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누구보다도 사랑하던 사람이었고 그사람 역시 절 믿고 따르고 저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그야
말로 저에게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처가집은 고향에서 내노라하는 부자집이었고,저역시 사람들에게 복받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하지만 전 돈보다 사랑이 먼저다라고 생각을 했지 돈에 사랑을 팔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마음은 예나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결혼후 딱10개월하고 열흘만에 큰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전 군에서 진급때마다 1차진급을 하여 여기저기서 저를 원하는 지휘관들이 생겨나고 그야말로 저에겐
정말 황금같은 시기였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군에서 아내의 역할을 일반사회에서 느끼는 그런 내조의 범위를 넘어서는것이
기본적인 관례가 되어있습니다. 병사들 김장이나 부대행사나 그리고 군인가족들간의 모임이라던가
남편들의 계급에 따라 부인들의 계급이 나뉘어지고 그러다보니 상하간에 지시와 복종체계가 존재하는
그런 생활들이었지요
동갑내기인 아내는 처음에는 아이핑계를 대면서 그런 행사에 자주 참석을 하지않게되었고 참석해도
두드러진 노력을 하지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부대내에서 핵심적인 직책에 있다보니 저의 임무자체가 많았고 따라서 아내의 임무도 보다
막중해졌다고 할수있었죠...
하지만 아내는 어느선을 딱그어서 이상이라고 생각이 되면 참석하지도 않고 비협조적으로 생활하다
보니 군인들이 모여사는 관사촌에서 이런말 저런말들이 나오게 되고 급기야 그영향이 저에게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들이 저에게 대하는게 조금씩 달라지고.....
저는 대위로 진급하면서 부대를 옮겼습니다. 그것도 아내의 애원조로 부탁하는 걸 뿌리칠수 없어
군인관사촌이 아닌 민간인들이 사는 주공아파트에 집을 얻어 부대와 좀 멀었지만 출퇴근을 하였습니다. 진급후 저는 대대 인사과장이되어 부대의 전반적인 행사관리부터 군인가족들의 모임지원등 적극
적으로 업무에 임했습니다. 남편이 인사과장이면 아내도 군인가족모임에서 그런역할을 해야하는게
당연시 되던때였습니다. 모임이 있으면 미리알리고 준비하고 하는게 인사과장 가족의 역할이었죠
그런 일들을 아내는 무시했습니다. 지휘관 사모님이 저를 불러 몇번 질타를 하시고 지휘관님도 몇번
저에게 말씀을 하셨죠 '서대위 군대생활 앞으로 계속할꺼지? 자네 정도면 앞으로 잘될꺼야'면서 독려도 해주시고....그러면서'자네 가족이 좀 비협조적인데 자꾸 그러면 자네평도 나빠질수있으니 집에가서 가족에게 잘말해!'......급기야 지휘관 사모님이 식기선물세트를 사가지고 제집에 방문까지 하셨습니다.............(중략)
그다음해 저는 전역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많이 힘들었죠.
전역후 두세군데 추천을 받아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회사에 면접을 보고 합격을 했습니다. 아내에게
어디로 가면 좋겠니라고 물어봤죠.....아내는 친정아버지가 건설회사를 하고 계시는데 거기가서 아버지를 좀 도와드리면 안되겠냐고 물어봤죠....몇일을 망설였습니다.
걷보리 서말이면 처가살이를 면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가 일하는 직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그나마 남자의 자존심은 살아있었습니다. ----사관학교시절...장교는 명예를 먹고산다고 배웠습니다.----
부모님과 상의를 하고 처가쪽에가서 일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모님은 많이 힘드신
모양인데 가서 도와드리라고 하셨죠... 결국 저는 제가 원하던 직장을 포기하고 장인의 회사에 몸을 담게 되었습니다.
처음 저는 군에서의 경력을 활용하여 회사관리와 회계,관리,기힉등의 업무를 맡아서 장인의 회사를 키워보겠다는 포부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출근첫날 저는 그야말로 노가다 잡부였습니다.
시멘트를 져다 나르고 모래를 푸고 철근도 옮기고...........
온몸에 파스를 붙여야 잠을 자고 아침이면 천근 만근의 몸으로 정말 힘들게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장인회사에서 5년을 버텼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하는일들은 조금씩 직책이 올라가면서 편한생활을 할수 있었죠 -여기서 편하다는것은 책상에 앉아서 펜대나 굴리는 그런 편안함이 아님니다. 열번 삽질할걸 한두번 할수 있었다는 거죠-
아무쪼록 저는 장인이 일군회사를 크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런회사를 제대로 만들기 위한 아니저를 제대로된 건설업자로 만들기 위한 장인의 트레이닝 기법이었다는것을 알고있었습니다.
제 전공도 아니었고 그런 업종의 일도 해본게 아니었기때문에 처음부터 밑바닥부터 제대로 배워야 힘들게 배운 지식이 경험이 모두 제것이 된다는것을 저는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장모는 장인회사에 있는 저를 언제부턴가 몸종 다루듯 했고 주말에 좀 쉴라치면 같이 어디가자고 하시면서 ...저는 장모님의 운전기사가 되어 있었고 집안 잡일부터 아무튼 대소사를 제가 다정리했습니다 외동딸의 외사위로 당연하다고 생각하시겠죠.
저역시 그런 생각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당연시 했죠....하지만 사람사는일에는 경우가 있는법이죠
나이가 많다고 나보다 높다고 그사람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함부로 좌지우지할수는 없는거죠...
또한 아내의 행동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군시절 큰아들 돌잔치를 부대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을때도 무산시키고 동기생들의 집들이를,,세상에 집들이를 동네앞 식당에서 할때끼지만해도 전 그냥 그사람이 좀 편하게 지낼수 있었으면 하고 참아주었습니다.
친정과 가까이 지내고 장모와 함께 붙어다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아내는 달라져갔습니다.
처가가 부자지 전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혹자는 갑부의 아들을 보고 부러워할껍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부자이지 그 아들은 부자가 아닙니다. 저역시 처가가 부자라고 흥청망청살지 않았습니다. 처가에서 일하면서 제 일의 댓가를 바랫던것이지 다른욕심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내의 소비행태는 제가 감수할수있는 범위에서 점점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군생활하면서 차곡차곡 모은돈으로 전 32평 아파트도 구입했습니다. 전재산을 끌어붓고 대출까지 받아서 산집이었기에 저는 돌릴수 있는 여유돈이 필요했습니다. 월급에서 조금씩 모아 적금을 부었습니다. 생활은 아껴가며 살았습니다. 지금 제큰아들이 13살 입니다. 그때당시 4살이었던 큰아들에게 전 그흔하다는 모형 로보트도 못사주었습니다. 아니 안사주었습니다. 차라리 저는 레고 블럭을 사서 제가 비행기며 차며 로보트며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쓰던 레고가 지금도 집에 있습니다. 만약 로보트를 삿다면 벌써 쓰레기통에 가있겠죠.....그렇게 아끼며 살던 저는 정말 지금도 큰아들에게 미안하답니다.
(중략)
어느날 제집에 냉장고며 소파면 가전제품들이 새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홈쇼핑에서 무이자로 판매하는 가전제품들이었죠 매달 할부금이 늘기시작했습니다.
서서히 제 급여로 충당하기에는 무리가 오기시작햇습니다. 아내에게 제가 따지듯 물엇습니다. 이제 그만 하면 안되겠냐고 멀쩡한걸 왜 바꾸냐고......낮시간 혼자서 집에 있으면 심심하다고 합니다. 무슨 대답이 그런지....그래서 홈쇼핑프로그램을 자주본다고.......
돈이 딸리니 아내는 처가에 가서 구걸을 하듯 돈을 받아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장인장모가 뭔소리를 들었는지 제게 적금붓고 있는것을 질책을 하십니다. 적금을 왜 넣는냐고 쓰기도 모자란판에 뭔적금이냐고 .......전 그날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담날 적금을 해약하고 카드대금을 모두 갚았습니다.
그날이후 정말 그사람고 정이 사라졌습니다. 부부관계도 뜸해지고 지금생각에 제가 30대 초반이었던 시절이었는데 거의 3개월에 한번정도의 잠자리를 가졌습니다. 집에가도 답도안나오고 그때 전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방황이란걸 해봤습니다.
술에 취해 공원벤치에서 잠도 자보고 차에서도 자보고 사우나에서 자보고 정말 집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정말로 어렸을때부터 사랑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보기조차 싫어졌습니다.
이래저래 방황하던 저는 한여자를 알게되었습니다. 저역시 유부남 그여자도 유부녀였죠..
정말 우연한기회에 말하자면 사고였죠......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 제마음을 헤아려주는 그여자에게 저는 제 마음을 줘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치사하지만 가정은 지키고 싶었습니다. 처음그야자와 관계를 갖고 저는 삶에 활력을 얻었습니다.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 삶에 유일한 해방구였습니다. 그러고 얼마되지 않아 그여자의 남편에게 두사람의 만남이 들통이 났습니다. 남자답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여자와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났고 아내와의 무던했던 관계는 차디찬 얼음장처럼 더 차가워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방황하던 저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녀석을 만나 집근처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아내는 이미 저의 잘못을 장모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해한다면 용서해주시던 장모에게 고마웠습니다 왜냐면 제자식을 위해 가정은 깨고싶지않았기 때문에 다시한번 재기할수 있도록 용서한다는 그말에 정말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장모는 그것을 장인에게 알린다는 핑계로 저를 더욱더 가지고 놀았습니다. 아내역시 한달에 3-4번은 주말이면 처가에 갔습니다. 주로 토요일 가서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고,,,,제 본가에는 두달에 한번 정도 들렀습니다. 그것도 잠시 한두시간 머무르다 가고요...
그날 저녁 술마시던 친구를 데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가서 한잔하자고요 아내와도 십수년간 알고지내는 친구라 부담없었습니다. 솔직히 돈도 없었습니다. 그냥 싸게 집에서 한잔하자고....
아내가 병원에 입원해있고 진단서도 끊어 놨다고 내딸에게 손찌검을 하냐고 콩밥을 먹어보라고...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갈때까지 간것같았습니다.
장인게게 찾아갔습니다 그래도 남자라 말은 통할것 같았습니다. 장일 왈 이혼해라....
안그러면 고소한다......
몇일을 망설이고 그렇게 이혼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제가 다 데려 왔습니다. 둘째는 아내가 데리고 간다는 걸 전 끝까지 말했습니다.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지만 얘둘은 형제다 너와 나를 위해 얘들을 떼놓을수는 없다..차라리 둘다데리고 가던지 아니면 내가 둘다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몇초의 망설임도 없이 재산은 반반 나누고 애들은 저보고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오냐 그러마 하고 약조를 하고 법원을로 갔었습니다.
이혼후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갔습니다. 새로운 직장도 구하고.....애들은 애들끼리 잘컷습니다.
그때 기저귀 차던 둘째가 지금은 유치원에 다닙니다.
남자혼자서 애들 키운다고 주위에서 말이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사람 정말 행복했습니다.
주말이면 큰애가 왜 외할머니댁에 가지않냐고 몇번을 묻다가 힘들어 하는 저를 보고 저는아빠가이세상에서 제일 좋와요 라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저를 위로해주곤 했습니다.
주말마다 저는 애들을 데리고 올림픽공원이며 롯데월드 잠실야구장 월드컵경기장등 방구석에 처박혀 어둡게 골방에서 지내는 애들은 데리고 가급적 많은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차츰차츰 자리를 잡고 1년만에 고향근처의 지사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중 두아들의 생일이 지나고 어린이날이 지나고.....아내는 연락한통 없었습니다.
정말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나에대한 정은 고사하고 자식에대한 정도 그렇게 없던 사람이었나...
아이들은 정말 절 잘따릅니다. 이렇게 이세상에 아빠가 최고라고 큰소리쳐내는 놈들도 흔치않을겁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천사같은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녀도 이혼녀였고...정말 이쁘고 착하고 저의 핸디캡을 이해해주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입니다.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하나가 되었고 얼마지 않아 살림을 합쳤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혼당시 데리고 나왔던 아이들이 둘있습니다.
아들과 딸! 제게는 자식이 네명되어버리는 셈이였죠 정말 첨에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성도 달랐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 아이들의 융화는 정말 기름과 물 같았습니다.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애들이 싸우다보면 이사람과 저는 자연스레 편가르기가 되었고....
한집에서 살던 우리는 3개월만에 각각 다른집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애들싸움도 문제였고
애들넷을 키우던 이사람의 고통이 너무도 컷던것 같습니다.
그렇게 따로따로 살기를 1년이 넘었습니다.
저역시 이사람 역시 너무도 사랑합니다. 애들이 우리사이에 걸림돌이 될수는 있었지만...
얼마전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그후 저희 부모님과 연락도 끊었습니다.
애덜 넷을 어떻게 키우냐고 미쳤냐고.......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여섯식구가 살기에는 월급으로는 힘들었거든요
얼마전 여름 휴가를 제주도로 다녀왔습니다. 여섯명의 식구가 움직이면 돈도 많이 들지만
사람들의 흥미로운 시선도 눈에 많이 거슬리죠
그리고 재미있는건 네명의 아이들이 모두 두살터울입니다 13,11,9,7 정말 누가보면 계산해서 나은것처럼 나이가 꼭 들어맞아요 요즘은 애들기리도 잘 지냅니다. 주말이면 애덜넷을 데리고 제가 피시방에 갑니다 집에 피시가 두대라서 매일 싸우거든요 제가 책임지고 주말엔 목욕이랑 피씨방은 책임집니다.
아내는 혼인신고후 저에게 더욱 잘합니다.
물론 생활은 힘듭니다만 잘살려고 노력중입니다.
두사람의 사랑으로 사는게 힘들겠지만 전 돈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앞으로 애들밑으로 들어갈 돈도 물론 많겠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볼랍니다.
결혼...이혼...,그리고 재혼!!
결혼생활 10년만에 이혼을 했습니다.
결혼전 저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방에서 장교로서 생활하던 그야말로 엘리트라면 엘리트였고
많은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죠.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어 자연스럽게 전방에서 군생활하면서 결혼을 하게되었고
그때 제나이 25이었습니다.
세상누구보다도 사랑하던 사람이었고 그사람 역시 절 믿고 따르고 저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그야
말로 저에게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처가집은 고향에서 내노라하는 부자집이었고,저역시 사람들에게 복받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곤
했습니다. 하지만 전 돈보다 사랑이 먼저다라고 생각을 했지 돈에 사랑을 팔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마음은 예나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결혼후 딱10개월하고 열흘만에 큰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전 군에서 진급때마다 1차진급을 하여 여기저기서 저를 원하는 지휘관들이 생겨나고 그야말로 저에겐
정말 황금같은 시기였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군에서 아내의 역할을 일반사회에서 느끼는 그런 내조의 범위를 넘어서는것이
기본적인 관례가 되어있습니다. 병사들 김장이나 부대행사나 그리고 군인가족들간의 모임이라던가
남편들의 계급에 따라 부인들의 계급이 나뉘어지고 그러다보니 상하간에 지시와 복종체계가 존재하는
그런 생활들이었지요
동갑내기인 아내는 처음에는 아이핑계를 대면서 그런 행사에 자주 참석을 하지않게되었고 참석해도
두드러진 노력을 하지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부대내에서 핵심적인 직책에 있다보니 저의 임무자체가 많았고 따라서 아내의 임무도 보다
막중해졌다고 할수있었죠...
하지만 아내는 어느선을 딱그어서 이상이라고 생각이 되면 참석하지도 않고 비협조적으로 생활하다
보니 군인들이 모여사는 관사촌에서 이런말 저런말들이 나오게 되고 급기야 그영향이 저에게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들이 저에게 대하는게 조금씩 달라지고.....
저는 대위로 진급하면서 부대를 옮겼습니다. 그것도 아내의 애원조로 부탁하는 걸 뿌리칠수 없어
군인관사촌이 아닌 민간인들이 사는 주공아파트에 집을 얻어 부대와 좀 멀었지만 출퇴근을 하였습니다. 진급후 저는 대대 인사과장이되어 부대의 전반적인 행사관리부터 군인가족들의 모임지원등 적극
적으로 업무에 임했습니다. 남편이 인사과장이면 아내도 군인가족모임에서 그런역할을 해야하는게
당연시 되던때였습니다. 모임이 있으면 미리알리고 준비하고 하는게 인사과장 가족의 역할이었죠
그런 일들을 아내는 무시했습니다. 지휘관 사모님이 저를 불러 몇번 질타를 하시고 지휘관님도 몇번
저에게 말씀을 하셨죠 '서대위 군대생활 앞으로 계속할꺼지? 자네 정도면 앞으로 잘될꺼야'면서 독려도 해주시고....그러면서'자네 가족이 좀 비협조적인데 자꾸 그러면 자네평도 나빠질수있으니 집에가서 가족에게 잘말해!'......급기야 지휘관 사모님이 식기선물세트를 사가지고 제집에 방문까지 하셨습니다.............(중략)
그다음해 저는 전역을 했습니다. 나름대로 많이 힘들었죠.
전역후 두세군데 추천을 받아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회사에 면접을 보고 합격을 했습니다. 아내에게
어디로 가면 좋겠니라고 물어봤죠.....아내는 친정아버지가 건설회사를 하고 계시는데 거기가서 아버지를 좀 도와드리면 안되겠냐고 물어봤죠....몇일을 망설였습니다.
걷보리 서말이면 처가살이를 면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가 일하는 직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그나마 남자의 자존심은 살아있었습니다. ----사관학교시절...장교는 명예를 먹고산다고 배웠습니다.----
부모님과 상의를 하고 처가쪽에가서 일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모님은 많이 힘드신
모양인데 가서 도와드리라고 하셨죠... 결국 저는 제가 원하던 직장을 포기하고 장인의 회사에 몸을 담게 되었습니다.
처음 저는 군에서의 경력을 활용하여 회사관리와 회계,관리,기힉등의 업무를 맡아서 장인의 회사를 키워보겠다는 포부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출근첫날 저는 그야말로 노가다 잡부였습니다.
시멘트를 져다 나르고 모래를 푸고 철근도 옮기고...........
온몸에 파스를 붙여야 잠을 자고 아침이면 천근 만근의 몸으로 정말 힘들게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장인회사에서 5년을 버텼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하는일들은 조금씩 직책이 올라가면서 편한생활을 할수 있었죠 -여기서 편하다는것은 책상에 앉아서 펜대나 굴리는 그런 편안함이 아님니다. 열번 삽질할걸 한두번 할수 있었다는 거죠-
아무쪼록 저는 장인이 일군회사를 크게 키우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런회사를 제대로 만들기 위한 아니저를 제대로된 건설업자로 만들기 위한 장인의 트레이닝 기법이었다는것을 알고있었습니다.
제 전공도 아니었고 그런 업종의 일도 해본게 아니었기때문에 처음부터 밑바닥부터 제대로 배워야 힘들게 배운 지식이 경험이 모두 제것이 된다는것을 저는 알고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장모는 장인회사에 있는 저를 언제부턴가 몸종 다루듯 했고 주말에 좀 쉴라치면 같이 어디가자고 하시면서 ...저는 장모님의 운전기사가 되어 있었고 집안 잡일부터 아무튼 대소사를 제가 다정리했습니다 외동딸의 외사위로 당연하다고 생각하시겠죠.
저역시 그런 생각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당연시 했죠....하지만 사람사는일에는 경우가 있는법이죠
나이가 많다고 나보다 높다고 그사람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함부로 좌지우지할수는 없는거죠...
또한 아내의 행동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군시절 큰아들 돌잔치를 부대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을때도 무산시키고 동기생들의 집들이를,,세상에 집들이를 동네앞 식당에서 할때끼지만해도 전 그냥 그사람이 좀 편하게 지낼수 있었으면 하고 참아주었습니다.
친정과 가까이 지내고 장모와 함께 붙어다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아내는 달라져갔습니다.
처가가 부자지 전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혹자는 갑부의 아들을 보고 부러워할껍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부자이지 그 아들은 부자가 아닙니다. 저역시 처가가 부자라고 흥청망청살지 않았습니다. 처가에서 일하면서 제 일의 댓가를 바랫던것이지 다른욕심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내의 소비행태는 제가 감수할수있는 범위에서 점점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군생활하면서 차곡차곡 모은돈으로 전 32평 아파트도 구입했습니다. 전재산을 끌어붓고 대출까지 받아서 산집이었기에 저는 돌릴수 있는 여유돈이 필요했습니다. 월급에서 조금씩 모아 적금을 부었습니다. 생활은 아껴가며 살았습니다. 지금 제큰아들이 13살 입니다. 그때당시 4살이었던 큰아들에게 전 그흔하다는 모형 로보트도 못사주었습니다. 아니 안사주었습니다. 차라리 저는 레고 블럭을 사서 제가 비행기며 차며 로보트며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쓰던 레고가 지금도 집에 있습니다. 만약 로보트를 삿다면 벌써 쓰레기통에 가있겠죠.....그렇게 아끼며 살던 저는 정말 지금도 큰아들에게 미안하답니다.
(중략)
어느날 제집에 냉장고며 소파면 가전제품들이 새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홈쇼핑에서 무이자로 판매하는 가전제품들이었죠 매달 할부금이 늘기시작했습니다.
서서히 제 급여로 충당하기에는 무리가 오기시작햇습니다. 아내에게 제가 따지듯 물엇습니다. 이제 그만 하면 안되겠냐고 멀쩡한걸 왜 바꾸냐고......낮시간 혼자서 집에 있으면 심심하다고 합니다. 무슨 대답이 그런지....그래서 홈쇼핑프로그램을 자주본다고.......
돈이 딸리니 아내는 처가에 가서 구걸을 하듯 돈을 받아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장인장모가 뭔소리를 들었는지 제게 적금붓고 있는것을 질책을 하십니다. 적금을 왜 넣는냐고 쓰기도 모자란판에 뭔적금이냐고 .......전 그날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담날 적금을 해약하고 카드대금을 모두 갚았습니다.
그날이후 정말 그사람고 정이 사라졌습니다. 부부관계도 뜸해지고 지금생각에 제가 30대 초반이었던 시절이었는데 거의 3개월에 한번정도의 잠자리를 가졌습니다. 집에가도 답도안나오고 그때 전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방황이란걸 해봤습니다.
술에 취해 공원벤치에서 잠도 자보고 차에서도 자보고 사우나에서 자보고 정말 집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정말로 어렸을때부터 사랑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보기조차 싫어졌습니다.
이래저래 방황하던 저는 한여자를 알게되었습니다. 저역시 유부남 그여자도 유부녀였죠..
정말 우연한기회에 말하자면 사고였죠......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 제마음을 헤아려주는 그여자에게 저는 제 마음을 줘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치사하지만 가정은 지키고 싶었습니다. 처음그야자와 관계를 갖고 저는 삶에 활력을 얻었습니다. 안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 삶에 유일한 해방구였습니다. 그러고 얼마되지 않아 그여자의 남편에게 두사람의 만남이 들통이 났습니다. 남자답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여자와의 관계는 그렇게 끝이났고 아내와의 무던했던 관계는 차디찬 얼음장처럼 더 차가워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방황하던 저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녀석을 만나 집근처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아내는 이미 저의 잘못을 장모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해한다면 용서해주시던 장모에게 고마웠습니다 왜냐면 제자식을 위해 가정은 깨고싶지않았기 때문에 다시한번 재기할수 있도록 용서한다는 그말에 정말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장모는 그것을 장인에게 알린다는 핑계로 저를 더욱더 가지고 놀았습니다. 아내역시 한달에 3-4번은 주말이면 처가에 갔습니다. 주로 토요일 가서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고,,,,제 본가에는 두달에 한번 정도 들렀습니다. 그것도 잠시 한두시간 머무르다 가고요...
그날 저녁 술마시던 친구를 데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가서 한잔하자고요 아내와도 십수년간 알고지내는 친구라 부담없었습니다. 솔직히 돈도 없었습니다. 그냥 싸게 집에서 한잔하자고....
그게 실수였습니다. 아내는 친구앞에서 제게 정말이지 남편이라고 할수 없을만큼 제자존심을 밟아버리더군요 친구앞에서 삿대질해가며 제친구에게 욕설을 해가며.....처음으로 아내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렇게 아내가 집을 나가고 술이 깨어 일어나니 장모가 전화를 해왔습니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해있고 진단서도 끊어 놨다고 내딸에게 손찌검을 하냐고 콩밥을 먹어보라고...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갈때까지 간것같았습니다.
장인게게 찾아갔습니다 그래도 남자라 말은 통할것 같았습니다. 장일 왈 이혼해라....
안그러면 고소한다......
몇일을 망설이고 그렇게 이혼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제가 다 데려 왔습니다. 둘째는 아내가 데리고 간다는 걸 전 끝까지 말했습니다. 부부는 돌아서면 남이지만 얘둘은 형제다 너와 나를 위해 얘들을 떼놓을수는 없다..차라리 둘다데리고 가던지 아니면 내가 둘다 데리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몇초의 망설임도 없이 재산은 반반 나누고 애들은 저보고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오냐 그러마 하고 약조를 하고 법원을로 갔었습니다.
이혼후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갔습니다. 새로운 직장도 구하고.....애들은 애들끼리 잘컷습니다.
그때 기저귀 차던 둘째가 지금은 유치원에 다닙니다.
남자혼자서 애들 키운다고 주위에서 말이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사람 정말 행복했습니다.
주말이면 큰애가 왜 외할머니댁에 가지않냐고 몇번을 묻다가 힘들어 하는 저를 보고 저는아빠가이세상에서 제일 좋와요 라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저를 위로해주곤 했습니다.
주말마다 저는 애들을 데리고 올림픽공원이며 롯데월드 잠실야구장 월드컵경기장등 방구석에 처박혀 어둡게 골방에서 지내는 애들은 데리고 가급적 많은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차츰차츰 자리를 잡고 1년만에 고향근처의 지사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중 두아들의 생일이 지나고 어린이날이 지나고.....아내는 연락한통 없었습니다.
정말 분하고 억울했습니다. 나에대한 정은 고사하고 자식에대한 정도 그렇게 없던 사람이었나...
아이들은 정말 절 잘따릅니다. 이렇게 이세상에 아빠가 최고라고 큰소리쳐내는 놈들도 흔치않을겁니다.
아무튼 지사에서 생활하던 저는 혼자산지 어언 2년째 이력이나고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햇죠
하지만 혼자사는 남자의 고민은 무었보다도 넘쳐나는 힘을 쏟아부을데가 없다는 거였죠
정말 자식들 모르게 고민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천사같은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녀도 이혼녀였고...정말 이쁘고 착하고 저의 핸디캡을 이해해주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입니다.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하나가 되었고 얼마지 않아 살림을 합쳤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혼당시 데리고 나왔던 아이들이 둘있습니다.
아들과 딸! 제게는 자식이 네명되어버리는 셈이였죠 정말 첨에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성도 달랐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 아이들의 융화는 정말 기름과 물 같았습니다.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애들이 싸우다보면 이사람과 저는 자연스레 편가르기가 되었고....
한집에서 살던 우리는 3개월만에 각각 다른집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애들싸움도 문제였고
애들넷을 키우던 이사람의 고통이 너무도 컷던것 같습니다.
그렇게 따로따로 살기를 1년이 넘었습니다.
저역시 이사람 역시 너무도 사랑합니다. 애들이 우리사이에 걸림돌이 될수는 있었지만...
얼마전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그후 저희 부모님과 연락도 끊었습니다.
애덜 넷을 어떻게 키우냐고 미쳤냐고.......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여섯식구가 살기에는 월급으로는 힘들었거든요
얼마전 여름 휴가를 제주도로 다녀왔습니다. 여섯명의 식구가 움직이면 돈도 많이 들지만
사람들의 흥미로운 시선도 눈에 많이 거슬리죠
그리고 재미있는건 네명의 아이들이 모두 두살터울입니다 13,11,9,7 정말 누가보면 계산해서 나은것처럼 나이가 꼭 들어맞아요 요즘은 애들기리도 잘 지냅니다. 주말이면 애덜넷을 데리고 제가 피시방에 갑니다 집에 피시가 두대라서 매일 싸우거든요 제가 책임지고 주말엔 목욕이랑 피씨방은 책임집니다.
아내는 혼인신고후 저에게 더욱 잘합니다.
물론 생활은 힘듭니다만 잘살려고 노력중입니다.
두사람의 사랑으로 사는게 힘들겠지만 전 돈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앞으로 애들밑으로 들어갈 돈도 물론 많겠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볼랍니다.
우리 두사람 잘살수 있겠죠.......