오겠지만.”
갑자기 그녀의 핸드폰이 울어댔다. 준기였다. 리진은 전화를 받으려 했지만 재면이 잽싸게 핸드폰을 뺏어 버렸다.
“미련이 남아?”
그는 배터리를 빼 창문을 열고는 도로에 집어 던졌다. 이젠 무용지물인 핸드폰은 리진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잠시 후 차는 생전 처음 보는 곳에 멈춰섰다.
“여기가 어디야? 나 집에 갈래.”
“우리도 잠 좀 자자. 너 집에 넣어 주면 또 도망갈 거 아니야.”
재면이 리진을 밀어넣은 곳은 화물창고 같았다. 습한 곰팡이 나는 좁은 곳에 종이박스만 가득했다. 문이 닫히자 종이박스마저 보이지 않았다. 리진은 지친 듯 자리에 앉았다. 콘크리트의 차가운 냉기가 10월의 낮은 기온과 섞여 리진의 몸을 서서히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동생이 귀가하지 않아 밤새 걱정을 하던 미영이 리진을 데러가라고 전화를 받은 건 오전 10시께였다. 그녀는 급히 차를 몰아 설명을 들은 곳으로 향했다.
“뭐예요! 창고에 가두어 뒀던 거예요?”
“아침 내내 꽥꽥거리다 금방 잠이 들었으니까 깨워서 데리고 가.”
해도해도 너무 해. 국민 배우로 외국에 가면 국빈 대우를 받는 리진이었다. 자신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창고에 가두어 버리다니. 미영도 이번만큼은 리진에게 참으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참에 기획사를 옮겨 버리겠어. 리진 정도면 위약금을 물어줄 기획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창고의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 들어갔다. 한낮인데도 햇빛이 들지 않는 작은 창고였다.
인디언 인형 - 02. 버려지지 않은 여자
인디언 인형
indian doll - 나는 죽었다. 그리고 부활했다.
Indian doll
인디언 인형 - 02. 버려지지 않은 여자
리진의 이번 영화는 대성공이었다. 나이는 24살이었지만 데뷔 8년차인 그녀의 이미지를 식상하다고 여길 거라는 몇몇 사람들의 기우는 그야말로 기우라는 것을 증명해 냈다. 노출 수위가 높아 신경을 많이 썼던 리진도 연기력에 좋은 평가를 하는 평론덕에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영화 상영을 시작한지 2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예매율은 여전히 높았고 당분간은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녀 주변에 늘 왁자지껄한 분위기, 팬레터와 응원 메시지가 넘쳐났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다. 준기와의 이별 6달 후, 이젠 밤마다 울면서 잠에 드는 일도 없었다. 그의 자리는 이제 독한 술이 대신하고 있었다.
스카치위스키를 따른 잔이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잔에 담긴 얼음이 자신의 심장과 같다고 생각하며 리진은 술을 들이켰다. 마치 자신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처럼 여겨졌다.
“너 자꾸 술 마시면 늙어!”
리진을 돌봐 주고 있는 친언니 미영이 술잔을 뺏었다.
“내가 늙어? 난 안 늙어. 난 언제나 그대로였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안 늙었다고! 앞으로도 늙지 않아, 리진은! 10년이 지나도 늙지 않을 거야.”
“나무에 매년 꽃이 피지만 그게 같은 꽃이든? 너보다 젊은 애들이 치고 올라와. 네 자리를 꿰어 찰 애들. 너 자신 말고 그 애들이랑 경쟁할 생각을 해. 오늘부터 금주야!”
“언니!”
“······.”
“나 슬퍼! 슬퍼, 너무 슬퍼. 슬픔이 이렇게 무거운 건 줄 몰랐어. 아무 무게도 없는 게 내 마음을 짓눌러.”
“슬플 게 뭐 있어? 세상에 널 원하는 남자는 얼마든지 있어. 남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정신 못 차릴 거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얼마나 무거운지 다리가 휘청거려. 일어날 땐 살이 짓이겨지는 것 같아. 그래도 억지로 웃고 다니다 돌아오면 마음은 너덜너덜 다 상해 있어.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이 아픔 치료할 수가 없다고.”
‘리진아.’
눈물범벅이 되어 술병에 손을 뻗치는 동생이 안쓰러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마음을 약하게 먹을 순 없었다.
“언니가 금주라고 말했잖아! 안돼! 괴로워도 견뎌! 아프면 그냥 아파. 남자대신 술에 의지해 보겠다? 술도 널 배신할 거야. 당장 위로가 되는 것처럼 보이겠지. 그러나 결국은 너 얼굴 몸매 다 망쳐버려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만들 거란 말이야. 술이든 뭐든 기댈 생각 하지 마. 아무 것도 이의지해선 안돼. 오직 너만 의지해!”
“언니, 오늘만. 오늘만 허락해 줘!”
“시끄러!”
미영은 술병을 싱크대에 던져 버렸다. 견고해 보이던 투명한 유리병은 산산조각 났고 파편은 리진의 발등에 박혔다. 유리조각은 리진의 피와 술에 섞여 마치 보석처럼 보였다.
“가만히 있어. 언니가 치울게.”
그제서야 리진도 조용해 졌다. 미영은 리진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거실로 나와 요가 비디오를 틀었다. 두 팔을 하늘로 향해 뻗었을 때 몸이 절실히 휴식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구슬땀이 매트를 적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동생이 약할수록 내가 강하져야 해. 난 그 애의 보호자니까. 그러나 10분도 못가서 털썩 자리에 누워 버리고 말았다.
리진 집의 부엌은 뷔페요리를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크기만 컸지 휑했던 부엌 곳곳에 미영의 손길이 닿은 후부터였다. 요리학원에 등록한 것은 리진의 균형 있는 식사를 위해서였지만 요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재미있었다. 싱크대 주변엔 전문 요리사들이 쓸 법한 조리기구들 즐비했고 아기자기한 소품도 많았다. 부엌만큼은 늘 평화로운 곳이었다.
야심한 시각. 리진을 위한 야참을 준비되고 있었다. 볶음 야채와 소고기를 밥과 함께 김에 말아 자른 후 코울슬로 드레싱을 얹고 날치 알을 얹었다. 상큼한 오이와 레몬즙은 늦게 귀가한 리진의 피로를 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관객 200만 축하!”
“밤에 번거롭게 이런 걸 다 해. 아, 너무 맛있겠어!”
“관객 300만 되면 친구들 불러서 파티하자. 간단하게 저녁 먹는 모임.”
“고마워, 언니.”
“먹어 봐. 어때? 밤이라 너무 달지 않게 했는데.”
음식을 먹는 리진은 행복해 보였다. 늘 네 곁엔 웃음만 있었으면. 미영은 리진의 언니이기 이전에 팬이었고 후원자였다. 그러나 야참을 끝내기도 전에 리진의 전화가 울려댔다.
“어딜 나간다는 거야?”
“급한 미팅이래.”
“12시가 넘어서? 야밤에 사람을 왜 불러낸대? 내일 가면 안 되는 거야?”
“스폰서 미팅이야.”
순간 미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차라리 내가 대신 갈 수 있다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리진이 나간 후에 미영은 숨겨 놓았던 술병을 열었다. 그리고 불쌍한 자신의 동생을 위해 홀로 건배를 했다.
리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문을 열면 지긋지긋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애를쓰며 문을 열었다. 리진은 스폰서 미팅을 극구 거부했었다. 사랑하는 준기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면서라도 스폰서 미팅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문을 통과해야 했다. 스폰서 미팅이란 대기업 총수의 자제나 정치권의 거물들 한마디로 높은 분들을 후원자로 삼아 때때로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리진의 뒤를 봐주고 리진은 웃음을 판다. 그것이 그들의 거래였다.
제일 늦었는지 리진 후원자의 옆 자리만 비워져 있었다. 요즘 그녀와 자주 비교되는 탤런트 민음정과 신인 탤런트들도 눈에 띄었다. 리진은 머리를 비웠다. 이 순간의 일은 기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은 조금만 할게요. 속이 매슥거려요.”
“리진이 임신이라도 한 거야?”
사람들은 깔깔거렸고 리진은 웃음을 보이며 밖으로 나왔다.
‘왜 이러지? 술도 얼마 안 마셨는데.’
입술에 감각도 없어진 것 같았다.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화장실에 들어섰을 때 한 여자가 담배를 피고 있었다. 나이는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 보였다. 아마도 여기서 일하는 여자겠지. 리진은 아픔을 참으며 그녀의 옆에서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그 곳에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들리고 곧 음정이 들어왔다.
“술집에 왔으면 술집년들이나 끼고 놀 것이지. 밤늦게 왜 불러내? 아씨, 나 내일 촬영 있는데.”
리진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음정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는지 괜스레 옆 여자에게 큰소리를 쳤다.
“뭘 꼬나봐? 너 연예인 처음 보냐? 담배나 있음 하나 내놔 봐.”
여자는 담배와 라이터를 음정에게 건네고 사라졌다.
“두 까치 받았는데, 줄까?”
리진은 고개를 저었다.
“좋은 후원자 만났다고 나 같은 건 대꾸도 안 해주는구나. 하긴 대단한 후원자지. 내 후원자는 완전 후져서 섭외 더 들어오는 것도 없이 이리저리 끌고만 댕기니. 아씨.”
“여러 명 상대하는 것보다 그래도 한명만 상대하면 되니 편하지 않아?”
“리진이 별 말을 다하네. 너 새파란 이감독 때문에 미팅 안하다고 끝내 튕겼다면서? 마음정리 완전히 한 거야?”
“그냥 그런 거지.”
“나 완전 감동했었는데. 이 바닥에도 사랑이 진짜 있기는 있구나 했었지.”
음정은 진짜 감동한 눈빛으로 리진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몰래 만나?”
“끝났어.”
“아깝다. 그런 남자가 또 있겠어? 직업이 별루긴 하지만 자기 여자 감싼다고 물러서는 남자. 멋진 순애보다, 야! 난 그런 놈 안 걸리나?”
“감싸다니?”
“얘가 왜 이래? 왜 잡아먹을 듯 쳐다봐.”
“감싸다니 무슨 말이야?”
“너 에이양 꼴 날 뻔했다면서? 기획사에서 이감독한테 손 안떼면 에이양 만들어 버린다고 협박했다고 하던데.”
에이양이라면 얼마 전 인터넷에 나체 사진이 돌아 모든 활동을 접고 외국으로 숨어 버린 여배우였다.
“네 몸뚱이에만 관심 있는 놈이었으면 그런 협박에 물러났겠니? 네가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었겠지. 아무튼 완전 감동이라니까.”
“기획사에서 이 감독한테 협박을?”
리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술집을 나왔다. 택시는 쉽게 잡혔다. 그의 집으로 향하면서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끝내 받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보냈다. 심장이 떨리고 눈물이 흘러 액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바보. 난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는데. 우린 사랑하는 사이였잖아. 그럼 비밀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한테 말을 해야 했다고.’
자신이 버려진 여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그에 대한 감정의 폭발. 리진은 흐르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으로 우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 그와 만나면 앞으로는 울 일은 없을 테니까.
청담동에서 그의 집 일산까지는 먼 거리였다. 조바심이 나는 걸 억지로 참으며 그를 보면 먼저 웃어 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그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파트 근처에서 내린 리진은 웃을 수 없었다. 기획사의 검은 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리진의 목소리는 곧 흩어져 버렸고 그녀는 검은 차에 실려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멀어졌다.
“우리도 좀 살자. 너한테 딸린 식구가 몇인 줄 알아?”
“······.”
“네가 이럴 때마다 밥줄 끊기는 놈이 몇인 줄 아냐고. 넌 이젠 이름만으로도 웬만한 중소기업 맘먹어. 사장님이라고. 정신 좀 차려.”
“터트려 버리겠어. 기획사가 한 일 모두 언론사에 발표할 거야.”
“끝장 내고 싶다는 거지. 넌 평범하지 않아. 평범함을 포기 해. 몇 년 있으면 너 같은 거 거들떠 안 보게 될 거야. 그 때 멍청하고 평범한 놈 끼고 살면서 평범함 지긋지긋하게 누려봐. 아마도 옛날이 좋았지, 하면서 또 기어 나오겠지만.”
갑자기 그녀의 핸드폰이 울어댔다. 준기였다. 리진은 전화를 받으려 했지만 재면이 잽싸게 핸드폰을 뺏어 버렸다.
“미련이 남아?”
그는 배터리를 빼 창문을 열고는 도로에 집어 던졌다. 이젠 무용지물인 핸드폰은 리진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잠시 후 차는 생전 처음 보는 곳에 멈춰섰다.
“여기가 어디야? 나 집에 갈래.”
“우리도 잠 좀 자자. 너 집에 넣어 주면 또 도망갈 거 아니야.”
재면이 리진을 밀어넣은 곳은 화물창고 같았다. 습한 곰팡이 나는 좁은 곳에 종이박스만 가득했다. 문이 닫히자 종이박스마저 보이지 않았다. 리진은 지친 듯 자리에 앉았다. 콘크리트의 차가운 냉기가 10월의 낮은 기온과 섞여 리진의 몸을 서서히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동생이 귀가하지 않아 밤새 걱정을 하던 미영이 리진을 데러가라고 전화를 받은 건 오전 10시께였다. 그녀는 급히 차를 몰아 설명을 들은 곳으로 향했다.
“뭐예요! 창고에 가두어 뒀던 거예요?”
“아침 내내 꽥꽥거리다 금방 잠이 들었으니까 깨워서 데리고 가.”
해도해도 너무 해. 국민 배우로 외국에 가면 국빈 대우를 받는 리진이었다. 자신들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창고에 가두어 버리다니. 미영도 이번만큼은 리진에게 참으라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참에 기획사를 옮겨 버리겠어. 리진 정도면 위약금을 물어줄 기획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창고의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 들어갔다. 한낮인데도 햇빛이 들지 않는 작은 창고였다.
“리진아!”
재면의 귀에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진아, 왜 그래? 리진아! 아악!”
목소리는 곧 비명 소리로 바뀌었다. 그것은 마치 동물의 울부짖음과 같은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