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폐점하는 비디오 가계에서 영화 =가위손= 비디오를 샀습니다. 연도가 연도인지라 다소 흠집이 있는 물건이긴 했지만 그 내용만큼은 1g 도 상하지 않았더군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커져버린 감동에 저녁 먹다 말고 울어 버렸습니다. (저 원래 영화 보다가 잘 웁니다. 제 일 때문에는 우는 일이 없는데...) 명작은 기술력 위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한 하루였습니다. ========================== 같이 보실래요? ============================ 역시나 중간고사 기간이라 피곤한 듯 그녀는 전철역으로 가는 버스에서 연이어 기지개를 켜며 졸음을 쫓았다. 기억 - 피곤해요? 민아 - 아.... 조금요. 버스에서 내려 전철로 갈아탄 뒤에도 그녀는 간간히 눈가에 눈물을 찍어내며 아기하품을 계속했다. 사실 보통의 경우라면 나도 계산기 버튼에 글씨가 지워지도록 공부해야 할 때지만... 지금 듣는 건 필수과목 2개, 교양 1개. 그럭저럭 보고서나 하나씩 내고 쪽지시험 공부 좀 하다가 띠엄띠엄 시험 준비나 하면 끝인 것이다. 같은 등록금 내고 수업을 적게 듣는 다는 건 상당히 속이 쓰린 일이지만 -공부24시. 눈꺼풀이 뒤집어진다. -밥은 먹고 하냐? -금요일에 물리, 화학. 어느 하나는 버려야만 한다. -두 문제만 풀자. -얘들아 날 버리지 마. 따위의 대화명으로 msn을 도배한 친구들을 보면 대의(大義)를 위한 희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내가 그녀의 공부를 도와주러 가고 있다는 게 그 증거가 아닌가? 문득 나 혼자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은 난 황급히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민아 - ....... 문 바로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몹시 피곤했는지 전철에 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철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는데.... 잠깐 깨워서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본능적인 시간 감각으로 일어나려나? 꾸벅꾸벅 졸고있는 그녀를 보며 잠시 다음 행동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때 전철은 다음 역에 도착했고 차가 정지하는 순간 운동하고 있던 그녀는 계속 운동하고자 하는 성질로 인해 관성력 F= -ma를 받아 기대있던 봉에서 조금 떨어지고 말았다. =콩.= 그리고 제법 아플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 기둥에 머리를 기대는 그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반복될지 모를 그 모습을 그냥 놔두기가 마음에 걸렸던 난 잠시 후 전철이 다시 출발할 때 그녀의 머리가 다시 기둥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노려 그 사이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사박한 머리칼의 촉감과 조금 묵직한 무게감. 동글동글한 두상이 손에 그대로 전해졌다. 팔꿈치를 위로 한껏 추켜올린 채 그녀의 어깨를 넘어 머리 밑에 손을 괴어 주고 있는 내 자세는 누가 봐도 이상했지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었다. 난 지금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한 15분이나 있었을까... 슬슬 내구성의 한계를 드러낸 어깨근육이 =팔 안 내리면 쥐난다.= 라는 위험신호를 끊임없이 전해왔다. 하지만 전혀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 그녀. 그녀는 오히려 베고 자기 딱 좋은 쿠션이라도 찾은 양 간간히 머리를 부비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 오늘 난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한다. 그리고 다시 10여분. 어깨가 끊어질 것 같다. 정말로 더 이상은 못 들고 있겠다. 어쩌지? 어쩔까? 어쩐다? 결국 어.쩔.수.없.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쳐 놓기로 결정하고 조심스레 팔에 힘을 빼는 순간, =푸쉭=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가 눈을 떴다. 민아 - ...... 응? 여기 어디야? 기억 - 여기.. 목낀대학 입구. 민아 - .....뭐?! 지났잖아! 기억 - 아....미, 미안.... 내가 미처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후다다닥 전철에서 내리는 그녀. 난 허둥지둥 짐을 챙겨들고 저린 팔을 주무르며 그녀의 뒤를 좇아 내렸다. 우리를 태우고 온 전철이 유유히 승강장 저편으로 사라진 뒤 정신을 차린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내게 말했다. 민아 - 미안해요, 보통 그 전에 깨는 데.... 기억 - 아니에요,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죠. 대략 50% 확률로 존댓말과 평어가 섞여 나오는 그녀와 나. 그래도 이정도면 장족의 발전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멍하니 맞은편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던 중 =이렇게 갑자기 찾아가도 되는 걸까?= 라는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기억 - 저... 집에 이렇게 불쑥 찾아가도 되는 건가요? 민아 - 아, 괜찮아요,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Come on baby, 오늘 밤은 집에 못 가..... =오우 마님, 안 돼요! 조금 더 천천히! =닥치고 이리와! =예, 마님. .....난 생각보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전철역을 나온 우린 곧게 뻗은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갔다. 무...무슨 달동네냐? 그렇다고 하기엔 근처에 있는 집들이 너무 좋은데? 민아 - 다 왔다. 성(城). 내 앞에 버티고 있는 드높은 벽을 표현할 말은 그 외엔 없을 듯 했다. 붉은 벽돌이 촘촘히 배열 되어있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성벽이 우리를 향해 묵직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마님.... 여기가 마님 댁이여유? =삑, 삐비빅, 철컹.= 그녀는 곧 카드키를 이용한 최첨단 대문을 열었고 외벽만큼이나 웅장한 정원에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는자 마자, 무언가 내 발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 - 즈르르르르를.... 뷁!! 뷁!!! 기억 - !!!!! =퍼억!!= ?? - 깨갱!!!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사적으로 발길질을 날린 다음 순간, 난 공중에 붕 떠서 저만치 나가떨어지는 둥글둥글하고 누런 개 한 마리를 볼 수 있었다. 민아 - 피카츄!! 그 직후에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개를 향해 뛰어가는 그녀. 아무래도 그 정체불명의 물체는 그녀의 애견이었던 것 같다. ......... X 됐다. 나 이대로 쫓겨나는 거 아냐? 민아 - 너 또 줄 빼고 나왔구나!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걱정과는 별개로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개의 목걸이를 잡아 줄을 묶으러 끌고 갔다. 앞발로 몸을 버티며 질질 끌려가는 피카츄. 난 아직도.... 그때 녀석이 나를 돌아보던 그 섬뜩한 눈빛을 잊지 못한다. =다음에 만나면 그 땐 확실히 조져주마.= 라고 말하는 듯한 살기 어린 눈빛. 잠시 후, 개를 묶고 돌아온 그녀. 민아 - 미안해요, 많이 놀랐죠? 안 다쳤어요? 기억 - 아, 아뇨, 오히려 제가 미안하죠, 개는 멀쩡해요? 민아 - 예, 괜찮아요. 개가 워낙 사나워서.... .....참으로 힘들게 들어선 현관문. 약간 어두침침한 집안은 휑한 느낌이 들만큼 넓었다. 민아 - 기다려요, 금방 불 켤게요. 괜찮아, 이대로가 좋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느껴지는 허전하고 서늘한 기운에 불까지 안 켜면 귀곡 산장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집안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하나씩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그녀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였던 건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을까. 집안이 이제 좀 살만해 보인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뭔가 삭막한 느낌이 들 던 바깥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방은 푸근함 그 자체로 꾸며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옅은 노란빛을 띄고 있는 인테리어에 중간 중간 놓여있는 쿠션이며, 인형 따위는 벽조차 누르면 푹신할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제야 난 내가 그녀의 집에 초대되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녀는 뭘 믿고 혼자 있는 집에 날 들인 걸까? 난 도통 그녀의 심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덥썩 따라오기는 왜 따라왔냐) 민아 - 음....우선.... 저녁 먹었어요? 기억 - 아뇨. 민아 - 지금 집에 밥이 없으니까... 자장면 어때요? 기억 - 저야 뭐... 아무거나. 민아 - 라면? 자장면? 아니면... 샌드위치? 의외의 선택지 밖에 없는 그녀의 질문. 그래도 굳이 택한다면.... 기억 - 라면이요. 잠시 후 그릇을 마주하고 앉은 우린 더운 입김을 불어가며 열심히 라면을 먹었다. 물 조절과 계란 익힘이 득햏의 경지에 이르렀다 싶은 강력한 포스가 느껴지는 라면에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그녀가 문득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날 바라보았다. 민아 - 아, 그거 기억나요? 지난번에 같이 밥 먹었을 때 생선살 발아주고 일어서서 가 버린 거? 기억 - 쿨룩!! 켁...... 아, 그게 그러니까....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 난 라면 가닥이 산낙지처럼 목구멍에 달라붙는 걸 느끼며 둘러댈 만한 말을 찾으려 허둥댔다. 하지만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바란 건 아니었던 듯 그녀는 바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민아 - 그 때 옆에 있던 친구가 누구냐고 누구냐고 계속 묻는데 제가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기억 - 아, 아뇨. 잘 모르는 사람? 복학생? 옆집 아저씨? 외계인? 민아 - 친구라고 하면 또 이상하고 해서.... 그냥 아는 오빠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쩜 그렇게 자상하냐고.... 자기 건 왜 안 발아주고 그냥 가냐고... 아무튼 재밌었어요. 기억 - 아, 네. 혹시, 정말 혹시 남자친구라고 말했으면 어쩌지? 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좀 부끄럽긴 했지만 그 일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민아 - 그런데.... 원래 공대생은 다 수학을 잘해요? 기억 - 글쎄요, 늘 배우는 게 계산하고 뭐 그런 거니까... 민아 - 음..... 25 곱하기 13은? 기억 - 325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민아 - ....세상에. 지금은 슈퍼에서 거스름돈 계산할 때도 무의적으로 공학용계산기를 꺼내드는 나지만 대학 1학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껌이었다.... 민아 - 공대 수학시간엔 뭐 배워요? 기억 - 음..... 사인, 코사인이나 그 하이퍼볼릭 함수의 값을 어떻게 하면 급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라거나... 입체를 다중 적분하는 법이나 뭐 그 외에.... 극형식을 조금 더 심화한.... 내가 주절주절 생각나는 부분들을 늘어놓는 동안 그녀는 자막 없는 아프리카 영화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단, 야동 제외. 야동엔 국경이 없다.)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민아 - ....그걸 다 어디다 써요? 기억 - 여기저기요. 민아 - 아....네. 사실... 난 지금도 그것들이 어디 쓰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시계는 어느덧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두 시간 이후에 출발한다고 하면 대략 집에 도착하는 건 11시.... 너무 늦지 않나? 그냥 친구 기숙사에서 재워달라고 할까? 기억 - 저, 전화 한 통화만 쓸게요. 1학기 때 간혹 시험공부 같은 게 밀리면 무료 여관으로 이용했던 친구 박모군의 방을 떠올린 난 집에 외박이라고 전화를 해 놓은 뒤 다시 그녀의 방을 찾았다. Now studying, please shut the FuXXer.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17화> 입성
오늘 폐점하는 비디오 가계에서
영화 =가위손= 비디오를 샀습니다.
연도가 연도인지라 다소 흠집이 있는 물건이긴 했지만
그 내용만큼은 1g 도 상하지 않았더군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커져버린 감동에
저녁 먹다 말고 울어 버렸습니다.
(저 원래 영화 보다가 잘 웁니다. 제 일 때문에는 우는 일이 없는데...)
명작은 기술력 위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한 하루였습니다.
========================== 같이 보실래요? ============================
역시나 중간고사 기간이라 피곤한 듯
그녀는 전철역으로 가는 버스에서
연이어 기지개를 켜며 졸음을 쫓았다.
기억 - 피곤해요?
민아 - 아.... 조금요.
버스에서 내려 전철로 갈아탄 뒤에도
그녀는 간간히 눈가에 눈물을 찍어내며
아기하품을 계속했다.
사실 보통의 경우라면
나도 계산기 버튼에 글씨가 지워지도록 공부해야 할 때지만...
지금 듣는 건 필수과목 2개, 교양 1개.
그럭저럭 보고서나 하나씩 내고
쪽지시험 공부 좀 하다가
띠엄띠엄 시험 준비나 하면 끝인 것이다.
같은 등록금 내고 수업을 적게 듣는 다는 건
상당히 속이 쓰린 일이지만
-공부24시. 눈꺼풀이 뒤집어진다.
-밥은 먹고 하냐?
-금요일에 물리, 화학. 어느 하나는 버려야만 한다.
-두 문제만 풀자.
-얘들아 날 버리지 마.
따위의 대화명으로 msn을 도배한 친구들을 보면
대의(大義)를 위한 희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내가 그녀의 공부를 도와주러 가고 있다는 게
그 증거가 아닌가?
문득 나 혼자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은 난
황급히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민아 - .......
문 바로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몹시 피곤했는지
전철에 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철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는데....
잠깐 깨워서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본능적인 시간 감각으로 일어나려나?
꾸벅꾸벅 졸고있는 그녀를 보며
잠시 다음 행동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때
전철은 다음 역에 도착했고
차가 정지하는 순간
운동하고 있던 그녀는 계속 운동하고자 하는 성질로 인해
관성력 F= -ma를 받아
기대있던 봉에서 조금 떨어지고 말았다.
=콩.=
그리고 제법 아플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 기둥에 머리를 기대는 그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반복될지 모를 그 모습을
그냥 놔두기가 마음에 걸렸던 난
잠시 후 전철이 다시 출발할 때
그녀의 머리가 다시 기둥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노려
그 사이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사박한 머리칼의 촉감과
조금 묵직한 무게감.
동글동글한 두상이 손에 그대로 전해졌다.
팔꿈치를 위로 한껏 추켜올린 채
그녀의 어깨를 넘어 머리 밑에 손을 괴어 주고 있는 내 자세는
누가 봐도 이상했지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었다.
난 지금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한 15분이나 있었을까...
슬슬 내구성의 한계를 드러낸 어깨근육이
=팔 안 내리면 쥐난다.= 라는 위험신호를 끊임없이 전해왔다.
하지만 전혀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 그녀.
그녀는 오히려 베고 자기 딱 좋은 쿠션이라도 찾은 양
간간히 머리를 부비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 오늘 난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한다.
그리고 다시 10여분.
어깨가 끊어질 것 같다.
정말로 더 이상은 못 들고 있겠다.
어쩌지? 어쩔까? 어쩐다?
결국 어.쩔.수.없.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쳐 놓기로 결정하고
조심스레 팔에 힘을 빼는 순간,
=푸쉭=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가 눈을 떴다.
민아 - ...... 응? 여기 어디야?
기억 - 여기.. 목낀대학 입구.
민아 - .....뭐?! 지났잖아!
기억 - 아....미, 미안....
내가 미처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후다다닥 전철에서 내리는 그녀.
난 허둥지둥 짐을 챙겨들고
저린 팔을 주무르며 그녀의 뒤를 좇아 내렸다.
우리를 태우고 온 전철이 유유히 승강장 저편으로 사라진 뒤
정신을 차린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내게 말했다.
민아 - 미안해요, 보통 그 전에 깨는 데....
기억 - 아니에요,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죠.
대략 50% 확률로 존댓말과 평어가 섞여 나오는 그녀와 나.
그래도 이정도면 장족의 발전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멍하니 맞은편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던 중
=이렇게 갑자기 찾아가도 되는 걸까?=
라는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기억 - 저... 집에 이렇게 불쑥 찾아가도 되는 건가요?
민아 - 아, 괜찮아요,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Come on baby, 오늘 밤은 집에 못 가.....
=오우 마님, 안 돼요! 조금 더 천천히!
=닥치고 이리와!
=예, 마님.
.....난 생각보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전철역을 나온 우린
곧게 뻗은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갔다.
무...무슨 달동네냐?
그렇다고 하기엔 근처에 있는 집들이 너무 좋은데?
민아 - 다 왔다.
성(城).
내 앞에 버티고 있는 드높은 벽을 표현할 말은
그 외엔 없을 듯 했다.
붉은 벽돌이 촘촘히 배열 되어있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성벽이
우리를 향해 묵직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마님.... 여기가 마님 댁이여유?
=삑, 삐비빅, 철컹.=
그녀는 곧 카드키를 이용한 최첨단 대문을 열었고
외벽만큼이나 웅장한 정원에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는자 마자,
무언가 내 발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 - 즈르르르르를.... 뷁!! 뷁!!!
기억 - !!!!!
=퍼억!!=
?? - 깨갱!!!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사적으로 발길질을 날린 다음 순간,
난 공중에 붕 떠서 저만치 나가떨어지는
둥글둥글하고 누런 개 한 마리를 볼 수 있었다.
민아 - 피카츄!!
그 직후에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개를 향해 뛰어가는 그녀.
아무래도 그 정체불명의 물체는 그녀의 애견이었던 것 같다.
......... X 됐다.
나 이대로 쫓겨나는 거 아냐?
민아 - 너 또 줄 빼고 나왔구나!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걱정과는 별개로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개의 목걸이를 잡아 줄을 묶으러 끌고 갔다.
앞발로 몸을 버티며 질질 끌려가는 피카츄.
난 아직도.... 그때 녀석이 나를 돌아보던
그 섬뜩한 눈빛을 잊지 못한다.
=다음에 만나면 그 땐 확실히 조져주마.=
라고 말하는 듯한 살기 어린 눈빛.
잠시 후, 개를 묶고 돌아온 그녀.
민아 - 미안해요, 많이 놀랐죠? 안 다쳤어요?
기억 - 아, 아뇨, 오히려 제가 미안하죠, 개는 멀쩡해요?
민아 - 예, 괜찮아요. 개가 워낙 사나워서....
.....참으로 힘들게 들어선 현관문.
약간 어두침침한 집안은 휑한 느낌이 들만큼 넓었다.
민아 - 기다려요, 금방 불 켤게요.
괜찮아, 이대로가 좋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느껴지는 허전하고 서늘한 기운에
불까지 안 켜면 귀곡 산장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집안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하나씩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그녀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였던 건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을까.
집안이 이제 좀 살만해 보인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뭔가 삭막한 느낌이 들 던 바깥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방은 푸근함 그 자체로 꾸며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옅은 노란빛을 띄고 있는 인테리어에
중간 중간 놓여있는 쿠션이며, 인형 따위는
벽조차 누르면 푹신할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제야 난 내가 그녀의 집에 초대되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녀는 뭘 믿고 혼자 있는 집에 날 들인 걸까?
난 도통 그녀의 심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덥썩 따라오기는 왜 따라왔냐)
민아 - 음....우선.... 저녁 먹었어요?
기억 - 아뇨.
민아 - 지금 집에 밥이 없으니까... 자장면 어때요?
기억 - 저야 뭐... 아무거나.
민아 - 라면? 자장면? 아니면... 샌드위치?
의외의 선택지 밖에 없는 그녀의 질문.
그래도 굳이 택한다면....
기억 - 라면이요.
잠시 후 그릇을 마주하고 앉은 우린
더운 입김을 불어가며 열심히 라면을 먹었다.
물 조절과 계란 익힘이 득햏의 경지에 이르렀다 싶은
강력한 포스가 느껴지는 라면에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그녀가 문득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날 바라보았다.
민아
- 아, 그거 기억나요?
지난번에 같이 밥 먹었을 때
생선살 발아주고 일어서서 가 버린 거?
기억 - 쿨룩!! 켁...... 아, 그게 그러니까....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 난
라면 가닥이 산낙지처럼 목구멍에 달라붙는 걸 느끼며
둘러댈 만한 말을 찾으려 허둥댔다.
하지만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바란 건 아니었던 듯
그녀는 바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민아
- 그 때 옆에 있던 친구가
누구냐고 누구냐고 계속 묻는데
제가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기억 - 아, 아뇨.
잘 모르는 사람? 복학생? 옆집 아저씨? 외계인?
민아
- 친구라고 하면 또 이상하고 해서....
그냥 아는 오빠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쩜 그렇게 자상하냐고....
자기 건 왜 안 발아주고 그냥 가냐고...
아무튼 재밌었어요.
기억 - 아, 네.
혹시, 정말 혹시
남자친구라고 말했으면 어쩌지? 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좀 부끄럽긴 했지만
그 일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민아 - 그런데.... 원래 공대생은 다 수학을 잘해요?
기억 - 글쎄요, 늘 배우는 게 계산하고 뭐 그런 거니까...
민아 - 음..... 25 곱하기 13은?
기억 - 325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민아 - ....세상에.
지금은 슈퍼에서 거스름돈 계산할 때도
무의적으로 공학용계산기를 꺼내드는 나지만
대학 1학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껌이었다....
민아 - 공대 수학시간엔 뭐 배워요?
기억
- 음..... 사인, 코사인이나 그 하이퍼볼릭 함수의 값을
어떻게 하면 급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라거나...
입체를 다중 적분하는 법이나
뭐 그 외에.... 극형식을 조금 더 심화한....
내가 주절주절 생각나는 부분들을 늘어놓는 동안
그녀는 자막 없는 아프리카 영화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단, 야동 제외. 야동엔 국경이 없다.)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민아 - ....그걸 다 어디다 써요?
기억 - 여기저기요.
민아 - 아....네.
사실... 난 지금도 그것들이 어디 쓰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시계는 어느덧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두 시간 이후에 출발한다고 하면
대략 집에 도착하는 건 11시.... 너무 늦지 않나?
그냥 친구 기숙사에서 재워달라고 할까?
기억 - 저, 전화 한 통화만 쓸게요.
1학기 때 간혹 시험공부 같은 게 밀리면
무료 여관으로 이용했던 친구 박모군의 방을 떠올린 난
집에 외박이라고 전화를 해 놓은 뒤
다시 그녀의 방을 찾았다.
Now studying, please shut the FuXX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