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12화> 채워주는 사랑 4막

바다의기억2005.08.01
조회17,459

헤나 문신 일을 하는 친구를 따라 바닷가에 갔다가

 

금속탐지기를 들고 유실물을 주우러 다니는 또다른 친구를 만났습니다.

 

참 황당한 일이 많은 주말이었습니다.

 

 

===================== 직업에 귀천은 없다죠... ==========================

 

객석은 조용했다.



‘이렇게 끝난 거야? 그런 거야?’



여느 비극이 그러하듯


조명이 모두 꺼진 무대 위엔


더 이상 사랑도,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다.


허탈함만이 가득한 그곳.



누구나 행복해지길 바라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무대는 조용히 소리치고 있었다.



긴긴 침묵의 시간을 지나


관객석 한 쪽에서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그 박수소리는


잔잔한 수면위에 던져진 돌처럼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가


이윽고 거대한 파랑을 만들었다.



‘짝짝짝짝짝짝.....’



아쉬움과 슬픔을


그 울림에 담아 씻어 보내려는 듯


박수소리는 점점 커져


무대를 흔들 것만 같앗다.



‘파팍!!’



순간, 강렬한 조명 하나가 무대 위에 박히면서


박수 소리를 일시에 잠재웠다.



철수 - .....



무대 오른쪽에 의자를 놓고


홀로 앉아있는 철수의 모습.


하얀 가운으로 갈아입은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 저승에 온 걸 환영한다.



무대에 연출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코 효과를 넣어 중후하게 울리는 베이스 톤의 음성.



-- 나는 현세에 축복받지 못한 이들의


다음 생을 축복하여 주는 자.


너의 소원은 무엇인가....


빛을 보지 못하는 인간이여.



목소리가 사그라지는 것과 동시에


무대의 조명도 어두워졌다.



‘파악!’



바로 다음 순간


무대 왼쪽에 새로운 조명이 내리 쬐었다.


철수와 똑같은 의자에 앉아있는 선희.



-- 나는 현세에 축복받지 못한 이들의


다음 생을 축복하여 주는 자.


너의 소원은 무엇인가...


땅을 딛고 서지 못한 인간이여.



조명은 또다시 천천히 어두워졌다.



‘쿵.....’



북소리와 같은 효과음과 함께


철수와 선희가 있는 곳의 조명이 함께 켜졌다.



철수 - 선희씨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선희 - 철수씨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둘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돌아온 대답 또한 같았다.



-- 그 소원은 이루어 줄 수 없다.


그 사람도 이미 죽었으니까.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데


가장 극적인 도구는 침묵이다.


충격, 격노, 기쁨에 이르기까지.



철수와 선희는 침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느낀


부정할 수 없는 어떤 직감을 부정하기 위해...



--나는 다음 생을 축복하는 자.


다른 소원을 말해 보아라.



대체 무얼 바라야 하는 걸까.


그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철수

- 제게 건강한 눈을 주세요.


그리고.... 그 모습으로


선희씨가 활기차게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게 해주세요.


그것 외엔... 바랄 게 없어요.



선희

- 다음 세상에선 제게 건강한 다리를 주세요.


그리고.... 철수씨가 선물한 구두를 신고


마음껏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 소박한 소원이구나.


하지만 윤회의 시간이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


다시 인연이 닿기를 기도하여라.




그로부터 30년 후 미래.


어느 구두 가계.


휠체어에 앉은 한 중년 여성이 가게를 지키고 있다.


어깨에서 머리 위로 둘러쓴 숄과


두꺼운 돋보기안경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피곤해 보이는 인상이 몹시도 고독해 보였다.



잠시 후, 한 젊은 여인이 무대위에 올라섰다.



?? - 계세요?


아주머니 - 예~ 어떻게 오셨어요.


?? - 구두를 좀 보러 왔는데요.


아주머니 -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철수야~!! 철수야~!!



그녀는 휠체어를 밀고 무대 한 쪽으로 퇴장했다가


철수라고 불린 남자의 귀를 잡고


다시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철수

- 아, 엄마 왜 그래요!


지금 한창 필 받는 중이었는데!



아주머니

- 이 녀석아, 그놈의 신발 그만 만들고


빨리 손님이나 받아라.


잘 만들기나 하면 말을 안 해요.



철수 - 아, 엄마가 빠쑌을 몰라서 그래요!


아주머니

- 뺘쑌은 무슨 놈의 빠쑌.


어디 30년 전에나 유행한 것들만


잔뜩 만들어 놓고....



아주머니로부터 한껏 꾸지람을 받은 철수는


스타일 구겼다는 듯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젊은 여성에게 다가섰다.



철수

- 아, 어떤 구두를 찾으세요?


힐이 있는 쪽입니까,


아니면 편안하게 신으실 것?



?? - 음.... 글쎄요. 딱히 정하고 들어온 게 아니라서...



철수

- 예? 아~ 그럼 우선 이쪽을 보시겠어요?


이쪽이 가장 최근에 유행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선희 - 음.... 이쪽은 그리 끌리지가 않는데요.


철수

- 아~ 역시 뭔가 빠쑈너블한 걸 찾으시나 보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요즘 유럽에서 한창 뜨고 있는


아몽가르드한 빠쑌아이템을........



철수가 자신만만한 어투로 환심을 끌며


무대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뭔가를 찾고 있을 때


여인은 신발장 아래 있는 널찍한 상자를 잡아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철수 - 이것들 한 번 보시죠. 빠쑌의 최신을 달리는....


?? - 아저씨, 이것도 파는 거예요?


철수 - 예?



그녀는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투박해 보이는 구두 한 켤레를 들어 보였다.


반짝반짝 거리는 하이힐을 들고 나타난 철수는


잠시 당황한 듯 그녀와 구두를 번갈아 보았다.



철수 - 아.... 그건..... 제가 그냥 취미로 만든 거라서....


?? - 음.... 얼마예요?


철수

- 아니 그러니까 그게....


딱히 가격이 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게 철수가 버벅 거리고 있는 사이


주변에 있는 신발들을 쭉 훑어본 그녀는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펴 보이며 당돌하게 외쳤다.



?? - 음.... 그럼.... 음.... 5만원에 주세요!


철수 - 그게... 마음에 드세요?


??

- 예, 필이 팍! 꽂혔어요.


어쩜, 사이즈도 딱 맞네.



어느새 신발까지 바꿔 신고


바닥에 콩콩 찍어보며 만족스러워하는 그녀.


이미 말린다고 들을 기세는 아닌 듯 했다.



철수

- ....... 저.... 그럼.... 저.....


지금 제가 새로 만들고 있는 게 있는 데


그것도 한 번 보여드릴까요?


거의 다 완성되었거든요?



?? - 에... 그래요 그럼.


철수

- 예, 여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가지고 나올게요.



등장했던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퇴장한 철수는


잠시 후, 동글동글하게 생긴 구두 하나를


셔츠로 문질러 광을 내며 나타났다.


아직 깃이 빳빳하게 살아있는 셔츠는


결코 구두 닦을 때 쓰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도...



철수 - 저... 이건데....


?? - 어머나, 귀엽네요~.


철수 - 저.... 발 좀 줘보세요.



여인의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철수는


조심스레 그녀의 발에 구두를 끼워 넣었다.



철수 - 다리가 참 예쁘시네요.


??

- 어머나.... 그래요?


다들 무슨 망아지 뒷다리 같다고 하는데...



철수 - 예, 참 튼튼해 보여요.


?? - ....칭찬이죠?


철수 - 아....아, 그럼요! 물론이죠! 한 번 움직여 보실래요?



의자에서 일어나 한 바퀴 휭 돌아본 그녀는


몹시도 흡족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에게 물었다.



??

- 이것도 가격표 없음이에요?


그럼 5만원? 오케이?



철수 - 저.... 그냥... 드릴게요.


?? - 예?


철수 - 대신에.... 대신에.... 저.... 같이 차라도 한 잔....



말을 하는 자신도 몹시도 부끄러운 듯


몸을 틀어대는 철수를 보며


여인은 짓궂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 - 저 사귀는 사람 있는데요?


철수 - 예, 예? 아, 저...그럼..... 아니 그게....


??

- 풋.... 농담이에요.


어디로 갈 건데요? 맛있는 곳 알아요?



철수 - 아.....그.... 그건 편하신 데로....



철수는 긴장이 탁 풀린 듯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피했다.



?? - 전 선희라고 해요.


철수 - 아, 전....


선희 - 철수씨죠? 아까 들었어요.


철수 - 아..... 예. 아까 어머니가...



조금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무대에서 퇴장하는 두 사람.



조명이 조금 어두워진 무대 위로


다시 휠체어에 탄 중년 여성이 등장했다.



아주머니 - 기도가... 이루어졌어.



돋보기안경을 벗고 머리에 두르고 있던 숄을 걷어낸 그녀는


예전의 술집의 마스터 김양이었다.



그리고 무대 위의 조명은 모두 꺼졌다.



The end.



연극의 끝이었다.


사람들이 찡한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


다시 무대 위에 환한 조명이 쏟아졌다.


안군과 민아를 중심으로


김양, 회계에서 술집에 앉아있던 엑스트라까지


한 줄로 정렬해있는 등장인물들.



그들이 일시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순간


객석에선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의 모든 찬사를 합친 듯한 그 요동에


난 가슴이 깊숙한 곳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나도.... 저 무대 위에 서고 싶다.


그녀와 함께


이 파도 속에 출렁이고 싶다.


얼마나 짜릿할까....


얼마나 감동적일까.



쏟아지는 환호 속에 연거푸 고개를 숙이는 그녀는


도도할 만큼 찬란하게 빛나 보였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살아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