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14화> 그땐 정말...

바다의기억2005.08.08
조회28,788

강화도 삼포리로 피서 다녀왔습니다.

 

때마침 찾아온 태풍에

 

시원한 주말을 보냈네요.

 

아직 여름휴가를 못가신 분들,

 

일기예보 꼭 확인하고 가세요~.

 

========================== 외지에선 돈이 힘 ==========================

 

허씨 - 븅신.



내가 어제 그녀와 있었던 일을 말했을 때


허씨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이었다.



허씨

- 아주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주마.


내가 너랑 만났다고 치자.


유아러 걸, 아임어 보이. 오케이?



기억 - .....오케이.


허씨

- 그런데 내가 너랑 악수하고 나서


몹시도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


재빨리 달려가 손을 씻는 거야.


기분 어떨 것 같아?



기억 - .........


허씨 - 언더스뎅?


기억 - 오브코스.



상황은 참으로 암담했다.


그의 말에 다소 과장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허씨

- 아예 이 말까지 하지 그랬어?


‘아악! 불결해~! 아저씨! 내려주세요!!’


나 같았으면 정말 그대로 쫓아가서


싸스킥 50방쯤 날렸다.



기억 - 아니 그러니까 나는 너무 당황해서....


허씨 - 다른 사람이 보기엔 완전 그거라니까?



....... 할 말 없다.



그렇게 절망의 절벽 끝에 매달려 있는 내 손가락을


허씨가 하나 하나 펴기 시작했다.



허씨

-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서


네가 균형을 잃어서 이렇게 탁 기댔는데


갑자기 여자가


‘어머! 재수 없어! 아저씨!! 내려주세요!!’


그러고 도중에 내렸다고 해 봐. 어쩔래?



기억 - 그....재수 없다고 하진 않았는데...


허씨 - 아무튼!!


기억 - 우선.... 쫓아가서.... 무릎 찍기를...


허씨

- 그렇지~!! 그런 거지.


무릎 찍기 안 당한 걸 다행으로 여기고


그냥.... 이쯤에서 포기 해.



결국 그렇게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진 난


작전상 후퇴.... 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소심한 내 자신을 위로하며


잠시 그녀를 피해 다니기로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 봐도


그녀가 까먹었기를 바라는 것 외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아.... 기회의 여신이여


그대의 뒤통수에 발모제를 처발라 주고 싶다!!


네가 해병대냐? 왜 뒤통수는 빡빡 밀고 그러냐...



그렇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세계 평화와 인류 복지 실현에 대해 걱정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


바닥에 떨어진 깡통 하나가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난 혹시 지나가는 사람에게 맞진 않을까 주변을 살펴본 뒤


캐논슛을 쏘기 위한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깡통아, 나의 답답함을 날려 보내다오.


저 하늘의 별이 되어라!!



다다다닷... 까앙!!


탱.... 딸그랑.....



깡통은 거의 직선에 근접한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10여 미터를 날아가 근처 건물에 맞은 뒤


벽 모서리에 놓인 재활용수거함 속으로 들어갔다.



기억 - .........




잠시 후


나는 연습실 문 앞에 서있었다.


결코 지나가다 깡통을 찼는데


쓰레기통도 아닌 재활용수거함에 골인해서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오늘 운이 좋을 것 같아서랄까....


깡통이랑은 아무 상관없다. 정말이다.



셋만 세고 들어가자.


하나.... 둘.....



--그 동안 뭐하다 이제 나타나요?



.....그렇게 말할 리가 없잖아. 자자, 용기를 내.


하나.... 둘...



--.....이미 소문 쫙 퍼진 거 아냐? 여성 혐오증이니 호모니 하는.



아니, 그녀가 설마 그런 짓을.....


용기를 내! 하나.... 둘.....



--....... 흥, 재수 없어.



......털썩.


난 안돼....



그렇게 문 앞에서 혼자 고뇌하고 절망한 난


결국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라고 자신을 설득하며.



민아 - ..... 가시게요?


기억 - 으다다아아악~!!



‘쿵!!’



내가 입구에서 버벅 거리고 있는 동안


뒤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빙글 돌아서는 순간 30cm 앞에서 딱 마주친 그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 난


문손잡이에 옆구리 뒤쪽을 찍혀


그대로 자리에 엎어지고 말았다.



기억 - 어...어억........



어떻게든 참아보려 해도


삐질삐질 기어 나오는 신음소리.


아직까지 손잡이가 옆구리에 박혀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오부지게도 아팠다.



게다가 통증과는 무관하게 복받쳐오는 서러움.


최악이다.... 최악의 재회다.



민아 - 괘....괜찮아요?



난 통증을 꾹 참으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찡하게 눈물이 올라오는 건 어떻게 참았지만


정말 표정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민아 - 미안해요.... 놀라게 해서.



아직 말을 하기엔 여파가 너무 강렬했던 데다


딱히 생각해둔 말도 없었던 난


괜찮다는 뜻과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뜻을 담아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잠시 후 아픔이 좀 가라앉은 후 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기억 - .....미안합니다. 지난번엔.... 그러니까....



그녀가 그 때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사과해야할 일임엔 틀림없었기에


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그녀도 뭔가 생각난 게 있는 듯


아랫입술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대고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기억 - .... 방귀가 너무 급했습니다.



.......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기억

- 그 전부터 힘들게 참고 있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되니까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어서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그때 마늘이랑 양파 같은 걸 너무 먹어서


버스 안에선 저도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본래 밀폐된 공간에선 확산운동이 활발하질 못해서


자칫하면 어지러움이나 중독 증상을 나타낼 수도....



말을 하는 나도 정신이 아늑해지고 있는데


앞에서 듣고 있는 사람은 오죽했겠는가.


그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그대로 굳어있었다.



갑자기 죽고 싶다는 충동이 눈물처럼 밀려왔다.


내가 왜 이럴까. 이러면 안 되는데.


굿바이. 내 사랑. 그동안 행복했어.



민아 - ..........



그녀가 뒤로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힘이 빠진 듯한 걸음걸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난 내가 얼마나 황당한 짓을 한 건지


그제야 가늠하기 시작했다.


밥 먹는데 똥 얘기 한 건 아무것도 아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여자한테


방귀뀌려고 도망쳤다고 말했다.



‘탁탁탁.’


그녀가 복도를 돌아 들어간 뒤


뒤따라 들려온 익숙한 효과음.


천천히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갔을 때


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언뜻 보면 울고 있는 것 같지만


중간 중간 손바닥으로 벽을 두드리며


배를 감싸 쥐고 있는 모습은


분명 웃고 있는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소리를 내는 것은 참는 듯 했지만.....



문득 내 기척을 느낀 듯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민아 - ....풋!!



몹시도.... 언짢은 기분이 드는 웃음을 터트리며


손으로 바닥을 치다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자리를 떠나기도 머쓱하고


지키고 있기도 뻘쭘한 상황에서


한참을 어색하게 기다리고 있자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비슬비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아

- 미안해요.... 쿡쿡.... 웃으면 안 되는 건데....


풋..... 그래도.....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그러니까....


그게 더 웃겨서....쿡쿡쿡쿡....



내 어깨에 한 손을 얹은 채


아직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웃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나 또한 입가에 묘한 경련이 느껴졌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까?



민아

- 아..... 배 아파...... 하악하악....


이렇게 웃은 게 얼마만인지....


아..... 화장 다 번졌겠다.



비슬거리는 걸음 그대로


그녀는 화장실 쪽으로 직행했다.


잠시 후 한 번 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나서


화장을 조금 고친 그녀가 돌아왔다.



민아 - 눈썹 좀 고쳤는데... 안 삐뚤어졌어요?



아직 붉은 눈물기가 어린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날 똑바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얼굴이 확 달아오른 난


어색하게 고개를 피했다.



민아 - 아아~ 좀 봐 봐요~! 나 이런 거 잘 못한단 말이에요.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날 독촉했지만


그런 모습이 내겐 더 부담스러웠다.


너무 귀엽다고 해야 할지....



생각해보면...


난 다른 사람과 눈을 똑바로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경우 보통 싸움이 났거나


어느 한 쪽이 자리를 피해야했다.


지금과 같은 시선에 난 익숙하지 못했다.



민아 - 비슷해요? 잘 된 것 같아요?


기억 - 아 알았으니까... 잠깐만 눈 좀 감아 봐요.



그녀는 아무 스스럼없이 눈을 감아보였다.


조금은 짱구기가 보이는 동그란 이마를 아래를 지나는


부드러운 두개의 곡선이 f= -cosh(pgx/T+a) 만큼이나 예뻤다.



그렇게 눈썹을 살펴보던 중


자연스레 감긴 눈을 지나


오똑한 코와 발그스름한 입술에 눈이 갔다.


방금 세수를 해서인지


물기가 촉촉이 남아있는 하얀 피부와


도도할 만큼 선명하게 자리 잡은 도톰한 입술.


엷게 발라진 립글로즈가 빛을 받아 미끈한 광택을 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살펴 본 적이 없었다.


이성의 얼굴은 더더욱 그랬다.


문득 가슴 속에서 강한 충동이 일렁였다.



키스 해볼까?



지금 생각해도...


그건 겁대가리가를 넘어  개념을 상실한 짓이었지만


난 그 충동을 실현시키려 했다.



민아 - 잘 됐어요?


기억 - ............예.



그 때 그녀가 눈만 안 떴으면...


정말로 하려고 했다.


정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