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17화> 입성

바다의기억2005.08.18
조회13,681

오늘 폐점하는 비디오 가계에서

 

영화 =가위손= 비디오를 샀습니다.

 

연도가 연도인지라 다소 흠집이 있는 물건이긴 했지만

 

그 내용만큼은 1g 도 상하지 않았더군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커져버린 감동에

 

저녁 먹다 말고 울어 버렸습니다.

(저 원래 영화 보다가 잘 웁니다. 제 일 때문에는 우는 일이 없는데...)

 

명작은 기술력 위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한 하루였습니다.

 

========================== 같이 보실래요? ============================

 

역시나 중간고사 기간이라 피곤한 듯


그녀는 전철역으로 가는 버스에서


연이어 기지개를 켜며 졸음을 쫓았다.



기억 - 피곤해요?


민아 - 아.... 조금요.



버스에서 내려 전철로 갈아탄 뒤에도


그녀는 간간히 눈가에 눈물을 찍어내며


아기하품을 계속했다.



사실 보통의 경우라면


나도 계산기 버튼에 글씨가 지워지도록 공부해야 할 때지만...


지금 듣는 건 필수과목 2개, 교양 1개.


그럭저럭 보고서나 하나씩 내고


쪽지시험 공부 좀 하다가


띠엄띠엄 시험 준비나 하면 끝인 것이다.



같은 등록금 내고 수업을 적게 듣는 다는 건


상당히 속이 쓰린 일이지만


-공부24시. 눈꺼풀이 뒤집어진다.

-밥은 먹고 하냐?

-금요일에 물리, 화학. 어느 하나는 버려야만 한다.

-두 문제만 풀자.

-얘들아 날 버리지 마.


따위의 대화명으로 msn을 도배한 친구들을 보면


대의(大義)를 위한 희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내가 그녀의 공부를 도와주러 가고 있다는 게


그 증거가 아닌가?



문득 나 혼자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은 난


황급히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민아 - .......



문 바로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몹시 피곤했는지


전철에 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철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는데....


잠깐 깨워서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본능적인 시간 감각으로 일어나려나?



꾸벅꾸벅 졸고있는 그녀를 보며


잠시 다음 행동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때


전철은 다음 역에 도착했고


차가 정지하는 순간


운동하고 있던 그녀는 계속 운동하고자 하는 성질로 인해


관성력 F= -ma를 받아


기대있던 봉에서 조금 떨어지고 말았다.


=콩.=


그리고 제법 아플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 기둥에 머리를 기대는 그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반복될지 모를 그 모습을


그냥 놔두기가 마음에 걸렸던 난


잠시 후 전철이 다시 출발할 때


그녀의 머리가 다시 기둥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노려


그 사이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사박한 머리칼의 촉감과


조금 묵직한 무게감.


동글동글한 두상이 손에 그대로 전해졌다.



팔꿈치를 위로 한껏 추켜올린 채


그녀의 어깨를 넘어 머리 밑에 손을 괴어 주고 있는 내 자세는


누가 봐도 이상했지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었다.



난 지금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한 15분이나 있었을까...


슬슬 내구성의 한계를 드러낸 어깨근육이


=팔 안 내리면 쥐난다.= 라는 위험신호를 끊임없이 전해왔다.


하지만 전혀 일어날 기색을 보이지 않는 그녀.


그녀는 오히려 베고 자기 딱 좋은 쿠션이라도 찾은 양


간간히 머리를 부비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 오늘 난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한다.



그리고 다시 10여분.


어깨가 끊어질 것 같다.


정말로 더 이상은 못 들고 있겠다.


어쩌지? 어쩔까? 어쩐다?



결국 어.쩔.수.없.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쳐 놓기로 결정하고


조심스레 팔에 힘을 빼는 순간,


=푸쉭=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가 눈을 떴다.



민아 - ...... 응? 여기 어디야?


기억 - 여기.. 목낀대학 입구.


민아 - .....뭐?! 지났잖아!


기억 - 아....미, 미안....



내가 미처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후다다닥 전철에서 내리는 그녀.


난 허둥지둥 짐을 챙겨들고


저린 팔을 주무르며 그녀의 뒤를 좇아 내렸다.



우리를 태우고 온 전철이 유유히 승강장 저편으로 사라진 뒤


정신을 차린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내게 말했다.



민아 - 미안해요, 보통 그 전에 깨는 데....


기억 - 아니에요, 피곤하면 그럴 수도 있죠.



대략 50% 확률로 존댓말과 평어가 섞여 나오는 그녀와 나.


그래도 이정도면 장족의 발전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멍하니 맞은편 전철이 오기를 기다리던 중


=이렇게 갑자기 찾아가도 되는 걸까?=


라는 불안감이 뇌리를 스쳤다.



기억 - 저... 집에 이렇게 불쑥 찾아가도 되는 건가요?


민아 - 아, 괜찮아요,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



=Come on baby, 오늘 밤은 집에 못 가.....


=오우 마님, 안 돼요! 조금 더 천천히!


=닥치고 이리와!


=예, 마님.



.....난 생각보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전철역을 나온 우린


곧게 뻗은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갔다.



무...무슨 달동네냐?


그렇다고 하기엔 근처에 있는 집들이 너무 좋은데?



민아 - 다 왔다.



성(城).


내 앞에 버티고 있는 드높은 벽을 표현할 말은


그 외엔 없을 듯 했다.


붉은 벽돌이 촘촘히 배열 되어있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성벽이


우리를 향해 묵직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마님.... 여기가 마님 댁이여유?



=삑, 삐비빅, 철컹.=


그녀는 곧 카드키를 이용한 최첨단 대문을 열었고


외벽만큼이나 웅장한 정원에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는자 마자,


무언가 내 발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 - 즈르르르르를.... 뷁!! 뷁!!!


기억 - !!!!!


=퍼억!!=


?? - 깨갱!!!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사적으로 발길질을 날린 다음 순간,


난 공중에 붕 떠서 저만치 나가떨어지는


둥글둥글하고 누런 개 한 마리를 볼 수 있었다.



민아 - 피카츄!!



그 직후에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개를 향해 뛰어가는 그녀.


아무래도 그 정체불명의 물체는 그녀의 애견이었던 것 같다.


......... X 됐다.


나 이대로 쫓겨나는 거 아냐?



민아 - 너 또 줄 빼고 나왔구나!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걱정과는 별개로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개의 목걸이를 잡아 줄을 묶으러 끌고 갔다.


앞발로 몸을 버티며 질질 끌려가는 피카츄.



난 아직도.... 그때 녀석이 나를 돌아보던


그 섬뜩한 눈빛을 잊지 못한다.


=다음에 만나면 그 땐 확실히 조져주마.=


라고 말하는 듯한 살기 어린 눈빛.



잠시 후, 개를 묶고 돌아온 그녀.



민아 - 미안해요, 많이 놀랐죠? 안 다쳤어요?


기억 - 아, 아뇨, 오히려 제가 미안하죠, 개는 멀쩡해요?


민아 - 예, 괜찮아요. 개가 워낙 사나워서....



.....참으로 힘들게 들어선 현관문.


약간 어두침침한 집안은 휑한 느낌이 들만큼 넓었다.



민아 - 기다려요, 금방 불 켤게요.



괜찮아, 이대로가 좋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느껴지는 허전하고 서늘한 기운에


불까지 안 켜면 귀곡 산장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집안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하나씩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그녀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였던 건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을까.



집안이 이제 좀 살만해 보인다....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뭔가 삭막한 느낌이 들 던 바깥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방은 푸근함 그 자체로 꾸며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옅은 노란빛을 띄고 있는 인테리어에


중간 중간 놓여있는 쿠션이며, 인형 따위는


벽조차 누르면 푹신할 것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제야 난 내가 그녀의 집에 초대되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녀는 뭘 믿고 혼자 있는 집에 날 들인 걸까?


난 도통 그녀의 심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덥썩 따라오기는 왜 따라왔냐)



민아 - 음....우선.... 저녁 먹었어요?


기억 - 아뇨.


민아 - 지금 집에 밥이 없으니까... 자장면 어때요?


기억 - 저야 뭐... 아무거나.


민아 - 라면? 자장면? 아니면... 샌드위치?



의외의 선택지 밖에 없는 그녀의 질문.


그래도 굳이 택한다면....



기억 - 라면이요.




잠시 후 그릇을 마주하고 앉은 우린


더운 입김을 불어가며 열심히 라면을 먹었다.


물 조절과 계란 익힘이 득햏의 경지에 이르렀다 싶은


강력한 포스가 느껴지는 라면에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그녀가 문득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날 바라보았다.



민아

- 아, 그거 기억나요?


지난번에 같이 밥 먹었을 때


생선살 발아주고 일어서서 가 버린 거?



기억 - 쿨룩!! 켁...... 아, 그게 그러니까....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당황한 난


라면 가닥이 산낙지처럼 목구멍에 달라붙는 걸 느끼며


둘러댈 만한 말을 찾으려 허둥댔다.


하지만 내가 무슨 대답을 하길 바란 건 아니었던 듯


그녀는 바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민아

- 그 때 옆에 있던 친구가


누구냐고 누구냐고 계속 묻는데


제가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기억 - 아, 아뇨.



잘 모르는 사람? 복학생? 옆집 아저씨? 외계인?



민아

- 친구라고 하면 또 이상하고 해서....


그냥 아는 오빠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쩜 그렇게 자상하냐고....


자기 건 왜 안 발아주고 그냥 가냐고...


아무튼 재밌었어요.



기억 - 아, 네.



혹시, 정말 혹시


남자친구라고 말했으면 어쩌지? 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좀 부끄럽긴 했지만


그 일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민아 - 그런데.... 원래 공대생은 다 수학을 잘해요?


기억 - 글쎄요, 늘 배우는 게 계산하고 뭐 그런 거니까...


민아 - 음..... 25 곱하기 13은?


기억 - 325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민아 - ....세상에.



지금은 슈퍼에서 거스름돈 계산할 때도


무의적으로 공학용계산기를 꺼내드는 나지만


대학 1학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껌이었다....



민아 - 공대 수학시간엔 뭐 배워요?


기억

- 음..... 사인, 코사인이나 그 하이퍼볼릭 함수의 값을


어떻게 하면 급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라거나...


입체를 다중 적분하는 법이나


뭐 그 외에.... 극형식을 조금 더 심화한....



내가 주절주절 생각나는 부분들을 늘어놓는 동안


그녀는 자막 없는 아프리카 영화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단, 야동 제외. 야동엔 국경이 없다.)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민아 - ....그걸 다 어디다 써요?


기억 - 여기저기요.


민아 - 아....네.



사실... 난 지금도 그것들이 어디 쓰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후


시계는 어느덧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두 시간 이후에 출발한다고 하면


대략 집에 도착하는 건 11시.... 너무 늦지 않나?


그냥 친구 기숙사에서 재워달라고 할까?



기억 - 저, 전화 한 통화만 쓸게요.



1학기 때 간혹 시험공부 같은 게 밀리면


무료 여관으로 이용했던 친구 박모군의 방을 떠올린 난


집에 외박이라고 전화를 해 놓은 뒤


다시 그녀의 방을 찾았다.



Now studying, please shut the FuXX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