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은 아침부터 속이 안 좋았다. 이 곳에 온 뒤로 변비도 생겼는지 어제부터 변을 보지 못했다. 유림은 아침부터 어디를 갔는지,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병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수연은 찾으러 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중앙 홀과 남자병실의 복도엔 주로 남자환자들이 나와 있어서 왠지 거북한 마음에 나가기가 싫어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 수연아, 밖에서 노.놀았어. 노.노래방 가서 놀았다. 너도 갔으면 좋은데. "
언제 왔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걸더니 유림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고, 할머니는 운동을 하는지 병실에서 복도로 걸어다니고, 옥순아줌마와 동아도 나가서 노는지 조용한 병실 이었다.
수연은 시계가 없으니 갑갑했다. 시계가 필요없다며 엄마가 가져온 손목시계도 간호원이 압수 해 갔기 때문이다. 간호원실과 중앙 홀에서만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늘 시계를 보던 습관인가? 딱히 손목 시계를 차고 다닌 편도 아닌데...
'그저 기계처럼 간호원이 때를 알려주고, 지시할 때만 시간을 느낄수 있는 인공 포유실 같다. 밥 먹이고, 약 먹이고, 재우고... 혼자 알아서 조금씩 돌아다니는 것이 운동하는 것인양 무표정한 눈으로 우리를 관찰하며 지켜보고... 몸이 무거워 진 것 같아. 늘 누워서 자는 시간이 많아 그런가 보다. 윗몸 일으키기도 하고, 운동을 해야겠다. 틈틈이...'
점심 시간이 지나고 평상시보다 1시간 정도 늦게 약을 주었는데 교수들과 박사들의 정기회진이 있는 날이었나 보다. 연홍병 교수를 위시해서 석기학 박사, 수연의 담당의사와 다른 의사들(뒤로는 레지던트들이 따르고) 이 한 무리의 아이들을 인솔하고 견학가는 분위기로 1403 호의 병실로 우르르 들어섰다.
" 기분은 어떠세요?"
"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
" 네."
" 가족들과는 면회했나요?"
" 네."
" 뭐 더 바라거나 그런 것 있나요?"
" 아뇨. 이젠 적응을 했지만, 크리스마스가 되니까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나네요."
" 네 "
그런 식으로 5 명과의 대화를 마친 후 그들은 1402호로 넘어갔다.
회진이 긴 시간 이어지는 것 같아, 수연은 초록색 크리스마스 트리와 붉은 여우 한 마리를 그리고, 색칠한 후, 간호원실에서 가위를 빌려 간호원 앞에서 오린 후, 빈 색지 한 장을 받아, 카드에 그림을 붙이고 간호원실을 나와 회진하느라 조용해진 중앙홀에 앉아 탁자 위에 카드를 놓고, 글을 썼다.
- 류 성준 선생님께 -
하루의 일과 중 추위를 느낄 새나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저 자신을 묶어놓고 있던 매듭들이 많이 풀려가는 것을 느껴요.
의사라는 직업, 특히 '정신과' 라는 분야가 인내를 많이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환자들의 정신 상태라는 것이 극히 작은 계기만 있어도, 변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제 자신도 안정을 찾기까지 4일이나 걸렸어요.
그 안정이라는 것이 겉으로 평가되는, 드러나 보이는 부분일지라도요.
선생님을 원망도 해보고, 가족들을 원망도 해보았지만, 결국은 제 스스로 만든 무덤에서
스스로의 의지와 정신을 찾아야만 주위의 도움들도 약이 되는 것 같아요.
아침 해 뜨기 전부터 해질녘의 창밖을 보죠.
창살 사이로 보이는 거지만 움직임이 살아있어 보기 좋아요.
저도 곧 , 저 창 밖의 풍경이 될테지만 여기 있는 하루하루를 마음의 평안을 찾으며 지내려 해요.
때론 답답하고, 정말 뛰쳐 나가고 싶은 순간들도 있지만 제가 정말로 제 자리에 당당하게
돌아올 것을 기도하는 가족들 생각을 해요. 죽음의 고비 속에서 뒤엉켜있는 제 마음의 현실을 인정하게 됐고, 이젠 사랑하는 법들도 하나씩 배워가려고 해요.
어제는 창훈씨와 솔직한 대화를 했어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결심을 굳혔어요. 이야기를 하기까지 아직도 망설임이 있었는데...
이 곳에 있는 것을 이유로 그를 제게 묶어둘 수 없다는 것, 여전히 저는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생각보다 그 말이 그리 어렵지 않더군요.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조금 아프고, 조금 슬픔이 조용히 저리는 그런 느낌이 있었지만...
제 마음이 이제 발걸음을 한 발자욱 떼었어요. 아기처럼.
제 자신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어요. 이 곳에서.
인내를 가지고, 깊은 관심으로 대화를 이끌어 주신 배려에 감사드려요.
진심으로 기분좋은 성탄절이 되시고, 늘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펜을 놓습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감사해요.
- 12월의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
-이 수연 드림-
다 쓴 카드를 봉투에 넣어 밀봉한 후, 간호원실에 맡겼다.
회진이 끝나고 중앙홀에서 종이접기 강습이 있어 나갔다 오니 점심 식사가 나왔는데, 수연이
병원에 온 이래 한 그릇을 다 먹기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반찬도 성의없게 나왔는데...식사를 한 후,
" 약 드세요" 하는 소리에 약을 먹고 병실로 돌아와 수연도, 병실 사람들도 다 같이 잠을 잤다.
나른한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 노래방이요, 노래방 "
하고 복도에서 소리치는 회장의 광고소리가 있었지만 누구하나 가려고 일어나지 않자, 회장이 수연을 병실 입구에서 손짓하며 불렀다.
" 수연씨, 할 말이 있어요."
" 네? "
수연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병실을 나가 복도의 소파 옆에 서있는 회장을 보며 소파에 앉았다.
" 수연씨, 24살이죠? 저도 같은데 우리 서로 말 놓고, 친구해요."
" ... 죄송해요. 전 이게 편해요. 그냥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하고 그러세요."
" 에이, 난 친구처럼 지내려고 했는데... 수연씨 얼굴이 많이 편해보이고, 부드러워 졌어요.
그냥 수연씨와 이야기해 보고 싶었어요. 늘."
" 네-에..."
" 수연아, 그.그냥 친구하지. 친구 맞잖아. 동갑 친구."
어느새, 옆에 와 앉으며 한 마디 끼어드는 유림과 지아가 새삼 반가왔다. 아직은 낯선 남자들과의 대화가 쉽지 않은 수연이었다.
회장은 자기가 15일 만에 골드카드를 비롯해 2천만원 넘게 썼더니 부모님이 열받아서 정신차리라며 강제적으로 여기에 넣었다고 자신에 대해서 설명했다. 나이트 클럽의 부킹에 대해... 스키에 대해 ... 수연은 두서 없는 설명을 이리저리 늘어놓는 그의 얼굴을 새삼스레 다시 살펴보았다. 컷트머리처럼 층을 많이 내어 자른 단발정도의 멋 낸 머리길이... 조금 휜 메부리코... 잘생기진 않았어도 어디서든 붙임성 있게 잘 적응할 것 같은 부잣집 청년같은 여유로운 웃음기를 늘 달고 있는 얼굴이었다.
'소문인 줄 알았더니...'
" 수연아, 저 방에 있는 화.화상입은 혜순언니, 김대중 대통령이 자.자기를 알아볼까봐 못 알아보게 석유를 몸에 붓고 불을 지른거란다. 반쯤만 자기를 태우려고... 미.미친거지, 미쳐서 그런거야...쯔쯧... 네 남자 왔을때도 내게 " 안.안기부 사람 아니야? 정말로? 이상하다. 난 꼭 그렇게 봤는데" 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래도 기관에서 나온 사람인 것 같다고 소문내고 다녔어."
수연은 그냥 웃고 말았다.
양복을 반듯하니 입고 들어오는 휜칠한 키와 차가워 보이는 창훈의 잘생긴 모습이 그렇게 보였나보다. 아래턱. 입술까지 다 타서 입을 벌리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보이는지... 때로는 낮이나 밤이나 고통스러워 "으. 으...흐..." 신음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내는 안쓰럽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배우기도 많이 배운 엘리트인데... 한 명, 한 명 사연없이 이 곳에 들어온 이는 없지만 그들을 보면서 수연은 자신이 이때까지 참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수연이 이런 저런 환자들의 이야기들을 듣다가 중앙 홀의 책장에서 다시금 책을 한 권 빼서 병실로 들어와 읽자니,
" 아가씨는 어떻게 그렇게 꾸준하지? 늘 책을 읽거나, 뭔가를 쓰거나, 참 잔잔해."
옥순아줌마가 수연을 신기한 동물 쳐다보듯 바라보며 말을 건냈지만 수연은 조용히 웃어주었다.
' 오늘은 선생님이 바쁘신 모양이야. 내일은 크리스마스인데, 내일도 못보겠네. 어제의 이야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담당의와의 시간을 기다리는 자신을 생각하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처음엔 그 무표정한 얼굴이 그렇게 싫었는데... 정신과 의사하면 왠지 편안하고, 부드러운 이미지 일거라는 선입견이 있어 그 젊어보이는 얼굴에 신뢰감이 안갔었는데...'
수연은 요즘 점점 웃음을 웃는 일이 많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분위기가 조금 더 수연의 벽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어느새 깜박 잠들었는지 회장이 '망년회'를 한다며 부르는 소리에 수연은 잠이 깼다.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아 거절하고 누워있는데 유림과 지아가 차례로 부르러 왔다. 참석하자고... 지아가 이젠 많이 나아졌다. 수연은 문득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정신병을 가진 환자로서 멀쩡함을 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마음을 스쳐갔다. 수연은 혼자 분위기를 깰 수도 없어서, 중앙 홀로 나가 망년회에 참석했다.
송년회 준비로 젊은 여자 3명과 사회사업가(여자)가 그래도 다과 준비, 게임 준비에 신경을 쓴 모양이다.
< ' 싱글.벙글' 노래후- 게임(인사법: 상대 돌려가며)- 빙고게임(크리스마스 단어로 3줄 먼저 맞추기: 이수연 우승)- '서울대학병원' 에 한글자씩 액센트 넣기( 개인전 우승-회장 ) - 디스코 타임- 묵상후 '사랑해' 라는 노래로 마침>
모양이야 특별한 건 없었어도 병원에서의 이런 행사들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분위기를 띄워주어서 이런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아도 하루 자고 난 후부터 오늘은 전과 같이 괜찮아 보였다.
건물들 뒤로 해 그림자가 노랗게 지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불이 났는지 요란한 싸이렌을 울리며 빨간 불자동차 3 대가 서둘러 달려갔다.
'누군가의 장난 전화가 아니였기를, 큰 불이 아니었기를, 인명 피해는 더욱 없기를...'
하는 마음이 스쳐갔다.
수연이 지아와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 오자, 류성준 담당의가 병실 입구에서 불렀다.
저녁 시간에 상담하기는 처음이었지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던 수연은 기쁜 마음으로 빠른 걸음으로 <면담실>로 들어갔다.
그가 오전에 만들어 간호원실에 맡겨놓은 카드를 받았는지 들어보이며, 눈주름이 퍼지도록 환하게 웃었다. 굉장히 젊어보였지만 웃을때 눈주름이 퍼지는 것이 어느 정도의 나이가 있는 것 같았다. 담당의에게 느끼는 감정이 신뢰감이 높아가는 것인지, 병원에 있기 때문에 아이가 엄마를 찾듯 의지하고 있는 것인지... 수연은 자신의 감정이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그를 만나면 굉장히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의 말, 그의 표정, 하나 하나가 수연의 가슴에 스며들듯이 남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붉은 여우-7 (-7일째-)
수연은 아침부터 속이 안 좋았다. 이 곳에 온 뒤로 변비도 생겼는지 어제부터 변을 보지 못했다. 유림은 아침부터 어디를 갔는지, 점심 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병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수연은 찾으러 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중앙 홀과 남자병실의 복도엔 주로 남자환자들이 나와 있어서 왠지 거북한 마음에 나가기가 싫어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 수연아, 밖에서 노.놀았어. 노.노래방 가서 놀았다. 너도 갔으면 좋은데. "
언제 왔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걸더니 유림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고, 할머니는 운동을 하는지 병실에서 복도로 걸어다니고, 옥순아줌마와 동아도 나가서 노는지 조용한 병실 이었다.
수연은 시계가 없으니 갑갑했다. 시계가 필요없다며 엄마가 가져온 손목시계도 간호원이 압수 해 갔기 때문이다. 간호원실과 중앙 홀에서만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늘 시계를 보던 습관인가? 딱히 손목 시계를 차고 다닌 편도 아닌데...
'그저 기계처럼 간호원이 때를 알려주고, 지시할 때만 시간을 느낄수 있는 인공 포유실 같다. 밥 먹이고, 약 먹이고, 재우고... 혼자 알아서 조금씩 돌아다니는 것이 운동하는 것인양 무표정한 눈으로 우리를 관찰하며 지켜보고... 몸이 무거워 진 것 같아. 늘 누워서 자는 시간이 많아 그런가 보다. 윗몸 일으키기도 하고, 운동을 해야겠다. 틈틈이...'
점심 시간이 지나고 평상시보다 1시간 정도 늦게 약을 주었는데 교수들과 박사들의 정기회진이 있는 날이었나 보다. 연홍병 교수를 위시해서 석기학 박사, 수연의 담당의사와 다른 의사들(뒤로는 레지던트들이 따르고) 이 한 무리의 아이들을 인솔하고 견학가는 분위기로 1403 호의 병실로 우르르 들어섰다.
" 기분은 어떠세요?"
" 괜찮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요?"
" 네."
" 가족들과는 면회했나요?"
" 네."
" 뭐 더 바라거나 그런 것 있나요?"
" 아뇨. 이젠 적응을 했지만, 크리스마스가 되니까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나네요."
" 네 "
그런 식으로 5 명과의 대화를 마친 후 그들은 1402호로 넘어갔다.
회진이 긴 시간 이어지는 것 같아, 수연은 초록색 크리스마스 트리와 붉은 여우 한 마리를 그리고, 색칠한 후, 간호원실에서 가위를 빌려 간호원 앞에서 오린 후, 빈 색지 한 장을 받아, 카드에 그림을 붙이고 간호원실을 나와 회진하느라 조용해진 중앙홀에 앉아 탁자 위에 카드를 놓고, 글을 썼다.
- 류 성준 선생님께 -
하루의 일과 중 추위를 느낄 새나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저 자신을 묶어놓고 있던 매듭들이 많이 풀려가는 것을 느껴요.
의사라는 직업, 특히 '정신과' 라는 분야가 인내를 많이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환자들의 정신 상태라는 것이 극히 작은 계기만 있어도, 변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제 자신도 안정을 찾기까지 4일이나 걸렸어요.
그 안정이라는 것이 겉으로 평가되는, 드러나 보이는 부분일지라도요.
선생님을 원망도 해보고, 가족들을 원망도 해보았지만, 결국은 제 스스로 만든 무덤에서
스스로의 의지와 정신을 찾아야만 주위의 도움들도 약이 되는 것 같아요.
아침 해 뜨기 전부터 해질녘의 창밖을 보죠.
창살 사이로 보이는 거지만 움직임이 살아있어 보기 좋아요.
저도 곧 , 저 창 밖의 풍경이 될테지만 여기 있는 하루하루를 마음의 평안을 찾으며 지내려 해요.
때론 답답하고, 정말 뛰쳐 나가고 싶은 순간들도 있지만 제가 정말로 제 자리에 당당하게
돌아올 것을 기도하는 가족들 생각을 해요. 죽음의 고비 속에서 뒤엉켜있는 제 마음의 현실을 인정하게 됐고, 이젠 사랑하는 법들도 하나씩 배워가려고 해요.
어제는 창훈씨와 솔직한 대화를 했어요.
그의 얼굴을 보면서 결심을 굳혔어요. 이야기를 하기까지 아직도 망설임이 있었는데...
이 곳에 있는 것을 이유로 그를 제게 묶어둘 수 없다는 것, 여전히 저는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생각보다 그 말이 그리 어렵지 않더군요.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조금 아프고, 조금 슬픔이 조용히 저리는 그런 느낌이 있었지만...
제 마음이 이제 발걸음을 한 발자욱 떼었어요. 아기처럼.
제 자신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어요. 이 곳에서.
인내를 가지고, 깊은 관심으로 대화를 이끌어 주신 배려에 감사드려요.
진심으로 기분좋은 성탄절이 되시고, 늘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펜을 놓습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감사해요.
- 12월의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
-이 수연 드림-
다 쓴 카드를 봉투에 넣어 밀봉한 후, 간호원실에 맡겼다.
회진이 끝나고 중앙홀에서 종이접기 강습이 있어 나갔다 오니 점심 식사가 나왔는데, 수연이
병원에 온 이래 한 그릇을 다 먹기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반찬도 성의없게 나왔는데...식사를 한 후,
" 약 드세요" 하는 소리에 약을 먹고 병실로 돌아와 수연도, 병실 사람들도 다 같이 잠을 잤다.
나른한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 노래방이요, 노래방 "
하고 복도에서 소리치는 회장의 광고소리가 있었지만 누구하나 가려고 일어나지 않자, 회장이 수연을 병실 입구에서 손짓하며 불렀다.
" 수연씨, 할 말이 있어요."
" 네? "
수연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병실을 나가 복도의 소파 옆에 서있는 회장을 보며 소파에 앉았다.
" 수연씨, 24살이죠? 저도 같은데 우리 서로 말 놓고, 친구해요."
" ... 죄송해요. 전 이게 편해요. 그냥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하고 그러세요."
" 에이, 난 친구처럼 지내려고 했는데... 수연씨 얼굴이 많이 편해보이고, 부드러워 졌어요.
그냥 수연씨와 이야기해 보고 싶었어요. 늘."
" 네-에..."
" 수연아, 그.그냥 친구하지. 친구 맞잖아. 동갑 친구."
어느새, 옆에 와 앉으며 한 마디 끼어드는 유림과 지아가 새삼 반가왔다. 아직은 낯선 남자들과의 대화가 쉽지 않은 수연이었다.
회장은 자기가 15일 만에 골드카드를 비롯해 2천만원 넘게 썼더니 부모님이 열받아서 정신차리라며 강제적으로 여기에 넣었다고 자신에 대해서 설명했다. 나이트 클럽의 부킹에 대해... 스키에 대해 ... 수연은 두서 없는 설명을 이리저리 늘어놓는 그의 얼굴을 새삼스레 다시 살펴보았다. 컷트머리처럼 층을 많이 내어 자른 단발정도의 멋 낸 머리길이... 조금 휜 메부리코... 잘생기진 않았어도 어디서든 붙임성 있게 잘 적응할 것 같은 부잣집 청년같은 여유로운 웃음기를 늘 달고 있는 얼굴이었다.
'소문인 줄 알았더니...'
" 수연아, 저 방에 있는 화.화상입은 혜순언니, 김대중 대통령이 자.자기를 알아볼까봐 못 알아보게 석유를 몸에 붓고 불을 지른거란다. 반쯤만 자기를 태우려고... 미.미친거지, 미쳐서 그런거야...쯔쯧... 네 남자 왔을때도 내게 " 안.안기부 사람 아니야? 정말로? 이상하다. 난 꼭 그렇게 봤는데" 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래도 기관에서 나온 사람인 것 같다고 소문내고 다녔어."
수연은 그냥 웃고 말았다.
양복을 반듯하니 입고 들어오는 휜칠한 키와 차가워 보이는 창훈의 잘생긴 모습이 그렇게 보였나보다. 아래턱. 입술까지 다 타서 입을 벌리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보이는지... 때로는 낮이나 밤이나 고통스러워 "으. 으...흐..." 신음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내는 안쓰럽고 불쌍한 사람이었다. 배우기도 많이 배운 엘리트인데... 한 명, 한 명 사연없이 이 곳에 들어온 이는 없지만 그들을 보면서 수연은 자신이 이때까지 참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수연이 이런 저런 환자들의 이야기들을 듣다가 중앙 홀의 책장에서 다시금 책을 한 권 빼서 병실로 들어와 읽자니,
" 아가씨는 어떻게 그렇게 꾸준하지? 늘 책을 읽거나, 뭔가를 쓰거나, 참 잔잔해."
옥순아줌마가 수연을 신기한 동물 쳐다보듯 바라보며 말을 건냈지만 수연은 조용히 웃어주었다.
' 오늘은 선생님이 바쁘신 모양이야. 내일은 크리스마스인데, 내일도 못보겠네. 어제의 이야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담당의와의 시간을 기다리는 자신을 생각하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처음엔 그 무표정한 얼굴이 그렇게 싫었는데... 정신과 의사하면 왠지 편안하고, 부드러운 이미지 일거라는 선입견이 있어 그 젊어보이는 얼굴에 신뢰감이 안갔었는데...'
수연은 요즘 점점 웃음을 웃는 일이 많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고,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분위기가 조금 더 수연의 벽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어느새 깜박 잠들었는지 회장이 '망년회'를 한다며 부르는 소리에 수연은 잠이 깼다.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아 거절하고 누워있는데 유림과 지아가 차례로 부르러 왔다. 참석하자고... 지아가 이젠 많이 나아졌다. 수연은 문득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정신병을 가진 환자로서 멀쩡함을 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마음을 스쳐갔다. 수연은 혼자 분위기를 깰 수도 없어서, 중앙 홀로 나가 망년회에 참석했다.
송년회 준비로 젊은 여자 3명과 사회사업가(여자)가 그래도 다과 준비, 게임 준비에 신경을 쓴 모양이다.
< ' 싱글.벙글' 노래후- 게임(인사법: 상대 돌려가며)- 빙고게임(크리스마스 단어로 3줄 먼저 맞추기: 이수연 우승)- '서울대학병원' 에 한글자씩 액센트 넣기( 개인전 우승-회장 ) - 디스코 타임- 묵상후 '사랑해' 라는 노래로 마침>
모양이야 특별한 건 없었어도 병원에서의 이런 행사들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분위기를 띄워주어서 이런 것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아도 하루 자고 난 후부터 오늘은 전과 같이 괜찮아 보였다.
건물들 뒤로 해 그림자가 노랗게 지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불이 났는지 요란한 싸이렌을 울리며 빨간 불자동차 3 대가 서둘러 달려갔다.
'누군가의 장난 전화가 아니였기를, 큰 불이 아니었기를, 인명 피해는 더욱 없기를...'
하는 마음이 스쳐갔다.
수연이 지아와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돌아 오자, 류성준 담당의가 병실 입구에서 불렀다.
저녁 시간에 상담하기는 처음이었지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던 수연은 기쁜 마음으로 빠른 걸음으로 <면담실>로 들어갔다.
그가 오전에 만들어 간호원실에 맡겨놓은 카드를 받았는지 들어보이며, 눈주름이 퍼지도록 환하게 웃었다. 굉장히 젊어보였지만 웃을때 눈주름이 퍼지는 것이 어느 정도의 나이가 있는 것 같았다. 담당의에게 느끼는 감정이 신뢰감이 높아가는 것인지, 병원에 있기 때문에 아이가 엄마를 찾듯 의지하고 있는 것인지... 수연은 자신의 감정이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그를 만나면 굉장히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의 말, 그의 표정, 하나 하나가 수연의 가슴에 스며들듯이 남는 것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