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는 세상 <1>

녹차우유2005.07.15
조회342
정나인

" 아직까지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은 좋은 거지만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제자
리 걸음이라면 문제가 있는거지. 괜찮다. 괜찮다. 그리 흐르는데로 놔두기엔 이젠
내가 너무 나이를 먹어버렸잖아. 제대로 잡히지 않은 계획에 생각만 앞서는 모습은
27이라는 숫자에 어울리지 않아. 빠져나가고 싶어. 과거에만 허우적 대며 행동을
못 하는 나에게서 빠져나가고 싶어. 누구라도 좋으니 이런 날 제발 끌어내 줘.
이 지긋 지긋한 두통에서 날 벗어나게 해달라구!" 최희경

"나인아. 난 널 너무 사랑해. 네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 보일 정도로 네가 좋아. 네가 가진 모든 걸 난 사랑해. 그러니 제발 날 놓지마. 생이 끝날 때까지 날 놓으면 안돼. 꼭 날 잡고 있어줘. 날 배신하는 행위따윈 절대 안돼. 네가 날 배신하면 나 죽어버릴꺼야. 나 정말 확 죽어버릴꺼라구! 그러니까 부탁이야. 내 손 절대 놓지마. 끝까지 날 잡아줘. 언제나 처럼 날 안아 다독거려 달란 말이야." 1. 퇴근 30분전.

나인이 손을 들어 오른쪽 관자 놀이에 대고 조심스럽지만 조금은 힘을 주어 천천히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 나인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기 전까지 계속해서 마우스 왼쪽 버튼을 클릭하고 있던 오른손은 그 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한 것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듯이 연신 뚝뚝 소리를 냈지만 나인은 개의치 않고 더욱 더 힘을 주어 관자놀이를 문질어댈 뿐이었다.


몇번이더라? 22번?23번?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고 진료 환자 리스트에서 새로운 환자가 접수를 했는지 다시 새로고침 버튼으로 마우스를 갖다대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인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퇴근을 알리는 음악을 기다리며 새로고침을 누르기 시작한 것이 벌써 30여분이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동절기가 지나고 하절기에 접어들어 퇴근시간에 한시간이 연장된 후로는 재촉해도 가지 않는 시간에 병원에서 견디는 시간이 더욱더 힘들어졌다. 얼마 전까지는 간호과장 눈을 피해 몰래 몰래 책이라도 봤었지만 선물 받은 체게바라를 펼쳐 놓은지 20분만에 이제 막 오토바이 여행을 떠나려는 체를 마중하던 나인이 기습 라운딩을 한 간호과장에게 걸린 후로는 그 마저도 어렵게 되어 지금은 상황에 맞춰 생각나는 대로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나인의 유일한 시간 죽이는 방법이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연신 새로고침을 누르는 꼴이라니.

이런 모습을 경이는 보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거보세요. 제가 선생님 정신과 근무할 떄 불안 하다 했었잖아요. 선생님은 우리와는 다른 4차원 세계에 살기 때문에 그쪽에서 근무하면 지금보다 더 이상해질거라고. 선생님은 굳이 그쪽을 가지 않은 지금도 충분히 이상한데 말에요"


이상하긴 이녀석아. 내가 보기엔 네 녀석이 더 이상해.

생각을 떨쳐내려 관자놀이를 더욱 더 세게 문지르던 나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오전과는 달리 이제는 한산해진 복도사이로 텔레비젼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왔지만 평소처럼 나인은 환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소리를 죽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정도 소리면 아직은 진료실 안쪽에 계시는 과장님이 소리를 줄여달라 부탁 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퇴근을 불과 20분 앞두고 있는 시간이 아닌가.


"정말 이거 안 먹어도 된다니까는 그러네"

"엄마. 정말 왜이래 창피하게! 그냥 먹어. 얼마나 한다고"

"오메. 이것이 약값이 올메나 비싼디. 그럴 돈 있으면 니 옷이나 사입어 이것아"


텔레비전 소리와 함께 크게 들리는 다툼소리에 나인이 진료실 밖을 나오자 할머니 한분과 그 딸인 듯한 젊은 여자가 실랑이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에 꽂힌 카네이션을 보니 아마도 어버이날을 맞아 안 간다는 어머니를 억지로 모시고 온 모양이었다. 가서 아무것도 안하고 상담만 한다는 말로 설득을 해서 겨우겨우 병원에는 왔지만 약까지 지어간다는 말에 저렇게 안 먹는다 떼를 쓰는 거라고 나인은 생각한다.

그도 그럴것이 양약과는 틀려서 한약은 며칠분만 지어도 몇만원이 훌쩍 넘어간다.
나인도 어쩌다 한번씩 약 지어달라며 드러누워 앓는 소리를 내는 어머니때문에 약을 지으면 직원가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부담이 되었는데 환자들은 오죽할까.

실랑이 끝에 결국엔 딸이 항복을 한 모양이었다. 시종일관 웃음을 머금은 채 두사람의 실랑이를 쳐다보고 있던 간호사에게 딸이 다가가 고개를 젓는 걸로 보아 말이다.


"그렇게 하세요. 원하시면 그렇게 하셔야죠.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으면 좋은약도 독이 된답니다."


3년 선배인 정아에게 나인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정아가 곧 고개를 숙이며 답례를 하더니 조그만 입술을 열어 차분한 목소리를 대답을 한다.

겉으로는 저렇게 웃고 있지만 마음 속으로는 퇴근 시간이 되기 전에 두사람의 실랑이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터였다. 아마 퇴근시간전에 결론이 난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겠지.


"정나인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전인간호잊었나? 언제나 환자의 입장에서.."

"시끄러워요. 시끄러워요 교수님."


유난히 깐깐했던 실습 담당 교수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자 나인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금까지 실랑이를 벌이던 모녀는 1층으로 내려갔지만 상담을 하던 정아는 아직 복도에 서 있다가 나인이 내지르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나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퇴근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인은 몸을 돌려 진료실에 들어가 그때까지 활짝 열어두었던 진료실 문을 조용히 닫으며 꽉 조여두었던 머리핀을 풀어냈다.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 날이다.나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인에게 5월 8일은 어버이 날이기도 하지만 3년 전 죽은 희경의 기일이기도 했다.


"나인아. 나인아. 우리 나인아. 희경이가 없어졌어. 희경이가 영영 없어졌단 말이다"

벌써 3년.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쳐대던 희경의 어머니와의 통화가 벌써 3년이나 지나버린 것이다.


"잊고 있었지? 너 잊고 있었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뭐든지 잘 까먹는 나인에게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로 하얀팔을 나인의 목에 감고선 자신의 볼을 나인의 볼에 마구 부벼대던 희경이.


잊지 않았어. 잊을 수가 없잖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병원을 나서 평소처럼 지하철역이 아니라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나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탑탑한 공기가 나인의 목으로 흘러들어왔다. 흡사 모래가 공기를 통해 들어온 듯 머릿속이 따끔거리자 나인이 눈을 질끈 감는다. 3년전부터 시작된 두통은 올해도 변함없이 찾아왔다. 나인은 습관처럼 가방을 열어 흰봉투를 꺼냈다. 병원내 약국에 부탁하며 얻은 두통약이었다. 처음 받아올 때는 제법 부피가 있어 어쩌다 책이라도 한권 가방에 넣을때면 제몸 부서져라 봉투가 비명을 지르곤 했는데 지금은 얇은 종이 이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알약을 물도 없이 한입에 털어넣은 나인이 빈봉투를 구겨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내일은 약국에 한번 더 들러야겠다. 진료실 냉장고 안에 약사님께 뇌물로 건넬 마땅한 음료수가 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나인은 약을 먹기위해 잠시 멈췄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직 여름이 되려면 멀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더운 것 같다. 2. 구정때 본 것을 마지막으로 두어달 만에 보는 희경의 어머니는 변함이 없었다. 나인의 방문에 소리 없이 맺힌 눈물을 집게 손가락으로 살짝 훔치는 것도, 희경의 방을 향하는 나인의 등을 오른손으로 가만히 두어번 쓰다듬는 행위도, 참고 있던 눈물을 희경의 방에 도착하자 왈칵 쏟아내는 것도 여전했다.

단지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요즘은 왜 방문이 뜸해지냐는 원망섞인 눈초리뿐. 장례식때 오열을 하는 희경의 어머니에게 대신 딸이 되어 자주 방문하겠다는 나인의 약속을 늘 되새기고 있기 떄문 일 것이다. 병원을 왔다갔다 하는 일 말고는 딱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1주에서 2주로 그리고 한달로 이제는 두어달만에 한번씩 기념일이나 연휴때만 방문하게 된 나인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민망했던지 겸연쩍은 웃음을 지우질 못한다.

그렇다고 결코 희경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적응하고 있었다. 희경이 없는 생활에 나인이 점점 적응 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이런 걸 사왔어. 그냥 오지."


울음 섞인 목소리로 희경의 어머니가 나인의 손에서 카네이션 바구니를 받아들더니 식사 준비를 핑계로 재빠르게 방을 나선다. 개수대를 붙잡고 울고 있을 희경의 어머니가 눈에 보이는 듯 했지만 그런 어머니의 뒷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전처럼 어머니를 따라가 달래 줄 생각은 안한다.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인이 창가에 있는 희경의 책상쪽으로 다가갔다. 작년부터 희경의 어머니는 나인이 방문 할때마다 희경의 방을 정리 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에 방문할 때는 물건이 정리되고 없을테니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나인을 방안으로 밀었지만 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리되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더 깨끗해지는 것 같았다.

막강 섹쉬 최희경. 못난 둥이 정나인.

책상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칼로 새긴 글씨를 검지 손가락으로 따라 읽으며 나인이 조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희경인 나인에게 친구라기 보다 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워낙에 어릴때 부터 몸이 약해 남들 보다 작은 몸집이기도 했지만 20이 넘어서도 변함없는 코맹맹이 소리에 자신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금새 토라져 입을 삐죽이 내밀고, 이처럼 유치한 글귀로 나인을 놀려대며 재미있어한 까닭이었다. 나인이 희경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며 기분이 나쁜 듯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줄라치면 희경은 손뼉을 치며 깔깔 웃어댔었지.


"그래도 그렇지. 막강 섹쉬는 좀 심하지 않았냐?"


흡사 희경이 옆에 있는 듯 말을 뱉던 나인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는 책상옆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 앉아 천장을 향해 드러눕는다. 벌써 3년이나 지나버렸다. 아니 이제 3년 밖에 안 지났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살 줄 알았는데... 밥을 먹을 수도 물을 마실 수도 없어 그냥 그렇게 말라 죽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빨리 희경의 생각에서 벗어나버렸다.

미안해 희경아. 나 솔직히 늘 네 생각을 하는 건 아냐. 뒷 정리를 끝내고 퇴근벨을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동안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지갑을 열다가 내 주민등록증 옆에 있는 네 사진을 보는 잠깐 동안 그리고 이렇게 네방에 들어와 누워있을때 이럴땐 네 생각을 한다. 겨우 3년인데.. 이제 겨우 3년인데 네 생각은 벌써 우선 순위에서 벗어나 버렸나봐. 죄책감에 못 살것 같더니 지금은 밥도 잘먹고, 길가다가 댄스 음악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해. 신호등을 지나며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기라도 하면 설사 차에라도 치일까봐 흠칫 놀라 서둘러 뛰어간다. 내가.. 내가 벌써 이렇게 되버렸다. 벌 받을꺼야. 희경아. 난 정말 벌 받을꺼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기가 없어 차갑던 바닥이 조금은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몇날 며칠이고 계속 울것만 같던 나인의 입에서도 울음을 참느라 끄윽대는 소리가 조금씩 잦아 들기 시작했다. 얼굴을 감싼 두손 사이로 눈물이 어느 정도 마르자 나인은 자신의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걸 느꼈다. 실은 오래전 부터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모른척 하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누나 일어나."


나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나인이 답답해던지 희주가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을 잡아 끌며 나인을 일으켜 세운다. 그러자 눈물이 말라 붙은 나인의 얼굴에 또 다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잡아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듯한 나인의 몸을 안을 듯이 자신의 오른팔로 단단히 잡아 당긴 희주가 엉망이 된 나인의 얼굴을 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한다.


"울지마"


침을 삼키느라 잠깐의 침묵 후 희주는 다시 말을 이었다.


"보기 싫으니 울지마."


나인은 대답이 없다.


"울지마 제발. 울지말고 이제는 잊어. 다 잊고 누나 삶을 살아. 언제까지..."


갑자기 희주의 말이 끊겼다. 자신을 잡고 있는 희주의 팔에 점차적으로 힘이 들어오자 나인이 그때까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희주를 바라본다. 안쓰러움이 가득 담은 채 나인을 바라보던 희주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는 것에 나인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붙잡힌 팔이 점점 조여옴에 나인은 팔과 함께 심장도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아니 절대로 잊지 마"


비명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가 나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절대로 있지마. 끝까지 기억해 내."


"........"


한참 후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나인의 말을 재차 물으며 희주가 쓴 웃음을 짓는다.


"힘들어? 네가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힘든 것에 절반도 못 따라와. 그렇게 살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그렇게 살아."


"희주야"


찰싹 소리가 나며 희주의 얼굴이 반쯤 옆으로 돌아갔다. 희경이와 같은 눈을 가진 희경의 어머니가 붉어진 얼굴로 올라간 손을 내리지 않은 채 희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뒤로 하며 나인이 희경의 방을 뛰쳐 나갔다.

평생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평생을 생각하지 않으려 스스로가 세뇌를 걸었었다. 자기 피부만큼이나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자신의 눈앞에서 떨어진 희경의 마지막 모습은 나인에게는 평생을 두고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다.


3.


"내가 그랬잖아. 나 배신 하지 마라고. 배신하면 나 확 죽어버린다고 했잖아."


진후와 함께 있으면서 꺼둔 핸드폰으로 들어온 묘하게 들뜬 희경의 목소리. 나인은 불길한 예감에 맨발로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 자신의 아파트에 도착한 나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자신의 아파트 난간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위태롭게 서 있는 희경이었다.


"안돼! 희경아 거기 그대로 있어. 내가 올라갈께"


나인이 막 건물 안으로 발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퍽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거봐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 했잖아"라고 말하는 듯 미소를 가득 띈 얼굴로 점차 자신에게 다가오던 희경이 꽃잎처럼 떨어지며 나인의 발 앞에서 붉은 색으로 빠르게 물들었다. 멍하니 벌린 입속으로 붉은 물이 흘러 들어왔지만 나인은 뱉어 낼 생각도 안한 채 산산히 부서진 희경의 시체를 품에 안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싸이렌 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나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시끄러워요. 이거 아무일도 아니에요. 이 녀석이 이렇게 죽을리가 없어요. 시끄러워요. 시끄럽다구요. 정말... 이녀석이 정말 이렇게..."


"나인아"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던 나인이 뒤를 돌아보니 불과 한시간 전까지도 나인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빛나던 눈이 새파랗게 질린 눈으로 바뀐 진후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죄책감. 그와중에 나인은 진후의 눈에서 죄책감을 읽어낸다.


"이녀석이.. 이녀석이 이렇게 죽을리가..."


나인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싸이렌 소리와 구급차를 부르라는 다급한 준후의 목소리,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비명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차츰 흐릿해지던 나인의 눈 앞은 암흑만이 남았다.



4. "가는거야?"


나인이 빠르게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막 대문을 열려는 나인의 팔은 어느새 따라나온 희주의 오른손에 잡혀있었다.


"이렇게 가는거야?"


대답 없이 손을 나인이 손을 뿌리치며 다시 대문고리를 잡자 이번에는 희주가 두팔로 나인을 자신에게로 돌려 세우더니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나인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쌌다.


"울지마 나인아. 제발 울지마. 내가 잘 못했어. 네가 이렇게 울고 있으면 나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루에도 몇번씩 몸서리치게 네가 밉다가도 이렇게 네가 울면 내 가슴이 너무 아파. 네가 이렇게 울면 누가 내 심장을 도려 내는 것처럼 아파와서 견딜 수가 없어. 나인아? 나인아!"


강하게 희주를 밀쳐 내며 대문을 나와 자신을 부르는 희주를 뒤로 하고 나인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변명한거야. 희주 말이 맞아. 내 탓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원인이야. 잡을 상황이 아니었다고, 도울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건 내 스스로가 내린 정의일 뿐이야. 내가 편하자고 생각한 나만의 생각일 뿐이라구. 난 벌 받아야해. 이렇게 멀쩡하게 있어선 안되는거야.

숨이 차올라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나인은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나인의 몸 스스로가 뛰는 것을 멈추려 하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죽어버려라. 이렇게 뛰다가 심장이 터져 죽어버려라! 그냥 이대로 죽어버려 정나인! 죽어버리라구!

그때였다. 몸속에 있는 모든 장기를 다 토해내기라도 하 듯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뛰어가던 나인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뒤로 나뒹굴었다. 미처 앞에 있던 방해물을 보지 못 한 것이었다.


"이봐. 눈을 어디다 달고 있는거야!"


퉁명스런 남자의 목소리가 바닥에 뒹군 나인의 머리위로 들려왔지만 나인은 얼굴을 들어 그 남자를 볼 생각도 일어나 흙으로 범벅이 된 옷을 털어 낼 생각도 안한다.


"이봐. 야!"


"아파요."


"뭐?"


"너무 아파요"


"야. 너 왜그래?"


"제가 지금 너무 아파요."


맙소사. 희경아 너 정말 죽은거니? 너 정말 죽은거야? 아파 나 심장이 너무 아파.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넘어져 다친 엉덩이가 아파. 아까전에 희주에게 잡힌 팔이 아파. 하지만 제일 아픈건 쉴새없이 조여오는 심장이야.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픈데.. 죽을만큼 아픈데 나는 아직 살아있잖아. 어떻게 해. 어떻게 해야해. 대답 좀 해봐.

입에서 흘러나온 흐느낌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더니 나인은 이내 큰 소리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