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13화> 바람개비

바다의기억2005.08.05
조회13,083

오늘 도로 중앙선에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이 사는 것 같습니다.

 

========================== CF가 사람 망친다 ===========================

 

?? 

- 그렇게 어깨를 움츠리고 있으면


날갯짓 하는 법을 잊어버려.



기억 - 난 그런 적 없어요.


?? - 내가 볼 땐 잔~뜩 웅크리고 있는 걸.


기억 

- 다들 날 무서워해요.


그런데 내가 왜 웅크려요?



?? - 음.... 말하자면... 고슴도치 같다고 할까?



고슴도치......



흐릿한 지난 기억의 한 파편이


미끄러지듯 손 안을 빠져나가며


난 무거운 눈을 떴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아있으니


어제의 떠들썩했던 축제가


방금 꾼 꿈의 일부분인 것처럼


눈앞에 어른어른 거렸다.



나도.... 그 무대 위에 있고 싶었다.



그건 굉장히 뜬금없는 목표였다.


멋있어 보인다거나, 부럽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동경(憧憬).



평생 인연도 없을 것 같던


연극부에 들어간 것만 해도


당장 구속되어 마땅할 이 상황에서


한술을 더 떠도 너무 크게 떴다.



하지만 그런 충동적인 욕구가


사람을 움직이는 법.



난 그날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연습실로 직행했다.



‘끼이이이....’



여전히 묵직한 느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땐


넓은 연습실 바닥에 축제의 잔해들만


어지럽게 늘어서 있었다.



월요일이면 연습이 있는 날인데.....


왜 사람이 아무도 없지?


내가 너무 빨리 왔나?



마냥 혼자 앉아있는 것도 좀 뭐하다는 생각에


난 주변을 정리하기로 했다.


소품들은 소품끼리 한쪽으로 몰아놓고


커튼 같은 것들은 둘둘 말아 놓고..


하지만 그렇게 정리를 마치고 나서도 아직 시간은 좀 이른 듯 했다.


어디보자... 뭔가 할만한 게....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소품을 만드는 데 쓰던


반짝반짝 거리는 포장지였다.



뭐건 눈에 띄는 게 있으면


‘이걸 어디다 쓸까?’ 아니면


‘이건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같은 생각이 먼저 드는 게 공대생의 천성인지라


난 포장지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재질 상 종이접기는 무린 것 같고...



바람개비!


브라보.



난 포장지 조각 중 적당한 것을 오려 핀에 꽂은 뒤


볼펜 뒤에 박아 바람개비 하나를 만들었다.



후우~


=파라라라락.


후우~


=파라라락



입김을 불면


작게 떨리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바람개비.


그 작고 영롱한 소용돌이 속에서


난 어린 날의 동심을 찾고 말았다.



기억 - 슈슈슈슈~. 돌아라~.



그래.


나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혼자 바람개비 만들어서 들고 뛰어다녔다.


.... 어쩌라고.


필이 꽂히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끼익.’



바로 그 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이 모습을 들키면 구속 내지 사회적으로 매장이다.



그제야 현실의 벽을 깨달은 난


재빨리 바람개비를 등 뒤로 숨기며


문 쪽을 돌아보았다.



민아 - 어머나?


기억 - 하....하이?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민아였다.


그녀는 내 어색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해 보이곤


연습실을 휘 둘러보았다.


아 씨.... 인사가 ‘하이’가 뭐냐 ‘하이’가....



민아 - 혼자 뭐하고 있었어요?


기억 - 아, 뭐... 여기.. 정리 좀 하고... 그러고...기다리고 있었죠.


민아

- 에.... 보통 연극 끝난 다음날은


사람들이 피곤해서 안 모여요.



기억 - 아...그렇군요.



그렇게 대화가 끊기고 나자


뻘쭘한 침묵이 5초정도 계속되었다.


아....어떡하나... 무슨 말이라도...



기억 - 그, 그럼 그쪽은 뭐 하러 오셨어요?



아, 제길. 그쪽이 뭐냐 그쪽이...


그리고 무슨 말투가 이래?


아 나 이거 참 애가 개념이 없어요!



민아 

- 아, 소품 사이에 제 신발이 딸려가서 찾으러 왔어요.


혹시 까만색 요렇게 네모난 구두 못 봤어요?



기억 - 아... 구두들은 저쪽에 치워놨는데요.



난 몸을 돌려


내 등 뒤쪽에 있는 구두 더미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 순간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바람개비가 그 자태를 나타내고 말았다.



민아 - 응? 뒤에 그건 뭐예요?


기억 - 에, 예?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상황을 깨달은 난


수업시간에 쪽지 돌리다 걸린 학생처럼


정색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아직 뭔지는 못 본건가?


아니면 ‘그 바람개비는 뭐예요?’를 함축한 말인가?


그럼 뭐라고 대답하지?



‘원래부터 여기 있던 거예요.’



오케이, 그거야.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내가 이상한 놈은 안 되잖아.


..... 잠깐, 생각해보니 볼펜에 내 이름이 써있어~!!


아니지, 그런 건 자세히 안 보면 안 보이니까


그녀 손에 넘어가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아무튼... 별 자질구레한 일로 걸로


죽도록 갈등한 다음에야


난 주춤주춤 그녀에게 바람개비를 보여주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잡아 빼기엔


오히려 더 의심만 받을 것 같고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도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민아 - 어머나.... 바람개비네요?


기억 

- 그니까... 그게 또...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뭐랄까.... 필이랄까...


빙글빙글 돌아가는 인생사 아무튼 뭐 그런.....


윤회사상을 형상화하고자...



내가 우물우물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사이


그녀는 바람개비에 입김을 불어보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듯 했다.



민아 - ......



설마 나처럼 들고 뛰어다니거나 하진 않겠지....


라는 황당한 상상을 멈추게 하는


깊은 그리움이 담긴 눈동자.


약간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눈동자엔


표면에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호수가 비치는 듯 했다.


다음 순간, 그녀가 ‘반짝’하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민아 - 저.... 이거 나 주지 않을래요?



너무나 진지한 그녀의 표정에


난 차마 ‘왜요?’ 라는 질문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열심히,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한 눈으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을 뿐.


만약 그 때 그녀가 아니라 거울이 앞에 있었다면


내발로 정신병원을 향해 갔을 지도 모르겠다.



민아 - 고마워요.



정말 기분 좋은 웃음.


찡긋 짓는 눈웃음이 마치 눈을 감은 듯 하면서도


미소처럼 은은한 느낌이 드는....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그 때의 기분을 말로 표현하자면 좀 어렵다.


상공 3000m에서 마하 3.98 로 날다가


‘나 지금 떨고 있니?’를 외치며


2020원더키디 아동용 책가방을 메고 뛰어내려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행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민아 - 맞다. 혹시 종이학 접을 줄 알아요?


기억 - .....예.


민아

- 혹시 괜찮으면... 좀 가르쳐주지 않을래요?


주말에 꼭 써먹어야하는데...


그림으로는 대체 이해가 안 가서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님.



그녀는 곧 가방에서 준비된 색종이들을 꺼냈고


난 순수했던 어린 날의 추억을 억지로 비틀어가며


학 접기의 오의를 더듬어갔다.



그러니까... 우선.... 마주 접기를 했다 펴고


대각선 접기를 했다 편 다음


양쪽 모서리가 대각선에 닿도록 접었다 펴기를 8방향에 대해 모두 하고


중앙을 중심으로 잘 정돈해서 오므리면


학 접기의 기본틀 완성!!

(이 말만 가지고 난생처음 학접기를 성공시킨 사람은

신(神)의 한 줄을 접을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민아 - .....우와.


기억 - 이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최첨단 학 접기입니다.


민아 - 아아.... 이 다음은요?


기억 

- 마주 보는 두 쪽을 위로 올려서


머리랑 꼬리를 만들고


날개를 내려주면 완성이죠.



민아 - 어머나! 다 만들었네?


기억 - 축하합니다. 짝짝짝..



어색하기 그지없는 내 반응에도


그녀는 함께 손뼉을 쳐가며 기뻐했다.


완성된 학을 이리저리 살피며


한참을 싱글벙글 웃던 그녀는


대뜸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민아 - 아, 미안해요, 이런 일로 시간 뺏어서.


기억 - 아, 아니에요. 저한테도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완전 국어책 아니면 80년대 소설이다.


왜 이렇게 밖에 말을 못하니.


‘괜찮아요, 이제부턴 제가 민아씨 시간을 뺏을 테니까요.’


이런 식으로 멋있게 받아서 이어가면 얼마나 좋아?


대체 알면서 왜 못하는 거야?



내가 이런 저런 후회로 마음속의 날 구타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조금 찡그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어색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맞아... 지금 대화가 끊긴 상태지.



기억 - 아, 저기... 그러니까.....



아무 말이건 해야 하는데....


또 무슨 말을 하지?



거북이는 접을 줄 아세요?


아냐, 캥거루 접기?


좀 더 임펙트가 강한


1:1500스케일 5단 합체 로봇 접기 같은 걸 해야 하나?



기억 - ....... 집에 어떻게 가세요?


민아 - 요 앞에서 버스 탄 다음... 전철타고 가요.


기억 - 아... 저도 전철역까지 가는데.... 지금 가실 건가요?


민아 - 좀 더 계시게요?


기억 - 아, 아뇨, 이제 가야죠.



뭔가 대화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스피드퀴즈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말에 재깍재깍 대답을 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난 누가 봐도 어색했을 것이다.



기억 - 가, 가죠?



결론은 그거였다.




전철역까지 가는 버스 안.


사람이 많았던 탓에 자리는 없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 말없이 서 있다가


어느새 두어 정거장을 남겨놓고 있을 때


그녀가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민아 - 원래 잘 안 웃는 편이세요?


기억 - 네네넷? 아....네.


민아 - ..... 저랑 있는 게 불편하세요?


기억 - 아, 아뇨!



뚱한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몹시 쑥스러워진 난 고개를 피했다.



민아 - ...... 그럼 다행이고요.



그렇게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창문 밖을 주시했다.


안 좋아... 분위기 안 좋아....



‘끼이이익!’



민아 - 꺗?



순간, 내리막에서 신호에 걸린 버스가 멈춰서면서


F = - ma 의 관성력을 받은 그녀가


uN의 마찰력과 손잡이의 장력 T를 이용해 무게중심을 안정시키고 있던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민아 - 미, 미안해요!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내 몸을 밀어내며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지만


하지만 이내 뒤에서 밀려온 제 2의 물결에 부딪혀


다시 내 품 속에 폭 안겨왔다.



민아 - 어, 엄맛?!



옷 너머로 전해지는 그녀의 체온.


얼굴이 화끈거린다..... 빨갛게 변해버렸을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려.... 소리가 들리진 않을까?


그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기억 - 아저씨!! 내려주세요!!



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말았다.


오늘의 속담 : 덩굴 째 들어온 호박에 프리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