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장마가 끝난 8월은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달이다. 오피스텔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태양이 선우와 주희를 맞이했다. 선우는 눈부신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이 끔찍한 더위, 사람들, 자동차 매연, 정말 서울에 왔긴 왔구나. 후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주희가 슬쩍 선우를 보더니 미소를 짓는다.
“얼마 만에 오는 거예요?”
“글쎄요, 한 5년? 아마 맞을 거예요. 전역하자마자 미국으로 날랐으니까. 줄곧 뉴욕에서 지냈어요.”
선우는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꾸했다.
“날랐다고요? 꼭 가출했다는 이야기로 들리네.”
주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출이라…… 뭐, 어떤 관점으로 보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가출이에요. 어쨌거나 집에서 도망쳐 나온 거니까. 가출은 가출이지.”
선우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꼭 사춘기 애들 같잖아. 혹시, 그쪽 부잣집의 반항아 도련님?”
주희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멈춰서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선우를 돌아보았고, 선우는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요? 나 보면 그런 분위기 안 느껴져요? 어딘가 고독하면서도 우수에 젖어있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럭셔리하면서도, 뭔가 있는 듯한…….”
선우의 말에 주희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에이, 그런 표정으로 말해버리면 내가 농담을 못하잖아요. 조금이라도 수긍해주면 안 되나. 정말 너무하네. 어쨌거나 우린 하룻밤을 같이 보낸 사이인데.”
정류장의 벤치에는 젊은 남자가 홀로 앉아 있었는데, 선우가 내뱉은 말을 들었는지 조금 놀란 표정으로 힐끔 쳐다봤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선우는 머쓱했던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주희가 눈을 슬쩍 흘기며 선우의 말을 되받아쳤다.
“어머나? 누가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고 그래요? 누구 혼삿길을 막으려고 작정했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미안하지만 어제는 그쪽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내가 집으로 데려갔던 거지, 뭔가 애틋한 일? 아니 에로틱한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고요. 뭐, 그쪽이 잠들어 있을 때 확 덮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요? 그런데 왜 실행하지 않았죠?”
선우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건…….”
주희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더욱 궁금해진 선우는 짓궂게 그녀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다시 물었다.
“말해 봐요, 왜 덮치지 않았어요? 내가 별로였나?”
“아뇨.”
“아니면 그쪽 취향이 아니라서?”
“아니에요.”
“그럼?”
선우는 집요했다.
“그건 그쪽이…….”
“내가?”
“……울었기 때문이에요. 잠꼬대를 하면서 울더라고요.”
“내가 울었다고요? 잠꼬대까지 하면서?”
“네, 그것도 아주 서럽게 울었어요. 못 믿나 보죠? 이럴 줄 알았으면 녹음이라도 해둘걸.”
“아니 못 믿는 건 아니고요. 그냥 좀 당황스러워서. 내가 정말 울었어요? 그리고 잠꼬대를 했다고요. 뭐라고 잠꼬대를 했죠?”
“엄마를 찾던데요. 무척 힘들다면서…….”
주희는 슬쩍 말끝을 흐렸다. 어쩌면 선우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우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랬군요. 사실 어머니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하하하!”
“뭐야, 근데 왜 웃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그럼 울까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데요?”
“뭐, 그러니까…… 조금은 어두워지거나, 우울한 표정을 짓는 게 보통이죠. 사실 좋은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그런가요?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 아닌가. 그게 언제인가의 차이는 있지만 숨길 이유도 없고,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속으로 끙끙 앓을 필요도 없죠. 안 그래요?”
“하아,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요. 이런 사람이 지난밤엔 왜 그랬을까.”
“흠흠, 그 이야기는 우리 그만 합시다. 그런데 지금 날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죠? 후우, 5년만이라 그런지 전부 낯설기만 하네.”
“일단 배를 채우러 가야죠. 내가 잘 아는 닭갈비집이 있거든요. 근데 닭갈비는 좋아해요?
“닭갈비요? 글쎄요, 사실 난 닭갈비를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에에? 정말요? 아니 어떻게 닭갈비를 안 먹어볼 수가 있지. 희한하네. 그럼 도대체 뭘 먹고 살았어요?”
“아니, 뭐, 그냥…….”
“혼자 이상한 나라에서 살다가 왔나 봐. 뉴욕에는 닭갈비가 없나? 요즘은 한인식당이 많아서 있을 법도 한데.”
“글쎄요. 난 찾아다니면서 먹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요?”
“아, 버스 오네요. 일단 타요.”
“버스타고 가야해요? 배도 고픈데 그냥 이 근처에서 먹지.”
선우가 배를 어루만지며 볼멘소리를 냈다.
“시끄러워요, 잔말 말고 타기나 해요. 원래 맛집은 이렇게 찾아다니면서 먹어야 더 맛있는 거예요, 보람도 있고. 그게 진정한 식도락가의 모습이라고요. 버스 왔어요. 빨리 타요.”
주희가 먼저 씩씩하게 버스에 올라타자, 선우는 가볍게 한숨을 짓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배고파 죽겠는데 그냥 아무데서나 먹지.”
“빨리 안타요?”
선우가 머뭇거리자, 주희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며 소리쳤다. 선우는 움찔하더니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얼른 버스에 올라탔다.
“넵! 갑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별안간 음산한 웃음소리가 귓전으로 파고든다. 지금껏 이렇게 기분 나쁜 웃음은 처음이다.
겁에 질린 시걸은 재빠르게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칠흑 같은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워져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이곳이 어디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어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 순간 망각의 수면 위로 기억의 편린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지난밤, 분명히 여우를 사냥하고 있었다. 욕정에 눈이 멀어버린 두 청년은 안타깝게 여우에게 희생되고, 시걸은 그 여우를 죽음의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었다.
바로 여우의 동료들! 그래, 그랬었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또 다른 여우가 시걸의 목숨을 노렸다. 피할 수도 없었고,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앞서 희생당한 두 청년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그리고 바로 그때,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뻗어왔다.
그 생명의 은인은…….
“으아악!”
시걸은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떴다.
눈에 익숙한 공간, 코를 자극하는 향기. 이곳은 여인의 침실이다. 그것도 시걸이 아주 잘 아는 여인의 침실이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핏빛처럼 진한 붉은색 치파오를 입은 여인, 시걸의 사부인 정화가 쟁반에 물과 식사를 들고 침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부…….”
정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쟁반을 침대머리맡의 작은 탁자에 올려놓고는 예의 무심한 시선으로 시걸을 응시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난밤의 무모한 행동을 질책하는 것 같았다. 시걸은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요, 사부. 난 그냥…….”
짝! 정화가 시걸의 뺨을 힘껏 때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시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시걸은 당황하여 정화의 얼굴을 보았다.
“너 혼자서는 아직 야행(夜行)은 무리야. 또 다시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면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겠어.”
“죄송합니다, 사부. 다시는 안 그럴게요.”
시걸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밥, 식는다.”
정화는 짤막하게 내뱉고는 조용히 침실을 나왔다. 문을 닫자, 안에서 시걸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정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하여간에 사부는 시걸이 녀석한테는 너무 관대하다니까. 아마 나였으면 당장 파문을 운운했을걸. 제자사랑은 고르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소파에 앉아서 한가롭게 케이블 방송의 영화채널을 보고 있던 시호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불만이라는 듯이 내뱉었다. 정화는 시호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그는?”
시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팔을 벌리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화가 뜸을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의를 주었다. 시호는 얼른 두 팔을 내리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사히 도착했지. 그런데 그 친구, 정말로 누구야?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던데, 그러니까 그렇게 요란스런 환영단이 마중 나왔지.”
“환영단?”
“어, 못해도 서른 명은 되었던 것 같아. 공항에 아주 쫙 깔렸던걸. 보니까 친절한 깍두기 아저씨들 같던데? 그 친구, 한국에 있을 때 대인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나봐. 아니면 누군가 돈을 떼먹고 도망쳤던가.”
“그가 그들에게 잡혔어?”
“아니, 사부가 지시한대로 아무도 모르게 그 친구를 보호했어. 뭐, 조금 무리다 싶어서 그 친구를 기절시켰지만.”
“기절?”
“내 존재를 모르게 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 깍두기 아저씨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어서 말이야. 내가 몸이 둘도 아니고, 한꺼번에 양쪽을 모두 신경 쓸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그럼 그는 어떻게 되었지?”
“글쎄, 마침 애인인지 어떤 스튜어디스가 챙겨주던걸?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내가 체크를 해두었어.”
“그래.”
“그런데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뭐가 뭔지 알아야 나도 전력으로 도와줄 수 있잖아. 이제는 말해줘도 되지 않아?”
“아직은 안 돼.”
“너무하네. 사부, 날 못 믿는 거야?”
“보름밤까지 앞으로 열흘 남았어. 그때가 되면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게 될 거야.”
“보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보름밤이라니?”
“그때가 되면 내 숙원을 이룰 수가 있어. 지금은 그것밖에 말해줄 수가 없으니까 더는 묻지 마.”
新 구미호 (11) : 그녀의 미소
구九미尾호狐
그녀의 미소
지루한 장마가 끝난 8월은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달이다. 오피스텔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태양이 선우와 주희를 맞이했다. 선우는 눈부신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이 끔찍한 더위, 사람들, 자동차 매연, 정말 서울에 왔긴 왔구나. 후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주희가 슬쩍 선우를 보더니 미소를 짓는다.
“얼마 만에 오는 거예요?”
“글쎄요, 한 5년? 아마 맞을 거예요. 전역하자마자 미국으로 날랐으니까. 줄곧 뉴욕에서 지냈어요.”
선우는 여전히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꾸했다.
“날랐다고요? 꼭 가출했다는 이야기로 들리네.”
주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출이라…… 뭐, 어떤 관점으로 보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네요. 맞아요, 가출이에요. 어쨌거나 집에서 도망쳐 나온 거니까. 가출은 가출이지.”
선우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꼭 사춘기 애들 같잖아. 혹시, 그쪽 부잣집의 반항아 도련님?”
주희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멈춰서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선우를 돌아보았고, 선우는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요? 나 보면 그런 분위기 안 느껴져요? 어딘가 고독하면서도 우수에 젖어있고,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럭셔리하면서도, 뭔가 있는 듯한…….”
선우의 말에 주희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에이, 그런 표정으로 말해버리면 내가 농담을 못하잖아요. 조금이라도 수긍해주면 안 되나. 정말 너무하네. 어쨌거나 우린 하룻밤을 같이 보낸 사이인데.”
정류장의 벤치에는 젊은 남자가 홀로 앉아 있었는데, 선우가 내뱉은 말을 들었는지 조금 놀란 표정으로 힐끔 쳐다봤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선우는 머쓱했던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주희가 눈을 슬쩍 흘기며 선우의 말을 되받아쳤다.
“어머나? 누가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고 그래요? 누구 혼삿길을 막으려고 작정했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미안하지만 어제는 그쪽이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내가 집으로 데려갔던 거지, 뭔가 애틋한 일? 아니 에로틱한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고요. 뭐, 그쪽이 잠들어 있을 때 확 덮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요? 그런데 왜 실행하지 않았죠?”
선우가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건…….”
주희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더욱 궁금해진 선우는 짓궂게 그녀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다시 물었다.
“말해 봐요, 왜 덮치지 않았어요? 내가 별로였나?”
“아뇨.”
“아니면 그쪽 취향이 아니라서?”
“아니에요.”
“그럼?”
선우는 집요했다.
“그건 그쪽이…….”
“내가?”
“……울었기 때문이에요. 잠꼬대를 하면서 울더라고요.”
“내가 울었다고요? 잠꼬대까지 하면서?”
“네, 그것도 아주 서럽게 울었어요. 못 믿나 보죠? 이럴 줄 알았으면 녹음이라도 해둘걸.”
“아니 못 믿는 건 아니고요. 그냥 좀 당황스러워서. 내가 정말 울었어요? 그리고 잠꼬대를 했다고요. 뭐라고 잠꼬대를 했죠?”
“엄마를 찾던데요. 무척 힘들다면서…….”
주희는 슬쩍 말끝을 흐렸다. 어쩌면 선우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우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랬군요. 사실 어머니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하하하!”
“뭐야, 근데 왜 웃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그럼 울까요? 다른 사람들은 어떤데요?”
“뭐, 그러니까…… 조금은 어두워지거나, 우울한 표정을 짓는 게 보통이죠. 사실 좋은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그런가요?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 거 아닌가. 그게 언제인가의 차이는 있지만 숨길 이유도 없고,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속으로 끙끙 앓을 필요도 없죠. 안 그래요?”
“하아,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요. 이런 사람이 지난밤엔 왜 그랬을까.”
“흠흠, 그 이야기는 우리 그만 합시다. 그런데 지금 날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죠? 후우, 5년만이라 그런지 전부 낯설기만 하네.”
“일단 배를 채우러 가야죠. 내가 잘 아는 닭갈비집이 있거든요. 근데 닭갈비는 좋아해요?
“닭갈비요? 글쎄요, 사실 난 닭갈비를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에에? 정말요? 아니 어떻게 닭갈비를 안 먹어볼 수가 있지. 희한하네. 그럼 도대체 뭘 먹고 살았어요?”
“아니, 뭐, 그냥…….”
“혼자 이상한 나라에서 살다가 왔나 봐. 뉴욕에는 닭갈비가 없나? 요즘은 한인식당이 많아서 있을 법도 한데.”
“글쎄요. 난 찾아다니면서 먹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요?”
“아, 버스 오네요. 일단 타요.”
“버스타고 가야해요? 배도 고픈데 그냥 이 근처에서 먹지.”
선우가 배를 어루만지며 볼멘소리를 냈다.
“시끄러워요, 잔말 말고 타기나 해요. 원래 맛집은 이렇게 찾아다니면서 먹어야 더 맛있는 거예요, 보람도 있고. 그게 진정한 식도락가의 모습이라고요. 버스 왔어요. 빨리 타요.”
주희가 먼저 씩씩하게 버스에 올라타자, 선우는 가볍게 한숨을 짓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배고파 죽겠는데 그냥 아무데서나 먹지.”
“빨리 안타요?”
선우가 머뭇거리자, 주희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며 소리쳤다. 선우는 움찔하더니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얼른 버스에 올라탔다.
“넵! 갑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별안간 음산한 웃음소리가 귓전으로 파고든다. 지금껏 이렇게 기분 나쁜 웃음은 처음이다.
겁에 질린 시걸은 재빠르게 웃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칠흑 같은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워져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이곳이 어디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어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 순간 망각의 수면 위로 기억의 편린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지난밤, 분명히 여우를 사냥하고 있었다. 욕정에 눈이 멀어버린 두 청년은 안타깝게 여우에게 희생되고, 시걸은 그 여우를 죽음의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었다.
바로 여우의 동료들! 그래, 그랬었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또 다른 여우가 시걸의 목숨을 노렸다. 피할 수도 없었고,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앞서 희생당한 두 청년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그리고 바로 그때,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뻗어왔다.
그 생명의 은인은…….
“으아악!”
시걸은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떴다.
눈에 익숙한 공간, 코를 자극하는 향기. 이곳은 여인의 침실이다. 그것도 시걸이 아주 잘 아는 여인의 침실이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핏빛처럼 진한 붉은색 치파오를 입은 여인, 시걸의 사부인 정화가 쟁반에 물과 식사를 들고 침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부…….”
정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쟁반을 침대머리맡의 작은 탁자에 올려놓고는 예의 무심한 시선으로 시걸을 응시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난밤의 무모한 행동을 질책하는 것 같았다. 시걸은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요, 사부. 난 그냥…….”
짝! 정화가 시걸의 뺨을 힘껏 때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시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시걸은 당황하여 정화의 얼굴을 보았다.
“너 혼자서는 아직 야행(夜行)은 무리야. 또 다시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하면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겠어.”
“죄송합니다, 사부. 다시는 안 그럴게요.”
시걸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밥, 식는다.”
정화는 짤막하게 내뱉고는 조용히 침실을 나왔다. 문을 닫자, 안에서 시걸이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정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하여간에 사부는 시걸이 녀석한테는 너무 관대하다니까. 아마 나였으면 당장 파문을 운운했을걸. 제자사랑은 고르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소파에 앉아서 한가롭게 케이블 방송의 영화채널을 보고 있던 시호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불만이라는 듯이 내뱉었다. 정화는 시호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그는?”
시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팔을 벌리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화가 뜸을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의를 주었다. 시호는 얼른 두 팔을 내리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사히 도착했지. 그런데 그 친구, 정말로 누구야?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던데, 그러니까 그렇게 요란스런 환영단이 마중 나왔지.”
“환영단?”
“어, 못해도 서른 명은 되었던 것 같아. 공항에 아주 쫙 깔렸던걸. 보니까 친절한 깍두기 아저씨들 같던데? 그 친구, 한국에 있을 때 대인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나봐. 아니면 누군가 돈을 떼먹고 도망쳤던가.”
“그가 그들에게 잡혔어?”
“아니, 사부가 지시한대로 아무도 모르게 그 친구를 보호했어. 뭐, 조금 무리다 싶어서 그 친구를 기절시켰지만.”
“기절?”
“내 존재를 모르게 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 깍두기 아저씨들이 기를 쓰고 달려들어서 말이야. 내가 몸이 둘도 아니고, 한꺼번에 양쪽을 모두 신경 쓸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그럼 그는 어떻게 되었지?”
“글쎄, 마침 애인인지 어떤 스튜어디스가 챙겨주던걸?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내가 체크를 해두었어.”
“그래.”
“그런데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뭐가 뭔지 알아야 나도 전력으로 도와줄 수 있잖아. 이제는 말해줘도 되지 않아?”
“아직은 안 돼.”
“너무하네. 사부, 날 못 믿는 거야?”
“보름밤까지 앞으로 열흘 남았어. 그때가 되면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게 될 거야.”
“보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보름밤이라니?”
“그때가 되면 내 숙원을 이룰 수가 있어. 지금은 그것밖에 말해줄 수가 없으니까 더는 묻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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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그동안 호러소설 령을 출간하느라 연재가 많이 늦어졌습니다.
정말 죄송하고요, 구미호의 연재를 오늘부터 재개합니다.
만일 이전의 내용을 궁금하거나, 찾기 힘든 분께서는
이곳을 이용해주세요~ ^^
에, 그리고
저의 신작인 령(靈)도 많은 관심바랍니다.
바로 요 아래에 있는 녀석이 령의 표지입니다!
도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