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69화

피바다200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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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예의 조리병들은 가죽이 벗겨진 포효를 넘겨받자 끓는 물에 고기를 삶거나 피를 내어 순대를 만드는 등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잔치를 준비했다.  그리고 술상이 준비된 소예의 군막에서는 소예와 그녀의 아래에 있는 고위급 장수들, 설무랑이 둘러 앉아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설무랑은 자신의 신분을 동방의 작은 귀족 집안 아들이라 둘러대어 생길 수 있는 위화감을 미리 차단하였고, 노장들은 최대한의 예우를 지켜 자신들을 존경하는 설무랑의 모습에 금방 호감을 가졌다. 술자리는 마침내 포효의 연하고 담백한 고기가 마련되자 더 흥이 나더니 밤새 그칠 줄 몰랐다. 모든 장수들이 스스럼없이 술잔을 돌리는 사이 소예만이 설무랑의 맞은 편에서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술을 많이 하지도 않았고 설무랑은 호탕하게 농담을 주고 받는 장수들의 대화 사이사이에 입담을 발휘하여 흥을 솜씨 좋게 돋우면서 간혹 소예와 눈이 마주치면 부드럽게 웃어주곤 하였다. 하지만 소예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근심이 서린 듯 했다. 설무랑은 군막의 주인이 오히려 손님처럼 겉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새 분위기는 최고조를 넘기고 다들 술이 과해졌다. 벌써 한 두명의 장수들은 술판에서 그대로 쓰러져 잠들기도 했고, 설무랑과 술에 이골이 난 장수 몇 명만이 정상적인 대화를 이어갈 뿐이었다. 군막 안의 공기마저 술기운으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 소예 대장군을 보좌하는 장군들이 어떤 분들이실까 궁금하였는데, 역시나 호걸들이십니다."

 설무랑이 문득 화제를 돌리자, 소예의 얼굴에 일순 긴장이 서렸다.

  설무랑은 눈빛을 빛내며 장수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 대장군과 같은 영웅은 이 천계 내에서도 드물지요. 그런 장군을 모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 아닙니까?"

  일순 천막 안에선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어온 듯 왁자하게 떠들던 소리마저 사라져버렸다.

  " 물론입니다. 북방군 뿐만 아니라 사대군 전체에서도 소예님만한 대장군은 드물지요."

  평소 소예를 비교적 진심으로 모시던 장수 한 명이 눈치껏 설무랑의 말을 이었다.

  " 그..그렇지. 우리 대장군님처럼 실력있는 장수가 어디 있겠는가!"

 눈치를 보던 몇 장수들은 그제서야 의식적으로 소예를 칭찬하는 말들을 꺼내놓았는데 워낙 맘에 없는 말이라는 게 표가 나서 소예는 더 이상 그 부담을 이기지 못했다. 그녀는 핑계를 대고 군막을 빠져나갔다.

  소예는 군막을 나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 새 별빛마저 사그라들면서 새벽의 기운이 하늘에 서리고 있었다. 하늘은 검으면서도 푸른 빛깔이었다. 설무랑이 쓸 데 없는 소리를 꺼낸 것에 대해 소예는 차차 화가 치밀었다. 평소 장군들이 소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전투 당시에만 그녀는 지휘관으로써 인정받을 뿐, 평소 그녀는 은근히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용맹이 덜하거나 전투력이 부족하기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에서였다. 한 번도 책 잡힐 일을 한 적이 없는 완벽한 장수였지만, 다른 장수들에게 그녀는 그들의 마누라나 딸자식과 같은 여자였고, 그들의 머릿 속에는 늘 그녀가 가진 한계와 부족함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 만든 여자에 대한 비하였다.

  또 한 명의 위대한 여성 대장군인 지우황녀(천제의 제 1황녀)가 이끄는 백색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음의 공주로 통하는 지우황녀는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성격이었다. 그녀가 처음 백색군의 총대장군으로 임명되어 군대를 맡았을때도 그녀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를 폄하하는 세력들이 많았고 그녀에게 열등감을 느낀 고위 장군들은 의도적으로 소문을 내어 그녀의 여성성이 가진 문제점들을 비난하는 소문들을 퍼뜨리기도 했다. 소문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부풀려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녀의 황녀로써의 이미지까지 실추될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잠잠하던 지우황녀는 이후, 첫 번째 전투에서 놀라운 지략과 작전, 전투력을 끌어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더니 본격적으로 피의 숙청에 들어갔다. 그녀는 장수,군졸 할 것없이 모조리 처형대로 끌어냈다. 그들의 죄목은 장수인 경우 전쟁수행력의 부족으로 많은 군졸을 무의미하게 죽게 했다거나 대장군의 명을 어긴 명령거역죄, 군졸인 경우 적군과 내통했다는 등의 내용이었지만 다들 그들이 지우를 흠해하려는 소문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우 황녀는 소리치며 발악하는 그들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죽였다. 그것은 거세와 참수였다. 모두 그녀의 잔인함에 소름이 돋았다.그리고 그 이후 그 누구도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비난하는 경우는 없었다.

  " 나는 황녀도, 여자도 아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단지 총대장군일 뿐이다. 전쟁에서 살고자하면 내가 누구인지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돌아서며 그렇게 못을 박았다.

 하지만 소예는 북방군에서 그런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 때, 군막 안에서 혀 꼬부라진 목소리가 크게 터져나왔다. 아주 고함을 치는 듯한 소리였다.

  " 크크크큭....맞는 말이지. 암! 맞고 말고. 위대한 소예 대장군이 아닌가?"

  소예는 단번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사실 술자리 내내 불편했던 이유가 이 목소리의 주인 때문이었다. 기마군의 장군인 그는 평소에는 말없고 서글서글한 남자였지만 술만 들어가면 온갖 난잡한 소리나 못할 소리를 다 내뱉어 모두를 괴롭게 했다. 특히나 소예의 여성성을 농락하여 그녀를 분노케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술이 깨고 나면 진짜인지 거짓 연기인지 하나도 기억을 못해 그녀는 화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 그 말랑말랑해 보이는 살결에, 탱탱한 젖가슴....푸하하.그러니 사내들이 광분하여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게지.크헤헤헤."

  그러자, 다른 장수들도 배를 잡고 웃어댔다.

  소예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김없이 그녀는 술자리 안주가 되고 있었다. 술만 마시면 사람이길 포기하는 장수와는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군막에서 되도록 멀리 벗어나는 게 상책인 줄 알았다. 그의 음란스러운 말은 계속 되었다.   

  " 소예 대장군의 나긋나긋한 팔다리를 떠올리며 다들 적들에게 돌진하는 거라고. 이미 적들이 적들이 아닌게지! 그 요상스런 계집이 무슨 최면이라도 걸었는지 다들 눈에는 대장군의 부드러운 젖가슴과 팔다리만 보이는 거라고. 크흐흐흐흐. 그러니 그 기세가 대단할 수 밖에! 계집에게 뛰어드는 사내들만큼 당당한 이들이 어디있어?"

  장수는 다른 장수들의 호응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더욱 기세 등등하게 지껄였다. 설무랑은 술잔을 비워내며 웃고 있었지만, 눈치 빠른 장수들은 흘깃 그를 보면서 그 웃음이 심장을 얼리듯 섬뜩하다는 것을 느끼고 얼굴에서 웃음을 싹 거두었다.

  " 계집..지가 아무리 대단해도 한낫 계집일 뿐이다. 사내의 품안에서 힘도 못 쓰고 발 버둥 칠...."

  그 순간 설무랑의 몸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는 옆에 있던 장수의 허리춤에 묶인 검집에서 검을 빼내어 들고 곧장 주정부리는 장수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술이 취한 자라지만 설무랑의 2배나 되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설무랑은 전혀 힘든 기색없이 그의 목을 손아귀에 잡아채어 내팽겨쳤고 그는 의자에서 붕 떠 올라 군막의 기둥에 부딪히며 꼬꾸라졌다.

 " 쿵!"

 거구가 바닥에 떨어지자 땅이 울렸다.

 소예는 듣기 싫은 소리를 피하려다 난데없는 굉음을 듣고 의아해졌다. 그녀는 군막 귀퉁이의 열린 틈으로 안을 훔쳐보았다. 놀란 눈의 장수들의 얼굴이 하나씩 보였고 주정부리던 장수가 바닥에 팽개쳐져있었다. 그리고 설무랑의 담담하면서도 냉랭한 기운이 도는 얼굴이 보였다.

 설무랑은 장수의 목을 한 손으로 찍어누른 채, 다른 손으로 칼날을 들어 그의 얼굴을 노리며 제압하고 있었다. 그 기세에 다른 장수들은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설무랑은 차가운 목소리로,

  " 자신의 대장군을 능멸하다니, 군법에 의하면 너는 사형이다!"

 장수는 그 충격에도 술이 반쯤만 깬 채, 그래도 몰려오는 공포에 덜덜 떨었다.

  " 너는 아주 훌륭한 장군으로 모시고 있다. 너같은 버러지가 나대는 꼴을 보고도 하해같은 마음으로 용서하는 분이 아니신가? 소예가 여자라 부족한 점이 무엇이냐? 그의 검과 활이 너보다 못할 것이 있더냐?"

  설무랑은 망설임없이 칼을 그의 얼굴을 향해 내리꽂았다.

  " 으아아악!"

  모든 장수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하지만 설무랑의 칼은 장수의 얼굴을 비켜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귀 옆을 지나 바닥에 꽂혔다.

  설무랑은 옷을 털면서 장수에게 몸을 떼어내며 일어섰다. 그는 힐끗 뒤를 돌아다보았고 다른 장수들은 흠칫 반응을 보였다. 설무랑의 얼굴은 처음의 온화하고 순진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 내노라하는 전투력을 자랑하는 북방군이라기에 잔뜩 기대를 했더니 아주 형편없군 그래.상하 질서마저 개떡같군 "

 설무랑은 다시 한 번 바닥에 떨며 뻗어있는 장수를 살피고는,

 " 한 번만 더 그 방정맞은 혀를 나대기만 해 봐라."

  설무랑은 조용히 걸어 술상으로 가더니 잔 하나를 들어 그 안의 술을 비워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 다 뽑아버릴거다...혀 뿐만 아니라 네 놈들 몸뚱아리에 달고 다니는 그 잘난 무기들까지 다 뽑아서 술을 담궈 버릴테다."

  소예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죽여 웃어버렸다. 실로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설무랑이 왠지 참 좋았다.

 

===아침 일찍 사촌동생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비가 하염없이 오더군요. 그래서 포기하고 집에 남았습니다. 가을이 오긴 오나봐요. 아침 저녁으로 이젠 싸늘한 기운에 가디건 하나 정도 걸쳐야 되더라구요. 가을-생각만해도 풍요로와지는 계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