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관계-(21) 희망 고문

瓚禧2005.08.08
조회1,829
 

 

이상한 관계




(21) 희망 고문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은 같이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은

절망을 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둘 사이에 애인으로서는

전혀 희망이 없음을 분명히 인식시켜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작은 희망 하나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계속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겐 본능적으로

최대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 자신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길 바란다.




술에 취해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 했어"라고 전화를 한다든지

사귈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과

그냥 괜찮다는 이유만으로 데이트를 한다든지,

싫어서 헤어지면서 이유는 집안이 어려워서,

옛 애인을 못 잊어서,

혹은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말을 한다든지 하는 행동들은


모두 상대방에게 "희망"을 주는 행위들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그 사람 가슴에 안타까움과 속상함,

집착 등을 남겨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이런 행위를 나는 "희망고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웬만하면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고문을 하지 말자.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희망을 주지 않음으로써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니까.


                                                           - 박 진영



상현이 헤어짐을 고할 때, 그녀가 일말의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딱 잘라주었다면. 그녀가 희망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을 수 없도록, 딱 잘라 말 해주었다면. 아픔의 기간이 줄어들었을까? 이렇게 오래도록 그의 그늘 아래서 아파하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상현과 힘겹게 인연의 끈을 끊어 내면서 했던 생각이었다. 그가 조금만 더 매정했더라면, 조금만 더 절망을 줬더라면. 포기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상현을 기다리면서도 그가 미웠었다. 조금만 더 잔인하게 대해주지. 조금만 더 그러지......... 미리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먼저 그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방치했던 남자가 못내 밉기도 했었다. 영효는 바로 앞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냐는 얼굴로, 그녀의 말이면 무슨 말이든 끝까지 들어줄 용의가 있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상한을 바라보았다. 잔인하다. 잔인하다. 이토록 잔인한 일을 평생 사랑이라는 굴레 속에서 자행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던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이런 일 따위는. 두 번 다시 자행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아픔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아픔. 어느 쪽이 더 애잔할까? 모두 아픔을 주는 자의 마음은 외면한다. 그 애절한 마음을, 그렇게 끊을 수밖에 없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외면한 채, 모두들 상처받는 자만을 위로 한다. 고로 상처를 주는 자의 애절함은 그 자 혼자만의 것이다. 혼자 견뎌야 하는 잔혹한 아픔. 머릿속에서는 연신, 말을 해야 한다. 그에게 희망 고문을 하지 않도록, 그가 희망을 품지 않고, 다른 사랑을 찾아 훌훌 날아가도록 보내 줘야 한다 말하고 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혁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이 남자는 무어라 말을 할 것인가? 무어라 입을 뗄까? 말해야 하는데, 말을 해야 하는데 애꿎은 손톱 옆 살만 잘근 잘근 눌러대고 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이별은 마음이 먼저 안다고 했던가? 마음으로 먼저 받아들이고 느낀다고 했던가? 주리를 사귈 때야, 워낙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준비할 시간이라도 있었기에 그나마 덜 했었다. 오히려 주리가 끝내자, 이별을 선고했을 때는 그녀를 만나고 내내 뭉쳐있던 체기가 다 가라앉는 듯 까지 했었다. 그녀가 떠나고 힘들기는 했지만, 견딜 만 한 아픔이었다. 사랑하기에, 사랑의 아픔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끝까지 떠나는 사람 발목 잡지 않아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느끼는 그였다. 하지만, 자꾸만 자신의 모습을 훔쳐보며, 입을 달싹이는 영효가 만약 이별을 고한다면, 사랑하는 이가 생겼다고 말 한다면 그녀의 발목을 잡아버릴 것 같았다. 상한은 그녀를 잡아버릴지 모를, 그녀를 안아버릴지 모를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알고는 있었다. 영효에게 자신의 자리란 그녀가 내어 준 그의 자리란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그녀가 지독히 그를 의지하는 것은 단순한 친구의 감정이고, 친구에 대한 믿음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살며시 기대어 올 때면, 혹시나 이 사람이 날 향해 조금씩 마음을 열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혼자 온갖 나래의 공상을 펼치던 그였다. 그녀의 미소 하나에 너무나 가슴 떨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을 적도 많았다. 영효는 모를 테지만, 그녀는 모를 테지만, 상한은 마음 깊숙이 그녀를 담았다. 그녀를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을 만큼 깊은 곳에 그녀가 외면할 때마다 생긴 피고름으로 그녀를 새기고 또 새기어 버렸다. 지우려 하여도,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이미 그녀를 새겨버린 그였다. 마른 바람에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영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알고 있는 거니? 알고도 날, 이렇게 가슴 아프게 하는 거니? 이미 마음속에는 네가 있는데,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널담아 버렸는데, 언제인지 모르게 나도 모르게 널 새겨 버렸는데 이렇게 날 외면하려 하는 거니? 그런 거니? 그럼 난 어쩌니? 이젠 지워 버릴 수도 없는 내 가슴은 어쩌니? 네가 떠나 버릴까봐, 전전 긍긍하는 나는 어떻게 하니......... 난 어쩌면 좋을까?...........’


한참을 영효는 머뭇거렸다. 그녀의 머뭇거림을 보며 상한은 제발 그녀가 그렇게 더 머뭇거리다가 잊어버렸으면 했다. 차라리 잊어 버렸으면, 안 들어도 좋으니. 그런 말 따위는. 안 들어도 좋으니 잊어버리길. 그냥......... 잊어버리길 바랬다. 하지만 야속한 그녀는 마음을 정한 표정으로 상한을 바라보았다. 제발 말하지 말라고. 그냥 잊어버리라고 애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마음은 듣지 못한 채. 찢어지는 그의 가슴은 보지 못한 채. 영효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나 주혁을 사랑하는 것 같아. 그를 보면 내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


‘하지만.’이라고 그녀의 말을 자르려는 상한을 향해, 끝까지 들어줘. 라는 눈빛을 보낸 영효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알아. 주혁이 나보다 한참 어리고 아직 군대도 다녀와야 한다는 것. 알면서도 내 마음이 그래. 그와는 안 될 관계라는 것. 이러면 안 된다는 것 알면서도. 내 마음이 자꾸만 그래. 자꾸만 그를 향해 가고 있어. 막아보려 했어. 잊어보려 했어. 그런데 알잖아. 안 된다는 것. 사랑이라는 게 우스워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 감정....... 어떻게 해 보아도 되지 않는 다는 것. 상한 씨에게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당신 힘들 것 알지만……. 나중에 더 당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말 하는 게 옳을 것 같아서 왔어. 내 마음....... 이해해 줄 거지?”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한다. 이해해 달라고 한다. 세상 어떤 마음 넓은 남자가 이해할까? 마음이 바다와 같이 넓다 해도 이해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영효는 그에게 이해해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그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그녀가. 언제 부턴가 보이지 않으면 미치게 보고 싶어, 하루에도 열두 번 밖을 내다보게 하는 그녀가. 그녀의 꿈 하나에도 가슴 떨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에게 그녀가. 이해를 요하고 있었다. 분명 당신이라면 날 이해해 주리라 믿어. 라는 눈빛으로.


‘당신, 참 잔인한 여자네.......... 잔인하다............. 어쩜. 나한테 이해해 달라는 말을 하니.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니.......’


어떻게 내게 그런 잔인한 부탁을 하냐고. 난 사람도 아닌 것 같냐고. 나도 남자고 나도 ……. 가슴 무너지는 것 느끼는 사람이라고. 그녀를 붙잡고 알려주고 싶었다. 너로 인해 한 남자 무너지는 꼴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그에게 돌아올 수만 있다면 상한은 골백번도 더 그 짓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란다. 자기는 아니란다. 다른 남자를 사랑한단다. 어찌하리. 어떻게 하리. 이해해 주는 착한 남자의 탈을 쓰고 상한은 애써 웃었다. 가슴으로 피 눈물이 흐르고, 그녀가 또다시 그의 가슴에 피를 흐르게 하는데도, 그에게 아픔을 주는 그녀인데도 상한은 웃었다. 정말 잘됐다는 얼굴로. 상한은....... 웃었다.


“그래. 할 수 없는 거지. 당신 마음이 그런 거라면. 이해해. 이해하고말고. 힘든 이야기였을 텐데. 이야기 해 줘서 너무 고맙다. 고마워. 하하.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당신이 나에게 미안해 할 필요 없는 거야. 그런 거야. 서로 마음이 항시 똑 같을 수는 없는 법이잖아. 안 그래? 만약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다 서로 사랑만 하게? 아픈 사람 없이? 아픈 사람이 있어야 그 사랑이 더 애잔해 지는 거야. 뭐, 그 까짓것. 당신 행복을 위해서 내가 좀 아파주지. 당신 사랑 더 애잔하고 아름답도록 말이야.”


상한은 웃으며 그녀를 이해한다고 했다. 이해한다고. 사람 마음이 항시 똑 같을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좋은 일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의 웃음 너머 그가 울고 있었다. 눈물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전혀 슬프지 않은 사람처럼 웃고 있었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눈물보다 더 날카롭게 그녀의 마음속에 박혔다.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웃지 마. 차라리 울든지. 날 욕해. 날 비난해. 왜 그런 남자 사랑 하냐고. 7살이나 어린 남자이고, 전에 결혼하려고 한 남자를 채간 여자의 동생이라고. 그런 남자 뭐 하러 사랑 하냐고. 세상 사람들 보기 안 좋다고. 그런 사랑은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날 욕하란 말이야. 날 설득이라도 시켜 보란 말이야. 그렇게 사람 좋은 척. 자기는 괜찮은 척 하지 말고. 차라리 그러란 말이야.’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잡아주길 기대했던 것일까? 그가 발목 잡고 늘어져 주길 바랐던 것일까? 너 아니면 나 죽는다고, 너 아니면 안 된다고 빌어주길 바랬던 것일까? 이상했다. 기분이 한 없이 이상했다. 아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태도에. 자꾸만 모순되게 ‘날 사랑하지 않았던 거니?’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어졌다. 미치도록 화가나 발을 동동 구르고 싶어 질 정도였다. 왜 화가 나는 건지. 웃는 상한의 뒤편으로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느끼면서도 자꾸만 의심이 갔다. 기다렸던 사람처럼. 영효가 먼저 두 손 탁탁 털고 일어나 주길 바랐던 사람처럼 웃고 넘기는 상한의 표정에서 도무지 영효에 대한 사랑의 애잔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그가 슬픔을 감추고 있다고 느끼면서 마음은 그의 마음을 저울질 하고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모순도, 모순도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분명 싫다고 말한 것은 그녀였다. 그녀가 그에게 먼저 체념하라고, 접으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래놓고도 화가 났다. 한 번 붙잡는 소리 내 뱉지 않는 상한이 얄미워 죽을 것 같았다. 얼굴 가득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획- 고개를 돌리는 영효를 상한이 쳐다보았다.


‘왜 그러니? 네가 원하는 대로 웃으며 널 보내주고 있는데, 넌 왜 그러는 거냐? 도대체 나한테 무얼 원하는 거니? 왜 그렇게 심통 잔뜩 난 얼굴로 날 쳐다보니?............’


괜한 짓이라는 것을. 괜한 투정이며 억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효는 이미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는 마음을 숨기고파, 자리에 일어났다.


“가봐야겠어. 늦기도 했고, 또...........”


마음 같아서는 ‘네 얼굴 보기가 좀 그래.’ 라고 팩- 쏘아 붙여 주고 싶었지만, 말을 흐리며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잡기라도 하는 양.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영효를 상한이 쳐다보았다. 애잔한 눈으로. 걸음을 옮기다, 등에 끈질기게 박히는 시선을 느끼며, 영효가 살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손까지 흔들며 미소를 짓는 상한. 웃고 있는데, 그가 웃고 있는데, 웃으며 자신을 보내주는데 가슴이 미치게 아렸다. 쓰리고 아픈 가슴. 가슴 한 귀퉁이가 저릿하고, 숨이 콱콱 막혔다.


‘붙잡지도 않았으면서. 그리 쉬이 끊어질 마음이었으면서 넌 왜 나에게 그랬던 것이니? 차라리 내가 모르게 숨기고라도 있지. 도대체 네 마음을 알 수가 없다.’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영효는 좀 더 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더욱 빨리 걸음을 옮기는 영효를 보며 상한이 “그렇게도 내가 부담스러운 거냐?...........”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하아.............”


숨이 막혔다. 왜 못 알아 봐 주는 것일까? 그 애송이 보다 자신이 더 사랑하는데. 영효에게 심장이라도 내어 줄 만큼 그녀를 사랑하는데. 이미 커져 버린 사랑 어떻게 혼자 감당하라고. 할 말 다 했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영효가 오늘은 못내......... 미웠다. 야속했다.


“그게 사랑이야? 좋다며, 좋아한다며. 그런데 왜 단 한 번도 붙잡지 않는 거야? 좋아하면 붙잡고 매달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런데 왜 안 그러냐고!”


방안 구석에 쳐 박힌 애꿎은 곰 인형을 향해 어퍼컷을 날려버렸다. 퍽 소리가 나게 때린 영효의 주먹에 쓰러져 버린 곰 인형이 상한인 마냥, 매섭게 노려보던 영효가 한 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지. 왜 이러는 거니? 너. 오히려 잘 된 것이잖아. 그도 쉽게 마음 정리하고 돌아가면 그게 더 좋은 거잖아. 그래…….좋은 건데....... 마음은 왜 이러냐고. 왜 찬 건 나인데, 내가 차인 것 같은 기분이냐 이 말이지.”


마음을 도저히 감 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를 보면 떨리지 않았다. 떨리기는커녕 너무 친근해, 오랫동안 봐온 소꿉친구 같기 까지 했다. 그런데, 오늘은 미친 듯 가슴이 아프고, 잡아주지 않은 그가 미웠다. 도무지 너무 변덕쟁이 마음이라 영효는 자신의 마음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사람 많은 길가에서 주혁이 버럭 소리를 질러 버렸다. 뜨끔 하며, 걸음을 멈추어 선 영효를 향해 뛰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영효의 작은 등을 획 하니 돌렸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처음 하는 데이트였다. 나름대로 처음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해 가며, 아침나절부터 그녀가 무엇을 좋아할까? 고민 고민한 그였다. 그녀와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려, 나이 많은 누나들에게까지 물었다. 도대체 그 나이 또래의 여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것인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아니던가? 분명 영효도 좋아하리라 믿었다. 자신이 이렇게 신경 쓴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가 알아주길 바랬다. 다른 여자에게는 그러지 않는 자신의 진심을. 그녀가 조금이라도 알아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리라 웃으며 나왔던 그였다. 하지만 이게 뭔가? 영효는 그가 준비한 써프라이즈 파티에도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축하 건배를 하며, 우리 서로 잘 해보자 하는 주혁의 말도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그녀를 위한 파티인데, 그녀 오직 한 여자만을 위해 만든 자리인데 정작 주인공은 전혀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동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좋아할 줄 알았다. 좋아서 그의 볼에 살그머니 따스한 입술을 대어 온다면, 못이기는 척, 그녀의 뽀뽀도 좋아라. 하고 받아들일 참이었다. 하지만, 영효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넋 나간 사람 마냥 정신을 딴 곳으로 빼 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영효의 저런 반응은 미처 계획에 넣지 못한 터라, 주혁은 당황스러웠다. 이제껏 자신의 호의에 저토록 무정히 답한 여자는 영효가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지만, 주혁은 애써 마음을 다 잡았다. 그래도 그녀와의 첫 데이트인데 이렇게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답답해하는 그녀를 데리고 나와, 예술의 전당으로 차를 몰았다. 언젠가 친구 녀석이 예술의 전당에 가면 하트 분수를 볼 수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그곳만큼 좋은 곳이 없다 싶어 차를 몰았다. 그곳에서 멋들어지게 다시 고백을 한다면, 당신을 사랑하노라. 하는 낯 뜨거운 고백이라도 한다면 그녀가 어떻게 나올까? 내심 부끄러우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주혁은 사실 지금 자신의 이런 모습이 꽤나 당황스러웠다. 누군가로 인해 이렇게 변해 갈 줄은. 천하의 변주혁이 한 여자로 인해 이토록 바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여자란 그저, 순간의 쾌락이며, 순간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한 여자만을 위해 이렇게 초초해 한 적도, 한 여자에게 이렇게 애 닳아 본 적도 없었다. 그녀가 좋아할 생각에 자신이 이렇게 기뻐질 줄은. 더욱더 생각 못한 그녀를 사랑함으로 얻은 축복이었다. 주혁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해를 바라보며, 조금 더 속도를 내었다. 어디를 가냐고 묻는 영효에게 대답해 주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잡고 성큼 성큼 오페라하우스와 음악당 사이에 있는 분수로 향했다. 지나가는 말로 친구 녀석에게 위치까지 물어 보길 잘했지. 라고 생각하며 그녀와 함께 하트 분수 앞에 섰다.


“예쁘지? 한참 보고 있으면 하트 모양으로 분수가 뿜어져 나온대.”


그의 말에 분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영효를 보다가, 분수가 하트 모양으로 바뀔 때, 주혁이 다시 영효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사랑해. 영효야. 사랑해. 우리 땅꼬마. 우리 이렇게 웃으며 다른 근심 걱정 하지 말고. 지레 겁먹고, 떨지 말고. 예쁘게 사랑하자. 서로를 믿고, 나를 믿고 너를 믿고. 우리 열심히 사랑만 하다 죽자.”


자기에게 이런 능글맞은 면이 있었던가? 능구렁이처럼 살금살금 잘도 나오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주혁은 기대감 가득 찬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분명, 너무 좋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일 거야. 쑥스러워 하기는.........’


주혁은 자신의 빨개진 목덜미를 영효에게 들킬 새라 손으로 가려버리고, 영효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빨리 그의 손을 마주잡고, 그러자고. 우리 죽을 때 까지 사랑만 하다 죽자고 달콤하게 속삭여주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 미안. 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이게 아닌데. 주혁이 바랬던 것은 영효가 살며시 손을 마주잡아 주며 자기도 그렇다고 속삭이는 것. 그 작은 것뿐이었는데. 그녀가 그렇게 나온다면, 그녀가 써프라이즈 파티에서 내내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쯤은 남자의 넓은 아량으로 지나가려 했는데. 영효는 오히려 주혁을 피하듯 걸음을 옮겨버리고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묻잖아.”


영효는 그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세차게 부여잡고 있는 그의 손을 자신의 어깨에서 떼어내고만 있을 뿐이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삭이며, 주혁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하고, 참을 인자 세 개면 이 여자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 참아야 한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고작 마음 확인한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일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세차게 감싸 쥐었던 그녀의 어깨에서 팔을 풀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왜 그러냐는 주혁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영효는 마음이 이상해 졌다. 분명 떨렸는데, 아직도 떨리고 있기는 한데 자꾸만, 자꾸만......... 애절하게 웃던, 그가 생각난다. 슬프게 웃으며 괜찮다고, 괜찮다고 말하던 그가 자꾸만 생각난다. 주혁과 있는데, 사랑한다고 의심치 않았던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에도 왜 자꾸 그가 생각나는 것일까? 왜 그러는 것일까? 자꾸만 주혁의 얼굴 너머로 그의 애잔한 눈빛이 머무는 것은 왜 일까? 혼란스러웠다. 잘못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주혁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것이 자신의 판단 미스는 아니었는지. 알고 싶었다. 모르는 이런 어정쩡한 마음으로 그를 마주보고 싶지 않았다.


“미, 미안해. 나 정말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래. 그래서 그러는 것뿐이니깐, 오늘만 이해해 줘.”


‘피곤한데 얼굴 표정은 왜 그런데? 넋이 반쯤 나간 네 표정을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데?’라는 말이 목구멍 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주혁은 애써 말을 삼키며 ‘알았어.’라는 말을 힘겹게 내 뱉었다. 그의 힘겨운 그 말을 그녀가 알아주었으면. 미리 짐작해 주고, 상한 그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주었으면 바랬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표정으로 저만치 가 버리고 말았다.


“하, 너 또 왜 그러냐? 한발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거냐? 왜 또 뒤로 도망가는 건데?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너를 내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데?........... 너 사람 참 피 마르게 한다. 사람 고문 하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다..........”


이렇게 멀리서 중얼거린다고 저만치 가 등조차 가물거리는 영효가 듣고 다시 돌아올 리 없지만, 그래도 못내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는 주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