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2화> ...저요?

바다의기억2005.09.01
조회13,308

다리를 찢어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괴롭군요.

 

찢을 때 아픈 건 문제가 아닌데

 

찢고 난 뒤에 후유증이 참 민망합니다.

 

나이가 나인데 아픈 티도 못 내겠고....

 

========================= 개다리 춤이라고 알랑가 모르시겄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각종 연습이 한창인 연습실에서


빙하타고 내려온 둘리 마냥 한쪽에 찌그러져있는 나에게


그녀가 다가왔다.



민아 - 기억이는 같이 안 해?



최근 그녀는 나를 ‘기억이.’ 라고 부른다.


언뜻 들으면 ‘기러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그녀가 내게 ‘기억아~’ 라고 말할 땐


내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기억 - 아...나는....



물론 나도 사람들과, 그녀와 함께 연습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깨 너머로 흉내 내 본 나의 모습이


꾀꼬리 흉내를 내는 박쥐만 같았기에


적당히 꼬리를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난.... 분명 감정적인 부분에 결함이 있다.



.....문득, 내 자신이 우스워졌다.


난 뭘 믿고 이리로 왔는가?



민아 - ..... 굉장히 심오한 웃음이네.


기억 - 응?


민아 - 뭐랄까... ‘인생이 다 이런 거지..’라는 느낌?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난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지만


방금 무슨 표정을 지었던 느낌 같은 건 없었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민아 - 기억이도 잘 보면... 참 표정이 많은 것 같아.


기억 - ...그럴 리가.


민아 - 아냐, 자세히 보면 분명 뭔가 변화가 있어.



= 기억아, 그거 아니? 넌 기분 좋으면 요기가 이렇게 땡땡해진다? =


요즘 들어 자꾸 그녀와 겹쳐 보이는 과거의 그림자를 피해


슬쩍 출입구 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연출이 작은 박스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연출

- 레이뒤르미르기스~ 엔 줴루르르를르르를를를뭬엔~


나왔노라, 보았노라, 감동했노라!


가을 연극 대본이 지금 나왔습니다!



--오오!


아무래도 기다리던 소식이 온 듯,


사람들은 정찰 나온 드론을 잡기 위해 모여드는 SCV처럼


연출의 주위를 에워쌌다.



나도 한 번 가볼까...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상황은 종료되어 버렸다.



박스엔 아직 대본이 몇 부 남아있었지만


지금 혼자 박스로 걸어가 대본을 가지고 올 배짱은 내게 없었다.


평소 그렇게 주변 눈치를 살피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내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지가 걱정이었다.



민아 - 으쌰.



그때, 대본을 든 그녀가 내 옆자리로 돌아왔다.


당연히 연출이나 안군 등


주요 멤버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가리라 예상하고 있던 난


깜짝 놀라 엉덩이 반 쪽 정도를 옆으로 당겨 앉았지만


그녀는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들고 온 대본을 훑어볼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요 며칠 그녀가 불쑥 내 옆자리로 와서 앉는 경우가 많았다.


약 20분에 걸쳐 조금씩 자리를 조정해서 접근하거나


음료수를 돌릴 때 제일 마지막 걸 그녀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주고


은근슬쩍 근처에 앉는 방법으로


그녀의 옆자리를 지향해왔던 나와는 대조적으로


그냥 대뜸 와서 앉아버리는 것이다.



이것도 호감의 표현일까?


아니면 그냥 내 주변이 가장 한산하기 때문일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그녀.


난 거의 동시에 눈을 피했지만


내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건 확실히 느꼈을 것 같다.



민아 - 대본 안 가지고 왔어요?


기억 - 예? ......아, 예. 전 아직.....



아직, 아직, 아직, 아직...


난 언제까지 이 말을 반복하게 될까.



양 무릎 사이에 깍지 낀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나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요멤버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내 자신이 한심해졌다.



민아 - 안군 오빠, 이번에도 남자주인공 신청할 거예요?


안군 

- 글쎄.... 이번 역할은 좀.... 두들겨 맞는 게 너무 많아서


내가 맡으면 어설플 것 같은데?


왜? 내가 했으면 딱이겠다 싶어?



민아 - 아뇨. 그냥 물어봤어요.


안군 - 넌 어떻게 할 건데?


민아 - 음... 조금 더 생각해 보고요.


안군 

- 어차피 다른 거 한다고 해도 주연 맡게 될 걸?


명색이 연극부의 히로인이신데.



민아 - 이잇, 놀리지 말아요~,


안군 - 아니, 난 진심으로 한 말인데?



불과 2~3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안군과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그녀를 보면서


그 한심함은 혐오감에 근접해갔다.



그렇게 심기가 불편한 연습 시간이 끝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손이 허전하다고 느낀 난


빌린 책이 담긴 쇼핑백을 놓고 나왔다는 걸 깨닫고


연습실로 발길을 돌렸다.



연출 - 응? 어디 가냐?


기억 - 뭘 좀 놓고 나와서요.


연출 - 아, 그래. 먼저 들어간다.



그녀는 확실히 내게 실망한 듯


내가 연출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한 번 돌아보는 일도 없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렇게 불 꺼진 연습실로 돌아간 난


가볍게 조명 하나만 켠 뒤 잊어버렸던 쇼핑백을 찾았다.


곧 목적을 달성하고 연습실을 나서려는 순간


연습실 구석에 놓인 대본 상자가 마음에 걸렸다.



................ 뭐.... 괜찮겠지. 그냥 가져가는 것뿐인데.



집에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대본을 읽으며 난 상상했다.


이 대본이 연극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여주인공은 민아가 맡게 될 거라고 했지?


회계는 조직 두목 역할을 할 거라고 했었고....


사채업자 부하가 하고 싶다던 녀석도 있었지....



배역에 어느 정도 인물들을 연결지어놓고 생각하니


공연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다.


무대 위에서 눈물로 하소연하는 민아의 모습.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기세로 폼을 잡는 회계의 모습...


관객들의 사각지대에서 열심히 뛰어다닐 연출의 모습.....



나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남은 배역들에 내 모습을 대입해 봐도


어울린다고 할만한 역할은 없었다.



...... 단 한 역할만 빼고.



기억 - 역시.... 엑스트라A인가.




그날 이후, 난 시간이 날 때마다 대본을 읽었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도, 책상에 앉아 쉬면서도


세세한 단어 하나하나까지 검토를 계속했다.



연극 대본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읽을수록 더 구체적인 무대의 전경이 그려지고


읽을수록 그곳에 쓰여 있지 않은


그들의 뒷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의 성장환경과 가치관,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정의 그림자.


오해, 불신, 사랑과 연민의 교차.


그런 수많은 상념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덩어리의 형태로


울컥하고 떠올라 버리는 것이다.



어느 늦은 밤, 혼자 방에서 대본에 몰입해 있던 중


점점 고조되는 감정에 사로잡힌 난


떨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기억 - ...... 이제 더 이상!!...... 아아, 이건 아니다.



밖으로 나온 음성이 상상속의 그것과는 너무 달랐기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은 나.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하는 것은 별개라는 걸


처절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났다.


이제 몇몇 경쟁률 치열한 배역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역할이 결정된 상태에서


사람들은 연습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



박군 - 내가 대빵 한다니까!


어깨 - 누구 마음대로!


덩치 - 훗, 둘 중 이긴 사람이 나와 붙는 건가?


박군&어깨 - 꺼져!!



그 경쟁률 치열한 배역 중 하나가


사채업자가 데리고 다니는 주먹패의 우두머리라는 게


결코 이해가 가지 않는 나였지만....


아무튼... 그런 배역을 놓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연출 - 김군 말고 철수역할 해보고 싶은 사람?


김군 - 아 왜요!


연출 

- 아니.... 뭐 명색이 남자 주인공 역인데


경쟁상대가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김군 - 잘할 수 있다니까요!



또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군은 이번 연극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딱히 잘 맞겠다 싶은 배역도 없고


그간 소홀히 했던 레슨도 준비해야 한다면서...



이번에 남자 주인공 역에 지원한 유일한 인물은


김군이라는 2학년 선배로


짠돌이, 쫌생이, 놈팽이, 구두쇠, 민폐쟁이 등....


뒷담에나 쓰일법한 단어들을 별명으로 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지난 2년 간 돈 안내는 회식 참가율 100%에


신입생들에게 밥을 얻어먹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고....



그럼 난 뭘 하고 있냐고?



배역을 맡는 게 무리라고 생각한 난


연출과 함께 스태프가 되어 활동할 계획으로


연습실 한 쪽에 놓여있던


‘무대장치의 구성과 활용’ 이라는 책을


서당 개도 삼년이면 기는 재주는 있다고.... 뭐라도 되겠지.



연출 - 음.... 그런데, 사채업자 역할에 맞는 사람이 없단 말이야.


민아 - 아직도 지원자가 없어요?


회계 - 아니, 지원자는 있는데, 애들이 너무 물러.


연출 - 그러니까 네가 맡아봐. 딱일 것 같은데.


회계 - 그럼 조직의 보스는 누가 하고? 나보다 연륜 있어 보이는 사람 있나?


연출 

- 흠..... 확실히 사채업자 역엔 연륜 보다는


약간 단정하면서 싸가지가 없어 보이고


히스테릭한 인상에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그런 인물이 필요한 데 말이야.



세상에 그런 인간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기던 난


왠지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슬쩍 눈을 들었다.



연출 - 기억아, 잠깐만 이쪽으로 와 볼래?


회계 - 아님 우리가 갈까?



................... 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