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18화> 동침

바다의기억2005.08.21
조회29,427

태권도 승단시험 치러 가서

 

190cm는 넘을듯한 외국인 아저씨와

 

필사의 혈투를 벌이고 돌아왔습니다.

(승단 겨루기엔 호구를 차지 않습니다)

 

그 순간 전....

 

코리안이 아닌 슈퍼코리안이었습니다.

 

=========================== 케런 하트씨 또 봐요 ============================

 

 

 

기억 - 여기서 x제곱을 t로 치환해 주는 거야.


민아 - ....막 그래도 되는 거야?


기억 

- ..... 그건 그 때 그 때 다르지.


여기선 다음 과정에서 t가 없어지니까 y만 남잖아.



민아 - 아.... 이렇게 푸는 거구나.



그녀가 날 부른 이유는


시험 전에 받은 기출문제 프린트 풀이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다행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공대생 기준)


난 무난히 그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다.



민아 - ...... 잠깐만, 다시 한 번만 설명해줘.


기억 

- 그러니까... 여기서 그냥 dx/dt...


아니, 이렇게 풀면 안 되지. 그러니까.... 음...



그래도 역시나 서식환경이 워낙 다르다 보니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걸, 이렇게, 대입, 쫙쫙 긋고, 오케이?


이렇게 말하면 끝날 풀이도


-여기서 필요한 게 y값이잖아요. 그러니까 우선....


이렇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8시를 지나


9시에 근접하고 있었다.



민아 - 아우.... 많이 했다. 잠깐 쉬었다 하죠.


기억 - 예. 크흠... 예. 저 마실 것 좀 주실래요?


민아 - 아, 죄송해요. 제가 그걸 생각 못했네요.



그녀가 조금 서두르듯 방을 나선 뒤


난 그녀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참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방.


침대, 책상, 옷장에 TV, 라디오까지


어지간한 가구는 다 갖춰진 방은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 외엔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로 이 집안에서 이 방을 제외한 곳은


그저 통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 안팎은 철저히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쟁반 위에 놓인 컵과 정체불명의 음료수 병 하나.


호리호리한 모양이 뭔가 미심쩍은 병엔


요란하게 휘갈겨진 필기체 글씨와


왕관 무늬가 그려진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개또라이보다 훨씬 더 옅은 연두색의 음료....


대체 저건 뭐지?


설마 사염화탄소에 염소를 녹인 건 아닐 테고....



차마 ‘그게 뭐예요?’ 라고 묻기가 머쓱했던 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녀는 뭔가 낌새를 챈 듯 먼저 말을 꺼냈다.



민아 

- 아.... 지금 집에 있는 게 물 뿐인데


냉장고에 이런 게 있어서....


혹시나 하고 가져와 봤어요.



......염소일 가능성도 있다는 건가.



결국 그 정체불명의 음료를 마셔보기로 한 우리는


잔의 1/3 정도만 가볍게 채운 뒤


시음에 들어갔다.



기억 - ... 목이 확~!!


민아 - 음... 국물이, 국물이.... 끝내줘요.



약간 톡 쏘는 청량감과 함께 전해지는 진한 달콤함.


입안에서부터 진하게 진동하며


잠들어있던 후각세포를 어루만지는 향기는


옅은 초록빛 청포도맛 캔디 냄새 같았다.



기억 - 맛있네요.


민아 - 음.... 이런 게 있었네?



그렇게 염소 수용액으로 오인 받던 물체를


청포도 주스라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우린


다시 학업에 정진하기 시작했다.



기억 - 음... 다음 문제 한 번 볼까?


민아 - 잠깐만, 이건 직접 풀 수 있을 것 같다.


기억 - 아, 응.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문제를 풀고 있는 동안


입안에 묘한 감칠맛이 느껴졌다.


별로 목이 마른 건 아닌데...


또 마시고 싶은 그 기분.



기억 - 한 잔만 더 마실게.


민아 - 아, 나도.



그녀도 같은 기분이었는지


이후 문제를 푸는 사이에


홀짝홀짝 마신 게 세 컵씩.


슬슬 체내 삼투압유지를 위한


수분 배출 신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억 - 나 잠깐 화장실 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졸음에


머리가 약간 멍해지는 것을 느낀 난


어깨를 뒤로 꾸욱 제쳐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기억 - 으드드뜨....하아....


민아 - .......아흠.....



하품은 전염된다고 했던가....


내가 기지개켜는 걸 본 그녀도


졸린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팔을 위로 쭉 뻗어 보였다.



그녀의 나른한 숨소리를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확 달아오르는 얼굴.



이젠 참 별 곳에서 다 두근거리는구나....



민아 - ....음?



화장실을 간다고 해놓고 멍하니 서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그녀는 눈가에 촉촉한 물기를 쓱 닦아내며


나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이런 각도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난 토끼나 다람쥐 같은 걸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을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기억 - 아, 화장실이 어딘 지를 몰라서....


민아 - 문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가면 맨 끝에 있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까.


그녀와 같이 있느라 너무 긴장했나?


아니면 맨날 퀘퀘한 곳에만 있다가


갑자기 이질적인 공간에 있어서 그런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화장실에 도착한 난


가볍게 체내 삼투압을 조절한 뒤


졸음을 쫓기 위해 세수를 하기로 했다.


손에 물을 모아 얼굴에 대는 순간 느껴지는


몹시 언짢은 이물감.


얼굴이 대략 5mm정도 다른 물질로 덮여 있는 것처럼


뻣뻣하고 얼얼한 기분이었다.


...... 왜 이러지? 다리에 힘도 빠지는 것 같고.



세수를 하고도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기분으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난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곱게 감은 눈 위에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검은 속눈썹.


스탠드 불빛에 하얗게 빛나는 피부.


그 위에 설깃 흐트러져있는 머리칼이


곱게 늘어진 발처럼 옅은 숨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1. 당연히 깨워줘야지. 아직 공부가 안 끝났잖아?


2.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보겠어. 좀 더 지켜보자.


3. 교복을 덮어주고 돌아간다.


4. 이때다, 덮쳐!



....... 뭐야 이 선택지들은?


설마 X급생?



잠시 고심하던 난 3번 선택지를 클릭하고


겉에 걸치고 있던 모직남방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려 했다.



‘흠칫!’


기억 - !!!!



하지만 남방이 몸에 닿는 순간


경련하듯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부스스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침대 쪽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하아...하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민아 - 나 20분만 잘게... 너무 졸려.


기억 - 아....응.



투우사 같은 포즈로 남방을 들고있는 내 옆을 지나


침대로 걸어간 그녀는


주섬주섬 이불을 어깨가지 끌어 덮고는


몸을 몇 번 뒤척이더니 이내 수면 모드로 들어갔다.



.......


....... 선택지를 잘못 택했나?



난 그렇게 되도 않는 후회를 하며


근처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린 채 잠자리에 든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 - ............



잠자기엔 너무 밝은가?



또 뜬금없는 걱정에 사로잡힌 난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있는 취침 등을 켠 뒤


나머지 불을 모두 껐다.



딴에는 별 생각 없이 한 짓이었지만


순간, 방의 분위기는 크게 변했다.



어두운 방안에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녀를 비추는 은은한 빛.


옅은 고동빛이 도는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를 지나


이불 위로 드러난 완만한 능선 같은 굴곡.



저기가 어깨고... 허리를 따라 쭈욱....



순간, 마음속에서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정체모를 충동에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낀 난


이내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쫓으며


옆에 있던 음료수를 가득 따라 급히 들이켰다.



기억 - ........



어라.......... 왜 갑자기 눈이 핑 돌지?


졸리다...... 아까 세수 했는데.....


....모르겠다. 나도 잠깐 눈이나 붙이자.




난 그렇게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


뭐야, 내가 왜 책상에 엎드려 있지?


...머리는 또 왜 이렇게 지끈 거려?


지금 몇 시야?


음.......? 1시?


내가 또 뭘 하다 잠들었더라?


무슨 문제 같은 거 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시험 공부 하고 있었나?


아니지 수학 시험 끝난 지가 언젠데....


아.... 목말라.


물 한 잔 마시고 잘까?


...... 하아, 귀찮다. 그냥 자자.



응? 이건 또 웬 취침등이야?


내 방에 이런 게 있었나?


.......에이 몰라 몰라.


어머니가 사다 놓으셨나보지 뭐....



으쓰쓰쓰... 쌀쌀 하구만.....



그렇게 난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양말은 벗어서 침대 밑에 던져놓은 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잠이 들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녀가 잠들어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당시 우리가 마셨던 음료수가


제법 고가의 백포도주였다는 걸 안 건


그로부터 제법 먼 훗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