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관점과 취향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적잖겠지만 영화를 보기 전에도 영화를
보는 중에도 내내 은근히 기대했던 것은 복수의 방식이었다. 송곳으로 혈관을 찌른다던가
쇠파이프로 이미 널부러진 머리를 으깬다던가 장기를 씹어먹는다던가 몸에 전선을 감기고
발전기를 돌려 감전시킨다던가 장기를 씹어먹는다던가 물속에 잠겨있는 아킬레스건을
자른다던가 상의를 걷어부치고 석삼자와 제트자를 칼로 긋는다던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등이나 복부를 체중을 실어 수차례 깊숙히 찌른다던가 약을 먹이고 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던가 장도리로 치아와 잇몸을 몽땅 분리시킨다던가 온몸을 토목내서 자루에 담는다 던가
15년정도 독방에서 군만두만 먹이면서 감금시킨다던가 장도리로 신체의 관절부위를
부숴버린다가 송곳으로 귀를 찌른다던가 씨디를 쪼개서 가슴을 난도질한다던가 마취도구
없이 혀를 잘라버린다던가 손목을 절단 내버린다던가 뭐 이런등등의 하드코어적 복수방식에
익숙해졌기에 삼부작의 마지막이라는데 적어도 반지의 제왕-왕의귀환편같은 오감을
사로잡을 감동의 도가니를 바랬던 것이다. 전작들이 보여준 저런 친절한 방식들에
이루말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오금저리게 맛보았기에 금자씨의 사연보다는 그 결과
보다는 그 과정과 그 메뉴얼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기대감. 기다림의 시간과 기대감 증폭의 정도는 굳이 그래프로 설명하지 않아도 다분히
비례의 대각선을 각도 높게 그린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더 놀라울 때는 그
기대감을 넘어서 수학책이나 국어사전에 나온 말로 감당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낄 때이다.
크레디크가 올라갈때 필자는 그만 내가 무엇에 집착하며 영화를 모고 있었는지 잊고
말았다. 그저 탄성뿐. 기대감 이상이 채워진 그 순간에 결국 당황하게 되더라. 이런
어떻게 표현하지. 이런 기분을. 식견은 짧고 흡수된 것들은 이미 용량을 넘어섰거늘.
좋고나쁨이라는 비판의 잣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oh~ wow!! 라는 만국공통의
느낌표들밖에 나오지 않더란 말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영화사를 좀더 공부할걸 그랬다.
감독은 역시 천재인가. 배우는 역시 보통이상의 사람인가. 스텝들은 외계생명체인가?
영화후기라는 것도 결국엔 재생산품일 뿐이다. 아무리 세련되고 잘만들어진 웰메이드
IT제품이라도 그 낯선 디자인에 적응하고 사용법을 익히기 전까지는 어줍잖은 자태로
뻘쭘거릴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든지 일부를 복제해서 내가 짜집은 단어의
일부로 포용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난해한 줄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읊어낼 자신이
없다. '금자씨는 친절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같은 소가 날아다니는 듯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을 뿐이다. 몸풀기라고나 할까. 자극에 대처하는
일종의 외양간 고치기 같은 행위. 영양가 없는 짓. 어디까지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나 시험중이다.
이금자. 그녀에게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중적인 면으로도 감춰질 수 없는 슬픔
그 정도였다. 한없이 웃으며 한없이 죽임을 행하고 한없이 고통을 부르짖으며 드러내지
않고 웃음으로 자신을 저주하는 결국 모든 가해의 희생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업같은
것이었음을. 노린것은 단 한명의 남자였지만 그이전에 이미 자신을 수천번 죽이고 수만번
버렸으리라. 그래도 남아있는 것은 모성이라는 애틋함.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버려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포기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이를 갈며 계획한다
해도 그 계획이 완성된다해도 그 결과까지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나 착했느냐는 얼마나 악했느냐와 다를바없고 얼마나 아끼는 소유가 있느냐는
어느 정도까지 잔인해질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이를 악물고도 웃을 수 밖에 없는 허망함.
스스로에게 물을 수 밖에 없지만 답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있기는 했었냐고 자조를 보낼 수
밖에 없는 그녀였던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라는 말은 이미 옛날말일
따름이다. 누가 말했던가. 죄가 무슨 죄냐고 그것을 저지르는 사람새끼가 죽일놈이지 라고.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굳게 믿으면서도 성선설이 맞는 것 같은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죄의 죄스러움을 통하여 사람에게 면죄부를 씌워줬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성악설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울고 있는 자신이 보인다. 선과 악은
생명의 이전부터 자라나 인간과 같이 하지만 알다시피 성장력과 번식력은 악이 훨씬 강하다.
우린 이미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인생 곳곳에 자리잡은 시커먼 그림자의 실체를. 영화는
금자씨의 구원을 결국 부정하고 말았지만 그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슬픔으로 파묻혀버린
얼굴에 선이라는 동정심을 씌우고 싶다. 그녀의 불친절함의 근원이 악자체를 위함이 아닌
선을 위함이었다는 것을 그래도 조금은 눈치챈 척 하고 싶으니까. 눈과 케이크. 그녀의
울음을 위로하며.
친절한 금자씨
필자의 관점과 취향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적잖겠지만 영화를 보기 전에도 영화를 보는 중에도 내내 은근히 기대했던 것은 복수의 방식이었다. 송곳으로 혈관을 찌른다던가 쇠파이프로 이미 널부러진 머리를 으깬다던가 장기를 씹어먹는다던가 몸에 전선을 감기고 발전기를 돌려 감전시킨다던가 장기를 씹어먹는다던가 물속에 잠겨있는 아킬레스건을 자른다던가 상의를 걷어부치고 석삼자와 제트자를 칼로 긋는다던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등이나 복부를 체중을 실어 수차례 깊숙히 찌른다던가 약을 먹이고 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던가 장도리로 치아와 잇몸을 몽땅 분리시킨다던가 온몸을 토목내서 자루에 담는다 던가 15년정도 독방에서 군만두만 먹이면서 감금시킨다던가 장도리로 신체의 관절부위를 부숴버린다가 송곳으로 귀를 찌른다던가 씨디를 쪼개서 가슴을 난도질한다던가 마취도구 없이 혀를 잘라버린다던가 손목을 절단 내버린다던가 뭐 이런등등의 하드코어적 복수방식에 익숙해졌기에 삼부작의 마지막이라는데 적어도 반지의 제왕-왕의귀환편같은 오감을 사로잡을 감동의 도가니를 바랬던 것이다. 전작들이 보여준 저런 친절한 방식들에 이루말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오금저리게 맛보았기에 금자씨의 사연보다는 그 결과 보다는 그 과정과 그 메뉴얼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기대감. 기다림의 시간과 기대감 증폭의 정도는 굳이 그래프로 설명하지 않아도 다분히 비례의 대각선을 각도 높게 그린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더 놀라울 때는 그 기대감을 넘어서 수학책이나 국어사전에 나온 말로 감당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낄 때이다. 크레디크가 올라갈때 필자는 그만 내가 무엇에 집착하며 영화를 모고 있었는지 잊고 말았다. 그저 탄성뿐. 기대감 이상이 채워진 그 순간에 결국 당황하게 되더라. 이런 어떻게 표현하지. 이런 기분을. 식견은 짧고 흡수된 것들은 이미 용량을 넘어섰거늘. 좋고나쁨이라는 비판의 잣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oh~ wow!! 라는 만국공통의 느낌표들밖에 나오지 않더란 말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영화사를 좀더 공부할걸 그랬다. 감독은 역시 천재인가. 배우는 역시 보통이상의 사람인가. 스텝들은 외계생명체인가? 영화후기라는 것도 결국엔 재생산품일 뿐이다. 아무리 세련되고 잘만들어진 웰메이드 IT제품이라도 그 낯선 디자인에 적응하고 사용법을 익히기 전까지는 어줍잖은 자태로 뻘쭘거릴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든지 일부를 복제해서 내가 짜집은 단어의 일부로 포용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난해한 줄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읊어낼 자신이 없다. '금자씨는 친절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같은 소가 날아다니는 듯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을 뿐이다. 몸풀기라고나 할까. 자극에 대처하는 일종의 외양간 고치기 같은 행위. 영양가 없는 짓. 어디까지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나 시험중이다. 이금자. 그녀에게서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중적인 면으로도 감춰질 수 없는 슬픔 그 정도였다. 한없이 웃으며 한없이 죽임을 행하고 한없이 고통을 부르짖으며 드러내지 않고 웃음으로 자신을 저주하는 결국 모든 가해의 희생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업같은 것이었음을. 노린것은 단 한명의 남자였지만 그이전에 이미 자신을 수천번 죽이고 수만번 버렸으리라. 그래도 남아있는 것은 모성이라는 애틋함. 결국 인간이라는 것은 버려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포기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이를 갈며 계획한다 해도 그 계획이 완성된다해도 그 결과까지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나 착했느냐는 얼마나 악했느냐와 다를바없고 얼마나 아끼는 소유가 있느냐는 어느 정도까지 잔인해질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이를 악물고도 웃을 수 밖에 없는 허망함. 스스로에게 물을 수 밖에 없지만 답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있기는 했었냐고 자조를 보낼 수 밖에 없는 그녀였던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라는 말은 이미 옛날말일 따름이다. 누가 말했던가. 죄가 무슨 죄냐고 그것을 저지르는 사람새끼가 죽일놈이지 라고.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굳게 믿으면서도 성선설이 맞는 것 같은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죄의 죄스러움을 통하여 사람에게 면죄부를 씌워줬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성악설이 더 타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울고 있는 자신이 보인다. 선과 악은 생명의 이전부터 자라나 인간과 같이 하지만 알다시피 성장력과 번식력은 악이 훨씬 강하다. 우린 이미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인생 곳곳에 자리잡은 시커먼 그림자의 실체를. 영화는 금자씨의 구원을 결국 부정하고 말았지만 그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슬픔으로 파묻혀버린 얼굴에 선이라는 동정심을 씌우고 싶다. 그녀의 불친절함의 근원이 악자체를 위함이 아닌 선을 위함이었다는 것을 그래도 조금은 눈치챈 척 하고 싶으니까. 눈과 케이크. 그녀의 울음을 위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